經典/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아비달마구사론 제 25 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6.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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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구사론 제 25 권
  
  존자 세친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6. 분별현성품 ④
  
  앞에서 논설하였듯이 부동(不動)의 응과(應果, 즉 아라한과)는 처음에 진지(盡智)을 일으킨 후에 무생지(無生智)를 일으키는데, 온갖 아라한에도 예류 등과 같은 차별이 있는 것인가, 있지 않은 것인가?
  역시 차별이 있다.
  그 차별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아라한에는 여섯 가지가 있으니
  퇴법에서 부동법에 이르는 것이 바로 그것인데
  앞의 다섯 가지는 신해로부터 생겨나는 것으로
  그 모두를 '시해탈'이라 이름한다.
  阿羅漢有六 謂退至不動
  前五信解生 總名時解脫
  
  마지막의 것은 '불시해탈'로서
  앞의 견지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後不時解脫 從前見至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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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하여 말하겠다. 계경 중에서는, 아라한에는 종성(種性)의 차이로 말미암아 여섯 가지의 종류가 있다고 설하고 있으니, 첫째는 퇴법(退法)이며, 둘째는 사법(思法)이며, 셋째는 호법(護法)이며, 넷째는 안주법(安住法)이며, 다섯째는 감달법(堪達法)이며, 여섯째는 부동법(不動法)이다.1)
  이 여섯 가지 중에서 앞의 다섯 종류는 앞(권제23)에서 언급한 유학위의 신해(信解)의 종성으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이것을 모두 '시애심해탈(時愛心解脫)'이라고 이름하니, 항시[一切時] 애호(愛護)하며, 마음으로 해탈한 것이기 때문이다.2) 또한 역시 '시해탈(時解脫)'이라고도 이름하는데, 요컨대 때를 기다려 해탈한 것이기 때문으로, '타락죽 항아리[酥甁]'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앞의 말을 생략하였기 때문에 '시해탈'이다.3) 즉 이것은 때를 기다려 비로소 능히 선정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니, 말하자면 자구(資具)와 무병(無病)과 처소 등의 뛰어난 인연과 화합하는 때를 기다려 비로소 선정에 들기 때문이다.4)
  부동법의 종성을 설하여 본송에서 '마지막의 것'이라 한 것으로, 이것을 일컬어 '부동심해탈(不動心解脫)'이라고 하니, 더 이상 [번뇌에 의해] 동요되어 물러나는 일 없이 마음으로 해탈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역시 '불시해탈(不時解脫)'이라고도 이름하는데, 때를 기다리지 않고 해탈하기 때문으로, 말하
  
  
  
1) 『중아함경』 권제30 「복전경(福田經)」(대정장1, p.616상). 여기서는 사법(思法)·승진법(昇進法, 즉 감달법)·부동법(不動法)·퇴법(退法)·불퇴법(不退法)·호법(護法)·실주법(實住法, 즉 안주법)·혜해탈(慧 解脫)·구해탈(俱解脫)의 9무학을 설하고 있다. 이는 6종성에 불퇴법·혜해탈·구해탈을 더한 것으로, 불퇴법 은 부동법에 포섭되고, 두 가지 해탈은 멸진정의 획득 여부에 근거한 것이므로 이러한 여섯 가지 종성에 포섭 되기 때문에 아비달마에서는 아라한에는 오로지 여섯 종성만이 있다고 설하는 것이다.(『현종론』 권제33, 한 글대장경201, p.390) 참고로 본론에서의 9무학은 앞의 5종성과 본득(本得)에 의한 부동종성과 연근(練根)에 의한 부동종성, 그리고 독각과 대각(大覺)이다.(후술)
2) 이미 획득한 공덕에서 퇴실하지 않기 위해 항상 애호하며, 마음으로 번뇌의 계박에서 해탈한 것이기 때 문에 '시애심해탈'이다.
3) '시해탈'은 바로 '때를 기다려 해탈한 것'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대시해탈(待時解脫)'이라고 해야지만, '타락죽을 담은 항아리[盛酥甁]'를 '타락죽 항아리[酥甁]'라고 하듯이 '대'자를 생략하였다는 뜻.
4) 『대비바사론』 권제101(한글대장경122, p.27-28)에 의하면, 좋은 옷과 음식과 와구와 처소와 설법과 보특가라를 획득할 때, 비로소 앞의 5종성 아라한을 낳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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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면 삼마지(三摩地)가 원하는 바에 따라 현전하여 뛰어난 인연과 화합하는 때를 기다리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잠시(暫時)의 해탈과 필경(畢竟)의 해탈에 근거하여 시해탈과 불시해탈이라는 명칭을 설정한 것이니, 물러나는 때가 있을 수 있고 물러나는 때가 결코 없기 때문이다.5)
  그리고 이것(부동법)은 유학위의 견지(見至)의 종성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이상에서 밝힌 여섯 가지 아라한의 종성은 이전부터 존재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후에 비로소 획득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6)
  일정하지 않다.
  그렇다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종성도 있으며
  후에 근기를 단련하여 획득된 종성도 있다.
  有是先種性 有後練根得
  
  논하여 말하겠다. 퇴법의 종성은 필시 이전부터 존재하였지만, 사법 등의 다섯 종성은 역시 또한 후에 획득된 경우도 있다. 즉 이전부터 사법의 종성인 경우도 있고, 이전에는 퇴법의 종성이었지만 후에 근기를 단련[練根]하여 사법이 되는 경우도 있다. 나아가 부동법의 경우에 대해서도 상응하는 바에 따라 마땅히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7)
  
  
5) 잠시 동안 해탈을 획득하여 퇴타(退墮)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시해탈'이라고 이름한 것이며, 궁극적 [畢竟]으로 해탈을 획득하여 이후 퇴타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불시해탈'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6) 아라한의 종성의 차별은 선천적인 것인가, 혹은 후천적인 수련에 의한 것인가 하는 물음.
7) 이와 마찬가지로 이전에 사법·호법·안주법·감달법이었던 자가 근기를 단련하여 호법·안주법·감달 법·부동법이 되는 경우도 있고, 선천적으로 호법 등인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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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퇴법이라고 함은 적은 인연을 만나더라도 바로 획득된 과위로부터 물러나는 이를 말하는 것으로,8) 사법 등은 그렇지 않다.
   사법이라고 함은 퇴실(退失)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항상 자해(自害)하려고 생각하는 이를 말한다.9)
  호법이라고 함은 획득한 과위에 대해 기뻐하며 스스로 방호하는 이를 말한다.
  안주법이라고 함은 두드러진 퇴실의 인연을 떠났기에 비록 스스로 방호하지 않더라도 역시 능히 물러나지도 않으며, 뛰어난 가행을 떠나 역시 증진하지도 않는 이를 말한다.
  감달법이라고 함은 그 성품에 능히 감당할 만한 능력이 있어 즐거이 근기를 단련하여 신속히 부동법에 도달하는 이를 말한다.
  부동법이라고 함은 필시 물러남이 없는 이를 말한다.10)
  이러한 여섯 종성 중의 앞의 두 가지는 일찍이 유학위에 있으면서 항시(恒時)와 존중(尊重)의 가행을 결여한 것으로, 근기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같은 차별이 있게 된 것이다.11) 그리고 세 번째 종성(호법)은 오로지 항시의 가행만이 있을 뿐이고, 네 번째 종성(안주법)은 오로지 존중의 가행만이 있을 뿐이며, 다섯 번째 종성(감달법)은 두 가지 가행을 모두 갖추고 있지만 바로 둔근이며, 여섯 번째 종성(부동법)은 이근으로서 두 가지 가행을 모두 갖추고 있다.
  그렇지만 퇴법의 종성이라도 결정코 반드시 물러나는 것은 아니며, 나아가
  
  
  
8) 퇴법이란 질병 등의 작은 인연을 만나더라도 수혹을 일으킴으로써 불환 등의 하위로 물러나 이미 획득 한 과위를 상실하지만, 퇴실(退失)의 인연을 만나지 않으면 곧바로 반열반하게 되는 종성의 아라한을 말한다.
9) 즉 하위로 물러날까 두려워하여 자해해서라도 반열반에 들고자 하는 종성의 아라한을 말한다.
10) 부동법종성이란 근기의 성품이 수승하고 그 뜻이 겁약(怯弱)하지 않아 뛰어난 퇴실의 인연을 만나더라 도 결코 물러나는 일이 없는 아라한을 말한다.
11) 여기서 '항시'란 항시에 가행을 닦는 것을 말하며, '존중'이란 가행을 낳을 때 법을 존중하는 것을 말 한다. 그리고 퇴법과 사법이 다 같이 이러한 두 가지 가행을 결여한 것임에도 별도의 종성으로 나누게 된 것 은, 퇴법은 둔근이고, 사법은 퇴법보다 좀더 이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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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달법도 반드시 [부동법에] 도달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에 근거하여 이 같은 명칭을 설정한 것이며, 그래서 여섯 종성의 아라한은 3계에 모두 존재하는 것이다.12) 만약 퇴법은 결정코 반드시 물러나야 하며, 내지 감달법은 반드시 [부동법에] 이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욕계에는 여섯 종성이 모두 존재하지만 무색계 중에는 오로지 안주법과 부동법 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즉 그곳에서는 퇴실(退失)과 자해(自害)와 자기 방호[自防]와 근기의 단련[練根]을 닦는 일이 없기 때문에 오로지 두 가지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여섯 종성의 아라한 가운데 누가 어디로부터 물러나는 것인가? 종성으로부터 물러난다고 해야 하는 것인가, 과위(즉 아라한과)로부터 물러난다고 해야 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네 가지는 종성으로부터 물러나고
  다섯 가지는 과위로부터 물러나지만, 일찍이 획득한 것에서는 물러나지 않는다.
  四從種性退 五從果非先
  
  논하여 말하겠다. 부동법의 종성은 필시 물러나는 일이 없지만, 앞의 다섯 가지 종성은 모두 물러나는 일이 있다. 이 중에서도 뒤의 네 가지는 종성으로부터 물러나는 일이 있지만, 퇴법의 한 종성만은 종성으로부터 물러나는 일이 없으니, 이 종성은 여섯 종성 가운데 가장 하위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섯 종성은 모두 과위로터 물러나는 일이 있다.
  
  
  
12) 6종성의 아라한은 다만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으로, 퇴법의 아라한이라고 해서 반드시 물러나는 것이 결정된 것은 아니다. 만약 퇴법은 반드시 물러나고, 감달법은 반드시 부동에 이르는 것 이라고 한다면, 지극히 적정(寂靜)한 곳이어서 퇴실·자해·자기 방호·근기의 단련과 같은 변동이 없는 무색 계에는 6종성이 아니라 안주와 부동법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구별은 단지 가능성에 근거한 것일 뿐이기 때문에 6종성은 3계에 모두 존재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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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비록 [종성과 과위에서] 다 같이 물러나는 일이 있을지라도 일찍이 획득한 것에서는 물러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온갖 무학으로서 일찍이 유학위 중에 머물렀던 종성이라면, 그는 이러한 종성으로부터 필시 물러나는 일이 없으니, 유학과 무학의 도에 의해 성취된 것이어서 견고하기 때문이다.13) 또한 만약 온갖 유학으로서 일찍이 범부위 중에 머물렀던 종성이라면, 그는 이러한 종성으로부터 역시 물러나는 일이 없으니, 세간도와 출세간도에 의해 성취된 것이어서 견고하기 때문이다.14) 그러나 만약 이러한 계위(즉 유학과 무학위)에 머문 후에 연근(練根)을 닦아 획득한 사법(思法) 등 네 종류의 종성이라면, 그는 이러한 종성으로부터 물러나는 일이 있을 수 있다.15)(이상 종성에서 물러나지 않는 경우와 물러나는 경우)
  나아가 선행된 두 계위(범부위와 유학위) 중에 머물면서 사법 등의 종성을 획득하였을 때에는 역시 이같이 획득된 과위로부터 필시 물러나는 일이 없으며,16) 오직 선행된 계위에서 획득된 퇴법만이 과위에서 물러나는 일이 있다. 또한 역시 일찍이 획득된 과위에서는 물러나는 일이 없지만, 이후에 획득된 과위에서는 물러날 수가 있다.17) 그렇기 때문에 예류과는 결정코 물러나는 일
  
  
13) 예컨대 유학위에 있을 때 사법의 종성을 성취한 자가 승진하여 무학위에 이르러서도 계속하여 사법의 종성을 상속하고 있으면, 그 종성은 유학과 무학의 두 가지 도에 의해 성취된 것이어서 견고하므로 퇴실할 리 가 없다는 뜻.
14) 이는 무학의 종성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앞서 언급한 사실을 유학의 경우에 적용시켜 논설한 것이다.
15) 예컨대 퇴법의 종성이 무학위에 머물면서 연근(練根)의 행을 닦아 사법 등의 네 종성(사·호·안주· 감달법)을 성취하였을 경우, 새로이 획득된 종성은 이전의 무학과 과위로서는 차별이 없으며, 유·무학의 두 가지 도에 의해 성취된 것이 아니어서 견고하지 않기 때문에 종성과 과위 모두로부터 물러나는 일이 있다. 또 한 온갖 유학위 중에 있으면서 연근의 행을 닦아 퇴법에서 사법 등의 종성을 성취하였거나 유학의 과위를 획 득하였을 경우에도 종성과 과위 모두에서 물러날 수 있다.
16) 유학위(혹은 범부위)에 머물면서 사법 등의 종성을 성취한 자가 승진하여 무학위(혹은 유학위)에 이르 러서도 계속하여 사법의 종성을 상속하고 있으면, 그 종성은 유학도와 무학도(혹은 세간도와 출세간도)에 의 해 성취된 것이어서 견고하기 때문에 과위에서도 역시 물러나는 일이 없다. 그러나 퇴법의 경우는 종성의 최 하위이기 때문에 종성상으로는 물러나는 일이 없지만, 과위에서는 물러나는 일이 있다.
17) '일찍이 획득된 과위'란 최초에 획득된 과위, 이를테면 예류과와 초월증의 일래·불환과를 말한다. 유 부에 의하면, 예류과 등 최초로 획득된 과위는 견도에 의해 유신견 등의 무지로부터 비롯된 이지적 번뇌[迷理 惑]를 끊은 자이기 때문에 한 번의 단멸로서 더 이상 하위로 물러나는 일이 없지만, 견도 이후 수도에 의해 정의적 번뇌[迷事惑]를 단멸하여 획득된 차제증의 일래·불환과와 아라한과의 경우는 물러나는 일이 있다. 즉 예류과 등은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한다고 하는 유신견 등의 추상적 번뇌[無事惑]를 끊기 위해 4제를 대상 으로 하여 획득된 법이지만, 차제증의 일래과 등은 어떤 실재하는 대상에 대해 직접적으로 집착·증오하고, 잘못 이해하여[不了] 일어나는 탐·진·만(慢) 등의 구체적 번뇌[有事惑]를 대상으로 하여 획득된 법이기 때 문에 실념하여 악연이나 사연(邪緣)을 만날 경우 다시 물러나는 일이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대중부와 경량 부에서는 아라한 무퇴론을 주장한다.(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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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없는 것이다.(이상 과위에서 물러나지 않는 경우와 물러나는 경우)
  이상과 같은 사실로 볼 때 응과(應果, 즉 아라한과)의 퇴법종성에는 결국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근기를 [단련하여] 증진한 경우이며, 둘째는 물러나 유학위에 머무는 경우이며, 셋째는 자신의 단계[自位]에 머물며 반열반하는 경우이다.18) 또한 사법종성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세 가지는 앞에서 설한 바와 같고, 여기에 다시 [사법에서 물러나] 퇴법의 종성에 머무는 한 가지의 경우를 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밖의 세 가지 종성에는 순서대로 다섯 가지와 여섯 가지와 일곱 가지가 있으니, 뒤의 것일수록 한 가지씩 더 증가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19)
  그리고 사법 등의 네 가지 종성이 물러나 유학위에 머물 때에는 퇴법으로서 머물 뿐 그 밖의 다른 법(이를테면 사법)으로서는 머물지 않는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퇴법보다] 뛰어난 종성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마땅히 승진하여 물러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어떠한 연유에서 일찍이 획득된 과위(즉 견도에 의한 예류·일래·불환)에서는 결정코 물러나는 일이 없는 것인가?
  견소단의 번뇌는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법[無事]'에 근거하기 때문이다.20) 이를테면 유신견(有身見, 즉 我見)은 자아[我處]에 의지하여 일어나며,
  
  
18) 근기를 단련하여 사법종성 등이 되는 경우와 과위에서 물러나 유학위의 성자가 될 때와 퇴법에서 그대 로 반열반에 들 때, 아라한은 퇴법종성에서 물러나게 된다.
19) 호법에는 호법에서 물러나 사법에 머무는 경우를 더한 다섯 가지, 안주법에는 여기에 안주법에서 물러 나 호법에 머무는 경우를 더한 여섯 가지, 감달법에는 여기에 감달법에서 물러나 안주법에 머무는 경우를 더 한 일곱 가지가 있다.
20) 즉 견혹은 실유의 소연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무실체인 자아, 즉 유신견 등의 무지로부터 비롯된 이지적 번뇌이기 때문에, 그러한 아(我)는 본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앎으로써 견혹이 일단 타파되기만 하 면 다시는 그것을 일으키는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 후술하듯이 이는 유소연심(有所緣心)을 주장 하는 유부설에 어긋나지 않는가 하는 논란이 대중부(大衆部)로부터 제기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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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소단의 번뇌는 바로 이러한 유신견을 근본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아 자체[我體]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견소단의 번뇌는]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법에 근거한다'고 말한 것으로, [번뇌의 대상이]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필시 물러나는 일이 없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마땅히 이 같은 견혹(見惑)은 비존재[無]를 소연으로 삼는다고 설해야 할 것이다.
  이것(견혹)은 비존재를 소연으로 삼는 것이 아니니, 4제(諦)를 경계로 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진리의 경계를 참답게 반연(攀緣)하지 않은 것일 뿐이다.21)
  온갖 번뇌 중에서 무엇이 이와 같이 참답게 반연하지 않는 것인가?
  비록 모든 번뇌가 이와 같다고 할지라도 여기에는 차별이 있으니, 수소단의 혹에는 각기 개별적인 실체[別事]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좋아하고[可意] 좋아하지 않는 것[不可意] 등이 바로 그것으로, 소연의 경계에도 이 같은 상이 없지 않다. 그러나 견소단의 혹은 아(我) 등이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이지만 온갖 진리의 경계에는 '아' 등의 상이 존재하지 않으니, 그것은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소단의 혹과는 다른 것이다.
  이를테면 색 등[5온]의 소연의 경계에 대해 아견(我見)이 헛되이 증익하여 작자(作者)라 하고, 향수자(享受者)라 하며, 자재자(自在者)라 하지만, [색 등은] 실유의 '아'가 아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변집견 등이 생겨나니, 그래서 그것들을 다 함께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법'에 근거한 번뇌라고 하게 된 것이다.22) 그러나 수소단의 번뇌인 탐·진·치의 경우, 색 등의 경계에 대해
  
  
21) 견혹은 비존재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4제를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다만 그것을 바로 관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견혹이다. 예컨대 5취온 등의 고과(苦果, 즉 고성제)는 무상하고 실재성이 없는 것임에도 항 상[常]하고 아(我) 혹은 아소(我所) 등으로 여기는 것이 견혹이다.
22) 요컨대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법'에 근거한 번뇌(즉 無事惑)란, 색 등의 5온 자체에 근거하여 그것 에 의해 직접 생겨난 번뇌가 아니라 그러한 색 등에 대해 비리(非理)의 작의(作意)를 시설(施設)하고, 그 같 은 허구의 시설에 대해 일으킨 아견(我見) 등을 말한다. 따라서 견소단의 번뇌는 직접 색 등을 소연으로 삼지 않는다는 뜻에서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법'에 근거하여 일어난 번뇌라고 하였으며, 이에 대한 판단 결택의 단계(즉 견도위)에 이르면 더 이상 물러나는 일이 없다고 한 것이다. 이에 반해 수소단의 번뇌는 직접적으로 실유의 색 등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난다는 의미에서 '실체로서 존재하는 법'에 근거하여 일어난 번뇌, 즉 유 사(有事)의 혹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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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로지 염착(染著)하고 싫어하여 배반하고[憎背] 으스대고[高擧] 알지 못함[不了]의 행상만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것들을 다 함께 '실체로서 존재하는 법'에 근거한 번뇌라고 설하게 된 것이다.
  또한 견소단의 번뇌는 진리의 이치[諦理]에 대해 아·아소와 단(斷)·상(常)의 견(見) 등으로 집착하는 것이지만, 진리 중에는 어떠한 경우라도 '아' 등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견소단의 탐 등은 이를 소연으로 하여 생겨나니, 그렇기 때문에 그 같은 견소단의 번뇌는 모두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법'에 근거한 번뇌라고 일컫게 된 것이다. 그러나 수소단의 번뇌는 색 등에 대해 '좋다', '나쁘다'는 등으로 말하는 것이지만, 색 등의 경계에 좋고 나쁜 등의 차별이 조금이라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소단의 번뇌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법'에 근거한 번뇌라고 설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견소단의 번뇌는 진리의 이치에 미혹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법'에 근거한 것이라고 하였지만, 수소단의 번뇌는 거친 실체[麤事, 즉 '탐' 등의 현상]에 미혹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실체로서 존재하는 법'에 근거한 것이라고 하였다. 즉 '진리의 이치'는 진실이기 때문에 이치로서 결정코 의지할 만한 것이니,23) 성혜(聖慧, 즉 무루혜)로써 이미 증득하였다면 필시 물러나는 일이 없다. 그러나 '거친 실체'의 상은 덧없고 거짓된 것[浮僞]이어서 결정코 의지할 만한 것이 없으니,24) 설혹 그것에 미혹하는 번뇌[迷事惑]를 끊었다 할지라도 실념(失念)하여 물러나는 일이 있는 것이다.
  
  
23) 원문에는 '개정가의(揩定可依)'로 되어 있지만 『현종론』(고려대장경28, p.239중)에 따라 '이정가의( 理定可依)'로 번역하였다. 참고로 『국역일체경』(비담부26하, p.1004)에서는 '해정가의(楷定可依)', 즉 '본 보기로서 결정코 의지할 만한 것이다'로 고쳐 번역하고 있다.
24) 『현종론』 권33(한글대장경201, p.396)에서는 "사(事, 현상을 구성하는 개별적 실체 즉 유위법)는 변 하는 것이어서 의지하기 어려운 것이기에(事變難依)"로 논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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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은 수소단의 번뇌는 자세히 살펴 생각함[審慮]으로써 생겨나는 것이 아니니, 어둡고 무딘 성질[昧鈍性]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견소단의 번뇌는 자세히 살펴 생각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니, 헤아려 아는 성질[推度性]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자라도 자세히 살펴 생각하지 않으면 '거친 실체'에 대해 실념(失念)하여 번뇌를 낳는 경우가 있지만, 자세히 살펴 생각하면 그렇지 않으니, 마치 새끼줄 등에 대해 문득 뱀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수소단의 번뇌에 대해서는 성자라도 물러남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문득 견혹을 일으킬 수는 없으니, 성자가 만약 자세히 살펴 생각하였다면 바로 진리의 이치를 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자는 견단(見斷)에서 결정코 물러남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경부사(經部師)는 설하기를, "아라한과로부터도 역시 물러나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25)
  그의 설은 이치에 부합하는 것이다.(논주 세친의 평석)
  어떻게 그러함을 안 것인가?(유부의 물음)
  교증과 이증에 의하였기 때문이다.
  어떠한 교증에 의한 것인가?
  경에서 말하기를, "필추가 성혜(聖慧)로써 번뇌를 끊은 것을 일컬어 진실된 끊음[實斷]이라고 한다"고 하였다.26) 또한 계경에서 "나는 유학은 마땅히 방일해서는 안 된다고 설하지만 아라한에 대해서는 그렇게 설하지 않는다"고 설하고 있다.27) 또한 경에서 부처님께서 경희(慶喜)에게 비록 "나는 이양(利
  
  
25) 경량부에서는 최초로 획득된 예류과뿐만 아니라 아라한과의 무퇴론(無退論)을 주장한다. 이에 반해 유 부에서는 앞에서 논설한 것처럼 부동법을 제외한 5종성 아라한의 유퇴론(有退論)을 주장한다.
26) 『중아함경』 권제3 「청백연화유경(淸白蓮華喩經)」(대정장1, p.574하). 여기서는 증(增)·사(伺)· 쟁송(諍訟)·에(恚)·한(恨)·진(瞋)·전(纏)·불어(不語)·결(結)·간(慳)·질(嫉)·사광(斯誑)·유첨(諛諂) ·무참(無慚)·무괴(無愧)·악욕(惡欲)·악견(惡見)은 신(身)·구(口)에 의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혜 견(慧見)에 의해 소멸된다고 설하고 있다. 곧 경량부에 있어서 진실된 번뇌의 끊어짐이란 성자가 무루혜로써 번뇌 종자를 끊어 다시는 현행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래와 불환은 유루도에 의해 획득되는 경우가 있으므로 그 때 번뇌 종자는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복(隱伏)되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지만, 예류와 아라한은 무루도로써 각각의 번뇌 종자를 끊은 성자이므로 더 이상 물러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27) 『중아함경』 권제51 「아습패경(阿濕貝經)」 (대정장1, p.752상) 『잡아함경』 권제8(대정장2, p.53 하). 즉 유학은 물러남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지만, 아라한의 무학은 물러남이 없기 때문에 불방일 을 설하지 않은 것이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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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養) 등도 아라한을 장애한다고 설한다"고 설하신 일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아라한과에서 물러난다는 사실에 대해 설한 것이 아니라 다만 현법락주(現法樂住)에서 물러난다는 사실을 설한 것일 뿐이다.28) 또한 경에서 "부동(不動)의 심해탈(心解脫)을 몸으로 작증하면, 나는 결정코 이로부터 더 이상 물러나는 인연이 없다고 설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29)
  그러나 만약 "물러나는 일이 있으니, 경에서 '시애심해탈(時愛心解脫)이 있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고 한다면, 나도 역시 그렇다고 인정한다. 그렇지만 다만 그가 물러나는 바에 대해 마땅히 관찰해 보아야 할 것이니, 응과(應果)로부터 물러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정려 등으로부터 물러난다고 해야 할 것인가?30) 즉 그 같은 근본정려와 등지(等持, 즉 4무색정)는 요컨대 적당한 시기[時]를 만나야 현전하기 때문에 '시해탈'이라고 일컬은 것이며, 그는 현법락주를 획득하기 위해 자주 그것이 현전하기를 희구하기 때문에 그것을 일컬어 '애'라고 한 것이다.
  
  
28) 『중아함경』 권제49 「대공경(大空經)」(대정장1, p.738) 참조. 이를테면 "만약 그들(비구·비구니… …)이 부동(不動)의 심해탈을 작증하면 나는 그들에게 장애가 있다고 설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네 가지 증상심(增上心, 정려)의 현법락거(現法樂居)를 획득하였다면 본래 정근하고 방일함이 없이 유행하였기 때문으로, 여기에 혹 물러남이 있다면 [홀로 있지 않고] 제자들이 많이 모였기 때문이다."(동 p.740상중)
29) 같은 경. 혹은 『잡아함경』 권제8 제212경(대정장2, p.53하), "그러한 비구는……머지 않아 온갖 유 루를 다하고 무루의 심해탈과 혜해탈을 획득하여 현법에 '나의 생은 이미 다하였고, 범행은 이미 확립되었고, 해야 할 일을 이미 다하였다'고 스스로 작증하였음을 알며, 더 이상 후유(後有)를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안다 . 왜냐 하면 그의 안식은 애락하고 염착할 만한 색에 대해 기뻐하지 않고 찬탄하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계 착(繫著)하여 머물지 않기 때문으로……그는 더 이상 안(眼)과 색(色)으로 물러나지 않는다." 즉 경량부에서 는 일체의 아라한을 부동(不動)의 심해탈로 해석하여 더 이상 번뇌로 인해 물러남이 없기 때문에 '부동'이라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30) 즉 경량부에서는 시애심해탈을 '적당한 때를 만나야 획득하는 해탈의 과위(시해탈아라한)에서 물러나 지 않기 위해 그것을 항시 애호하는 아라한'으로 해석하지 않고, 유루인 근본정려의 현법락주에서 물러나는 아라한으로 해석하여 유부가 인용한 아라한 유퇴론(有退論)의 경증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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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어떤 이도 "이러한 선정은 바로 애미(愛味)의 대상이 된다"고 설하였다. 곧 모든 아라한의 결과인 해탈은 항상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응당 마땅히 '시'라고 이름해서는 안 되며, [그 같은 과위에서는] 더 이상 흔구(欣求)하지 않기 때문에 '애'라고도 이름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응과로부터 물러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세존께서는 다만 '증득한 현법락주에서 물러날 수 있다'고만 설하셨겠는가?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모든 아라한의 결과인 해탈은 필시 부동(不動)임을 깨달아 알아야 한다. 그렇지만 이양(利養) 등의 과실에 의해 이미 획득한 현법락주의 자재(自在)로부터는 물러나는 일이 있으니, 이를테면 온갖 둔근자가 바로 그러하다. 그러나 만약 온갖 이근자라면 물러나는 일이 없다. 따라서 획득한 현법락주에서는 물러나는 일이 있기도 하고, 물러나는 일이 없기도 하기 때문에 퇴(退)·불퇴법(不退法)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31) 이와 마찬가지로 사법(思法) 등에 대해서도 마땅히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불퇴법과 안주법과 부동법에 어떠한 차별이 있는 것인가?
  근기를 단련[練根]하지 않고서 획득하는 것을 일컬어 불퇴법이라고 하며,근기를 단련하여 획득하는 것을 일컬어 부동법이라고 하는데,32) 이러한 두 근기가 일으킨 뛰어난 등지는 설사 물러나게 될 인연을 만날지라도 역시 물러나는 일이 없다. 그리고 안주법이란 다만 이미 머물고 있는 온갖 뛰어난 공덕 중에서는 능히 물러나는 일이 없지만 더 이상 또 다른 뛰어난 공덕을 능히 인기하지 않으며, 설혹 다시 인기하여 낳을지라도 그것으로부터 물러날 수 있는 종성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불퇴법 등의 세 종성의 차별이다.
  
  
31) 앞에서 논설한 대로 유부에서는 6종성의 아라한을 물러남에 근거하여 해석하고 있는 데 반해 경량부의 경우, 그것은 다만 현법락주(現法樂住, drstadharma sukhavihara)에 기초한 차별일 뿐 일체 종성의 아라한과 자체는 부동법이다. 즉 경량부에서는 유루정인 현법락주에서의 물러남만을 인정하여 그것에서 물러나는 일이 있는 둔근자를 앞의 다섯 종성의 아라한이라 하고, 물러남이 없는 이근자를 제6 부동법의 아라한이라고 하였 다. 다시 말해 이미 획득한 4정려의 현법락주에서 물러나는 일이 있으면 퇴법, 물러나는 일이 없으면 불퇴법( 즉 부동법)이며, 나아가 그것을 생각하거나 방호하는 것 등을 사법·호법이라고 이름한다는 것이다.(후술)
32) 즉 이근자가 획득한 부동의 종성을 불퇴법이라고 하며, 둔근자가 근기를 닦아 획득하는 부동의 종성을 부동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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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교저가(喬底迦)가 옛날 유학위(有學位)에 있으면서 시해탈을 지극히 미착(味著)하였기 때문에, 또한 둔근자였기 때문에 자주자주 퇴실(退失)하게 되자 깊이 혐오하고 자책하여 칼로써 자해하였지만, 신명(身命)에 대해 바라고 아끼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명종할 때 아라한과를 획득하고 바로 반열반하였다. 따라서 교저가 역시 아라한과에서 물러난 것은 아닌 것이다.33)
  또한 『증십경(增十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하나의 법을 마땅히 일으켜야 할 것이니, 시애심해탈(時愛心解脫)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의 법을 마땅히 증득해야 할 것이니, 부동심해탈(不動心解脫)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만약 응과(應果)의 존재를 일컬어 시애심해탈이라고 한다면, 어째서 이 『증십경』 중에서는 응과를 다시 설하고 있는 것인가? 또한 일찍이 어떤 곳에서도 아라한과를 일컬어 '마땅히 일으켜야 하는 것[應起]'이라고 설한 일이 없으며, 다만 '마땅히 증득해야 하는 것[應證]'으로 설하고 있을 뿐이다.34) 또한 둔근에 포섭되는 응과를 일컬어 '마땅히 일으켜야 하는 것'이라고 설하였다면, 무슨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인가? 만약 그 같은 응과가 능히 일어나 현전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밖의 다른 이근자도 가장 뛰어나게 능히 마땅히 일으켜야 할 것이며, 만약 그것이 마땅히 일어나 현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밖의 다른 이근자도 가장 뛰어나게 마땅히 일으켜야 한다. 따라서 시해탈은 응과의 존재가 아닌 것이다.
  
  
33) 교저가(Gautika, 혹은 瞿低迦)의 기사는 『잡아함경』 권제39 제1091경(대정장2, p.286상)에 나온다. 그는 시수의해탈(時受意解脫, 즉 시애해탈)을 획득하였으나 여섯 번이나 물러나게 되자 더 이상 물러나지 않 기 위해 자살하였다. 그 때 세존께서는 수기(授記)하였고, 그가 반열반하였음을 찬탄하였다. 이에 대해 경량 부에서는 그 때의 물러남은 유학위의 유루정에서였다고 해석하고 있다. 즉 그는 시해탈에 대해 깊이 애미(愛 味)하여 하지의 혹에 의해 자주 물러나게 되자 이를 싫어하여 자살하였고, 그 같은 찰나에 신명을 아끼지 않 았기 때문에 아라한과를 획득하고 무여열반에 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34) 이는, 시해탈은 아라한과가 아니라 유루정이라는 사실의 경증으로, 경에서 시해탈과 부동심해탈을 별 도로 설한 것은 그 자체의 본질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증십경』은 『장아함경』 권제9 「십 상경(十上經)」(대정장1, p.51상) 참조. "一生法謂有漏解脫, 一證法謂無礙心解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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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계경에서] '시해탈의 응과'라는 말로 설하고 있는 것인가?
  이를테면 어떤 응과는 근기의 성질이 둔하기 때문이며, 요컨대 [적당한] 시기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으로, 그 때 선정(즉 현법락주의 유루정)이 비로소 현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와 서로 반대되는 경우라면 불시해탈(不時解脫)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아비달마(阿毘達磨)에서도 역시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욕탐수면은 세 처소로 말미암아 일어나니, 첫째는 욕탐수면을 아직 단변지(斷遍知)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둘째는 그것에 따르는 전(纏)의 법이 바로 현재전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그것에 대해 비리작의를 바로 일으키기 때문이다."35) 만약 그것(앞의 아비달마 논설)은 그 같은 원인을 갖출 때 생겨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라고 한다면, 다시 어떤 법이 있어 그 같은 원인을 갖추지 않고 생겨날 것인가?
  이것이 바로 성교(聖敎)에 의한 [아라한 불퇴론(不退論)의 증명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떠한 이증에 의한 것인가?
  만약 아라한에게 번뇌가 필경 일어나지 않는 것은 대치도가 이미 생겨났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러한즉 응당 마땅히 물러나 번뇌를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만약 아라한에게 이러한 대치도가 아직 생겨나지 않았다고 한다면, 아직 번뇌의 종자를 능히 영원히 뽑아내지 않았기 때문에 번뇌[漏]가 다하지 않았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번뇌가 다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어찌 그것을 응과라고 설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바로 이치에 의한 [아라한 불퇴론(不退論)의 증명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마땅히 『탄유계경(炭喩契經)』에 대해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거기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다문(多聞)의 여러 성(聖) 제자는 혹은 가면서 혹은 머물면서 어떤 처소, 어떤 때에 실념(失念)하기 때문에 악과 불선의 생각을 낳기도 한다."36) 이 경에서는 오로지
  
  
35) 『품류족론』 권제3(한글대장경117, p.66). 욕탐의 번뇌가 이 같은 이유에 의해 일어난다고 할 때, 아 라한과는 욕탐을 이미 끊었고, 비리작의도 더 이상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수면을 일으켜 물러날 리가 없다는 것이다.
36) 『잡아함경』 권제43 제1173경(대정장2, p.314중). "혹 어느 때 다문의 성 제자는 정념(正念)을 잃고 악 불선의 생각을 낳아 욕(欲)을 장양하고 에(恚)를 장양하며 치(癡)를 장양하니, 이는 바로 둔근자이다. 다 문의 성 제자가 비록 집(集)의 멸(滅)을 일으켰을지라도 '욕'이 마음을 덮고 있기 때문으로, 비유컨대 쇠구슬 을 달구어 몹시 뜨거워졌을 때 물을 조금 뿌리면 바로 말라 없어지듯이, 다문의 성 제자로서 둔근자가 염을 낳을 때 바로 멸하는 것도 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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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한과에 대해 설한 것으로, 그 경에서 "그러한 성 제자의 마음은 오랫동안 원리(遠離)에 수순(隨順)하여……(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마침내 열반에 들게 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37) 다른 계경 중에서도 이러한 '원리' 등에 수순하는 것을 설하여 '응과의 힘'이라고 설하는 경우가 있으며, 또한 이 경 중에서도 "그는 번뇌[漏]에 수순하는 일체를 이미 능히 영원히 다하여 버렸고 이미 청량(淸凉)을 획득하였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여기서의 다문의 성 제자는] 바로 아라한임을 결정코 알 수 있는 것이다.
  실로 뒤에 설한 성 제자는 바로 아라한이다. 그렇지만 그(앞에서 설한 다문의 성 제자)는 갈 적에나 머물고 있을 적에 아직 잘 통달하지 못하였으므로 그 같은 일(실념하여 불선을 낳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이를테면 유학자는 갈 때나 머물고 있을 때 실념함으로 말미암아 번뇌를 일으킬 수 있지만, 그 뒤 무학을 성취하게 되면 번뇌를 일으키는 일이 없다. 즉 전자는 유학위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그같이 설하여도 아무런 허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결정코 이와 같이 설하고 있다. "아라한과도 역시 물러나는 일이 있다."
  
  오로지 아라한에게만 여섯 종성이 있는 것인가, 그 밖의 다른 과위에도 역시 여섯 종성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있다고 한다면 그것들도 모두 능히 근기의 단련[練根]을 수습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37) 같은 경. "그 같은 다문의 성 제자는 그 마음이 오랫동안 원리(遠離)를 향해, 이욕(離欲)을 향해 나아 갔고 흘러들었으며 실려갔다. 그래서 열반에서 적정(寂靜) 사리(捨離)하였으며, 열반을 즐겼으며, 유루처를 적멸하여 청량(淸凉)하게 되었다." 여기서 원리와 이욕은 바로 아라한의 특징이므로 앞에서 '실념하는 다문의 성 제자'는 바로 아라한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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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송으로 말하겠다.
  
  유학과 이생에게도 역시 여섯 종성이 있지만
  견도위에서는 근기의 단련을 수습하지 않는다.
  學異生亦六 練根非見道
  
  논하여 말하겠다. 유학과 이생의 종성에도 역시 여섯 가지가 있으니, 여섯 종류의 응과(應果)는 그것을 선행하는 것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견도위에서는 필시 근기를 단련하는 일[練根]이 없으니, 이러한 견도위에서는 가행을 일으키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38) 오로지 신해(信解, 즉 수도위)와 이생위 중에서만 무학위에서처럼 능히 근기의 단련을 닦을 수 있는 것이다.
  계경에서 이같이 설하고 있다. "나는 그같이 증득된 네 종류의 증상의 심소(곧 4정려)인 현법락주 중 한 가지에 따라 획득한 바로부터 물러나는 일이 있다고 설한다. 그렇지만 부동의 심해탈을 몸으로 작증한 이의 경우, 나는 결정코 이로부터 물러나는 인연이 없다고 설한다."39) 그런데 어떻게 부동법이 현법락주(現法樂住)에서 물러날 수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물러남에는 세 가지가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이득(已得)과 미득(未得)과 수용(受用)에서의 그것으로
  부처님에게는 오로지 최후의 것만이 있을 뿐이지만
  이근에게는 중간과 뒤의 것이, 둔근에게는 세 가지가 모두 있다.
  
  
  
38) 즉 견도위는 매우 빠르게 전이하여 그 중간에 근기의 단련과 같은 다른 행을 닦을 겨를이 없기 때문이 다.
39) 『중아함경』 권제49 「대공경」(대정장1, p.740상중), " 若彼不移動心解脫作證, 我不說有障礙也. 若 彼得增上心現法樂居, 本爲精勤無放逸遊行故. 此或可有失以弟子多集會."(해석은 주2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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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應知退有三 已未得受用
  佛唯有最後 利中後鈍三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물러남에는 모두 세 가지 종류가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즉 첫째는 이득퇴(已得退)이니, 이미 획득한 수승한 공덕에서 물러나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미득퇴(未得退)이니, 아직 능히 수승한 공덕을 획득하지 못한 것을 말한다. 셋째는 수용퇴(受用退)이니, 이를테면 이미 획득한 온갖 수승한 공덕이 현재전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40)
  이러한 세 가지 물러남 중에서 세존에게는 오로지 수용퇴 한 가지만이 있을 뿐이니, 온갖 공덕을 갖추었을지라도 그것이 일시에 단박에 현전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41) [불세존을 제외한] 그 밖의 부동법은 수용퇴와 미득퇴 모두를 갖추고 있으니, 역시 또한 스스로 수승한 공덕이라 여기는 뛰어난 법을 아직 획득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42) 그 밖의 다섯 종성은 세 가지 물러남을 모두 갖추고 있으니, 역시 또한 이미 획득한 공덕에서 물러나는 것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즉 [계경에서는] 수용퇴에 근거하여 부동법은 현법락주에서 물러난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부동법에 물러남이 없다는 사실과] 서로 모순되는 허물은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 무퇴론자(無退論者, 즉 경부)는 이와 같이 설하고 있다. "온갖 무루의 해탈을 모두 '부동'이라 이름한다. 그럼에도 여섯 번째의 부동법을 별도로 설정한 것은 앞서 해석하여 회통한 바와 같으니, 이는 마땅히 힐난할 바가 되지 않는 것이다."43)
  
  
40) 수용퇴란 말하자면 수승한 공덕을 이미 획득하였지만 수용하지 않는 것으로, 예컨대 금전을 획득하였 으면서도 더 큰 공덕을 획득함에 따라 그것을 수용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즉 앞의 두 가지가 비득(非 得)을 본질로 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오로지 현전하지 않은 것일 뿐이다.
41) 부처가 갖는 온갖 공덕, 이를테면 그만이 갖는 공덕[不共法]과 다른 성자와 공통적으로 갖는 공덕[共 法]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27(p.1223 이하)에서 상론한다.
42) 여기서 '스스로 수승한 공덕이라 여기는 뛰어난 법'이란 부처와 여러 성자 간에 공통되는 공덕인 무쟁 (無諍)·원지(願智)·4무애해(無礙解) 등을 말한다. 본론 권제27 (p.1238 이하) 참조.
43) 즉 유루정인 현법락주에서 물러나고 물러나지 않는 등의 이유에 따라 아라한을 6종성으로 나눈 것이다 . 주3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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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갖 아라한은 자신의 과위에서 물러난다고 이미 인정하였으니, 다시 태어난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인가? 또한 온갖 아라한은 과위에 머물 때에 짓지 않았던 일을 물러날 때에는 짓는 것인가, 그렇지 않는 것인가?
  그렇지가 않다.44)
  어떠한 연유에서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일체의 아라한은 과위에서 물러나더라도
  반드시 다시 획득하고, 명종하지 않으며
  과위에 머물면서 짓지 않았던 일은
  부끄러움이 증가하였기 때문에 짓지 않는다.
  一切從果退 必得不命終
  住果所不爲 慚增故不作
  
  논하여 말하겠다. [아라한은] 과위로부터 물러나더라도 중간에 목숨을 마치는 일이 없으니, 물러나서는 잠시 후에 반드시 그것을 다시 획득하기 때문으로, 계경에서 "이와 같은 다문(多聞)의 온갖 성 제자들은 정념(正念)에서 퇴실하더라도 물러남으로써 일어나게 된 것(즉 번뇌)을 능히 다시 신속하게 다하고[盡], 몰(沒)하고, 멸(滅)하고, 떠날[離] 수 있게 됨을, 필추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고 설한 바와 같다.45)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범행
  
  
44)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그는 물러나는 단계에서 번뇌를 갖기 때문에 목숨을 마치고서 마땅히 다시 생 을 받는다고 해야 할 것이며, 또한 그는 이미 혹을 일으켰으므로 마땅히 과위에 머물 때에는 짓지 않던 일을 다시 짓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현종론』 권제33, 앞의 책, p.400)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45) 『잡아함경』 권제43 제1173경(대정장2, p.314중하). 원리(遠離)를 향해 나아간 다문의 성 제자들은 과위에서 물러나 번뇌를 일으키더라도 신속하게 다시 과위를 획득하여 일어난 번뇌를 진몰(盡沒)하게 할 수 있으니, 비유하자면 동방으로 흘러가는 항하(恒河)를 많은 사람들이 막아 서방으로 흘러가게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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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梵行)을 닦더라도 그 과보는 응당 안온하게 맡기고 믿을 만한 것이 아니어야 하는 것이다.46)
  또한 과위에 머무는 단계에서는 응당 행하지 않았던 그 같은 과위에 어긋나는 사업(事業)은, 부끄러움[慚]이 증가하였기 때문에 잠시 동안 물러나 있을 때라도 역시 필시 짓지 않으니, 비유하자면 장사가 비록 무릎은 꿇을지라도 엎드리지 않는 것과 같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근기를 단련[練根]하여 무학과 유학을 획득하기도 하는데,47) 바로 근기를 단련할 때 각기 몇 가지의 무간도와 몇 가지의 해탈도가 있는가? 그리고 그것은 어떠한 성질에 포섭되며, 그것의 소의는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학위에서의 근기의 단련은
  아홉 가지의 무간도와 해탈도이니,
  오래 익혀야 하기 때문이고, 유학은 한 가지인데
  
  
  
46) 여기서 범행이란 무간·해탈·승진의 세 도를 말하는 것으로, 청정행의 뜻이다. 즉 만약 아라한과에서 물러나 다시 획득할 수 없다고 한다면, 범행을 닦아 획득한 그 같은 과보는 안온하게 믿고 안주할 수 없는 것 이어야 한다는 뜻.
47) 근기의 단련 즉 연근(練根)이란 온갖 근기를 조련(調練)하여 증장시키는 것을 말한다. 즉 도의 힘으로 인해 근기가 상속하게 되는 것으로, 하품의 근기를 버리고 중품의 근기를 획득하며, 중품의 근기를 버리고 상 품의 근기를 획득하여 점차로 증가하고 뛰어나게 되는 것을 일컬어 '연근'이라고 한다. 따라서 연근이라고 하 는 명칭은 '근기를 바꾼다'는 전근(轉根)의 뜻에 근거한 것이다. 비록 여덟 가지 해탈도는 점차로 뛰어난 근 기를 획득하는 것일지라도 본심은 뛰어난 종성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 뛰어난 종성을 획득하지 않았 을 경우에는 이전의 저열한 종성을 버리지 않으니, 이는 마치 뒤의 과위를 획득하여야 비로소 앞의 향(向)을 버리는 것과 같다. 그리고 성자위에 존재하는 종성에 여섯 가지가 있어 능히 연근을 닦는 것과 마찬가지로 견 도에 들기 전의 난법(煖法) 등의 가행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성자위 중에서는 뛰 어난 종성을 획득하면 반드시 이전의 저열한 종성을 버리지만, 난법 등의 가행위에서 연근을 닦는 자는 단지 뛰어난 종성을 획득하여 저열한 종성이 작용하지 않는 것을 일컬어 '전근'이라고 하니, 저열한 종성의 '득'을 버리는 것은 아니다.(『현종론』 권제33, 앞의 책, p.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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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루이며, 인취의 세 주에 의지한다.
  練根無學位 九無間解脫
  久習故學一 無漏依人三
  
  또한 무학은 9지(地)에 의지하고
  유학은 다만 6지에 의지하여 근기를 단련하니
  과도(果道)와 승과도를 버리고서
  오로지 과도만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無學依九地 有學但依六
  捨果勝果道 唯得果道故
  
  논하여 말하겠다. 뛰어난 종성을 추구하여 근기의 단련을 닦는 자가 무학위 중에서 각각의 종성을 바꾸는 데에는 각기 아홉 가지의 무간도와 아홉 가지의 해탈도가 있으니, 이는 마치 응과를 획득할 때와 같다.48)
  그러한 까닭은 무엇인가?
  무학의 둔근종성은 오랫동안 익혀야 하므로 적은 공력으로 능히 근기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유학도와 무학도에 의해 성취된 근기는 견고하기 때문이다.
  유학위 중에서 각각의 종성을 바꾸는 데에는 각기 한 가지의 무간도와 한 가지의 해탈도가 있으니, 이는 마치 초과(初果)를 획득할 때와 같은 것으로, 앞서 언급한 사실과는 서로 반대되기 때문이다.49)
  그것(유학위와 무학위)의 가행도의 경우에도 그러한 온갖 단계에 각기 한 가지가 있다.50)
  
  
48) 개개의 종성을 장애하는 불염오무지에 9품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끊는 무간·해탈도에도 각기 9품이 있는 것으로, 이는 마치 9무간도와 9해탈도로써 유정(有頂)의 혹을 끊고 아라한이 되는 것과 같다.
49) 즉 유학의 둔근종성은 오랫동안 익혀 얻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근기를 바꾸기가 쉬운 것이다.
50) 가행도의 경우, 유학과 무학은 모두 한 가지 도만을 일으킨다. 따라서 유학의 성자가 근기의 단련을 닦는 데에는 각기 한 가지의 가행·무간·해탈도가 있으며, 무학의 경우에는 한 가지 가행도와 각기 아홉 가 지의 무간·해탈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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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은 무간도와 해탈도는 모두 오로지 무루의 성질에 포섭된다. 즉 성자는 필시 유루도로써 근을 바꾸는 일이 없으니, 증상(增上)이 아니기 때문이다.51)
  그리고 [본송에서] '의지한다'고 함은 소의신과 소의지를 말하는 것으로, 이같이 근기를 단련하는 소의신은 오로지 인취의 세 주(洲)의 그것으로, 그 밖의 다른 처소의 몸은 물러남이 없기 때문이다.52)
  이것의 소의지는, 무학의 경우 9지(地)와 통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미지정과 중간정려와 4근본정과 아래 세 무색정이 바로 그것이다. 유학의 경우 오로지 여섯 지에만 의지하여 일어나니, 이를테면 앞의 9지에서 뒤의 세 가지(아래 세 무색정)를 제외한 그것이다.
  제외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대저 근기를 바꿀 경우 [지금까지의] 과도(果道)와 승과도(勝果道, 즉 向道)를 버릴 수 있지만 획득되는 것은 오로지 과도일 뿐 승과도가 아니기 때문이며, 유학의 과위는 무색정에 포섭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유학의 연근도 다만 여섯 지에 의지하는 것이다.53)
  온갖 무학위의 보특가라에는 모두 몇 가지의 종류가 있으며, 어떠한 차별에 의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일곱 가지 성문과 두 가지 부처가 있으니,
  
  
  
51) 세속의 유루도는 그 본질상 뛰어난 것이 아니어서 성자의 근기를 감당할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52) 색·무색계와 6욕천에는 무루도가 존재하지만 물러남이 없기 때문에 근기의 단련을 닦지 않는다. 오로 지 북구로주를 제외한 인취의 세 주에만 물러남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두려워하여 근기의 단련을 닦게 된다는 것이다.
53) 근기를 바꾸는 것[轉根]은 지금까지의 과도(果道)와 승과도(勝果道, 즉 向道)를 버리고 다만 보다 뛰 어난 사문과의 획득만을 추구하기 때문으로, 유학위 증 예류·일래과는 욕계 미지정에 의지하고, 불환과는 미 지·중간·4근본정의 6지에 의지하였듯이, 근기의 단련 역시 아래 3무색정을 제외한 6지에 의지하여 일어나 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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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차별은 9품의 근기에 의한 것이다.
  七聲聞二佛 差別由九根
  
  논하여 말하겠다. 무학위에 머물고 있는 성자에는 아홉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일곱 가지의 성문과 두 가지의 각자(覺者)가 바로 그것이다. 일곱 가지의 성문이란 퇴법 등의 다섯 종성과 부동법―이를 둘로 나눈 것은 선후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을 말하며,54) 두 가지 각자란 독각(獨覺)과 대각(大覺)을 말하는 것으로, 근기에 하하품 등의 9품의 차이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무학의 성자에 아홉 가지 차별이 있게 된 것이다.
  유학위와 무학위에 일곱 가지 성자가 있어 일체의 성자는 모두 다 여기에 포섭되니, 첫째는 수신행(隨信行)이며, 둘째는 수법행(隨法行)이며, 셋째는 신해(信解)이며, 넷째는 견지(見至)이며, 다섯째는 신증(身證)이며, 여섯째는 혜해탈(慧解脫)이며, 일곱째는 구해탈(俱解脫)이다.
  이러한 일곱 가지는 무엇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이며, 실제적인 차별은 몇 가지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가행과 근기와 멸진정과
  해탈의 차이 때문에 일곱 가지가 된 것으로
  이것의 실제적인 차별은 다만 여섯 가지이니
  세 가지 도에 각기 두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加行根滅定 解脫故成七
  此事別唯六 三道各二故
  
  논하여 말하겠다. 가행의 차이에 근거하여 처음의 두 종류를 설정하였으니, 이를테면 일찍이 다른 이와 법에 따라 추구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 가행을 닦
  
  
  
54) 선(先)의 부동이란 근기의 단련에 의하지 않고 선래(先來) 본득(本得)의 부동을 말하며, 후(後)의 부 동이란 근기의 단련에 의해 부동이 된 아라한을 말한다. 주3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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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 데 근거하여 '수신행'과 '수법행'이란 명칭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55)
  근기가 동일하지 않음에 근거하여 그 다음의 두 종류를 설정하였으니, 이를테면 둔근과 이근에게 신근(信根)과 혜근(慧根)이 증가하였기 때문에 순서대로 '신해'와 '견지'로 이름하게 된 것이다.56)
  멸진정을 획득한 것에 근거하여 '신증'이라는 명칭을 설정하였으니, 소의신에 의해 멸진정을 증득하였기 때문이다.57)
  해탈의 차이에 근거하여 마지막 두 종류를 설정하였으니, 이를테면 오로지 혜(慧)에 의해 번뇌의 장애[煩惱障]를 떠난 성자를 '혜해탈'로 설정하였으며, 아울러 선정[定]을 획득함에 따라 해탈의 장애[解脫障]마저 떠난 성자를 '구해탈'로 설정하였다.58)
  이같이 성자의 명칭에 비록 일곱 가지가 있을지라도 실제적인 차별은 오로지 여섯 가지일 뿐이다. 즉 견도 중에 두 종류의 성자가 있으니, 첫째는 수신행이고, 둘째는 수법행이다. 이러한 성자가 수도에 이르게 되면 다시 별도의 두 가지의 명칭을 설정하니, 첫째는 신해이고, 둘째는 견지이다.59) 이러한 성자가 무학에 이르게 되면 다시 두 종류의 명칭을 설정하니, 이를테면 시해탈(時解脫)과 불시해탈(不時解脫)이 바로 그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여기서 첫 번째 수신행의 경우, 이를테면 하·중·상의 근기의 차별로 말미암아 세 가지가 되며, 이를테면 퇴법 등의 종성의 차별로 말미암아 다섯 가지가 되며, 이를테면 8인(忍)·7지(智)의 도의 차별로 말미암아 열다섯 가지가 되며, 이를테면 구박(具縛)과 8지의 염오를 떠
  
  
  
55) 즉 견도 이전에 다른 이의 말을 믿고서 가행을 닦은 이를 수신행이라고 하며, 스스로 증득한 법[自證 法]에 따라 가행을 닦은 이를 수법행이라고 한다. 본론 권제23을 참조 바람.
56) 둔근인 수신행의 성자가 수도에 이르러 신(信)의 증상력으로 말미암아 무루의 정해(正解)가 나타났기 때문에 '신해'라고 한 것이며, 이근인 수법행의 성자가 수도에 이르러 혜의 증상력으로 말미암아 무루 정견이 나타났기 때문에 '견지'라고 이름하였다. 본론 권제23(p.1068)을 참조 바람.
57) 신증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24(p.1098)를 참조 바람.
58) 해탈의 장애[解脫障]는 정장(定障)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해탈은 멸진정. 즉 멸진정에 들어가는 것 을 장애하는 무부무기성인 저열한 무지인 불염오무지를 말한다. 차송(次頌) 참조.
59) 그리고 신해와 견지로서 멸진정을 획득한 성자를 '신증'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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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염(離染)의 차별로 말미암아 일흔세 가지가 되며,60) 이를테면 [인취의] 세 주와 욕계 천의 소의신의 차별로 말미암아 아홉 가지가 된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근기와 종성과 도와 이염과 소의신의 차별을 서로 결부시키게 되면, 그 수는 1억 4만 7천8백25종류가 될 것이다.
  수법행 등의 경우에 대해서도 참답게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무엇을 구해탈과 혜해탈이라 이름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구해탈은 멸진정을 획득하였기 때문이며
  그렇지 않은 이를 혜해탈이라고 이름한다.
  俱由得滅定 餘名慧解脫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아라한으로서 멸진정을 획득한 자를 일컬어 '구해탈'이라고 하니, 지혜[慧]와 선정[定]의 힘에 의해 번뇌와 해탈의 장애에서 모두 해탈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밖의 아직 멸진정을 획득하지 않은 자를 일컬어 '혜해탈'이라고 하니, 다만 지혜의 힘에 의해 번뇌의 장애로부터 해탈을 획득하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세존께서 설하시기를, "다섯 번뇌를 끊으면 [욕계의 혹업에] 견인되지 않을지라도 아직 원만한 유학이라고는 이름하지 않는다"고 하셨다.61) 유학과 무학위는 각기 몇 가지 조건[因]에 의해 그 중에서도 오로지 그만을 홀로 '원만한 이'라고 일컫게 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60) 이생위에서 수혹을 끊지 않고 견도위에 든 구박의 성자와, 하(下) 8지의 9품의 수혹을 끊은 일흔두 종 류의 성자를 말한다.
61) 즉 5하분결(下分結)을 끊고서 불환과를 성취하면 다시는 욕계의 혹업(惑業)에 견인되지 않는 불퇴위에 머물게 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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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학으로서 원만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근기와 과보와 선정의 세 가지 조건에 의해서이며
  무학으로서 원만하다는 명칭을 얻은 것은
  다만 근기와 선정의 두 가지 조건에 의해서이다.
  有學名爲滿 由根果定三
  無學得滿名 但由根定二
  
  논하여 말하겠다. 유학이 유학위 중에서 오로지 그만이 홀로 '원만한 이'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되는 것은 세 가지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근기[根]와 과보[果]와 선정[定]이 바로 그것이다.62)
  즉 어떤 유학의 성자는 다만 근기에 의해 역시 원만한 이라는 명칭을 획득하는 경우도 있으니, 이를테면 온갖 견지(見至)로서 아직 욕계의 염오를 떠나지 않은 자가 그러하다. 어떤 유학의 성자는 다만 과보에 의해 역시 원만한 이라는 명칭을 획득하는 경우도 있으니, 이를테면 신해(信解)의 불환으로서 아직 멸진정을 획득하지 않은 자가 그러하다. 어떤 유학의 성자는 근기와 과보에 의해 역시 원만한 이라는 명칭을 획득하는 경우도 있으니, 이를테면 견지의 불환으로서 아직 멸진정을 획득하지 않은 자가 그러하다. 어떤 유학의 성자는 과보와 선정에 의해 역시 원만한 이라는 명칭을 획득하는 경우도 있으니, 이를테면 온갖 신해로서 멸진정을 획득한 자가 그러하다. 어떤 유학의 성자는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추었기 때문에 오로지 그만이 홀로 원만한 이라는 명칭을 획득하는 경우도 있으니, 이를테면 온갖 견지로서 멸진정을 획득한 자가 그러하다. 그렇지만 다만 선정에 의해, 그리고 근기과 선정에 의해 역시 원만한 이라는 명칭을 획득하는 유학의 성자는 없다.
  
  
  
62) '원만한 유학'이란 이근이 그러한 과위를 획득하고서 멸진정을 획득한 자를 말하는데, 이러한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견지의 불환신증을 '원만(圓滿)한 이'라 하고, 한두 가지 조건을 갖춘 견지 등을 '부분적으 로 원만[分滿]한 이'라고 한다. 즉 신해로서 멸진정을 획득한 자는 근기를 결여한 유학이며, 견지의 불환으로 아직 멸진정을 획득하지 못한 자는 선정을 결여한 유학이며, 견지로서 아직 욕계를 떠나지 못한 자는 과보와 선정을 결여한 유학이며, 신해의 불환으로 멸진정을 획득하지 못한 자는 근기와 선정을 결여한 유학이다.(후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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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갖 무학의 성자는 무학위에서 근기와 선정 두 가지 조건에 의해 오로지 그만이 홀로 '원만한 이'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되는데, 무학위 중에는 과보가 원만하지 않은 이는 없기 때문에63) 과보에 의해 역시 원만한 이라는 명칭을 건립하는 일은 없다.
  즉 다만 근기에 의해 역시 원만한 이라는 명칭을 획득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불시해탈로서 아직 멸진정을 획득하지 못한 자가 그러하다. 다만 선정에 의해 역시 원만한 이라는 명칭을 획득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시해탈로서 멸진정을 획득한 자가 그러하다. 그리고 두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추었기 때문에 오로지 그만이 홀로 원만한 이라는 명칭을 획득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불시해탈로서 이미 멸진정을 획득한 자가 그러하다.
  
  온갖 도에 대해 널리 설해 볼 것 같으면 그 차별은 이루 헤아릴 수 없으니, 이를테면 세간도와 출세간도와 견도(見道)와 수도(修道)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간략하게 설하여 몇 가지의 도가 [그같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도의 차별을] 능히 두루 포섭할 수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으로, 일체의 도를
  간략히 설하면 오로지 네 가지가 있으니
  말하자면 가행도와 무간도와
  해탈도와 승진도가 바로 그것이다.
  應知一切道 略說唯有四
  謂加行無間 解脫勝進道
  
  논하여 말하겠다. 가행도(加行道)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이것으로부터 무간에 무간도(無間道)가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무간도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마땅히 끊어야 할 장애를 능히 끊는 것을 말한다. 해탈도(解脫道)라
  
  
  
63) 무학위는 모두 아라한과를 획득한 자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최상의 과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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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마땅히 끊어야 할 장애로부터 해탈하고 나서 최초로 생겨나는 도를 말한다. 그리고 승진도(勝進道)라고 하는 것은, 세 가지를 제외한 그 밖의 도를 말한다.
  '도(道)'의 뜻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열반에 이르는 길[路]이라는 뜻이니, 이를 타고 능히 열반이라는 성(城)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다시 도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찾아 구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니, 이것에 의해 열반이라는 과실(果實)을 찾아 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탈과 승진을 어떻게 '도'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인가?
  도와 종류가 동일하여 상위의 품류를 일으키기 때문이다.64) 혹은 앞의 힘에 의해 뒤의 단계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며, 혹은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으로 능히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는 도를 통행(通行, pratipad)이라는 명칭으로 건립하고 있으니, [4제에 대해] 능히 잘 통달하여 열반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통행에는 몇 가지가 있으며, 그것은 무엇에 근거하여 건립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통행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낙통행은 근본정려에 의한 것이고
  고통행은 그 밖의 지에 의한 것으로
  느림과 빠름은 둔근과 이근이다.
  通行有四種 樂依本靜慮
  苦依所餘地 遲速鈍利根
  
  논하여 말하겠다. 경에서는 통행에 모두 네 종류가 있다고 설하고 있으니,
  
  
  
64) 이는 가행·무간도와 마찬가지로 보다 향상된 단계로 향하는 것으로, 하품의 해탈·승진도는 중품의 가행·무간도를 낳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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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는 고지통행(苦遲通行)이며, 둘째는 고속통행(苦速通行)이며, 셋째는 낙지통행(樂遲通行)이며, 넷째는 낙속통행(樂速通行)이다.65)
  근본 4정려에 의해 생겨난 도를 '낙통행'이라고 이름하니, 선정의 갈래[支]를 섭수하고, 지(止)와 관(觀)이 평등하여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66)
  무색정과 미지정과 중간정에 의해 생겨난 도를 '고통행'이라고 이름하니, 선정의 갈래를 섭수하지 않고, 지(止)와 관(觀)이 평등하지도 않아 어렵고 힘들게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67) 이를테면 무색정에서는 '관'이 감소하고 '지'가 증가하며, 미지정과 중간정에서는 '관'이 증가하고 '지'가 감소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낙(樂)과 고(苦)의 두 가지 통행 중에서 둔근을 '느린 것[遲]'이라 이름하고, 이근을 '빠른 것[速]'이라고 이름하였다. 즉 고·낙의 두 가지 행이 경계(즉 4제)를 통달하는 것이 느리기 때문에 '지통'이라 이름한 것이며, 이와 반대되는 것을 '속통'이라 이름하였다. 혹은 느린 둔근자가 일으킨 통행을 일컬어 '지통행'이라 하였으며, 빠른 이근자는 이와 반대이다.
  
  도(道)를 일컬어 또한 역시 보리분법(菩提分法)이라고도 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으며, 그 명칭의 뜻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65) 즉 통행을 이러한 네 가지로 구별하는 것은, 그것이 어떠한 지(地)와 근기에 근거한 것인가에 따른 것 이다.
66) 근본정려에는 열여덟 가지의 정려지(支)를 갖추고 있으며(제1·제3정려의 각 5지와 제2·제4정려의 각 4지, 본론 권28, p.1281 참조), 관지(觀智)와 정심(定心)이 평등하기 때문에, 그것에 의해 생겨난 도는 마치 배를 타고 강을 내려가는 것처럼 인위적인 노력 없이 저절로 일어나기 때문에 '낙통행'이라 한다. 그러나 그 밖의 정려에 의해 일어난 도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고통행'이라고 하는 것이다.(후술)
67) 비록 도 자체는 괴로움이 아니지만, 이러한 등지는 희(喜)·낙(樂) 등의 5지와 4지를 섭수하지 않고 고수(苦受)와 상응하고, '지'와 '관'이 갖추어져 있을지라도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일이 있어 어렵고 힘들게 일어나기 때문에 역시 '고'라고 일컬은 것으로, 마치 육로를 걸어서 가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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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분(覺分)에는 서른일곱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4념주 등이 그것으로,
  '각'이란 진지와 무생지를 말하며,
  이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분'이라 이름하였다.
  覺分三十七 謂四念住等
  覺謂盡無生 順此故名分
  
  논하여 말하겠다. 경에서 각분(覺分)에는 서른일곱 가지가 있다고 설하고 있으니, 이를테면 4념주(念住)와 4정단(正斷)과 4신족(神足)과 5근(根)과 5력(力)과 7등각지(等覺支)와 8성도지(聖道支)가 바로 그것이다.68)
  진지와 무생지를 설하여 '각'이라 이름하였는데, 깨달은 자의 차별에 따라 세 가지 보리를 설정하니, 첫째는 성문의 보리이며, 둘째는 독각의 보리이며, 셋째는 무상(無上, 즉 대각)의 보리이다. 즉 이러한 두 가지 지(智)는 무명(無明)과 수면(睡眠)을 모두 영원히 끊는 것이기 때문에, 아울러 자기가 지어야 할 일을 이미 지어 다시는 짓지 않는다는 것을 참답게 아는 것이기 때문에 '각'이라 이름한 것으로, 서른일곱 가지의 법은 이 같은 보리에 따르고 보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보리분법'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러한 서른일곱 가지 법의 본질[體]은 각기 다른 것인가?
  
  
  
68) 권제26 제694경(대정장2, p.188중). 이러한 37도지(道支, 혹은 助道品)의 명칭은 같은 경 권제26∼28에 상설된다. (1) 4념주 : 신(身)·수(受)·심(心)·법념주(본론 권제23, p.1033 참조). (2) 4정단 (또는 正勤) : 이미 일어난 악법을 끊는 단단(斷斷). 계율을 수지하여 아직 생겨나지 않은 악법을 생겨나지 않게 하는 율의단(律儀斷). 바른 도를 닦아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선법을 생겨나게 하는 수단(修斷). 이미 생겨 난 선법을 지속하고 증장시키려고 노력하는 수호단(隨護斷). (3) 4신족(또는 如意足) : 선정은 신통 미묘한 공덕을 획득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에 '신족'이라 한 것으로, 뛰어난 삼매를 획득하려고 원하고[欲], 노력·정 진하고[勤], 마음을 능히 잘 다스리고[心], 지혜로써 사유·관찰하는 것[觀]. (4)(5) 5근·5력 : 신(信)·정 진(精進)·염(念)·정(定)·혜근[慧]. (6) 7각지 : 택법(擇法)·정진(精進)·희(喜)·경안(輕安)·염(念)·정 (定)·사각지(捨覺支). (7) 8성도지 :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 ·정업(正業)·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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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것의 실제적 본질은 열 가지뿐이니
  이를테면 혜(慧)·근(勤)·정(定)·신(信)·
  염(念)·희(喜)·사(捨)·경안(輕安)과
  아울러 계(戒)와 심(尋)을 본질로 한다.
  此實事唯十 謂慧勤定信
  念喜捨輕安 及戒尋爲體
  
  논하여 말하겠다. 이러한 각분의 명칭은 비록 서른일곱 가지이지만, 그것의 실제적 본질[事]은 오로지 열 가지뿐이니, '혜'와 '근' 등이 바로 그것이다. 즉 4념주(念住)와 혜근(慧根)·혜력(慧力)·택법각지(擇法覺支)·정견(正見)은 혜(慧)를 본질로 하며, 4정단(正斷)과 정진근(精進根)·정진력(精進力)·정진각지(精進覺支)·정정진(正精進)은 근(勤)을 본질로 하며, 4신족(神足)과 정근(定根)·정력(定力)·정각지(定覺支)·정정(正定)은 정(定)을 본질로 하며, 신근(信根)과 신력(信力)은 신(信)을 본질로 한다. 염근(念根)과 염력(念力)과 염각지(念覺支)와 정념(正念)은 염(念)을 본질로 하며, 희각지(喜覺支)는 희(喜)를 본질로 하며, 사각지(捨覺支)는 행온에 포섭되는 사(捨)를 본질로 하며, 경안각지(輕安覺支)는 경안을 본질로 한다. 그리고 정어(正語)와 정업(正業)과 정명(正命)은 계(戒)를 본질로 하며, 정사유(正思惟)는 심(尋)을 본질로 한다.
  이와 같이 각분의 실제적인 본질은 오로지 열 가지뿐이지만, 신(信) 등의 5근이나 5력상에 다시 희(喜)와 사(捨)와 경안(輕安)과 계(戒)와 심(尋)을 더한 것이 [37각분이다].69)
  
  
69) 즉 신(信)·정진(精進)·염(念)·정(定)·혜(慧)의 5근이 경계의 차별에 따라 서른 가지로 나누어, 여 기에 다시 희·사·경안·계(정어·정업·정명)·심을 더한 것이 37각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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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설하기를, "각분의 본질은 열한 가지이니, 신업과 어업은 서로 뒤섞이지 않기 때문에 계는 두 가지로 나뉘며, 그 밖의 아홉 가지는 앞에서와 같다"고 하였다.70)
  염주 등의 세 가지 명칭은 [열 가지 본질에] 별도로 소속되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유독 혜(慧)와 근(勤)과 정(定)을 본질로 한다고 설한 것인가?71)
  게송으로 말하겠다.
  
  네 가지 염주와 정단과
  신족은 두드러진 것에 따라
  혜·근·정이라고 설하였으나
  실제로는 온갖 가행선이다.
  四念住正斷 神足隨增上
  說爲慧勤定 實諸加行善
  
  논하여 말하겠다. 4념주 등 세 가지 품류의 선법 자체는 실제로는 온갖 가행선을 두루 포섭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동일한 품류 중의 두드러진 증상(增上)의 선근에 따라 순서대로 혜(慧)와 근(勤)과 정(定)을 본질로 한다고 설하였다.
  어떠한 연유에서 '혜'에 대해 염주라는 명칭을 설정한 것인가?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이와 같이 설하고 있다. "혜는 염의 힘에 의해 유지되고, [소연의 경계에] 머물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치상으로는 실로 '혜'가 염으로 하여금 대상(즉 4제)에 머물게 하는 것으로, 참답게 본 자가 능히 분명하게 기억하기 때문이니, 염주를 설하
  
  
  
70) 『대비바사론』 권제96(한글대장경121, p.468-469)에 의하면, 37보리분법의 본질은 열한 가지 혹은 열 두 가지이며, 열 가지라는 주장은 유설(有說)로 언급되고 있다.
71) 4념주·4정단·4신족 중에는 특별히 열 가지 실제적 본질에 소속될 만한 것이 없는데, 어째서 염주를 혜에 배당하고, 정근을 '근'에, 신족을 '정'에 배당한는 것인가 하는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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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중에 이미 널리 성립시킨 바와 같다.72)
  어째서 '근(勤)'을 설하여 정단의 본질이라 일컬은 것인가?
  올바로 단수(斷修)를 수습하는 단계에서 이러한 '근'의 힘이 능히 해태(懈怠)를 끊기 때문이다.73) 혹은 정단을 정승(正勝)이라고도 이름하는데, 신(身)·어(語)·의(意)를 올바로 임지(任持)하고서 채찍질하는 것 가운데 이것이 가장 뛰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연유에서 '정(定)'에 대해 신족이라는 명칭을 설정한 것인가?
  신령스럽고 미묘한 온갖 공덕의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다.74)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신(神)'은 바로 선정을 말하며, '족(足)'은 욕(欲) 등을 말한다"고 하였다.75) 그러나 그럴 경우 그는 마땅히 각분의 본질에 열세 가지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니, '욕(欲)'과 '심(心)'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경설에도 위배된다. 즉 계경에서 말하기를, "나는 지금 그대를 위해 신족 등에 대해 설할 것이니, '신'이란 여러 신통의 경계[神境]를 수용하여 하나를 나누어 여럿으로 만드는 것……(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을 말하며,76) '족'이란 욕(欲) 등에 의해 일어난 네 가지 삼마지를 말한다"고 하였다. 즉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선정의 결과를 설하여 '신'이라 일컬었으며, 욕 등에 의해 생겨난 등지(等持)를 '족'이라 일컫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연유에서 신(信) 등에 대해 앞에서는 '근(根)'이라 설하였으면서 뒤
  
  
  
72) 본론 권제23(p.1035) 참조.
73) 이생(已生)·미생(未生)의 악과 선을 힘써 끊고 닦을 때, 근(勤)의 심소가 뛰어난 힘을 갖고서 끊고 닦는 것을 게을리 하는 해태를 지금 바로 끊기 때문에 '정단'이라 이름하였다는 뜻.
74) 선정은 능히 변화하는 마음 등을 일으켜 온갖 신통한 불가사의한 경계[神]를 조작하는 근거[足]가 되 기 때문에 '신족'이라 이름한 것이다.
75) 선정은 신통변화의 부사의한 묘용(妙用)을 나타내기 때문에 '신(神)'이라 일컬은 것이며, 뛰어난 삼매 를 획득하려고 원하고[欲], 노력·정진하고[勤], 마음을 다스리고[心], 지혜로써 사유·관찰하는 것[觀]은 그 러한 선정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족(足)'이라 일컬었다는 뜻. 즉 유부 비바사사는 선정이 신령스러운 공덕[ 能變化心]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이러한 네 가지 법을 '신족'이라고 한 데 반해 유여사는 신통변화인 선정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일컬은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76) 신통의 경계, 즉 신경(神境)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27(p.1247)의 6통(通) 중 신경지증통(神境智證通)과 p.1255의 설명을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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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서는 '역(力)'이라고 일컬은 것인가?
  이러한 다섯 가지 법은 하품과 상품에 따라 전자와 후자로 나뉘기 때문이다. 또는 굴복할 수 있는 것과 굴복할 수 없는 것에 의거하였기 때문이다.77)
  '신' 등은 어떠한 연유에서 이와 같은 순서로 설해진 것인가?
  이를테면 인과에 대해 먼저 신심(信心)을 일으킨 이는 결과를 얻기 위해 원인을 닦아야 하므로 다음으로 정진을 일으킨다. 정진으로 말미암아 염(念)은 소연에 머물게 되고, 염의 힘으로 말미암아 마음은 바로 선정을 획득하게 되며, 마음이 선정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능히 참답게 아는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신' 등의 순서가 이와 같은 것이다.
  
  응당 말해 보아야 할 것이니, 어떠한 단계에서 어떠한 각분이 증가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초업위(初業位)와 순결택분
  그리고 수도위와 견도위에서
  염주 등의 7품이 순서대로
  증가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初業順決擇 及修見道位
  念住等七品 應知次第增
  
  논하여 말하겠다. 처음으로 업을 닦는 단계에서는 능히 신(身) 등의 네 경계를 자세하게 비추어 아니, 혜(慧)의 작용이 뛰어나기 때문에 염주(念住)가 증가한다고 설한다.78)
  
  
77) 5근이나 5력은 다 같이 신(信)·근(勤)·염(念)·정(定)·혜(慧)이지만, 하품의 그것을 '근'이라 하고 , 상품의 그것을 '역'이라 하였다. 혹은 굴복될 수 있을 정도로 저열한 그것을 '근'이라 하고, 굴복될 수 없 을 정도로 견고한 그것을 '역'이라 이름하였다. 즉 하품의 '신' 등은 그 세력이 저열하기 때문에 대치되는 것 과 동류로서 굴복될 수 있는 것이며, 상품의 그것은 이와 반대되기 때문에 두 가지 도로 구분하게 된 것이다.
78) 처음으로 업을 닦는 단계[初修業位]란 순결택분(즉 4선근) 이전 단계인 별상념주와 총상념주로서, 신( 身)·수(受)·심(心)·법(法)을 밝혀 그 자상과 공상을 요지(了知)하기 때문에 혜의 작용이 가장 뛰어난 염주 가 현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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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법(煖法)의 단계에서는 [이전과는] 다른 품류의 수승한 공덕을 능히 증득하니, 근(勤)의 작용이 뛰어나기 때문에 정단(正斷)이 증가한다고 설한다.79)
  정법(頂法)의 단계에서는 능히 수승한 선근을 지니고 물러남이 없는 단계로 나아가니, 선정의 작용이 뛰어나기 때문에 신족(神足)이 증가한다고 설한다.
  인법(忍法)의 단계에서는 필시 물러나 [악취에] 떨어지지 않으니, 선근이 견고하여 증상(增上)을 획득하기 때문에 5근이 증가한다고 설한다.
  세제일법의 단계에서는 번뇌와 세속법(즉 이생법)에 의해 능히 굴복당하지 않으니, 굴복됨이 없는 힘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5력이 증가한다고 설한다.
  수도의 단계에서는 보리(菩提), 즉 깨달음의 단계에 가까워 깨달음을 돕는 작용이 뛰어나기 때문에 각지(覺支)가 증가한다고 설한다.
  견도의 단계는 빠르게 일어나고 통행(通行)이 뛰어나기 때문에 도지(道支)가 증가한다고 설한다. 그리고 계경에서 7각지를 먼저 설하고 8성도지를 나중에 설한 것은 수(數)의 증가에 따른 것으로, 수습(修習)의 순서에 따른 것이 아니다.80)
  그리고 8도지 중의 정견은 바로 도(道)이자 역시 도지(道支)이지만, 그 밖의 나머지는 도지일 뿐 도는 아니다. 또한 7각지 중 택법은 바로 각(覺)이자 역시 각지(覺支)이지만, 그 밖의 나머지는 각지일 뿐 각은 아니다.81) 비바사사(毘婆沙師)의 설은 이상과 같다.
  
  
79) 즉 난법위에서는 생사의 허물과 열반의 공덕을 관찰하여 마침내 용맹 정진함으로써 생사에 떨어지지 않고 신속하게 열반으로 나아가게 되므로 근(勤)의 작용이 뛰어나다고 한 것이다.
80) 『잡아함경』 권제24 제628경(대정장2, p.176하), 동 권제26 제648경(동p.186하)에서 37보리분법을 4 념주·4정단·5근·7각지·8성도지의 순으로 설한 것은 법수(法數)의 증가에 따른 것으로, 만약 닦는 순서에 따라 설한 것이라면 견도에서 8성도지를 닦고 수도에서 7각지를 닦기 때문에 두 가지의 순서가 바뀌어야 한다 는 뜻.
81) 즉 8성도지 중 정견은 바로 견도인 동시에 견도위에서 닦는 8성도지 한 갈래[支]이며, 7각지 중 택법 은 깨달음인 동시에 깨달음에 이르는 한 갈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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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유여사는 이러한 37각분의 순서에 대해 계경에서 설한 순서를 허물어뜨리지 않고 염주 등을 설정하였다. 이를테면 수행자가 장차 수행을 하고자 할 때 여러 경계로 그 마음이 내달려 산란되기 때문에 먼저 염주를 닦아 그 마음을 억제하고 굴복시켜야 한다. 그래서 계경에서도 말하기를, "이러한 4념주는 능히 경계에 그 마음을 계박(繫縛)시키며, 아울러 탐기(貪嗜)의 소의가 되는 염(念)을 바로 제거한다"고 하였다.82) 그렇기 때문에 제일 먼저 4념주를 설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염주의 세력에 의해 근(勤)이 마침내 증장하여 네 가지 일을 성취하기 위해 마음을 채찍질하여 임지하니,83) 그렇기 때문에 정단(正斷)을 두 번째로 설하게 된 것이다. 정진으로 말미암아 근심과 후회의 마음이 없어지고 능히 뛰어난 선정을 닦고 다스릴 수 있으니, 그렇기 때문에 신족(神足)을 세 번째로 설한 것이다. 뛰어난 선정을 근거로 하여 신(信) 등으로 하여금 출세간법의 증상연이 되게 하니, 이에 따라 5근을 네 번째로 설하게 된 것이다. 근이 이미 성립하여 대치될 [번뇌의] 현행을 능히 바로 제거하고 성법을 이끌어 낳게 되니, 이에 따라 5력을 다섯 번째로 설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견도위에 각지(覺支)를 건립하니, 거기서 4성제를 참답게 깨달아 알기 때문이다. 두 계위 모두에 도지(道支)를 건립하니, 다 같이 바로 열반의 성(城)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곧 계경에서 "8도지를 닦아 원만해진 자는 4념주 내지 7각지의 경우도 역시 닦아 원만해진다"고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84) 또한 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필추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참다운 말[如實語]을 베푸는 것을 4성제를 설하는 것에 비유하며, 본래의 길[本路]로 신속하게 나아가는 것을 8성도지를 수습하는 것에 비유한
  
  
82) 『중아함경』 권제52 「조어지경(調御地經)」(대정장1, p.758중). "이러한 4념처는 현성(賢聖)의 제자 마음속에 있으면서 세속[家]을 즐겁다고 하는 생각을 다스리고, 세속의 욕망을 제거하며, 세속의 피로함을 쉬 게 하여 정법(正法)을 즐기게 하고 성계(聖戒)를 닦게 한다."
83) 네 가지 일이란 이미 생겨난 악법은 끊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악법은 생겨나지 않게 하며, 이미 생겨 난 선법은 증장시키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선법을 생겨나게 하는 것.
84) 『잡아함경』 권제13 제305경(대정장2, p.87하), "八聖道修習滿足已四念處修習滿足. 四正勤四如意足五 根五力七覺分修習滿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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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85) 따라서 8도지는 두 가지 계위 모두에 근거하여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각분(覺分)이 증가하는 단계에 따라 그 순서도 이미 그러하다는 사실에 대해 논설하였다.
  이치상 실로 마땅히 말해 보아야 할 것이니, 이러한 서른일곱 가지 각분 중의 몇 가지가 유루와 통하고, 몇 가지가 무루와 통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7각지와 8도지는
  한결같이 무루이며,
  4의 세 가지와 5근·5력은
  두 종류 모두와 통한다.
  七覺八道支 一向是無漏
  三四五根力 皆通於二種
  
  논하여 말하겠다. 이 가운데 7각지(覺支)와 8성도지(聖道支)는 오로지 무루일 뿐이니, 이것은 바야흐로 오로지 수도위와 견도위 중에만 건립되기 때문이다. 세간에도 역시 정견 등의 법이 존재하지만,86) 그것은 성도지라는 명칭을 획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밖의 각분은 두 가지(유루·무루) 모두와 통한다.
  
  이러한 37각분은 어떠한 지(地)에 몇 가지가 존재하는 것인가?
  
  
  
85) 『잡아함경』 권제43 제1175경(대정장2, p.315하), "如實言者謂四眞諦, 復道還者以八聖道." 여기서 ' 본래의 길'이란 모든 부처가 수행하였던 길이라는 뜻으로, 이는 곧 8성도지가 견·수 양도에 통한다는 사실의 교증이다.
86) 이러한 경우를 고려하여 『대비바사론』 권제95(한글대장경121, p.455)에서는 '7각지 뒤에 8도지를 분 별하였으면, 그것은 오로지 무루이지만, 7각지 앞에 8도지를 분별하였으면 유루와 무루 모두와 통한다'고 논 설하고 있다. 즉 37각분에서 8성도지는 언제나 7각지 뒤에 설해지고 있기 때문에 오로지 무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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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송으로 말하겠다.
  
  초정려에는 모두가 존재하며
  미지정에는 희근이 제외되고
  제2정려에는 심(尋)이 제외되며
  제3·제4정려와 중간정에는 두 가지가 제외된다.
  初靜慮一切 未至除喜根
  二靜慮除尋 三四中除二
  
  앞의 세 무색정의 단계에는
  계(戒)와 앞의 두 종류가 제외되며
  욕계와 유정지에 있어서는
  각지와 도지가 제외된다.
  前三無色地 除戒前二種
  於欲界有頂 除覺及道支
  
  논하여 말하겠다. 초정려 중에는 서른일곱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다.
  미지정의 단계에는 희각지(喜覺支)가 제외되니, 근분지에서의 도는 갖은 힘을 다하여야 일어나기 때문이며,87) 하지의 법에서는 아직 의심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제2정려에는 정사유(正思惟)가 제외되니, 그러한 정려 중에는 이미 심(尋)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러한 두 지(미지정과 제2정려)에는 각기 서른여섯 가지의 각분이 존재하는 것이다.
  제3·제4정려와 중간정에는 각기 '희(喜)'와 '심(尋)'을 제외한 서른다섯 가지 각분이 존재한다.
  
  
  
87) 이는 논주 세친의 설(『현종론』 권제34에서는 有說)로서, 근분지에서는 힘을 다하여 도를 일으키기 때문에 희수(喜受)가 없으며, 미지정에는 하지와 인근하여 하지의 번뇌에 의해 장애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있기 때문에(즉 信을 갖지 않기 때문에), 힘을 다하여 도를 일으켜도 안심이 되지 않기 때문에 희각지가 없다 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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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의 세 무색정에는 각기 계(戒)의 세 갈래를 제외하고,88) 아울러 '희'와 '심'을 제외한 서른두 가지 각분이 존재한다.
  그리고 욕계와 유정지에는 각기 7각지와 8도지를 제외한 스물두 가지의 각분만이 존재하는데, 거기에는 무루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각분이 일어날 때 반드시 증정(證淨)을 획득하게 되는데,89) 여기에는 몇 가지의 종류가 있으며, 어떠한 단계에 근거하여 획득되는 것인가? 또한 그것의 실제적 본질은 어떠한 법이며, 유루인가, 무루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증정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불·법·승과 계(戒)로서
  세 가지 제(諦)를 관찰할 때 '법'과 '계'를 획득하며
  도제를 관찰할 때 아울러 '불'과 '승'을 획득한다.
  證淨有四種 謂佛法僧戒
  見三得法戒 見道兼佛僧
  
  법이란 세 가지 제(諦) 전부와
  보살과 독각의 도를 말하는데
  신(信)과 계 두 가지를 본질로 하는
  네 증정은 모두 오로지 무루이다.
  法謂三諦全 菩薩獨覺道
  信戒二爲體 四皆唯無漏
  
  논하여 말하겠다. 경에서는 증정(證淨)에 모두 네 종류가 있다고 설하고
  
  
  
88) 계의 세 갈래[支]란 계를 본질로 하는 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으로, 아래 세 무색정에는 색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세 가지 업도 없는 것이다.
89) 4제의 이치를 증득함으로써 불·법·승 3보와 계(戒)에 대한 청정한 무루의 믿음[信]을 낳게 되는데, 이를 증정(證淨, avetyaprasada)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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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으니,90) 첫째는 불(佛)에 대한 증정이며, 둘째는 법(法)에 대한 증정이며, 셋째는 승(僧)에 대한 증정이며, 넷째는 성계(聖戒)에 대한 증정이다.
  바야흐로 견도위에서 세 가지 제(諦, 고제·집제·멸제)를 관찰할 때, 각각의 단계에서 오로지 '법'과 '계'의 증정을 획득하며, 도제를 관찰하는 단계에서는 그것과 아울러 '불'과 '승'의 증정을 획득한다.91) 즉 그 때에는 아울러 부처를 성취하는 온갖 무학법과 성문승(聲聞僧)을 성취하는 온갖 유학과 무학법에 대해서도 역시 증정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아울러'라고 하는 말은 도제를 관찰할 때 역시 또한 '법'과 '계'에 대한 증정도 획득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믿음의 대상이 되는 법에는 간략히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개별적인 것[別]이며, 둘째는 전체적인 것[總]이다. 전체적인 것이란 4제와 통하는 것이고, 개별적인 것이란 오로지 세 가지 제 전부와 보살과 독각의 도를 말한다. 따라서 4제를 관찰할 때에는 모두 법증정을 획득하며,92) 성자에 의해 애호되는 계(戒)도 현관(現觀)과 구기하기 때문에 모든 때에 역시 또한 획득되지 않는 일이 없다.
  나아가 믿음의 대상이 다르기 때문에 그 명칭에 네 가지가 있는 것이지만, 실제적 본질[實事]에는 오로지 두 종류만이 있을 뿐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즉 불(佛) 등의 세 가지 증정은 신(信)을 본질로 하며, 성계(聖戒)의 증정은 계를 본질로 하기 때문에 오로지 두 가지 종류만이 있다고 한 것이다.
  
  
  
90) 『잡아함경』 권제30 제833-836경(대정장2, p.214상중). 여기서는 불괴정(不壞淨)이라는 말로 설하고 있다. 구역어는 증해정신(證解淨信).
91) 견도위에서 고제·집제·멸제를 증득할 때는 무루심이 구기하여 그러한 3제의 이치를 믿게 되는데, 이 러한 믿음을 법증정이라고 하며, 그러한 무루도에는 반드시 수심전의 도구계(道俱戒)가 구기(俱起)하니, 이를 계증정이라고 한다. 또한 도제를 관찰할 때, 그러한 무루혜는 불신(佛身) 중의 온갖 무루·무학법을 관찰하여 무루의 믿음을 일으키며, 승가 중의 유학·무학법을 관찰하여 그것을 독실히 믿기 때문에 앞의 두 증정에다 다시 불증정과 승증정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92) 법증정에 있어 법이란, 전체적으로 말하면 4제 전부이지만, 개별적으로 말하면 고·집·멸의 3제 전부 와 네 번째 도제 중의 보살도(미지당지근과 이지근 등의 학법)와 독각도(미지근과 이지근의 학법과 구지근 등 의 무학법)로서, 보살과 독각은 각기 독자적으로 출세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승증정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다. 참고로 승가의 최소한 구성 인원은 4인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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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은 네 종류의 증정은 오로지 무루이니, 유루의 법은 증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뜻에 근거하여 '증정'이라는 명칭을 설정한 것인가?
  참답게 4성제의 이치를 깨달아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일컬어 '증(證)'이라고 하였으며, 삼보와 미묘한 시라(尸羅)를 지금 바로 믿는 것을 모두 '청정함[淨]'이라고 말하였으니, 불신(不信)의 더러움[垢]과 파계(破戒)의 더러움을 떠난 것이기 때문이다. 곧 청정함을 증득하였기 때문에 '증정'이라는 명칭을 건립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네 가지는 현관에서 나올 때 현기(現起)하는 순서와 같으니,93) 그래서 현관 내의 순서가 이와 같다고 설한 것이다.
  출관(出觀)할 때 현기하는 순서는 어떠한가?
  이를테면 출관하는 단계에서 먼저 세존이 바로 정등각(正等覺)임을 믿게 되고, 다음으로 정법(正法)과 비나야(毘奈耶)에 대해 그것이 선설(善說)임을 믿게 되며, 그 뒤에 성승(聖僧)이 바로 미묘한 행자임을 믿게 된다. 이는 곧 삼보는 마치 좋은 의사와 같고, 좋은 약과 같으며, 좋은 간병인과 같다고 믿는 것이고, 그래서 마음이 청정해졌기 때문에 청정한 시라(尸羅, 곧 무루의 道俱戒)를 낳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라를 네 번째로 설하게 된 것이다. 요컨대 청정한 믿음을 갖출 때 이러한 시라가 바야흐로 현전하니, 마치 세 가지 인연(좋은 의사와 약과 간병인)을 만날 때 병이 비로소 제거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혹은 이 네 가지 종류는 마치 길을 인도하는 이[導師]와 도로와 상인과 탈 것과도 같다.
  
  경에서 말하기를, "유학위에서는 8지(支)를 성취하고, 무학위에서는 10지를 모두 성취한다"고 하였다.94) 어떠한 연유에서 유학위 중에는 정해탈(正解
  
  
93) 4증정은 4제의 현관(現觀)으로부터 출관할 때 행자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믿음의 순서에 의한 것으로, 먼저 불·세존이 정등각임을 믿고, 다음으로 정법과 비나야가 선설(善說)임을 믿으며, 성승(聖僧)이 미묘한 행자임을 믿을 때 마음이 청정해져 청정한 시라(즉 무루의 도공계)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94) 『중아함경』 권제49 「성도경(聖道經)」(대정장1, p.736중). 여기서 8지(支)란 8성도지를 말하며, 10 지란 여기에 정해탈(正解脫)과 정지(正智, 유위와 무위의 두 해탈을 아는 진지와 무생지)를 더한 것을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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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脫)이 존재하고 아울러 정지(正智)가 존재한다고 설하지 않은 것인가? 나아가 정해탈과 정지의 본질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유학에는 계박이 남아 있기 때문에
  정해탈과 정지의 갈래가 없는 것으로
  해탈에는 유위와 무위가 있으니
  말하자면 승해와 번뇌의 멸이 바로 그것이다.
  學有餘縛故 無正脫智支
  解脫爲無爲 謂勝解惑滅
  
  유위의 무학해탈의 갈래인
  두 가지의 해탈은 바로 해탈온이며
  정지는 각분에서 설한 바와 같으니
  진지와 무생지를 말한다.
  有爲無學支 卽二解脫蘊
  正智如覺說 謂盡無生智
  
  논하여 말하겠다. 유학위 중에는 여전히 계박이 남아 있어 아직 해탈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해탈의 갈래[支]가 없는 것으로, 약간의 계박을 떠났다고 해서 해탈자라고는 이름할 수 없으며, 해탈의 본질[體]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해탈지(解脫智, 즉 정견)의 갈래도 설정할 수 없다. 그러나 무학은 이미 모든 번뇌의 계박에서 벗어났고, 또한 능히 해탈을 아는 두 가지 지(智)를 일으키니,95) 두 가지 지가 드러남으로 말미암아 두 가지 갈래(정지와 정해탈)를 설정할 수 있지만, 유학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8지(支)의 성도만을 성
  
  
95) 여기서 두 가지 지(智)란 유위와 무위의 두 해탈을 아는 지로서, 진지와 무생지를 말한다. 이러한 두 가지 지가 바로 정지지(正智支)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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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하는 것이다.
  즉 해탈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유위와 무위가 바로 그것이다.96) 유위해탈이란 무학의 승해를 말하며, 무위해탈은 일체의 번뇌가 소멸한 것을 말한다. 그리고 유위해탈을 무학의 갈래[無學支]라고도 이름하는데, '갈래'라고 하는 말은 유위에 근거하여서만 설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97) [유위의 무학해탈의] 갈래에 포섭되는 해탈에는 다시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98) 또 다른 경에서는 그것을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이라고 하였다.99) 이러한 두 가지는 바로 해탈온(蘊)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마땅히 계경 중에서 이같이 설하지 않았어야 한다. 즉 "무엇이 해탈의 청정함이고 최상의 수승함인가? 이를테면 마음이 탐(貪)으로부터 이염(離染) 해탈하고, 진(瞋)과 치(癡)로부터 이염 해탈하며, 이 같은 해탈온이 원만하지 않으면 원만하게 하기 위해, 이미 원만한 것은 섭수하기 위해 욕(欲)과 근(勤) 등을 닦는 것이다."100)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해탈온이란] 무엇인가?
  유여사는 설하기를, "진지(眞智)의 힘에 의해 탐·진·치를 끊는 것, 즉
  
  
  
96) 무위해탈은 택멸을 본질로 하는 것으로, 불변부동이기 때문에 '무위'라고 한 것이며, 유위해탈은 그러 한 무위해탈을 획득하게 하는 승해를 본질로 하는 것으로, 부동이 아니기 때문에 '유위'라고 한 것이다.
97) 유위해탈에는 유학과 무학의 두 가지가 있다. 즉 7성신(聖身, 예류향 내지 아라한향)의 유위해탈을 유 학해탈이라고 하며, 제8 아라한과의 유위해탈을 무학해탈이라고 하는데, 일체의 번뇌를 소멸한 무위해탈에는 더 이상 갈래[支]의 작용이 없기 때문에 오로지 유위 중의 무학해탈에만 해탈의 갈래를 설정할 수 있는 것이 다.
98) 무학에는 시(時)해탈과 불시(不時)해탈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99) 『잡아함경』 권제8 제211경(대정장2, p.53중), "……亦當不久得盡諸漏, 無漏心解脫慧解脫, 現法自知 作證. '我生已盡 梵行而立 所作已作.' 自知不受後有." 여기서 심해탈은 심왕과 상응하는 승해를, 혜해탈은 혜 와 상응하는 승해를 본질로 하는 것으로서, 이 두 가지 승해는 5분법신(分法身) 중의 해탈온에 포섭된다.
100) 『잡아함경』 권제21 제565경(대정장2, p.148하-149상), "如來應等正覺說四種淸淨. 戒淸淨心淸淨見淸 淨解脫淸淨.……云何爲解脫淸淨斷? 謂聖弟子貪心無欲解脫, 瞋恚心無欲解脫. 如是解脫未滿者令滿, 已滿者隨順 攝受, 欲精進乃至常攝受. 是名解脫淨斷苦種."즉 경에서 해탈의 청정 수승함은 마음이 탐 등으로부터 이염 해 탈한 것이라고 하였을 뿐 승해라고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탈온의 본질은 승해가 아니라 마음이라는 힐난으 로, 이는 경부 혹은 경부여사(餘師)에 의해 제기된 힐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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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이 번뇌의 더러움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일컬어 해탈온이라고 한다."101)
  이와 같이 정해탈의 본질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정지(正智)의 본질은 앞의 각분에서 설한 바와 같으니,102) 이를테면 앞에서 설한 진지와 무생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무학의 심해탈은 마음이 어떠한 순간[世]에 있을 때에 바로[正] 해탈을 획득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학의 마음이 생겨날 때,
  바로 장애로부터 해탈한다.
  無學心生時 正從障解脫
  
  논하여 말하겠다. 이를테면 본론(本論)에서 "최초의 무학의 마음이 미래에 생겨날 때 장애로부터 해탈한다"고 설한 바와 같다.103)
  무엇을 일컬어 장애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번뇌의 득(得)을 말하니, 그것은 능히 이러한 무학의 마음이 생겨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즉 금강유정(金剛喩定)이 바로 소멸하는 단계[正滅位]에서 그것의 득은 바로 끊어지고, 첫 번째 무학의 마음이 바로 생겨나는 단계[正生位]에서 해탈을 바로 획득하게 된다.104) 그리고 금강유정이
  
  
101) 여기서 유여사는 경부, 즉 유부가 무학의 정견(正見)·정지(正智)와 상응하는 승해를 유위해탈온의 본질이라고 한 데 반해 심소의 개별적 실재성을 부정하는 경부에서는 마음을 그것의 본질이라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102) 37각분에서 이를 보리(菩提)라고 이름하였으나, 여기서는 그것을 '정지'라고 이름한 것일 뿐이다.
103) 『발지론』 권제1(한글대장경176, p.23), "어떠한 마음이 해탈하는가? 과거의 것인가, 미래의 것인가 , 현재의 것인가?…… 미래에 무학의 마음이 생겨날 때 모든 장애로부터 해탈한다." 여기서 최초의 무학의 마 음이란 무학의 첫 찰나의 진지(盡智)를 말한다. 즉 그것이 미래 생상위(生相位)에 있을 때 장애로부터 해탈하 는 것을 일컬어 '정(正)해탈'이라고 한다는 뜻. 참고로 그것의 현재세를 '이(已)해탈'이라고 한다.
104) 번뇌의 득이 생상위(生相位)에 이르지 않는 것을 '바로 끊어졌다[正斷]'고 하는 것으로, 바로 끊어졌 기 때문에 그것은 더 이상 무학의 첫 찰나의 마음을 장애하지 않는다. 곧 번뇌의 득과 구유(俱有)하지 않는 것을 '정(正)해탈'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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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소멸한 상태[已滅位]에서 그것의 득은 이미 끊어지고 첫 번째 무학의 마음이 이미 생겨난 상태[已生位]를 '이미 해탈한 것[已解脫]'이라고 이름한다. 나아가 아직 생겨나지 않은 무학의 마음이나 세속의 마음도 응당 그 때(즉 무학의 첫 찰나 마음의 生相位)에 이르면 역시 해탈한다고 말할 수 있다.105) 그렇지만 지금 여기서는 바야흐로 결정코 생겨나는 것(즉 생상위에 이른 것)만을 설한 것으로, 그 때에는 그것만이 현신(現身)과 현세(現世)로 행할 것이기 때문이다.106)
  온갖 세속의 마음은 무엇으로부터 해탈하는 것인가?
  역시 마음이 생겨나는 것을 방해하는 그 같은 장애(즉 번뇌의 득)로부터 해탈한다.
  이러한 세속의 마음은 아직 해탈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어찌 생겨나지 않을 것인가?
  이미 생겨나 있을지라도 지금의 경우와는 같지 않다.
  그것이 어떻게 같지 않은가?
  [세속의 마음은] 번뇌의 득과 함께하는 것이지만, [무학의 첫 찰나의 마음] 이후에 생겨난 그것이라면 번뇌의 득과 함께하는 일이 없다.
  
  그렇다면 도(道)는 어떠한 상태에서 그 같은 생장(生障) 즉 무학의 첫 찰나의 마음이 생겨나는 것을 장애하는 번뇌의 득을 끊어지게 하는 것인가?107)
  
  
105) 여기서 말하는 세속의 마음은 무학자가 미래에 낳을 세속의 선심을 말하는 것으로, 세속의 유루의 마 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106) 미생(未生)의 무학심도 세속심도 금강유정이 소멸하는 단계에 결정코 해탈할 것이지만, 그것은 아직 생상위에 이르지 않은 것이어서 결정적이지 못하다. 즉 미래 생상위에 이른 무학의 첫 찰나의 마음은 현재의 소의신과 시간에 드러나겠지만 그 밖의 마음은 생겨날 수도 있고 생겨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여기서 설 하지 않은 것이라는 뜻.
107) 즉 무학심의 생기를 장애하는 번뇌의 득을 끊는 것은 도(즉 금강유정)의 어떠한 상태인가 하는 물음. 금강유정은 그것의 현재의 장애만을 끊으며, 과거·미래의 장애는 끊지 않는다. 다시 말해 도가 능히 장애를 끊는 것은 바로 멸상(滅相)에 있을 때로서, 그 때 현재 번뇌의 득(得, 즉 법구득)을 쇠퇴하게 하여 그것이 더 이상 후찰나의 번뇌의 득을 인기하여 생상(生相)에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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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송으로 말하겠다.
  
  도는 오로지 바로 멸하는 상태에서
  능히 그것의 장애를 끊어지게 한다.
  道唯正滅位 能令彼障斷
  
  논하여 말하겠다. '바로 멸하는 상태[正滅位]'라고 하는 말은 현재에 머무는 것을 말하며, '바로 생겨나는 상태[正生位]'라고 하는 말은 미래세를 나타낸다. 따라서 도가 능히 장애를 끊는 것은 오로지 바로 멸할 때(즉 현재)이니, 그 밖의 다른 상태에서는 결정코 장애를 끊는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곧 해탈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상태[未生位]'와 통한다는 사실과는 같지 않으니,108) [해탈의 경우] 생겨난 것이든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이든 장애를 떠나는 것이 동일하기 때문이다.109)
  경에서 "3계란 이를테면 단(斷)·이(離)·멸(滅)의 계(界)를 말한다"고 하였다.110) 이것은 무엇을 본질로 하며, 그 차별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위해탈을 3계로 설한 것이니
  이계는 오로지 탐을 떠난 것이며
  단계는 그 밖의 결을 끊은 것이며
  
  
  
108) 미래 생상위(生相位)에 이른 해탈이 바로 '정해탈'이다.
109) 어떻게 아직 생겨나지 않은 해탈이 장애를 떠날 수 있다는 것인가? '바로 생겨나는 것[正生]'과 '생 겨난 것[已生]'의 장애가 동일하기 때문으로, 수로를 열 때 가까운 물이나 멀리 있는 물이나 모두 다 장애를 떠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능히 번뇌를 끊는 도가 소의신 중에 이미 생겨났다고 관찰하였으면, 역시 마땅 히 가까운 마음이나 멀리 있는 마음이 모두 다 해탈을 획득한다고 설할 수 있는 것이다. 혹은 최초로 무학의 마음을 바로 일으켜 그것의 생상을 바로 획득하였을 때를 '정해탈(正解脫)'이라고 이름하듯이 미래에 수습될 무루심 등도 그 생기를 획득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역시 해탈이라고 이름할 수 있다.(『현종론』 권제34, 앞의 책, p.449)
110) 『잡아함경』 권제17 제464경(대정장2, p.118중), 若斷界無欲界滅界, 是名諸解脫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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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멸계는 그것의 계박을 멸한 것이다.
  無爲說三界 離界唯離貪
  斷界斷餘結 滅界滅彼事
  
  논하여 말하겠다. '단(斷)' 등의 3계는 바로 앞에서 논설한 무위해탈을 [세 가지로] 나눈 것으로, 그것을 그 자체의 본질로 삼는다.111) 즉 이계(離界)라고 하는 것은 다만 탐결(貪結)을 떠난 것을 말하며, 단계(斷界)라고 하는 것은 그 밖의 결(8결)을 끊은 것을 말하며, 멸계(滅界)라고 하는 것은 탐 등의 수면에 의해 수증된 그 밖의 온갖 법[事]을 멸한 것을 말한다. 그래서 경에서 3계는 바로 무위해탈이라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러한 법이 능히 '싫어하는 것[厭]'이라면, 반드시 능히 '떠나는 것[離]'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싫어하는 것'은 고·집을 소연으로 하는 혜이고
  '떠나는 것'은 4제를 소연으로 하여 능히 끊는 것으로
  서로가 서로에 대해 광·협의 뜻을 갖기 때문에
  마땅히 네 구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厭緣苦集慧 離緣四能斷
  相對互廣狹 故應成四句
  
  논하여 말하겠다. 오로지 고제와 집제만을 소연으로 하여 일어나는 인
  
  
111) 이(離)·단(斷)·멸(滅)의 3계는 모두 택멸(무위해탈)을 본질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속의 관점[假 說]에서 본다면 서로 다르게 논설되겠지만, 승의의 관점[實事]에서 본다면 본질적으로 어떠한 차별도 없는 것 으로, 각각의 택멸은 모두 '단'도 되고, '이'도 되며, '멸'도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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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忍)과 지(智)를 일컬어 '싫어하는 것[厭, nirveda]'이라고 하지만, 다른 것(즉 떠나는 것)은 그렇지가 않다. 즉 4제의 경계에 대해 일어나는 '인'과 '지'로서, 능히 번뇌를 끊는 것은 모두 '떠나는 것[離, vitaraga]'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데, 이 두 가지는 광협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네 구로 분별해 보아야 한다.
  즉 싫어하는 것이면서 떠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고제·집제를 소연으로 한 '인'과 '지'로서 혹(惑)을 끊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것으로, 싫어하는 경계를 소연으로 하였기 때문이며, 염오를 떠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떠나는 것이면서 싫어하는 것이 아닌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멸제·도제를 소연으로 한 '인'과 '지'로서 능히 혹을 끊는 것이 바로 그것으로, 좋아하는 경계를 소연으로 하였기 때문이며, 능히 염오를 떠난 것이기 때문이다.
  싫어하는 것이면서 역시 떠나는 것인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고제·집제를 소연으로 한 '인'과 '지'로서 능히 혹을 끊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싫어하는 것과 떠나는 것 모두가 아닌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멸제·도제를 소연으로 한 '인'과 '지'로서 혹을 끊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으로, 이 가운데 일찍이 욕계의 염오를 떠나고서 그 후 4제를 관찰하는 자에게 존재하는 법인(法忍)과 아울러 온갖 지(智) 중의 가행·해탈·승진도에 포섭되는 것은 혹을 끊지 못하니, 혹이 이미 끊어졌기 때문이며, 단대치(斷對治)의 도가 아니기 때문이다.112)
112) 이는 앞의 4구(句)의 뜻을 거듭 해명한 논설이다. 즉 일찍이 욕계의 염오를 떠난 자가 그 후 견도에 들어 법인(法忍)을 획득하였을 경우, 만약 고제·집제를 소연으로 한 것이라면 싫어하는 것이면서 떠나는 것 이 아니니, 이미 혹이 끊어졌기 때문이다.(제1구) 만약 멸제·도제를 소연으로 한 것이라면 떠나는 것도 아니 고 싫어하는 것도 아니니, 좋아하는 경계를 소연으로 삼았기 때문이며, 이미 혹이 끊어졌기 때문이다.(제4구) 또한 온갖 지(智) 가운데 견도의 해탈도에 포섭되는 것과 수도의 가행·해탈·승진도에 포섭되는 것으로서, 만약 고제·집제를 소연으로 한 것이라면 싫어하는 것이면서 떠나는 것이 아니니, 싫어하는 경계를 소연으로 삼았음에도 단대치가 아니기 때문이다.(제1구) 만약 고제·집제를 소연으로 한 것이라면 떠나는 것도 아니고 싫어하는 것도 아니니, 좋아하는 경계를 소연으로 삼았으며 단대치가 아니기 때문이다.(제4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