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아비달마구사론 제 29 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6.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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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구사론 제 29 권
  
  존자 세친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8. 분별정품 ②
  
  이와 같이 지(智)의 소의지가 되는 선정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마땅히 이 같은 선정에 의해 일어나는 공덕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온갖 공덕 가운데 먼저 무량(無量, apramana)에 대해 분별하리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량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진(瞋) 따위를 대치하기 때문으로
  자(慈)와 비(悲)의 자성은 무진이며
  희(喜)는 희, 사(捨)는 무탐이다.
  無量有四種 對治瞋等故
  慈悲無瞋性 喜喜捨無貪
  
  이러한 무량의 행상은 순서대로
  즐거움을 주는 것과 괴로움을 없애는 것과
  기뻐함과 유정의 평등함이니
  욕계의 유정을 소연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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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此行相如次 與樂及拔苦
  欣慰有情等 緣欲界有情
  
  희무량은 초·제2정려에 의해 일어나며
  그 밖의 무량은 6지, 혹은 5지·10지에 의해서인데
  능히 온갖 번뇌를 끊을 수 없으며
  인취가 일으키고, 결정코 세 가지를 성취한다.
  喜初二靜慮 餘六或五十
  不能斷諸惑 人起定成三
  
  논하여 말하겠다. 무량(無量)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자(慈, maitr )이며, 둘째는 비(悲, karuna)이며, 셋째는 희(喜, mudita)이며, 넷째는 사(捨, apeksa)이다.
  '무량'이라고 말한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유정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며,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복을 인기하기 때문이며,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과보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오로지 이 같은 네 가지 종류만 있는 것인가?
  다수의 작용[多行]을 갖는 네 가지 종류의 장애를 대치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네 가지 장애라고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온갖 진(瞋)과 해(害)와 기뻐하지 않음[不欣慰]과 욕계의 탐(貪)·진(瞋)을 말하니, 이것을 대치하기 위해 순서대로 '자' 등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1)
  부정관(不淨觀)과 사(捨)가 다 같이 욕계의 탐을 대치하는데, 여기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 것인가?
  
  
1) '진'이란 유정을 죽이려고 하는 심소이고, '해'는 유정을 괴롭히려고 하는 심소이며, 불흔위 즉 '기뻐 하지 않음'이란 경계에 탐착하여 온갖 선품에 즐거이 머물지 않게 하는 것, 다시 말해 다른 유정이 괴로움을 떠나 즐거움을 획득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않는 것으로, '질(嫉)'을 본질로 하며, '욕계의 탐·진'이란 욕 계의 경계에 대해 기뻐 즐거워하는 마음을 일으켜 싫어함이나 만족함이 없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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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설하기를, "욕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색(즉 현색과 형색)탐이고, 둘째는 음탐(貪)인데, 부정관과 '사'는 순서대로 능히 대치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치상으로 실로 부정관이 능히 음탐을 대치하며, 그 밖의 친한 벗에 대한 탐은 '사'가 능히 대치한다.
  4무량 가운데 앞의 두 가지(자·비)의 본질은 바로 무진(無瞋)이다.2) 그러나 이치상으로 볼 때 '비'의 본질은 마땅히 불해(不害)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3)
  또한 희무량의 본질은 바로 희수(喜受)이며,4) 사무량의 본질은 바로 무탐이다. 그러나 만약 권속(상응·구유법)과 함께 설할 경우 5온을 본질로 한다.5)
  만약 '사'가 무탐을 본질로 한다면, 어떻게 능히 '진'을 대치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사'에 의해 대치되는 '진'은 탐에 의해 인기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치상으로 볼 때 실로 '사'는 마땅히 두 가지 법(무탐과 무진)을 본질로 삼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6)
  
  
2) 이는 유부의 정설이다. 그러나 자·비의 본질이 다 같이 무진(無瞋)이라면 양자의 차별은 무엇인가? 중 현에 의하면, 비록 자성상으로는 어떠한 차별도 없을지라도, 자무량은 유정을 죽이려고 하는 진에를 능히 대 치하여 기쁨[歡]의 행상을 일으키지만, 비무량은 유정을 괴롭히려는 진에를 능히 대치하여 근심[戚]의 행상을 일으킨다.(『현종론』 권제40, 한글대장경201, p.617)
3) 이는 논주 세친의 해석이다. 『현종론』(앞의 책, p.618)에 따르면 그는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치상으로도 실로 그와 같을 것이지만, 해꼬지[害]는 진에와 유사하기 때문에 '진'이라는 말로써 설 한 것으로, 비무량의 행상도 역시 무진과 유사하기 때문에 무진이라는 말로 규정하였으나 실제로는 '불해'이 다."
4) 희무량은 다른 이가 괴로움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획득하는 것을 소연으로 삼아 기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본질을 희수라고 한 것이지만, 여기에는 이설이 많다. 『대비바사론』 권제141(한글대장경123, p.363)에서 는 경하하고 위로하는 작의[慶慰作意]와 상응하는 희근, 혹은 선의 심소 중의 '흔(欣)'을 본질로 한다는 이설 을 전하고 있으며, 『현종론』(앞의 책)에서는 '흔'과 '무탐'을 본질로 한다는 이설을 전하고 있다.
5) 보광에 의하면 이는 4무량 모두와 상응·구유법의 본질을 밝힌 것이다. 그런데 『대비바사론』 권제81( 한글대장경121, p.141)에 의하면, 4무량을 상응·수전법과 함께 취할 경우 욕계의 그것은 4온을 본질로 하며, 색계의 그것은 5온을 본질로 한다. 즉 욕계는 수전색이 없지만, 색계에는 정구계(定俱戒)의 수전색이 존재하 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6) 이는 논주 세친의 해석이다. 즉 사(捨)는 욕계의 탐과 진을 대치하므로 무탐과 무진을 본질로 하는 것 이라고 해야 한다.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1법에 두 가지 본질이 있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사'는 탐도 아 니고 진도 아닌 마음의 평등성 즉 무경각성(無警覺性)을 말하기 때문에(본론 권제4 주27 참조) 그 같은 과실 은 없다. 다만 본송에서 '무탐'만을 언급한 것은 강성한 것에 따라, 혹은 앞의 비바사사의 설에 따른 것이다.(『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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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4무량의 행상의 차별은 다음과 같다. 즉 '어떻게 하여야 모든 유정류로 하여금 응당 이와 같은 즐거움을 획득하게 할 것인가.' 이와 같이 사유함으로써 자등지(慈等至)에 들어가게 된다. '어떻게 하여야 모든 유정류로 하여금 응당 이와 같은 괴로움을 떠나게 할 것인가.' 이와 같이 사유함으로써 비등지(悲等至)에 들어가게 된다. '모든 유정류가 즐거움을 획득하고 괴로움을 떠난다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이와 같이 사유함으로써 희등지(喜等至)에 들어가게 된다. '모든 유정류는 평등하고 평등하여 사랑하는 이도 미워하는 이도 없다.' 이와 같이 사유함으로써 사등지(捨等至)에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4무량은 다른 이로 하여금 실제로는 즐거움 등을 능히 획득하게 할 수 없는데, 어찌 전도(顚倒)된 것이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즐거움 등을 획득하기를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혹은 아세야(阿世耶, aya)에 전도가 없기 때문에 [전도가 아니니], 승해의 상(想)과 상응하여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7)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이 바로 전도라고 한다면 다시 무슨 허물이 있게 되는 것인가?
  만약 [이것이 바로 전도라고 한다면] 마땅히 선이 아니라고 해야 하지만 이치상 그렇지가 않으니, 이것은 선근과 상응하여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바로 전도라고 한다면] 마땅히 악을 인기한다고 해야 하지만 이치상 역시 그렇지가 않으니, 이것의 힘에 의해 능히 진에 등을 대치하기 때문이다.
  
  
  
7) 전도란 괴로운 것 등을 즐거운 것 등이라고 집착하는 것으로(본론 권제19, p.873 참조), 비록 4무량이 유정들로 하여금 실제적인 즐거움을 획득하게 하지는 않을지라도 그것은 다만 이미 획득한 즐거움 등에 대해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즐거움 등을 획득하기를 원하며, 그것은 선한 아세야(즉 意樂)이기 때문에, 또한 그러한 승해의 상(想)은 가상이어서 진실로 집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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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4무량은 욕계의 일체의 유정을 소연으로 삼으니, 능히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진에 등의 장애를 대치하기 때문이다.8) 그런데 계경에서는 "자무량 등을 수습할 때 한 방향[一方]과 일체 세계를 사유한다"고 설하고 있지만,9) 이 경에서는 기세간(器世間)을 언급한 것으로, 그 같은 기세간 중의 [일체 유정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4무량 중] 세 번째 희무량은 희수에 포섭되기 때문에 다만 초정려와 제2정려에 의지하는 것으로, 그 밖의 선정의 경지에는 희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밖의 세 가지 무량은 모두 여섯 지에 의지하여 일어나니, 이를테면 4정려와 미지정과 중간정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혹 어떤 이는 이를테면 미지정을 제외한 오로지 다섯 지에 의지하여 일어날 뿐이라고 주장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용예(容豫)의 공덕으로 이미 욕계를 떠난 자라야 비로소 능히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10) 혹은 어떤 이는, '이러한 4무량은 그것이 상응하는 바에 따라 10지 모두에 의지하여 일어나니, 이를테면 욕계정과 네 가지 근본정과 근분정, 그리고 중간정이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다.11) 곧 이러한 주장의 의미는 정지(定地, 즉 색계)와 부정지(不定地, 욕계)의 근본정과 가행(즉 근분정)을 모두 무량에 포섭시키고자 한 것이
  
  
8) 이를테면 욕계에는 미워하고 사랑하고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세 부류의 유정들이 있어 진에 따위 를 낳게 되는데, 만약 미워하고 사랑하는 등의 상을 버릴 경우 바로 진에 등의 번뇌를 조복시켜 제거할 수 있 다. 그러므로 이것의 경계는 오로지 욕계의 유정일 뿐으로, 색·무색계의 유정을 능히 소연으로 삼을 수 없다 . 참고로 대비(大悲)의 본질은 무치(無癡)의 선근이기 때문에 3계의 유정을 모두 소연으로 삼는다.
9) 『잡아함경』 권제21 제567경(대정장2, 149하);『중아함경』 권제21 「설처경(說處經)」(대정장1, p.563중), "비구는 마음이 자무량과 함께할 때 1방(方)에 두루 차 성취하여 노닐고(사유하고), 2방·3방·4방 의 4유(維)·상하·일체에 두루하니, 마음이 자무량과 함께하기 때문에 무결(無結)·무원(無怨)·무에(無恚) ·무쟁(無諍)하여 지극히 광대한 무량의 선을 닦아 일체세간에 두루 차 성취하여 노닐게 된다.…… 비·희· 사무량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10) 이러한 4무량정은 욕계 9품의 혹을 끊어 버린 이욕자(離欲者)가 일으키는 선정으로, 용예 즉 여유가 있을 때 일으키는 공덕이기 때문에 미지정에서는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11) 『대비바사론』 권제81(한글대장경121, p.142)에 의하면 자·비·사무량은 10지와 통하며, 희무량은 욕계와 초정려와 제2정려에 의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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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그리고 비록 앞에서 이러한 4무량이 네 가지 장애를 능히 대치한다고 설하였을지라도 온갖 번뇌의 득(得)을 끊어지게 할 수는 없으니, 이것은 유루의 근본정려에 포섭되기 때문이며, 승해작의와 상응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며, 일체의 유정을 두루 소연의 경계로 삼기 때문이다.12) 그렇지만 이것의 가행위(욕계와 미지정)에서는 진에 등을 억제하거나 숨기며, 혹은 이것(4무량)은 이미 끊어진 번뇌를 더욱 멀어지게 하기 때문에 앞에서 이러한 4무량은 능히 네 가지 장애를 대치한다고 설한 것이다. 이를테면 욕계와 미지정에서도 역시 수소성(修所成)의 근본 무량과 유사한 자(慈) 등이 존재하니,13) 이것에 의해 진에 등의 장애를 억제하거나 숨기며, 그런 다음 번뇌를 끊는 도[斷道, 즉 무간도]를 인기하여 능히 온갖 번뇌를 끊으며, 온갖 번뇌를 끊고 나서 이염위(離染位) 중에서 비로소 근본 4무량을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의 상태에서는 비록 [번뇌를 일으킬 만한] 강력한 인연을 만나게 될지라도 진에 등에 의해 은폐되거나 굴복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으로 그러한 업을 수습하는 단계[初習業位]에서는 어떻게 자무량을 닦는 것인가?
  이를테면 먼저 자신이 향수하는 즐거움을 사유하고서, 혹은 부처와 보살과 성문 그리고 독각 등이 향수하는 쾌락에 대해 설하는 것을 듣고서 '일체의 모든 유정이 이와 같은 쾌락을 향수하기를 원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그에게 본래 번뇌가 증성하여 이와 같이 평등하게 마음을 운용할 수 없는 자라고 한다면, 마땅히 유정을 세 가지 품류―이른바 친우와 처중(處中, 친우도 아니고 원수도 아닌 이)과 원수―로 분류하고, 다시 친우를 상·중·하의 세 품류로 나누고, 중품(즉 처중)은 오로지 한 가지로, 원수도 상·중·하의 세 품류로 나누어 모두 일곱 가지 품류를 성취해야 한다.14) 그리고 이같
  
  
12) 번뇌는 오로지 제법의 공상(共相)을 소연으로 하는 진실의 작의에 의해서만 끊어진다. 즉 4무량의 승 해작의는 일체의 유정을 소연으로 하여 일시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같은 가상관(觀)으로써는 번뇌를 끊 을 수 없는 것이다.
13) 여기서 '자(慈) 등'이란 자·비·사의 세 무량을 말한다. 즉 앞에서 설하였듯이 희무량은 오로지 초정 려와 제2정려에서만 존재한다.
14) 『현종론』 권제40(앞의 책, p.626)에서는 처중도 역시 상·중·하품으로 나누어 모두 9품으로 분류하 고 있다. 여기서 상품의 친우란 일체의 유정이 그의 극중한 은혜를 지고 있는 살아 있는 법신(法身)을 말하며 , 중품의 친우란 재물과 법으로써 교제하는 이를, 하품의 친우란 오로지 재물로써만 교제하는 이를 말한다. 또한 상품의 원수란 명예나 생명, 혹은 친우를 앗아간 이를, 중품의 원수란 자신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재 와 도구를 빼앗아간 이를, 하품의 원수란 친우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도구와 자재를 빼앗아간 이를 말한다. 참고로 상품의 처중이란 일찍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 중품의 처중이란 비록 듣고 보았을지라도 교류·왕래 가 없었던 이, 하품의 처중이란 비록 교류·왕래가 있었다 할지라도 은혜를 입거나 원수진 일이 없었던 이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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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품류의 차별을 나누고 난 후 먼저 상품의 친우에 대해 진실로 즐거움을 주려고 하는 승해를 일으키며,15) 이러한 원이 성취되고 나면 중품과 하품의 친우에 대해서도 역시 이와 같은 승해를 점차로 닦는다. 이같이 하여 세 품류의 친우에 대한 평등한 마음을 획득하고 나면, 다음으로 처중의 중품과 하·중·상품의 원수에 대해서도 역시 점차로 이와 같은 승해를 닦으니, 자주 닦은 힘에 의해 상품의 원수에 대해서도 능히 즐거움을 주려고 하는 원을 일으켜 그것이 상품의 친우에 대한 원과 평등하게 된다. 이 같은 승해를 닦아 더 이상 물러남이 없게 되면, 다음으로 소연을 점차 넓혀 나가면서 닦게 된다. 즉 그 같은 생각[想]을 점차 한 동네, 한 나라, 한 방향, 일체의 세계로 옮겨 즐거움을 주려는 행상을 사유하여 두루하지 않음이 없게 될 때, 이를 자무량을 수습하는 것이 성취되어 원만해졌다[成滿]고 한다.
  그리고 만약 유정에 대한 공덕(즉 좋은 점)을 즐거이 추구하는 자라면 능히 자정(慈定)을 닦아 신속하게 성취하게 되겠지만, 유정에 대한 과실(즉 약점)을 즐거이 추구하는 자는 그렇지 못하다. 즉 선근을 끊은 자라도 공덕이라 할 만한 것이 있으며, 인각유 독각에게도 과실을 찾아볼 수 있으니, 일찍이 지은 복과 죄의 과보가 현재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16)
  
  
15) 만약 무시(無始) 이래 자주 익혀 성취된 악한 아세야로 인해 조그마한 핍박이나 괴로움을 당하여 깊은 한(恨)을 품고서 그 같은 승해를 멈추게 될 경우, 다시 분발하여 그의 막중한 은혜를 생각하고서 그에게 즐거 움을 주려는 의요를 다시 낳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여 원한의 마음이 영원히 사라지고, 즐거움을 주려는 승해 가 끊어지지 않고 상속할 때 자무량이 성취된 것이라고 한다.(위의 논)
16) 즉 단선근자의 용모가 단정하고 독각의 용모가 추한 것은 과거 복업과 죄업의 과보로서, 단선근자에게 도 좋은 점이 있을 수 있고, 성자에게도 과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자무량을 닦고자 하는 이는 한결같이 좋 은 점만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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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무량과 희무량을 닦는 법도 이에 준하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즉 유정이 온갖 괴로움의 바다에 빠진 것을 관찰하고서는 바로 그들이 모두 해탈을 획득하게 되기를 원하고, 아울러 유정이 즐거움을 얻고 괴로움에서 떠나기를 생각하고서는 스스로 깊이 기뻐하여 '진실로 즐겁도다'고 하면, [이러한 때를 일컬어 비무량과 희무량을 닦는 것이 성취되어 원만해졌다고 한다].
  처음으로 사무량을 닦는 자는 먼저 처중(處中)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차로 능히 상품의 친우에 이르러 평등한 마음을 일으켜 처중과 동등하게 여기면 [이러한 때를 일컬어 사무량을 닦는 것이 성취되어 원만해졌다고 한다].17)
  이러한 4무량은 인취에서 일어나며, 다른 곳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그 중의 한 가지 무량을 획득할 때 필시 세 종류의 무량을 성취하니, 제3정려 등(이상)에 태어나면 오로지 희무량을 성취하지 않기 때문에 [4무량을 성취한다고 말하지 않은 것이다].18)
  무량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다음으로 해탈(解脫, vimoksa)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해탈에는 여덟 가지의 종류가 있으니
  앞의 세 가지는 무탐(無貪)의 성질로서
  두 가지는 두 선정에, 한 가지는 한 선정에 의지하며
  네 가지 해탈은 무색정으로서 선이다.
  解脫有八種 前三無貪性
  二二一一定 四無色定善
  
  
  
  
17) 처중은 미워하지도 않고 탐착하지도 않는 것이어서 버리기가 쉽기 때문에 먼저 버리고서, 다음으로 하 ·중·상품의 원수를 버리고, 다시 하·중·상품의 친우(가장 버리기 어렵기 때문에 제일 뒤에 닦는 것임)를 버려 마침내 일체 유정에 대한 평등심을 획득할 때 사무량을 성취하게 된다.
18) 즉 희무량은 초정려와 제2정려에서만 일어나며, 그 밖의 자·비·사무량은 4정려와 미지정과 중간정의 6지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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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멸수상해탈(滅受想解脫)은
  미미한 마음과 무간에 생기며,
  자지의 청정한 마음(즉 유루)이나
  하지의 무루심으로 나오게 된다.
  滅受想解脫 微微無間生
  由自地淨心 及下無漏出
  
  세 해탈의 경계는 욕계의 볼 수 있는 것이며,
  네 해탈의 경계는 유지품(類智品)의 도(道)와
  자지와 상지의 고·집·멸제와
  비택멸(非擇滅)과 허공이다.
  三境欲可見 四境類品道
  自上苦集滅 非擇滅虛空
  
  논하여 말하겠다. 해탈에는 여덟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내적으로 색의 상(想)이 있으면서 외적인 색을 관찰하는 해탈이며,19) 둘째는 내적으로 색의 상이 없으면서 외적인 색을 관찰하는 해탈이며,20) 셋째는 청정한 해탈을 몸으로 작증(作證)하고 구족하여 머무는 것이며,21) 4무색정을 순서대로 네 가지 해탈이라고 하며,22) 멸수상정(滅受想定)을 여덟 번째 해탈이라고 한다.23)
  
  
19) 내유색상관외색해탈(內有色想觀外色解脫). 내적으로 색신을 탐하는 색상(色想)이 있어 이러한 탐심을 없애기 위하여 부정(不淨)한 푸르죽죽한 어혈 등의 외적인 색을 관찰하여 그것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
20) 내무색상관외색해탈(內無色想觀外色解脫). 내적으로 색신을 탐하는 색상은 없지만, 이를 보다 견고하 게 하기 위해 부정한 외적인 색을 관찰하여 그것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
21) 정해탈신작증구족주(淨解脫身作證具足住). 청정한 색을 관찰하여 탐심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을 '정 해탈'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해탈이 관행자의 몸에 증득되어[身作證] 구족·원만하게 되는 것.
22) 무색정의 공무변처·식무변처·무소유처·비상비비상처 해탈은 각기 하지의 탐에서 해탈한 것으로, 이 는 제4에서 제7의 해탈이다.
23) 온전한 명칭은 멸수상정해탈신작증구족주(滅受想定解脫身作證具足住). 이는 멸진정을 말하는 것으로, 수·상 등의 마음을 싫어하여 무심의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기 때문에 해탈이라고 한 것이다. 즉 여기서 '해탈 '이란 버리거나 등진다[棄背]는 뜻으로, 앞의 두 해탈은 색탐의 마음을, 세 번째 해탈은 부정관의 마음을, 4 무색처해탈은 각각 하지의 마음을, 멸수상해탈은 일체의 유소연의 마음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해탈'이다.( 『대비바사론』 권제84, 한글대장경121,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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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같은 8해탈 중에서 앞의 세 가지는 무탐을 본질로 하니, 탐을 직접적으로 대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경 중에서 '……상관(想觀)……'이라고 설한 것은 '상'과 '관'이 증가하였기 때문이다.24) 즉 이러한 세 가지 해탈 중에 처음의 두 가지는 부정상(不淨相)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여기서는 푸르죽죽한 어혈[靑瘀] 등의 온갖 행상을 짓기 때문이다.25) 또한 세 번째 해탈은 청정상(淸淨相)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청정한 빛의 선명한 행상을 짓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 가지 해탈이 그것에 수반되는 법과 함께하는 경우라면, 그것은 모두 5온을 본질로 한다.
  처음 두 가지 해탈은 각기 초정려와 제2정려에 의지하여 일어나니, 그것(초정려와 제2정려)은 능히 욕계와 초정려 중의 현색탐(顯色貪)을 대치하기 때문이다.26) 세 번째 해탈은 뒤의 정려(제4정려와 근분정)에 의지하여 일어나니, 그것은 여덟 가지 재환(災患)을 떠나 마음이 맑고 깨끗하기 때문이다.27) 그리고 그 밖의 경지에도 이와 서로 유사한 해탈이 존재하지만, 탁월한 것[增上]이 아니기 때문에 '해탈'이라 이름하지 않은 것이다.28)
  
  
24) 즉 탐의 취집(聚集) 중에서 생각이 증대한 것을 '상'이라 하고, 무탐의 취집 중에서 관찰이 증대한 것 을 '관'이라고 하기 때문에 '상관'이라고 말한 것이다.(『구사론기』 권제29)
25) 푸르죽죽한 어혈[靑瘀]이란 피고름이 엉켜 푸르죽죽하게 변한 시체의 모양으로, 청어상·이적상(異赤 想) 등의 부정관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22 주67) 참조할 것.
26) 초·제2정려는 욕계 안식과 초정려의 안식에 의해 일어난 현색탐(청·황·적·백 등의 색상에 대한 탐 욕)을 능히 대치하기 때문이다.
27) 세 번째 해탈은 오로지 청정한 색[淨色]을 관찰하여 탐이 일어나지 않게 된 것으로, 이는 지극히 어려 운 일이기 때문에 수승한 선정에 의지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심(尋)·사(伺)·희수(喜受)·낙수(樂受 )·우수(優秀)·고수(苦受)·출식(出息)·입식(入息)의 8재환(본론 권제28 주84 참조)을 떠나 마음이 징정(澄 淨)하게 된 제4정려에 의해서만 청정한 색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28) 즉 제3·제4정려와 욕계에도 처음 두 가지 해탈과 유사한 해탈이 존재하지만 욕계의 경우에는 욕탐과 뒤섞여 있기 때문에, 제3·제4정려의 경우는 대치되는 법(현색탐)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해탈'이라고 이름하 지 않는 것이다. 또한 아래 세 정려와 욕계에도 세 번째 해탈과 유사한 해탈이 존재하지만 욕계의 경우에는 욕탐과 뒤섞여 있기 때문에, 초정려과 제2정려의 경우는 청정하게 조복되지 않기 때문에, 제3정려 중에서는 낙(樂)에 의해 미란(迷亂)되기 때문이며, 또한 다 같이 8재환에 의해 동요되고 어지럽혀졌기 때문에 '해탈'이 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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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의 네 가지 해탈(제4에서 제7해탈)은 그 순서대로 4무색정의 선을 본질로 한다. 즉 그것은 무기나 염오의 무색정을 본질로 하지 않으니, 그러한 법(무기와 염오)은 해탈이 아니기 때문이며, 산란심의 선[散善] 역시 본질로 하지 않으니, 그것은 그 성질이 약하고 저열하기 때문으로, 그러한 산란심의 선이란 예컨대 목숨을 마칠 때의 마음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설하기를, "그 밖의 다른 때에도 역시 산란심의 선이 존재한다"고 하였다.29)
  그리고 [무색계] 근분정(近分定)의 모든 해탈도도 역시 '해탈'이라고 이름할 수 있지만 무간도는 그렇지 않으니, 하지를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요컨대 하지를 등져야 비로소 '해탈'이라고 이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다른 곳에서 대체로 그 같은 근본지(즉 4무색정)만을 '해탈'이라고 설한 것은, 근분 중의 모든 경지가 '해탈'이 아니기 때문이다.30)
  여덟 번째 해탈은 바로 멸진정(滅盡定)이니, 그것의 자성 등에 대해서는 이미 앞(본론 권제5)에서 논설한 바와 같다. 즉 수(受)와 상(想)을 싫어하여 등지고서 이것을 일으켰기 때문에, 혹은 소연을 갖는 법[有所緣, 즉 심·심소를 말함]을 모두 싫어하여 등진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멸진정은 '해탈'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것에 의해 정장(定障, 불염오무지)에서 해탈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선정은 미미한 마음[微微心] 뒤에 현전한다. 즉 앞에서 상심(想心,
  
  
  
29) 여기서 '그 밖의 다른 때'란 목숨을 마칠 때가 아닌 때로서, 이숙생의 심·심소를 말한다.
30) 근분정 중의 일부인 해탈도만이 '해탈'이고, 무간도는 해탈이 아니기 때문에 각각의 근분정을 제4에서 제7의 해탈로 설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는 유부의 정설이다. 즉 '모든 근분지의 9무간도와 8해탈도는 역시 '해탈'이 아니니, 하지를 싫어하여 등진 것[厭背]이 아니기 때문이며, 하지를 대상으로 하는 도가 뒤섞여 있 기 때문이며, 또한 아직 하지의 염오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현종론』 권제40, 앞의 책, p.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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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 '상'과 상응하는 마음)과 대응하는 마음을 이미 '미세한 마음[微細心]'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이것은 더욱더 미세하기 때문에 '미미한 마음'이라고 일컬은 것으로, 이와 같은 마음 다음 찰나에 멸진정에 들어간다. 그리고 멸진정으로부터 나올 때에는 혹 어떤 경우 유정지의 청정한 선정[淨定, 즉 정등지]의 마음을 일으키기도 하고, 혹 어떤 경우에는 무소유처의 무루선정의 마음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와 같이 멸진정에 들어가는 마음은 오로지 유루이지만, 유루와 무루의 마음 모두로부터 나오게 되는 것이다.31)
  8해탈 가운데 앞의 세 가지는 오로지 욕계의 색처(色處)를 경계로 한다. 다만 차별이 있다면, 두 가지(제1·제2해탈)의 경계는 미워할 만한 것[可憎]이고, 한 가지(제3해탈)의 경계는 애호할 만한 것[可愛]이다.32) 그 다음의 네 가지 해탈(제4에서 제7해탈)은 각기 자지와 상지의 고·집·멸제와, 일체 유지품(類智品)의 도(道)와 그것의 비택멸과 허공을 소연의 경계로 삼는다.33)
  제3정려에는 어찌 해탈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제3정려 중에는 색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자지의 미묘한 낙(樂)에 의해 어지럽혀지기 때문이다.
  관행자(觀行者)는 어떠한 연유에서 정해탈(淨解脫, 즉 제3해탈)을 닦는 것인가?
  마음이 잠시 기뻐하게[欣悅]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니, 이전에 닦은 부정관(不淨觀, 첫 번째와 두 번째 해탈)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근심[沈戚]하게 하는 것이라면 지금 청정관(淸淨觀)을 분발하여 닦는 것은 마음이 기뻐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혹은 스스로 감당할 능력이 있는지, 이를테면 앞서 닦은
  
  
  
31) 즉 들어가는 마음[入心]은 '멸진정의 적정'을 소연으로 삼아 비로소 능히 들어가기 때문에 유루이지만 , 그것에서 나오는 마음[出心]은 반드시 멸진정을 소연으로 삼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유루와 무루 모두와 통 하는 것이다.
32) 본송에서 '욕계에서 볼 수 있는 것[可見]'이란 바로 욕계 색처를 말한다. 즉 첫 번째와 두 번째 해탈 은 부정상(不淨想)을 취하고, 세 번째 해탈은 청정상(淸淨想)을 취한다.
33) 하지의 고·집제 등을 소연으로 삼지 않는 것은, 하지는 저열하기 때문이며, 하지를 이미 배반하였기 때문이지만, 유지품의 도와 그것의 비택멸, 그리고 허공은 소의지에 따른 승렬(勝劣)이 없기 때문에 모두를 소연으로 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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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정관의 해탈이 성취되었다고 해야 할지 성취되지 않았다고 해야 할지 자세히 살펴 알기를 원하였기 때문으로, 만약 청정상을 관찰하더라도 번뇌(색탐)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 같은 해탈은 바야흐로 성취된 것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이유로 말미암아 모든 유가사(瑜伽師)는 해탈 등을 닦는 것이니, 첫째는 온갖 번뇌가 끊어지고 나서 더욱 멀어지게 하기 위해서이며, 둘째는 선정에 대해 뛰어난 자재를 획득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능히 무쟁(無諍) 등의 공덕과 성스러운 신통을 일으킬 수 있는 것으로, 이에 따라 온갖 사업을 능히 변화시켜 일으키고, 유다수행(留多壽行)과 사다수행(捨多壽行) 등의 여러 작용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34)
  어째서 경에서는 제3해탈과 제8해탈은 '몸으로 작증하는 것[身作證]'이라고 설하면서 다른 여섯 가지 해탈에 대해서는 그렇게 설하지 않은 것인가?35)
  8해탈 중에서 이 두 가지가 뛰어난 것이기 때문이며, 두 세계 중에서 각기 가장자리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36)
  해탈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다음으로 승처(勝處, abhibhayatana)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34) 부처님과 불시해탈의 아라한은 자신의 수명을 늘일 수도 있고 줄일 수도 있다. 예컨대 세존은 100세 혹은 120세의 수명을 80세로 단축하였으며, 열반 직전 3개월간 목숨을 연장하였다.(이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3 주 41, 42를 참조할 것)
35) 『중아함경』 권제24 「대인경(大因經)」(대정장1, p.582상), "……다시 정해탈(淨解脫)을 몸으로 작 증하고서 성취하여 노니나니, 이를 제3해탈이라고 한다.……다시 일체의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의 상(想)을 건너 멸해탈(滅解脫)을 알아 몸으로 작증하고서 성취하여 노닐며, 아울러 모든 번뇌가 다하였음을 혜관하여 아니, 이를 제8해탈이라고 한다."
36) 『대비바사론』 권제152(한글대장경124, p.49)에는 이를 포함한 여섯 이설이 언급되고 있다. 즉 "…… 정해탈은 색계의 끝(혹은 제4정려의 끝)에서 일어나며, 상수멸해탈(想受滅解脫)은 무색계의 끝(혹은 비상비비 상처정의 끝)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혹은 정해탈은 비록 색의 청정상을 취할지라도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수승하며, 상수멸해탈은 마음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몸의 힘으로 일으킬 뿐 마음의 힘으로 일으키지 않기 때문 에……세존께서 '신작증'이라 일컬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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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처에는 여덟 가지 종류가 있으니
  두 가지는 첫 번째 해탈과 같으며
  다음의 두 가지는 두 번째 해탈과
  뒤의 네 가지는 세 번째 해탈과 같다.
  勝處有八種 二如初解脫
  次二如第二 後四如第三
  
  논하여 말하겠다. 승처(勝處)에는 여덟 가지가 있다.
  첫째는 내적으로 색의 상(想)이 있으면서 외부의 적은 색을 관찰하는 것이며,37) 둘째는 내적으로 색의 상이 있으면서 외부의 많은 색을 관찰하는 것이며,38) 셋째는 내적으로 색의 상이 없으면서 외부의 적은 색을 관찰하는 것이며,39) 넷째는 내적으로 색의 상이 없으면서 외부의 많은 색을 관찰하는 것이다.40) 그리고 내적으로 색의 상이 없으면서 외부의 청(靑)·황(黃)·적(赤) ·백(白)을 관찰하는 것이 네 가지 승처로,41) 이를 앞의 네 가지에 더하여 8승처가 되는 것이다.42)
  
  
37) 내유색상관외색소(內有色想觀外色少). 내적으로 색신을 탐하는 색상(色想)이 있어 이를 대치하기 위해 외부의 적은 색을 관찰하여 죽은 시체의 푸르죽죽한 어혈 등으로 여기는 것을 말한다.
38) 내유색상관외색다(內有色想觀外色多). 앞의 주에 준하여 알 것.
39) 내무색상관외색소(內無色想觀外色少). 내적으로 색신을 탐하는 상은 없지만, 보다 견고하게 하기 위해 외부의 적은 색을 관찰하여 죽은 시체의 푸르죽죽한 어혈로 여기는 것을 말한다.
40) 내무색상관외색다(內無色想觀外色多). 앞의 주에 준하여 알 것.
41) 내무색상관외청·황·적·백색(內無色想觀外靑·黃·赤·白色). 내적으로 색신에 대한 애탐이 없으면 서, 다만 마음을 책려하기 위해, 혹은 번뇌를 경계하기 위해 외부의 청·황·적·백색을 관찰하여 탐이 일어 나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
42) 여기서 '승처'라고 하는 말은 경계를 능히 제압하고 조복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이를테면 비록 일체의 소연이 되는 색경(色境)에 청정하고 빛나고 아름답고 미묘함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할지라도, 선근의 힘이 그것을 능히 압도하고 가려 버리니, 비유하자면 하인이 비록 제아무리 진귀한 의복을 입었을지라도 주인 에게 압도되어 가려지는 것과 같다. 혹은 이러한 처소에서는 전변(轉變)하는 것이 자재하여 이에 따라 더 이 상 번뇌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승처'라고 이름한 것으로, 처소에 대해 수승하기 때문에 '승처'라는 명칭을 설정하였다. 혹은 이러한 선근을 일컬어 바로 '처소'라고 한 것으로, 처소가 능히 수승하기 때문에 '승처'라 는 명칭을 설정한 것이다.(『현종론』 권제40, 앞의 책, p.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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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승처 가운데 앞의 두 가지 승처는 첫 번째 해탈과 같고, 다음의 두 가지 승처는 두 번째 해탈과 같으며, 마지막 네 가지 승처는 세 번째 해탈과 같다.43)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8승처는 세 가지 해탈과 무엇이 다른가?
  앞의 해탈을 닦는 것은 오로지 능히 [색탐 등을] 버리고 등지는 것일 뿐이지만, 뒤의 승처를 닦는 것은 능히 소연을 제압하기 위해서이다.44) 즉 즐기는 바에 따라 관찰하면서도 번뇌가 끝내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승처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다음으로 변처(遍處, krtsnayatana)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변처에는 열 가지 종류가 있으니
  여덟 가지는 정해탈과 같으며
  뒤의 두 가지는 청정한 무색정으로
  자지의 4온을 소연으로 한다.
  遍處有十種 八如淨解脫
  後二淨無色 緣自地四蘊
  
  논하여 말하겠다. 변처(遍處)에는 열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지(地)·수(水)·화(火)·풍(風)·청(靑)·황(黃)·적(赤)·백(白)과 아울러 공(空)과 식(識)의 두 가지 무변처(無邊處)를 두루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즉
  
  
  
43) 즉 제1·제2승처는 첫 번째 해탈, 제3·제4승처는 두 번째 해탈, 나머지 네 승처는 제3 정해탈의 과보 로서 각각의 본질과 소의지, 소연은 대응하는 해탈의 그것과 같다.
44) 즉 앞의 세 해탈은 온갖 색을 다만 부정상과 청정상이라고 하여 전체적으로 취할 뿐이지만, 지금의 8 승처는 모든 색에 대해 적고 많고, 푸르고 붉다는 등의 각기 다른 상으로 분별한다. 따라서 앞의 해탈이 단지 색에 대한 욕탐이나 부정상을 버리고 등지게 하는 것이라면, 지금의 8승처는 소연을 분석하고 제압 조복하여 그에 따라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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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체의 처소에 어떠한 간극(間隙, 틈)도 없이 두루 망라하여 관찰하기 때문에 '변처'라고 이름한 것이다.45)
  10변처 가운데 앞의 여덟 가지는 정해탈(淨解脫, 세 번째 해탈)과 같은 것으로, 이를테면 그 자성은 모두 무탐이며, 만약 그것에 수반되는 법과 함께하는 경우라면 5온을 본질로 한다. 또한 제4정려에 의해 일어나며, 욕계의 가견(可見)의 색(즉 색처)을 소연으로 한다.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오로지 풍(風)의 변처만은 접촉되어지는 법[所觸法] 중의 풍계(風界)를 소연의 경계로 삼는다"고 하였다.46)
  뒤의 두 가지 변처는 순서대로 공(空)과 식(識)의 두 가지 청정한 무색정을 그것의 자성으로 삼으며, 각기 자지의 4온을 소연의 경계로 삼는다.
  그리고 관행(觀行)을 닦는 자는 온갖 해탈로부터 온갖 승처에 들어가며, 온갖 승처로부터 온갖 변처로 들어가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뒤의 것일수록 일어나는 것이 앞의 것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해탈 등의 세 가지(해탈·승처·변처) 공덕은 무엇에 의해 획득되며, 어떠한 몸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멸진정은 앞에서 분별한 바와 같으며
  그 밖의 것은 두 가지 득과 모두 통하는데
  무색정의 그것은 3계신(身)에 의지하며
  
  
  
45) 『대비바사론』(권제85, 한글대장경121, p.228)에 따르면 이는 대덕(大德)의 설이다. 유부의 정설은 무간(無間) 광대(廣大)하기 때문에 변처이다. 예컨대 청색 등에 대한 승해작의가 다른 어떤 상과도 뒤섞임이 없기 때문에[不相雜, 즉 무간], 청색 등을 소연으로 하는 승해작의의 대상이 무한하기 때문에[無邊, 즉 광대] '변처'이다.
46) 지계(地界)가 견고성[堅]과 사물의 유지[持]를 본질과 작용으로 하는 대종이라면, 현실의 '지(地)'는 색·향·미·촉의 4처가 합하여 이루어진 현색과 형색의 색처를 말한다.(본론 권제1, p.24 참조) 따라서 변처 는 지계가 아니라 '지'(즉 색처)를 소연으로 삼는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풍(風)과 풍계(風界)의 경우, 풍계 는 운동성[動]과 사물의 동요[長]를 본질과 작용으로 하지만, 현실의 바람 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이같이 설하 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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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밖의 것은 오로지 인취에서만 일어난다.
  滅定如先辯 餘皆通二得
  無色依三界 餘唯人趣起
  
  논하여 말하겠다. 여덟 번째 해탈은 앞에서 이미 분별한 바와 같으니, 이것은 바로 앞에서 논설한 멸진정이기 때문이다.47) 그 밖의 해탈 등(7해탈과 8승처와 10변처)은 모두 두 가지에 의해 획득된다. 이를테면 그것들은 이염과 가행에 의해 획득되니, 일찍이 수습하였던 이도 있고, 아직 수습하지 않은 자도 있기 때문이다.48)
  네 가지 무색정의 해탈(즉 제4에서 제7의 해탈)과 두 가지 무색정의 변처(즉 공·식무변처의 변처)는 각기 3계의 몸에 의지하여 일어나지만, 그 밖의 공덕은 오로지 인취에 의지할 뿐이니, 요컨대 그것은 가르침의 힘[敎力]에 의해 인기되기 때문이다.49)
  그리고 [멸진정을 제외한 일곱 가지 해탈과 8승처와 10변처는] 이생과 성자가 모두 능히 바로 일으킬 수 있다.
  
  그렇다면 온갖 유정이 색·무색계에 태어나 존재하면서 정려와 무색정을 일으키는 것은 어떤 다른 인연에 의해서인가?50)
  게송으로 말하겠다.
  
  
  
47) 본론 권제5의 멸진정의 항목에서 논설하였다. 즉 부처님의 경우 이염득이지만, 그 밖의 성자는 가행득 이며, 욕·색계신에 의지하여 일어나며, 성자만이 일으킬 뿐 이생은 일으킬 수 없다.
48) 일찍이 수습하여 그것을 일으켰던 자는 이염에 의해 획득하지만, 일찍이 수습하지 않아 일으킨 적이 없었던 자는 가행에 의해 획득한다.
49) 즉 가르침은 인취 중에만 있는 것으로, 천취 중에는 없다. 설령 그곳에 현저한 즐거움이 있다 할지라 도 그것을 처음으로 일으킬 수는 없다. 따라서 인취에서 처음으로 일으키고, 그곳에서 물러나 욕계천(天)에 태어난 후 숙세(즉 인취)에서 익힌 힘에 의해 비로소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50) 앞에서 무색정의 해탈과 변처를 제외한 그 밖의 선정은 오로지 성교가 존재하는 욕계 인취의 세 주(洲 )에서만 일어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색·무색계에서는 어떻게 그 같은 선정을 일으킬 수 있는가 하는 물음.(『대비바사론』 권제153, 한글대장경124, p.64-6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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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계(界)에서는 원인과 업에 의해
  능히 무색정을 일으킬 수 있으며
  색계에서 정려를 일으키는 것은
  또한 법이력(法爾力)에 의해서이다.
  二界由因業 能起無色定
  色界起靜慮 亦由法爾力
  
  논하여 말하겠다. 상 2계에 태어나는 경우에는 모두 세 가지의 인연에 의해 능히 색계와 무색계의 선정을 인기하게 된다.
  첫째는 원인의 힘[因力]에 의해서이니, 이를테면 일찍이 가까이서 닦았거나 자주 닦았던 바가 선정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51)
  둘째는 업의 힘[業力]에 의해서이니, 이를테면 일찍이 상지의 생을 초래할 만한 순후수업(順後受業) 등을 지었을 경우, 장차 그러한 업의 이숙을 일으켜 현전하게 하려는 세력이 능히 그 같은 선정을 일으키게 하니, 만약 하지의 번뇌를 떠나지 않았다면 필시 결정코 상지에 태어나는 일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법이력(法爾力), 즉 저절로 그렇게 되는 힘에 의해서이다. 이를테면 기세계(器世界)가 장차 허물어지려고 할 때, 하지의 유정은 저절로 능히 상지의 정려를 일으키는데,52) 이러한 단계에서는 존재하는 선법이 모두 저절로 그렇게 되는 힘에 의해 증가하고 왕성해지기 때문이다.
  즉 온갖 유정으로서 상 2계 중에 태어난 자는 원인과 업의 힘에 의해 무색정을 일으키며, 저절로 그렇게 되는 힘에 의해서는 일으키지 않으니, 무운천(無雲天, 제4정려의 제1천) 등은 3재(災)로 인해 허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53) 또한 색계에 태어나 머물 때에는 앞의 두 가지 인연과 저절로 그렇게
  
  
51) 어떤 사람이 무색정을 일으켰거나 혹은 자주 닦다가 물러나 색계에 태어나는 경우, 무색정의 동류인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색계에서 그는 능히 무색정을 일으키는데, 전자를 '가까이서 닦았던 것[近修]에 의한 것' 이라 하고, 후자를 '자주 닦았던 것[數修]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52) 본론 권제12(p.556)의 논설 참조.
53) 제4정려는 8재환을 떠난 부동(不動)이기 때문에(본론 권제28, p.1293), 그것의 하늘에도 화·수·풍의 3재가 없다.(본론 권제12, p.587 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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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되는 힘에 의해 정려를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만약 욕계에 태어나 상지의 선정을 일으킬 때에는 이 밖의 가르침의 힘[敎力]에 의해서도 각각의 선정을 일으키게 된다는 사실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의 법문에 대해 분별하였는데, 이는 모두 세존의 정법(正法)을 널리 지니게 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정법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응당 어느 때에 머무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부처님의 정법에는 두 가지가 있어
  교법(敎法)과 증법(證法)을 본질로 하니
  지니고 설하고 행하는 자가 있으면
  이것은 바로 세간에 머물 것이리라.
  佛正法有二 謂敎證爲體
  有持說行者 此便住世間
  
  논하여 말하겠다. 세존의 정법(正法)은 그 자체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교법(敎法)이며, 둘째는 증법(證法)이다. 교법이란 이를테면 계경(契經)과 조복(調伏)과 대법(對法)을 말하며,54) 증법이란 3승의 온갖 보리분법(菩提分法)을 말한다.55)
  
  
54) 계경·조복·대법은 경(sutra)·율(vinaya)·논(abhidharma) 3장을 말한다. 여기서 대법은 단지 승의 의 무루지로 나아가기 위한 방편 자량일 뿐이지만(본론 권제1 참조), 『현종론』 권제40(한글대장경201, p.642)에서는 아비달마를 대법(對法)이라 하지 않고 승법(勝法) 즉 '뛰어난 승의의 법'으로 논설하고 있는데, 이는 세친과는 차별되는 중현 아비달마관이다. 참고로 『분별공덕론』 제1에서는 아비달마를 '대법(大法)' 혹 은 '무비법(無比法)'으로 번역하고 있다.
55) 불타의 정법에는 깨달음 그 자체인 37보리분법과 그것을 언어적 방편을 통해 나타낸 경·율·논이 있 는데, 전자가 승의정법으로 깨달음[自證]의 대상이라면, 후자는 세속정법으로 분별, 즉 이해[敎]의 대상이다. 다시 말해 불타의 깨달음 그 자체는 말로서 드러낼 수 없는 자증의 궁극적 도리[宗趣]이며, 교법은 언어적 개 념적 이해인 가르침의 도리[言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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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능히 받아 지니고 올바로 설하는 자가 있으면 부처의 올바른 증법은 바로 세간에 머물게 된다. 따라서 세 사람(지니는 자와 설하는 자와 행하는 자)이 세간에 머무는 시간에 따라 정법도 그 만큼의 시간 동안 머물게 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56)
  그런데 어떤 이는 해석하기를, "증법은 오로지 천 년만 머물 뿐이며, 교법이 머무는 때는 이를 초과한다"고 하였다.57)
  이 논은 아비달마를 근거로 하고 거기에 포섭되는데,58) 어떠한 이치에 근거하여 대법을 해석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가습미라 비바사사에 의해 그 이치가 이루어졌으니
  나는 대다수 그것에 의거하여 대법을 해석하였는데
  조금이라도 폄훼하여 헤아렸으면 그것은 나의 과실로서
  법의 올바른 이치는 모니(牟尼)만이 판별할 뿐이다.59)
  迦濕彌羅議理成 我多依彼釋對法
  
  
  
56) '지니는 자[持者]'란 바로 설하는 자[說者]'와 '행하는 자[行者]'를 말하는 것으로, '교'의 정법은 설 하는 자에 의해, '증'의 정법은 행하는 자에 의해 세간에 머물게 되지만, 행하는 자는 교법에도 역시 의지하 므로 증법이 세간에 머물 때 교법도 역시 머물게 된다. 따라서 교법이 세간에 머무는 것은 설하는 자와 행하 는 자 때문이며, 증법이 머무는 것은 다만 행하는 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현종론』 권제40, p.643)
57) 즉 천 년을 지나서는 성법을 획득하지 못할지라도 그 때에도 역시 지니는 자와 설하는 자가 있기 때문 에 천 년을 지나서도 교법은 지속한다는 뜻.
58) 그래서 본론을 대법(對法) 즉 '아비달마'라고 하지 않고 대법장(對法藏) 즉 아비달마코샤(abhidharmakosa)라고 한 것이다.(본론 권제1, p.3 참조)
59) 세친은 '대다수 대법에 근거하였다'고 하여 이 논을 전적으로 가습미라 비바사사의 설에 의존하지 않 았으며, 아울러 경부의 설로써 폄훼하였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중현은 『현종론』 권제40(앞의 책, p.643)에서 '나는 오로지 그것에 의거하여 대법(對法)을 해석하였으니, 혹 그것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의 과실이다(我唯依彼釋對法 或有差違是我失)'로 고쳐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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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少有貶量爲我失 判法正理在牟尼
  
  논하여 말하겠다. 가습미라(迦濕彌羅) 비바사사(毘婆沙師)들이 논의한 아비달마는 그 이치가 매우 잘 성립된 것으로,60) 나는 대다수 그것에 의거하여 대법(對法)의 종의를 해석하였다. 그러나 조금이라고 폄훼하여 헤아린 바가 있으면 그것은 나의 과실이니, 법의 올바른 이치는 오로지 세존과 여러 여래 대성(大聖)의 제자들만이 판별할 수 있을 뿐이다.61)
  대사(大師)의 진리의 눈[法眼]은 이미 감기셨고,
  그것을 증명할 만한 자도 대다수 산멸(散滅)하였으니,
  진리를 보지 못해 자재함이 없는 이들이
  어지러운 생각[尋思]으로써 성교를 어지럽히네.
  
  스스로 깨치신 분은 이미 뛰어난 적정에 드셨고,
  그의 가르침을 지니는 자들도 대다수 따라 열반하였으니,
  세간에 의지할 만한 이가 없고 온갖 공덕이 상실되매
  갈고리(정법)의 제압이 없어 번뇌가 제멋대로 일어날 뿐이네.
  
  이미 여래정법의 수명이 점차 쇠망하여
  마치 목숨이 목구멍에 이른 것과 같음을 알았으니,62)
  바로 이같이 온갖 번뇌의 힘이 증성할 때일수록
  마땅히 해탈을 추구하여 게으르지 말아야 할 것이리라.
  
  
60) 가습미라(Kasm ra, 혹은 罽賓, 오늘날 카슈미르)는 북인도 간다라[犍馱羅] 동북쪽의 히말라야 산록에 위치한 나라로서, 바로 『아비달마대비바사론』이 저술된 곳이다.(이에 반해 본론은 간다라에서 저술되었음) 그리고 비바사사(Vaibhasika)란 비바사론(Vibhasa-sastra)을 존중하는 이를 말하는데, 경(經)이나 율(律)을 존중하는 이와 대비된다.
61) 그러나 중현에 의하면 위대한 모니존(牟尼尊)께서만이 모든 법의 올바른 이치를 결정하고 판별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아비달마는 진실로 불설(佛說)이다.
62) 즉 정법의 주세(住世)가 천 년일 경우, 세친의 출세는 불멸(佛滅) 900년이므로 이는 장차 정법이 멸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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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파집아품(破執我品) ①
  
  이것(즉 불타정법)을 벗어나 다른 가르침에 의지한다 한들 어찌 해탈이 없다고 할 것인가?63)
  이치상 필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허망한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 말미암아 미혹되고 뇌란되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이러한 정법 이외에 온갖 이들이 주장하는 아(我)는 바로 온(蘊)의 상속상에 일시 설정된 것이 아니라 '온을 떠난 아[離蘊我]'가 진실로 존재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곧 '아'에 대해 집착하는 힘으로 말미암아 온갖 번뇌가 생겨나고, 3유(有)를 윤회하여 결코 해탈할 수 없는 것이다.64)
  어떠한 논거로써 온갖 '아'라고 하는 말은 오로지 온의 상속을 가리키는 것일 뿐 개별적으로 실재하는 '아' 자체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안 것인가?
  그들이 생각하는 온을 떠나 [개별적으로 실재하는] '아'는 진실로 현량(現量, 직접지각)이나 비량(比量, 추리)에 의해 알려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아' 자체가 그 밖의 다른 어떤 법이 존재하는 것처럼 개별적인 실체[實物]로서 존재하는 것이라면, 장애하는 조건[障緣]이 없을 경우 6경(境)이나 의근처럼 마땅히 현량에 의해 인식되어야 할 것이며,65) 혹은 5색근(色根)처럼 비량으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5색근이 비량에 의해 획득된다고
  
  
63) 보광에 의하면 앞의 「정품」 말미의 게송에서 '마땅히 해탈을 추구하여 게으르지 말아야 하리라'고 말한 것을, '이 같은 불타의 정법만이 해탈의 방편으로 그 밖에 달리 해탈의 방편이 없기 때문에 해탈을 구하 는 자는 이러한 정법을 익히는 데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이 같은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64) 이는 이하에서 논의하는 것처럼 독자부(犢子部) 혹은 승론(勝論)의 주장이다. 그렇지만 독자부의 경우 단순히 온을 떠난 개별적 실체로서의 자아가 아니라 '온과 동일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온을 떠난 것도 아 닌, 불가설의 자아[非卽非離蘊我]'를 주장하고 있다.
65) 색·성·향·미·촉의 5경은 안 등의 전5식에 의해 직접지각되며, 법경으로서 관행자(觀行者, 즉 瑜伽 師)의 경계가 되는 것도 직접지각된다. 그리고 등무간멸(전찰나)의 의근은 무간생(후찰나)의 의근에 의해 어 떤 매개물 없이 바로 요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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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는 말은 세간에서 현견(現見)되는 것과 같다. 즉 비록 온갖 연(緣)을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별도의 연이 결여될 경우 결과는 생겨나는 일이 없지만 결여되지 않았을 경우 바로 생겨나니, 마치 종자가 씨앗을 낳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견(見)'에 있어서도 역시 비록 현재찰나의 대상과 작의(作意) 등의 연을 갖추고 있다 할지라도 모든 장님과 귀머거리, 그렇지 않은 정상인[不盲聾]에게 그러한 등등의 인식이 일어나지 않고 일어나는 것은 별도의 연이 결여된 것인가, 결여되지 않은 것인가에 따른 것임을 결정코 알아야 한다. 여기서 '별도의 연'이란 바로 안(眼) 등의 근으로, 이 같은 사실을 일컬어 '색근은 비량에 의해 인식된다'고 말한 것이다.66) 곧 온을 떠나 [개별적으로 실재하는] '아'는 두 가지 인식방법[量]에 의해 결코 인식되는 일이 없으니, 이러한 사실로 말미암아 '진실의 자아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독자부(犢子部)에서는 "보특가라(補特伽羅, pudgala)가 존재하니, 그것 자체는 온과 동일한 것도 아니며, 다른 것도 아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그것을 실유(實有)라고 해야 할 것인가, 가유(假有)라고 해야 할 것인가?(논주 세친)
  실유와 가유의 상의 차별은 어떠한가?(독자부)
  색이나 소리처럼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은 바로 실유의 상이며, 젖이나 낙(酪)처럼 단지 적취물로서 존재하는 것은 가유의 상이다.(세친)
  실유로 간주하거나 가유로 간주할 경우, 거기에는 각기 어떠한 과실이 있는 것인가?(독자부)
  만약 보특가라 자체가 바로 실유라고 한다면 마땅히 온과는 달라야 할 것
  
  
  
  
66) 비록 습도나 광선 온도 등의 온갖 조건[衆緣]이 갖추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그와는 별도의 조건 즉 씨 앗이 없으면 싹이 생겨나지 않는 것처럼 비록 색 등의 대상과 그것을 인식하겠다는 작의(作意) 등의 조건이 갖추어져 있을지라도 안근 등의 5색근이 존재하지 않으면 그에 대한 인식은 일어날 수 없다. 곧 5식의 작용은 5색근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5식을 통해 5색근의 존재는 추리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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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니, 각각의 개별적인 온처럼 그 자성이 온과는 별도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실체로서 존재한다면 필시 마땅히 원인을 갖어야 할 것이며, 혹은 마땅히 무위(無爲)여야 할 것으로, 이는 바로 외도의 견해와 동일한 것이다.67) 또한 마땅히 그 작용도 없어야 할 것이니, 그럴 경우 [무슨 이익이 있어] 실유의 보특가라를 주장할 것인가?68) 그러나 만약 보특가라 자체가 가유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설하는 바와 동일하다.(세친)
  우리가 설정한 보특가라는 그대가 따지고 있는 실유나 가유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현재세에 포섭되는 내적인 유집수(有執受)의 제온(諸蘊)에 근거하여(skandhan upadaya) 보특가라를 설정할 수 있다고 한 것일 뿐이다.69)(독자부)
  이 같은 기만의 말은 그 의미가 아직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에 나는 잘 알지 못하겠다. 여기서 무엇을 일컬어 '근거'라고 한 것인가? 만약 '제온을 취[攬]하여(skandhan grh tva)'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 같은 '근거'의 뜻이라고 한다면 이미 제온을 취하여 보특가라가 성립한 것으로, 그럴 경우 보특가라는 마땅히 가유가 되어야 할 것이니, 젖이나 낙(酪) 등이 색(色) 등을 취하여 이루어진 것과 같다.70) 또한 만약 '제온을 원인[因]으로 하여(skandhan prat tya)'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 같은 '근거'의 뜻이라고 한다면, 이미 제온을 원인으로 하여 보특가라가 설정되었으므로 보특가라 역시 이러한 온과 동일하다는 과실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71)(세친)
  
  
67) 즉 보특가라가 실체라면, 그것은 원인으로부터 생겨난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만약 전자라고 한 다면 그것은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결국 무상한 것으로 상주의 실체가 아니어야 할 것이며, 만약 후자라고 한 다면 그것은 바로 허공처럼 원인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닌 무제약적 존재(무위)이기 때문에 외도가 주장하는 자아(atman)와 같은 것이 되고 만다.
68) 보특가라가 만약 무위 즉 무제약적 초월적 존재라면 현상의 어떠한 작용도 갖지 않을 것이고, 만약 작 용이 없다고 한다면 실유의 보특가라를 주장한들 무슨 이익이 있을 것인가 하는 논주 세친의 힐난.
69) 즉 독자부에서 설정한 보특가라는 온과는 독립된 개별적 실재라거나 혹은 그 취합물을 일시 그 같은 명칭으로 일컬은 것이 아니라 다만 현재에 신체 내부에 있으면서 지각하고 인식하는 행위의 주체로서 설정된 개념이라는 뜻.
70) 젖이나 낙(일종의 요구르트)은 색·향·미·촉 등을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화합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것은 실유가 아니라 가유이다.
71) 만약 제온의 취집을 원인으로 하여 보특가라를 설정하였다고 한다면 보특가라도 역시 제온과 마찬가지 로 그 자체 가유가 되어야 하며(경량부에 의하는 한 온은 가유이다. 본론 권제1, p.38 주77 참조), 이는 더 이상 독자부가 주장하는 보특가라가 아니다.(『구사론기』 권제29, 대정장41, p.440상) 참고로 본 「파아품」 은 전적으로 경량부의 입장에서 논설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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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와 같은 방식으로 설정되지 않았다.(독자부)
  그렇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설정된 것인가?(세친)
  이는 마치 세간에서 땔감에 근거하여 불을 설정하는 것과 같다.(독자부)
  어떻게 땔감에 근거하여 불을 설정한 것이라고 설할 수 있는 것인가?(세친)
  이를테면 땔감을 떠나 불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땔감과 불은 다른 것도 아니며 동일한 것도 아니다. 만약 불이 땔감과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각기 서로 개별적 실체라고 한다면) 땔감은 마땅히 뜨겁지 않아야 할 것이며, 만약 불이 땔감과 동일한 것이라고 한다면 태워지는 것이 바로 능히 태우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온을 떠나 보특가라를 설정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보특가라는 온과 다른 것도 아니고 동일한 것도 아니다. 만약 [보특가라가] 온과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상주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며, 만약 온과 동일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자체는 마땅히 단멸을 성취해야 하는 것이다.(독자부)
  그대는 지금 여기서 바야흐로 '무엇을 불이라 하고 무엇을 땔감이라고 하는가'에 대해 마땅히 설하여 나로 하여금 '불은 땔감을 근거로 한다'는 사실의 뜻을 알도록 해야 할 것이다.(세친)
  [불과 땔감에 대해] 마땅히 설해야 할 것이 무엇이 있을 것인가? 그러나 만약 설하라고 한다면 마땅히 '태워지는 것[所燒]'은 바로 땔감이며, '능히 태우는 것[能燒]'은 바로 불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독자부)
  그렇다면 여기서 마땅히 다시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니, 무엇이 태워지는 것이고, 무엇이 능히 태우는 것이기에 '땔감'이라 이름하고 '불'이라 이름하는 것인가?(세친)
  바야흐로 스스로 타지 않는 것으로서 태워지는 온갖 사물을 일컬어 '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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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는 땔감'이라 하고, 온갖 광명을 갖고 지극히 뜨거우며 [스스로] 타올라 능히 태우는 사물을 일컬어 '능히 태우는 불'이라고 한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니, 이것(불)은 그 같은 사물의 상속을 능히 태워 다음다음의 찰나를 그 전찰나와는 다르게 하기 때문이다. 즉 이것(불)과 저것(땔감)은 비록 8사(事)를 본질로 하는 것일지라도,72) 땔감을 근거[緣]로 하였기 때문에 불은 비로소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니, 마치 젖과 술을 근거로 하여 낙(酪)과 초(醋)가 생겨나는 것과 같다.73) 그래서 세간에서는 다 같이 '땔감을 근거로 하여 불이 존재한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독자부)
  만약 이러한 이치에 따를 경우 불은 땔감과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니, 후찰나의 불과 전찰나의 땔감은 각기 시간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그대가 생각하는 보특가라가 마치 불이 땔감에 근거하는 것처럼 제온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결정코 마땅히 '이러한 보특가라는 온을 근거로 하여 생겨난 것으로, 그 본질은 제온과 다르며, [그럼에도] 무상성을 성취한다'고 설해야 하는 것이다.74)
  또한 만약 타고 있는 나무 따위의 난촉(煖觸, 火의 자상)을 '불'이라 이름하고, 그 밖의 사물(8사 중 난촉을 제외한 7事)을 '땔감'이라고 이름한다면, 이는 즉 불과 땔감이 동시에 생기한 것[俱生]이면서 마땅히 다른 존재[異體]가 되어야 할 것이니, 자상[相]이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마땅히 '근거한다[依]'는 뜻에 대해서도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니, 이것들이 이미 동시에 생기한 것이라면 어떻게 '땔감을 근거로 하여 불을 설정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
  
  
  
72) 그것이 땔감이든 불이든 현상계의 모든 물질은 견(堅)·습(濕)·난(煖)·동(動)을 본질로 하는 지·수 ·화 ·풍의 4대종과 색(色)·향(香)·미(味)·촉(觸)의 4대소조생의 집적(8事俱生)이지만, 인연에 따라 그 세력이 나타나기도 하고 감추어지기도 한다.(본론 권제4, p.156 초 참조)
73) 전찰나의 젖을 연(緣)으로 하여 후찰나에 낙(요구르트)이 생겨나는 것처럼, 전찰나의 땔감을 연으로 하여 후찰나에 불이 생겨나게 된다는 뜻.
74) 즉 전찰나의 땔감을 연으로 하여 후찰나의 불이 생겨나듯이 자아(보특가라)가 제온을 연으로 하여 생 겨나는 것이라고 할 경우, 여기에서는 다음의 세 뜻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 자아는 제온을 연으로 하여 생겨 난 것이다. 둘째, 자아의 본질은 제온과는 다른 것이다. 셋째, 자아는 일찍이 없다가 지금 존재하므로 무상성 을 성취해야 한다. 그럼에도 독자부에서는 자아를 온과 다른 것이 아니며, 또한 무상한 것도 아니라고 하였으 므로 앞의 설과 모순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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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 즉 이 때(동시 생기할 때)의 불은 땔감을 원인으로 삼은 것이 아니니, 각기 자신의 원인으로부터 동시에 생기하였기 때문이다.75) 또한 이 때 불이라는 명칭은 땔감을 원인으로 하여 설정된 것이 아니니, 불이라는 명칭은 난촉(煖觸)을 원인으로 하여 설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앞에서 설한 '불은 땔감을 근거로 한다'는 말이 동시 생기[俱生] 혹은 근거[依止]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럴 경우 보특가라는 온과 구생하거나 혹은 온에 의지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인정해야 할 것이니, 이는 이미 그 자체 온과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치상으로 볼 때 땔감이 존재하지 않으면 불 자체도 역시 존재하지 않듯이, 제온이 존재하지 않으면 보특가라 자체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땅히 인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그대는 그 같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니, 그렇기 때문에 그대의 해석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독자부)은 여기서 스스로 힐난하여 말하기를, "만약 불이 땔감과 다른 것이라면(각기 서로 개별적인 실체라고 한다면) 땔감은 마땅히 뜨겁지 않아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그럴 경우 그들은 마땅히 뜨거움이란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 결정코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그들이 '뜨거움이란 이를테면 난촉(煖觸)을 말한다'고 해석한다면 땔감은 뜨거워지지 않을 것이니, 그 본질이 다르기 때문이다.76) 또한 만약 '[땔감의] 뜨거움이란 난상(煖相)과 화합한 것을 말한다'고 해석한다면 [난(煖)과는] 다른 존재(즉 7事)도 역시 '뜨거움'이라는 명칭을 획득하여야 할 것으로, 실제적으로도 '불'이라는 명칭은 오로지 난촉에 근거한 것이지만 그 밖의 난상과 화합한 것도 모두 '뜨거움'이라는 명칭을 획득할 수 있다.77) 그런즉 '땔감을 일컬어 뜨거운 것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
  
  
75) 만약 불과 땔감이 구생하는 것이라면 땔감은 땔감의 원인으로부터, 불은 불의 원인으로부터, 각기 자 신의 과거 동류인으로부터 동시에 생겨난 것이며, 그럴 경우 불은 땔감을 원인으로 하여 생겨났다고 한 앞의 주장과는 모순되는 것이다.
76) 뜨거움을 난촉(火大의 자상)으로, 땔감을 그 밖의 7사(事)로 해석할 경우, 그것들은 각기 존재양태[體 相]가 다르기 때문에 '땔감과 불이 다른 것이라면 땔감은 마땅히 뜨거워지지 않아야 한다'고 한 독자부의 힐 난은 바로 그들 자신에게 적용되고 만다는 뜻.
77) 즉 물[水]이나 바람[風] 혹은 맛[味] 또한 난상(煖相)과 화합하면 뜨거운 물, 뜨거운 바람, 뜨거운 맛 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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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땔감과 불이 다른 것일지라도 [그럴 경우 '땔감이 뜨겁지 않게 된다'는] 허물은 성취되지 않으니, 어떻게 앞서 언급한 그 같은 사실로써 힐난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만약 '나무 등이 두루 탈 때를 설하여 땔감이라 이름하고 또한 역시 불이라고도 이름한다'고 할 경우, 마땅히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니, 그 때 '근거'라는 뜻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78) 곧 보특가라와 색 등의 온은 결정코 마땅히 동일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이 같은 사실을 능히 부정할 만한 어떠한 이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주장한 "마치 땔감을 근거로 하여 불을 설정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온을 근거로 하여 보특가라를 설정한다"고 하는 말은 앞뒤로 따져 보아도 그 이치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들(독자부)이 만약 "보특가라는 온과 동일한 것이라고도, 다른 것이라고도 다 같이 설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들이 인정하는 3세(世)와 무위법과 아울러 불가설(不可說)의 다섯 종류의 이염(爾焰, jneya)에 대해서도 역시 마땅히 설할 수 없어야 할 것이니, 보특가라를 다섯 번째라거나 다섯 번째가 아니라고도 설할 수 없기 때문이다.79)
  
  
78) 나무 등이 탈 때를 땔감이라고도 하고 불이라고도 한다면, 다시 말해 불과 땔감이 개별적인 존재가 아 니라고 한다면(개별적 존재라고 한다면 땔감은 뜨겁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무엇을 태워지는 것[所依]이라 하고, 무엇을 능히 타는 것[能依]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즉 불과 땔감은 능의와 소의의 개별적 관계가 아니 듯이 보특가라와 제온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는 뜻.
79) 여기서 '이염'은 소지(所知) 즉 알려지는 대상. 독자부에서는 마땅히 알아야 할 법장(法藏)으로서 과 거·현재·미래의 3세의 5온과 무위법과 바로 이 같은 불가설의 보특가라를 들고 있다. 즉 보특가라는 생사의 유위에서는 5온과의 일이(一異)를, 열반에서는 무위와의 일이를 설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제5의 불가설 법장 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들이 설하는 5종의 소지도 역시 5종이 있다고 설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자아(보특가라)와 앞의 네 법장이 다르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제5의 법장이라고도 설할 수 없으며, 동일하다고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제5의 법장이 아니라고도 설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제5가 아닌 것은 바로 앞의 네 가지 법장인데, 제5라고도 제5가 아니라고도 설할 수 없는 것이라면 단지 앞의 네 가 지 법장만을 설하여야 하지 제5의 법장을 별도로 설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같은 독자부의 5법장설에 대 한 논파는 『성실론』 권제3 「유아무아품」 제35(대정장32, p.260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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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그들이 시설(施設)한 보특가라에 대해 마땅히 다시 확실하게 진술해 보아야 할 것이니, 무엇에 의탁하고 있는 것인가? 만약 온에 의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가설적(假說的)인 것이라는 뜻이 이미 성취된 셈이니, 시설된 보특가라는 보특가라에 의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이같이 시설된 보특가라가 보특가라에 의탁하는 것(즉 자기 원인적 존재)이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앞에서 제온을 근거로 하여 설정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인가? 이치상 다만 보특가라를 근거로 하여 설정한 것이라고 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그 같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오로지 온에 의탁하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이 시설한 보특가라는 가설적인 것이다.]
  또한 만약 온이 존재하기에 이것(보특가라)을 바로 알 수 있으며, 그래서 앞에서 '이것은 온을 근거로 하여 설정하였다'고 한다면,80) 이는 바로 온갖 색(色)은 안(眼) 등의 연(緣)이 있어야 비로소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색 등도] 마땅히 '안 등을 근거로 하여 설정하였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이상 세친)
  또한 바야흐로 마땅히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니, 보특가라는 6식(識) 중의 어떠한 식에 의해 알려지는 것인가?(세친)
  6식에 의해 알려진다.(독자부)
  그 까닭은 무엇인가?(세친)
  만약 어느 때 안식이 색을 인식하면 이로 인해 보특가라가 존재함을 아니, 이 같은 사실을 설하여 '안식에 의해 알려진다'고 하였다.81) 그렇더라도 [이 때의 보특가라를] 색과 동일하다거나 다른 것이라고는 설할 수 없다.82) 나아
  
  
80) 다시 말해 온이 존재하여야 능히 그 같은 경험의 주체로서의 자아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자아를 알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보특가라는 제온을 근거로 하여 설정하였다고 말한다면'의 뜻.
81) 만약 안식 등이 꽃을 인식하면, '나는 꽃을 보았다'고 생각하므로 자아(보특가라)의 존재는 안 등의 6 식을 통해 확인된다는 것이다.
82) 보특가라는 색상(色相)이 없기 때문에 색과 동일하다고 설할 수 없으며, 불가설이기 때문에 색과 다르 다고도 설할 수 없다. 즉 독자부에서 말하는 보특가라는 보여지고 들려지고 인식되는 것과 같은 것도 아니며 다른 것도 아닌, 그 같은 인식을 통해 추리되는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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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 어느 때 의식이 법을 인식하면 이로 인해 보특가라가 존재함을 아니, 이 같은 사실을 설하여 '의식에 의해 알려진다'고 하였다. 그렇더라도 [이 때의 보특가라를] 법과 동일하다거나 다른 것이라고는 설할 수 없는 것이다.(독자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대들이 생각한 보특가라는 마땅히 젖 따위처럼 오로지 가설적으로 시설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안식이 온갖 색을 인식할 때, 만약 이로 인해 능히 젖 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라고 한다면, 젖 등은 '안식에 의해 알려진다'고 바로 설할 수 있을지라도 색법과 동일하다거나 다른 것이라고는 설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내지는 신식이 온갖 촉을 인식할 때, 만약 이로 인해 능히 젖 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라고 한다면, 젖 등은 '신식에 의해 알려진다'고 바로 설할 수 있을지라도 촉법과 동일하다거나 다른 것이라고는 설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즉 [동일하다고 한다면] 젖 등은 네 가지(색·향·미·촉)를 성취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며, 혹은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네 가지에 의해 성취된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83)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마치 세간에서 색 등(향·미·촉) 모두에 근거하여 젖 등을 시설한 것과 마찬가지로 마땅히 제온 모두에 근거하여 '보특가라가 존재한다'고 일시 시설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으로, 이러한 존재는 바로 가설적인 것이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들이 설한, '만약 어느 때 안식이 색을 인식하면 이로 인해 보특가라가 존재함을 안다'고 하는 이 같은 말은 무슨 뜻인가? 온갖 색이 바로 보특가라를 요별하는 근거[因]가 된다는 말인가, 색을 요별할 때 보특가라 역시 요별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만약 '온갖 색은 바로 이러한 보특가라를 요별하는 근거가 되지만, 그러나 이것은 색과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설한
  
  
  
83) 즉 젖 등이 색·향·미·촉의 4진(塵)과 동일한 것이라고 한다면 젖 등은 색 등을 성취하지 않게 되는 과실이 있으며, 만약 색 등과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젖 등은 4진에 의해 성취된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 과 실을 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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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면, 이는 곧 온갖 색은 안(眼)과 밝음[明]과 작의(作意) 등의 조건[緣]을 요별의 근거로 삼기 때문에 마땅히 색이 안 등과 다른 것이라고 설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84) 그러나 만약 '색을 요별할 때 이것(보특가라)도 역시 요별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색을 능히 요별하는 것(즉 안식)이 바로 이것도 능히 요별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이것을 능히 요별하는 별도의 [안식이]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색을 능히 요별하는 것이 바로 이것도 능히 요별한다'고 한다면, 마땅히 이러한 자아 자체가 바로 색이라고 하거나, 혹은 오로지 색에 대해서만 이것을 일시 설정하는 것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혹은 마땅히 '이러이러한 것은 바로 색이고 이러이러한 것은 바로 이 같은 자아이다'와 같은 분별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니,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이와 같은 두 종류의 분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색이 존재한다'거나 '보특가라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곧 존재성[有性]은 바로 분별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85) 나아가 만약 '이것을 능히 요별하는 별도의 [안식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요별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이는 마땅히 색과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니,86) 마치 노란색이 푸른색과 다르고 전찰나의 법과 후찰나의 법이 다른 것과 같다.87)
  나아가 법에 대해서도 역시 이와 같이 따져 힐난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같은 힐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를테면 이것(보특가라)과 색은 결정코 동일하다거나 다르다고 설할 수 없으며, 능히 요별하는 두 가지 종류의 식을 서로 비교해 보아도 역시 그러하다고 말한다면,88) 이 때 '능히
  
  
84) 온갖 색은 안(眼) 등의 연(緣)을 요별의 근거로 삼기 때문에 안 등과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면, 꽃을 볼 경우 그것이 눈과 다르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인가 하는 힐난.
85) 존재성[有性] 즉 자상을 갖는 실체로서의 법(法, dharma)은 현량과 비량의 분별에 의해 설정된 것으로 , 분별되지 않은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존재의 유무조차 논의할 수 없다.
86) 색을 요별하는 안식과 보특가라를 요별하는 안식은 동시에 일어날 수 없다.(그럴 경우 2心 不俱起의 원칙에 위배됨) 따라서 자아는 색과 달라야 하는 것이다.
87) 노란색과 푸른색은 각기 개별적인 것으로서, 전자가 인식될 때 후자는 인식되지 않으며, 후자가 인식 될 때 전자는 인식되지 않는다.
88) 즉 색을 능히 요별하는 식과 자아를 능히 요별하는 식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여 색을 능히 요별하는 식 이 바로 자아를 능히 요별하는 식이라고도 설할 수 없으며, 색을 능히 요별하는 식과는 별도로 자아를 능히 요별하는 식이 존재한다고도 설할 수 없다고 한다면……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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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별하는 식'은 마땅히 유위에 포섭되지 않아야 할 것이며,89) 만약 그렇다고 인정한다면 바로 [오로지 자아만이 불가설이라는] 자신의 종의를 허무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이상 세친)
  또한 만약 '색(色)이라고도, 비색(非色)이라고도 설할 수 없는 진실의 보특가라가 존재한다'고 한다면, 세존께서는 어째서 "색(色) 내지 식(識)에는 모두 아(我)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90)
  또한 그들(독자부)은 보특가라는 안식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라고 이미 인정하였는데, 이와 같은 안식은 색경(色境)과 이 같은 보특가라, 그리고 두 가지 모두 가운데 무엇을 소연으로 삼아 일어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색을 소연으로 삼아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안식이 능히 보특가라를 요별한다고 설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것은 성처(聲處) 등과 마찬가지로 안식의 소연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어떤 식이 이러한 경계(색)를 소연으로 삼아 일어났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이러한 경계를 소연연(所緣緣)으로 삼았을 뿐 보특가라는 안식의 소연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어째서 [앞에서] 안식의 소연이 될 수 있다('안식에 의해 알려진다')고 설한 것인가?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보특가라는 결정코 안식에 의해 요별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안식이 이 같은 보특가라 혹은 두 가지 모두를 소연으로 삼아 일어난다고 한다면 경설에 위배될 것이니, 계경 중에서는 "식이 일어나는 것은 두 가지 연에 의한다"고 판별하고 있기 때문이다.91) 또한 계경에서 설하
  
  
89) 이 때 '능히 요별하는 식'은 자아처럼 불가설이기 때문에 그것을 유위법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뜻.
90) 『잡아함경』 권제10 제262경(대정장2, p.66중), " 색은 무상이다. 수·상·행·식은 무상이다. 일체 행은 무상이다. 일체법은 무아이고, 열반은 적정이다." ; 동 권제1 제24경(동, p.5중), " 諸所有色……彼一切 非我, 不異我, 不相在……如是受想行識……."
91) 『잡아함경』 권제8 제214경(대정장2, p.54상). 즉 만약 안식이 '아'를 소연으로 하여 일어난다면, 안 식은 안근과 색경과 '아'라고 하는 세 조건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되어 경설에 어긋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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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를, "안근을 인(因)으로 하고 색경을 연(緣)으로 삼아 능히 안식을 낳게 된다는 사실을 필추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존재하는 모든 안식은 다 안과 색을 연으로 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92) 또한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안식의 소연이 된다고 한다면) 보특가라는 마땅히 무상한 것이어야 할 것이니, 계경에서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계경에서는 설하기를, "온갖 인(因)과 온갖 연(緣)으로서 능히 식(識)을 낳는 것은 모두 다 무상한 존재이다"고 하였다.93)
  만약 그들(독자부)이 마침내 '보특가라는 식의 소연이 아니다'고 한다면, [자아는] 마땅히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며, 만약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 존재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만약 그 존재를 설정하지 않는다면 바로 자신의 종의를 허무는 것이 될 것이다.
  또한 만약 6식에 의해 인식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안식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이를테면 색과 같은 것으로 소리 등과는 다른 것이어야 할 것이며, 이식에 인식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이를테면 소리와 같은 것으로 색 등과는 다른 것이어야 할 것이며, 나아가 그 밖의 식에 인식되는 경우에 대해서도 이에 준하여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자아를] 설정하여 6식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바로 경설에 위배될 것이니, 이를테면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5근의 행처(行處)와 경계가 각기 다른 것임을 범지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각각의 근은 오로지 자신이 작용하는 처소[所行處]와 자신의 경계만을 수용할 뿐 다른 근으로서 다른 근의 행처와 다른 근의 경계를 역시 능히 수용하는 일은 없다. 여기서 5근이란 안·이·비·설·신을 말한다. 그렇지만 의근의 경우만은 5근의 행처와 그 경계 대상도 함께 수용하니, 그것(5근)들은 의근에 근거하기 때문이다."94) 혹은 보특가라가 바로 5근의 경계 대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
  
  
92) 『잡아함경』 권제9 제238경(대정장2, p.57하).
93) 『잡아함경』 권제1 제11경(대정장2, p.2상), " 色無常. 若因若緣, 生諸色者, 彼亦無常. 無常因無常緣 所有諸色 云何有常?"
94) 『중아함경』 권제58 『대구치라경(大拘絺羅經)』(대정장1, p.791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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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한다면, 마찬가지로 바로 5식에 의해 인식되는 것도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며, 그럴 경우 [자신의] 종의에 어긋나는 과실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이상 세친)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의근(意根)의 경계도 역시 마땅히 [다른 근의 경계와] 달라야 할 것이니, 『육생유계경(六生喩契經)』 중에서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 "이와 같은 6근의 행처와 경계에는 각각의 차별이 있어 각기 다른 자신의 작용을 행하는 처소와 자신의 경계만을 즐거이 추구[樂求]하는 것이다."95)(독자부)
  이 경에서는 안(眼) 등의 6근을 설한 것이 아니니, 안 등의 5근과 그것에 의해 생겨난 식에는 낙(樂)과 견(見) 따위의 세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96) 즉 여기서는 다만 안 등의 뛰어난 세력에 의해 인기된 의식(意識)을 설하여 안 등의 근이라고 이름한 것일 뿐이다. 즉 단독으로 작용[獨行]하는 의근의 뛰어난 세력에 의해 인기된 의식은 안 등의 5근이 작용하는 경계를 능히 즐거이 추구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의 뜻에는 앞서 언급한 사실과 위배되는 과실은 없다.
  또한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필추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나는 지금 그대들을 위하여 통달되는 것[所達]과 알려지는 것[所知]에 대한 법문을 모두 연설하리라.97) 그 본질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온갖 안
  
  
95) 『잡아함경』 권제43 제1171경(대정장2, p.313상). 즉 경에서는 제6의근도 자신의 소행처(所行處)와 경계가 있다고 하였지만, 의근은 실제적으로 법경만을 소연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전5근의 소연의 경계로 삼 는다. 그렇다면 이 같은 예에 따라 전5근도 비록 자신의 소행처와 경계만을 수용한다고 하였을지라도 그 밖의 다른 대상을 소연으로 삼는 경우도 고려해 볼 수 있다는 뜻.
96) 5근은 색을 자성으로 하며 전5식은 무분별이기 때문에 견(見)이나 낙(樂) 등의 어떠한 판단도 일어나 지 않는다.('견'이란 먼저 審慮하고 決度하는 것, 즉 제6의식 상응의 혜를 말한다. 본론 권제2, p.86) 그런데 경에서는 '즐거이 추구한다[樂求]'고 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안 등의 6근에 대해 설한 것이 아니라는 뜻.
97) 여기서 '통달되는 것[所達, abhijneya]'은 무간도로서 혜에 의해 달성되며, '알려지는 것[所知, parijneya]'은 해탈도로서 지(智)에 의해 알려진다. 즉 일체법은 모두 '혜'와 '지'에 의해 통달되고 알려지는 것으로, 그렇지 않은 그 밖의 것(이를테면 자아)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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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眼色)과 안식(眼識)과 안촉(眼觸)과, 안촉을 연으로 하여 내적으로 생겨난 수(受)로서, 그것은 혹은 낙(樂)이고 혹은 고(苦)이며, 혹은 불고불락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의촉(意觸)을 연으로 하여 내적으로 생겨난 수로서, 그것은 혹은 낙이고 혹은 고이며, 혹은 불고불락이다. 이것을 일컬어 일체의 통달되는 것과 알려지는 것이라고 한다." 즉 이 같은 경문에 의하여 일체의 통달되는 법과 알려지는 법은 오로지 그 같은 법만이 있는 것으로 결택 판단되니, 여기에 보특가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보특가라는 역시 또한 알려지는 것[所識]도 아니니, 혜(慧)와 식(識)의 대상은 반드시 동일하기 때문이다.
  '안근이 보특가라를 본다'고 주장하는 모든 이들은, 안근은 이것(색)이 소유한 상을 보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으로, 나 아닌 것[非我, 즉 이것(색)이 소유한 상]을 보고서도 '나'를 보았다고 하기 때문에 그들은 바로 악견의 깊은 구덩이에 거꾸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도 경 중에서 스스로 이 같은 뜻을 결택하여 '오로지 제온에 대해 보특가라를 설할 뿐이다'고 하였으니, 이를테면 『인계경(人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안근과 색경을 연으로 하여 안식을 낳으며, 삼사(三事)의 화합인 촉은 수(受)·상(想)·사(思)와 함께 일어난다. 여기서 뒤의 네 가지를 무색(無色)의 온이라 하고, 처음의 안근과 색을 일컬어 색온이라 하니, 오로지 이러한 근거[量]에 의해서만 인간[人]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즉 이러한 존재(제온)에 대해 각기 뜻의 차별에 따라 일시 명상(名想)을 설정하니, 혹 어떤 경우 유정(有情)이라 하기도 하고, 불열(不悅)·의생(意生)·유동(儒童)·양자(養者)·명자(命者)·생자(生者)·보특가라(補特伽羅)라고도 하는 것이다. 또한 역시 스스로 일컬어 '내 눈이 색을 본다'고 말하고, 또한 다시 세속(世俗)에 따라 이 구수(具壽)는 이름이 이와 같고, 종족이 이와 같고, 성류(性類)가 이와 같고, 먹고 마시는 것이 이와 같고, 받아 즐기는 것이 이와 같고, 받아 괴로워하는 것이 이와 같고, 목숨의 길이가 이와 같고, 이와 같이 오래 머물며, 이와 같이 목숨이 끝났다[壽際]고 설하니, 필추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다만 명상(名想, 개념)일 뿐이며, 이것은 오로지 자칭(自稱)일 뿐이며, 이것은 다만 세속에 따라 일시 설정된 존재[施設有]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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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은 일체의 존재는 무상하고 유위이며, 온갖 연[衆緣]으로부터 생겨난 것으로서 사(思)에 의해 조작된 것이다."98) 즉 세존께서는 항상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할 것을 가르쳤는데, 이 경은 요의이니, 마땅히 달리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박가범께서 범지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나는 일체의 존재[有]는 오로지 12처(處)뿐이라고 설한다"고 하였다.99) 만약 수취취(數取趣, 즉 보특가라)가 이러한 12처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라면 존재하지 않는다[無體]는 이치가 성립할 것이며, 만약 이러한 12처에 포섭되는 것이라면 마땅히 불가설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그 부파(독자부)에서 외워 전승하는 계경에서도 역시 말하기를, "존재하는 모든 안근(眼根)과 존재하는 모든 색경(色境)……(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에 대해 필추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여래는 이것을 모두 일체(一切)로 시설하였으니,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법[自體法]을 일체로 건립하였다"고 하였다.100) 즉 여기(12처)에 보특가라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이것이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설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빈비사라계경(頻毘娑羅契經)』에서도 역시 설하기를, "우매하며 [진리를] 들은 적이 없는 모든 이생은 가명(假名)에 수축(隨逐, 집착)하여 그것을 아(我)라고 헤아리지만, 여기에는 아도 아소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일체 중고(衆苦)의 법체만이 존재하여 미래[將]·현재[正]·과거[已]에 생겨날 뿐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하였다.101)
  
  
98) 『잡아함경』 권제13 권제306경(대정장2, p.87하). 여기서 유정(sattva, 존재자)·불열(nara)·의생(manuja, 마누로부터 태어난 자)·유동(manava, 마누에 소속된 善者)·양자(posa, 能食者로서 생명의 주체)·명자(j va, 能活者, 생명의 원리로써 살아가는 자)·생자(jantu, 能生者)·보특가 라(pudgala, 이기성에 근거한 개체자)는 모두 현상적 인간 일반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철학적 논의의 대상이 될 경우 영속적인 실체를 의미하는 형이상학적 용어가 된다. 즉 이것들은 모두 경험과 변화의 기체(基體)로서 의 자아(혹은 영혼)를 의미한다.
99) 『잡아함경』 권제13 제219경(대정장2, p.91상), " 一切者, 謂十二入處, 眼色耳聲鼻香舌味身觸意法, 是名一切."
100) 앞의 경, " 若復說言, 此非一切. 沙門瞿曇所說一切, 我今捨, 別立餘一切者, 彼但有言說. 問已不知, 增其疑惑. 所以者何? 非其境界故" 참조.
101) 『중아함경』 권제11 『빈비사라왕영불경(頻娑邏王迎佛經)』(대정장1, p. 49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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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세라(世羅, ila)라고 이름하는 아라한의 필추니(苾芻尼)가 마왕을 위해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그대 악견취(惡見趣)에 떨어져
  헛된 행취(行趣, 즉 유위행) 중에
  그릇되이 유정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니,
  지자(智者)는 존재하지 않음을 안다.
  
  이는 마치 여러 부품을 취하여
  수레라고 일시 개념[假想] 짓는 것처럼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제온을 취하여
  세속(즉 가명)으로 유정이라 한 것임을.102)
  또한 세존께서는 『잡아급마(雜阿笈摩)』 중에서 바라문인 바타리(婆柁梨, Badari)를 위해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바타리여! 잘 들어야 할 것이니
  능히 온갖 번뇌[結]를 푸는 법에 대해.
  말하자면 마음에 의지하여 염오가 있고
  역시 마음에 의지하여 청정이 있을 따름이다.
  
  아(我)라고 하는 것은 실로 무아성으로
  전도로 인해 존재한다고 집착하지만
  실로 유정도 없고 '아'도 없으며,
  오로지 존재의 원인인 법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를테면 열두 가지 존재의 갈래[有支]에
  
  
  
102) 『잡아함경』 권제45 제1202경(대정정2, p.327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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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섭되는 온·처·계만이 있을 뿐으로,
  이 같은 일체의 존재에 보특가라는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잘 생각해야 하리라.
  
  내입처(內入處)가 이미 공(空)하다고 관찰하였고
  외입처(外入處)의 공도 역시 그렇게 관찰하였으니,
  이같이 능히 [일체를] 공으로 관찰한 이는
  역시 또한 어떠한 것(보특가라)도 인식하지 않으리.
  
  또한 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아(我)를 주장할 경우 다섯 가지 종류의 과실을 범하게 되니, 이를테면 아견(我見)과 유정견(有情見)을 일으켜 악견취(惡見趣)에 떨어지게 되며, 온갖 외도와 동일하게 되며, [열반의 올바른] 길을 벗어나 가게 되며, 마음이 공성(空性, 즉 5온무아) 중에 깨달아 들지 못하여 능히 청정한 믿음을 낳을 수 없고 능히 안주할 수 없어 해탈을 획득하지 못하게 되며, 그에게 있어 성법(聖法)은 능히 청정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이상 세친)
  
  이것(앞의 경증)들은 모두 올바른 근거[量]가 아니다.(독자부)
  그 까닭이 무엇인가?(세친)
  우리 부파에서는 일찍이 그것을 외워 전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독자부)
  그대 종의에서 인정하는 것이 바로 올바른 근거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대들 부파의 주장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부처의 말씀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그대들] 부파의 주장이 바로 올바른 근거라고 한다면 부처는 그대들의 스승이 아니어야 할 것이며, 그대들은 석자(釋子)가 아니어야 할 것이다. 만약 [올바른 근거가] 부처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이는 모두 부처의 말씀인데, 어떻게 올바른 근거가 아니라고 하는 것인가?(세친)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모두 부처의 참된 말씀이 아니다"고 하였다.103)(독
  
  
103) 즉 그러한 경들은 모두 후세 사람들이 증광(增廣)한 것이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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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부)
  그 까닭이 무엇인가?(세친)
  우리 부파에서 외워 전승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독자부)
  이는 지극히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다.(세친)
  무엇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인가?(독자부)
  이와 같은 경문은 모든 부파에서 모두 외워 전하는 것으로, [연기의] 법성(法性)이나 그 밖의 다른 경에도 위배되지 않거늘 감히 이에 대해 빈번히 '우리가 외워 전승하지 않기 때문에 부처의 참된 말씀이 아니다'고 비방하고 부정하는 것은 오로지 흉악하고도 미치광이가 그러할 뿐이기 때문에 지극히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들 부파(독자부)에도 어찌 '일체법은 모두 비아성(非我性)이다'고 말하는 이러한 경이 없을 것인가? 만약 그들이 '보특가라는 그 소의가 되는 법(즉 5온)과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법(5온)은 모두 비아이다'는 의미로 말할 경우, 이미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마땅히 의식에 의해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 '식(識)은 두 가지 연(緣)에 의해 낳아진다'고 경에서 판결하고 있기 때문이다.104) 또한 그 밖의 다른 경과는 어떻게 회통하여 해석할 것인가? 즉 계경에서는 설하기를, "비아를 '아'라고 헤아리는 것, 여기에는 상(想)과 심(心)과 견(見)의 전도(顚倒)를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105)(이상 세친)
  '아'를 헤아려 전도를 성취하는 것은 비아에 대해 설한 것으로 '아'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닌데,106) 어찌 번거롭게 회통하여 해석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독자부)
  [그렇다면] 비아란 무엇인가?(세친)
  이를테면 온·처·계를 말한다.(독자부)
  
  
  
104) 만약 보특가라가 의식에 의해 알려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때 의식은 세 가지 연(緣)에 의해 낳아지 게 되므로 경설에 위배된다. 즉 그 때 의식은 의근과 일체법(법경)과 보특가라를 소의와 소연으로 삼아야 하 기 때문이다.
105) 『대집법문경』 권상. 본론 권제19, 주59) 참조.
106) 비아를 '아'로 헤아리는 것이 전도이지 '아'를 '아'로 헤아리는 것은 전도가 아니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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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바로 앞에서 '보특가라는 색 등의 온과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고 설한 것에 위배되지 않는가? 또한 또 다른 경에서 설하기를, "필추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일체의 사문 바라문 등으로서 '아' 등과 그에 따른 관견(觀見)을 주장하는 모든 이는 그러한 일체의 주장을 오로지 5취온상에서 일으킨다"고 하였다.107) 따라서 '아'를 근거로 하여 아견(我見)을 일으키는 일은 없으며, 다만 비아의 법을 그릇되이 분별하여 '아'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또 다른 경에서 말하기를, "여러 숙주(宿住)에 대한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기억과 미래의 기억, 그러한 일체의 모든 기억은 오로지 5취온상에서만 일어난다"고 하였다.108) 따라서 결정코 보특가라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세친)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이 경에서는 다시 "나는 과거세에 이와 같은 색 등으로 존재하였다"고 설하고 있는 것인가?109)(독자부)
  이 경은 숙주의 한 상속 중에 여러 일들이 있었던 것을 능히 기억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만약 실유의 보특가라가 존재하여 과거 생에 능히 색 등으로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관찰한 것이라고 한다면 어찌 유신견(有身見)을 일으키는 과실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겠는가? 혹은 마땅히 '이러한 경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방하고 부정하여야 할 것이다.110) 그렇기 때문에 이 경은 총상(總相)의 가아(假我)에 근거하여 '색 등으로 존재하였다'고 말한 것이니, 그것은 마치 [곡물]더미[聚]와도 같고, [물의] 흐름과도 같다.111)(세친)
  
  
107) 『잡아함경』 권제2 제45경(대정장2, p.11중), " 諸沙門婆羅門見有我者, 一切皆於此五受陰見我."
108) 앞의 경 제46경(대정장2, p.11중), " 沙門婆羅門 以宿命智自識種種宿命, 已識當識今識, 皆於此五受陰 , 已識當識今識."
109) 같은 경, "我過去所經, 如是色, 如是受, 如是想, 如是行, 如是識.(나는 과거세 이와 같은 색이었고, 이와 같은 수였고, 이와 같은 상이었고, 이와 같은 행이었고, 이와 같은 식이었다.)" 즉 기억의 주체로서 '나 '를 설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경증. 이하 독자부의 논란과 이에 대한 세친의 해명이 논설되고 있다.
110) 즉 경에서 설한 '나'를 실유의 보특가라로 해석한다면, 이러한 경은 마땅히 유신견을 일으키게 하는 과실로 인해 존재 자체가 부정되어야 한다는 뜻.
111) '아'라고 하는 것은 곡물더미처럼 제온이 인연화합하여 생겨난 가법(假法)이기 때문에 단일하지 않으 며, 흘러가는 강물처럼 상속하므로 부동의 영속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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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세존께서는 마땅히 일체지(一切智)가 아니어야 할 것이니, 심·심소로써는 찰나찰나에 변이 생멸하는 일체법을 능히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아'가 존재한다고 인정한다면 일체법을 능히 두루 알 수 있을 것이다.112)(독자부)
  그럴 경우 보특가라는 마땅히 상주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니, 마음이 소멸할 때 이것은 소멸하지 않는 것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는 바로 그대들이 인정하는 종의에 어긋나게 될 것이다.113) 우리들은 '부처님께서는 일체법에 대해 능히 단박에 두루 알기 때문에 일체지자(一切智者)라고 이름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상속신에 [일체지를] 감당할 만한 공능[堪能]을 가졌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그렇게 말한 것일 뿐이다. 이를테면 부처라는 명칭을 획득한 이는 제온의 상속에 이와 같은 [일체지를] 감당할 만한 뛰어난 공능(즉 一切智德)을 성취하여 문득 작의(作意)할 때 알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 전도됨이 없는 지(智)가 일어나기 때문에 '일체지'라고 이름한 것으로, 한 찰나[一念]에 능히 단박에 [일체의 경계를] 두루 안다는 뜻이 아니다. 그래서 이에 대해 이와 같은 게송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마치 불이 일체를 삼켜 버리듯이
  상속신에 감당할 공능이 있기 때문이니,
  이처럼 일체지(一切智)라고 함은
  두루 단박에 알기 때문이 아니다.114)
  상속신에 근거하여 일체법을 아는 것이라고 설할 뿐, 자아가 두루 아는 것
  
  
  
112) 만약 지속의 자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찰나멸하는 일체법을 역시 또한 찰나멸하는 심·심소로써 능 히 알 수 없으며, 설혹 안다고 할지라도 그 같은 인식 또한 찰나멸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참된 인식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부처 역시 일체지자라고 할 수 없다는 뜻.
113) 즉 독자부에서 설하는 보특가라는 상주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없고[非離蘊] 무상한 것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非卽蘊]이다.
114) 즉 불이 단박에 일체의 세계를 태워 버리기 때문에 '일체를 집어 삼킨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점차로 태우지만 마침내 일체의 세계를 태울 만한 공능을 지녔기 때문에 그같이 말한 것처럼 '일체지'라는 말도 다만 상속신상에 그 같은 공능을 지니고 있음을 말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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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아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독자부)
  불세존께서 3세에 존재한다고 설하셨기 때문이다.(세친)
  어디서 설하고 있는 것인가?(독자부)
  이를테면 어떤 게송에서 말한 바와 같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도
  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현재의 모든 부처님도
  모두 중생의 근심을 멸하시네.115)
  그대의 종의에서는 오로지 온(蘊)만이 3세에 존재하며 수취취(數取趣, 보특가라)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결정코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독자부)
  
115) 『잡아함경』 권제44 제1188경(대정장2, p.322상), " 過去等正覺及未來諸佛 現在佛世尊能除衆生憂." 즉 단박에 두루 일체지를 성취하는 것이라면 이처럼 3세에 각기 다른 부처가 존재할 필요가 어디에 있을 것인 가? 상속신에 근거하여 일체법을 알기 때문에 각각의 시간에 각각의 부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