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시중
1.
스님께서 대중에게 설법(示衆)하셨다.
“그대들 납자여, 각자 자기 마음이 부처임을 믿도록 하라. 이마음이 바로 부처이다. 달마대사가 남천축국(南天竺國)에서 중국에 와 상승(上乘)인 일심법(一心法)을 전하여 그대들을 깨닫게 하였다. 그리고는 「능伽經」을 인용하여 중생의 마음바탕을 확인(印)해 주셨으니, 그대들이 완전히 잘못 알아 이 일심법이 각자에게 있음을 믿지 않을까 염려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능가경」에서는 ‘부처님 말씀은 마음(心)으로 종(宗)을 삼고, 방편 없음(無門)으로 방편(法門)을
삼는다. 그러므로 법을 구하는 자라면 응당 구하는 것이 없어야 하니,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으며, 부처 밖에 따로 마음 없기 때문이다‘하셨다.
선이라 해서 취할 것도 없고 악이라 해서 버릴 것도 없으며,
깨끗함과 더러움 두쪽 다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 죄의 본성이 공(空)임을 통달하면 생각생각 어디에도 죄를 찾을 수 없으니 그 성품(自性)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3계가 오직 마음일 뿐(三界唯心)이며, 삼라만상이 한 법에서 나온(印)것이이다. 형상(色)을 볼 때, 그것은 모두 마음을 보는 것인데, 마음은 그 자체가 마음이 아니라 형상을 의지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황따라 말하면 될 뿐, 현상이든(卽事)이치에든(卽理) 아무 걸릴 것이 없다. 수행의 결과로 얻어지는 깨달음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에서 나온(生) 것을 형상(色)이라 하는데, 색이 공함을 알기 때문에 난 것은 동시에 난 것이 아니다.
이 뜻을 확실히 알아야 그때그때 옷 입고 밥 먹으면서 부처될 씨앗(聖胎)을 길러내고 인연따라 시절을 보내게 되리니. 더 이상 무슨 일이 있겠는가.
그대들은 나의 가르침을 받고 나의 게송을 들어보아라
마음 바탕을 때에 따라 말하니
보리도 역시 그러할 뿐이라네
현상이나 이치에 모두 걸릴 것 없으니
나는 그 자리가 나지 않는 자리라네
心地隨時說 菩提亦只寧
事理俱無碍 當生卽不生
2.
어떤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도를 닦는 것입니까?”
“도는 닦는 데 속하지 않는다. 닦아서 체득한다면 닦아서 이루었으니 다시 부서져 성문(聲聞)과 같아질 것이며, 닦지 않는다 하면 그냥 범부이다.”
다시 물었다.
“어떻게 이해해야 도를 깨칠 수 있겠습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자성(自性)은 본래 완전하니 선이다 악이다 하는 데 막히지 않기만 하면 도 닦는 사람(修道人)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선은 취하고 악은 버리며 공(共)을 관찰하여 선정에 들어가면 바로 유위(有爲)에 떨어진다 하겠다. 게다가 밖으로 치달아 구하면 더더욱 멀어질 뿐이니 3계의 심량(心量)을 다 없애도록만 하라. 한 생각 망념이 3계 생사의 근본이니, 일념이 없기만 하면 즉시 생사의 근본이 없어지며 부처님(法王)의 위 없는 진귀한 보배를 얻게 될 것이다.
무량겁(無量劫) 이래로 범부는 망상심, 즉 거짓과 삿됨, 아만(我慢)과 뽐냄이 합하여 한덩어리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여러 법이 모여 이 몸을 이루었기 때문에 일어날 때는 법만 일어날 뿐이며, 면할 때도 법만 멸할 뿐이다’하였다. 그러므로 이 법이 일어날때 내(我)가 일어난다 하지 않으며, 멸할 때도 내가 멸한다 하진 않는다.
전념(前念).후념(後念).중념(中念)이 생각생각 서로 의지하지 않아서 생각생각 고요함(寂滅)을 해인삼매(海人三昧)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일체법을 다 포섭한다. 마치 백천 갈래 물줄
기가 함께 큰 바다로 모여들면 모두 바닷물이라 이름하는 것과도 같다. 한 맛(一味)에 여러 맛이 녹아 있고 큰 바다에 모든 물줄기가 섞여드니, 마치 큰 바다에서 목욕을 하면 모든 물을 다 쓰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성문은 깨달았다 미혹해지고 범부는 미혹에서 깨달는다. 성문은 성인의 마음에는 본래 수행지위.인과.계급 등 헤아리는 망상이 없음을 모른다. 그리하여 인(因)을 닦아 과(果)를 얻고, 8만겁(八萬劫).2만겁(二萬劫) 동안을 공정(公定)에 안주하니, 비록 깨닫긴 했으나 깨닫고 나서는 다시 미혹한 것이다. 또한 모든 보살은 저 지옥 고통을 보면 공적함(空寂)에 빠져 불성을 보지 못한다. 상근기 중생이라면 홀연히 선지식의 가르침을 만나 말끝에 깨닫고 다시는 계급과 지위를 거치지 않고서 본성을 단박에 깨닫는다. 그러므로 경에서‘범부에게서는 엎치락뒤치락하는 마음이 있지만 성문에게는 그것이 없다’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미혹에 상대하여 깨달음을 설명하였지만 본래 미혹이 없으므로 깨달음도 성립되지 않는다.
일체 중생들은 무량겁 이래로 법성삼매(法性三昧)를 벗어나지 않고 영원히 그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옷 입고 밥 먹으며 말하고 대꾸하는 6근(六根)의 작용과 모든 행위가 모조리 법성이다. 그러나 근원으로 돌아갈 줄 모르고서 명상(名相)을 좇으므로 미혹한 생각(情)이 허망하게 일어나 갖가지 업(業)을 지으니, 가령 한 생각 돌이켜본다면(返照) 그대로가 성인의 마음이다.
여러분은 각자 자기 마음을 깨치면 될 뿐 내 말을 기억하지
말라. 설사 항하사만큼 도리를 잘 설명한다 해도 그 마음은 늘지 않으며, 설명하지 못한다 해도 그 마음은 줄지 않는다. 또한 설명을 해도 그대들의 마음이며, 설명하지 못해도 그대들의 마음이다. 또 몸을 나누고 빛을 놓으며 18가지 신통변화를 나타낸다 해도 나에게 불꺼진 재를 갖다 주느니만 못하다. 장마비가 지난 뒤 꺼진 재에 불기가 없는 것은 성문이 허망하게 인을 닦아 과를 얻음에 비유할 만하며, 장마비가 아직 지나지 않아 꺼진 재에 불기운이 있는 것은 보살의 도업(道業)이 순수하게 익어 모든 악에 물들지 않음을 비유할 만하다.
만일 여래의 방편인 삼장(三長)의 가르침을 말하자면, 쇠사슬같이 끊김이 없어 항하사겁토록 설명해도 다하지 못하게지만, 부처님의 마음을 깨닫는다면 아무 일도 없게 된다. 오랜동안 서 있었으니 이만 몸 조심하라.“
3.
대중에게 설법하셨다.
“도(道)는 닦을 것이 없으니 물들지만 말라, 무엇을 물들음이라 하는가. 생사심으로 작위와 지향이 있게 되면 모두가 물들음이다. 그 도를 당장 알려고 하는가. 평상심(平常心)이 도이다. 무엇이 평상심이라고 하는가. 조작이 없고, 시비가 없고, 취사(取捨)가 없고, 단상(斷想)이 없으며, 범부와 성인이 없는 것이다.
경에서도 이렇게 말하였다.
‘범부의 행동도 아니고 성현의 행동도 아닌 이것이 보살행이
다.’
지금 하는 일상생활과 인연따라 중생을 이끌어주는 이 모든 것이 도(道)이니, 도가 바로 법계(法界)이며 나아가서는 향하사만큼의 오묘한 작용까지도 이 법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심지법문을 말하며, 무엇 때문에 다함 없는 법등(法燈)을 말하였겠는가. 그르므로 일체법은 모두가 마음법이며, 일체의 명칭은 모두가 마음의 명칭이다. 만법은 모두가 마음에서 나왔으니 마음은 만법의 근본이다. 경에서도 ‘마음을 알아 본원(本源)이 통달하였으므로 사문(沙文)이라한다’고 하였으니, 이 본원자리에서는 명칭도 평등하고 의미도 평등하며 일체법이 다 평등하여 순수하여 잡스러움이 없다.
만일 교문(敎門)에서 시절따라 자유롭게 법계를 건립해 내면 모조리 법계이고, 진여(眞如)를 세우면 모조리 진여이며,이치(理)를 세우면 일체법이 이치이며, 현상(事)을 세우면 일체법이 현상이 된다. 하나를 들면 모두 따라와 이사(理事)가 다름이 없이 그대로 오묘한 작용이며, 더 이상 다른 이치가 없다. 이 모두가 마음의 움직임이다. 비유하면 달그림자에는 차이가 있으나 달 자체는 차이가 없고, 여러 갈래 물줄기는 차이가 있으나 그 물의 본성은
차이가 없는 것과 같다. 또한 삼라만상은 차이가 있으나 허공은 차이가 없는 것처럼 도리를 설명하는 데에는 차이가 있으나 걸림 없는 지혜는 차이가 없듯이 갖가지로 세운 법이 모둔 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세워도 되고 싹 쓸어버러도 된다. 모조리 오묘한 작용이며 그대로가 자기이니. 진(眞)을 떠나서 세울 곳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세운 그 자리
가 바로 진이며, 다 자기인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하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이냐.
일체법이 불법이고 모든 법이 바로 해탈인데 해탈이 바로 진여이나, 모든 법은 진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상 생활이 모드 불가사의한 작용으로서 시절인연을 기다리지 않는다. 경에서도 ‘곳곳마다 부처님 계신 곳’이라 하였다.
부처님은 매우 자비로우며 지혜가 있어 선한 본성으로 일체 중생의 얽힌 의심을 부수어 유무(有無)등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한다. 범부다 성인이다 하는 망정이 다하고 인집.법집.(人.法)이 함께 공하여 비할 바 없는 법륜을 굴리고 모든 테두리(數量)를 벗어났다. 그리하여 일마다 걸림이 없고, 현상.이치 양쪽 다 통하니 마치 하늘에 구름이 일어났다가 어느덧 없어지듯 머문 자취를 남기지 않으며, 물에다 그림을 그리듯하여 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니 이것이 대적멸(大寂滅)이다.
번뇌 속에 있으면 “여래장(如來藏)‘이라 하고 거기서 벗어나면 ’청정법신(淸淨法身)‘이라 이름한다. 법신은 무궁하여 그 자체는 늘고 줄음이 없다.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모나고 둥글기도 하면서 대상에 따라 형체를 나타내니 물에 비친 달처럼 잔잔하게 흔들거리며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유위(有爲)를 다하지도 않고 무위(無爲)에 머물지도 않으니 유위는 무위의 작용이며, 무위는 유위의 의지처이다. 의지처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어디에도 의지할 것 없는 허공과 같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심생멸(心生滅)과 심진여(心眞如)라는 뜻에서 보자.
심진여(心眞如)라 하는 것은 밝은 거울이 물상을 비추는 것
과도 같은데, 거울은 마음에 비유되고 물상은 모든 법에 비유된다. 여기에서 마음으로 법을 취한다면 바깥 인연에 끄달리게 되니 그것이 샘생멸의(心生滅義)가 된다.
성문은 소리를 들음으로써 불성을 보고 보살은 눈으로 불성을 보니 그것이 둘 아님을 아는 것을 평등한 성품이라 한다. 이 성품은 차이가 없으나 작용은 같지 않아서 미혹에 있으면 식(識)이 되고, 깨달음에 있으면 지(智)가 되며, 이치(理)를 따르면 깨달음이 되고, 현상(事)을 따르면 미혹이 된다. 그러나 미혹해도 자기 본심에 미혹하는 것이며 깨달아도 자기 본성을 깨닫는 것이다. 한번 깨달으면 영원히 깨달아 다시는 미혹되지 않으니, 마치 해가 뜸과 동시에 어둠은 없어지듯 밝은 지혜가 나오면 어두운 번뇌는 공존할 수 없다.
마음(心)과 경계(境)를 깨달으면 망상이 발생하지 않으며, 망상이 나지 않는 그 자리가 바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이다. 무생법인은 본래부터 있었고 지금도 있어서 도를 닦고 좌선할 필요가 없으니 닦을 것도 없고 좌선할 것도 없는 이것이 바로 여래의 청정선(淸淨禪)이다.
이제 이 이치를 알았으면 진정코 모든 업을 짓지 말고 본분따라 일생을 지내도록 하라. 가사 한 벌 누더기 한 벌로 앉으나 서나 끊임없이 계행(戒行)을 더욱 훈습하고 정업(淀業)을 더욱 쌓도록 하라.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깨닫지 못할까 무얼근심하랴. 듣느라고 수고하였다. 몸 조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