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오심요(圓悟心要)

87. 장대제(蔣待制)에게 드리는 글

通達無我法者 2008. 2. 21. 14:58
 





87. 장대제(蔣待制)에게 드리는 글



이 일로 말하자면, 하늘, 인간, 뭇 생령, 부처, 조사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이것의 위력을 받습니다. 다만 뭇 생령들은 이를 간직하고 있으나 어둡고 미혹하여 부질없이 생사윤회를 받고, 불조는 이를 통달하여 훌쩍 증득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미혹과 깨달음이 다르긴 해도 불가사의하기는 매일반입니다.



그러므로 불조께서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열어 보이심은,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각각 자기에게 본래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는 청정묘명(淸淨妙明)한 진심을 독자적으로 깨달아 다시는 허다한 번뇌 망상과 헤아리고 생각하는 지견을 남겨두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5온의 몸밭에서 그대로 회광반조하여 담적여여(湛寂如如)하게 확연히 알아차려 이 바른 성품을 분명히 보게 하니 이 성품이 바로 마음이며, 이 마음이 바로 성품입니다.



호호탕탕히 작위(作爲)함이 응당 6근(六根)의 문턱에서 천변만화를 부리지만 애초에 요동하지 않으므로, 그것을 ‘항상 한 본원(本源)’이라고 부릅니다. 이 본원을 통달하면 작용하는 것마다 투철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반드시 흐름을 끊고 증득해야지 이리저리 생각을 움직였다가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집니다.

바로 당사자의 근성이 본래 순수하고 고요하고 침착하면 가장 쉽게 힘이 되는 것이니, 다만 잠시 빛을 돌이켜 한 번 뚫기만 하면 그대로 깨달아 들어갑니다. 옛 사람은 이를 ‘무진장(無盡藏)’, ‘여의주(如意珠)’, 또는 ‘금강보검’이라 불렀습니다.



요컨대 깊은 신근(信根)을 갖추고 이것은 남에게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믿어야만 합니다. 행주좌와의 네 위의에서 정신을 응집하고 고요히 반조하여 적나라한 경지에서 간단이 없으면, 자연히 모든 견해가 나지 않아 이 바른 자체에 계합합니다. 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으며,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며, 실제도 없고 헛것도 없어, 이름과 모양을 떠났으니 바로 이것이 자기의 본지풍광이며 본래면목입니다.



그러므로 눈썹을 드날리고 눈을 깜짝이며, 백추를 들고 불자를 세우며, 주장자를 휘두르고 ‘할’을 하며 미묘한 언구를 베푸는 등 옛분들의 백천억 가지 방편이, 모두 사람들로 하여금 여기에서 투철히 벗어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한 번 꿰뚫었다 하면 그대로 근원까지 깊이 사무쳐 꿰뚫어, 문 두드리는 기왓조각을 버리고 끝내 털끝만큼도 마음에 둔 것이 없습니다. 20년이고 30년이고 그렇게 해나가면서 이론이나 주장을 끊고 기연과 경계를 파하고 쉬어버리면 홀연히 무심해진, 그곳이 안락하게 쉬는 경계입니다. 그 때문에 “지금 쉬어야 쉬는 것이지, 만약 때를 찾다가는 끝내 때는 없으리라” 하였던 것입니다.



마갈타에서 방문을 걸어 닫고 비야리에서 말을 막은 일들을 사람들은 극치라고 여기나, 그분들의 발가락 끝도 꿈에도 보지 못하였다 하겠습니다. 대인의 큰 견해, 큰 지혜, 큰 작용이 어찌 격식과 한량에 매이겠습니까. 그대로가 매우 분명한데도 오히려 두 손으로 물려주지 않은 것을 한스러워합니다. 어찌 심천, 득실, 피아의 현량(現量)을 논하여, 어지럽게 진탕을 만들겠습니까. 그렇다면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기 전, 조사가 서쪽에서 오기 전, 허공과 세계가 생기지 않았을 때는 어느 곳에서 더듬고 찾겠습니까.



요컨대 마음[機心]을 버리고, 지견을 죽이며 세간의 지혜와 분별, 총명함을 벗어야만 합니다. 놓아버려서 곧바로 마른 나무, 석은 기둥과 같게 하여 단박에 체득해서, 호흡[氣息]이 끊긴 상태에 도달하면 담담히 마음을 잊어서 만 년이 일념입니다. 이를 기르고 보호하여 오래오래 익혀 자세하게 돌이켜 관찰하면 단박에 마갈타와 정명(淨名:유마)에서 흘러온 맥을 알게 됩니다.



조주스님은 입멸에 임하자 한 자루 불자(拂子)를 봉하여 진부대왕(鎭府大王)에게 보내주면서 “이는 노승이 일생 동안 써도 다 쓰지 못한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스님의 높고 원대한 식견을 살펴보건대 어찌 사람들을 모양에 막히고 말에 집착하며, 언어문자에 매이게 하였겠습니까. 곧바로 깨쳐야만 활발하게 무리에서 벗어나는 계략이 생겨 큰 법을 걸머질 수 있습니다. 마치 물이 물로 들어가고 금에다 금을 입히는 것과 같습니다.



양양군(襄陽郡)의 장수인 왕상시(王常侍)는 위산 대원(?山大圓)스님을 찾아뵙고 종지를 체득하였습니다. 하루는 어떤 스님이 위산에서 찾아오자 왕상시가 물었습니다.

“위산스님이 무슨 법문을 합디까?”

그러자 그 스님은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위산스님은 불자를 세웠습니다.”

“산중에선 이를 어떻게 이해하던가요?”

“산중에서는 색을 통해 마음을 밝히고 사물을 통해 이치를 드러냈다고들 의논합니다.”

“알기는 알았습니다만 무엇이 그리 급합니까. 그대는 속히 되돌아 가십시오. 노스님에게 드리는 편지가 있으니 기다리십시오.”

그 스님이 되돌아가 편지를 돌려 드리자 위산스님이 열어보았더니, 일원상(一圓相)을 그리고 그 가운데 날일[日]자가 씌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자 위산스님은 크게 웃으면서 말하였습니다.

“뉘라서 알았으랴. 나를 천 리 밖에서 아는 지음(知音)이 있을 줄을.”

앙산(仰山)스님이 말하였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앙산스님은 땅 위에 일원상을 그리고 일자(日字)를 쓰더니 발로 문질러버리고 가버렸습니다.



체득한 사람들이 나아간 자취를 보십시오. 어찌 고정된 틀을 지켰겠습니까. 여기에서 그 변화를 잘 관찰한다면 그 마음을 완전히 살필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을 살피고 나면 자유로운 곳이 있으면, 자유로움이 있고 나면 다른 것에 끄달리지 않습니다. 다른 것에 끄달리지 않고 나면 어디를 간들 마음대로 되지 않겠습니까!



사대부를 만나 보면 대개들 “세속의 일에 얽혀 그렇게 할 겨를이 없습니다. 세속의 일을 차츰차츰 정리하고 나서 마음먹고 참구해 보겠습니다”라고들 합니다. 좋은 말이긴 합니다만 그러나 기왕 세속 일에 오래 있어왔으니, 번뇌로써 수행으로 삼으면 됩니다. 번뇌가 출몰할 때 쓸모없는 물건처럼 태워버리고 그것을 그저 ‘세속의 일’이라 부른다면, 어찌 다시 세속의 인연을 버려야 깨달아 들어갈 곳이 있다 하겠습니까.



이른바 “종일 행해도 일찍이 행한 적이 없고, 종일 쓰면서도 일찍이 쓴 적이 없다”한 것입니다. 어찌 번뇌 밖에 따로 이 큰 인연이 있겠습니까. 큰 보배더미 위에서 큰 보배 광명을 놓아 천지를 빛낸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서, 스스로 깨달아 알아차리지 않고 다시 밖에 나가 구하느라고 더더욱 고생만 하니, 어찌 지극한 요점이라 하겠습니까. 큰 근기를 갖추었다면 옛분들의 말씀이나 공안을 들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을 바르게 하고 마음을 고요히 하여 가리키고 부르는 등 모든 행위를 할 때 한 번의 행위마다 다시 한 번 집어내서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이것이 어디서 일어났으며, 어떤 물건이기에 이런저런 행위를 해내는지를.



티끌 인연 속에서 한 번 꿰뚫으면 일체 모든 인연이 옳지 않음이 없으니, 무엇 때문에 떨어버리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이에 즉(卽)한다면 삼계화택 가운데서 그대로 종지와 격식을 초월하여 청정하여 함이 없고 청량한 큰 도량이 될 것입니다. 「법화경(法華經)」에 이르기를 “불자가 이 경지에 안주하면 곧 부처님의 수용(受用)인 것이니, 경행(經行)과 앉고 누움이 항상 그 가운데 있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