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성철스님] 총림성사 / 간당 행기簡堂行機 선사의 살림살이

通達無我法者 2008. 2. 27. 15:04

총림선사

1.간당 행기簡堂行機 선사의 살림살이
간당 행기 선사는 처음에 요주饒州 완산사莞山寺에서 주지로 있었는데, 십칠 년 동안 화전을 일구어 밭갈이를 하면서 갖은 고초를 겪었다. 스님이 살던 곳은 사방이 자연 그대로의 상태였으므로 적막함을 즐길 수 있었으며, 세상의 부귀 영달에 마음 쓰지 않고 베옷과 나물밥으로 절개를 변함없이 지켜 왔다. 세상에서는 그를 ‘기도인’이라 불렀다. 나중에 스님은 구강九江 원통사圓通寺에 살며 차암 경원此菴景元(1094~1146)스님의 도를 크게 폈다.
그가 한번은 대중 법문을 하였다.
“여기 원통사엔 생 약가게를 열지 않고 다만 죽은 고양이 머리를 판다. 그 값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으나 먹기만 하면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지.”
그곳에서 태평선원太平禪院의 은정암隱靜庵으로 옮겨 갔는데 비록 대중은 많아도 부엌이나 창고는 쓸쓸하였다. 그래도 대중들은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절 소임을 맡기려 할 때는 반드시 황룡 노스님의 법을 따라 새벽 죽공양이 끝나면 바리때를 걸어 놓고 승당에서 시자에게 목탁을 치게 한 뒤 “누가 무슨 소임을 맡아 주기를 바란다”고 하면, 어느 누구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혹시라도 명을 어기는 사람이 있으면 “나의 회중에서 일을 맡지 않고 네가 어디 가서 일을 맡겠다는 거냐?”고 꾸짖었다.
아! 선배들은 도가 높아 사람 쓰는 것이 이처럼 쉬웠는데,어찌하여 오늘날엔 수없이 빌고 절하여도 소임 맡을 생각이 없고 오히려 하늘 높은 줄 모르는지. 괴롭습니다. 부처님이시여!

2. 조운사 우연지尤延之에게 주지 자리를 내놓고
혜홍彗洪 수좌
혜홍 각범覺範수좌는 임천臨川사람으로 불조 덕광佛照德光 스님의 법을 이었다. 홍주洪州 광효사光孝寺의 주지로 세상에 나갔는데 이는 조운사漕運使 우연지의 부름에 따른 것이다.
그 다음 우연지가 태수太守에 임명되었는데, 초하루와 보름의 공참公參 때에 여러 스님들을 관청으로 불러들여 큰 절을 한 뒤 물러가게 하였다. 혜홍스님은 이 말을 전해듣고 불쾌하여, 천하에 이럴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북을 울려 대중을 모아놓고 법상에 올라가 주지직을 사임하고 떠나면서 송을 지었다.
祖翁活計元來大
誰敢區區謾折腰
珍重豫章賢太守
芒靴竹杖任逍遙
조사의 살림살이 원래 큰 것이었는데
누가 감히 자질구레하게 허리 굽히랴.
안녕하소서, 훌륭한 예장 태수님!
나는 죽장에 짚신 신고 마음껏 노니려 하오.
태수는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부끄럽게 여겨 사람을 보내 다시 청하였지만 혜홍스님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으며 강서땅 모든 사찰이 그뒤부터 다시 힘을 얻게 되었다.
뒷날 스님은 길주吉州 상부사祥符寺의 주지를 지냈고 개복사開福寺로 자리를 옮긴 뒤 그곳에서 입적하니, 시랑侍郞 우연지는 몸소 스님의 전기를 썼다.

3. 제방의 주지를 경계하는
운거 서雲居舒 스님
운거 서스님은 「수계문」을 지어서 총림에 퍼뜨렸는데, 제방의 주지를 경계하는 내용이었다. 늙고 병든 사람을 편안히 머물게 해야 하며, 젊은 사람들만 골라서 살게 하는 일은 교화에 큰 손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고사목과 노승은 산문의 한 경관이라는 이야기다.
이 수계문과 관련해서 기억나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한 노승이 오문吳門 만수사萬壽寺를 찾아갔는데, 그곳 주지가 머물 것을 허락하지 않고 노승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늙었는데 어찌하여 작은 절을 찾아가지 않소? 당신 같은 사람은 고작 나무 한 그루나 심을 수 있을 것이요.”
노승이 응수하였다.
“그대는 애당초 인연이 닿지 않아 주지가 되지 못했더라면 아마 도처에서 나무나 심고 있었을 것이다.”
주지가 부끄러워 대답하지 못하자 노승은 게를 써 놓고 떠나갔다고 한다.
江湖幾度氣呑牛 年老方知總是愁
春勤後生宣勉勵 看看種樹在前頭
강호에서 몇 차례나 소를 삼켰던 기백이던가
늙어서야 비로소 모두가 근심이라는 것을 알았노라.
권하노니 후생들이여 부지런히 노력하여라
보아라, 나무 심을 날이 바로 너희 앞에 있음을.
당시 태수 왕좌王佐가 이 소식을 듣고 모든 사찰에 명을 내려 머물려는 승려를 가리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그것이 이른바 불종자를 단절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4. 애욕을 경계하는 글
안정군왕安定郡王
안정군왕의 호는 초연初然 거사이다. 잠시 동경東京에 있을 무렵, 불교에 뜻을 두어 장령 수탁長靈守卓스님을 찾아 뵙고 깨친 바 있는데, 그 뒤로 어느 사건에 연루되어 강서 땅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북방 오랑캐의 침공으로 동경이 함락되자 종실의 여러 왕 가운데는 휘종과 흠종, 두 왕을 따라 북쪽으로 끌려간 사람이 많았지만 거사는 유배 때문에 그 화를 면하였다.
마침내 삼구三衢에 살며 시랑 풍지도馮至道, 설당 도행雪堂道行스님 등과 속세를 초월한 교류를 맺었다. 구주 지방 사람들이 불교를 믿게 된 것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일찍이 남악南嶽 법륜사法輪寺 성행당省行堂의 기문記文을 지은 적이 있는데 뛰어난 걸작이었으며, 또한 애욕을 경계하는 글을 지은 적이 있는데 여기에 싣는다.
내가 생각해 보니 세상 사람들은 태고 이후 크나큰 고뇌를 지닌 채 몸과 마음을 어지럽히면서도 여기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크나큰 괴로움이란 곧 음욕淫慾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음욕의 고뇌는 정신을 어둡게 하고 목숨을 해치며 덕성과 도덕을 잃게 하고 수행을 방해한다.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자기 마음이 어느새 산란해지고 바르지 못한 견해가 일렁거리며, 환경과 인연의 유무에 관계없이 깨끗하고 더러운 곳도 가리지 않고, 갑자기 전도망상을 일으켜 더러운 짓을 마음대로 한다.
청정한 눈으로 본다면 거기에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그러나 망상의 티끌은 끝없이 구르고 애욕의 불길은 타오르니, 예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노소 귀천을 막론하고 그와 같은 해를 입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재물을 탐하고 벼슬을 쫓다가 뜻이 이루어진 다음엔 색욕에 탐닉하기 때문이다.
또한 승려든 속인이든 온갖 잡념이 찬 재처럼 사라져도, 오로지 이 한가지 일만은 흔히 마장魔障에 걸리거나 번뇌를 갖게 되며, 심하면 요사스러운 일과 도적질을 일삼기도 하고 나라가 기울어지고 집안이 망하는 경우까지 있다.
색욕이란 참으로 사람을 무너뜨리는 근본으로 사람에게 지대한 피해를 준다. 그 간교함, 투기, 속임수, 현혹이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모든 업장은 끊기 쉬우나 이 괴로움은 없애기 어렵다. 참으로 색욕을 모두 없애면 도를 이루지 못할 게 없다”고 말씀하셨다. 남녀 이근二根은 애당초 분별이 없지만 간사한 생각이 일어나면 서로 좋아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것이 습관이 되어 마음에 얽매임으로써 드디어 사모하고 그리워하며, 꿈속에서도 놀라는 괴로움, 재물을 낭비하고 가산을 탕진하는 괴로움,남을 이간하고 원수를 맺는 괴로움, 또는 형벌을 받고 질병에 고생하는 괴로움을 당한다. 그것이 더럽고 청정한 인因이 아님을 분명히 알면서도 마치 불나비가 스스로 불속으로 뒤어들어 제 몸을 태우는 격이다.
여래께서는 분명히, “정욕을 끊지 못하고 성인의 도를 구함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고 가르치셨다. 여인의 교태는 사람을 죽이는 도적이며 번뇌를 일으키는 원인이며 지옥에 들어가는 씨앗이다. 이는 사람을 그르치고 덕을 손상시키고 목숨을 잃게 한다. 언제나 남자니 여자니 하는 생각을 끊고 진실을 깨치면 누가 애욕에 얽히는 고통을 받겠는가.
또한 우리의 육신이란 더럽고 추악한 것이라서 무너지고 나면 모두 백골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애욕의 경계에 더 이상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신령한 식(靈識)이 있는 모든 중생들에게 널리 바라노니, 싫어서 버릴 생각을 내되 원수를 생각하듯 멀리 떠나고 큰 불덩이를 대하듯 가까이 하지 말고 화급히 피해야 한다. 마침내 참회하는 마음을 한 번 내면 얽매인 사슬이 스스로 풀린다. 그리하여 더러움이 변하여 법신法身을 얻고 음욕의 불꽃은 흩어져 지혜가 되어, 서로서로 교화하여 다 함께 청정도를 수행하여 안락행을 깨닫게 되었으면 한다.

총림성사는 송나라 도융스님이 불조 덕광스님 문하에 있을 때, 대중 생활하면서 보고 들은 일이나 모범된 이야기를 모아서 펴낸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