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어서화(東語西話)

24. 선가에서는 왜 의미 없는 말들을 사용하는가?

通達無我法者 2008. 2. 27. 18:53
24. 선가에서는 왜 의미 없는 말들을 사용하는가?


세간에서 쓰이고 있는 말과 언어는 그것이 마음 속에서 발동하여
입으로 나오면 말한 사람의 감정이 밖으로 드러나서
의미 없는 말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말하는 사람의 감정이 부드럽고 좋으면 그 말도 화기롭고 온화하며,
반대로 증오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말 또한 거칠다.
또 노하면 그 말은 절박하면서도 원망스러우며,
마음이 순조롭고 너그러우면 그 말 또한 자재하면서도 이치에 알맞게 되고,
마음 속에 무언가 뽐내고 꾸미려 하면
그 말은 직접적이지를 못하고 번지르하고,
속되고 촌스러우면 그 말은 소박하지만 졸렬하다.
이것은 모두 언어이 겉모습이다.
그러므로 말의 의미를 살피고자 한다면 먼저 그 겉모습을 관찰해야 하다.
또 겉모습을 통달하고 나면 결국 그 마음의 감정을 알게 되고
나아가 그 말의 의미를 따져볼 수 있다.

이른바 의미[義]는 감정에 맞는 것을 의식이 주재하여

언어로써 선포한 것이다.
대체로 언어란 감정이 반연한 의미를 모사하여 아름답게 꾸민 것이다.
실로 감정이 미치지 못하고 알음알이가 적용되지 못하면
종일토록 어떤 것에 대해 설명한다 해도,
한마디조차 어떻게 해낸 것이 없다.
이런 것이 어찌 사람의 말에만 해당하는가?
거위가 울고 까치가 울고 개가 짖고 닭이 우는 등등의 일까지도,
감정을 가진 존재들이 한 번 소리를 내었다 하면
그 속에는 반드시 주장하는 의미가 들어 있다.
다만 인간들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다.
겉으로 나타난 음성이 있는데 그것의 의미가 어찌 없겠는가?

그러나 우리 불조의 도(道)는 이와는 다르다.
부처님이 탄생하시자마자 손으로는 하늘과 땅을 각각 가리키고
앞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면서부터
영취산에 꽃 한 송이를 들어보이실 때까지,
그 사이에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백만억의 대중들이
모두가 신통스런 성인이었음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이 비록 아무리 깊이 생각하고 또 사고했어도
끝내는 부처님의 뜻을 겉껍질조차도 헤아리질 못했다.
그러나 오직 가섭존자만이 꽃을 보고 미소지었을 뿐이다.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중국으로 건너와서는
양종5파(兩宗五派)가 하늘의 별과, 바둑판처럼 온 세상에 분포되었다.
그리하여 선(禪)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수미산(須邇山)이다", "이 무엇인고?"
"동해 바다 속의 잉어를 한 몽둥이로 때려잡아라"
"신부는 노새를 타고 시어머니가 이끌고 간다"
"나에게 선판(禪板)을 가져오너라"
"이 밥통아 강서(江西)의 호남(湖南)으로 꺼져라" 는
등등의 대답이 흉흉하게 끊임이 없었다.
이는 마치 장강대하(長江大河)를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것과 같았다.

이를 맛보려 하면 마치 나무로 만든 국과 무쇠 못으로 만든 밥과 같았다.
그리고 가까이 하려 하면 취모검(吹毛劍)이나
불무더기와 같아서 가까이 할 수도 없으며,
눈으로 보려 하면 번득이는 번갯불이나 부싯돌의 불빛과도 같았으며,
귀로 들으려 하면 독을 바른 북이나
가문 땅 위에 내려치는 우뢰소리와도 같았으며,
그 속으로 들어가려 하면 가시덤불과도 같으며,
뚫으려 하면 마치 무쇠로 된 장벽과 같았다.
그렇다고 말로는 물론 말없음으로도 알 수 없으며,
지식으로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이것에 대해서는 뭇 귀신들도 어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것을 가리켜 의미없는 말[無義語]이라 한다.

의미가 없는 말은 희노애락의 범주를 초월하였고,
알음알이의 범주를 벗어났다.
그러니 어떻게 경전의 문자와 나아가
성인이니 범부이니 하는 단계 따위로 깨달을 수 있겠는가?
참으로 애석하다.
참선하는 납자들이 이것을 알지 못하고 되는 대로
이 소리 저 소리 하고 자기 멋대로 착각하여 말하기를,
"이 말은 놓아주었다"
"이는 파정(把定)이다"
"이는 곁에서 두들겼다"
"이는 가만히 쳤다"
"이는 상대를 더듬어 보았다",
"이는 긍정하고 허락했다",
"이는 향상향하(向上向下)이다"
"이는 전제반제(全提半提)다"
"이는 빈가주가(賓家主家)다"
"이는 사구활구(死句活句)다"
"이는 상량평전(商量平展)이다" 고 말하기도 한다.
또는 "이 말은 최초와 최후이다"
"이는 칼끝을 숨기고 관문을 꿰뚫었다",
"이는 살인하는 칼, 혹은 사람을 살리는 칼이다" 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심한 사람들은 경교(脛敎)에서 억지로 이끌어다 말하기를,
"이것은 색(色)에 나아가 마음을 밝히고 사물에 의탁하여 이치를 나타냈다.
 또 이는 말을 하여 말없음[無言]을 나타냈고,
 무언으로 말있음[有言]을 나타냈다.
 이것의 눈은 동남쪽을 관찰하지만 뜻은 서북쪽에 있다.
 이는 위음왕불(威踵王佛) 저쪽 공겁(空劫) 이전으로서
 티끌만큼 차이도 없이 완전히 자기에게로 되돌아간다" 라고들 한다.
이와 같은 이단(異端)의 잘못된 말들은 일일이 다 말할 수가 없다.
알음알이에 한 번 빠졌다 하면
모두가 의미 있는 말[有義語]에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하겠다.

가령 불조의 도가 결과적으로 의미 있는 말[有義語]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생사망정(生死妄情)의 뿌리를 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이른바 반딧불을 모아서 수미산을 불태우고 조개껍질을 가지고
바닷물을 헤아리는 것이라 하겠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선가의 의미 없는 말[無義語]을 나는 압니다.
 불조께서 문자를 세우지 않고 전한 교외별전(敎外別傳)에
 어찌 의미 있는 말[有義語]이 있겠습니까!
 다만 그때 그때의 기연에 감응하여 중생을 제접할 뿐입니다.
 그리하여 때에 따라 높이 휘두르고 크게 문지르기도 하면서
 서로 문답한 것이 굉장히 많아서
 그에 따르는 말씀이야말로 티끌처럼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잘못에 떨어지지 않고
 모두가 제일가는 뜻[第一義諦] 으로 귀결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의미가 말 속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찌 향상(向上)이니 향하(向下)이니
 분분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의미있는 말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점을 두고 하는 것이 아닐는지요?"

그것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의 말은 50(五十步)보로써
 100보(百步)를 비웃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요?
 그대가 향상(向上)·향하의 귀절에 떨어지지는 않았다고는 하지만,
 그대가 말한 제일가는 뜻[第一義諦]은 의미 있는 말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제가 듣기로서는 달라붙은 것을 분해시키고 결박을 제거하며[解粘去縛]
 못을 뽑고 문설주를 뽑아버려라[抽釘拔楔]한 말들도
 결국은 언어 문자를 의지하여서 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가령 불조의 말이나 언어에 그 의미가 없다면
 어떻게 이런 말들이 나왔겠습니까?"

나는 대답했다.

"그대의 이 말은 진실에 약간은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그대는 이 의심을 가슴 속에 깊이깊이 간직하여 오래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저절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쓸데없는 희론만 더할 뿐
 도(道)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됩니다.

 사람에겐 누구나 마음이 있으며 마음에는 감응하는 작용이 있습니다.
 선이란 마음이며 기(機;방편)란 마음이 감응할 대상입니다.
 부처님께서 영취산에서 꽃을 들어 여러 대중에게 보여주시고
 소림사에서 혜가스님이 달마스님께 팔뚝을 잘라 바친 이후,
 역대의 조사들께서 이 마음만을 오로지 전하여
 그 메아리가 천고에 울렸습니다.
 `선이란 이런 것이다' 혹은 `방편[機]이란 저런 것이다라'는 등등의 말은
 어느 한 때도 없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말들이 억지로 꾸며내느라고 그랬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더구나 종문(宗門)이 건립된 이래로 이른바
 목상좌(木上座)·금강권(金剛志)·암호자(暗號子)·파사분(破沙盆)·
 청주삼(靑州杉)·낭생고(娘生袴)·삼각려(三脚驪)·별비사( 鼻蛇)·
 무미반(無味飯)·불습갱(不濕羹)과 5군신(五君臣)·4빈주(四賓主)·
 3현9대(三玄九帶)·10지중관(十地重關)·방하착(放下着)·
 시십마(是什 )·막관타(莫管他) 등에 이르기까지 4방 8면에서
 우뢰가 진동하듯 호호탕탕하게 전후로 나타나 서로 응하니,
 일일이 그것을 다 기록할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빠르기는 날으는 화살촉을 물어뜯는 것보다 신속하고,
 예리함으로 말하자면 취모검(吹毛劍)도 둔하며,
 독하기는 먹으면 죽는 짐주( 酒)술과도 견줄 수 없습니다.
 그 훌륭한 맛은 고깃국과도 비교할 수가 없어
 화려한 비단 위에 꽃을 수놓은 격이며
 최고로 맛난 음료인 우유와도 같습니다.
 근엄한 모습으로 대중 앞에 임하였고 큰 평상에 걸터앉았으니,
 바람이 불면 귀신 소리가 우주에 퍼집니다.
 기침하고, 침뱉고, 팔을 휘젓고,
 노하여 꾸짖고, 희롱하여 웃는 일 등을 가리켜
 모두 선기(禪機)라 한 것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유가(儒家) 경전에서 말한 `고요히 움직이지 않다가 감응하면
 드디어 마음에 통한다(寂然不動 惑而遂通)'는 말은
 불가의 선기와 비슷한 듯도 합니다.
 여기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중지시킬 그 무엇이 있어서 움직이지 않게 한 것이 아닙니다.
 자태가 본래 밝고 고요하여 태허공(太虛空)같은 것으로서,
 이는 천리(天理)이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응하여 만사에 통한다'는 것은
 한 털끝만큼이라도 의식적으로 바래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감응하여 마음에 통할 때,
 마치 큰 종을 두들기면 빈 골짜기에 소리가 울리듯이
 인위적인 작위도 조작도 없이 이치가 본래 그런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맑은 거울에 온갖 물체가 비치고,
 밝은 구슬에 5색이 나타나는 것과도 같습니다.
 선(禪)은 이러한 거울이나 구슬이며,
 기(機)는 비춤이거나 나타남입니다.
 온갖 물체의 곱고 추함과 5색의 엷고 진함이 너무도 분명하여
 자신을 감추지 못한다고는 하나,
 거울과 구슬이 무엇을 인위적으로 비추려 하였겠습니까?
 한 것이 있다면 지극히 청정하고 지극히 맑은 그 자체의 효과일 뿐입니다.
 여기에 계합하는 것을 선기(禪機)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그대의 알 바가 아닙니다."

어떤 이가 물었다.

"들은 바에 의하면 모든 사람에게는 마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유정계(有情界) 안에 예로부터 지금까지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산업(産業)과
 세상을 다스리는 말[言語]이 모래알처럼 많습니다.
 그 원인은 마음 때문이지, 선기(禪機)라는 말은 들어보질 못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소림문하에서 묻고 참구하는 것을 업으로 하는 이만이
 자기 멋대로 명칭을 붙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요?"

나는 대답해 말했다.
"마음에는 진(眞)·망(妄) 두 종류가 있습니다.
 진심(眞心이란 영지(靈知)의 본체로서,
 오묘하게 깨닫지 않고서는 추측이 불가능합니다.
 망심(妄心)이란 알음알이 허깨비가 작용한 것으로서,
 외물(外物)을 쫓는 자는 이 망심대로 움직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저 모두 마음이라고 부르지만,
 진심과 망심이 하늘과 땅 차이인 줄을 모릅니다.
 우리의 생활을 풍요롭게 해주는 산업은 망심이지 진심이 아닙니다.
 진심은 부처님과 조사만이 정인(正因)을 단련하여
 지혜로 사무치고 신령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당당하게 갖가지의 차별세계와 시비 속에서도
 오묘하게 부합하고 은밀하게 계합하셨습니다.
 수증(修證)을 완전히 초월하여 공훈(功勳)에 구애되지 않으며,
 경험적으로 얻은 지식에도 포섭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수행의 단계가 있겠습니까?
 이른바 `대도(大道)에 통달함이여!
 알음알이를 뚝 끊어 초연하구나!' 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바로 이 상태에 간 사람을 조사라고 합니다.
 그러니 어찌 알음알이에 의존하여 속세의 번뇌에 얽매여 있는 자들과
 같이 취급할 수 있겠습니까?

 아직 그 진심을 통달하지 못했지만 열심히 수행하는 것도 괜찮기는 합니다.
 그러나 가령 사유(思惟)를 조작하여 참선하는 집 안에 살면서
 허공을 바라보고 짖고 흙덩이를 좇는 어리석은 짓을 한다면,
 이런 사람은 오히려 세속에 내려가
 삶을 윤택하게 하는 산업에 종사하여 돈을 버느니만 못합니다.
 이렇게 하면 저 자신도 이익이 없을뿐 아니라,
 앉아서 법을 비방하는 허물도 짓게 됩니다.
 선기(禪機)가 왜 사람에게 누를 끼치겠습니까?
 사람이 진심을 잘 선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수도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꼭 살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