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어서화(東語西話)

25. 평상심이 도라고 하는 말뜻은 무엇인가 ?

通達無我法者 2008. 2. 27. 20:07
25. 평상심이 도라고 하는 말뜻은 무엇인가 ?


조주(趙州;778∼897)스님이 남전(南泉;748∼834)스님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도입니까?"하자,
남전스님이 "평소의 마음이 도이다" 라고 했다.
그리하여 이 대화의 내용이 총림에 널리 퍼졌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이 말 때문에 알음알이에 빠지지 않은 자가 드물다.
모두들 말하기를,
"옷 입고 밥 먹는 동정어묵(動靜語默)이 한결같이 본래의 참모습이다.
 이 본래의 참모습을 떠난 밖에서 사량분별로 헤아리면,
 벌써 평상(平常)이 아니다" 라고 말들 한다.
옛 사람이 `평상심이 도이다' 라고 말하며 두 손으로 분부할 때는
일체가 평상한 것을 귀하게 여겼을 뿐이었다.
불법(佛法)과 세간법(世間法)은 모두 그 자체에는 힘이 없는 것이니,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
그런데도 장졸수재(張拙秀才)가 말한
`세상의 인연을 그대로 좇아서 걸림이 없으니 열반과 생사가 모두 헛꽃이다'
라고 한 말을 인용하여 이것이 평상심이라고도 한다.
혹은 방거사(龐居君)가 말한
`매일 일어나는 일이 별다를 것이 없고, 내 스스로 우연히 함께 할 뿐이다'
라고 한 것을 평상심이라고도 하고, 3조(三祖)가 말한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다. 오직 간택하는 것을 미워할 뿐이다'
라고 한 말들을 인용하여 그것이 평상심이라고 한다.
또한 마조스님이 말한
`색(色)을 보면 바로 마음을 보며, 색이 없으면 마음도 나타나지 않는다'
고 한 것을 평상심이라고도 하고, 고덕스님이 말한
`푸른 대나무는 진여(眞如)이고, 누런 국화는 반야(般若)이다'
고 한 것을 평상심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이 일상생활에 본래 갖추어져 견문각지(見聞覺知)를
떠나지 않은 내용이기만 하면 모두 평상심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알음알이로 인식하는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남전스님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았으며,
위로부터 고인들도 이 속에서 머뭇거린 것이 아니었다.
조주스님이 아직 묻지도 않았고,
남전스님이 채 대답하기 전에 직접 알아차려야 한다.
그렇지 않고 한 생각이라도 내어 어묵동정(語默動靜)을 따라
알음알이를 일으키려고 머뭇거린다면 결코 평상심이 아니다.
그렇다고 옛 사람들이 중생을 교화했던 방편으로
한 말들을 이끌어다가 평상심의 증거로 삼는다면
더더욱 절벽이 만 리나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또 `바로 지금 사물을 마주하고 경계를 만나도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으면 이것이 평상심이다' 고 하며,
혹은 `생각을 내어 알음알이를 움직여도 모양다리에 매이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평상심이다' 라고 하며,
혹은 `유와 무의 간격이 없어 보고 들음이 혼융하면,
이것이 평상심이다' 라고 하며,
`추우면 옷 입고 더우면 부채질하는 것이 평상심' 이라고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번거롭게 큰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
그대로 완전한 본체로써 진실하며,
미세한 말·거친 말이 모두 제일가는 뜻[第一義]이니,
이것이 평상심이다' 라고도 한다.
혹은 `옛 사람이 통렬하게 방망이질 하고, 목이 터져라고 꾸짖고,
기연(機緣)에 매이지 않고 일상생활을 말하신 것이 평상심이다' 라고 한다.
그밖에도 갖가지 작위(作爲)와 갖가지 사상과
갖가지 자잘한 일들도 평상심과 흡사하다고 하지만,
이는 자기 귀를 막아 방울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려는 것과 다름이 없어
스스로 속임수만 더할 뿐이다.
아무리 현묘한 성인의 말씀이라 해도, 또 오묘한 이치의 참된 말씀이라 해도
모두 평상심과는 상응(相應)하지 못한다.
그런데 더구나 미혹된 탐망(貪妄)과 전도된 알음알이로써
조금이라도 평상심에 계합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음을 명심해야 한다.
평상심은 알음알이에도 속하지 않고,
이해해서 되는 것도 아니며,
또한 화해영락(和解領略)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해(知解)에 걸려서야 어떻게 평상의 이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옛날 설산(雪山)에서 부처님께서 밝은 별을 보았던 것도
이 평상심을 깨달은 것이며,
가섭이 파안미소하고, 2조(二祖)가 세 번 절하며 예를 올렸던 것도
모두 이 평상심을 깨달은 것이다.
태원(太原:?∼1370)스님이 호각소리를 듣고,
영운(靈雲: )스님이 복사꽃을 보았던 일기일경(一機一境)의 계합과 증오도
모두 이 평상심에 계합하지 않은 것이 없다.
오늘 이 평상심과 조금도 간격이 없기를 바란다면,
직접 저 불조께서 홀연히 한 번 돌이켰던 것과 같이 해야 하리라.
그렇게 한다면 손 가는대로 집어들어도
조금도 평상심과 상응하지 않음이 없으리라.
석가모니 부처님이 미간(眉間)에서 만팔천토(萬八千土)를 비추는 광채와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덮는 광장설상(廣長舌相)을 드러내며,
개자(遭子)에 수미산을 받아들이고,
털끝에서도 보왕의 나라를 건립하여,
심지어는 불무더기에 몸을 눕히고 도산(刀山)지옥을 활보하는 것까지도
모두 한결같이 평상심과 상응하지 않은 것이 없다.
나아가 가없는 중생들이 끝없는 괴로움 속에서
자꾸 미혹되며 여러 가지 장애를 받으며,
무수한 세월을 지내면서도 그 괴로움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역시 이것도 일찌기 털끝만큼도
이 평상심에서 비롯되지 않은 것이 없다.

미혹된 사람은 스스로 차별상을 보지만,
그 차별 가운데에도 이 평상심으로부터 드러나지 않은 것이 없다.
나아가 가없는 중생들은 끝없는 괴로움 속에서
자꾸 미혹되고 여러 가지에 구애되며,
무수한 세월을 지나면서도 그 괴로움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역시 이것도 평상심에서 비롯되지 않은 것은 털끝만큼도 없다.
다만 스스로 미혹되어 이를 깨닫지 못할 뿐이다.
남전(南泉)스님은 말하기를,
"도는 아는 것에도 속하지 않고, 모르는 것에도 속하지 않는다.
 안다면 허망한 깨달음이며, 모른다면 무기(無記)이다" 라고 하였다.
세상 사람들은이 말씀을 온갖 힘을 다해 잡고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에 잘못된 허물이 많은 줄은 알지 못한다.
영가(永圈)스님이 말한
"배움을 끊고 인위적인 조작을 끊은 한가한 도인은
 망상을 없애려 하지도 않고 구하려 하지도 않는다" 라고 한 것은
평상심과 조금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누가 배움을 끊었으며, 누가 인위적인 조작을 끊었겠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대답할 수가 없다.

멀리서 온 길손이 문앞을 지나다가 나의 몸뚱아리를 가리키며
4법계(四法界)에 대해 물었다.
"이 몸은 4법계에서 어느 법계에 해당합니까?"

           
나는 그에게 조용히 대답하였다.

"4종법계(四種法界)는 한 마음의 체(體)와 용(用)을 나타내었을 뿐입니다.
 소승은 경교(經敎)를 잘 모르므로 내 나름대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그러니 이 손의 주장자( 杖子)로 비유해 말하겠습니다.
 겉모양을 보아 주장자( 杖子)라고 하는 것이
 사법계(事法界)로 비유해 말하겠습니다.
 겉모양을 보아 주장자라고 하는 것이 사법계(事法界)이며,
 모양을 떠나서 성품뿐이면 주장자라고 부를 수가 없으니
 이것은 이법계(理法界)이며, 성품과 모양이 둘이 아니면[性相不二]
 주장자라 부를 때 문득 주장자가 아니며,
 주장자가 아닌 상태에서는 본체에 걸림이 없는 주장자이니
 이를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라 합니다.
 끝으로 한 주장자가 일체법에 들어가 법에 따라 명칭을 붙이지만
 끝내 일정한 본체가 없고,
 일체법이 나의 주장자로 들어와 똑같이 주장자라고 부르지만
 또한 일정한 본체가 없는 것을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제망주(帝網珠)와 같습니다.
 나의 한 구슬이 일체의 구슬에 투영되서 들어간다지만
 그 본체는 일찌기 분리되지 않았으며,
 일체의 구슬이 나의 한 구슬에 비쳐 들어와도 
 본체는 일찌기 합치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들어가고 서로 포섭하여 이지러짐이 없고,
 서로 부정하고 서로 융합하면서 간격이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영가스님께서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나의 본성에 들어오니
 나의 본성이 다시 여래와 함께 합한다.
 달 하나가 모든 강물에 두루 나타나니,
 물 속의 모든 달이 달 하나에 포섭된다' 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법계의 명칭을 드넓게 말하면 만 가지로 다르나 대략 말해보면
 넷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실제는 넷도 아닙니다.
 확연하게 자기의 마음을 깨달은 사람만이 그 경지가
 법계의 모양과 원융하여 하여 하나를 고집하지 않고 일체를 말하며,
 일체를 떠나지 않고 하나를 지킵니다.
 이것은 이치가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으로서,
 신통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슬프다. 어리석은 사람들이여!
 허망하게 색신(色身)을 고집하여 나〔我〕라 하고 갖가지 탐욕을 일으켜
 사(事)에 장애되어 3계(三界)에 결박되니 해탈에 기약이 없습니다.
 성문들은(色)에 나〔我〕가 없다는 것을 관하기는 했지만,
 다만 공(空) 그 자체에 막혀 세간을 멀리 떠나
 홀로 해탈을 구하느라고 이(理)에 장애가 되어 부처님의 꾸중을 받습니다.
 그런가 하면 보살승들은 색(色)이 곧 공(空)이며
 공(空)이 곧 색(色)임을 분명히 깨닫고
 색과 공이 둘이 아닌 중도(中道)에 안주하여,
 이사(理事)를 서로 머금고 홀로 해탈하여 걸림이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견해의 집착이 존재하여 오히려 법진에 막혀 있습니다.
 유독 여래의 사사무애(事事無碍)의 경계만은 거울로 거울을 비추듯,
 허공으로 허공에 합치듯 합니다.
 훌륭한 마니구슬은 모든 색을 갖추었으니 거두면 한꺼번에 거두고,
 나타나면 일제히 나타나는 것과도 같아 조작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찌 인위적으로 배치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두고 공용(功用)이 없는 법문(法門)이라고 합니다.
 만 가지나 되는 법계의 모습을 총괄하여 넷으로 귀결하고,
 넷을 회합하여 하나로 귀결시키는데,
 공용이 없는 가운데서 그 하나마저도 남겨둘 수 없습니다.
 나의 몸이 4법계(四法界)에 있어서 이치의 자체가 이와 같습니다.
 빼어난 상근기는 기연보다 앞서서 알아차리지만
 중·하의 부류들은 부질없이 수고하며 오랫동안 생각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객승은 "아 그렇군요" 하고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