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66칙 암두의 할〔巖頭作力〕

通達無我法者 2008. 3. 3. 10:42
 

 

 

제66칙 암두의 할〔巖頭作


(수시)

기틀에 당하여서는 범을 빠뜨리는 덫을 당장에 놓고 도적을 사로잡는 작전을 이리저리 짠다. 밝

음에도 합하고 어둠에도 합하며, 한꺼번에 놓아주기도 하고 한꺼번에 잡아들이기도 한다. 죽은 뱀을 가지고 노는 것일랑 저

들 작가 선지식에게 맡겨라.


(본칙)

암두스님이 한 스님에게 물었다.

“어느 곳에서 왔느냐?”

-입을 열기 이전에 벌써 저버렸다. 해골을 뚫어버렸다. 온 곳을 알려 한다면 어렵지 않지.


“서경(西京)에서 왔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좀도둑이었군.


“황소(黃巢)가 지난 뒤에 칼을 주었느냐?”

-평소에 좀도둑질은 하지 않았구나. 모가지 떨어질까 두려워하지도 않고 이처럼 물어다대니 담력이    퍽이나 크구나.


“주었습니다.”

-졌구나. 몸을 피할 줄을 몰랐구나. 멍청한 놈들이 삼대 같고 좁쌀처럼 많다.


암두스님이 목을 그의 앞으로 쑤욱 빼면서 “얏!”하고 소리치자,

-반드시 적절한 기연을 알아야 한다. 범을 잡는 덫이군. 이 무슨 수작인가?


스님은 말하였다.

“스님의 머리가 떨어져버렸습니다.”

-송곳 끝이 날카로운 것만 알지, 끌의 끝이 네모난 줄은 모르는군. (네 주제에) 무슨 좋고 싫은    것을 따지는가! 한 수 두었다.


암두스님이 껄껄대고 크게 웃었다.

-온 천하의 납승이라도 (암두스님) 어찌할 수 없다. 천하 사람은 속일지 몰라도, 이 늙은이의 머   리가 떨어진 곳은 못 찾는다.


스님이 그 뒤 설봉(雪峰)스님에게 이르자,

-여전히 어리석구나. 이 스님이 늘 완전히 지기만 하는구나.


설봉스님이 물었다.

“어느 곳에서 왔느냐?”

-어디에서 왔는지 묻지 않을 수 없지. 반드시 시험해보아야 한다.

“암두에서 왔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지고 말았네.


“무슨 말씀을 하시던가?”

-이야기를 해도 방망이 맞는 것을 면치 못하리라.


스님이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자,

-곧바로 쫓아냈어야 했다.


설봉스님이 서른 방망이를 쳐서 �아내버렸다.

-비록 (속발하는) 못을 끊고 쇠를 자르기는 했으나 무엇 때문에 서른 방망이만 쳤느냐? 주장자가

  아직도 부러지지 않았다. 이는 아직 본분 소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침에 3천 방망이, 저녁에 8

  백 방망이를 쳐야 하기 때문이다. 동기동창이 아니라면 어떻게 또렷한 뜻을 분별하랴. 이와 같

  긴 하지만 말해보라, 설봉스님과 암두스님의 귀결점은 어디에 있는가를.


(평창)

바랑을 걸머쥐고 풀을 헤치며 바람을 맞으면서 행각할 때는 반드시 안목을 갖춰야만 된다. 이

스님은 안목이 (민첩하기가) 유성과 같았으나 암두스님에게 시험을 당하여 한 꿰미에 뚫려버렸다.

당시에 제대로 된 놈이었다면, 때로는 죽이기도 하고 때로는 살리기도 하면서 (종사가) 말해주면

바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변변치 못하여 대뜸 “주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행

각을 한다면 염라대왕이 그대에게 행각중에 얻어먹었던 밥값을 내라고 할 것이다.

그는 얼마나 많은 짚신을 떨어뜨리면서 설봉스님에게 이르렀는가? 당시 조금이라도 안목이 있어

대뜸 일어나 갔었더라면 이 어찌 통쾌하지 않았겠느냐? 이런 인연(암두스님이 웃는 것)은 깐깐하

여 어렵다. ‘이 일’은 득실이 없다고는 하나 여기에 이르러서는 또한 안목을 갖춰 간택할 필요가

있다.

용아(龍牙)스님이 행각할 때 의심을 일으켜 덕산(德山)스님에게 물었다.

“학인이 막야(鏌鎁) 보검을 들고서 스님의 머리를 베려고 할 때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덕산스님이 목을 쑥 빼며 앞으로 다가서며 “얏!”하고 소리지르자, 용아스님은 말하였다.

“스님의 머리는 떨어졌습니다.”

덕산스님의 방장실로 돌아가버렸다. 용아스님이 그 뒤 이일을 동산(洞山)스님에게 얘기하자 동산

스님은 말하였다.

“덕산이 당시에 무어라고 말하던가?”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그가 말이 없었던 것은 그만두고 떨어진 덕산스님의 머리를 나에게 가져와보게.”

용아스님은 이 말에 완전히 깨닫고 마침내 향을 사르면서 멀리 덕산스님을 바라보고 절을 올리

며 참회하였다.

어느 스님이 덕산스님의 처소에 이르러 이 일을 전하자 덕산스님은 말하였다.

“동산 늙은이가 좋고 나쁜 것도 구별할 줄 모르는군. 이놈이 죽은 지 한참 지났는데 구해준들 무

슨 쓸모가 있겠는가?”

이 공안을 살펴보면 용아스님의 경우와 매한가지이다. 덕산스님이 방장실로 되돌아가 버렸던 것

은 곧 어둠 가운데서 가장 현묘한 것이었다. 암두스님이 크게 웃었는데, 그의 웃음 속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누구나 이를 알 수 있다면 천하를 누빌 것이다. 스님이 그 당시 알 수만 있었다면

천고 이후에도 계속되는 꾸지람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암두스님의 문하에서 이미 한바탕 틀려

버렸다.

이를 살펴보면 설봉스님은 암두스님과 동참(모두 덕산스님의 제자)이기에 곧 귀결점을 알고 있었

으나 그에게 말해주지 않고 서른 방망이를 두들겨서 절 밖으로 내쫓아버렸다. 이는 전무후무의 경

지라 할 만하다. 이는 작가 납승의 면목을 나타내어 사람을 지도하는 솜씨이다. 그에게  이렇게

해주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스스로가 깨닫겠는가? 본분종사는 사람을 지도하되, 어느 때는 꼼짝

도 못하게 가두어놓기도 하고 어느 때는 놓아주어 어쩔 줄 모르게 만들어 깨닫도록 해주었다.

저토록 대단하신 암두․설봉 스님은 거꾸로 밥통 같은 선객에게 감파를 당하였다. 암두스님이 “황소가 지난 뒤에 칼을 주었느냐?”고 하였는데, 여러분은 말해보라, 여기에서 무슨 말을 해야 그의 웃음을 면할 수 있으며, 또한 설봉스님의 방망이에 쫓겨남을 면할 수 있을까? 이 깐깐한 화두를 몸소 깨닫지 못한다면 설령 입으로 통쾌하고 날카롭게 말하여 구경(究竟)의 경지에 이른다 하여도 투철하게 생사를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산승은 평소에 사람들에게 이 기관(機關)이 전변하는 곳을 살펴보게 하였다. 만약 머뭇머뭇 헤아

린다면 멀고도 먼 이야기이다. 듣지 못하였느냐? 투자(投子)스님이 연평(延平)스님에게 물었던 것

을, 투자스님이 “황소가 지난 뒤에 칼을 주었느냐?”고 묻자, 스님이 손으로 땅을 가리켰다. 투자스

님은 “30년 동안 마부 노릇을 하였지만 오늘 도리어 나귀한테 들이받혔구나”라고 말했다.

살펴보면 이 스님은 참으로 작가였다. “주었다”고 말하지도 않고 “줍지 못했다”고도 말하지 않았

으니, 서울〔西京〕의 스님네와는 저 바다 건너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다.

진여(眞如)스님은 이를 염(拈)하여 말하였다.

“옛사람은 하나(투자스님)는 우두머리가 되고 하나(이 스님)는 꼴찌가 되었다.”

설두스님의 송은 다음과 같다.


(송)

황소가 지난 뒤에 칼을 주었다는데

-어리석은 녀석 같으니라고,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이는 다만 주석으로 만들어진 (물렁한) 칼

  한 자루일 뿐이다.


크게 웃는 웃음은 작가이어야 알 수 있다.

-한 자식만이 몸소 얻었군. 과연 몇 사람이 있을는지? 그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자유를 얻을 수

  있겠는가?


서른 방망이도 또한 가볍게 용서해줌이니

-같은 가지에서 나고 같은 가지에서 죽는다. 아침엔 3천, 저녁엔 8백 방망이다. 동쪽집 사람이 죽

  자 서쪽집 사람이 조문을 한다. 구제하여 살려주었다.


이익을 본 것 같으니 결국 손해를 본 것이로다.

-죄상에 의거하여 판결하였다. 당초에 조심하지 않았던 게 후회스럽다. 그래도 조금은 나은 편이   다.


(평창)

“황소가 지난 뒤에 칼을 주었다는데, 크게 웃는 웃음은 작가이어야 알 수 있다”는 것은 설두스님

은 그 스님과 암두스님이 큰 소리로 웃었던 곳을 노래한 것이나, 이는 천하 사람이 더듬고 찾아도

찾을 수 없다. 말해보라, 그는 무엇 때문에 웃었는가를. 모름지기 이는 작가이어야 알 것이다. 이

웃음 속에는 권(權)과 실(實)이 있으며, 조(照)와 용(用)이 있고, 죽임〔殺〕과 살림〔活〕이 있다.

“서른 방망이도 또한 가볍게 용서해줌이니”라는 것은, 스님이 그 뒤 설봉스님에게 이르러 여전히

거칠었으므로 설봉스님이 법령에 따라 서른방망이를 친 후 쫓아내버린 것을 노래한 것이다. 말해

보라, 무엇 때문에 이처럼 했는가를. 온갖 망정을 다하여 이 말을 이해하려고 하는냐? 이익을 본

것 같으나 실은 손해를 봄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