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문경훈(緇門警訓)

선문 禪文 / 전선관법 傳禪觀法

通達無我法者 2008. 3. 17. 17:36
 

 

선문 禪文

 

전선관법 傳禪觀法

 

禪法濫觴,[1] 自於秦世僧叡法師序關中出禪經,[2] 其文則明心達理之趣也. 然譬若始有其方, 未能修合, 弗聞療疾, 徒曰醫書. 矧以大敎旣敷, 群英分講, 註之者矜其辭義, 科之者逞其區分,[3] 執麈搖松,[4] 但尙其乘機應變, 解紛挫銳,[5] 唯觀其智刃辭鋒, 都忘所詮, 不求出離, 江表.遠公,[6] 慨禪法未敷, 於是苦求而得也.[7]菩提達磨祖師, 觀此土之根緣, 對一期之繁紊[8]而宣言曰: 「不立文字, 遣其執文滯迹也; 直指人心, 明其頓了無生也.」 其機峻, 其理圓故, 不免漸修之徒篤加訕謗. 傳禪法者, 自達磨爲始焉, 直下相繼, 六代傳衣, 橫枝而出, 不可勝紀, 如《曹溪寶林傳》所明也.[9]

선법의 기원은 진나라 때 승예법사가 관중에서 나온 선문의 경전에 서문을 쓰고 부터이니, 그 글은 곧 마음을 밝히고 이치를 통달하는 요지이다. 그러나 비유하자면, 처음으로 그 방법은 있으되 아직 능히 수행하여 합치시켜 보지 못함이 마치 병을 치료하였음은 듣지 못한 채 다만 의서 만을 말하는 것과 같았다. 하물며 큰 가르침이 이미 널리 퍼지자 영명한 무리들이 나누어 강의함에 있어서 주석을 단 이는 그 글자의 의미를 자랑하고 과목을 나눈 이는 그 구분 지음을 만족하게 여기며 총채를 움켜잡고 소나무 가지를 흔들지만 단지 임기응변의 묘미만을 숭상할 뿐이요, 어지러운 것을 풀고 날카로운 것을 꺾음에 오직 그 지혜와 칼날과 논술의 날카로운 기세만을 들여다 볼 뿐 나타내고자 하는 바는 모두 잊어버리고 문자에서 벗어나 여의기를 구하지 않으니, 강표의 원공이 선법이 펼쳐지지 못함을 개탄하다가 이에 애써 구하여 얻은 것이다.

보리달마조사께서 이 땅의 근기와 인연을 들여다보고 한 기간 번잡하고 문란해 질 것에 대해 선언하여 이르기를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는 것(不立文字)은 문자에 집착하거나 자취에 체류함을 놓아버리는 것이요, 사람의 마음을 곧장 가리킨다는 것(直旨人心)은 태어남이 없음을 문득 깨우쳐 체득함을 밝힌 것이다」라 하였는데, 그 기틀이 높이 빼어나고 그 이치가 원만한 까닭에 점수漸修하는 무리들의 신랄한 비방을 면치 못하였다. 선법을 전한 것은 달마로부터 비롯하여 곧장 아래로 이어져 6대까지 가사를 전하였고 곁가지로 뻗어 나간 것은 이루 기록할 수 없으니《조계보림전》에 밝힌 것과 같다.

【1】《書》云: 「三江浩浩, 其源濫觴.」 濫, 但可泛一盃而已, 又泛溢於盃觴也, 言其源則小而漸成江‧漢之浩瀚. 禪法之傳, 亦如是也.

【2】達磨未來中土時, 晋.遠公先譯其禪經二卷, 藏秦.關中, 僧叡出關中所藏禪經, 作序流布.

【3】逞者, 矜而自呈也. 區分者, 區別分限也, 言分別乎序正流通等之區局也.

【4】鹿之大者爲麈, 群鹿隨之, 皆視麈尾所轉爲準, 古之談者揮之, 良有以也. 搖松者, 惠朗禪師得法於石頭, 常執松枝爲人禪話, 後人以爲談柄松. 又生公擯在虎丘山, 執松枝爲談柄故. 詩云: 「聽徒千箇石, 談柄一枝松」云也.

【5】魯.仲連遊趙, 言秦稱帝之害, 秦將聞之, 却五十里, 平原君欲封之, 連笑曰: 「所貴乎天下士者, 爲人排難解紛而無取也, 有所取者, 是商賈之事也.」 江淹祭戰亡文: 「巨醜挫銳」, 注: 巨醜, 强胡也; 挫‧折也, 銳‧利也. 此言解釋其紛亂之心, 折挫其惠利之志.

【6】盧山在潯陽.九江之外, 故云江表. 遠公居之.

【7】《定祖圖》云: 「秦僧智儼, 於罽賓國懇請佛陀跋多, 偕來中夏. 初至長安, 後至廬山, 遂出禪經, 與遠公同譯而藏秦.關中焉.」

【8】音問, 亂也.

【9】唐.儀鳳中, 曹叔良建閣於雙峰大溪之間, 六祖居之, 因名曹溪. 貞元中, 金陵沙門慧炬, 將祖偈, 往曹溪, 同西天勝持三藏, 重共參校並唐初以來傳法宗師機緣, 集成《寶林傳》.

【1】《서경》에 이르기를 「세 강줄기가 광활하게 흐르지만 그 근원은 잔 하나 띄울 정도일 뿐이다」 하였으니, 濫은 단지 잔 하나를 띄울 수 있을 뿐이라는 것, 또는 잔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라는 것이므로 그 근원은 작으나 차츰 나아가 장강과 한수의 크고 넓음을 이루었음을 말한다. 선법의 전수도 역시 이와 같다.

【2】달마가 아직 중국 땅에 오지 않았을 때 晋나라 원공이 먼저 선에 관한 경전 2권을 번역하여 秦의 관중에 간직하여 두었더니 승예가 관중에 간직해 두었던 선에 관한 경전을 꺼내어 서문을 지어 유포하였다.

【3】逞이란 긍지를 가지고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 區分이란 구별하여 나누고 한계를 짓는 것이니 序와 正과 流通 등의 구분을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4】사슴 가운데 대장을 麈라 하는데 사슴 무리들이 그를 따르며 모두 그의 꼬리가 움직이는 바를 보아서 [행동의] 기준으로 삼으니, 예전에 담론하던 자들이 그것을 휘두르는 데는 진실로 까닭이 있기 때문이었다. 소나무를 흔든다는 것은, 혜랑선사가 석두선사로부터 법을 얻고는 항상 소나무 가지를 잡고서 사람들을 위해 禪話를 하였더니 뒷사람들이 소나무를 談柄(이야기할 때 손에 쥐는 拂子)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또는 생공이 배척 당하여 호구산에 있을 때 소나무 가지를 잡고 談柄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시에서 말하기를 「듣는 무리는 1천개의 돌이요 談柄으로는 한 가지 소나무로다」라 하였다.

【5】노나라 중련이 조나라에 노닐다가 진나라가 稱帝한 해악을 말하였더니 진나라 장수가 이 말을 듣고는 50리를 물러가거늘 평원군이 그를 책봉하려 하자 중련이 웃으며 말하기를 「천하의 선비가 귀하게 여겨지는 까닭은 다른 이들을 위해 어려움을 물리치고 분란을 해소시키지만 취하는 것이 없기 때문인데, 취하는 바가 있는 것은 곧 商賈의 일입니다」 하였다. 강엄이 전사한 망자들을 제사 지내는 글에서 「巨醜挫銳」라 하였는데 巨醜는 강력한 오랑캐이며 挫는 꺾음을 말하고 銳는 예리함을 말한다. 이는 분란스러운 마음을 해소시키고 날카로운 뜻을 주저앉힘을 말한다.

【6】노산은 심양의 구강 바깥 편에 있기에 江表라 일컫는다. 원공이 그곳에 거처하였다.

【7】《정조도》에 이르기를 「진나라 승려 지엄이 계빈국에서 불타발다에게 간청하여 함께 중국으로 건너왔다. 처음에는 장안에 이르렀다가 후에 노산에 도착하여 마침내 선법에 관한 경전을 꺼내어 원공과 더불어 함께 번역하여 秦의 관중에 간직하여 두었다.

【8】음은 문(問)이요 어지럽다는 뜻이다.

【9】당나라 의봉 연간에 조숙량이 쌍둥이 뫼봉과 큰 시냇물 사이에 누각을 세웠는데 육조대사가 그곳에 기거한 인연으로 ‘조계’라 이름하였다. 정원 연간에 금릉의 사문 혜거가 조사들의 게송을 가지고 조계에 가서 서천의 승지삼장과 함께 거듭 정리 교정하고 당나라 초기이래 법을 전해 받은 종사들의 機緣을 아울러서《보림전》을 집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