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一. 귀경(歸敬)과 술의(述意)

通達無我法者 2008. 3. 24. 11:12

 

一. 귀경(歸敬)과 술의(述意)

은정희 역주/일지사/자료입력:도규희

 

 

△ 처음 세 줄의 게송 가운데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으니, 앞의 두 게송은 바로 삼보(三寶)에 귀경하는 것이요, 뒤의 한 게송은 기신론을 지은 뜻을 서술하는 것이다.
〔△ 弟三消文. 文有三分. 初三行偈, 歸敬述意. 論曰以下, 正立論體. 最後一頌, 總結廻向.
△ 初三偈中, 卽有二意. 前之二頌, 正歸三寶. 其後一偈, 述造論意. 〕

【논(論)】
온 시방(十方)에서 가장 수승한 업(業)과 변(?知)을 갖추시고, 색(色)이 걸림이 없이 자재(自在)하신 구세(救世)의 대비(大悲)하신 이와 및 저 신체상(身體相)의 법성진여(法性眞如)의 바다와 한량없는 공덕을 갖춘 이의 여실한 수행 등에게 귀명(歸命)하옵나니,
〔歸命盡十方. 最勝業?知. 色無碍自在. 救世大悲者. 及彼身體相. 法性眞如海. 無量功德藏. 如實修行等.〕

【소】
처음 귀경(歸敬)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귀명’ 두 자는 능귀(能歸)의 상(相)이요, ‘온 시방(盡十方)’이하는 소귀(所歸)의 덕을 나타내는 것이다. 능귀(能歸)의 상(相)이란, 공경하여 따르는 뜻이 ’귀(歸)’의 뜻이며, 향하여 나아가는 뜻이 ’귀(歸)‘의 뜻이다. 명(命)은 목숨(命根)을 이름이니, 이 목숨이 몸의 모든 기관을 통어(統御)한다. 한 몸의 요체로는 오직 이 명(命)이 주가 되며, 온갖 산 것의 중하게 여기는 것이 이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이 둘도 없는 명(命)을 들어서 무상(無上)의 존귀함(즉 삼보)을 받들어 신심의 지극함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귀명(歸命)’이라고 말한 것이다. 또한 ’귀명(歸命)'이란 근원에 돌아가는 뜻이니, 왜냐하면 중생의 육근(六根)이 일심(一心)에서부터 일어나 스스로의 근원을 등지고 육진(六塵)에 흩어져 달려 나가는 것인데, 이제 목숨을 들어 육정(六情)을 총섭 하여 그 본래의 일심의 근원에 돌아가기 때문에 ‘귀명(歸命)’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이 귀명의 대상인 일심은 곧 삼보(三寶)이기 때문이다.
〔 初歸敬中有二. 歸命二者. 是能歸相. 蘊十方下, 顯所歸德. 能歸相者. 敬順義是歸義. 超向義是歸義. 命謂命根, 一身之要, 唯命爲主. 萬生所重. 莫是爲先. 擧此無二之命. 以奉無上之尊. 表信心極. 故言歸命. 又復歸命者還源義. 所以者, 衆生六根, 從一心起, 而背自原, 馳散六塵. 今擧命總攝六情, 還歸基本一心之原, 故曰歸命, 所歸一心, 卽是三寶故也.〕

‘온 시방(盡十方)’이하는 돌아갈 대상인 덕을 나타냈으니, 이 중에서 마땅히 삼보의 뜻을 설명해야 하는데, 그 뜻은 따로 말한 것과 같다. 이제 우선 글을 해석함에 있어 글 가운데 세 가지가 있으니, 불(佛)ㆍ법(法)ㆍ승(僧)을 말한다. 불보 안에 또한 세 가지 뜻이 있으니, 먼저 심덕(心德)을 찬탄하였고, 다음에 색덕(色德)을 찬탄하였으며, 제 삼구는 사람을 들어 찬탄을 끝맺었다. 심덕을 찬탄하는 중에 용(用)과 체(體)를 찬탄하였다.
〔盡十方下 , 顯所歸德. 此中應說三寶之義. 義如別設. 今且消文. 文中有三. 謂不法僧. 寶之內亦有三意. 先歎心德. 次歎色德. 第三句者, 擧人結歎, 歎心德中, 歎用及體.〕

처음 ‘온 시방의 가장 수승한 업’이라고 말한 것은 업의 작용을 찬탄하는 것이니, 팔상(八相)등을 나타내어 중생을 교화한 업을 이르는 것이다. 즉 시방계(十方界)를 다하고 삼세(三世)의 시기에 두루 하여 모든 교화할 수 있는 것을 따라 모든 불사(佛事)를 일으켰기 때문 에 ‘온 시방의 가장 수승한 업’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는 대법론(對法論)에 이르기를 “업대성(業大性)이란 생사의 시기가 다할 때까지 일체의 보리를 이루는 것들을 나타내어 광대한 모든 불사(佛事)를 건립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으니, 대법론에서는 ‘삼세(三世)’를 들었고, 기신론에서는 ‘시방(十方)’이라고 나타내었다.
〔初言盡十方最勝業者, 是歎業用. 謂現八相等化衆生業. 蘊十方界. ?三世際. 隨諸可化, 作諸佛事. 故言蘊十方最勝業. 如對法論云. 業大性者, 窮生死際, 示現一切成菩提等, 建立廣大諸佛事故. 彼擧三世. 此顯十方也.〕

‘두루한 지혜(?智)’라고 말한 것은 지체(智體)를 찬탄한 것이다. 업용(業用)이 시방에 두루한 까닭은 그 지체가 두루 하지 않은 바가 없기 때문이며, 지체가 두루 하기 때문에 두루한 지혜라고 말한 것이다. 이는 십대승론(十代乘論)에서 이르기를, “마치 허공이 일체의 물질세계에 두루 하여 생(生)ㆍ주(住)ㆍ멸(滅)의 변이(變異)가 없는 것처럼, 여래(如來)의 지혜도 그러하여 일체의 아는 바에 두루 하여 전도(轉倒)되는 것도 없고 변이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라고 한 것과 같다. 심덕을 찬탄함을 마치다.
〔言?智者, 是敬智體. 所以業用周於十方者, 由其智體無所不?故也. 智體周?, 故言?智. 如攝論云. 猶如虛空, ?一切色際, 無生住滅變異. 如來智亦爾. ?一切所知. 無倒無變異故, 歎心德竟.〕

다음에는 색덕(色德)을 찬탄함이니, 이 중에도 두 가지가 있다. ‘색이 걸림이 없다’는 것은 색의 본체의 신묘함을 찬탄하는 것이요, ‘자재하다’고 말하는 것은 색의 작용의 수승함을 찬탄하는 것이다. 처음 색체(色體)라고 한 것은, 여래의 색신(色身)이 만행(萬行)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및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훈습으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신묘한 색이 있다고 하더라도 장애되는 것이 없어서 한 가지 상(相), 한 가지 호(好)가 한계가 없기 때문에 색이 걸림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이는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허공의 변제(邊際)를 찾는 것은 오히려 가능하지만 부처님의 한 터럭 구멍은 한계가 없다. 부처님의 덕은 이처럼 불가사의하므로 여래의 깨끗한 지견(知見)이라 이름한다.” 한 것과 같다. 질애(質?)는 없지만 방소(方所)에 나타나는 뜻이 있기 때문에 색(色)이면서 걸림이 없다고 아름하게 된 것이다.
〔次歎色德, 於中亦二. 色無?者, 歎色體妙. 言自在者, 歎色用勝. 初言色體者. 如來色身, 萬行所成, 及不思議薰習所成. 雖有妙色, 而無障?. 一相一好無際無限. 故言 色無?. 如華嚴經言. 求空邊際猶可得. 佛一毛孔無崖限. 佛德如是不思議. 是名如來淨知見故. 雖無質?, 而有方所示現之義. 故得名色而無?也.〕

‘자재(自在)’라고 말한 것은 그 색의 작용을 찬탄하는 것으로, 오근(五根)이 서로 작용하고 십신(十身)이 서로 작용하는 것 등을 이름하니, 그러므로 ‘색이 자재하다(色自在)’라고 말한 것이다. 오근(五根)이 서로 작용한다는 것은 열반경(涅槃經)의 팔자재(八自在)중에서 발한 것과 같고, 십신이 서로 짓는다는 것은 화엄경 십지품(十地品)에서 설한 것과 같다. 색덕을 찬탄함을 마치다.
〔言自在者, 歎其色用. 謂五根互用, 十身相作等, 故言色自在. 五根互用者, 如涅槃經八自在中說. 十身相作者, 如華嚴經十地品說. 歎色德竟.〕

‘구세의 대비하신이’라는 것은 세 번째 구절의 사람을 들어 찬탄을 끝맺은 것이다. 부처는 대장자(大長者)와 같아서 중생을 자식으로 여기는지라 삼계(三界)의 화택(火宅)에 들어가 모든 불타는 고통을 구원하기 때문에 구세(救世)라 말하였으니, 이 구세의 덕이 바로 대비(대비)인 것이다. 자타(自他)를 떠난 자비 가운데 수승하기 때문에 대비라 말하였으며, 부처의 경지에서 갖는 만 가지 덕 가운데 여래는 오직 대비만으로 힘을 삼기 때문에 그것만을 들어서 부처를 나타내었다. 이는 《증일 아함경(增一阿含經)》에서 이르기를, “범인과 성인의 힘에 여섯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여섯 가지인가? 어린 아이는 우는 것으로써 힘을 삼기 때문에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울 것이고, 여인은 성내는 것으로 힘을 삼기 때문에 성을 내고 난 후에 말하고, 사문(沙門)과 바라문(婆羅門)은 참는 것으로 힘을 삼기 때문에 항상 남에게 겸손할 것을 생각한 뒤에 스스로 말하고, 국왕은 교만한 것으로 힘을 삼기 때문에 이런 큰 세력을 부림으로써 스스로 말하고, 아라한(阿羅漢)은 한결같은 정진으로 힘을 삼아 스스로 말하며, 모든 부처와 세존은 대비로써 힘을 삼아 널리 중생을 이익 되게 하기 때문이다.” 라고 한 것과 같다. 그러나 모든 부처는 특히 대비로써 힘을 삼기 때문에 사람(佛人)을 표시하려 함에 대비(大悲)한 이라고 이름붙인 것임을 알아야 한다. 위에서부터 세 구절은 불보(佛寶)를 찬탄하여 마친 것이다.
〔救世大悲者者, 是第三句擧人結歎 佛猶大長者. 以衆生爲者. 人三界火宅. 救諸焚燒苦. 故言救世. 救世之德, 正是大悲. 無綠之悲, 諸悲中勝. 故言大悲. 佛地所有萬德之中, 如來唯用大悲爲力. 故偏擧之, 以顯佛人. 如增一阿含云. 凡聖之力有其六種, 小兒以?爲力. 欲有所說, 要當先?. 女人以瞋爲?力, 依瞋?已, 然後所說. 沙門婆羅門, 以忍爲力. 常念下於人, 然後自陣. 國王?慢爲力. 以此豪勢而自陣說. 阿羅漢以專精爲力, 而自陣說. 諸佛世尊以大悲爲力. 弘益衆生故. 是知諸佛偏以大悲爲力. 故將表人名大悲者. 以來三句歎佛寶竟.〕

이 아래 두 구절은 다음에 법보(法寶)를 나타낸 것이다. ‘ 및 저 몸의 체상(及彼身體相
)’이란 것은 앞에서 말한 여래의 몸이 곧 보신불(報身佛)임을 말하는 것이니, 바로 법계(法界)로써 자기 몸을 삼기 때문에 ’저 몸의 체상‘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는 부처를 들어 그 법을 취하였다.
〔此下二句, 次顯法寶. 及彼身體相者. 爲前所說如來之身. 卽是報佛. 正用法界以爲自體. 故言彼身之體相也. 此是擧佛而取其法.〕

아래 구절은 바로 법보(法寶)의 체상을 낸 것이다. ‘법성(法性)’이라고 말한 것은 열반을 말한 것이니, 열반은 법의 본성이기 때문에 ‘법성’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이는 지도론(智度論)에서 이르기를, “법은 열반을 이름하니 희론(戱論)이 없는 것이며, 법성은 본분종(本分種)을 이름하니, 누런 돌에는 금의 성질이 있고 흰 돌에는 은(銀)의 성질이 있는 것과 같이 모든 법 가운데에는 열반의 성질이 있다.” 라고 한 것과 같기 때문에 ‘법성’이라고 말한 것이다.
〔下句正出法寶體相. 言法性者, 所謂涅槃. 法之本性, 故名法性. 如智度論云. 法名涅槃. 無戱論法. 姓名本分種. 如黃石金性, 白石銀性. 如是一切法中有涅槃性, 故言法性.〕

‘진여(眞如)’라고 말한 것은, 보낼 것이 없음을 ‘진(眞)’이라고 하고 세울 것이 없음을 ‘여(如)’라고 하니, 아래 글에서 “이 진여의 체는 보낼만한 것이 없으니 일체법이 다 참되기 때문이며, 또한 세울 것이 없으니, 모든 법이 다같이 같기(如) 때문이다. 그러니 일체법(一切法)을 말할 수 없고 생각할 수도 없기 때문에 진여(眞如)라고 이름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라고 말한 것과 같다.
〔言眞如者. 無遺曰眞. 無立曰如. 如下文云, 此眞如體無有可遺. 以一切法悉皆眞故. 亦無可立. 以一切法皆同如故. 當知一切法不可說不可念, 故名爲眞如.〕

‘해(海)’라고 말한 것은 비유에 붙여 법을 나타낸 것이다. 대략 설명하자면 바다에는 네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매우 깊음이요, 둘째는 광대함이요, 셋째는 온갖 보배가 다함이 없음이요, 넷째는 온갖 형상이 비취어 나타남이다. 진여의 큰 바다로 또한 그러함을 알아야 할 것이니, 왜냐하면 모든 잘못을 영원히 끊기 때문이며, 만물을 포용하기 때문이며, 갖추지 않은 덕이 없기 때문이며, 나타나지 않는 형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법성진여해(法性眞如海)’라고 말하니, 이는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비유하면 깊은 대해(大海)에 진귀한 보배가 한이 없으며, 그 중에 중생의 형류상(形類相)을 모두 나타내는 것과 같이, 매우 깊은 인연의 바다에 공덕의 보배가 한이 없으며, 청정한 법신 중에 어떤 형상이든 나타내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법보(法寶)를 찬탄함을 마치다.
〔所言海者, 寄喩顯法. 略而說之, 海有四義. 一者甚深, 二者廣大, 三者百寶無窮, 四者萬像影現. 眞如大海當知亦爾. 永絶百悲故, 苞容萬物故, 無德不備故, 無像不現故. 故言法性眞如海也. 如華嚴經言, 譬如深大海, 珍寶不可盡. 於中悉顯現, 衆生刑類相. 甚深因綠海, 功德寶無盡. 淸淨法身中. 無像而不現故. 歎法寶竟.〕

이 아래 두 구절은 승보(僧寶)를 찬탄한 것이다. ‘한량없는 공덕장(無量功德藏)’이라 말한 것은 덕을 들어 사람을 취하는 것이니, 지상보살(地上菩薩)이 한 가지 행을 닦음에 따라 만 가지 행이 모여 이루어짐을 말한다. 그 하나하나의 행이 모두 법계와 같아서 한량이 없는지라 공을 쌓아 얻은 바이니 그러므로 한량없는 공덕이라 하며, 이러한 공덕이 모두 보살에 속하여 사람(그 보살)이 덕을 잘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장(藏)’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此下二句歎其僧寶. 言無量功德藏者, 擧德取人. 謂地上菩薩, 隨修一行, 萬行集成. 其一一行皆等法界, 無有限量. 積功所得, 以之故言無量功德. 如是功德總屬菩薩. 人能攝得, 故名爲藏.〕

다음에 ‘여실한 수행 등(如實修行等)’이라 말한 것은 바로 행덕(行德)을 찬탄한 것이다. 보성론(寶性論)에 의하면, 정체지(正體智)에 의하여 여실행(如實行)이라고 이름하며 후득지(後得智)에 의하여 변행(?行)이라고 이름하였으니, 이제 이 가운데(기신론)에서 ‘여실한 수행’이라 말함은 정체지를 든 것이요, 다음에 ‘등(等)’이라고 말한 것은 후득지를 취한 것이다. 만약 법집경(法集經)에 의하여 설명한다면 만 가지 행의 시종(始終)을 총괄하여 통틀어 두 구절에 포함시킬 수 있으니, 여실수행과 불방일(不放逸)을 말한다. 저 경(法集經)에서 말하기를, “‘여실수행’이란 보리원(菩提願)을 말함을 말하며 ‘불방일’이란 보리원을 만족시킴을 말한다.”라고 하고 다시, “여실수행이란 보시(布施)를 수행하는 것을 말하며, 불방일이란 보답을 구하지 않음을 말하니, 이와 같이 깨끗한 계율을 가져서 불퇴(不退)를 성취하며, 혹은 인욕행(忍辱行)을 닦아서 무생인(無生忍)을 얻으며, 일체의 선근(善根)을 구하되 피로하거나 싫증을 내지 아니하고 일체의 지은 일을 버리며, 선정(禪定)을 닦되 선정에 안주하지 않으며, 지혜를 충분히 채웠으되 모든 법을 희론(戱論)하지 아니한다. 그 차례대로 여실수행과 및 불방일이며ㆍㆍㆍㆍㆍㆍ”라고 하고 그 밖에 널리 설명하고 있다.
〔次言如實修行等者, 正歎行德. 依寶性論, 約正體智名如實行, 其後得智. 名爲?行. 今此中言如實修行, 擧正體智. 次言等者, 取後得者. 若依法集經說, 總括萬行始終, 通爲二句所攝. 謂如實修行, 及不放逸. 如彼經言, 如實修行者, 謂發菩薩願. 不放逸者, 謂滿足菩提願. 復次如實修行者, 謂修行布施. 不放逸者. 謂不求報. 如是特淨戒, 成就不退. 或修忍辱行, 得無生忍. 求一切善根而不疲倦. 拾一切所作事. 修禪定不住禪定. 滿足智慧 不戱論諸法. 如其次第, 如實修行及不放逸. 乃至廣說.〕

이제 기신론에서 ‘여실수행’이라고 말한 것은 곧 발보리원(發菩提願)에서 만족지혜(滿足智慧)까지를 포함하며, 다음에 ‘등(等)’이라는 것은 불방일을 취하는 것이니 곧 만족보리원(滿足菩提願)에서 모든 법을 희론하지 않는 것까지이다. 삼보(三寶)에 귀경함을 앞에서 마치다.
〔今言如實修行者, 卽攝發菩提願, 乃至滿足智慧. 次言等者, 取不放逸, 卽是滿足菩提願, 乃至不戱論諸法也. 歸敬三報竟在前.〕


【논(論)】
중생으로 하여금 의혹을 제거하고 잘못된 집착을 버리게 하여 대승의 바른 믿음을 일으켜 불종(佛種)이 끊어지지 않게 하고자 하기 위한 까닭이다.
〔爲欲齡衆生 除疑捨邪執. 起大乘正信. 佛種不斷故.〕

【소(疏)】
다음은 이 논을 지은 대의를 서술한 것이다. 논을 지은 대의는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으니, 상반(上半)은 하화중생(下化衆生:아래로 중생을 교화함)하기 위함임을 밝혔고, 하반(下半)은 상홍불도(上弘佛道:위로 불도를 넓힘)하기 위함임을 나타냈다. 중생이 길이 생사의 바다에 빠져 열반의 언덕에 나아가지 못하는 까닭은 다만 의혹과 사집(邪執)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하화중생의 요체는 의혹을 제거하고 사집을 버리게 하는 것이다.
〔次述造論大意. 造論大意不出二種. 上半明爲下化衆生, 下半顯爲上弘佛道. 所以衆生長 生死之海不趣涅槃之岸者, 由疑惑邪執故也. 故今下化衆生之要, 令除疑惑而 邪執.〕

의혹을 널리 논하자면 많은 방법이 있다. 대승을 구하는 자의 의혹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법을 의심하는 것으로 이는 발심에 장애되며, 둘째는 교문(敎門)을 의심하는 것으로 이는 수행에 장애되는 것이다.
〔汎論疑惑, 乃有多途. 求大乘者所疑有二, 一者疑法, 障於發心, 二者疑門, 障於修行.〕

법을 의심한다고 말한 것은 다음과 같이 의심하는 것을 말함이다. 즉 대승의 법체가 하나인가 여럿인가? 만일 하나라면 다른 법이 없는 것이요, 다른 법이 없기 때문에 모든 중생이 없을 터인즉, 보살은 누구를 위하여 넓은 서원(誓願)을 말할 것인가? 만약 법이 여럿이라면 이는 일체(一切)가 아닌 것이요, 일체가 아니기 때문에 상대와 내가 각기 다를 것인데, 어떻게 동체(同體)의 대비(大悲 )를 일으키게 되겠는가? 이러한 의혹 때문에 발심하지 못하는 것이다.
〔言疑法者, 謂作此疑, 大乘法體謂一爲多. 如是其一, 則無異法. 無異法故, 無諸衆生. 菩薩爲誰發弘誓願. 若是多法, 則非一體. 非一體故, 物我名別. 如何得起同體大悲. 由是疑惑, 不能發心.〕

교문(敎門)을 의심한다고 말한 것은 다음과 같다. 여래가 세운 교문이 많으니, 어느 문에 의하여 처음 수행을 시작할 것인가? 만일 다 함께 그 많은 문들을 의거해야 한다면 한꺼번에 그 문에 들어 갈 수 없을 것이며, 만일 한 두 문에 의거해야 한다면, 어느 것을 버리고 어느 것에 나아가야 하는가? 이러한 의심 때문에 수행을 일으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기신론에서는 이러한 두 가지 의심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심법(一心法)을 세워서 두 가지 문을 열었다.
〔言疑門者, 如來所立敎門衆多, 爲依何門初發修行, 若共可依, 不可頓入. 若依一二, 何遣何就. 由是疑故, 不能起修行. 故今爲遣此二種疑, 立一心法. 開二種門.〕

일심법을 세운 것은 저 처음의 의심(즉 법을 의심하는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는 대승법엔 오직 일심만이 있으니 일심 밖에는 다시 다른 법이 없으니, 다만 무명(無明)이 자기의 일심을 미혹하여 모든 물결을 일으켜서 육도(六道)에 유전(流轉)하게 됨을 밝히는 것이다. 비록 육도의 물결을 일으키지만 일심의 바다를 벗어나지 아니하니, 진실로 일심이 움직여 육도를 일으키기 때문에 널리 구제하는 서원을 발하게 되는 것이요, 육도가 일심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동체대비(同體大悲)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의심을 제거해야만 큰 마음을 발하게 된다.
〔立一心法者, 遣彼初疑. 明大乘法唯有一心, 一心之更無別法. 但有無明迷自一心, 起諸波浪流轉六道. 雖起六道之浪, 不出一心之海. 良由一心動作六道. 故得發弘濟之願. 六道不出一心, 故能起同體大悲. 如是遣疑, 得發大心也.〕

두 가지 문(二種門)을 연 것은 두 번째 의심(즉 문을 의심하는 것)울 제거하는 것이다. 이는 여러 교문(敎門)이 많이 있지만 처음 수행에 들어감에는 두 문을 벗어나지 아니하니, 진여문(眞如門)에 의하여 지행(止行)을 생멸문(生滅門)에 의하여 관행(觀行)을 일으킴을 밝힌 것이다. 지행과 관행을 쌍으로 부림에 만행(萬行)이 이에 갖추어져 있으므로, 두 문에 들어가면 모든 문이 다 통하는 것이니, 이렇게 의심을 제거해야만 수행을 잘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開二種門者, 遣第二疑, 明諸敎門雖有衆多, 初入修行不出二門, 依眞如門修止行, 依生滅門而起觀行, 止觀雙運 萬行斯備. 入此二門, 諸門皆達. 如是遣疑, 能起修行也.〕

사집(邪執)을 버린다는 것은, 여기에 두 가지 사집이 있으니 인집(人執)과 법집(法執)을 말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뜻을 버리는 것은 아래 글에서 말할 것이다. 하화중생(下化衆生)은 앞에서 마치다.
〔捨邪執者, 有二邪執. 所謂人執及與法執. 捨此二種. 下文當說. 下化衆生竟在於前也.〕

이 아래 두 구절은 위로 佛道를 넓혀서 저 이변(二邊)의 의심을 제거하여 결정적인 믿음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니, 대승이 오직 일심뿐이라는 것을 믿고 이해하게 하기 때문에 대승의 바른 믿음을 일으킨다고 말하며, 앞의 두 가지 집착으로 인한 분별을 버리어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얻고 여래가(如來家)에 나서 부처의 지위를 잇게 되기 때문에, 불종(佛種)이 끊어지지 않는 까닭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는 논에서 말하기를, “불법의 큰 바다를 믿음으로써 들어갈 수 있으며, 지혜로써 건널 수 있다.” 라고 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믿음과 지혜를 들어 불도를 넓힐 것을 밝혔다. 게송의 첫머리에서 ‘위(爲)’라고 말하고 맨 아래에서 ‘고(故)’라고 끝맺은 것은 이러한 두 가지 뜻(下化衆生과 上弘佛道)을 밝힌 것이 되며, 그러므로 이 기신론을 지은 것이다. 귀경(歸敬)과 술의(述意)를 마치다.
〔此下二句. 上弘佛道. 除彼二邊之疑, 得起決定之信. 信解大乘唯是一心, 故言起大乘正信也. 捨前二執分別, 而得無分別智. 生如來家, 能紹佛位. 故言佛種不斷故也. 如論說云, 佛法大海信爲能人, 智慧能度. 故擧信智, 明弘佛道. 偈首言爲, 下結云故者, 爲明二意故, 造此論也. 歸敬述意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