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書狀)

서장대강좌40/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8. 3. 26. 15:14
 

 

 

서장 대 강좌 10 - 2 강

 

  우리가 부처님께 귀의를 해서 불교를 믿고, 불교공부를 하면서 불교공부를 제대로 해서 부처님 재산을 제대로 나의 재산으로 만들어서 그 재산을 가지고,

다시 말해서 불법의 이치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됩니다.

그런 길이 불자의 길입니다.

근래에 자선사업도 불자들이 많이 하고, 스님들도 많이 하고, 복지회관 이라든지 병원이라든지 노인 요양소라든지 복지시설을 많이 해서 불우한 사람들을 돕는 일이라든지, 참 좋은 일을 많이 하는데, 그것은 부처님제자가 그 일까지 아니해도 됩니다.

  부처님제자는 그 보다 더 바쁜 일. 급한 일. 더 고귀한 더 가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부처님제자에게 한 번도 그런 일 하라고 권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가르친 진리의 가르침을 제대로 공부해서 진리를 세상에 전하라고 했지, 그 외에 다를 것을 세상에 보탬이 되도록 하라고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을 아셔야 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그것은 쉬우니까 그런 쉬운 일을 하나봅니다.

불교는 어렵고요.

복지문제라든지 배고픈 사람들에게 의식주 제공하는 일은 쉬우니까 그 일을 하는 것 같은데,

불교를 아는 것도 어려운 것 같고, 알고 전하는 것도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닌가 봅니다.

  그래서 여기서 깨달은 허 보살님. 국태부인에게 최후로 당부하는 말씀을 우리는 유의해야 됩니다.

 

자기 깨달은 것에 도취해서 그냥 지내면 안 된다.

꼭 자비와 지혜를 일으켜 가지고서 유정들을 불쌍히 여겨야 된다.

유정들을 불쌍히 여기라는 말은 중생제도를 해야 되고, 교화를 해야 된다.

부처님 법으로서 교화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그 아들 장승상 덕원에게 답한다고 그랬어요.

이 분도 역시 깨달으신 분입니다.

승상에게 답하는 편지라서 그런가?

처음부터 대혜스님도  자세가 좀 다른 것을 느끼게 됩니다.

 

 p. 187

  26. 장승상 덕원에게 답함

공경하여 생각하니 편안하게 고요한 곳에서 생활하여 저 국태부인과 더불어 한 곳에 함께 모여서 비로자나불의 세계를 즐겨서,

마땅함을 따라 불사를 하되 병도 없고 고뇌도 없어서 당신의 생활이 萬福(만복)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머니도 깨달았고 형님은 깨달음에 거의 가까워 있는 사람이라고 또 이 승상은 승상벼슬을 하는 사람으로서 깨달음을 이뤘으니까 그 집안은 세속적으로나 불교적으로나 참 부러운 집안이네요.

  위로부터 모든 성인께서 다 그렇지 않은 분이 없으셨습니다.

깨달은 사람들은 깨달은 사람들끼리 정말 제대로 복을 누린다는 것이지요.

이른바 모든 생각 가운데 일체법이 滅盡(멸진)한 삼매에 들어서

이것은 일체 중생으로서의 어떤 사량 분별은 다 소멸된 상태에서라는 말입니다.

다음에도 그 얘기입니다.

菩薩道(보살도)에서 물러나지 않았으며,

菩薩事(보살사)를 버리지 않았으며,

대자비심을 버리지 않았으며, 

바라밀을 닦아 익히되 일찍이 쉬지 않았으며,

일체의 불국토를 관찰하되 싫어하고 게으름이 없었으며,

중생을 제도하려는 원을 버리지 않았으며,

법륜을 굴리는 일을 단절하지 않았으며,

중생을 교화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으며,

가진 바 훌륭한 소원에 이르기까지 다 원만함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말이 달라서 그렇지 아주 여러 번 반복해서 같은 이야기입니다.

   보살도가 무엇이며

   보살사는 무엇이며

   대비심은 무엇입니까?

누구에게 해당 됩니까?

   일체의 불국토를 관찰한다고 하는 일.

   중생을 제도한다는 일.

법륜을 굴린다는 일.

중생을 교화한다는 일.

이것이 전부 중생교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교화로서 회향하라.

재상쯤 돼서 도를 통하면 그 자리에서 중생교화 하기 참 좋을 겁니다.

권력 있지, 돈 있지, 그 다음에 중생 교화할 원력만 있으면 아주 마음껏 할 수

겁니다.

  요즘하고는 다르잖아요.

요즘 국무총리가 그런 것 한다고 하면 당장에 비판 받지만,

옛날에 재상이 한다면 감히 누가 뭐라고 합니까?

 

임제스님도 보면 거기 부주. 도지사쯤 되는 사람이 관원들에게

“공무들 하지 말라. 오늘은 휴업이다.”하고 임제스님을 초청해서 전부 법당에 불러놓고 일체 관료들,

오늘 공무집행 아니해도 된다고 하고 전부 불러서

“임제스님의 법문을 들어라.”

임제스님의 법문을 듣는 것이 공무집행 하는 것 보다 더 급한 일이다 이겁니다. 이렇게 해서 수 천 명을 모아놓고 법문을 듣게했습니다.

도지사쯤만 되어도 그렇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옛날부터 그런 말이 있습니다.

“그 자리를 얻으면 그 일을 할 수 있다.” 자리가 그렇게 중요한가 봐요.

“그 자리를 얻으면 그 일을 할 수 있다.” 참 함축성 있는 말이지요.

그래서 자리 차지하려고 그렇게 혈안이 되어있나 봐요.

그것을 이렇게 중생을 깨우치고 교화하는 데에 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것이 비록 옛날 군주국가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그것이 민주사회에서는 용납이 될 수 없는 일이라고 우리가 얼른 생각을 하지만,

이런 권력을 잘 활용을 해서, 사람들에게 더 큰 이익이 돌아가게 한다고 하면, 이것은 더 바람직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교화로 회향하라.” “중생교화로 회향하라.”

보살도. 보살사. 중생을 제도하는 일. 법륜 굴리는 일.

중생을 교화하는 일. 불교 중에서는 완전한 불교 선불교.

그리고 불교 최고의 공부를 하는 여러 불자님들은,

상당히 불교에 대한 안목과 소견이 갖춰졌을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할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러 가지 길이 있는데,

거기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길을 찾아서 부처님 법을 펴는 일.

배고픈 사람에게 밥 주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부처님 법을 한 그릇 준다고 생각해 볼 때,

밥 한 그릇 하고 어찌 비유가 되겠습니까?

그 생각을 좀 해보세요.

그러면 뭐가 복이 되지요?

  철 한 근 주는 것 하고, 다이아몬드 한 근 주는 것 하고, 도대체 비교나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우리 불자들은요. 최소한도 그 정도 불법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셔야 됩니다.

불교공부는 그런 겁니다.

그 만치 가치가 있는 겁니다.

거기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졌을 때 시시하게 살지도 않고,

남 보기엔 모르지요.

겉으로 보기엔 몰라도 정신적으로 차원이 다른 삶을 결국은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체 국토의 차별을 통달해서 알며, 부처 종자의 성품에 들어가 피안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대장부가 네 가지 위의 가운데 수용한 가풍일 뿐입니다.

네 가지 위의는 행 주 좌 와. 가나오나 앉으나 서나 누우나 할 것 없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대거사께서 大자를 하나 더 붙여 줬네요.

大居士(대거사)께서 여기에 힘써 실천하고 게으름이 없으므로 저도 여기에 또한 동참합니다.

또 알지 못하겠습니다.

도리어 외부인이 간섭하는 것을 허락합니까?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니 중생제도 하는데,

“나도 동참합니다. 우리 다 같이 합시다.

내가 거기에 거사와 더불어 중생교화 한다고 하는데 당신이 간섭할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 뜻이지요.

외부인이 간섭하는 것을 허락합니까? 그러니까 대혜스님의 법력이 아무리 높다한들 일개 재상이 재상의 자리를 빌어서 중생교화를 한다고 하면,

그것이 비교가 안 되지요.

그런 뜻입니다.

 

  傳法偈(전법게)에

假使頂戴經塵劫(가사정대경진겁) 身爲床座遍三千(신위상좌변삼천).

若不傳法度衆生(약불전법도중생) 畢竟無能報恩者(필경무능보은자).

이런 말이 있지요.

가령 부처님을 위한답시고 부처님을 머리에 이고 수 억만 년의 세월을 지내고, 또 부처님을 위한답시고 부처님을 모시는데,

내가 큰 넓고 넓은 평상이 되어서 내 몸의 평상위에서 부처님이 앉고 눕고 자고 걸어 다니고,

할 수 있도록 내 몸을 그렇게 까지 희생을 하고 봉사 한다 하더라도,

若不傳法度衆生. 만약에 부처님의 법을 배워서 부처님의 법을 전해서 사람들을 교화하지 못하면 결코 불교를 안다고 할 수가 없고,

부처님께 공덕을 짓는다고 할 수도 없고,

또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다고도 할 수가 없다고 그랬습니다.

얼마나 명확한 말입니까?

  우리 몸을 희생해서 부처님이 앉고 눕고 걸어 다니고 하는 평상이 되고 길이 되고 우마가 되고,

설사 이 몸을 가지고 그렇게 희생 하고 봉사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불공이 아니다 이 겁니다.

그것이 부처님한테 복 짓는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법을 배워서 그 법을 사람들에게 전할 줄 알아야 그것이 부처님이 알아주는 일이고,

부처님이 고마워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도 사실은 우리가 받아들이기에 따라서 그야말로 이 순간에 우리는 다이아몬드의 큰 광맥을 발견한 겁니다.

어디 가서 봉사하고 남을 위해서 배려하는 일을 얼마나 많이 합니까?

  하지만 그것은 한 근의 철을 가지고 보시하는 것이라면,

부처님의 가르침. 진리의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일깨워 준다면,

이것은 다이아몬드를 그 사람에게 한 근을 주는 것 하고 맛 먹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와 같은 가르침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 가치를 우리가 얼마만치 가슴에 와 닿게 이해하고 새기고,

내 살림살이가 되느냐 하는 것이 물론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지만,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얼마든지 가능한 입니다.

 

  들으니 장사에 이르러 곧 비야에서 입을 막고 깊이 둘 아닌 데에 들어갔다고 하니, 이것은 장사라는 지명이지요.

장사라는 곳에 들어가서 비야에서 입을 막고 깊이 둘 아닌 데에 들어갔다. 이것은 거사분의 대표로서 유마거사는 유마경에서 잘 나타났는데,

그 분이 바이샬리 라고 비야리 성에서 사셨고,

거기가 유마경의 무대가 되었는데 그 유마경의 내용은 말하자면 不二法門을 나타내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둘이 아닌 이치를 이야기를 하다가,

마지막에 문수보살이 둘이 아닌 이치를 아주 현묘한 논리로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최후로 유마거사보고,

둘이 아닌 도리를 한 번 표현하십시오.”라고 하니까

입을 막고 하는 말이 아무 말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둘이 아니라면 하나인데 이것은 숫자로서의 하나가 아니고,

통일된 하나.

전체로서의 하나. 그런 입니다.

전체다 이겁니다. 그렇다면 굳이 나누어서 이야기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너와 내가 둘이 아니다.”라고 하는 말도 벌써 때가 묻은 것이고,

흔적이 남는 것이고, 군더더기가 되어버리지요.

“너와 내가 둘이 아니다.”라고 하는 이 말도요.

그러니까 유마거사는 그 이치를 알기 때문에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비야리성에서 입을 막고 깊이 둘 아닌 데에 들어갔다.

그러니까 이 분. 장승상도 그렇게 묵묵히 지내시나 봅니다.

그 소식을 들었으니 이 역시 분수 밖이 아닙니다.

물론 분수 밖의 일은 아니다. 아무 말 없이 지낸다는 것.

그것도 이해는 해줄 수 있다 이말입니다.

 

법이 이와 같은 연고로 원컨대 거사는 이와 같이 수용한다면,

모든 마군과 외도가 정히 와서 법을 지키는 선신이 될 것입니다.

그 나머지 갖가지 차별되는 다른 뜻도 다 스스로 마음에 나타난 경계이고, 또한 다른 물건이 아닙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 거사는 어떻습니까?

앞의 내용을 보면 보살도. 보살사. 중생제도. 법륜 굴림.중생교화.

이런 말을 잔뜩 늘어놓고, 나중에 “아, 이것은 어떻습니까?”

이 거사하고 길이 다른 이야기지요.

길이 다른 이야기를 앞에 잔뜩 많이 해놓고, 마지막에는 거사가 입을 막고 조용히 지낸다고 하니까 그것을 그냥 인정해 주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되어 있습니다.

  대혜스님이 이 장승상에게 경책 내지 꾸중을 충분히 이해하시겠지요.

이것은 꾸중입니다. 보통 꾸중이 아닙니다.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도

당신이 깨달았다고 하는 그 깨달음에 도취해 살지 마십시오.

그것은 일종의 집착입니다.

깨달았으면 중생교화 해야지요.

이렇게 표현했고 또 이 장승상이라는 사람에게도 앞에 그렇게 여러 낱말을 중복 써 가면서 중생교화.

불교는 사람들을 교화하는 데에뜻이 있는 것이지, 교화가 없는 것이라면, 당신혼자 잘 먹고 잘 살려고 도통 했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없는 것이라는 뜻이거든요.

 

앞에서 그래 놓고는 사실 이 거사는 입을 막고 조용히 사니까 그 태도가 옳지 않다는 것을 은연중에,

어떻게 보면 지극히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편지로 읽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아셔야 됩니다.

이것이 맞장구치는 식의 표현을 했습니다만 사실은 아닙니다.

앞의 글을 보면, 전반부의 글을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어쨌건 이와 같이 해서 장승상 덕원에게 답하는 내용은 이렇게 됐습니다.

 

  p. 190

   27. 장제형 양숙에게 답함

  이분은 형입니다.

형인데 제형이라고 하는 벼슬은 재상보다는 훨씬 낮은 벼슬이고,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분도 가당치 않은 분입니다.

비록 어머니하고 동생처럼 그렇게 확연히 깨닫지는 못했지만,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은 아주 대단한 경지에 이른 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노거사의 행동하는 바가 그윽하게 도에 합치되지만,

다만 한번 “와!” 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뿐입니다.

일상생활은 그야말로 도에 합치된다. 그랬습니다.

제가 서장 강의 서두에 禪의 일곱 가지 정신을 거론한 적이 있습니다.

깨달아서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고,

그야말로 우리의 일상생활이 선의 정신에 부합하느냐 안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그랬습니다.

저는 늘 선을 얘기할 때 그 얘기를 합니다.

   簡素(간소). 簡潔(간결), 소박한 삶. 선이 좋다면, 선을 좋아하는 특히 선불교는 불교의 완성이라고 했으니까 불교의 궁극은 결국은 그 삶이 어떠하냐?

일곱 가지로 표현될 수 있다. 간결 소박한 모습.

  脫俗(탈속)한 모습.

俗氣(속기)가 덕지덕지 묻어 있어서 속된 모습.

그것은 불교도 아니고 선불교는 더욱 아니다 이겁니다.

탈속해야 됩니다.

그리고 지극히 自然(자연)스러워야 됩니다.

저절로 그러해야지, 조작 되어 있으면 이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선불교는 더욱 아닙니다.

자연을 제가 강조를 했지요.

그리고 悠然(유연)야 됩니다.

깊이가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孤高(고고)함이있어야 됩니다.

그 다음에 어수선하고 부산함이 있어선 아니 됩니다.

  靜寂(정적). 정적한 모습. 할 일 다 하면서도 어딘가 고요한, 흔들림이 없는, 動搖(동요) 없는, 요지부동의 그런 자세.

이것이 선을 하는 선불교를 하는 사람의 정신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變化(변화). 자기 삶이 절대적이라고 옹고집이 되어서 도대체 융통성이 없는 그런 인간은 그것은 불교를 하는 인간이 아닙니다.

선불교를 하는 인간은 더욱 아니지요.

변화무쌍해야 됩니다.

그야말로 한 순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런 상황에 그 상황보다도 아주 더 빨리 대처할 수 있는 그런 능력.

그런 정신이 선불교를 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그것이 삶이지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일상생활이 도에 계합한다는 것이 禪의 일곱 가지 정신이 충분히 잘 갖춰진 삶을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와!” 라고 하는 것은 뭐냐?

깨달음을 표현하는 것이지요. “와!”

일상생활은 행동하는 바가 그윽하게 도와 합치되지만, 다만 한번 “와!” 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 그랬어요.

“와!” 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그런 간소 · 탈속 · 자연 · 유연 · 고고 · 정적 · 변화.

이런 일곱 가지 정신을 충분히 나의 삶으로 엮어가더라도,

지고한 인간의 가치를 알아야 됩니다.

앞서 서두에 말씀드린 지고한 인간의 가치를 알면 우리의 삶이란 축제의 연속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처지가 어떻든 병이 들었든 늙었든 아니면 젊었든,

어떤 상황에서든지 그 상황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고,

어떤 조건도 필요치 않는 그런 입장에서 정말 인간의 지고한 가치를 제대로 알면 우리의 삶은,

지금 현재 어떤 처지에 있던지 간에 우리의 삶은,

매일 매일 어마어마한 축제의 연속이다 하는 것.

이러한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보통 행복이라는 낱말로는 표현이 안 되는 겁니다.

매일 매일 수백억짜리 로또 복권이 터지는데 그것을 어떻게 감당 하겠습니까? 감당 못 할 정도의 축제. 축제의 분위기.

우리의 삶은 축제의 연속이다 이겁니다.

이 가치를 정말 확신하는 것이지요.

눈으로 바로 보는 것이고요.

순간순간 느끼게 되는 “와!”하는 그 도리입니다.

“와!”하는 그 도리가 뭐겠습니까?

그 사실을 깨닫는 것. 인간의 그같이 지고한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임제스님 같은 이는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있는 것이 아니다.”

一步一拜(일보일배) 하면서 수년을 거쳐서 오대산에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가고 있는 아주 유명한 무착문희 선사를 보고 꾸짖는 소리입니다.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있는 것이 아니고,

친견하러 가는 당신이야말로 내가 보니까 진짜 살아있는 문수구나.”

오대산에 문수는 일보일배 할 줄 몰라요.

피곤하면 잠 잘 줄 몰라요.

석굴암 부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화 낼 줄도 몰라요.

속에는 화나도 참는 그런 것이 아니고, 무엇같이 다 잊어버리고 화내고,

통곡할 일이 있으면 통곡하고, 웃을 일이 있으면 그냥 허벌나게 웃고,

그것이 살아있는 부처지요.

그보다 더 존귀한 존재가 또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 어디 어떤 부처가 그럴 줄 압니까?

여러분들 말고 어디에도 그런 부처는 없습니다.

그렇게 바로 보입니다.

이런 사실을 스스로 확연히 깨달아 아는 것.

이것이 “와!”하는 그 소리입니다.

 

  금강경만 하더라도 一切法(일체법)이 皆是佛法(개시불법)이라는 말을 하지요.

일체법이 뭡니까?

우리에게 있어서 일체법이란 것이 뭡니까?

탐욕부리고 좋은 것 있으면 탐심 나고, 화 날 일이 있으면 화내고, 이치를 몰라서 그냥 캄캄하고 어리석고 어리석은 행동 막하고 하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는 일체법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일체법은 그것이라고요.

우리가 뭘 하든지 간에 우리의 상황이 어떻든 간에 처해진 상황에 따라서 내 나름대로 살아가는 겁니다.

이것이 나에게는 일체법입니다.

그것 말고 다시 일체법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과정에서, 울고 웃고 온갖 희로애락이 뒤범벅이 되어 있는 그런 하루하루의 삶.

이것이 일체법입니다.

一切法(일체법)이 뭐라고요? 皆是佛法(개시불법)이라고 했잖아요.

平常心(평상심)이 是道(시도)다.

이런 말 많이 들었지요?

여러분, 평상심이 뭡니까?

좋은 것 보면 탐심 나지요?

이것이 우리 평상심입니다.

마음에 안 들면 화나지요?

이것이 평상심이라고요.

탐 진 치 삼독 말고 우리 평상심이 있으면 뭐가 있는가 또 내놔 보세요.

자기 허물 덮으려고 하고, 쥐꼬리만 한 잘한 것 있으면 그냥 자랑하려고 하고, 이것이 우리 살림살이고 우리의 평상심입니다.

그것 말고 무슨 평상심이 있냐고요.

평상심이 도다. 하니까 이것을 어떻게 해석을 못해서 “텅 빈 마음이다.”

텅 빈 마음이 어디 있습니까?

텅 빈 마음은 없는 겁니다.

그것은 도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탐 진 치 삼독과 8만4천 온갖 번뇌.

희로애락이 그대로 우리 평상심이 아닙니까? 그 마음이 도입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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