話頭·參禪

선 사상의 진수 - 서암스님

通達無我法者 2008. 3. 31. 11:08
 

 

 

 

선 사상의 진수 - 서암스님 

 

우리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천 가지 만 가지로 생각을 굴리고 그 끊임없는 상념을 쫓아 살아가기 바쁩니다.

그런데 그러한 상념을 모두 털어 버린 곳에 본래 빛나는 주인공이 항상 있음을 알아야 참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주인공을 찾는 것이 참선법입니다.

참선은 입 벌리기 전 설명하기 전에 본래 이루어진 것입니다.

49년동안 설법을 하셨으면서도 한 마디도 말한 바 없다고 하신 부처님의 말씀도 근본 자리는 언어와 상념으로 통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 중생들의 마음은 항시 생각이 흘러 잠시도 멈추지 않습니다.

항상 찰나찰나 흐르고 있는 마음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념 동안에 9백 생멸한다는 걸로 그 미세한 흐름을 설명합니다만 사실 이런 말로는 제대로 설명 될 수 없을 정도로 더 복잡하게 흐르고 있는 것이 중생의 마음이지요.

이렇게 강가에 물 흐르듯이 정처없이 자꾸 흘러가는 그 마음이 모든 희로애락 길흉화복을 낳는 것이요, 이 일체 상념 속에서 헤매는 것을 몇 갈래로 구분하여 삼계육도 중생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그런 생각을 완전히 쉬어 버리면 그 자리에 공공적적하고 불생불멸한 본래 마음자리가 빛나고 있거든요.

부처님께서 금강경에 말씀하셨듯이 과거심도 얻을 수 없고 현재심도 얻을 수 없고 미래심도 얻을 수 없는데, 우리 사바세계는 그 근거없는 생각을 통해서 무한히 죄를 짓고 과보를 받고 상념을 일으키고 희로애락을 느끼고 있어요. 그것은 마치 우리가 꿈을 꾸는데 좋은 꿈, 괴로운 꿈 등 온갖 꿈을 밤새도록 꾸면서 하룻밤에 몇 해의 이야기를 꾸기도 하고, 단 몇 시간의 단잠에 몇 생을 거듭 사는 삶의 꿈을 꾸기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모두 깨고 보면 한바탕 분명한 꿈인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러나 사실 우리가 꿈에서 깨고 보니까 나쁘고 좋은 온갖 경계가 다 한바탕 꿈인 줄 알았지, 꿈을 깨기 전까지는 그 경계에 사로 잡혀서 꿈의 구속을 받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좋은 경계에는 웃고 언짢은 경계에는 괴로워 하고 헤매고 당황해 합니다.

이렇게 꿈이라는 게 하무한 것이지만 그 꿈을 꾸었던 주인공은 허무한 것이 아니라 분명 있어요.

그러니까 짧은 꿈, 긴 꿈, 좋은 꿈, 언짢은 그 꿈들의 주인공이 '나'라는 것은 영원히 처리할 수는 없는 것이니 이것이 정말 문제지요.

우리가 백년을 살면 그 백 년 인생이 다 꿈입니다.

또 백 년이란 꿈을 꾸며 살아도 그 역시 흘러가는 경계 인지라 돌아보면 다 지나간 것입니다. 이렇게 평생을 살아오는 동안에 겪은 좋은 일이나 언짢은 일이나 슬픈 일이나 기쁜 일들이 모두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한바탕 꿈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꿈이면서 그 꿈을 감지하는 그 놈은 변함없이 불생불멸이요,

항상 현존목전(現存目前)에 있는 그 한자리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불교는 바로 꿈 깨는 가르침입니다.

본시 여여부동(如如不動)한, 시간과 공간에 상관없이 항존하는 자기 인생을 꿰뚫어 보라는 것이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입니다.

절대자를 찾고 창조주니 조물주니 해서 인간 밖의 위대한 힘을 찾고 거기에 구원을 청하는 것과 같은 이치에 맞지 않는 신앙의 종교는 불교가 아닙니다.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에서 장야(長夜)의 꿈을 깼습니다.

그렇게 꿈을 깨는 도리를 기록한 것이 8만 4천 법문이요, 꿈을 깨는 방법이 계, 정, 혜(戒定慧) 삼학인 것이지요.

우리가 상념이 일어나는 대로 오욕락을 따라가다 보면 술 취한 사람처럼 그 경계에 취해 자기의 본색이나 이성을 잃어버리고 온갖 경계 사로잡히고 맙니다. 이런 우리 생활을 절제하여 안정시키는 것이 계행입니다.

또 그렇게 절제하여 살다 보면 안정이 생기고 빛나는 지혜가 나타납니다.

그것을 비유해 보면, 파도가 일 때 그곳에 비친 일체 그림자가 찢어지고, 그 파도가 가라앉으면 모든 만물의 형상이 명경지수(明鏡止水)에 분명히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파도를 가라앉게 하는 방법이 계행이요, 그런 계행을 지킴으로 해서 안정을 얻고, 그래서 영원한 자기의 본래 빛을 보게 된다는 말이지요.

모든 이론과 상념을 초월한 곳에 있는 참선법은 바로 그 자기 본래의 빛을 밝히는 것이지요.

우리가 평소에는 지나간 일을 생각하든 또는 앞으로 올 미래를 꿈꾸든지 결국 눈 앞에 보이는 경계에 팔려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흘러가는 생각이 생각을 하지 않을 때 자기 생각이 어디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참선입니다.

잠을 자면 꿈 속에 돌아다니는 자기가 보이고 자기의 위치가 거기 있습니다.

또 현재도 눈 앞에 보고 듣고 있으니 자기 위치가 거기 있어요.

그런데 꿈도 안 꾸며 깊이 잠이 들었을 때는 과연 자기가 어디 있느냐고 하면 여러분들은 꽉 막힐 것입니다.

그 막힌다는 것은 우리가 모태에 들었을 때나 모태 안에 들기 이전의 자기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꽉 막히면서도 빛나는 자기가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참선은 배우고 듣고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스스로 은산철벽(銀山鐵壁)이 되어서 어떠한 문제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요, 그렇게 할 수 있어야 깨달아지고 열려지는 것입니다.

참선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고 쉽습니다.

바닷가에 가서 모래알을 세듯이 복잡스런 경구라든지 학설들을 종합해서 일생 동안 헤매고 따지는 것이 참선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따지고 헤맨다면 그것은 중생놀음입니다.

철학이니 과학이니 하는 모든 것은 무엇을 종합분석하며 풀이 하는 학설로써 다람쥐 쳇바퀴 돌듯 상념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앉으나 서나 항상 스스로 앉고 스스로 일어나는 자기의 부처를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그 물건을 바로 응시해서 관찰한다면 어떻게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참선하기보다 쉬운 게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눈 앞에 있는 게 어디 가겠습니까?

잠시도 여의지 않습니다.

부르면 대답하고 꼬집으면 아픈 줄 아는 그 소소영영한 자리 찾기가 뭐 어렵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생에 익힌 습관에 얽매여 헤어나지 못하니까 화두법을 받아들여 수행하는데, 그렇게 방편 지어진 것이 간화선입니다.

중요한 것은 꿈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이슬 같고, 번개 같은 그 실다움 없는 속에 진실한 물건, 여기에 우리가 착안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불교는 맹신하는 종교가 아니며, 또 누구를 따라 가고 연구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누가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꼬집어 뜯으면 아픈 줄 아는 이 주인공을, 눈을 똑바로 정시해서 찾아내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옛날 스님들께서 참선은 '입만 벌리면 어긋난다'고 하여, 몽둥이로 그저 후려친다든지 할을 한다든지 한 것 모두가 그 주인공을 바로 깨치도록 이끄시는 방법이었지요.

참선은 어렵다면 한 없이 어렵고, 쉽다면 그 보다 쉬운 게 없습니다.

'삼 서근이다', '뜰 앞의 잣나무다', 혹은 '똥막대기다' 하는 1700공안의 뜻이 단도직입적으로 부처의 세계를 일러 준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 계제도 없고 차별도 없고 계급도 없습니다.

다만 한마디 일러주면 누구나 통하는 것이니 이보다 간단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간단한 것을 모르고 항상 바깥으로 헤매는 것이 우리 중생이지요.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자기의 눈은 안 보입니다.

그렇다고 눈은 안 보이니까 눈이 없다고 하다면 그 사람은 분명 어리석은 사람이죠.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지고 있는 그 자리가 부처인데 그것을 두고 바깥으로 헤매면서 신앙하고 찾으려 하니 찾을수록 점점 멀어집니다.

그 본래 마음자리 찾는 화두법이란, '이것이 도대체 무엇 이길래 앉고 서고, 가고 오고, 밥도 먹고 옷도 입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고, 괴로워하기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하면서 온갖 분멸을 다 하는 그 핵심된 주인공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고 의심하는 것입니다.

남녀노소 존비귀천에 차별이 없어 누구나 평등한 자리, 그 의심 자리를 한 번 응시해서 찾아낸다는 것이 아주 쉬운 일인데,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을 모르고 바깥으 로 찾아 헤매면서 허송세월 하는 것은 아타까운 일입니다.

참선을 하면 모든 경계에 흔들림이 없는 자기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사람 사는 것이 복잡하기가 말할 수 없이 착잡하고 어지 럽지만, 그 한 주인공은 절대 어지럽지 않고 항상 한가합니다.

그렇게 일체 경계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를 발견해서 사는 게 해탈의 세계입니다.

그 자기를 잃어버리면 모든 경계에 얽매여 항상 공포나 초조와 불안 속에 헤매게 되니 그것이 그대로 지옥이지요.

참된 자기 모습을 발견하고 보면 어떠한 것에도 피해를 입지 않는 존재인데, 미혹한 중생은 스스로 고통을 일으 키고 그 고통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의 마음은 빛깔도 없고 냄새도 없고 모양도 없이 일 체가 끊어진 자리이니까, 누가 해칠 수도 없고 파괴할 수도 없습니다.

취할 수도 버릴 수도 없는 것이 허공과 같지요.

허공은 끝도 모양도 한계도 없고, 아무리 칼로 베어도 상처를 입지 않으며, 아무리 불로 태우려 해도 불에 끄슬려지지 않고, 한계가 없어서 그릇에 담을 수도 없거든요.

그런 본래 마음을 크게 쓰면 무한히 크게 써집니다.

예를 들어서 나와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철천지원수 라고 할지라도 한 생각 넓게 쓰면 용서하고 포용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 한 생각 옹졸하게 쓰면 아무리 친한 사이에도 조금 귀에 거슬리는 소리에 서로 칼부림이 일어나고 원수를 맺고, 내외간에도 이혼을 하는 등 모든 체계가 다 무너져 버립니다.

 

본 마음자리는 옹졸한 게 없는 것인데 스스로가 옹졸하게 써서 그런 것이니, 넓은 마음을 구애없이 쓰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항상 좁은 소견을 쓰기 때문에 백년인생을 여러 가지 불안에 떨며 살아가지만, 한 순간 이러한 한계 없는 본래 자기 마음을 찾아 쓰게 되면, 이 세상을 전부 포용 할 수도 있다는 것이 불교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서 누구의 지배도 없이 자기가 창조주이고 조물주이며,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는 위대한 자기 인생을 발견해서 살라는 게 불교요, 참선의 목적입니다.

우리 마음이 항상 갈팡질팡 기멸(起滅)하는 파도가 이는 것은 마치 물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파도가 일어나는 것과 같이,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선이란 바로 희로애락의 파도가 치지 않고 고요하고 평정하게 안정된 마음, 그러니까 마음의 기멸없는 터를 닦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명에 가려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착각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본래 청정한 우리 마음에 중생세계인 지옥, 아귀, 수라 등 육도만행이 벌어진 것이지, 본시 기멸없는 마음자리는 때 묻지 않는 청정한 자리입니다.

그 마음자리란 분명히 있어서, 언제 어디서든 누구나 열심히 참구한다면 만법을 포용하는 자기의 생명을 회복할 수 있으니, 불자는 늘 이 참선수행을 힘써 생활화 해야겠습니다. 

 

서암큰스님 - 소리 없는 소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