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아비담마

아비담마 왕초보 입문 / 2

通達無我法者 2008. 4. 2. 11:09
 

 

 

Δ 12. 아비담마는 초기불교인가? (2)


여기서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어떤 수행기법이 부처님이 직접 가르치신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청정도론에서는 부처님께서는 출입식념(아나빠나사띠)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으셨다고 격찬을 하고 있고 이 출입식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존 당시에도 수많은 스님들이 출입식념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도와 과를 얻었습니다. 이렇게 수행 방법과 명상주제는 벌써 그 사람의 기틀에 따라서 부처님 당시부터도 다양하게 가르쳐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북방의 간화선이나 묵조선 나아가서는 염불선까지 아니 염불이나 기도나 주력까지도 그리고 남방의 위빠사나와 사마타 기법은 물론이고 이 모든 수행법들이 불교의 가르침 체계에 튼튼히 뿌리한 수행법이라면 자기에 맞는 방법을 택해서 열심히 정진하면 된다고 봅니다. 거기서 오는 문제점은 여러 경들이나 논서들을 보면서 점검하고 널리 다른 수행하는 분들과 함께 진지하게 탁마하면 된다고 봅니다.


청정도론에서도 벌써 40가지로 명상주제를 정리해서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 절에서 일상으로 행하는 염불, 기도, 간경, 축원 보시 등의 모든 실천이나 수행이나 의식이 이 40가지 안에 다 포함된다고 저는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남방의 의식이 있는 스님들은 결코 아비담마를 부처님 직설이라고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아비담마야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장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집대성한 가르침이라고 자랑합니다. 그리고 그런 아비담마를 몇 천년 전승해온 자기 전통에 대해서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불교역사에서 남방 아비담마보다 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수행을 염두에 두고 체계적으로 정리하려 노력한 곳은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간화선이야말로 불교의 최상승 수행이라고 주장하려면 튼튼한 이론적인 뒷받침이 되어야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우리나라에 지금까지 전승되어오는 간화선이야말로 부처님 수행법의 골수 중의 골수라고 무한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 감사합니다, 스님. 제가 너무 외람되이 주제넘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나 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가슴 한편이 시원하기도 하고 뭔가 가닥이 잡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주제로 돌아와서 ... 그러니까 스님께서 지금 설명하고자 하시는 게 남방에서 전승되어 발전되어온 아비담마 교학체계라는 것이지요?


답: 그러합니다. 그래서 제가 아비다르마나 아비달마란 용어대신에 아비담마란 용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Δ 13. 아비담마와 위빳사나는 어떤 관계가 있나?


문: 또 주제넘게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너무 궁금한게 많거든요.

답: 좋습니다. 무엇이던 질문해보세요. 단 아비담마와 관련이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문: 스님, 남방에서 발전되고 지금까지 잘 전승되어온 이 두 체계 즉 아비담마와 위빠사나는 서로 연관이 있습니까? 아비담마는 남방의 교학체계고 위빠사나는 그런 남방 교학체계에 튼튼히 뿌리한 수행법일거라는 생각이 스님과 대화하면서 강하게 드는데요?


답: 참 잘 말씀하셨습니다. 한마디로 그렇습니다. 아비담마 없는 위빠사나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요즘 상당수의 한국 분들이 아비담마에 대해서 전혀 사유해보지도 않고 위빠사나를 체험위주의 신비주의로 접근하는 것은 위험 천만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아비담마를 배울 기회가 없어서이겠지만 그렇게 되면 위빠사나는 극단의 신비주의로 흐를 위험이 많습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법에서는 인터뷰를 중시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절대 비방이 아님) 한국에서 위빳사나를 지도하는 분들 가운데서 제대로 인터뷰를 할 수 있는 분이 몇분이나 되는지 걱정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벌써 온 몸에 기가 도는 것을 느낀다든지 몸 속이 보인다든지 힘을 몸의 특정부분으로 모을 수 있다든지 하는 경계에 빠져 그런 유희를 즐기는 것쯤으로 위빠사나를 호도하는 이야기를 자랑삼아 해대는 분들이 많거든요. 또 잘 못 경계에 집착하고 있는 것을 삐띠(희열)이라느니 행복(수카)라느니 평온(우뻬카)이라느니 초선의 경지라느니 이선 ... 사선 ... 무소유처라느니 하면서 인터뷰하는 분들이 오히려 부추기고 있기도 하지요. 경계는 대부분 위빳사나를 하지 않고 집중(선정)에 맛들이려는데서 생깁니다. 이것은 사마타의 경지에도 못들어가는 것이지요. 이런 것 쯤은 아비담마 길라잡이의 9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열가지 위빳사나의 경계 축에도 들지 못하는 참으로 가소로운 경계입니다.


남방의 제대로 공부하고 수행한 스님들은 아비담마가 위빠사나요 위빠사나가 아비담마라고 거듭 설하고 계십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 아비담마길라잡이를 제일 먼저 출판한 이유도 위빠사나 수행법에 대한 튼튼한 이론 체계인 아비담마를 평이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중요한 핵심을 거듭 강조하면서 한국에 소개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진지하게 위빳사나 수행을 하시는 몇 몇 한국 스님들과 재가 불자님들은 아비담마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결코 위빳사나 수행은 진전이 없다면서 격려해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위빠사나 수행이 없는 아비담마는 그야말로 매마른 고담준론일 뿐입니다. 수행을 통한 확인이 없다면 그것은 그냥 어려운 빠알리어나 그것을 그냥 한문으로 옮긴 무슨 뜻인지도 전혀 알 수 없는 기호들의 나열인 듯한 무미건조한 것이 될 소지가 너무 많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이 뒷받침 될 때 아비담마는 지금 여기에서 살아있는 생생한 가르침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실제로 자기자신에서 벌어지고 있는 물-심의 현상에 대입하여 관찰하지 않고서는 결코 아비담마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아비담마길라잡이를 공동번역하면서 제가 절감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양 학자들도 아비담마를 Philosophical Psychology(철학적 심리학)라고 소개하는데 이런 지적 탐구를 자신의 심리상태를 돌이켜보는데 적용시키는 가르침이라 이해하고 싶습니다.



Δ 14. 아비담마란 무슨 뜻인가?


문: 그럼 이제 하나하나 아비담마에 대해서 질문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아비담마란 문자적인 뜻부터 말씀해주십시요.


답: 아비담마의 의미에 대해서는 아래 아비담마란 무엇인가(1-4)에서 설명했으니 그것을 참조하시고요. 여기서는 거듭 다음의 측면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아비담마는 첫째 부처님 가르침(Dhamma)에 대한(abhi) 것입니다. 이 45년간 수많은 사람들에게 수많은 방편(pariyaaya)으로 세간적이고 출세간이며 높고 낮은 수많은 부처님가르침을 체계적으로 핵심만을 골라서 이해하려는 것이 아비담마입니다. 그래서 주석가들은 뛰어난법[승법]이라고 아비담마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런 체계적인 이해가 없으면 자칫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놓치고 오해하고 호도할 우려가 있으며 자칫 금구성언을 윤리도덕만을 중시한 가르침으로 평가절하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비담마는 물.심의 여러 현상(dhmma)을 대면하여(abhi) 그것을 잘 분석하여 그것이 선인지 불선인지 그런 현상들은 어떤 조건하에게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 지를 철저하게 알아서 저 고귀한 열반을 증득하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나’ 밖에 있는 물심의 현상(dhamma)은 아비담마에서는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비담마의 주제는 내 안에서 벌어지는 물심의 현상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불교에서 강조해서 말하는 법의 핵심입니다. 이 제일 중요한 측면을 놓쳐버리면 법은 나와 아무 관계없는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법을 이렇게 나와 관계없는 것으로 생각해버리면 그 순간부터 부처님 가르침(Dhamma)은 의미를 잃고 맙니다.


우리 불교를 보십시오, 교학은 문자놀음 정도로 치부해버리고 강원에서 비구/비구니계 받기 위해서 싫어도 억지로? 공부해야하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어디 한둘입니까. 그렇게 된 가장 근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법을 나와 상관없는 지금여기서 숨쉬고 고뇌하고 하는 이 나의 삶과는 관계가 없는 나 외에 저 밖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법이 아닙니다.


법은 학문의 대상이 아닙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법은 내 안에서 벌어지는 물심의 현상입니다. 내 밖에서 벌어지는 것은 의미가 크지 않습니다. 일단 내 안의 문제가 정리되고 이해되고 극복되면 자연스럽게 그 빛은 내 밖으로 퍼져나갑니다. 그것이 자비고 그것이 참다운 보시이고 보살행입니다. 그런 것이 출가자로서 가지는 사회에 대한 관심이어야 합니다.


나를 떠난 법은 의미가 없습니다. 섯불리 남의 문제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야말로 정치(나쁜 의미의)라 할 수 있습니다. 출가자가 정치꾼이 되어야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불교에서는 모든 것을 정치로서만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풀려고 드니 참 안타까울 뿐입니다.




Δ 15. 아비담마는 나를 관찰하는 학문이요 수행이다 (1)


문: 잘 알겠습니다. 스님, 그런데 현장스님께서 구사론에서 아비담마를 대법(對法)으로 옮겼다고 들었는데요?


답: 참으로 그렇습니다. 현장 스님께서 구사론을 옮기면서 아비다르마를 승법이 아닌 대법(對法), 즉 법에 대한 것으로 옮겼는데 참 고결한 안목이라 생각합니다. 아비담마를 승법으로 말해버리면 물론 구극의 단위라는 뜻이 전달되기도 하겠지만 아무래도 이 삶의 현장을 넘어서서 있는 고고한 무슨 법, 영원한 진리로서의 법이라는 쪽으로 이해될 소지가 크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대법으로, 법에 대한 것으로 이해하면 바로 지금 여기(here and now) 내 속에서, 이 인식과 목숨을 가진 한길 몸뚱이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법)을 대면하고 직시하고 관찰하고 분석하고 분해해서 보는 것이란 의미가 살아난다고 생각합니다.


아비담마는 바로 지금 여기 내 몸뚱이에서 일어나는 물심의 모든 현상을 체계적으로 분석 분해해서 가르쳐주는 수행의 길잡이입니다. 내 몸뚱이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현상들, 그 중에서도 특히 나의 심리현상은 참으로 미로중의 미로입니다. 이 미로속을 아무런 사전 지식이나 지도나 안내서나 길잡이가 없이 들어갔다가는 백 퍼센트 모두 길을 잃고 헤매다 죽기 마련이고 아니면 다른 이상 한 곳에 떨어져 그것이 궁극의 이상향인양 떠들고 다니다가 귀중한 한 평생을 다 보내기 십상입니다.


물심의 모든 현상을 물질 28 가지 단위와 정신 53가지로 분석해서 이들이 어떤 조건과 과정을 통해서 생기고 멸하고를 거듭하면서 흘러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비담마입니다. 이렇게 분석해서 관찰하면 모든 현상은 무상 고 무아일 뿐이지 나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그 어떤 실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알게됩니다. 이것을 절감하고 이것에 투철해야 그 사람이 참다운 수행자고 불자라 할 것입니다. 이런 점이야말로 아비담마가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가장 강한 멧시지라고 저는 받아들입니다. 이런 태도가 없는 아바담마 공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비담마는 승법이라기보다는 대법이라 이해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아비담마가 위빳사나(內觀)요 위빳나사나 아비담마라고 남방의 훌륭하신 스님들은 역설하신다고 봅니다. 나를 관찰하는 것을 떠난 아비담마는 이미 아비담마가 아니고 그런 위빳사나는 위빳사나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Δ 16. 아비담마는 나를 관찰하는 학문이요 수행이다 (2)


이런의미에서 인식과 알음알이(식)를 더불은 이 한길 몸뚱이에서 세계의 고집멸도를 본다는 상응부의 부처님 말씀이야말로 아비담마의 시작이요 전부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남방 스님들은 상응부의 이 말씀으로 아비담마와 위빳사나의 설명을 시작합니다.


거듭 거듭 말씀드리지만, 분명히 해야할 점은 이 ‘나’를 떠나서는 아비담마의 여러 가지 법수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아비담마의 핵심중의 핵심입니다. 물질도 내가 내 몸안에서 파악하는 물질입니다. 이 파악은 눈만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마노)으로 파악하고 생생히 느끼고 그래서 그것에 연연하지 않는 체계입니다. 심(마음)과 심소(마음부수)도 물론 그러하고요. 아비담마를 공부하는 사람은 이 심과 심소와 물질을 아비담마를 공부하는 매순간 자기 몸에서 찾고 확인해야합니다. 그러면 그런 아비담마 공부 자체가 바로 위빳사나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위빳사나입니다.


이렇게 아비담마에 대한 튼튼한 기초를 다지면서 위빳사나 센터에 들어가서 기법도 배워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힘든 산길을 가는데는 역시 지침서도 있어야하지만 처음 가는 길은 반드시 인도자가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산길을 가는 기법(테크닉)을 터득해야만 시간낭비하지 않고 바르게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길동무가 있으면 나태하지 않고 더 힘차게 갈 수 있지요. 그렇게 되면 결코 곁길에 속지 않고 바른 길을 가게되고 수행에 큰 향상이 있을 것입니다.


문: 스님 말씀 감사합니다. 아비담마는 바로 지금 여기 내 몸뚱이에서 일어나는 물심의 모든 현상을 체계적으로 분석 분해해서 가르쳐주는 수행의 길잡이라는 스님의 말씀을 깊히 새기겠습니다. 그럼 일체 모든 물심의 현상이 아비담마의 주제이겠습니다.


답: 넓게 본다면 그렇지만 엄밀히 말하면 아닙니다. 아비담마에서는 이 dhamma를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든 물심의 현상이든 그것을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하는데 우리도 잘 아는 진제(眞諦, paramattha-sacca)와 속제(俗諦, sammuti-sacca)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아비담마에서 다루는 주제는 거의 대부분 이 진제입니다. 속제는 다른 말로 빤�띠(pan$n$atti)라하는데 명칭이나 개념이란 말입니다. 명칭/개념과 그에 해당하는 물심의 현상은 밑도 끝도 없이 많고 아무런 실체가 없는 것이니까 일단 아비담마에서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Δ 17. 속제에 대해서


문: 그런데 스님, 진제와 속제는 대승불교에서도 익히 알려진 개념이죠. 아비담마에서는 진제와 속제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궁금합니다. 먼저 속제부터 말씀해주시지요.


답: 속제를 빠알리로는 삼무띠 삿짜(sammuti-sacca)라 합니다. 먼저 諦로 한역되고 있는 삿짜(sacca)란 단어부터 살펴보면, 삿짜란 √as(to be)에서 파생된 중성명사입니다. √as는 ‘있다, ~이다’를 뜻하는 영어의 be동사와 꼭 같이 범어 일반에서 쓰이는 너무나 많이 등장하는 동사원형입니다. 이것의 현재능동분사가 sat이고 여기에다가 가능분사를 만드는 어미 ‘-ya'를 첨가하여 satya라는 형용사를 만들었는데 이것의 빠알리 형태가 sacca입니다. 그래서 형용사로 쓰이면 ‘있어야하는, 존재해야하는 [것]’이란 의미에서 ‘진실한, 사실인’ 등의 형용사로 쓰이기도 하며 중성명사로 쓰여 ‘진실, 진리, 사실, 실제’란 의미로 쓰이지요. 불교에서는 고.집.멸.도를 네 가지 거룩한 진리라 하여 사성제라 부르지요. 아무튼 이런 측면에서 sacca는 진행되어 가는 의미의 진리가 아닌 불변의 진리라는 측면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할 수 있겠습니다. 말이 너무 길어지니 이만 줄입니다.


그리고 sammuti란 단어는 sam*(함께)+√man(to think, to consider)에서 파생된 여성형 명사로서 ‘함께 생각된 것, 서로 통용되는 의견’ 등의 의미에서 ‘세간에 널리 통용되는 이치나 견해’ 등을 뜻하는 의미로 쓰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을 8월 30일이라 하는 것이나 음력 7월 13일이라 하는 것, 자동차, 사람, 꽃 등등 세간에서 널리 사용되고 쓰이는 여러 개념, 규정, 약속, 법률, 관습, 등을 삼무띠 삿짜라 합니다.


분명히 해야할 점은 불교에서는 결코 속제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세간에서 통용되는 법규나 규정 약속은 너무 중요합니다. 이런 세속제에 의해서 세상의 모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행위들은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어가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이런 세간적 인습 등에 함몰되어버리면 진정한 해탈과 진정한 자유는 없게 됩니다.



Δ 18. 속제와 빤�띠(개념)


문: 속제를 빤�띠라 즉 명칭이라 한다고 하셨는데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답: 빤�띠(pan$n$atti)는 지혜(pan$n$aa)라는 용어가 파생된 동사 pra(앞으로)+√jn$aa(to know)의 사역형 동사 pan$n$aapeti에서 파생된 여성형 명사입니다. pan$n$aapeti는 사역형이니까 ‘[남들이] 잘 알게 하다’는 의미에서 ‘선언하다, 선포하다, 알리다, 지적하다, 지목하다’ 등의 의미로 쓰입니다. 그래서 빤�띠는 ‘알게 하는 것’이란 의미에서 ‘명칭, 개념, 서술, 술어, 용어’ 등의 의미로 쓰입니다. 중국에서는 ‘施設’로 번역되었는데 ‘假說, 方便設’이란 의미가 강합니다.


아비담마에서는 두 가지 빤�띠(개념)를 말하는데 세간에서 통용되는 모든 언어(sadda-pan$n$atti, 삿다 빤�띠)와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들(attha-pan$n$atti, 앗타 빤�띠) 즉 사람, 나무, 돌, 컴퓨터 ... 등등을 말합니다. 이 들은 모두 아비담마에서는 개념(빤�띠)의 카테고리에 포함되고 그래서 엄밀히 말하자면 아비담마의 주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비담마에 의하면 이것은 실재가 아니고 모두 방편일 뿐이니까요. 아비담마에서 다루는 주제는 진제 혹은 승의제이고 그래서 아비담마를 빼어난(아비) 법(담마), 수승한 법이라 해석하고 그래서 중국에서 승법(勝法)이라 뜻풀이를 했다고 봅니다.


문: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네요. 자아(aatman, Paali. attaa)는 진제일까요 아니면 이 속제에 속할까요?


답: 거창한 주제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아비담마에서 본다면 분명 자아는 빤�띠일 뿐입니다. 그런 기본 단위(dhamma)는 존재하지 않고 아비담마에서 설하고 있는 여러 기본 단위들이 뭉쳐서 만들어진 하나의 개념이고 존재일 뿐이라 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런 독립된 아이덴티티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산냐일뿐이고 상카라일뿐이라고 위숫디막가[淸淨道論]에서 설하고 있습니다.


문: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아뜨만을 그들의 모든 철학이나 종교에서 최고 우위에 두는 힌두 제파에서 불교를 맹공격할 수밖에 없었겠습니다. 그럼 진제를 설명해 주시지요.



Δ 19. 진제, 승의제, 빠라맛타 삿짜(1)


답: 진제는 빠라맛타 삿짜(paramattha-sacca)라 합니다. paramattha는 parama(최고의, 최상의)+attha(이치, 뜻)로 분석됩니다. ‘최고의 이치’라 할 수 있겠는데 그래서 중국에서는 ‘勝義’라고 직역해서 勝義諦라고 많이 사용했습니다. 아비담마에서 제시하고 있는 여러 단위들이야말로 이 온갖 세상 즉 이 욕계에서부터 출세간의 경지에까지 항상 존재하는 최소의 단위라는 것입니다. 존재를 이런 최소의 단위, 궁극의 단위로 분해하고 해체하여(vibhajja) 나라고 주장할 수 있는 궁극적인 존재가 없다고 설하는 것이 아비담마입니다.


아비담마에서는 빤�띠 즉 속제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세속에서 하는 여러 학문은 사실 대부분 이 빤�띠를 연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아비담마에서는 이 승의제인 구극의 단위들을 분석하여 제시하고 이들이 여러 다른 조건들 속에서 서로 어떤 관계 속에 존재하고 연연취산(因緣聚散)을 거듭하고 있는지를 설명하려 합니다. 이것이 아비담마의 관심입니다. 승의제인 구극의 단위를 아비담마의 담마에서는 4가지 영역을 정하여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 4개의 카테고리 안에 모든 것(dhamma)을 포함시켜 체계화하고 있지요. 그래서 부처님의 궁극입장인 무아를 분석적으로 증명하고 보여주려는 학문이 아비담마입니다. 무아의 최초요 최고의 변론자인 셈이지요.


그리고 여기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아비담마는 개념(빤�띠)과 법(진제, 빠라맛타)을 정확히 구분하는데서 출발한다는 점입니다. 존재와 인식의 구극의 단위인 이 법들을 빤�띠와 구분하지 못하면 아비담마는 혼란에 빠집니다. 그러니 아비담마 학도는 이 둘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사유해 봐야합니다. 그리고 아비담마에서 설하는 최소단위인 법들은 인식하고 인식되는 최소단위라고 정의해야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에 논의할 기회가 있겠지요.



Δ 20. 진제, 승의제, 빠라맛타 삿짜(2)


문: 잘 알겠습니다. 그러니 아비담마는 자칫 아주 무미 건조하고 어려울 수 있겠습니다.


답: 사실입니다. 그래서 아비담마는 승원에서 스님들이 하던 공부입니다. 신도들은 어렵다고 머리부터 저어버리지요. 지금도 아비담마의 나라라는 미얀마에 가보면 신도들은 거의 대부분 아비담마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아비담마란 말만 들어도 합장하고 공경하려하지 알려고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님들에게는 아비담마를 외우고 배우는 것 자체가 수행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아비담마의 법수를 계속 외고 익히다보면 ‘나’를 분해하고 분석해서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힘을 자연스럽게 기르게 되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위빠사나로 연결되고 그래서 어떤 수행의 경계가 와도 그기에 속지 않고 그 경계를 아비담마적으로 분석하고 분해하여 객관적으로 보게 됩니다. 분석하고 분해하지 못하면 마음 경계에 속습니다. 철저하게 분해해서 그 뿌리를 보아야하지요.


미얀마에서는 스님들이 사미때부터 그 분량이 엄청나고 최고로 어렵다는 빠타나(Pathaana)를 우리가 천수경 외듯이 줄줄 욉니다. 그 자체가 큰 수행인 셈이지요. 그렇게 외서 나중에 커서 아비담마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미세한 심리현상을 더욱더 정밀하게 관찰하게 되겠지요. 그래서 아마 미얀마에서는 소위 말하는 큰스님들이 많이 나오시는 가 봐요.



'經典 > 아비담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비담마 왕초보 입문 / 5  (0) 2008.04.02
아비담마 왕초보 입문 / 4  (0) 2008.04.02
아비담마 왕초보 입문 / 3  (0) 2008.04.02
아비담마 왕초보 입문 / 1  (0) 2008.04.02
[아비담마 왕초보 입문] / 차례  (0) 2008.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