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아비담마

아비담마 왕초보 입문 / 3

通達無我法者 2008. 4. 2. 11:19
 

 

 

Δ 21. 네 가지 승의제(빠라맛타삿짜) - 아비담마의 네 가지 주제


문: 이제 다시 승의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아비담마에서는 네 가지로 카테고리를 정하여 설명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뭔지 궁금해집니다. 물론 특별한 것은 아니겠지요. 스님 말씀을 듣다보니 아비담마란게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땅에서 불쑥 쏟아난 게 아니고 부처님 가르침을 토대로 하여 그것을 수승한 안목으로 체계화하고 분석하여 설명한 것이겠는데 그러면 당연히 부처님 근본 가르침에 뿌리 두고 있다고 여겨지는데요?


답: 물론입니다. 먼저 네 가지를 말씀드리지요. 그것은 �따(citta), 쩨따시까(cetasika), 루빠(ruupa), 닙바나(nibbaana)입니다. 한글과 한자로 옮기자면 마음(心), 마음부수(心所), 물질(色), 열반(涅槃)입니다.



Δ 22. 마음(citta, 心)


문: 스님, 그럼 이제 하나하나 그 뜻을 설명해 주십시오. 먼저 마음이라 하셨고 한문으로는 心이라 하셨는데요. 사실 한글로는 마음이란 단어하나로 우리 마음의 여러 가지 현상이나 기능을 나타내어 버리고 마는데 범어에서는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제일 많이 거론되는 것이 한역 경전들에서도 심, 의, 식(心意識)의 문제가 아닙니까. 이 아비담마에서 스님께서 마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한역 경들에 나오는 심의식 중에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그리고 이 심의식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 궁금한 게 많습니다.


답: 참 좋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먼저 한문으로 옮긴 심.의.식(心意識)의 범어 원어를 말씀드리자면 심(心)은 citta(Sk. citta)를 의(意)는 mano(Sk. manas)를 식(識)은 vin$n$aan*a(Sk. vijn$aan*a)입니다. 心으로 옮긴 citta(√cit, to think)는 초기 경들에서는 주로 우리의 생각이나 사고 일반을 나타내는 술어로 나타나고 意로 옮긴 mano(√man(to think)는 오직 우리의 생각을 관장하는 기관[根, indriya, 혹은 處나 入, aayatana]의 개념으로서만 등장합니다. 識으로 옮긴 vin$n$aan*a(vi분리하여+√jn$aa, to know)는 여섯 감각 기관과 여섯 대상이 관여할 때 일어나는 알음알이의 개념으로서 나타납니다. 초기경들에서는 엄밀히 말하면 이렇게 용처가 다릅니다.


그런데 이것을 심.의.식(心意識)으로 옮기고 다시 이것을 현대 한국에 사는 우리가 우리의 한문에 대한 개념 규정으로 대하면 오해의 소지가 많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다른 한글이나 한문으로 옮기는 것도 여간 어렵지가 않고요. 아니 아직 그런 시도 자체도 없지요.


그리고 후대 주석서들과 아비담마에서는 이 셋이 같은 것이라 정의합니다. 물론 북방 불교에서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아비담마에서 자세히 보면 citta와 mano는 그 용처가 분명 다릅니다. 그러나 citta와 vijn$aan*a는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렇게 받아들이면 되겠습니다. 물론 전체적으로 볼때 �따는 마노와 윈냐나를 포함한 마음 일반을 나타내는 용어라 보면 되겠습니다. 제가 마음이라 옮기면 citta를 뜻하는 것이고 알음알이라 옮기면 vijn$aan*a를 뜻하며 마노나 意로 옮기면 일단 mano를 뜻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Δ 23. 마음은 찰라생 찰라멸이다


문: 분명하게 말씀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일단 �따와 윈냐나는 같은 의미로 마음이라는 넒은 의미로 사용되고 마노는 정신영역을 관장하는 기관이라 보면 되겠습니다.


답: 그렇지가 않습니다. 제가 분명하게 제시를 못한 것 같습니다. 아비담마에 한정하여 말하면 �따와 윈냐나 즉 마음으로 옮기고 있는 것은 매 찰라(khan*a)에 생겼다가 멸하는 그 한 생각을 말합니다. 마음이라하니 뭐 불변하는 우리에게 내재된 실재, 영원히 나고 죽음을 초월한 그 자리란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아비담마에서 말하는 마음이란 한 순간에 생겼다가 다음 순간에 사라지는 것입니다. 단지 그것입니다.


문: 그렇습니까?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 조금 알송달송합니다. 스님께서는 앞서 승의제란 구극의 단위나 실재라고 하신 것 같은데요?


답: 구극의 단위입니다. 그러나 아비담마에서는 이 구극의 실재는 찰라생이고 찰라멸입니다. 찰라 생과 찰라 멸을 하는 단위로서의 구극의 단위입니다. 구극의 단위라 하여 불변하는 실체를 상정하면 안됩니다. 마음은 이전의 여러 수억조의 마음이나 마음부수등의 현상(법)에 조건지워져서 생겨서 변화되어 사라집니다. 그러면 다시 여러 조건의 화합에 의해서 그 다음 마음이 즉시에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 이렇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마음이 생멸합니다.


마음은 생겨서 대상을 인지하는 본래 기능을 다하고 소멸합니다. 이렇게 매찰나찰나 마음은 수억조번 일어납니다. 마음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그 기간을 심찰나(citta-kkhana)라 부릅니다. 북방 논서에도 손가락 한 번 튀기는 사이에 마음은 960번 일어났다가 소멸한다는 문구를 본적이 있습니다. 그런 것이 마음입니다. 마음은 너무 빨리 생멸하기 때문에 생멸하지 않은 것 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마음은 찰라생 찰라멸이라는 것이 아비담마의 제일 전제입니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아비담마가 오리무중이 됩니다. 반드시 숙지해야하고 자기 자신 속에서 확인하고 뼈시리게 느껴야합니다.



Δ 24. 찰라생 찰라멸과 설일체유부


문: 그러면 그것은 없는 것 아닙니까. 한 순간에 생겼다가 없어져 버리는 것이니까요.


답: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한 순간에 생겼다가 다음 순간에 다른 조건으로 생기는 것이니까요. 이런 생멸하는 구극의 마음이나 생각의 단위를 �따라합니다. 이것은 나머지 쩨따시까와 루빠 즉 심소와 물질에도 다 적용됩니다. 아비담마의 모든 구극의 단위들은 모두 찰라생 찰라멸입니다. 찰라생 찰라멸로서의 단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설일체유부(設一切有部, sarvaastivaadin)의 견해도 이해해야합니다.


설일체유부라하니 많은 사람들이 이 부파에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존재한다라고 가르치는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다시 ‘모든 것이 있다라고 하는데 어떻게 불교의 일파라 할 수 있는가. 그런데도 부파 불교중에서 가장 왕성했던 파이고 불교가 인도에서 힘을 잃을 때까지 끝까지 대승불교와 교리논쟁을 벌여왔던 파인데 어떻게 이런 모든 것이 있다라는 파가 그렇게 불교 내에서 힘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의문을 가집니다. 설일체유부에서는 결코 모든 것이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세속제로서의 모든 것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영원히 있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찰라 생과 찰라멸을 거듭하는 구극의 단위들을 상정하여 그런 구극의 단위들은 존재한다[有]라고 설하기 때문에 설일체유부라 불리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설일체유부와 남방 상좌부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물론 어떻게든 구극의 단위로서의 법들(dhaamaa)을 인정하고 있기에 대승불교 특히 중관파(공관파)와 교리 논쟁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설일체유부에 속하던 스님들이 유식을 크게 일으켜 세웠음은 주지의 사실이지요. 그만큼 아비담마를 깊이 이해하는 것은 후대 불교교리의 발전과 변천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토대입니다.



Δ 25. 삼세실유, 어떻게 이해해야하나


문: 아하, 찰라생 찰라멸을 하는 구극의 단위라 깊이 새겨보겠습니다. 아뭇던 이런 기본적인 이해가 없으면 아비담마는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겠습니다.


답: 그렇습니다. 무슨 가르침이나 학문이든 기본적인 명제라 할까요 그런 직관에 바탕한 전제 조건들을 제대로 음미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말장난에 빠지기 쉽다고 봅니다. 일단 아비담마에서 설하는 이 citta뿐만 아니라 모든 단위들(dhammaa)이 모두 찰라생 찰라멸을 한다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직관은 모두 내 자신을 들여다보는 수행에서 직접 체득한 것입니다.


지금 고요히 자신을 들여다보세요. 매 순간순간 얼마나 많은 현상들이 생기고 멸하고 생기고 멸하고를 거듭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바로 이순간 찰의 전도 아니고 찰라의 후도 아닌 바로 이 순간이야말로 오직 실재가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것은 형성된 것(san#khaata, 行)에 속합니다만. 순간이 존재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말로서는 여러 가지로 다른 철학적 근거를 가지고 얼마든지 논리를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즉금의 찰라는 존재합니다. 이것을 부정하면 자기 삶을 부정하는 것이 되고 수행의 토대를 부정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런 즉금의 찰라는 분명히 존재했기 때문에 단위들이 되는 것입니다. 저의 이 말을 유론이나 상견에 빠진 말이라고 하시는 분들은 말에 떨어진 것입니다. 말을 쫓아가지 마십시오. 이런 바탕을 잃어버리면 수행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아비담마와 위빳사나의 출발은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에 내 안에서 벌어지는 물심의 현상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극의 실재로서의 심 심소 물질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며 이런 확장으로서의 과거 현재 미래의 법들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문: 스님, 현재는 존재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과거와 미래도 존재합니까? 아비다르마에서는 삼세실유를 주장한다고 들었는데요?


답: 남방 아비담마에서도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실재한다고 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학문을 위한 주의 주장은 큰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제 입장에서 보면 처음에 과거와 미래가 실재한다는 것이 참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좌정하고 앉아있으면 몇 십년 전이나 몇 년전이나 몇일전의 일이 아무런 차이 없이 즉시에 떠오르지 않습니까. 만일 과거가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지금에 일어나는 마음의 대상이 될 수 없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는 실재한다고 받아들이는 입장입니다.


성인의 경지에서는 미래를 정확하게 진단합니다. 만일 미래가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어떻게 예측할 수 있을지, 그런 의미에서 미래는 실재한다고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매순간의 연속으로서의 현재는 미래가 있기 때문에 가능할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앞으로 더 사유해야하고 옛 선지식들의 견해를 찾아서 음미해봐야겠지요. 성급하게 한 번에 다 알려는 태도는 수행자의 태도가 아니라고 봅니다. 저도 더 사유하고 궁구해볼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처럼 아비담마를 공부하는 사람은 항상 반조를 해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으며 무엇을 모르고 있나. 모르는 것은 무슨 이유때문이며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나 자주자주 점검해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 자체가 수행이아닐까요?



Δ 26. 마음은 하나뿐인데 왜 89 혹은 121 가지 마음을 설하나?


문: 감사합니다. 중요한 포인트라 생각합니다. 다음에도 중요한 포인트들은 이렇게 강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이런 이해가 그냥 용어들을 나열하여 전달하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제가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나 남방불교에서는 89가지 마음 즉 �따를 말한다. 청정도론에서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스님 말씀에 따르면 �따는 오직 하나 뿐이다 이런 말씀이 되는데 좀 혼란스럽습니다.


답: �따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오직 하나뿐이라하면 수백억겁이 지나도 불생불멸인 영원한 하나인가라고 생각하시면 거듭 말씀드리지만 아비담마나 초기불교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여기서 하나라는 것은 구극의 단위로서 하나 뿐이란 말입니다. 사실 찰라생과 찰라멸을 거듭하니 그 모든 것을 하나의 단위로 본다면 불가설 불가설전이지요. 그렇지만 구극의 단위로서는 하나다, 다시 말하면 ‘안다’는 하나의 기능만 한다라고 말해야합니다.


그러나 조금 전에 말했지만 찰라생 찰라멸을 하면서 불가설 불가설전의 수많은 태어남과 사라짐을 거듭하는데 그런 생과 멸은 그 �따가 일어나는 장소(bhuumi), 다양한 관련된 다른 단위(dhamma)들 등의 조건에 따라서 분류하는데 이렇게 분류해보면 89가지나 121가지 경우가 있다 이런 말입니다. 그래서 쉽게들 �따는 89가지이다 이렇게 말해버리지요. 그러나 구극의 단위로서는 하나입니다.




Δ 27. 아비담마는 사진이다 (1)


문: 알겠습니다. 그래도 조금 미진한 것 같기도 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하고 그렇습니다. 스님, 좋은 비유가 없을까요?


답: 저는 아비담마를 사진이나 영화 필름에 비유해서 이해합니다. 그러면 분명하게 포인트를 잡을 수가 있습니다. 제가 군대 있을 때 항공사진반이란 곳이 있었습니다. 항공 사진을 찍어서 적의 동태를 파악하는 첩보자료를 만드는 작전반이었습니다. 그들은 첩보용 비행기나 위성등으로 찍어서 보내온 수많은 사진들을 분류하고 판독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여기에 비유해서 보면 사진 필름 한 장 한 장은 모두 매 찰라에 우리의 마음과 몸을 찍은 사진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 수 억장의 사진들은 그러나 사진이라는 것에서는 하나이지만 여러 가지 조건들에 따라서 몇 십가지로 분류해서 대용량의 컴퓨터에 저장할 수 있겠지요.))


아무리 다양한 사진들이 수 억 장이 있다하더라도 대상을 찍었다는 작용으로는 모두 하나의 ‘사진’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수 억 장의 사진을 분류해 보면 동해상의 사진, 서해상의 사진, 황해도의 사진, 평안도의 사진 등으로 분류해 볼 수 있겠지요. 같은 동해상의 사진이라도 낮에 찍은 사진, 밤에 찍은 사진 등으로 분류해 볼 수도 있고, 같은 동해상의 사진이라도 그 안에 탱크가 들은 사진, 곡사포가 들은 사진, 등으로도 분류해 볼 수 있고 ... 이렇게 어떤 조건에 따라서 분류해보면 수 억장의 사진일지라도 몇 십가지나 몇 백가지로 줄여서 나타낼 수가 있겠지요. 그럴려면 분류하는 기준을 찾아야겠고 그 기준으로서 지역이 제일 좋은 기준이 되겠지요.


�따도 그와 같습니다. 정신-물리적인 현상을 찍은 수억장의 사진을 분류하는 기준은 많겠지만 아비담마에서는 �따를 주목합니다. 그래서 분류의 기준으로 알음알이인 �따가 일어나는 곳에 따라, 욕계, 색계, 무색계, 출세간의 넷으로 나누고 욕계는 다시 不善(akusala)과 원인 없이 생긴 것(ahetuka)과 아름다운 것(sobhana)으로 나누고, 다시 불선은 탐욕에 뿌리박은 것, 성냄에 뿌리박은 것, 미혹에 뿌리박은 것으로 나누고 .... 이렇게 계통을 만들어 분류해보면 불가설 불가설전으로 수 없이 생겼다가 멸하는 �따를 89가지나 혹은 121가지로 줄여서 파악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Δ 28. 아비담마는 사진이다 (2)


문: 참 좋은 비유입니다. 뭔가 감이 많이 잡힙니다. 아비담마는 사진이다. 아비담마를 연구한 분들은 사진 판독가들이다. 그런데 이 사진은 물질만 찍는게 아니고 정신현상까지도 찍는다. 일단 아비담마의 주 관심은 이런 수백억조 개 이상으로 순간 순간 생멸을 하는 우리의 정신-물리적 현상을 사진으로 찍어서 분류하는 작업이군요.


아비담마을 가르치시는 분들은 이렇게 �따를 분류의 기준으로 삼아서 분류해가지고 이 부류의 사진에는 어떤 심리현상들(cetasika)들이 있고 어떤 물질(ruupa)들이 있고 그래서 이런 것들이 어떤 상호 작용을 하고 ... 뭐 이런 연구를 하는 아비담마연구소의 공학박사님들 내지는 싸이코피직스?를 전공한 박사님들이라고 보면 되겠군요.


답: 하 하 하 ... 그런 셈이지요. 그리고 이 아비담마 사진기로 찍힌 사진은 우리가 보통으로 대하는 사진기와는 아주 다르지요. 우선 정신현상까지도 찍는게 다르고 물질적 대상도 산, 물, 꽃, 사람 등으로 찍는게 아니라 물질은 28가지의 최소단위로 환원하여 그중에 어느 찰나에 나타나는 �따에는 어떤 환원물질들이 나타나는 가를 찍고 우리 마음의 여러 복잡한 현상들도 모두 52가지 단위로 환원하여 나타나게 하는 그런 사진이지요.


그리고 그 사진을 연구하는 분들은 단지 사진만 연구 분석하는 분들이 아니고 이런 사진들이 순간 순간에 어떤 필름으로 돌아가서 어떤 미세한 심리-물질적인 현상을 벌이는가 까지 연구하는 분들이지요. 이를 아비담마에서는 위티�따(viithicitta)라 부르는데 인식과정이라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순간 순간의 �따들이 모여서 최소의 사고과정 단위를 구성하는데 이를 일컷는 말이지요.



Δ 29. 순간 순간의 아비담마 사진을 연결한 것이 인식과정(viithicitta)이다


문: 인식과정이라면 ... 아, 스님, 그 자다가 망고 먹는 것 말씀이지요.


답: (웃음) 아세네요. 그래요 자다가 망고 먹는 데 비유한 17의 �따 사진들로서 우리의 한 생각이 일어났다가는 어떤 작용을 하고 없어져 가는가 하는 과정을 설명한 것입니다. 우리의 인식과정은 아주 미세하고 복잡하고 제멋대로인 것 같지만 사실은 분명한 법칙(niyama)속에서 전개되어가는 과정이라는게 이 인식과정(위티�따)의 가르침입니다.


우리의 인식과정을 통찰하는 아비담마의 너무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비담마길라잡이 4장에서 나름대로 깊이 해설을 해보았습니다만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은 사실 이 위티�따(인식과정)를 자세히 체계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따는 89측면에서 분류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위티�따로서 윤회하는 원리와 과정 등을 아비담마는 논리적이고 성공적으로 설명하고 있고 그중에서도 자와나(속행)야말로 선업 불선업을 짓는 순간이고 그래서 요니소 마나시까라(지혜로운 주의)로서 선을 행하여 향상의 길로 갈 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와나에 대해서는 아비담마 길라잡이 3장과 4장에서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Δ 30. 순간 순간의 사진끼리의 관계를 설명한 것이 24가지 빳짜야(paccaya, 조건)이다


문: 감이 옵니다. 그러니까 아비담마에서 제일 어렵다는 24가지 빳짜야(조건)도 이렇게 수백억 장의 사진을 가지고 이 사진과 저 사진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 어떤 조건때문에 이 다음에는 이 마음이 일어나는 가를 밝힌 것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답: 바로 그렇습니다. 나의 인식과정속에 흘러가는 불가설 불가설전의 수백 수천 억 조의 심 찰라에 찍은 마음 사진은 그것이 아무리 숫자가 많다고 하더라도 서로의 조건을 가지고 분류해보면 모두 24가지 조건 하에 들어오게 된다고 아비담마에서는 가르칩니다. 이런 조건들을 깊이 음미해보면 우리의 심리현상과 사고과정을 이해하는데 엄청난 도움이 되며 요술쟁이와 같은 우리의 알음알이가 벌이는 여러 삼리현상에 속지 않게 되지요.


이 빳짜야(조건)의 가르침은 어렵긴 하지만 옛 큰 스님들의 예지가 깊이 배여있는 너무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이런 빳짜야를 살펴 통찰하는 그 자체가 큰 수행입니다. 예를 들면 여기 지금 생긴 한 생각은 어떤 조건에서 생겼으며 이것은 또 다음 생각에 어떤 조건이 되는가를 밝혀주는 것입니다. 이런 관심으로 24가지 빳짜야들을 음미해보면 수행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마음의 달인이 되어 가는 것이겠지요. 이런 측면에서 중국에서 옛날이 불교를 심학이라 부른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심(마음)과 심소(마음부수)들 특히 52가지 심소법들을 또 함께 관련된 것끼리 묶어서 번뇌다, 폭류다, 족쇄다, 장애다라는 등의 불선법이나, 사념처 오근 오력 등 깨달음의 편에 있는 법이다 등등으로 사진을 분석하고 판독해보기도 하지요.


그 모든 판독은 사실은 이런 현상은 열반을 실현하는데 도움이 되는가 아닌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남북 양 전통의 불교에서 설하고 있는 근본은 뭐라 해도 해탈과 열반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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