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바른 방법
명상할 때 수행자가 바른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바른 방법만이 위빠싸나 지혜를 생기게 합니다. 수행자가 사물을 영원한 것으로 본다면 어떻게 위빠싸나 지혜가 생기겠습니까? 사물을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이며, 영혼이며 자아라고 본다면 어떻게 위빠싸나 지혜가 생기겠습니까?
마음과 물질은 무상합니다. 수행자는 이 무상한 것들을 있는 그대로 무상한 것으로 보기 위하여, 무상한 것들에 대해서 명상해야 합니다. 그것들은 생겼다가는 사라지곤 하면서 계속 수행자를 압박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며 고통입니다. 수행자는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고 고통으로 보기 위해서 명상해야 합니다. 그것들은 개아나 영혼이나 자아가 없는 과정입니다. 수행자는 거기에는 개아도 영혼도 자아도 없다는 것을 알기 위하여 명상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보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수행자는 보고 듣고 감촉하거나 지각할 때마다 육문[眼耳鼻舌身意]을 통해서 일어나는 정신적 물질적 과정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즉 볼 때 '보고 있음, 보고 있음'을 알아차리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들을 때 '듣고 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냄새맡을 때 '냄새맡고 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감촉할 때 '닿고 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접촉할 때에는 피로함, 뜨거움, 통증과 같은 참을 수 없고 불쾌한 느낌도 일어납니다. 그것들을 피로함, 뜨거움, 통증 등으로 알아차리십시오. 생각이나 관념이 나타날 지도 모릅니다. 그것들을 일어날 때마다 생각함, 상상함, 욕망, 즐거움, 기쁨으로 알아차리십시오. 그러나 초심자가 육문을 통해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알아차리기는 어렵습니다. 처음에는 조금만 알아차리면 됩니다.
명상은 이렇게 합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 배가 일어나고 꺼지는 것을 보는 것이 가장 쉽습니다. 이 배의 움직임을 먼저 알아차리기 시작하십시오. 배가 일어날 때 '일어남'을 알아차리십시오. 배가 꺼질 때 '꺼짐'을 알아차리십시오. 경전에는 이 배의 일어나고 꺼짐을 알아차리는 것이 없습니다. 명상 수행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경멸하는 말투로 '배의 일어남과 꺼짐을 알아차리는 것은 경전과 아무 관계가 없다.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경전에 있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그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일어남은 실재이며, 꺼짐도 실재이며, 바람의 요소[風大]의 움직임도 실재입니다. 우리들은 편의상 구어체인 '일어남'과 '꺼짐'을 사용해 왔습니다. 경전 용어로는 일어남-꺼짐은 풍대입니다. 배가 일어나고 꺼질 때 주의 깊게 알아차리면, 거기에는 팽창(distendedness)이 있고, 움직임이 있으며, 운반함(conveying)이 있습니다. 여기서 팽창은 풍대의 특징(characteristic)이며, 움직임은 그것의 역할(property)이며, 운반함은 풍대의 현시(manifestation)입니다. 풍대를 있는 그대로 안다는 것은 그것의 특징과 역할과 현시를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알기 위해서 명상해야 됩니다. 위빠싸나 지혜는 마음과 물질의 정의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수행자는 물질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수행자는) 특징, 역할 등을 통해서 이해해야 한다.'
(위숫디막가. ii, 227)
물질이나 마음에 대해서 명상하기 시작할 때, 수행자는 특징이나 기능을 경유하여 시작해야 합니다. '등을'이란 말은 '현시(나타나는 양태)'를 말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철학 개론(Compendium of Philosophy)'에 아주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견해의 청정이란 마음과 물질을 그들의 특징, 역할, 현시와 가까운 원인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 뜻은 이렇습니다. 위빠싸나 지혜는 마음과 물질에 대한 분석적인 지혜로부터 시작됩니다. 청정(purity)의 일곱 단계 중 앞의 세 가지는, 처음에 계를 완벽하게 지키고 마음을 청정하게 한 다음에 비로소 견해의 청정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물질에 관한 분석적인 지혜와 견해의 청정을 획득하려면, 수행자는 마음과 물질에 대하여 명상하여, 그들의 특징, 역할, 현시와 가까운 원인을 통하여 그들을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일단 그렇게 알면, 수행자는 마음과 물질에 대해서 분석적 지혜를 얻게 됩니다. 일단 이 지혜가 성숙되면, 수행자는 견해의 청정을 계발합니다.
여기서 '마음과 물질을 그들의 특징을 경유하여 안다'는 말은 마음과 물질의 고유한 본성을 안다는 뜻입니다. '역할을 경유하여' 안다는 것은 그들의 기능을 안다는 것입니다. 현시는 그들의 겉으로 드러나는 양태입니다. 명상 수행의 초기 단계에서는 아직 가까운 원인을 알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특징과 기능과 현시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청정도론과 철학개론 모두 마음과 물질을 이름에 의해서 알아차리거나, 숫자에 의해서 알아차리거나, 물질 입자의 존재로서 알아차리거나, 끊임없이 일어나는 과정으로서 알아차리라고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들의 특징과 기능과 현시에 의해서 알아차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수행자는 이를 주의 깊게 주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행자가 이름이라는 개념이나 숫자나 입자나 과정에 이끌릴 수 있습니다. 주석서들은 마음과 물질을 그 특징과 기능과 현시를 경유해서 알아차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풍대를 알아차릴 때, 특징과 기능과 현시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풍대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풍대의 고유한 본성입니다. 풍대라는 것은 단지 그것입니다. 풍대의 기능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움직임입니다. 풍대의 현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운반함입니다. 현시란 수행자의 지성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풍대를 알아차릴 때, 풍대는 수행자의 지성에 운반하고 밀고 당기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풍대의 현시입니다. 수행자가 배의 일어남-꺼짐을 알아차릴 때, 팽창하고 움직이고 운반하는 모든 것이 수행자에게 명백하게 나타납니다. 이런 것들이 특징이고 기능이며 현시입니다. 이 풍대는 중요합니다. 염처경의 자세와 분명한 이해와 몸을 주시하는 부분에서, 주석가는 풍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걷고 있을 때, 그는 '나는 걷고 있다'라고 안다.'
부처님께서는 걸을 때마다 '걸음, 걸음'을 주시하면서 물질적 형상을 알아차리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렇게 알아차리면 어떻게 지혜가 계발되는지는 주석가가 설명합니다.
'내가 걷는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이것이 풍대를 만든다. 이 풍대가 암시를 만든다. 풍대가 온몸에 퍼지면서 걸으라고 함에 따라서 온몸이 앞으로 나아간다.'
이것은 이런 뜻입니다. '걸음, 걸음'을 알아차리는데 익숙한 수행자가, 걸을 때마다 다음과 같이 깨닫습니다. 먼저 '나는 걸을 것이다'라는 관념이 떠오릅니다. 이 의도가 온몸에 움직인다는 긴장감이 생기게 하고, 그것이 이번에는 물질인 몸을 앞으로 움직이고 또 움직이게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나는 걷는다' 혹은 '그는 걷는다'입니다. 실재로는 걷는 '나'나 '그'는 없습니다. 단지 걸으려는 의도와 물질인 걸음만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수행자가 깨닫습니다. 여기, 이 주석서의 설명에서는 풍대의 움직임을 깨닫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풍대를 특징과 기능과 현시를 경유하여 이해한다면, 수행자가 자신이 명상을 올바르게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풍대는 지탱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축구공이 속을 채우고 공을 단단하게 유지하도록 지탱하고 있는 것은 공기입니다. 구어체로 말할 때 공에 바람이 꽉 찼고 단단하다고 합니다. 철학 용어로 말할 때는 풍대가 지탱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수행자가 팔을 뻗고 있으면 팔이 뻣뻣함을 느낍니다. 그것은 풍대가 지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수행자가 공기 베개에 머리를 대거나 공기 매트리스에 누우면 머리나 몸이 바닥에 닿지 않습니다. 그것은 베개나 매트리스 속에 있는 풍대가 수행자를 지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벽돌은 밑의 것이 위의 것을 지탱하므로 쌓을 수 있습니다. 밑의 벽돌이 지탱하지 않는다면 위의 것이 무너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몸도 풍대로 가득차 있어서 지탱하고 있기 때문에 딱딱하고 견고하게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딱딱하다'고 했지만 그것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더 딱딱한 것이 있으면 '물렁물렁하다'고 했을 것입니다. 더 물렁물렁한 것이 있으면 그것은 다시 딱딱한 것이 됩니다.
풍대의 기능은 움직임입니다. 강할 때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움직입니다. 몸을 구부리고 뻗고 앉고 일어서고 가거나 오게 하는 것은 풍대입니다. 위빠싸나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말합니다. '팔을 구부리고 뻗는 것을 주시하면 단지 '팔'이라는 개념이 나타날 뿐이다. 왼발-오른발을 주시하면 단지 '다리'라는 개념이 나타날 뿐이다. 배의 일어나고 꺼짐을 주시하면 단지 '배'라는 개념이 나타날 뿐이다.' 일부 초보자에게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념이 계속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초보자에게는 개념과 실재 모두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초보자들에게 실재만 알아차리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시작 단계에서는 개념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실제적이지 못합니다. 실제적인 것은 실재와 결합된 개념을 주시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자신도 개념을 표현하는 언어를 사용하셨으며, 우리가 걷거나 구부리거나 뻗을 때 '나는 걷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실재를 표현하는 언어를 사용하여 '그것은 지탱하는 것이며, 움직이는 것이다'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수행자가 걷고 구부리고 뻗는 등의 개념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명상하더라도, 알아차림과 집중이 강해지면, 개념은 사라지고 지탱과 움직임과 같은 실재만 수행자에게 나타나게 됩니다. 소멸의 지혜를 아는 단계에 도달하면, 수행자가 '걷고 있음, 걷고 있음'을 알아차렸음에도 불구하고, 다리나 몸이 수행자에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연속되는 움직임만 있을 뿐입니다. 비록 수행자가 '구부림, 구부림'만 알아차렸지만, 팔이나 다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움직임만 있습니다. 수행자가 '일어남, 꺼짐'만 알아차렸음에도 불구하고, 배나 몸의 이미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들어가고 나오는 움직임만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흔들리는 것과 함께 풍대의 기능입니다.
수행자의 마음에 밀어내거나 끌어들이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풍대의 현시입니다. 수행자가 팔을 구부리거나 뻗을 때 무엇인가 끌어들이고 밀어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걸을 때에는 보다 분명합니다. '걸음, 오른발, 왼발, 발을 들어서, 앞으로, 놓음'으로 주시하여 집중이 날카로워진 수행자에게는, 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마치 뒤에서 누가 미는 것처럼 아주 분명하게 됩니다. 다리는 자발적으로 앞으로 미는 듯합니다. 수행자가 이렇다 할 노력을 하지 않아도 어떻게 다리가 앞으로 가는지가 아주 분명합니다. 이렇게 걸으면서 알아차리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서 어떤 수행자는 경행하는데 시간을 많이 사용하곤 합니다.
그러므로 풍대에 대해서 명상할 때, 수행자는 지탱하는 특징을 경유하여 풍대를 알아야 합니다. 풍대의 기능은 움직임이고, 현시는 운반함입니다. 그럴 때만이 수행자의 지혜는 바른 방향으로 올바르게 계발됩니다.
수행자에게 '반드시 특징과 기능과 현시를 배운 다음에 명상해야 되는가?'라는 의문이 떠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그것들을 배울 필요 없습니다. 수행자가 마음과 물질이 생기는 것에 대해서 명상하면, 수행자는 특징과 기능과 현시도 알게 됩니다. 수행자가 마음과 물질이 생기는 것에 대해서 명상할 때, 달리 특징과 기능과 현시를 경유하여 아는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 오는 날 하늘을 쳐다보면 번쩍이는 섬광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밝은 빛이 번개의 특징입니다. 번개가 번쩍이면 어두움이 사라집니다. 이 어두움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번개의 기능, 일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어떤 것인지, 긴지, 짧은지, 곡선인지, 원형인지 아니면 거대한지도 볼 수 있습니다. 수행자는 번개의 특징과 기능과 현시를 한눈에 봅니다. 단지 수행자가 밝음이 번개의 특징이고, 어둠을 몰아내는 것이 그 기능이며, 그 모양이나 윤곽은 현시라고 알 수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동시에 그 모든 것을 봅니다.
같은 방법으로, 마음과 물질의 일어남에 대해서 명상할 때, 수행자는 그 특징과 기능과 현시 모든 것을 압니다. 그것들을 배울 필요 없습니다. 일부 박식한 사람들은 명상하기 전에 그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배우는 것은 단지 개념일 뿐입니다. 실재가 아닙니다. 마음과 물질이 일어나는 것을 주시하는 수행자는 그것을 마치 자신의 손으로 만지고 있는 것처럼 압니다. 그는 그것들을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눈앞에 코끼리가 있을 때, 코끼리의 그림을 볼 필요는 없지요.
배의 일어남과 꺼짐을 명상하고 있는 수행자는 그것이 딱딱한지 말랑말랑한지 압니다. 그것이 특징입니다.
그는 들어가고 나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이 기능입니다. 만약 수행자가 이것들이 실재로 있는 그대로 안다면, 그것들에 대해서 배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자신의 깨달음을 원한다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남에게 설교하려고 한다면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수행자가 오른발, 왼발에 대해서 명상하면서 발걸음마다의 긴장감을 안다면 그것은 특징입니다. 움직임을 안다면 그것은 기능입니다. 그것의 운반함을 알 때 그것이 현시입니다. 이것이 적절한 지혜이며, 올바른 지혜입니다.
자, 지금부터 단지 떠오르는 것을 알아차리기만 하면 어떻게 해서 특징 등등을 수행자가 식별할 수 있는지 스스로 알아보기 위하여, 명상을 해 보십시오. 수행자는 틀림없이 자신의 몸 어디에서인가 뜨거움, 통증, 지루함, 쑤심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참기 어려운 불쾌한 느낌입니다. 수행자의 지성을 이 불쾌함에 집중하고 뜨거움, 뜨거움 혹은 통증, 통증을 주시하십시오. 수행자는 자신이 불쾌한 체험과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 불쾌한 체험을 경험하는 것이 고통의 특징입니다.
이 불쾌한 느낌이 생길 때, 수행자는 기분(spirit)이 저조해 집니다. 불쾌감이 조금밖에 없을 때는 기분이 조금 저조하지만, 많을 때에는 기분도 많이 저조합니다. 불쾌감이 강렬하면 의지력이 강한 사람조차도 기분이 저조하게 될 것입니다. 일단 몹시 피곤해지면, 움직일 수도 없게 됩니다. 이 기분을 저조하게 하는 것이 불쾌감의 기능입니다. 지금 말한 것이 마음의 기분입니다. 마음이 저조하면 마음의 작용[心所]도 또한 저조해 집니다.
불쾌감의 현시는 물질적 나른함입니다. 불쾌감 자체가 물질적 고통으로서, 수행자의 지성에게 참기 어려운 것입니다. 수행자가 뜨거움, 뜨거움, 통증, 통증으로 알아차릴 때, 그것은 수행자에게 몸이 나른하고 참기 아주 힘든 것으로 나타납니다. 심할 때에는 신음이 저절로 나옵니다.
몸에서 불쾌감이 일어날 때 알아차리면, 수행자는 바람직하지 않은 감촉 대상을 알게 되는데 그것이 특징이며, 종합적으로 위축시키는 상태가 기능이며, 물질적 고통이 현시입니다. 이것이 수행자가 지혜를 획득하는 방법입니다.
'經典 > 위빠사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7. 왜 그리고 언제 (0) | 2008.04.02 |
---|---|
6. 마음 (0) | 2008.04.02 |
4. 지혜와 해탈 (0) | 2008.04.02 |
3.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五取蘊, Aggregates] (0) | 2008.04.02 |
2. 선정과 위빠싸나 (0) | 2008.0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