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위빠사나

4. 지혜와 해탈

通達無我法者 2008. 4. 2. 15:08
 

 

 

4. 지혜와 해탈


'위빠싸나 수행은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에 대한 알아차림이다.'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일치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경(經)이라고 하는데 이는 '실'이라는 뜻입니다. 목수가 목재를 대패로 깎거나 톱으로 자르려면 실로 기준선을 긋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경건하게 살려면 '실' 즉 경으로 우리의 행동에 기준선을 그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도덕 훈련을 하며, 집중을 계발해서 지혜를 얻는가에 대한 기준선 즉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기준선을 넘어서 수행자가 하고 싶은 대로 말하거나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를 알아차림에 대해서 경에서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비구들이여, 물질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고통이다. 고통은 실체가 없다. 실체가 없는 것은 내 것이 아니며, 내가 아니고, 나의 자아가 아니다. 이와 같이 올바른 지혜로 있는 그대로 알아야 한다.'

(상윳따 니까야, ii, 19)


수행자는 이 무상 고 무아, 즉 물질은 진정으로 무상하고, 지긋지긋한 고통이며, 자아나 에고가 없다는 것을  깨닫기 위하여 물질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는 마찬가지로 느낌, 지각, 의도와 의식에 대해서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들 오취온을 무상 고 무아로 보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것들을 그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집착하지 않고, 느낌 등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상윳따니까야, iii, 68)


오취온의 본성이 무상하고 고통이며 무아라는 것을 깨달은 수행자는 물질을 혐오하고, 느낌, 지각, 의도와 의식을 혐오합니다.


'집착하지 않음에 의해 그는 현상에 대해 평등심을 갖게 된다.'


다시 말하면 그는 성자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입니다.


'현상에 대해 평등심을 갖음에 의해 그는 해탈된다.'


일단 그가 현상에 대해 평등심을 갖음에 의해 성자의 길로 들어서면, 그는 번뇌로부터 해탈되는 네 가지 과(果, Fruition)에 도달하게 됩니다.


'해탈되면 '내가 해탈됐다'라는 지혜가 나타난다.'


수행자가 해탈될 때, 수행자는 자신이 해탈됐다는 것을 스스로 압니다. 다른 말로 하면, 수행자가 번뇌가 소멸된 아라한이 됐을 때, 번뇌가 소멸됐다는 것을 압니다.


이상은 야다니짜(Yadanicca) 경에서 발췌한 것이며, 이런 종류의 경은 많이 있습니다. 칸다왁가(Khandhavagga) 상윳따는 전부 이런 것들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이 들 중에서 실라완따(Silavanta) 경과 수따완따(Sutavanta) 경이 주목할 만합니다. 이 두 개의 경에서 꼿티까(Kotthika) 존자의 질문에 대해, 사리뿟따 존자가 아주 간단하지만 명쾌하게 대답합니다. 꼿티까 존자가 묻습니다.


'사리뿟따여, 계를 완벽하게 지키는 비구는 어떤 수행을 해야 합니까?'


이 질문에서 '계'의 특성을 주목하십시오. 수행자가 도(道), 과(果)와 닙바나(열반)를 증득하려고 위빠싸나 수행을 실천하려면, 계를 완벽하게 지키는 것이 최소한도의 자격요건입니다. 수행자가 계도 안 지킨다면, 더 높은 조건인 집중과 지혜를 획득할 희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사리뿟따 존자가 대답합니다.


'꼿티까여, 계를 완벽하게 지키는 비구는 오취온을 정확하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오취온을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며, 질병이며, 부스럼이며, 화살이며, 불건전한 것이며, 고통스러운 것이며, 내 것이 아니며, 허무한 것이며, 자아가 없는 것이며, 쇠퇴해 가는 것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면 어떤 이익이 있을까요? 사리뿟따 존자는 계속 대답합니다.


'벗이여, 계를 완벽하게 지키는 비구가 진정으로 오취온을 이렇게 무상하고 등등으로 정확하게 알아차린다면 수다원과를 증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다원이 되어 사악도(四惡道)에 다시는 떨어지고 싶지 않다면, 수행자는 오취온의 무상하고 고통이며 무아인 본성을 깨닫도록 오취온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수행자는 아라한이 될 수 있습니다. 꼿티까 존자는 계속 묻습니다.


'사리뿟따여, 수다원인 비구는 무엇을 정확하게 알아차려야 합니까?'


사리뿟따 존자는 수다원도 마찬가지로 오취온을 무상하고 고통이며 무아라고 정확하게 알아차려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그는 사다함을 향해 나아갑니다. 사다함은 무엇을 알아차려야 할까요? 다시 같은 오취온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면 아나함이 됩니다. 아나함은 무엇을 알아차립니까? 마찬가지로 오취온입니다. 이제 그는 아라한이 됩니다. 아라한은 무엇을 알아차립니까? 또다시 오취온입니다. 여기서 수행자가 심지어는 아라한이 된 다음에도 오취온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아라한이 그렇게 알아차리면 무슨 이익이 있을까요? 벽지불이 될까요? 아니면, 위없는 깨달음을 얻은 붓다(Supreme Buddha)가 될까요? 둘 다 아닙니다. 그는 아라한으로 윤회를 끝내고 반열반(Nibbana)에 듭니다. 아라한에게는 제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번뇌 즉 고요해지지 않은(uncalmed) 번뇌가 없습니다. 모든 번뇌가 제거되고 고요해졌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제거되지 않고 남아 있는 번뇌나 고요해지지 않고 남아 있는 번뇌를 제거하기 위하여 계발해야 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는 완벽하게 하기 위해서 더 계발해야할 계도 집중도 지혜도 없습니다. 완성되어야 할 모든 계와 집중과 지혜를 그는 이미 완성시켰습니다. 그래서 완성되어야 할 것을 완성하기 위해서 일할 필요도 없고, 이미 완성된 것을 강화시킬 필요도 없습니다. 위빠싸나 수행은 아라한에게 그런 이익을 가져다 주지는 않습니다.


아라한이 오취온을 알아차림에 의해서 받는 첫 번째 이익은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알아차리지 않는다면, 아라한임에도 불구하고, 육문(六門, 眼耳鼻舌身意) 중 지금은 여기, 지금은 저기에서 끊임없이 동요(disquiet)와 불안(discomfort)이 생깁니다. 여기서 동요란 정신적 고뇌(distress)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자신과 무관하게 육경(六境, 色聲香味觸法)이 끊임없이 나타나서 마음이 평화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수행에 몰두하고 있는 여러분들도 육경을 만날 때 불편할 것입니다. 선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면, 이런 것을 보고, 저런 것을 듣고, 이런저런 사업상 이야기에 끼어 들게 되어 마음의 평화는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선원으로 다시 오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동요가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단지 나흘, 닷새 혹은 열흘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속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엷어져서 가정생활을 하는 것이 행복하게 생각되어 다시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라한은 과거의 습관으로 되돌아가지 않습니다. 다만 알아차리지 않으면서 여러 가지 육경을 만나면 동요가 생길 뿐입니다. 그가 위빠싸나 수행에 몰두하고 있을 때에만 마음이 평화롭습니다. 그런 식으로 오취온을 알아차림에 의해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게 됩니다.


나아가서, 열심히 알아차리면서 살면, 알아차림과 무상 고 무아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계속 그에게 떠오릅니다. 이것이 또 하나의 이익입니다. 알아차림과 분명한 이해가 지속적으로 떠오르는 아라한을 사따따 위하리(satata-vihaarii.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면서 사는 분)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원할 때는 언제나 과(果)에 도달하여 즐길 수 있습니다. 아라한은, 이 두 가지 이익, 바로 이번 생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과 알아차림과 분명한 이해를 위하여 알아차리면서 살아갑니다.


이상이 사리뿟따 존자가 실라완따 경에서 대답한 것입니다. 수따완따에서도 똑같이 대답합니다. 다른 점은 실라완따와 수따완따라는 용어뿐입니다. 실라완따는 '계를 지키는' 혹은 '덕이 있는'이라는 뜻이며, 수따완따는 '교육받은' 혹은 '박식한'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내용은 모두 똑같습니다. 이 두 경과 다른 오취온에 관한 경을 근거로 해서 다음 격언이 만들어졌습니다.


'위빠싸나 지혜는 오취온을 알아차림으로부터 나온다.'


이제 육문[眼耳鼻舌身意]을 통해서 나타나는 집착으로 되돌아갑시다.


사람들은 볼 때,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변하지 않고, 전부터 존재해 왔고, 지금도 존재하며, 미래에도 존재할 것이며, 항상 존재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복하고, 선량하며,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감촉할 때에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감촉'은 근육과 피가 통하는 온몸에 퍼져 있습니다. 그리고 감촉이 생기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나 집착이 일어납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팔다리를 구부리고 펴고 움직이는 것은 모두 감촉입니다. 배가 일어나고 꺼지는 팽팽한 느낌도 감촉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상세히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보통 사람은 생각 즉 상상할 때 이렇게 생각합니다. '전부터 존재하고 있는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다. 생각하면서 나는 계속 존재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신을 영원한 것이며 자아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또한 생각 즉 상상하는 것은 즐길만한 것이며 아주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해 줘도 그는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보통 사람은 육문에 나타나는 모든 것을 영원한 것이고 행복한 것이고 자아이며 '나'라고 집착합니다. 그는 갈애와 그것에 집착함에 의해 기뻐합니다. 그는 잘못된 견해와 그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착각합니다. 수행자는 집착하거나 움켜쥐기 쉬운 이들 오취온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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