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성철스님 열반송의 의미

通達無我法者 2008. 8. 13. 22:33

성철 스님의 열반송에 대한 질문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해 되는대로 설명을 해 보았습니다. 물론 성철 스님의 뜻이야 성철 스님 당신이 아니면 누구도 정확하게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뜻을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고, 나아가 불교를 비빙하는 근거자료로 삼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서 나름대로의 해석을 덧붙여 보게 되었습니다.

 

生平欺狂男女群(생평기광남녀군)하니
彌天罪業過須彌(미천죄업과수미)라.
活陷阿鼻恨萬端(활함아비한만단)이여
一輪吐紅掛碧山(일륜토홍괘벽산)이로다.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선사(禪師)들의 게송은 말 그대로 선(禪)의 경지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거나 자신의 견해로 마음대로 재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할 것입니다. 선(禪) 게송은 선(禪)의 경지를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통의 상식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평생 동안 남녀무리를 속인 죄가 수미산보다 크다]

 

성철스님뿐만 아니라 선사(禪師)들의 설법이나 선시(禪詩) 또는 게송에 보면 세상 사람들을 속인다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그러면 선사들이 세상사람들을 속인다도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이 다 본래로 부처라고 합니다. 새삼스럽게 무엇을 얻거나 알아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라고 표현합니다. 반야심경에서도 '알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無知亦無得]'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미물곤충까지 모두 불성(佛性)을 본래부터 갖추고 있어서, 깨달음이나 수행을 통해 별도로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원만하고 부족함이 없는 마음자리, 불성(佛性)을 본래부터 두루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피나는 노력과 간절한 수행을 통해 마음을 얻어야 한다고 법문을 하게 되는 상황에 대한 말씀인 것입니다.

 

스스로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원만구족한 마음을 그대로 믿으면 되는데, 그러한 큰 믿음을 내지 못하고 밖으로 마음을 찾아 나서고 있는 중생(衆生)들에게 다시 한 번 자기 자신을 되돌이켜 본성(本性)을 보도록 채근하는 구절인 것입니다. 마음을 먼데서 찾지 말고 회광반조(廻光返照)하라는 당부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 공부인(工夫人)의 자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한 선사들은 '마음이 바로 부처다', '참자기를 깨달아라', '마음이 어떻게 생긴 물건인줄 알아야 한다', '마음을 내놔 봐라', '뭐라고 말할 수 없는 한 물건[일물(一物)]이 있다', '주인공을 찾아라'라고 합니다. 그러나 육조대사께서는 "본래 한 물건도 없다."라고 했습니다. 찾아서 정체를 밝혀낼 마음이라는 것이 무슨 물건처럼 따로 있는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부를 시작하는 학인(學人)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분명하니 마음의 정체를 밝혀야만 하는 것이고, 그러자니 마음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 마음이란게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는 물건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찾아 나서야 찾을 수 있는 것이겠지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는데 마음이란 것이 저절로 찾아질 수 없는 것일테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온갖 노력과 수행을 통해 마음을 찾아 놓고 보니, 그 마음이란게 본래로 한 물건도 없는 것이고 새삼스럽게 찾았다거나 무엇을 얻었다거나 할만한 것이 아니더라는 것이지요. 본래부터 자기가 매일 같이 살아오던 그대로일 뿐이어서, 다시 더하고 뺄 것이 없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선사들은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잔다", "땔감을 하고 물을 길어 나르는 것이 신통이고 묘한 작용이다", "차나 마시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선지식(善知識)이 마음을 깨닫지 못한 학인(學人)들에게 공부(工夫)를 채근하는 이러한 모습을 ‘멀쩡한 사람을 속인다’거나 ‘평지에 풍파를 일으킨다’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 말씀 자체도 깨달음에 대한 큰 힌트가 숨어있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선가(禪家)에는 역설적인 표현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곰곰이 음미할수록 살아 움직이는 활달함과 역동성 그리고 무한한 자유를 느낄 수 있는 표현임을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다음에 나오는 대목도 바로 그러합니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해는 밝게 빛나며 푸른 산 위에 떠 있다]

 

눈 밝은 이는 무간지옥에 떨어지더라도 반드시 산채로 떨어지는 법입니다. 어떠한 경계가 닥쳐오더라도 피하지 않고 온 몸을 그대로 내맡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떤 것을 만나더라도 조금도 동요(動搖)하지 않게 되는 것이니, 한(恨)이 천만갈래나 되는 듯 하지만 화로불에 떨어진 눈과 같고, 밝은 태양아래 드러난 이슬과 같아서 조금도 걸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거울에 그 어떤 그림자가 비추어지더라도 거울에 얼룩이지거나 깨지거나 하지 않듯이, 크게 둥근 거울같은 마음을 요달(了達)한 사람은 그 어떤 것을 만나더라도 본래의 마음자리를 잃지 않게 되어, 푸른 산 위에 붉은 해가 항상 떠 있어서 밝음이 없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마음은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는다. 불성(佛性)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합니다. 육체적인 죽음은 불성(佛性) 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불성(佛性)은 태어남도 멸함도, 늘어나거나 줄어들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불생불멸의 마음을 깨달은 사람에게는 죽음도 없을진대, 지옥과 극락이 따로 있겠습니까?

 

마음과 마음의 작용을 잘 아는 사람은 진정한 자유로움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온갖 작용 속에서 본체를 잃지 않고, 또한 본체를 고집하지 않고 인연에 따라 한없는 작용을 펼친다는 것입니다.

 

의상대사의 법성게(法性偈)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참성품은 깊고깊어 지극히 미묘하여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자기 성품 고집 않고 인연따라 나투우네.

 

참 성품은 말로 다 할 수 없고 모든 것을 떠나 있지만, 그러한 성품에 머무르지 않고 인연에 따라 온갖 작용을 이루어 나간다는 뜻입니다.

 

또한 진리의 실상을 안 사람에게는 중생이 그대로 부처이고, 지옥이 그대로 극락일 것입니다. 증도가에 보면, '어리석은 중생의 마음이 바로 부처의 마음이고 허깨비 같이 공한 육신이 바로 진리의 몸이다 [無明實性 卽佛性  幻化空身 卽法身]'라는 말이 나옵니다. 깨달음의 분상에서 보면 지옥, 극락, 중생, 부처와 같은 이분법적인 분별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니, 이러한 것을 무분별지(無分別智)라고 합니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진다는 구절은 모든 구속과 장애에서 벗어난 대자유인의 여유가 그대로 나타나는 참으로 멋진 표현입니다. 이 정도의 기상이 없다면 어떻게 참다운 자유와 해탈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깨달음을 통해 언제 어디서라도 당당하게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니, 이것을 임제선사께서는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어디서든 주인이 되고, 서는 곳마다 모두 진리다'라는 뜻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스스로 지옥에 가기를 소원할 정도로 모든 분별심을 타파하고 진정한 자유자재를 얻었는지 항상 점검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도 이참에 불자로서 수미산보다 수 만배 큰 죄를 짓고, 뜨거운 불길과 예리한 칼날이 난무하는 도산지옥과 화탕지옥으로 한시 바삐 들어가고자 하는 큰 서원을 세워봅니다.


본래 부처인 중생이 다시 스스로를 돌이키는 것은
평지에 풍파를 일으킴이요, 세상사람들을 크게 속임이다

 

지옥과 극락의 분별마저 타파한 진정한 대자유인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지옥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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