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한문 고전을 읽혀 보면,
학생들이 도무지 ‘번역본’을 읽을 수 없다고 불평입니다.
유교 경전이나 불경이나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일본어 역본이나 중국어 역본,
그리고 영어 번역본을 던져 주어보게 합니다.
제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중국어 역본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말 번역투와 별로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본어 역본은 구절구절의 ‘주석’이 상세하고,
문장의 ‘구조’를 뚜렷이 알게 해 주며,
적절한 ‘맥락’과 ‘배경’을 보여 주어 크게 도움이 됩니다.
그럼에도 정작 문장의 ‘의미’ 자체에 대해서는 좀 미흡합니다.
이 점에서 영어 번역본이 단연 탁월합니다.
학생들은 대부분 이 번역본들을 통해,
해당 ‘문장’의 의미를,
적어도 애매한 구석 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일반인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은 영어가 한문보다 더 가깝습니다
이 말은 영어권의 학자들이 특별히 학문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뛰어나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인접성’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어가 한문이나 중국어보다 더 우리말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지금 ‘우리가 쓰는 말’은 한문이나 중국어보다,
그리고 우리네 조상들이 19세기 이전까지 오랫동안 써오던 말보다 훨씬 더, 영어에 가깝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학생들이 전통식 훈고나 언해보다도 영어 번역이 ‘이해’하기 쉽다고 말들 하는 것입니다.
우리말은 19세기 후반에 근본적 변화를 겪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쓰는 말과 글은 이전의 한자어나 우리 고유어가 아니라,
일본이 서구의 근대적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새로 창안한 ‘번안어’들과 거기 걸맞는 ‘어법’을 주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믿기지 않는다고 하실 분들이 많겠습니다.
지금 당장 신문의 기사나 칼럼,
학교의 교과서 한 꼭지를 펼쳐 보십시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제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의 단락에서부터 그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기’ ‘후반’ ‘근본적’ ‘변화’ ‘이전’ ‘고유’ ‘서구’ ‘근대적’ ‘문물’ ‘창안’ ‘번안어’ ‘어법’ ‘형성’ ‘신문’ ‘기사’ ‘컬럼’ ‘학교’ ‘교과서’ ‘단락’ ‘점’ ‘확인’….
이 말들은 한자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전통적으로 쓰던 한자말이 전혀 아닙니다.
원효나 지눌, 퇴계나 율곡에게 이 한자어를 들이댄다면,
다들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혀를 끌끌 찰 것입니다.
그들은 이들 한자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한자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전통 한자가 아닌 근대적 ‘신조어’들을 통해 대화하고 소통하고 있습니다.
위의 말은 거의 의미의 손실 없이 서구어로 대치할 수 있습니다.
아니 이 말들이 원래 서구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겼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위의 말들을 영어로 대치하면 이렇습니다.
century, latter, fundamental, change, earlier, unique, western, modern, civilization, creation… etc.
한문공부를 하시는 분 가운데는 위의 목록에서 가령 ‘고유(固有)’라는 한자어를 끌어내 이 말이 <맹자>에서 쓰이고 있다고 반론을 제기할 지도 모릅니다.
분명히 이 말은 맹자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쓴 개념입니다.
그러나 그때의 의미는 ‘본질적인’이라는 뜻이지,
‘독특한’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옛적 한자어 가운데 상당수가 현대적 번안어로 재활용되기는 했지만,
그 둘 사이에는 간과할 수 없는 의미의 편차가 있습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용법의 차이를 넘어,
전통과 현대 사이의,
동양과 서양 사이의 서로 다른 세계관과 엇갈리는 가치관까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연(自然)이 세계관의 차이를,
권리(權利)가 엇갈리는 가치관을 보여주는데,
이 문제 또한 본격 논할 자리가 있을 것입니다.
달라진 언어를 혁명적으로 수용해야
아무튼, 분명한 것은 우리는 지금 옛 적의 한문과는 ‘완전히 다른’ 언어를 통해 대화하고 소통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옛적 한문은 지금 영어보다 훨씬 낯설고 이질적인,
흡사 그리스어나 이집트어 같은 ‘외국어’가 되었습니다.
이 점을 정말 깊이깊이 새겨야 합니다.
이 추세를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선지식들이여, 이렇게 ‘달라진 언어’를 전폭 수용하는 혁명적 자세를 가져 주십시오.
불교 한문을 그대로 들이대면 대중들은 전혀 알아듣지 못합니다.
의미를 몰라도 자꾸 듣다 보면 익숙해지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것을 이해했다고는 못합니다.
어림하니 짐작은 하겠지만,
그게 진정 무슨 뜻인지,
물어보면 그만 아득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는 그 말의 피와 살을 맛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더구나 뼈와 골수는 결코 장악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장악이 안 되고 겉도는 사이에,
불교가 대중들로부터 멀어지고,
그 빈 자리에 이방인 포교사들의 목소리가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 포교사들의 성공신화,
그 비결을 한국불교가 벤치마킹해야 합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그 비결은 그들의 수행력에 있다기보다 그들이 쓰는 ‘언어’의 프리미엄에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우리가 쓰는 말에 가까운 ‘영어’를 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일상의 체험’ 위에서 정직하게 설파하고 있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게 그들의 인기와 호소력의 비밀입니다.
제가 지금 사대주의적 발상으로 영어와 외국인을 찬미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당대의 언어에 철저했던 육조 혜능
육조 혜능이 선의 실질적 창시자가 될 수 있었던 비결도 저는 그 ‘당대의 소통’에서 찾습니다.
주변의 선지식들이,
삼장법사 현장처럼,
다들 인도의 원전에 조회하고,
전통적 학문 언어를 고집하고 있을 때,
그는 이 인습을 과감히 탈피하여,
자신의 체험으로, 당대의 대중들과 현장에서 소통해 나갔습니다.
<육조단경>을 펼쳐 보십시오.
그 언어는 우리가 경전이나 논소에서 보던 언어와는 완전히 다른,
가히 파격적인 구어를 쓰고 있습니다.
촌스럽지요. 거칠고. 그러나 얼마나 생생한 육성입니까.
그의 <금강경> 해설은 자신의 체험을 당대의 대중들에게 분명히 전달하고,
그들을 진리에의 길로 이끌겠다는 간절한 노파심으로 사무쳐 있습니다.
그의 <금강경> 해석이 구결(口訣)의 이름을 달고 있는 것을 예사로 보아 넘겨서는 안 됩니다.
그는 일자무식(一字無識)이었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통적 불교에 익숙한 전문가들의 안목에서 볼 때 그렇습니다.
혜능의 이런 과격한 탈전통이 없었다면 중국불교는 없었을 것입니다.
선의 그 화려한 개화 또한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의 우리 또한 혜능의 그 방편(方便)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은 혜능의 언어와 저작을 오랜 전통으로 묵수하는데 있지 않고,
혜능이 그랬듯이 우리 또한 자신의 체험에 입각하여,
지금 소통되는 당대의 현장 언어에 철저해 나가겠다는 서원에서 출발합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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