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금강경(金剛經)

한형조교수/11강/‘반야’를 그대로 쓸까, ‘지혜’로 번역해서 쓸까

通達無我法者 2008. 8. 15. 21:20

 

서양 개떡’에서 ‘피자’로

‘번역’은 문명사적 교류와 창조의 과정에서 넘지 않으면 안 될 산입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들어설 때 우리 또한 그 문제적 상황에 부닥쳤는데,

그 고민과 해결을 아쉽게도(?) 일본이 대신 해주는 바람에,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주도적 권리를 잃고 말았습니다.

일본은 18·19세기에 걸쳐 서구문명과 문물을 이해하고 수용하기 위해 번역청을 설치하여 대규모 인력을 투입했습니다.

그 어휘들은 지금 우리가 쓰는 한자말의 적어도 80% 이상을 상회하고 있고,

전통식 개념이지만 의미가 달라진 것들을 포함하면 이 신조어들은 거의 90%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두 언어체계를 구분해 주는 사전이 없습니다.
지금도 다들 “한자면 한자지, 뭐, 다를 것이 있겠노?”라고 하시지,

전통식 한자와 근대식 한자 사이에 깊은 심연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계십니다.


아마도 불교든 유교든,

동양철학을 하시는 분들의 글을 읽기가 버겁고 힘들다고 느끼신 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 근본 이유는 이렇게 서로 다른 언어체계가 구분 없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수많은 난해함과 모호함, 그리고 오해가 빚어졌습니다.

그렇게 소통이 아니 되는 마당에 유효한 설득이나 학문적 축적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대안은 이 두 언어체계를 분명히 갈라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현대의 언어체계를 존중하고,

전통한문 용어와 어법들을 과감하게 ‘해석’하는 용기와 결단력부터 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나 전문가들은 이렇게 달라진 언어를 전폭, 조건 없이 수용해 주어야 합니다.

길은 돌아갈 수 없으니까요.

일반인들이 말을 못 알아듣겠다면,

그 책임은 대부분 동양철학을 하시는 분들의 책임이라는 말이지요.

제가 지금 열고 있는 이 강좌도 이 원칙에 충실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통의 개념에서 어법,

문장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해부하여 당대의 언어로 소통할 수 있도록 해 보자는 기염으로 출발했습니다만,

그게 얼마나 달성되고 있는지는 제가 자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야’를 그대로 쓸 것이냐, ‘지혜’로 번역해 쓸 것이냐

‘금강반야’를 설명하다가 또 엇길로 샜습니다.

다시 기침 한번 하고 본 주제로 들어가겠습니다.

금강, 혹은 다이아몬드는 우리가 알듯이 세 가지의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예리하고, 견고하며, 그리고 무지 비쌉니다.

어떤 것도 잘라 버리면서,

그 자신은 어떤 것에도 깨지지 않고,

그리고 결혼 예물이나 보석상에서 보듯이 비싸고 귀하기 그지없습니다.


반야가 바로 이 다이아몬드의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혜능 스님은 다이아몬드의 특성을 오히려 불성 쪽에 귀속시켰지만…)

반야(般若)는 지혜(智慧)입니다.

그러나 반야는 우리가 보통 아는 지혜와는 성격이 다른 어떤 것입니다.

이를테면 반야는 대인관계를 효율적으로 맺거나,

사무를 능숙하게 처리하는 노하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이 반야는 또한, 같은 정신적 지혜라고는 해도,

유교의 일상적 도덕규범이나 도가의 은둔적 자연관조와도 매우 다른 ‘독특한’ 지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갭이 너무 컸기에, 불교는 결국 번역어인 ‘지혜’보다 원어인 ‘반야’를 정착시켰습니다.

아시죠, 반야는 프라즈나(prjna)라는 산스크리트어를 ‘소리 그대로’ 읊어놓은 것입니다.

열반(涅槃)도 마찬가지이지요.

열반은 한자 자체의 뜻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니르바나(nirvana)라는 말을 발음 나는 대로 적어놓은 것일 뿐입니다.

처음에는 물론 니르바나도 무위(無爲)로 번역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노장의 무위(無爲)와 불교의 니르바나 사이에는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너무 크고,

이 차이가 본질적인 것이었기에, 결국 원어인 열반을 그대로 쓰는 쪽으로 낙착되었습니다.


이 과정은 번역의 역사에서 늘 일어나는 일인데요.

언젠가 어느 한국 교포에게서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자기 할머니가 50년 전 미국으로 이민 갔을 때,

‘피자’라는 물건을 보고는 대뜸, ‘서양개떡’이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처음 듣고는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형태로 보면 피자는 오히려 두툼한 개떡보다 오히려 넓적한 ‘빈대떡’에 가깝지요.

그 할머니는 아마도 ‘형태’보다도,

맛도 형편없고 천한 음식이라는 ‘가치’쪽에 무게를 두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 합니다.


격의(格意) 불교의 시대
어쨌거나 처음 번역은 이렇게 낯선 물건의 형태와 속성,

가치 등에 입각해서 ‘근사치’를 제공해 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 전략은 오해를 가급적 줄이면서, 주변에 익숙한 물건을 연상시키는 쪽으로 나갑니다.

불교 또한 이 단계를 거칩니다.

인도의 개념과 역사, 불교의 독특한 사유를 담고 있는 말들을 이방의 중국인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익숙한 말들 가운데 가급적 비슷한 용어를 차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프라즈나는 지혜 니르바나는 무위, 아눗다라삼약삼보디는 무상정등각으로 의역(意譯)되었습니다.

이 시기가 기원 후 불교가 수입되는 것과 더불어 수백 년간 계속되었습니다.

이를 격의(格義)불교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격의란 ‘의미(義)’를 ‘격자화(格子化)’한다는 뜻입니다.

인도불교의 낯설고 분방한 의미들은 이렇게 중국의 이미 존재하는 개념의 격자에 맞추어 구겨 넣어(?)졌습니다.


인도와 중국 사이에 사람들이 왕래하고,

문화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이 격자에서 부당하게 삐쳐 나오고 잘려나간 의미들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습니다.

그 잘려나간 부분이 본질적이라고 생각될 때는 근본적 대책이 필요하다고까지 느끼게 되었습니다.

포괄적이고, 추상의 층위가 높은 것들,

그리고 맥락이 섬세하고 복합적인 개념들이 격자화에 갇히기를 포기하고,

원래의 이름 그대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지혜는 반야로, 무위는 열반으로, 무상정등각은 아뉵다라삼먁삼보리로 제 얼굴을 찾았습니다.

흡사 사람들이 외국에서 피자도 맛보고,

그리고 우리나라 곳곳에도 피자 체인점이 늘어나면서 ‘서양개떡’이나 ‘서양빈대떡’이 사라지고 본래 이름인 ‘피자’가 정착되듯이 말입니다.


아, 이 과정이 무슨 권위 있는 기관에서 강압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표준을 제시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불평 없이 따랐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불교는 대단히 탈권위적인 가르침입니다.

어느 편이든 선택은 역사의 심판에 맡겨졌습니다.

즉, 어떤 이름을 쓸 것이냐는 오랜 세월에 걸친 대중들의 선택에 따라 자연스레 정착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때 두 종류의 번역어들은 서로 경쟁하다가, 한쪽이 완승을 거두거나, 또는 양쪽이 다 살아남기도 했습니다.

혜능 스님은 반야를 해설하면서 “당언(唐言)은 지혜(知慧)”라고 했습니다.

이로 보건대, 혜능 스님 당대만 해도 두 번역어들이 서로 공존 각축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반야는 최종적으로 원어가 승리한 대표적 케이스입니다.

그만큼 이 용어가 불교 전통에서 갖는 의미와 역할이 근본적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