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던진 돌 하나 우주 균형 바꾼다
세계의 총체적 연관에 대한 이해는,
우리를 자아라는 좁은 울타리로부터 벗어나게 해 줍니다.
그래서 모든 사태를 내 호오(好惡)를 기준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라는 잣대로 판단하고 행동해 왔습니다.
이 주관적 왜곡이 남을 불편하게 하고,
공동체의 정의와 안전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연기법(緣起法)과 화엄(華嚴)은 주관적 욕망으로 물든 세계가 아니라,
서로 연관된 객관적 사실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그 성찰과 이해를 통해 우리는 자아의 점착성으로부터 점차 해방되고,
이웃에 대한 관심과 전체에 대한 책임감을 키워갈 것입니다.
해가 기울면 그림자가 사라진다
아, 여기서 처음의 1) 주관적 욕망으로 물든 세계를 변계소집성( 計所執性)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는 앞에서 했습니다.
욕망과 공포가 있어, 없던 환상이 생기고,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연기법과 화엄이 일러주고 있는 2) 서로 연관되어 있는 객관적 사실로서의 세계를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고 부릅니다.
불교의 상식에 익숙한 사람은 제가 지금 삼성(三性),
즉 세계를 보는 불교의 세 가지 시각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실 것입니다.
<금강경>의 마지막 부록에 실린 부대사(傅大師)의 송(頌)을 들어봅시다.
두 번째 의타기성을 두고 읊은 노래입니다.
한문을 어떻게 새기는지부터 보여드릴까요.
“(모든 것이) 남(他)에 의지(依)하고 있어,
스스로(自) 독립(立)해 있는 것은 없다네.
(어떤 사물이나 사태도) 반드시(必),
여러(衆) 인연(緣)을 빌려(假) 이루어(成)진다네.
해(日)가 기울면(謝) 나무(樹)에 그림자(影)가 없어지고,
등불(燈)이 오면(來) 방(室)이 곧(乃) 밟아진다(明).
사물(名)은 여러 계기의 협력(共業)으로 인(因)해 변화(變)하고,
모든 현상(萬象)은 작은 계기(微)들이 쌓여(積) 생긴다네(生),
만약(若) 사물의 진정한(眞) 모습(空色)을 깨닫는다면(悟), 바로 그 순간(?然),
그대는 ‘이름의 고착과 환상(有名)’을 떠나게(去) 될 것이다.”
세상에 홀로 서 있는 것은 없습니다.
모두가 어떤 것에 대해서, 짝을 지어 있습니다.
한문의 사람 인(人)자가 그렇다듯이,
우리는 서로를 의지해서 살고 있습니다.
(이 참에 흥을 깨자면, 이 설명은 후대의 철학적 해석일 뿐입니다.
중국 고대의 갑골문을 보면,
사람 인자는 팔을 늘어뜨린 사람을 옆에서 본 대로 그려놓은 상형자입니다.)
책상 다리도 한 짝이 없으면 무너지고, 그림자는 해가 기울면, 그만 사라질 뿐입니다.
어떤 것도 ‘이것이다’싶게 고정된 것, 그리하여 ‘자성(自性)이라’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자성이란 고유하고, 독립적이며, 변하지 않는 특성을 가진, 좀 어려운 철학용어로 하자면, ‘자기원인적causa sui 실체’를 뜻합니다.)
한 사물이나 사태, 그리고 생명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수많은 계기와 인연들의 협력(共業)이라면,
이 가운데 하나만 변해도 그 사물이나 사태,
그리고 생명은 변화하고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 계기들을 일일이 다 알 수도 없고,
그렇기에 충분히 제어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내 뜻대로 모든 것을 이루리라’라는 기필(期必)을 거두십시오.
세상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 오만과 아만(我慢)을 버려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연기법은 두 가지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1) 하나는 이렇게 우리가 서로 얽혀 있다는 것,
그리하여 내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너무 애면글면하지 마라.”
그리고 그나마 가진 것도 곧 변하고 흩어져,
그토록 애타게 집착할 것도 아니란 것을 보여줍니다.
거기 <금강경>의 마지막 충고가 장엄하게 울립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 꿈같고 신기루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은 것.
이슬처럼 덧없고,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그러나 연기법은 또 다른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이 둘이 합쳐져야 비로소 연기법의 이해가 온전해질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화하자면,
우리는 서로 얽혀 있으므로,
2) 내가 세상에 대해 지는 책임은 무한하다는 좀 억울한(?) 역설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계산이 맞지 않는다고 불평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세상의 진실임을 어떡합니까.
부처님도 바꿀 수 없는 이치를….
나중의 측면을 살펴볼까요.
저번 강의에서 제가 말씀드린 나비 효과(butterfly effect)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나비 효과는 1960년,
미국의 수학자 에드워드 로렌즈가 기상 변화를 수학적으로 계산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입니다.
그는 원시적 진공관 컴퓨터를 이용해서 기상의 장기 예측을 시도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중간 자료를 다시 입력하는 과정에서 소수점 몇 자리 이하를,
대수롭지 않게 버렸더니,
한 시간 후에는 엄청나게 다른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처음 그것이 컴퓨터의 고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주 미세한, 소수점 네 자리 숫자를 버렸을 뿐인데 나타난 결과가 그 정도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초기 조건의 작은 변화에 대해 기상이 이처럼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나비 효과’라고 부릅니다.
“북경에서 나비 하나가 날갯짓을 하면, 다음달엔 미국 동부에 허리케인의 방향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어디 기상뿐입니까.
작은 일상의 사건 하나에서,
커다란 정치적 격변에 이르기까지,
아울러 경제적 제도의 선택과 경기변동에 이르기까지,
작은 변화 변화가 예측 못한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옵니다.
그러니 조심하십시오.
당신의 무심코 떠올린 탁한 생각 하나가 꽃들을 말려죽일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또 스스로 대견해 하십시오.
당신의 미소 하나가 들의 꽃들을 피게 하고 온 세상에 희망을 줄 것입니다.
사랑과 미움은 바이러스처럼,
한 순간에,
집안의 분위기를 물들이고,
직장을 뒤흔들며, 곧 전 우주로 퍼져나갑니다.
시인 정현종이 대학시절에 한 일
저는 시인 정현종의 시보다는 산문을 더 좋아합니다.
오래전 <숨과 꿈>이라는 산문집을 읽다가 감전된 적이 있습니다.
“숲 속에서 새 소리를 듣는다….
그때 이 숲에서 나는 돌 하나를 던진 적이 있다.
숲 위쪽에서 던진 돌은 저 아래 어디엔가 떨어졌다.
돌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지구 무게만한 어떤 느낌이 마치 지진처럼 내 속으로 지나가는 걸 느꼈다.
즉 내가 방금 던진 돌에 의해,
나에 의해 여기서 저기로 옮겨진 돌 하나에 의해 우주의 균형이 달라졌다는 느낌이 그것이었다.
내가 던진 돌 하나가 우주의 균형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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