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금강경(金剛經)

한형조교수/32강/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자유롭게 본다는 것

通達無我法者 2008. 8. 16. 01:47
안아도 안아도 아득한 아내의 허리

우리가 아침저녁으로 듣고 독송하는 <반야심경>은 <금강경>과 더불어 불교의 지혜,

그 핵심이자 정수를 담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초벌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실 제,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함을 통찰하시고,

일체의 고통과 재난으로부터 벗어나셨다.”

너무 익숙한 구절 같겠지만,

이 속에는 수많은 곡절과 최상의 지혜가 들어 있습니다.

이 지혜를 깨달음으로써 우리는 그야말로 일체의 삶의 고통과 재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말에 전율했고,

이 말에 희망의 빛을 발견했습니다.

지금까지의 강의를 따라 오신 분들은 이 지혜의 그림자라도 엿보았을 것입니다.
아직 고개를 갸웃하는 분들을 위해 무딘 혀를 다시 한번 두드려 볼까 합니다.

공(空)과 아원자 세계는 관련이 없다

세계는 공(空), 즉 ‘비어있습니다.’

이 말씀을 자꾸 오해하시는데,

공(空)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물리적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법계(法界)가 여여한데,

그게 왜 없다고들 하십니까.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공(空)이란 자기 이해와 관심의 탈각을 뜻합니다.

공(空)은 세계에 개입하는 주관적 태도, 바로 그것을 문제 삼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제발 공(空)을 이해시키겠다면서 현대물리학의 성과를 끌어들여 아원자 세계의 빈 공간이니 쿼크니 하는 어법을 삼가주셨으면 합니다.

그것은 불교의 의도와는 거리가 먼,

십만 팔천리도 그런 십만 팔천리가 없습니다.

공(空)은 무아(無我)와 동의어라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색(色)과 공(空)이 공존할 수 있습니다.

서로 범주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방해받지 않으면서 나란히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공(空)인 색(色)의 세계란 번역하자면,

자아에 의해 오염되거나 굴절되지 않은,

나아가 인류의 집단적 환상과 편견으로부터 해방된 진정한 세계(法界),

있는 그대로의 세계(眞如)입니다.

그 여여(如如)한 세계는 바로 코앞에 역력히 있기에 누구나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세계만큼 아득히 먼 것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무시이래의 무명(無明),

즉 자기관심의 색안경을 벗어던지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 딜레마가 불교 전체를 수놓고 있는 역설의 진원지입니다.
불도(佛道)는 너무 쉬우면서도, 또 너무나 어렵습니다.

조고각하(照顧脚下),

발뒤꿈치 한번 돌리면 환하게 열리는 소식이지만,

그러나 억겁을 뼈를 깎고 피를 태워도 여전히 아득한 이 소식을 어찌 하오리까.


관견(管見), 대롱으로 보는 세상

관자재보살은 바로 그것을 성취한 사람,

즉 ‘이제는 자유롭게(自在) 사물을 볼(觀) 수 있게 된’분을 뜻합니다.

자유롭게 보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자유롭게 본다는 것은 전망대 위의 망원경처럼 사방팔방을 이리저리 마음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 사물을 볼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관견(管見)이란 말이 적실히 말해 주듯,

우리는 자신의 욕망과 관심이라는 좁은 대롱을 통해서만 사물을 보기 때문에,

우리는 사태의 다른 측면은 물론이고, 전체를 보기는 더욱 더욱 아득합니다.

그래서 전체를 보는 통찰력,

즉 일체지(一切智)는 여래와 부처의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중생들에게 세상은 모두 나(我)의 이미지(相)로만 존재합니다.

우리는 다만 욕망과 관심이라는 색안경을 통해서만 사물을 보고,

자신의 이해관계를 기준으로 사람을 만납니다.

불교는 그 좁은 새장을 벗어나 자유롭게 창공을 날고,

거기서 독수리처럼 세상을 조견(照見)하라는 ‘조감(鳥瞰)의 권고’입니다.

이 조감이 무슨 이득을 주느냐고요.

그 바라봄으로 하여,

오직 그 통찰을 통해서만 인간은 일체의 고통과 번민으로부터 궁극적으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과 만난 적이 없습니다.

비즈니스 상대는 말할 것도 없고,

가장 가깝다는 가족이나 친구도 까마득히 멀어보기 쉽습니다.

시인 고은은 이렇게 읊은 적이 있습니다.
“안아도 안아도 아득한 아내의 허리….”
우리는 바로 앞에 선 사람을 잘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다만 자기 욕망의 투영인 ‘이미지(相)’를 통해 그를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는 나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며,

나를 찬양했거나 모욕했고,

내가 좋아하는 혹은 싫어하는 스타일에, 내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인상에, 습관에,

또 내가 존경하는 지식 혹은 내가 경멸하는 지적 수준에,

내가 샘내는 부귀 혹은 내가 천시하는 가난에,

그리고 무엇보다 내게 득을 준 사람,

혹은 줄 사람 또는 내게 해를 끼친 사람, 혹은 끼칠 사람….

그런 ‘이미지’를 통해서만 상대와 나는 관계를 맺습니다.

아내, 남편, 아이, 이웃, 나라, 지도자나 정치가들,

대상은 달라도, 흡사 카메라가 서로 다른 피사체를 찍듯이,

우리가 사람을 만나는 패턴은 가깝거나 멀거나 꼭 같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나날의 삶의 모습이고,

우리가 늘 불행한 이유입니다.


아내의 손을 잡아주십시오

우리가 염려, 근심 걱정으로 눈멀어 있다면,

우리는 황혼의 저녁이나, 뜰에 핀 꽃,

아내의 젖은 손이나 남편의 어깨 위에 앉은 비듬을 볼 수 없습니다.

20세기 현대 철학을 이끈 하이데거는 인간의 근본 조건을 바로 이 염려(Sorge)에서 찾았습니다.
그는 무시이래 인류의 마음 밑바닥에 깔린 이 불안의 중심을 통찰하고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 인간적 삶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들 이미지들 때문에 우리는 자연과의 생생한 접촉을 잃고,

다른 사람과의 의미 있는 만남을 놓치고 맙니다.

이 공허를 메우기 위해서 우리는 전혀 다른 매체로 도피합니다.
술과 도박이며 외도뿐이 아닙니다.
책과 TV, 극장과 공연장, 미술관으로 가는 발걸음 속에도 그 도피가 은밀히 숨어있을 수 있습니다.

창공을 나는 새의 아름다움을 보고,

또 무엇보다 ‘사람의 얼굴’에서 아름다움을 본다면,

우리는 미술관이나, 애완견에 그토록 몰두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울러 이런 시답잖은 강의를 듣겠다고 귀한 시간을 쪼개 신문이나 붓다뉴스를 들여다보고 있지 않으실 것입니다.
세상이 어렵습니다.

그럴수록 내 욕망과 기대를 통해 아내와 남편,

가족과 친구들을 평가하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이미지(相)를 버리고 실제(法)와 만나십시오.
아내의 젖은 손을 잡아주고, 남편의 지친 어깨에 묻은 비듬을 털어주십시오.

“네가 왜 이런 일을 해 주지 않지?”라는 불평과 기대를 접고, “내가 무슨 위로를 주고,

무슨 힘을 보태 함께 이 어려움을 헤쳐 나갈까”를 생각하십시오.

생각 하나가 우주의 균형을 바꾸고, 불가사의한 기적을 하루아침에 만들어 줍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