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침저녁으로 듣고 독송하는 <반야심경>은 <금강경>과 더불어 불교의 지혜,
그 핵심이자 정수를 담고 있습니다.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초벌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실 제,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함을 통찰하시고,
일체의 고통과 재난으로부터 벗어나셨다.”
너무 익숙한 구절 같겠지만,
이 속에는 수많은 곡절과 최상의 지혜가 들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에 전율했고,
이 말에 희망의 빛을 발견했습니다.
아직 고개를 갸웃하는 분들을 위해 무딘 혀를 다시 한번 두드려 볼까 합니다.
공(空)과 아원자 세계는 관련이 없다
세계는 공(空), 즉 ‘비어있습니다.’
이 말씀을 자꾸 오해하시는데,
공(空)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물리적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법계(法界)가 여여한데,
그게 왜 없다고들 하십니까.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공(空)이란 자기 이해와 관심의 탈각을 뜻합니다.
그러니 제발 공(空)을 이해시키겠다면서 현대물리학의 성과를 끌어들여 아원자 세계의 빈 공간이니 쿼크니 하는 어법을 삼가주셨으면 합니다.
그것은 불교의 의도와는 거리가 먼,
십만 팔천리도 그런 십만 팔천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색(色)과 공(空)이 공존할 수 있습니다.
서로 범주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방해받지 않으면서 나란히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공(空)인 색(色)의 세계란 번역하자면,
자아에 의해 오염되거나 굴절되지 않은,
나아가 인류의 집단적 환상과 편견으로부터 해방된 진정한 세계(法界),
있는 그대로의 세계(眞如)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무시이래의 무명(無明),
즉 자기관심의 색안경을 벗어던지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조고각하(照顧脚下),
발뒤꿈치 한번 돌리면 환하게 열리는 소식이지만,
그러나 억겁을 뼈를 깎고 피를 태워도 여전히 아득한 이 소식을 어찌 하오리까.
관견(管見), 대롱으로 보는 세상
관자재보살은 바로 그것을 성취한 사람,
즉 ‘이제는 자유롭게(自在) 사물을 볼(觀) 수 있게 된’분을 뜻합니다.
관견(管見)이란 말이 적실히 말해 주듯,
우리는 자신의 욕망과 관심이라는 좁은 대롱을 통해서만 사물을 보기 때문에,
우리는 사태의 다른 측면은 물론이고, 전체를 보기는 더욱 더욱 아득합니다.
그래서 전체를 보는 통찰력,
즉 일체지(一切智)는 여래와 부처의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다만 욕망과 관심이라는 색안경을 통해서만 사물을 보고,
자신의 이해관계를 기준으로 사람을 만납니다.
불교는 그 좁은 새장을 벗어나 자유롭게 창공을 날고,
거기서 독수리처럼 세상을 조견(照見)하라는 ‘조감(鳥瞰)의 권고’입니다.
그 바라봄으로 하여,
오직 그 통찰을 통해서만 인간은 일체의 고통과 번민으로부터 궁극적으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비즈니스 상대는 말할 것도 없고,
가장 가깝다는 가족이나 친구도 까마득히 멀어보기 쉽습니다.
“안아도 안아도 아득한 아내의 허리….”
우리는 바로 앞에 선 사람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는 나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며,
나를 찬양했거나 모욕했고,
내가 좋아하는 혹은 싫어하는 스타일에, 내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인상에, 습관에,
또 내가 존경하는 지식 혹은 내가 경멸하는 지적 수준에,
내가 샘내는 부귀 혹은 내가 천시하는 가난에,
그리고 무엇보다 내게 득을 준 사람,
혹은 줄 사람 또는 내게 해를 끼친 사람, 혹은 끼칠 사람….
아내, 남편, 아이, 이웃, 나라, 지도자나 정치가들,
대상은 달라도, 흡사 카메라가 서로 다른 피사체를 찍듯이,
우리가 사람을 만나는 패턴은 가깝거나 멀거나 꼭 같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나날의 삶의 모습이고,
우리가 늘 불행한 이유입니다.
아내의 손을 잡아주십시오
우리가 염려, 근심 걱정으로 눈멀어 있다면,
우리는 황혼의 저녁이나, 뜰에 핀 꽃,
아내의 젖은 손이나 남편의 어깨 위에 앉은 비듬을 볼 수 없습니다.
이들 이미지들 때문에 우리는 자연과의 생생한 접촉을 잃고,
다른 사람과의 의미 있는 만남을 놓치고 맙니다.
창공을 나는 새의 아름다움을 보고,
또 무엇보다 ‘사람의 얼굴’에서 아름다움을 본다면,
우리는 미술관이나, 애완견에 그토록 몰두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이 어렵습니다.
그럴수록 내 욕망과 기대를 통해 아내와 남편,
가족과 친구들을 평가하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네가 왜 이런 일을 해 주지 않지?”라는 불평과 기대를 접고, “내가 무슨 위로를 주고,
무슨 힘을 보태 함께 이 어려움을 헤쳐 나갈까”를 생각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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