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금강경(金剛經)

한형조교수/35강/밥 먹을 때 밥 먹고

通達無我法者 2008. 8. 16. 06:53
 
 
 
누가 밥맛을 안다 하는가

정말이지 밥 먹기 힘듭니다.
세상에 어려운 것이 밥 먹는 일입니다.

도(道)가 차 한 잔에 있듯이,

선의 비밀은 우리가 밥을 제대로 먹게 되는 날,

자연히 얻어질 것입니다.

어느 선사에게 누가 물었습니다.
“스님도 도를 닦고 있습니까?”
“닦고 있지.”
“어떻게 하시는데요?”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잔다.”

“에이, 그거야 아무나 하는 것 아닙니까?

 

도 닦는 게 그런 거라면,

아무나 도를 닦고 있다고 하겠군요.”

“그렇지 않아, 그들은 밥 먹을 때 밥은 안 먹고 이런 저런 잡생각을 하고 있고,

잠잘 때 잠은 안 자고 이런 저런 걱정에 시달리고 있지.”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도가 밥 먹는데 있으니,

우리는 밥 먹는 법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훈련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것을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고,

그것을 배우는 학원이나 도장은 없는 듯합니다.

물론, 밥을 젓가락으로 깨작거리지 말라거나,

반찬을 수석거리지 말고,

소리 내서 씹지 말라는 식탁의 매너는 가르치지만,

정작 그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음식의 도(食道)’는 가르치는 것 같지 않단 말씀입니다.

제가 권하는 비결은 간단한데,

‘음식’보다 ‘몸’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존중하는 것 그것 하나입니다.

이 말에 보충 설명이 필요할 듯합니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겠는데,

우리는 우리 몸을 잘 모릅니다.

모든 문제가 여기에서 생깁니다.
불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니고, 환상이라고 가르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 몸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의 대부분이 착각이나 잘못된 정보로 인한 세뇌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 몸은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자만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자기 몸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들은 대체로 남이 전해준 것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소문은 그만 제쳐두고,

이제 깊은 주의력으로 자신의 몸을 살피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십시오.

자기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다이어트는 저절로 됩니다.
생각보다 어렵지도 않습니다.

다시 유혹하자면,

다이어트의 효과도 뛰어나고 근본적입니다.

이 길은 먹고 싶은 음식을 참아야 하는 고통도 없고,

싫은 운동을 늘 해야 하는 강제도 없습니다.

편하고 쉽게 날씬해지고 건강한 몸매를 유지할 것이니,

다들 솔깃하지 않습니까.

제발 몸을 학대하지 마십시오.

음식을 바꾸고 양을 줄이는 대신에, “음식을 느끼십시오!”

음식의 맛을 느낄 수 있다면 다이어트는 틀림없이 성공합니다.

몸은 음식의 질과 양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그 ‘자연의 지혜’를 마음이 가로막고 혼란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니 음식을 줄일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자신과 싸우는 길입니다.

싸움에는 소모가 따르고, 쉬 피로해지며, 그래서는 오래 지속될 수 없고,

다시 본래의 관성대로 돌아오고 맙니다.


몸은 음식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몸에 전적인 통제권을 주십시오.
몸이 음식을 맛볼 수 있도록 나는 ‘마음’을 비워주어야 합니다.
마음이 차 있다면 음식 맛을 느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김치를 밥이나 접시 위에 집어놓고,

그걸 까마득히 잊고는 다시 다른 김치를 젓가락으로 집어온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속담에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쁜 다른 일이 있거나,

고민해야 할 일이 신경 쓰이거나,

선을 보는 자리거나,

상사나 어려운 분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 음식 맛을 느끼기 힘듭니다.

상념이 음식을 떠나 다른 곳을 헤매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교 경전인 <대학(大學)>에도 그런 경구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음식을 먹지만, 음식 맛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예컨대 가십에 열중하거나, 남을 비난하거나, 두고 온 일을 걱정하거나,

쓸데없는 논쟁에 마음을 빼앗기면 한 순간 이 자각의 끈은 어둠 속으로 홀연히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는 음식을 느낄 수 없고,

마음 또한 그에 따라 혼란하고 탁해집니다.

이렇게 상념이 몸을 가로막고 있어서는 소화가 잘 될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나날이 먹는 음식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습니다.

이 분리를 넘어 음식맛과 조우할 때,

그때가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만나는 순간입니다.

다이어트 또한 그 속에 있습니다.

이 자각과 유념의 끈을 붙들고 있으면,

몸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필요로 하는 이상으로 음식을 탐하지 않게 됩니다.

배가 고픈 것을 알게 되는 행복을 맛볼 수 있게 되고,

일주일 정도면 뱃살이 줄어들고 몸이 가벼워 자연스럽게 기지개를 켜거나,

권투 선수처럼 주먹을 슉슉 뻗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장담합니다.
음식 맛을 느낄 수 있으면 도 또한 멀지 않습니다.
불교가 노리는 최상승의 경지를 저는 이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식의 도(食道)에 이르는 것을 방해하는 두 가지 장애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게 뭐 그리 대단하냐는 의심입니다.
이 의심을 제거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길을 나서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 말을 아니 믿어도 좋으니 앞의 선사의 말씀은 간곡히 들어주어야 한다.
“도는 밥 먹는데 있다.”

밥을 먹기 위한 준비
두 번째 장애는 그것을 믿는다 하여도 거기 도달하기가 또한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우기가 어디 쉬운 일입니까.
천하에 어려운 일이 이 일입니다.
여기 또 의심이 가로막습니다.

그 동안 마음은 채우는 것이지,

비우는 것이 아니라고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비우면 큰 일 나는 줄 알고 있습니다.
멍청하다고 놀림을 받거나,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까 싶어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온갖 정보를 머리에 쓸어 넣고,

상대방의 의도를 거꾸로 재며,

제 욕심을 채우려 잔머리를 굴립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험한 세상, 뒤처지거나 도태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정은 정반대입니다.

마음을 비울 때 심신은 가뜬하고,

지각은 더 민감해지며,

지식에 대한 흡수력도 훨씬 증강됩니다.

마음을 비우면,

밖에서 오는 사물의 영향력이 줄어들어 스트레스를 견디기가 훨씬 수월해지며,

지금 만나는 사람들을 훨씬 느긋하게 대할 수 있고,

그로부터 받은 심리적 상처에도 훨씬 관용적이게 되어 인간관계도 좋아집니다.

그런 사람 주변에는 사람이 모이고 따릅니다.
누구나 심리적 여유가 있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승진을 하고 장사를 잘 하기 위한 전략(?)으로서라도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이는 역설이지만 진실입니다.

노자가 말했듯이,

“진실은 늘 상식과 어긋나 보이는 법(正言若反)”이고,

“진정 똑똑한 사람은 어리석어 보이는 법(大巧若拙)”입니다.

그래도 아니 믿을 사람이 많겠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마음을 비우느냐인데….

다른 것은 그만 두고,

위에서 적은 것 하나만 기억해주기를 바랍니다.

요컨대 밥을 제대로 먹을 것,

몸이 밥을 느끼도록 해 줄 것,

그것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마음의 불순물을 제발 좀 걷어내 줍시사 하는 것 하나입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 붓다뉴스 http://news.buddhapi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