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금강경(金剛經)

한형조교수/47강/봉황의 안목, 송사리의 물차기

通達無我法者 2008. 8. 21. 13:27

 

 

 

가깝게 보이는 산, 그러나 길은 험하다

말이 난 김에, ‘불교와 주자학’을 본격 짚어나가려 했는데, 가던 길이 있어 우선 접습니다.
저번에 원효 스님의 <진역 화엄경소>를 두 번째 단락까지 살피다가, 엉뚱한 데로 튀었지요.
오늘은 그 자리를 이어 세 번째 단락을 짚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원효 ‘진역 화엄경소’의 세 번째 단락

“(3) 그렇지만 저 문(彼門)에 기대 이 일(此事)을 보게 되면,

하루에 세 번 문을 나서는 것같고,

열 사람이 방안에 앉은 듯 덤덤한 세계이니,

무엇 기특한 일이 있겠는가.

하물며 수미산을 겨자씨에 넣는 일이 쌀알들을 큰 창고에 들이는 듯하고,

방 안에 여러 사람 들어차는 것이 넓은 우주가 만물을 포용하듯 힘들지 않고 무난하다.

어디 어려움이 있겠는가.”

“이는 봉황이 푸른 구름을 타고 올라 산악의 낮음을 바라봄과 같고,

하백이 한바다에 이르러 시내 황하가 좁았음을 겸연쩍어 하는 것과 같으니,

배우는 자는 이 경전의 너른 문에 들어서야 비로소 지금까지 배운 것이 악착했음을 알리라.”

“그렇지만 날개 짧은 작은 새는 산림에 의지해서 크고 있고,

송사리처럼 작은 물고기는 여울에 살면서도 본성에 편안한 법이니,

천근한 방편의 가르침이라 하여 내버릴 수 없다.”

저번 두 번째 단락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우리가 꿈에 그리는 그 법계는 시간을 적용할 수 없고,

공간도 특칭화할 수 없는 세계이다.

거기서는 움직임도 고요도 없다.

먼지 하나에도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이지만,

또 태허로도 다 감싸 안을 수 없는 규모이다.

법계에는 시간이 없으므로 생사가 없고,

공간이 없으므로 나와 남이 구분되지 않는다.

그런 불가사의한 곳을 짐작할 수 있겠느냐.”
이 불교적 유토피아 앞에서 우리는 그만 까마득해집니다.
어디 머리 들이밀고 손을 댈 수 있을 것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화엄은 우리가 전혀 꿈꿀 수 없는 이 불가사의한 법계가 기실은 아주 가까이 있다고 말합니다.

지금 살피는 세 번째 단락은 그 역설을 설파하고 있는 중입니다.

“저 문에 기대 이 일을 보게 되면”,

즉 법계(法界)와 연관하여 이 사바를 볼작시면,

이 불가사의한 법계는 엄연히 공간과 시간의 일상적 질서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역설이 가능할까요.

어째서 우리의 일상적 세계가 무장무애(無障無石疑),

즉 아무런 장애도 훈련도 교정도 타파도 없이,

곧 불가사의한 법계와 동등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이 화엄의 화두를 타파해야 일대사를 마칠 수 있습니다.

화엄, 부수고 다시 세우는 세상
그 소식을 무딘 붓으로 그리자면 이렇습니다.

앞에서 누누이 적은 대로,

세상은 우리가 보는 바에 따라 포획되고 레테르가 붙여지며,

그런 점에서는 극히 주관적입니다.

변계소집(遍計所執), 인간의 의식적 가치판단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행해집니다.

그 무의식 바닥에 있는 이 극히 주관적 판단의 뿌리를 찾아,

그것을 제거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그 뿌리는 우리의 생존을 유지하려는 뿌리깊은 생물학적 욕망에 닿아 있습니다.

살아있는 한 그 뿌리를 제거하기는 어렵지요.

그러나, 제거한다면,

그동안 생존의 욕망 위에 구획되어 있던 전 가치판단의 지도(地圖)가 바뀔 것임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거창하게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남다른 삶의 굴곡을 겪으면서 전혀 다른 가치 정향을 갖게 된 사람들의 감동적인 얘기를 우리는 심심치 않게 듣고 있습니다.

화엄은 바로 이 소식을 전하고자 합니다.

내가 살아온 길,

내가 그려놓은 그동안의 가치 지도는 실상(實相)이 아니었다는 것,

그 타파(破)를 지금 앞부분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를 벗어나면,

온 세상은 있는 그대로 평화롭습니다.

시간과 공간,

움직임과 고요함,

좋고 싫음에,

나고 죽음이나,

또 너니 나니,

그리고 하나와 여럿의 제 구분들이야,

우리 각자의 뿌리 깊은 욕망의 의식 무의식적 흔적들이고 자식들입니다.

이들을 한꺼번에 쓸어내야 화엄의 자리,

법계의 실상을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부순 다음에는 세워야(立)겠지요.

그 주관적 가치의식이 깨어지고 깨어져나가도,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시냇물은 흘러가고,

창밖에 차소리는 들리며,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또 들으며,

화를 내고 웃으며,

또 협상도 하고 협박도 하며,

사기도 치고 구걸도 하는 이 인간만사의 세상일들이 그대로 여여(如如)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혼란스럽고 적대적이었던 그 세계는 그러나 법들의 질서,

즉 연기법(緣起法) 위에서 유유히 흘러가고 있는 거대한 강같은 것입니다.

거기 아무런 무질서나 혼돈이 없습니다.
세상이 혼란스럽고 개판이라는 생각은 혹시 그 세상이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탓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까.

봉황, 높새 바람을 견디는 안목
화엄의 경지는 세상을,

운명을 전폭 수긍할 수 있는 용기와 통찰력을 갖춘 사람에게 예외적으로 열려있는 안목입니다.

당연 쉽지 않습니다.
자신의 좁은 욕망과 편견으로 세상을 보지 않게 되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그 누구입니까.

그런 사람이 혹 있다고 해도,

그는 그것을 자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그 경지는 높은 만큼,

더 강한 바람과 유혹 앞에서 흔들리기 쉬운 것입니다.

화엄은 사물을 절대적 무차별의 경지에서 바라보라고 가르칩니다.
이 경지는 지극히 높아 그만큼 어렵습니다.
원효는 이를 “봉황이 구름을 타고 올라 나트막한 산들을 내려다보는 것과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백이 큰 바다에 이르러 시냇물(?) 황하가 좁았음을 겸연쩍어 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입니다.
“배우는 자는 이 경전의 너른 문에 들어서야 비로소 지금까지 배운 것이 악착했음을 알리라.”
그 동안은 어쩌했습니까.

불교는 소승에서부터, 사성제니 팔정도니 하여,

나 자신의 작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런 저런 이론도 세우고,

수련의 지침들도 만들어 사람들을 가르쳐왔지 않습니까.

화엄은 이 모든 작은 노력들이 글쎄,

좀 짜잘하고 좀스럽다고 흉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위대한 것은 원효의 다음 말입니다.

화엄의 원만 돈교(圓滿 頓敎)만이 아니라,

팔만의 크고 작은 가르침과 수행법들이 다들 귀하고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날개짧은 작은 새는 산림에 의지해서 크고 있고,

송사리처럼 작은 물고기는 여울에 살면서도 본성에 편안한 법이니,

천근한 방편의 가르침이라 하여 내버릴 수 없다!”

나는 이 말에 목이 메입니다.

갈 곳은 멀고 높지만,

우리는 아주 작은 걸음부터 천천히 이 험한 계단을 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흡사,

아주 가까이 보이는 산이지만,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먼 길을 힘겹게 걸어야 하는 산행과 같은 것입니다.

부디,

낮고 짜잘한 가르침이라고 하여 버리지 마십시오.

진짜는 그곳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