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금강경(金剛經)

한형조교수/49강/돈교(頓敎)의 법문(法門)이란 무엇인가

通達無我法者 2008. 8. 21. 16:21

 

 

 

돈오란 깨달음의 ‘특성’ 알려주는 말

<진역 화엄경소>의 마지막 단락을 보겠습니다.

오늘은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총섭(總攝)하는 일구인 돈교법문(頓敎法門)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4) “지금 이 경(經)은 원만무상(圓滿無上)의 돈교법문(頓敎法門)이라,

법계법문을 널리 열어 무변의 행덕(行德)을 현시한다.

행덕을 거리낌 없이 내보여도 계단이 있는 까닭에 가히 닦을 수 있고,

법문이 끝이 없으나 열어도 모두 부합하는 까닭에 가히 나아갈 수 있다.”

 

“그 문에 초입(超入)한 사람은 들어섬이 없기 때문에, 들어서지 않음이 없다.

이 덕(德)을 닦는 사람은 얻음이 없기 때문에 얻지 않음도 없다.

삼현십성(三賢十聖)이 이에서 행함에 두루하지 않음이 없고,

삼신시불(三身十佛)이 구비치 않은 덕이 없으니 (화엄경의) 그 문장이 밝게 빛나고 그 뜻이 넓고 무궁함을 무슨 말로 칭탄하랴.”


(5) “대방광불화엄(大方廣佛華嚴)이란 이름은,

법계가 무한하기에 대방광(大方廣)이요,

행덕이 끝이 없으므로 불화엄(佛華嚴)이다.

대방이 아니면 불화를 넓힐 수 없고,

불화가 아니면 대방을 장엄할 수 없다.

이래서 방(方)과 화(華)의 뜻을 함께 들어 그 광엄(廣嚴)의 종(宗)을 드러냈다.”


“이른바 경(經)이란,

원만 법륜이 시방에 두루 들리고,

무여(無餘) 세계의 삼세를 두루 전하니 끝없는 유정(有情)들의 지극한 궤도요 최종적 진리라,

그래서 ‘길(徑)’이라 부른다.

이 취지를 들어,

제목에 걸었으니,

고로, 대방광불화엄경이라 한다.”



선의 래디칼리즘

선(禪)은 불교의 궁극이 결국 깨달음이라는 것,

그것을 제외한 어떤 수식도 변명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근본주의정신,

요즘 말로 래디칼리즘에 철저했습니다.

‘선’ 하면 떠오르는 고의적인 기행과 과격한 교육방식도 이같은 지향의 부산물로 알아주셔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 파격이 본질은 아닙니다.

얼마든지 온건하게 차근차근한 방식으로 법을 가르치고 거래할 수 있습니다.

이즈음의 시절과 근기로는 후자의 방식이 더욱 절실하고 효율적일 것입니다.


각설하고,

선이 대결하고자 했던 상대는 ‘대승의 번쇄 치밀한 교학’과,

‘정토의 의타적 기복의식’이었습니다.

교학에 대한 대결의식은 “문자에 의지하지 아니하고(不立文字, 敎外別傳) 마음의 본질을 곧바로 드러내어(直指人心) 궁극적인 깨달음을 열겠다(見性成佛)”는 캐치프레이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선의 정신을 간명하게 정식화한 ‘돈오점수(頓悟漸修)’는 교학도 교학이지만,

특히나 정토를 의식하고 제창된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정토는 자신의 내적 가능성보다 타율적 구원에 의존해 왔습니다.

그 전통은 “나는 하잘것없는 중생이다.

저 너머 정토에 계시는 무한한 힘의 부처들이 나를 이 비참한 사바의 고통에서 건져 주시러 오실 것이다”라고 철석같이 믿고,

일구월심 서방을 향해 간절하게 기구합니다.


저는 정토가 위대한 깨달음을 위한 하심(下心),

혹은 헌신의 위대한 위의(威儀)임을 믿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뿐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궁극적 깨달음은 경전을 모래로 세거나,

서방정토에 자신을 맡기는 것을 넘어서,

스스로 큰 경지를 이루겠다는 발심과,

그에 걸맞는 바른 수행의 길을 걸어야만 기약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역사는 그 근본정신을 너무 오랫동안 망각해 왔습니다.

선은 이처럼 교학에 치이고 정토에 소외된 대중들의 무기력을 충격적으로 일깨우려 합니다.

그것은 흡사 죽어가는 자에게 마지막으로 쓴다는 용천혈의 대침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대침이 바로 돈오(頓悟)입니다.



선의 돈오는 곧 화엄 법계의 소식

돈오가 무엇이냐에 대해 분분한 논의가 있어 왔습니다.

절집에서는 돈오를 ‘몰록 깨침’이라고들 합니다.

이 말에서 연상되듯이,

다들 돈오를 ‘깨달음에 걸리는 시간’과 연관해서 읽고 있습니다.

즉 돈오란 깨달음이 단번에 한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같은 해석이 수많은 오해를 불러왔다고 생각합니다.


돈오의 돈(頓)이란 깨달음에 이르는 ‘기간(span)’의 장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교가 말하는 궁극적 깨달음의 ‘특성(nature)’을 알려주고 있는 말입니다.

이 대목을 유의해 보셔야 합니다.

돈오란 다시 말하면 깨달음이라는 사건이 문득,

아주 짧은 시간에 일어난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화엄이 설파하듯 깨달음이란 원래 오고감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입니다.

즉, 돈(頓)이란,

“깨달음은 이미 여기 와 있다!”는 것,

그러므로 찾거나 이루거나 하는 ‘시간’과 ‘점차(漸)’로 더듬지 말라는 것을 일깨우는 말입니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원효는 초시간적 사건으로서의 법(法)의 세계가 “크지도 작지도 않으며,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으며, 움직이는 것도 멈추는 것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고 또 여럿인 것도 아니다”라고 설파했습니다.

이 기준에 따르면, 여기서 말하는 ‘사건’이라거나 ‘깨달음’이란 말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이 말들은 시간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궁극의 깨달음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누누이 얘기했듯이,

시간이란 차이와 구분에서 탄생하는 바,

그 간격을 여읜 영원의 본지풍광(本地風光)에서는 번뇌(煩惱)와 보리(菩提) 사이의 거리가 어느새 지워져 있습니다.

얼시구,

거기서는 허망이 곧 진실이라 부처(聖)와 범부(凡) 사이에 아무런 차별이 없고,

일상(日常)이 곧 성사(聖事)라 닦을 것도 깨달을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이승(二乘) 사과(四果)의 점차(漸次)와 계제(階梯)가 빛을 잃고 맙니다.

돈오(頓悟)란 바로 이 본분사(本分事)의 역설을 알리자는 것이니,

여기 서서야 원효의 다음 말이 어름하니 집혀올 것입니다.


“그 문에 초입(超入)한 사람은 들어섬이 없기 때문에, 들어서지 않음이 없다.

이 덕(德)을 닦는 사람은 얻음이 없기 때문에 얻지 않음도 없다.

삼현십성(三賢十聖)이 이에서 행함에 두루하지 않음이 없고,

삼신시불(三身十佛)이 구비치 않은 덕이 없으니 (화엄경의) 그 문장이 밝게 빛나고 그 뜻이 넓고 무궁함을 무슨 말로 칭탄하랴.”


이런,

그러고 보니 선의 돈오는 화엄이 일러주는 법계의 소식과 짝,

한 치도 틀리지 않습니다.



문자속의 돈오

지금 제가 한 말은 기특한 문자속일 뿐입니다.

허나,

지눌 스님은 문자의 이해가 정확해야 길을 잃지 않는다고 강조했습니다.

스님은 돈오를 불교의 진리에 대한 분명한 지적 이해라고 강조했습니다.

즉, “돈오란 여실(如實)의 언교(言敎)요, 문자(文字)의 지귀(指歸)이다.” 그렇습니다.

돈오란 법계의 실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이고,

불경의 문자 속에 담긴 근본 메시지입니다.


제 미욱한 생각에,

오수(悟修)의 돈점(頓漸)을 둘러싼 만단(萬端)의 갈등(葛藤)을 풀기 위해서는 이 자리부터 분명히 해 두어야 하지 하리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