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금강경(金剛經)

한형조교수/2부/58강/혜능의 세 가지 장엄

通達無我法者 2008. 8. 23. 17:32

 

 

내 마음의 불국토 장엄하기

몸 어디에 불성이 숨어있나
나도 그동안 오해했었다. 심신의 작용, 그 안쪽 깊숙한 어디에, 꼭 찐빵 속에 앙꼬가 있듯이, 불성이나 자성이 숨어 있을 것이라는 선입 혹은 기대가 그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심신의 작용 바로 그것이, 그대로, 비약이나 가공 없이, 있는 그대로 자성이고 곧 불성이다. 그래서 혜능 마조 지눌이 한 목소리로 분명히 말한다. “작용시성(作用是性), 작용 바로 그놈이 곧 자성이요 불성이다.”


그동안 심신을 헤집어, 혹은 붓다 초기의 고행처럼 이 육신을 쥐어짜고 학대해서, 혹은 그것을 정지시키고서야, 그 극처에서 스파크처럼 만나거나 혜성처럼 등장하는 것이 불성이라고 믿었던 사람에게, 이 선언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다. 나는 이 사실에 전율했다.


돈교란 “구원이 이미 와 있다”는 소리이며, 심즉시불(心卽是佛), “네가 에누리 없이 부처이다!”가 그 선언이라고 한 바 있다. 심호흡을 하고, 고요히 응진(凝眞), 생각을 모아보라. 그대 주어진데 어디 하나 빠진 것이 있는가를…. 콧구멍도 두 개, 눈도 두 개, 코도 하나, 팔도 움직일 수 있고, 그뿐인가, 세상에, 생각도 할 수 있네! 부처나 성인과 비교해서 어디 하나 빠진 구석이 있으면 말해보라. 약간 한 두군데 좀 불편하신 분들은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중생의 몸은 그대로 부처를 닮아있다.


문제는 “내가 곧 부처다”를 사람들이 곧이 듣지 않으려 한다는데 있다. 그래서 오래도록 집을 떠나거나, 기벽한 행동을 통해 이 비밀과 만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그게 다 길을 잘못 들었다. 혜능과 지눌 앞에 그런 꼴로 섰다간 몽둥이 세례 깨나 맞았을 것이다. 기억하자. 메테를링크의 파랑새는 자기집 처마에서 울고 있고, 선재 동자는 깨닫고 보니 길을 떠난 바로 그 자리였다.

자성, 저 물소리 속의 고요
이 우화를, 이 구도이야기를 흘려 들으면 안 된다. 정말 깊이 깊이 새겨야 한다. 호흡을 길게 하고 돌이켜 보라. 지눌은 묻는다. “저 물소리를 듣느냐?” 우리 모두는, 청각에 문제가 있는 분들은 마음으로 듣겠지만, 물소리를 듣는다. 단지 그것뿐, 더 이상 캘 것도 이루어야 할 일도 없다. 지눌은 그 물소리를 듣는 작용 속이 고요하다고 말한다. 그 안에서는 어떤 분별도 없다. 그렇다. 다만, 듣는 것 거기가 모든 것이다. 혹, 다른 것이 있을 것이고 탐색하거나, 분석을 하거나, 가치를 시비하고 있으면, 어느덧 물소리는 흩어지고, 우리는 자기 속에 유폐되거나 이미지의 노예가 되고 만다. 이런 분별(分別)로 하여 우리는 물소리의 축복으로부터 추방되었다!


선은 말한다. “너는 이미 완전하고,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 구원은 성취되었다! 네게 허여된 축복을 긁어 부스럼, 스스로 훼손하지 말라.”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가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활동(作用), 우리가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삶은 어떤 것들인가. 그것들은 그 자체의 여여(如如)한 가치가 아니라, 돈과 명예, 권력과 애정 등 사회가 부여해준 관습적 가치, 혹은 미디어가 부추긴 허상(幻妄)이 아닌가.
그 모든 것들은 이름(名)이며 이미지(相)가 아닌지 스스로의 가슴에 물어보라. 진정 내가 마음으로 승인해준 가치는 법(法)이라고 불릴만한 것인데, 그것들은 직업이나 성별, 신분이나 교양에 상관없이 발휘되는 것들이고, 그 모든 것들은 나의 심신의 작용을 통해 발휘되고 친교된다. 그렇지 않은가. 위대한 자의 손발을 나도 갖고 있고, 위대한 자의 정신을 나도 갖고 있으매, 여기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장엄 아닌 장엄
하여, 우리의 몸은 자성불(自性佛)이고 여기 디디고 선 땅은 불국토(佛土)이다. 잡화(雜花), 수많은 꽃들의 우주적 축제에 참여할 티켓을 가진 신성한 몸과 마음을 누가 홀대하는가. 삶은 그토록 누추한 것이 아니고, 육신 또한 벌줄 죄인이 아닌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일으키라. 대승기신(大乘起信)은 한 마디로 “네 우주적 육신을 찬양하라!”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다.


혜능은 나의 위대한 육신으로 불국토를 어떻게 장엄해야 할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충고한다. 다시 한번 읽는다.
[혜능] 불국토는 청정하여 이미지도 형태도 없으니, 어떤 물건으로 능히 장엄(莊嚴)하리오. 다만 이 정혜(定慧)의 보물로 임시로 장엄이라 일컫느니라. 장엄에 셋이 있으니 제1은 ‘세간의 불토(世間佛土)’를 장엄함이다. 절을 짓고 경을 베끼며 보시하고 공양하는 것이 이것이요, 제2는 ‘몸의 불토(身佛土)’를 장엄함이니, 모든 사람을 보되 널리 공경을 행하는 것이 이것이다. 제3은 ‘마음의 불토(心佛土)’를 장엄함이니, 마음이 깨끗하면 곧 불토가 깨끗해지기에, 념념(念念)이 언제나 무소득심(無所得心)을 행하는 것이 이것이다.


[六祖] 佛土淸淨, 無相無形, 何物而能莊嚴耶. 唯以定慧之寶, 假名莊嚴, 莊嚴有三, 第一莊嚴 世間佛土, 造寺寫經布施供養, 是也, 第二莊嚴身佛土, 見一切人普行恭敬, 是也, 第三莊嚴心佛土, 心淨卽佛土淨, 念念常行無所得心, 是也.
- “불국토는 청정하여 이미지도 형태도 없다.” 삶은 이미 주어졌다. 우리의 삶은 다만, 그 안에서 경영될 수밖에 없다. 푸념하지 말지니, 지혜는 그 ‘위대한 수용’에서 시작한다고 한 바 있다. 그때 문득 세상이 평등하고 화평해지면서,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한다.


- “정혜의 보물로 임시로 장엄이라 한다.” 장엄이란 이를테면 세상 속으로 나를 들이밀면서, 거기 보상도 기대도 걸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내 삶으로 이 땅에 요익(饒益)을 주되, 나는 그것을 의식하거나 자랑삼지 않는 것이 진정한 장엄이다. 이를 <금강경>이,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하지만, 그것은 장엄치 않은 것이다.(菩薩... 莊嚴佛土者,卽非莊嚴,是名莊嚴.)”라고 했다.

세상의 원리 마음속에 있어
- 혜능은 이 우주적 참여로서의 장엄을 세 가지로 특화했다. 하나는 ‘세간 불토의 장엄’이다. 세간불토는 ‘사찰이라는 신성한 공간’을 뜻한다. 거기 공양한다는 것은 불교라는 종교에 의식적 의례적(儀禮的)으로 참여하는 것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는 경전을 베끼고 외며, 절에 보시하고 스님들께 공양하는 행위를 지칭한다. 둘째는 ‘몸으로 하는 불국토 장엄’이다. 이 몸을 경건히 잘 건사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구체적으로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삶의 자세를 가리킨다. 혜능은 이 ‘사람에 대한 배려’가 ‘절간을 번듯이 하는 불사’보다 위대하다고 가르친다.


배려로서의 장엄보다 더 근본적이고 위대한 것은 ‘스스로에 대한 불사’이다. ‘마음으로 하는 불국토 장엄’이란 내 마음을 언제나 밝고 환하게, 구름끼지 않게 유지하는 것을 가리킨다. 내 마음 하나가 깨끗해지면, 곧 온 세상이 밝아진다. 사람이 남에게 하는 생각과 태도, 말은 곧 스스로의 관심과 수준의 반영이다.


내가 도둑이면 모든 사람이 내 물건 훔쳐갈 도둑처럼 보이며, 자신이 부처이면, 모든 사람을 부처님 대하듯 손 모으고 공경하게 된다. 무소득심(無所得心), 세상에 내가 얻을 것도, 가질 것도 뭐, 별 대수냐 싶은 마음, 그 여유로운 한 마음을 가지면, 세상이 그 가닥을 통해 숨통을 열고, 어느덧 사태해결의 부드러운 실마리가 열릴 것이다.
세상이 오직 공리주의의 원칙에 따라 계산으로 움직일 것이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억측이고 오해이다. 세상의 원리는 따로, 즉 ‘마음’에 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 붓다뉴스 http://news.buddhapi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