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금강경(金剛經)

한형조교수/2부/64강/혜능의 실천적 충고

通達無我法者 2008. 8. 23. 17:44

 

 

“아무 것도 태어나지 않는다”

13장은 지금까지의 독특한 설파에 ‘반야바라밀’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이 명명이 혹 오해를 부를까 싶어, 몇 가지 다짐을 잊지 않았다. 혜능은 이 피날레에 대고 무슨 노파심을 언설했을까. 그는 다음에 보듯이 <금강경>의 불이(不二) 법문을 실천적 권유로 연금술화해 놓았다. 이로써 자칫 머리로 이동하려는 에너지가 우리네 가슴으로, 다시 두 팔과 다리로 착실히 내려온다. 그것이 혜능 언설의 매력이고 존재이유다. 그 실용주의적 오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정통적 <오가해>의 판본에 따라 장을 다섯 단락으로 나누었다.
(본문 13-1절)
爾時,須菩提白佛言, 世尊, 當何名此經, 我等云何奉持. 佛告須菩提, 是經名爲金剛般若波羅蜜,以是名字,汝當奉持. 所以者何. 須菩提, 佛說般若波羅蜜,卽非般若波羅蜜,是名般若波羅蜜.
이때, 수보리가 부처께 사뢰되, “세존이시여, 이 위대한 경전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리까. 그리고 어떻게 받들고 지키리이까.” 부처가 수보리에게 말했다. “이 경전의 이름을 ‘금강반야바리밀’이라고 할지니, 이 이름으로 너는 마땅히 받들고 지키라. (이 명명은 다만 임시적이니 썼다가 너는 지워야 한다.) 왜냐. 수보리야, 부처(인 내)가 (지금) 반야바라밀이라 하지만, 이는 기실 (실체로서의) 반야바라밀이 아니다. 그러기에, (그것을 전제로 내가 지금)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
(육조 13-1)


“佛說般若波羅蜜, 令諸學人用智慧, 除 愚心生滅. 生滅滅盡卽到彼岸. 若心有所得卽不到彼岸, 心無一法可得卽是到彼岸. 口說心行乃是到彼岸也.”
“부처가 이렇고럼 반야바라밀을 설한 것은 여러 학인들로 하여금 지혜를 발휘해 ‘어리석은 마음의 생멸(生滅)’을 제거토록 하고자 함이다. 생멸이 다한 곳, 거기가 피안이다. 여기 만일 ‘얻은 바 있다(有所得)’는 마음이 들면 피안에 이르지 못한다. 마음에 그 무엇(法)도 얻을 수 없다는 진실에 투철하면 그는 피안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이치를 말로만 아니라 몸으로도 실천해야 피안에 이를 수 있다.”
(부연 13-1)
불교는 가정적 환경이나 사회적 여건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어떤 잘못된 습관 하나가 오랜 고통과 불행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하여 불교의 ‘지혜’가 실제 작용해서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의 어떤 잘못된 ‘습관’ 하나이다. 혜능 또한 반야바라밀의 타겟이 ‘우심생멸(愚心生滅)의 제거’라고 분명히 적었다.
‘우심생멸(愚心生滅)’은 ‘어리석은 마음에 오가는 생멸’이다. 아니 ‘어리석은 심생멸(心生滅)’로 읽을 수도 있다. 짐짓 <대승기신론>의 어법을 차용해서 이 구절을 읽어보기로 하자.

두 가지 마음, 체용(體用)
<대승기신론>은 ‘마음’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썼다. ‘마음의 바탕’과 ‘마음의 파장’이 그것이다. 전자를 심진여(心眞如)라 하고, 후자를 심생멸(心生滅)이라고 한다. 당연히 우리네 마음의 수많은 작용들은 바다에 이는 파도처럼 망망 거대한 바다의 그 고요로부터 온다.
이 비유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불교가, 그리고 <대승기신론>이 마음의 근원을 프로이트나 처럼, 의식의 불건전한 잡동사니 창고라고 보고 있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마음의 바탕은 고요하고, 무한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풍성하다. 그 속에 고래나 자라, 수많은 고기떼와 수초가 있는 생명의 활발할한 장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사람들은 의아해한다. 그 고요하고 무한하고 풍요롭다는 마음은 어디 있는가. 내 안에 있다 하는데, 아무리 뒤져보아도 나는 한심하고 하찮고 위태롭다. 시시각각 작은 걱정 큰 근심에 잠자리 땀 흥건한 나를 발견할 뿐이지 않은가. <대승기신론>은 이 퇴전(退轉)의 비관에 ‘희망의 바가지물을 들이붓는다. “너는 부처다. 잊지 마라.”
내 마음을 오가는 흔적들, 크고 작은 파도들을 심생멸(心生滅)이라고 한다. <기신론>은 여기에도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우선 오해 하나를 적어두고 가야겠다. 간혹 심진여는 좋은 것, 그리고 심생멸은 버려야할 것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이것은 큰 오해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마음의 바탕(體)을 적절히 운용(用)하는데 있다. 고목사회(枯木死灰)를 어디다 쓰겠느냐. <대승기신론>은 건전한 심생멸(心生滅)을 목표로 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두 가지 심생멸(心生滅)
<기신론>은 생멸하는 마음에 두 종류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자각적인 마음이고 하나는 부자각의 마음이다. 여기가 중생과 부처의 갈림길이다.
삶이 혼동스럽고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의 삶을 ‘보는’ 자기의식의 불투명성, 불철저함에 기인한다. 삶의 추함과 아름다음, 선과 악은 ‘있는 그대로,’ 그 의식의 빛 속에서 구원을 얻는다. 불교는 우리 삶에 아무런 고통이 없다거나, 즐거움만이 가득차 있다고 사기치지 않는다. 다만 고통을 구성하는 연쇄고리를 보다 분명히 알고, 그 뿌리가 인간의 원초적 무지와 맹목적 욕망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고, 사물의 실상을 보다 분명히 이해하게 될 때, 그 자각이, 그 반야바라밀이 우리의 고통을 덜어주고, 존재에 위안을 주며, 궁극적 평안의 언덕으로 이끌어줄 것이다.


깨어있는 자각적 주시는 우리네 고통을 ‘1차원’으로 묶어놓고, 의식으로 하여, 오해로 하여 증폭되거나 파생되는 것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삶의 고통은 환경이나 상황보다, 그것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의미화하는 ‘심리적 정서적 개입과 증폭’에 더 의존하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어떤 사람은 주어진 재난을 더 든든히 견디고, 어떤 사람은 작은 금전적 손실이나 자존심의 상처에 죽음과 같은 고통을 느낀다. “오로지 밖을 향해 탓을 하지 마라. 고통은 대부분 그대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이 18계(界) 이론을 통해 불교가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다. 18계에 세 가지 영역이 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하나는 ‘감각기관’ 자극을 수용하는 기관이다. 둘은 ‘감각자료’, 즉 대상과 환경이다. 세 번째 -이것이 가장 중요한데- 가 이들을 연관짓고 인식과 판단을 구성하는 ‘입법적 작용’이다. 여기 환경과 대상, 여건은 세 가지 요인 가운데 오직 하나를 구성할 뿐이다.

뿌연 먼지에 덮인 마음을
‘어리석은 마음의 생멸(生滅)’이란 부자각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활동들을 가리킨다. 이들 ‘소외된 심생멸’은 작은 일에 쉽게 자극받고, 심리적 정서적 자아의식이 강하다. 자기만의 독단을 객관적이라 자부하며 과거의 기억에 현재를 묶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장밋빛 환상을 걸기 쉽다. <대부>에서 기억나는 명대사가 있다. “적을 미워하지 마라. 판단을 흐린다.” 조바심과 원한, 편견이 작동하면 현재의 실상을 여여하게 인식할 수 없고, 그런 마음으로는 합리적이고 공익적인 문제해결을 기대할 수 없다.

 
<금강경>이 적고 있듯, 세상은 너와 내가 평지풍파(平地風波)로 일으킨 먼지로 뿌우옇다. 흡사 여름날 빗자루를 꽁지에 단 말이 한바탕 히힝거리며 춤을 춘 것같다. 불교에 입문한 사람들은 이 마음의 풍경이 그저 속상하고 안타까왔던 사람들이다. 무의식에서라도 신호가 왔기에 독자들은 이 글을 보고 있다. 그 발심(發心)만으로 이미 절반은 이루어졌다. 그 신호를 따라 가다보면 적절한 계기와 절차를 거쳐 그리던 평화와 아타락시아에 이르게 될 것이다. 뜻을 굳게 가지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