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識)의 눈높이가 세상을 결정한다
“어리석은 마음에 출몰하는 생멸(生滅)을 ‘지혜’로, 반성과 자각으로 제거하십시오.” 혜능의 권고가 이 한 마디에 집약되어 있다. 그의 노파심은 이어진다. “이 생멸 안에는 생멸의 치유와 소멸을 통해 심리적 자산과 자존을 취득한다는, 그리하여 남과는 격이 달라진다는 ‘소유’의식의 발생(?)도 들어있다. 일체의 법에 대해 무심한, 기대와 희망을 내려놓고, 거기 기반하지 않는 삶을 이루라, 그것도 입으로만 말고, 실천으로…”
그의 구결을 더 들어보자.
(육조 13-2)
“佛問須菩提, 如來說法心有所得不. 須菩提知如來說法心無所得, 故言無所說也. 如來意者, 欲令世人離有所得之心, 故說般若波羅蜜法, 令一切人聞之, 皆發菩提心, 悟無生理, 成無上道也.”
“부처가 수보리에게 물었다. ‘여래가 진리를 설했고, 나는 그 진리를 획득했다는 생각이 있느냐?’ 수보리는 여래가 진리를 설했지만, 그럼에도 내 마음에 얻은 바 진리는 없다는 것을 알기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여래의 뜻은 세상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얻은 바 있다’는 마음(有所得之心)을 제발 떨쳐내게 하려고, 이 반야바라밀의 진리를 설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듣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보리심(菩提心)을 발하게 하고, 무생(無生)의 진리를 깨달아, 마침내 무상(無上)의 도리를 성취케하려는 것이다.”
(부연 13-2)
역시 <금강경>이 타겟으로 하는 것, 혜능이 강조해 마지 않는 경계도 이 ‘소유’와 ‘지배’의 의식이다. 심리적 결핍과 짝해 있는 이 오래된 허기를 다스리지 않으면 영원의 평화는 없다!
작은 것 하나 성취했다고 우쭐하고, 조금 늘어난 재산에 약간 높은 지위에 ‘취득’을 자부하는 것도 느끼하고 비호감이다. 애들 말로는 ‘쏠린다’고 하던가. 세속 너머 더없는(無上)의 진리를 향한 자의 성취의식은 더욱 위태롭다. 내적 자부는 겸양과 동정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독점자의 오만과 독선으로 빠진다면, 그 인간 차라리 이 도에 접하지 않으니만 천백배 못하다.
<금강경>은 세속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수행인들, 종교 종파를 불문하고 길을 간다는 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을 경계하고 또 경계한 경전이다. 진정 불도를 익힌 자, 그 빛에 휘황하게 은총받은 자, 그는 불교의 냄새를 피우지 않는다. 지극히 평범해서 보통 사람들은 그를 알아볼 수 없다. 거꾸로, 불도에 아예 접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우리는 불도의 힘과 영광을 느끼는 때가 많다. 그렇기에 <금강경>이 한사코 ‘그분은 32상의 표징으로 오시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지금 그분은 집안에서 밥을 짓거나 설거지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거리에서 신문을 펴들고 있을지 모르며, 식구들을 먹여살리려고 이 팍팍하고 험한 세상에 땀에 젖은 지폐 몇 장을 벌고 계실지 모른다.
반야바라밀은 혜능의 말대로, “보리심(菩提心)을 발하게 하고, 무생(無生)의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무상(無上)의 도리를 성취케하려는 것이다.” 여기 ‘무생(無生)’의 진리(理)‘라는 말이 낯설지 모르겠다.
앞에서 어리석은 마음이 무지에 싸여 ‘생멸’을 상속(相續)해 나간다고 했다. 무생(無生)은 이 심리적 윤회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 사물은 연기(緣起)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진다. 그 ‘저대로의 여여한 과정’이 심리적 전변이나 격돌을, 그로 인한 차별을 야기치 않을 때, 그 마음이 비로소 말한다. “사물은 변화하지 않고, 세상은 평온하다!” 요컨대 무생은 사물이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그 변화에 따라 심리적 계산이나 격변의 추동이 그만 멈춘 자리, 즉 윤회로부터의 해탈을 가리키고 있다.
(혜능 13-3)
“如來說, 衆生性中妄念, 如三千大千世界中所有微塵, 一切衆生被妄念微塵, 起滅不停, 遮蔽佛性, 不得解脫. 若能念念眞正修般若波羅蜜, 無著無相行, 了妄念塵勞卽淸淨法性. 妄念旣無卽非微塵, 是名微塵. 了眞卽妄, 了妄卽眞. 眞妄俱泯, 無別有法. 故云, 是名微塵. 性中無塵勞卽是 佛世界. 心中有塵勞卽是衆生世界. 了諸妄念空寂, 故云非世界. 證得如來法身, 普現塵刹, 應用無方, 是名世界.”
“여래가 말씀하시길, 중생들의 몸(性) 안에 있는 망념들은 삼천대천세계 안에 들어찬 먼지들같다고 했다. 중생들은 예외없이 망념의 먼지들을 덮어쓰고 있는데, 그것들은 쉴 새 없이 일어났다 스러지며 불성을 가로막고 해탈을 방해한다. 만일 념념이 반야바라밀을 올바로 수행하고, 무착(無著) 무상(無相)의 행(行)을 닦아 나갈 수 있다면 먼지처럼 뿌옇던 망념들이 어느덧 청정한 법성으로 변해 있는 것을 볼 것이다. (이렇게 궁극적 의미에서) 망념이란 없기에, ‘먼지가 아니다. 그래서 먼지라 부른다’라고 한 것이다. (정리하자면) 진짜라고 붇든 것이 망녕된 것이고, 망녕된 것이 기실 진짜라는 것을 알아, 진짜와 망녕이 함께 스러져 다시 다른 구분(法)이 없다! 그래서 ‘이를 먼지라 이름한다’고 말했다. 내 몸(性)에 아무런 진로(塵勞)가 없는 것이 곧 부처의 세계이다. 마음 속에 진로가 있는 것이 곧 중생의 세계이다. 여러 망념이 공적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래서 세계가 아니라 한다’고 했다. 여래법신을 증득하여 널리 수많은 세계에 자유롭게 나투길래, ‘이를 세계라고 한다’고 했다.
(부연 13-3)
여기 ‘먼지’들은 앞에서 적은 대로, ‘어리석은 마음의 생멸’, 그 출몰을 가리키고, 그 흔적들로 하여 혼란해진 마음들을 가리킨다. 그것은 또한 연기하는 세상이 스스로 여여(如如)하게 평온한 것을 모르고, 즉 무생(無生)의 이치를 모르고서, 세상이 일어났다 스러지고, 태어났다가 죽는다고 ‘생각’하는 마음의 오래된 습관을 가리킨다. 반야바라밀은 이 습관 하나를 치유하려는 원포인트 공략이다.
그러므로 늘 스스로 돌이켜야 한다. 세상은 평온한데, 내가 스스로 상(相)을 짓고, 스스로 찧고 까불며 깨춤을 추지 않는지를... 인간은 다들 이 오래된 습관이 만든 자기감옥 속에 갇혀 산다. 그래서 중생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 감옥의 크기와 성격이 세상을 보는 눈을 결정한다. 결코 세상은 자기눈높이 이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불교는 각자의 식(識)에 따른 세상의 층위를 33천(天)으로 설정해놓은 것을 기억할 것이다.
자기 세계(世界)라는 감옥에 갇힌 사람은 다른 사람도 자기같은 줄만 안다. 그러나 각자 욕망과 습관의 지도는 서로 매우 다르고 또 훌쩍 격이 다른 사람도 있다. 모든 사람이 다 자기욕심에 따라 물불 아니 가린다고 생각하지 말라. 사람에 따라 가치의 무게중심이 다르기에 관용이 필요하고, 또 어떤 사람은 보다 큰 규모에서 생각하고, 보다 원대한 이상을 갖고 있기에 그들을 존경하고 받들어야 한다.
혜능의 권고대로 살아보자. “념념(念念)이 반야바라밀을 올바로 수행하고, 무착(無著) 무상(無相)의 행(行)을 닦아 나가자. 그때 먼지처럼 뿌옇던 망념들이 청정한 법성으로 변할 것이다.”
우리 자신이 변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결코 구원되지 않는다. 입만 열만 남의 탓을 하는 사람과는 상종하지 마라. 그들을 책임있는 자리에 앉혀서도 안된다. 불평을 말하기보다 불리한 여건에서 무슨 작은 일이라도 성취하여 세상에 보탬이 될까를 생각하라. 그 ‘작은’ 태도 하나가 보통사람과 영웅을 가른다. 말많은 세상, 남의 탓하고, 세상을 적대시하느라 원망과 어지러움이 가득한 세상, 희망의 불씨를 위태롭게 만드는 혼돈과 광풍의 세상에 이 덕목이 목메게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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