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이야기·이규행

22. 확연무성(廓然無聖)

通達無我法者 2008. 9. 20. 18:26

 

 

확연무성(廓然無聖)

“공덕을 꾀하는 일로 깨달음 이룰순 없다”

무제는 삿대질만 할 뿐
말을 잇지 못하고
신하들도 노기가 충천했다



무제는 달마가 자기의 공적을 깡그리 무시하자 섭섭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고 물었다.

“그렇다면 조사가 말하는 참다운 공덕이란 무엇이오?”
“맑은 지혜가 묘원(妙圓)해지면 몸이 절로 공적(空寂)해지는 법입니다. 그것이 참 공덕인데 어찌 아실 수 있겠습니까.”무제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그렇다면 짐이 지금까지 부처님을 섬긴 것이 쓸데없는 일이란 말이오?”달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고개만 가볍게 가로저을 뿐이었다. 그러나 무제는 집요했다. 계속 답변을 촉구했다. 달마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달마는 무제가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무제가 부처를 공경해 온 본래 의도가 자신을 위해 공덕을 세우고 백성들의 존경을 받아 황실의 안정과 번영을 꾀하는 데 있다는 것을 모를 턱이 있겠는가. 더군다나 천리 길이 넘는 먼 곳에서 초청해 온 것도 실상은 달마의 입에서 공덕을 칭송하는 소리를 듣고 황제의 위신을 한층 높이고자 한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달마는 그것이 바른 길이 아닌 이상 절대로 응할 수 없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그가 동쪽 땅으로 건너온 것은 오직 참다운 선법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이제 와서 그 결심을 꺾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제는 노여움으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마엔 푸른 힘줄이 불끈 솟았다. 문무백관들은 이런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달마를 혼내 줌으로써 성상의 체면을 살릴 묘책을 찾기에 바빴다. 누구보다도 앞장 서 나온 것은 무승 철타였다.

“성상께서는 극진히 부처를 섬기시고 세 차례나 동태사에 사신(舍身)까지 하셔서 우리와 함께 고행을 했는데 어째서 공덕이 없단 말이오?”이쯤 되면 더 이상 답변을 피할 수가 없었다. 달마는 천천히 일어섰다. “성상께서 성심을 다해 부처를 섬긴 것은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본 것이고 진실로 칭송 받아 마땅하오. 그러나 노납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소이다. 성상께서는 이 나라의 천자(天子)이십니다. 만일 치국안민(治國安民)에 전력을 다하신다면 그것이 곧 불심(佛心)을 보여주는 것일텐데 굳이 몸을 던져 동태사에서 중노릇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노납이 듣건대, 성상께서는 세 차례나 동태사에 사신하였고 그때마다 대소신료들이 수많은 금과 은을 헌금하고 다시 모셔왔다던데, 그런 것은 공덕과 거리가 먼 것이외다. 그렇게 백성들의 재산을 소모하고 국고를 비우는 것을 어찌 공덕이라 할 수 있겠소?”무제의 진노는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그리곤 달마를 노려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대가…, 그대가 감히….”
무제는 삿대질만 할 뿐 말을 잇지 못했다. 신하들도 노기가 충천했다. 달마의 말은 분명 무제를 깎아내리고 신하들의 뺨을 때린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신하들 가운데 좌장격인 정각이 삿대질을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이오. 당장 사과하시오. 여러 대신들이 성상의 속전(贖錢)을 바친 것은 이 나라에 하루라도 폐하가 안 계시면 안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오. 속전으로 낸 금과 은도 모두 절을 새로 짓거나 수리하는 데 썼고, 불상을 조성하는 등 불법을 널리 알리고 중생을 제도하는데 사용했소. 어떻게 이것을 질책할 수 있단 말이오.”분위기는 극도로 험악해졌다. 그러나 달마는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조사는 정각과 여러 대신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지금 하신 말씀은 지극히 옳은 것이외다. 노납은 결코 성상을 나무란 것이 아닙니다. 절을 짓고 수리하여 널리 보시하는 것은 천축 역시 이 나라에 못지않소이다. 그러나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 민생(民生)을 어떻게 살펴야 하는 것이오? 국력은 또 어디서 오는 것이오? 그렇게 해서 과연 중생을 고해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겠소? 깨달음이란 안으로 본심을 증험하고 밖으로는 모든 인연을 끊어서 마음을 명경지수(明鏡止水)같이 맑게 하여 본성을 보는 경계에까지 이르러야 하는 법이외다. 공덕을 꾀하는 따위로는 어림도 없소이다.”“그 입을 닥치지 못하겠소.”
무제가 벼락같이 소리질렀다.

“절을 지은 것도 공이 없고 수계한 것도 덕이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그렇다면 조사라는 당신은 왜 가사를 입고 총림을 떠돌고 있소? 당신 같은 언동이야말로 석가모니 부처님을 배반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오? 망령되이 조사라고 칭하기까지 하다니 나는 당신을 인정할 수 없소.”“하, 하, 하….”
그 자리에 있던 문무백관들이 모두 통쾌하다는 듯 웃어댔다. 그 웃음 속에 비웃음이 섞여 있음은 물론이다. 일부 대신들은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다.

“당신이 무슨 조사야. 가짜가 틀림없으렸다.”
이렇게 소란한 틈을 타 무승 철타가 달마에게 무례하게 덤벼들었다.

“너는 도대체 어떤 놈이냐? 정체를 밝혀라. 네가 조사를 사칭하고 감히 성상을 희롱하다니 무슨 죄에 해당하는지 알고나 있느냐?”달마 조사는 자기가 말한 심요선법(心要禪法)을 무제가 전혀 깨닫지 못하자 적잖이 실망했다. 기회와 인연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어쩔 수 없는 법임을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무제는 신하들의 충성심에 감격했다. 그러나 앞에 서 있는 달마는 아무리 봐도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 의연함이 분위기를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무제는 다시 한 번 달마와 담판을 벌일 생각이었다. 이른바 ‘황제 대보살’이라고까지 칭송 받는 처지에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누구보다도 수행에 출중하다고 자부하고 있는 그로서는 제아무리 조사라고 할지라도 설복시킬 자신이 있었다. 사실 무제는 평상시에도 승복을 입고 지낼 정도로 경전 읽기와 염불이 곧 생활 자체였다. 나이 50이 되면서부터는 완전히 채식(菜食)만 했고 여색(女色)도 끊었다. 궁중에 있던 궁녀들은 모두 니승(尼僧)으로 귀의시켰다. 심지어는 죄지은 자에게도 자비심 베풀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지방에서 사형이 집행됐다는 보고가 올라올 경우엔 눈물을 흘리며 통곡했다. 마침내 사형제도를 폐지하라고까지 엄명을 내렸다. 이런 신심과 수행으로 말미암아 무제는 86세의 수를 누렸다. 이것은 당시의 황제로서는 보기 드문 장수였다. 무제는 신하들의 소란을 진정시키고 무승 철타를 제지했다. 깊은숨을 한 번 내쉬고는 근엄한 목소리로 달마 조사에게 물었다.

“짐이 다시 한 번 묻겠소. 불교의 성스러운 교의(敎義) 가운데 첫째는 무엇이오?”이것은 <벽암록>에 쓰여 있는 ‘여하시성제제일의(如何是聖諦弟一義)’의 질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달마의 처지에서 볼 때 질문거리조차 안 되는 것이었다. 신앙의 본질이라곤 전혀 알지 못하는 유치한 질문이었다. 달마는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그런 것은 없소이다.”
즉 ‘확연무성(廓然無聖)’이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확연’이란 ‘텅 빈 것’을 이르는 말이다. 차별이나 한계가 없다는 뜻이다. 속인(俗人)들은 무엇이든지 비교하거나 평가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사일 뿐이다. 불도에는 그런 것이 있을 수 없다. 일체차별상(一切差別相)을 끊은 자율자협(自律自慊)의 대법(大法)엔 성(聖)도 범(凡)도 없다는 뜻이다. 이런 대승의 바른 가르침을 무제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달마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무엇이라고? 그런 것이 없다고? 그러면 내 앞에 있는 그대는 누군가?”달마는 한 마디로 잘라 대답했다.

“모르오.”
즉 ‘불식(不識)’이라고 했다. 여기서 ‘불식’은 단순히 ‘모른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알 수 없음’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불식’의 본래 뜻은 이른바 ‘식(識)’의 차원을 넘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몸으로 깨닫지 않고는 얻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고차원의 대답을 무제가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무제는 잠시 충격을 받은 듯 멈칫했다. 달마는 작별인사도 하지 않고 그대로 참례전 문을 나섰다. 무제의 성난 눈빛이 달마의 등 뒤에 꽂혔다. 그런 오만과 무례를 결코 용인할 수 없었다. 그는 달마를 가리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저런 미친 놈의 중 같으니…. 짐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무제의 말 한 마디는 그대로 법이었다. 무승 철타는 비호같이 몸을 날렸다. 달마를 체포하기 위해 호위군사까지 동원했다. 그러나 달마의 발걸음을 좀처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철타는 최후 수단으로 암도(暗刀)를 꺼내더니 달마를 겨냥해 던졌다. 달마는 등 뒤에서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직감했다. 등 뒤로 손을 뻗쳐 손가락 끝으로 날아오는 암도를 마치 장난감 다루듯 여유만만하게 잡아냈다. 그는 철타에게 준엄하게 말했다.

“우리 부처님은 자비로우시니 이 참례전에서는 살생이란 있을 수 없소이다.”달마 조사는 손끝에 잡고 있던 비수를 땅바닥에 던졌다. 그 자리에서 암도는 ‘뗑그렁’ 소리를 내며 두 동강이 나 버렸다. 달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 광경을 지켜본 무제와 신하들은 마치 무엇에 홀린 듯 멍하니 있었다. 그러나 체면을 구긴 철타는 가만 있지 않았다.

“미친 중놈아. 게 멈춰라.”
소리를 지르면서 칼을 움켜잡고 뒤쫓아갔다. 달마는 빠른 걸음으로 철타의 추격을 피했다. 그러나 금릉의 지리에 익숙하지 못해 이곳 저곳을 헤맸다. 마침 해가 서산으로 떨어지면서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금릉의 북쪽 산기슭에 도착한 달마는 더 이상 갈 길이 막막했다. 멀리 산 아래쪽으로 어슴푸레 큰 강이 흐르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가 보니 과연 여울물소리가 들려왔다.

달마는 문득 스승 반야다라 존자의 게송이 머리에 떠올랐다.
“길을 가다가 물을 건너고, 다시 양을 만나니, 홀로 여유 있게 강을 건너간다.”강가로 걸어가면서 달마는 마음 속 깊이 희열을 느꼈다. 오래 전 일이었지만 스승께서 앞날을 헤아려 내려주신 게송이 그대로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이제 양 나라에는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지 않은가. 게송대로 강을 건너기로 마음먹었다. 강을 건너면 바로 북위(北魏)땅이다. 달마는 그 곳이 법연(法緣)의 땅이라는 기대에 가슴이 설레었다.

한데 바로 그때 언덕 너머에서 저녁 종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