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이야기·지묵스님

“참사람은 바보가 되는 데서 나온다”/지묵스님

通達無我法者 2008. 12. 12. 02:57

 

 

“참사람은 바보가 되는 데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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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스님이 또 이르셨다. “형제 여러분, 아래 남녘에서 온 선사에게는 짐을 내려줄지니라. 그러나 위 북녘에서 온 선사에게는 짐을 실어줄지니라. 이 까닭을 말하리라. 위 북녘 선사를 가까이하여 도를 물으면 도를 잃기 때문이고, 아래 남녘 선사를 가까이 하여 도를 물으면 도를 얻기 때문이니라.”

강설 / 선의 황금시대에서는 남(南)은 선(禪)의 대명사였다. 그만큼 남녘 선사가 대단한 명성을 떨쳤다. 임제스님이나 조주스님은 동시대인으로 북녘 사람들이다. 두 선사는 남녘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에 북녘 고향으로 돌아와 교화를 폈다.



조주스님이 또 이르셨다. “형제 여러분, 바른 사람이 삿된 법을 설하여도 삿된 법은 오히려 정법이 되느니라. 반대로 삿된 사람이 정법을 설하여도 정법은 삿된 법이 되느니라. 밖의 제방에서 도를 만나보는 것은 어렵느니라. 그러나 깨달으려고 하면 쉽게 깨닫느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는 도를 만나보는 것은 쉬워. 그러나 깨닫기는 퍽 어려우니라.”

강설 / 유명한 법문이다. 이 공부는 흉내가 통하지 않는 법. 사자가 여우 소리를 내어도 결국은 사자의 소리일 수밖에 없고 여우가 사자 소리를 내어도 역시 여우 소리 이상은 아닌 것이다. 타지에 있으면 선사를 뵙기가 어려워도 모방이 아닌 독자적인 수행 방법을 찾은 까닭에 구도의 길이 더욱 활발발(活潑潑)해지고 명역역(明歷歷)해진다.

그러나 한 도량에서 스승을 모시고 지내면 선사는 매일 보고 모방을 일삼을 수는 있지만 구도에서는 크게 발전하지 않는 법이다. 크게 발심한 수행자가 아닌 이상에는 그렇다는 것이다.


선악의 구별이 분명하다 해도

마음속에 선이니 악이니 하는

분별심이 남아 있는 한은

대자유인이라 할 수가 없다



어떤 스님이 여쭈었다. “선악에 혹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독탈(獨脫, 깨끗하게 속진에서 벗어남)하겠습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독탈치 못하느니라.”

학인 스님이 일렀다. “왜 독탈하지 못합니까?”

조주스님이 이르셨다. “그 사람이 아직은 선악 속에 그대로 들어있기 때문이니라.”

강설 / 선악의 구별이 분명하다 해도 마음속에 선이니 악이니 하는 분별심이 남아있는 한은 대자유인이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소를 찾는 나그네가 소를 찾아 끌고 와서 외양간 안에 소를 가두어 두고 있는 모습이다. 잘 길들여진 소라면 이제 소를 잊어버려라. 소를 찾았던 마음도 놓아버리고 잊어버려라. 외양간을 짓기 이전의 처음 모습으로 돌아가라.



비구니 스님이 여쭈었다. “윗대의 가르침을 떠나서 화상의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조주스님이 할을 하고 이르셨다. “불에 타서 시커멓게 그을려 깨진 쇠물병!”

비구니 스님이 쇠물병에 물을 담아 와서는 청하였다. “화상께서는 대답을 해주십시오.”

조주스님이 웃으셨다.

강설 / 불에 탄 것, 시커멓게 그을린 것, 깨진 쇠물병, 이런 말은 여태 들어본 적이 없지? 별것 아니야! 윗대 스님들의 법문에 이런 말이 들어 있었어? 뭐 기특한 말을 찾는다고 그래?

경봉(鏡峰圓光, 1892~1982)스님의 법문이 있다.

“바보가 되어라. 사람노릇 하자면 일이 많다. 바보가 되는 데서 참사람이 나온다.”

시비분별심으로 깨달을 수 없고 지식과 알음알이로 생사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우리는 똑똑하게 바로 간다고 믿었다. 문명이 자랑이었다. 그러나 편리 위주의 과학 문명은 무엇을 가져왔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덕보다는 해가 되는 공해와 스트레스를 주었다. 우리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바보가 되어라.”

똑똑한 것이 오히려 해가 된 역사의 잘못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우직하게 살자.

“참사람은 바보가 되는 데서 나온다.”

지묵스님 / 장흥 보림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