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선의 강의·혜거스님

〈1〉선의 개요/간절한 마음으로 사무치게 의심하라

通達無我法者 2009. 6. 12. 22:58

 

 

간절한 마음으로 사무치게 의심하라

〈1〉선의 개요


선이란 무엇인가? 선(禪)은 범어 댜나(dhya-na)의 음역인 선나(禪那)의 약칭이며, 사유수(思惟修), 정려(靜慮), 기악(棄惡), 공덕총림(功德叢林)이라고도 번역한다. 사유수(思惟修)란 마음을 한 대상에 집중하여 깊이 사유하여 닦는다는 뜻이며, 정려(靜慮)란 고요히 생각한다는 뜻이다. 또한 능히 욕계의 다섯 가지 장애 등 일체의 악을 버릴 수 있기 때문에 기악(棄惡)이라 하며, 온갖 공덕을 저장하고 있기 때문에 공덕총림(功德叢林)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뜻을 종합해 보면 “선이란 마음을 한결같이 어느 대상에 집중하여 가라앉히고, 한 생각을 깊이 사유하여 사물의 본성을 궁구하는 길이다”라고 할 수 있다.

 

참선이란 몰입하고 몰입하여 무아의 경지가 되고, 간절한 마음으로 사무치게 의심하라

무아의 경지에서 더 몰입하여 의문이 타파될 때까지

몰입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또한 선(禪)을 선정(禪定)이라고도 한다. 고요히 사유하는 것을 선이라고 한다면, 정(定)은 삼매를 가리키는 것이다. 정은 마음이 한 가지 대상에 집중하여 통일된 상태, 즉 몰입(沒入)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렇게 한 가지를 깊이 사유하고 사유하여 더 사유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러 시공(時空)이 끊어진 상태, 즉 몰입된 상태를 선정이라 하고 선정에 들고자 힘쓰는 것을 참선이라 한다.

참선이란 간절한 마음으로 사무쳐서 의심하고, 의문이 사무쳐서 몰입하고 몰입하여 무아의 경지가 되고, 무아의 경지에서 더욱더 몰입하여 의문이 타파될 때까지 몰입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의문의 대상은 우주의 실상, 생사의 자리, 나 자신의 참모습,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모습, 움직이고 생각하는 주체, 내지는 현상계의 만물의 이치, 실상계의 만법의 이치 등이 되어야 한다.

한 가지 대상에 집중하는 몰입이 왜 필요한지는 거론할 여지가 없지만 인간세계의 문명은 모두 몰입하여 연구해서 얻어진 결과이며 철학적 사고와 종교적 사상 또한 몰입으로부터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령 둥근 물체가 굴러가는 것을 보고 수레를 만들고, 속이 빈 나무쪽이 물에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배를 만들고, 거미줄을 보고 그물을 만들고, 새의 발자국을 보고 문자를 만들었던 것 등을 비롯하여 눈을 보고 카메라를 만들고 뇌를 본떠 컴퓨터를 만드는 등 모든 문명과 문화는 관찰과 살핌으로 비롯되었으며 나아가 구체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까닭도 바로 이 몰입 참구에 의해서 된 것이다. 이와 같이 큰 호기심과 의문과 깊은 관찰과 사유 없이는 몰입하여 선정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이 태자시절에 동서남북의 4문을 유관하다가 죽은 사람의 장례행렬을 보시고 “죽지 않는 법이 무엇일까”하는 의문을 가지시게 되었는데, 그 의문은 곧 부처님의 출가동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 의문이 마음에 가득 사무쳐서 성도할 때까지 이를 참구하고 또 참구하여 마침내 생사가 본래 없는 이치를 깨달았으니, 이것이 곧 성불인 것이다. 이와 같이 의문이 사무치는 것을 몰입이라 하며, 몰입하고 몰입하여 선정에 이르러 의문이 타파될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을 참선수행이라고 한다.

선의 방법이 구체적으로 제시된 것은 고대 인도의 선인(仙人)들이 명상을 통해 심신을 극복하고 예지를 얻은 데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대인도에는 요가(yoga)라고 불리는 명상법이 있었는데 이는 인도의 여러 사상이나 종교 및 철학 등 모든 사유의 근간이 되어 왔다. 선도 인도의 명상법인 요가와 무관하지 않다.

부처님이 수행하던 중 웃따까라마뿟따와 알라라깔라마는 선인을 만나 4선정(四禪定)과 8선정(八禪定)을 닦았다는 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인도에는 이미 명상수행의 극치에 이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 역시 당시의 요가 수행법을 통하여 현실의 괴로움과 고통에서 벗어나 영원한 안락인 해탈을 얻기 위하여 수행을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부처님은 8선정의 마지막 단계인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에 들어 법계의 무궁함과 능력의 무한함을 초탈하시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이전부터 요가 명상을 수행하던 선인들의 완성경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 요가의 수행법으로는 진정한 해탈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안 부처님은 보리수나무 아래 정좌하고 생각하기를, “설사 이 몸이 죽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정등각(正等覺)을 얻기 전에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노라”고 굳게 결심하시고 중도(中道)의 바른 방법으로 선정에 들었다. 시간을 잊고 자신을 잊은 채 앉아서 오로지 죽지 않는 도리만을 찾고자 몰입하고 몰입하여 삼매에 들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한 부처님은 삼매 속에서 어느 날 새벽 샛별이 반짝이는 것을 보시고 홀연히 생사가 없는 도리와 일체 만법의 본래 모습인 실상세계의 이치를 확연히 깨달았으니 비로소 정등각(正等覺)을 성취한 것이다.

선은 붓다 석가모니 이래의 인도불교에 그 기원을 두며, 오랜 역사를 통해서 인도.중국.한국.일본 등지에서 그 민족의 문화와 시대적인 환경에 따라서 융화하고 발전해 오면서 수행방법과 선풍이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선법(禪法)은 부처님법을 벗어나 있지 않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핵심수행법인 선은 중국 선종의 가르침이다. 중국선종은 경전의 주석적 연구에 치중하는 교종과는 달리 보리달마가 중국으로 건너와, 오직 마음의 깨달음을 중시하면서 ‘경전 밖에 따로 전해지는 가르침으로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바로 마음에 계합하여 견성하여 성불한다 (敎外別傳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라는 기치를 내걸고 독자적인 수행방법과 수도규칙을 확립하여 형성된 것으로 중국불교의 최대종파가 된 선종이다. 보리달마에 의해서 전해진 선은 대승선으로 대승불교의 사상을 실천 수행하는 반야공관(般若空觀)을 바탕으로 하며 지혜와 자비를 구현하는 자기실현의 방법이다.

참선이란 결국 사물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기르고 자기 자신의 내면세계를 반조(返照)하여 투과하는 공부이다. 선은 해탈과 마음의 깨달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엄격한 수행과 자기 절제와 자기 탐구의 방법을 제시해 줌으로써 불교의 수행법 가운데에서 가장 실천적이고 구체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혜거스님 / 서울 금강선원장

 



혜거스님은 1959년 삼척 영은사에서 탄허스님을 은사로 출가, 김제 흥복사 등에서 수선안거했다. <한암대종사문집>, <탄허대화상문집> 편찬위원장을 맡았으며 2005년 탄허불교문화재단 제7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불교방송 ‘자비의 전화’ 상담과 경전 강의, 불교TV 경전 강의 등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파하고 있다.

<참나>를 비롯해 <혜거스님의 금강경 강의>, <유식 30송 강의>, <15분 집중 공부법>, 혜거스님과 함께 하는 마음공부 <가시가 꽃이 되다> 등의 저서가 있다.

http://www.ibulgyo.com /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