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선의 강의·혜거스님

〈7〉보살의 공덕/선을 수행하는 이는 반야를 닦는 보살

通達無我法者 2009. 6. 13. 05:13

 

 

선을 수행하는 이는 반야를 닦는 보살

〈7〉보살의 공덕


중국 선종의 초조인 보리달마대사 역시 반야를 중시하였고, 대승의 반야공관(般若空觀)에 바탕을 둔 강한 실천력과 가르침으로 선을 중국에 뿌리내리게 하였다. 반야공관은 대승사상의 핵심이며 대승보살이 실천해야 할 덕목인 동시에 우리나라 선수행에서 도달해야 할 목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선을 수행하는 이를 반야를 닦는 보살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결국 좌선은 반야를 얻기 위한 수행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당나라 때 현사사비(玄沙師備: 835~908) 스님께서도 “대개 반야를 배우는 보살은 큰 근기를 갖추고 큰 지혜가 있어야 한다 (夫學般若菩薩 具大根器 有大智慧始得)”고 하였으며, <원각경> ‘변음보살장(辨音菩薩章)’에서도 “걸림없는 청정한 지혜가 다 선정에서 나온다 (無碍淸淨慧 皆依禪定生)”고 하였다.

이렇듯이 지혜는 선정을 닦음으로써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므로 모든 보살과 선지식이 선정을 닦았고 선정 수행을 권장한 것이다. 육조 대사께서는 지혜를 선정과 구별해서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시면서 정(定)과 혜(慧)는 하나요 둘이 아니니, 정은 혜의 체(體)요, 혜는 정의 용(用)이라 하여 참 지혜는 선정의 정(定)에서 나온다고 하셨다.

영가현각(永嘉玄覺: 665~713) 대사께서도 <영가집(永嘉集)>에서 “일체 만법의 실상의 이치는 지혜가 아니면 알 수 없고, 지혜는 일체 만법의 이치를 바로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지혜가 만법의 이치를 바로 아는 것임을 극명히 하여 지혜를 성취하는 것이 수행자가 해야 할 최우선의 길임을 밝힌 것이다. 또한 지혜는 계(戒)와 정(定)을 닦음으로써 자연히 우러나오는 것이며, 계율이 아니면 선정에 들 수 없고, 선정이 아니면 지혜가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수행자가 바른 이치를 깨닫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계행을 철저히 하고 선정을 닦아야 한다.

 

진여의 법으로 올곧은 마음 내

모든 선행을 즐기는 행을 하여

중생고통 없애는 자비심을 발현한다
 

 
반야는 대부분 여러 가지 비유로서 그 공능이 이해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어두운 방에 불을 밝히면 방안의 어둠은 사라지고 광명으로 가득 차 색깔과 형상이 있는 모든 것들이 드러나는 것처럼 반야는 무명(無明)의 어둠을 깨뜨리고 제법실상(諸法實相)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물론 그 번뇌가 미세한 것이든 큰 것이든 어떤 것도 문제 되지 않는다. 실제로 좌선에 있어서, 이러한 반야의 특성은 번뇌와 그것으로 야기된 갖가지 업의 정화와 관련되어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반야의 종류는 크게 유분별지(有分別智)와 무분별지(無分別智)로 나뉜다. 유분별지는 일체법은 무자성(無自性)이며 공성(空性)임을 알지만 대상에 대해 그것을 인식 차별하는 것이고, 무분별지는 일체 법이 무자성, 공성임을 안 후 대상이 끊어져 대상과 일체가 되어 저절로 법에 부합되는 것으로 근본지(根本智)라고도 하며, 모든 경전에서 말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지혜, 최상의 지혜, 두루 하지 않음이 없는 지혜, 상대가 끊어진 지혜인 것이다.

그러므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은 불보살은 거기에 머물지 않고 그 반야로서 다시 중생세간을 관찰해야 한다. 그리고 중생의 근기를 자세히 파악하여 역경계나 순경계를 불문하고 하고자 하는 것에 동사섭(同事攝)하여 그 대비방편으로 쉬지 않고 중생 제도를 펼친다. 즉, 경쟁하고자 하는 마음이 끊어지고 신통묘용을 초월하여 소리 없이 이 세상에 처하고, 상이 없이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지혜는 함이 있는 유위법(有爲法)의 지혜가 아니요 세간상의 지혜도 아니다. 벽을 뚫고 하늘을 나는 지혜가 아니라 탐진치를 끊는 것이요, 철저하게 나를 버리는 것이다. 옛 선사들의 수행이 모두 그러했고 제자를 지도하신 것이 다 그러했다.

선정을 닦는 수행자를 반야를 배우는 보살이라 한 이 문단에서 반야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았으므로 이제 보살의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보살(菩薩)이란 불교의 이상적인 인간상을 지칭하는 용어로, bodhi-sattva의 음역인 보리살타의 줄임말이다. bodhi가 깨달음을 뜻하는 보리(菩提)이고, sattva가 유정(有情).중생(衆生)이란 뜻이므로 ‘깨달음을 구하는 중생’이라 할 수 있다.

승조(僧肇: 384~414)는 “보살은 정음(正音)에 보리살타라 하니, 보리는 불도를 말하는 것이요, 살타는 중국에서는 큰마음이라 한다. 중생이 큰마음으로 불도에 들어가는 것을 보리살타라 한다 (菩薩 肇曰 正音云 菩提薩 菩提佛道名也 薩秦言大心 衆生有大心入佛道 名菩提薩)”고 하였다.

이러한 보살은 먼저 대비심(大悲心) 있어야 한다고 했다. 대비심(大悲心)은 maha--karun.a-의 번역으로 고통을 없애준다는 뜻이며, 불보살이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한 연민심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maitrya의 번역어인 중생의 즐거움을 함께 한다는 자(慈)라는 말과 병용하여 사용되고 있다. 이것의 가장 큰 특징은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이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는 믿음으로 성취되는 발심을 자비의 일환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일체제불(一切諸佛)께서 증득하신 도에 일체 보살이 발심 수행하는데 3가지가 있다. 첫째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이요, 둘째 해행발심(解行發心)이요, 셋째 증발심(證發心)이라 한다.

여기서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이란 어떤 마음을 내는 것인가. 대략 세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는 직심(直心)이니, 진여의 법으로 바르게 생각하는 올곧은 마음이요, 둘째는 심심(深心)이니, 일체 모든 선행을 즐겨 행하는 깊은 마음이요, 셋째는 대비심(大悲心)이니, 일체 중생의 고통을 없애주고자 하는 대자비의 마음이다. (復次信成就發心者 發何等心 略說三種 云何爲三 一者 直心 正念眞如法故 二者 深心 樂集一切諸善行故 三者 大悲心 欲拔一切衆生苦故)”라 하고 있다.

그러면 범부와 보살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신심의 유무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 그대로 바로 내가 부처이거나 불성을 지닌 존재임을 확신하여 보리심을 발한 이는 보살이고, 여전히 미혹으로 인해 믿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는 범부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반야를 배우는 보살’이라 한 것은 이미 신심은 성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보살은 자기를 성취하는 반야와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자비심으로써 공덕을 삼는다.


혜거스님 / 서울 금강선원장



[불교신문 2504호/ 2월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