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선의 강의·혜거스님

〈21〉망념 다스리기/자성에는 일체의 분별이 없다

通達無我法者 2009. 6. 15. 06:11

 

 

 

자성에는 일체의 분별이 없다

〈21〉망념 다스리기

좌선을 할 때 가장 힘든 것 중의 하나가 망념이다. 망념을 다스릴 줄 알면 참선할 줄 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망념을 다스리는 일은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초심자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려 하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이 일어나고 그 생각 속을 헤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생각이 일어나면 바로 그것은 망념이다. 마음이 일어나면 왜 망념인가. 사람은 마음이 일어나면 선과 악, 좋고 그름, 미워하고 좋아함 등을 끊임없이 분별한다. 이 분별하는 마음이 곧 망인 것이다. 왜냐하면 보리의 본래 자성에는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 미워하고 좋아함 등 일체의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허물이 아니다. 단지 마음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헤매고 허덕이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그러므로 법안종(法眼宗)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6)스님은 <종경록(宗鏡錄)>권38에서 말하기를,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깨달음이 더딘 것만을 걱정하라. 갑자기 일어나는 생각이 병이요, 이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약이다.(禪門中云 不念起 唯慮覺遲 又云 瞥起是病 不續是藥)”라고 하였다.
 
영명스님 말처럼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깨달음이 더딘 것을 걱정해야 한다. 생각은 일어나게 마련이다. 다만 일어난 생각을 즉시 알아차리느냐 알아차리지 못하느냐 하는 이것이 중요하다. 일어난 생각을 알아차리면 그 생각은 사라지게 되어있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 또 다른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므로 일어나는 생각을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만이 부질없이 일어나는 생각을 바로 잡는 약이 된다. 간혹 일어나는 생각을 억지로 억누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으로서 도리어 병을 불러들일 수 있으므로 경계해야 한다.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깨달음이 더딘 것만을 걱정하라
 
갑자기 일어나는 생각이 병이요
 
이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약이다
 
 
황벽희운(黃檗希運)선사도 “망념을 일으키고 그것을 없애는 것 또한 망념이 된다. 망념은 본래 뿌리가 없지만 다만 분별 때문에 생긴다. 다만 범(凡)과 성(聖) 두 곳에 알음알이를 내지 않는다면, 자연 망념은 없어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망념은 뜬구름과 같아서 실체가 없는 것인데 실체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는 거기에 집착한다. 망념은 안.이.비.설.신.의 육근의 그림자이다. 보면 본 만큼 망념이 되고, 들으면 들은 만큼 망념이 된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사람은 생활 반경을 좁혀야 할 것이다. 좁히고 좁혀 수행을 하다보면 반연을 잊게 되고 반연을 잊어 오래오래 정진하게 되면 공부의 한 부분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생활반경을 좁히는데 두 가지 방법을 쓸 수 있다.
 
하나는 세속의 많은 반연을 줄이는 것이다. 노는 것 좋아하고 구경하는 것 좋아하고 먹고 입는 것에 집착하고 한 가지 일에 꾸준하지 않고 많은 일을 하다가 마는 것 등 끊임없이 허덕이는 이러한 마음을 쉬는 것이다. 현실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룬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결국 참선을 해도 마찬가지가 되고 만다.
 
또 하나는 오관에 끌려가지 않고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다. 눈으로 볼 때는 눈에만 마음이 있고 귀나 코 등 다른 감각기관의 작용이 쉬어져야 하는 것이다. 귀로 들을 적에는 집중하여 듣고 냄새를 맡을 적에는 집중하여 냄새를 맡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가령 눈으로 응시할 때는 귀와 코 등 모든 감각기관이 함께 응시하게 되면 자연히 보는 것이 집중이 되어 모든 반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오래도록 반연을 잊으면 저절로 일편을 이루리니 이것이 좌선의 중요한 방법인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 망념은 어떻게 해야 쉬어지는가? 그것은 한 가지에 집중하고 집중하여 모든 망념을 그 한 가지에 귀결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망념이 결국 한 가지에 귀결되고 이 한 가지가 나와 하나가 되면 일체 선악도 생각하지 않고 망념도 일으키지 않아 반연을 잊어서 그 기간이 오래되면 저절로 공부의 한 부분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좌선의 요술(坐禪之要術)’이라 한 것이니, 좌선하는 방법의 비결로 살아야 할 것이다.
 
좌선이란 앉아서 하는 선으로서 행주좌와가 선아님이 없으나 앉아서 하는 좌선이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다. 한 생각 일어나지 않은 자리에서 오래도록 반연을 잊는 것만이 좌선의 요긴한 방법이라고 한 이 문단이 좌선의 핵심이 된다. 좌선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며, 좌선을 하는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선가(禪家)에서 말하는 타성일편(打成一片)의 경지인 것이다.
 
타성일편이란 하나를 이룬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타성이란 이룬다는 뜻이고 일편이란 한 줄기 한 가닥의 뜻이다. 만 가지의 상황에서 한 가닥 한 가닥 잡혀지는 것이니 말하자면 일체의 정황을 계산해서 비교하려 하지 말고 천차만별의 일과 사물을 한 가닥으로 융통시켜 너와 나라는 차별을 버리고 이것과 저것의 분별을 따지지 말고 누가 주인이고 누가 객이라는 정상(情想)을 버리고 오로지 한 가닥만을 응시하여 한 가닥이 분명해지도록 해야 한다.
 
선종에서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 방법으로 공부하여 이원(二元)적 대립의 관념을 없애는 좌표로 삼아온 것이다. 현실에서는 끝없이 얽히고 말할 수 없이 산란한 현상과 각기 다른 견해의 경계가 한 찰나도 쉬어지지 않아 거기에서 허덕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정황을 원만히 융합하여 한 가닥을 이루는 것이 좌선의 근본적 방법이라 하겠다.
 
<벽암록(碧巖錄)>제6칙 송평(頌評)에 “길고 짧고 좋고 나쁜 것을 모두 묶어 한 가닥을 이루니 하나하나 가져다 다시는 다른 견해가 없어야 한다(長短好惡 打成一片 一一拈來 更無異見)”라고 했으며, 제17칙 평창(評唱)에도 향림스님이 “내가 일찍이 40년만에야 타성일편을 이루었다(我四十年方打成一片)”라고 했으며, 또 <무문관(無門關)> 제1칙 평(評)에 “오래오래 순순히 익으면, 자연히 안과 밖이 일편을 이루는 것이 마치 벙어리가 꿈을 꾸고서 다만 스스로 알 뿐인 것 같이 하라(久久純熟, 自然內外打成一片, 如啞子得夢, 只許自知)”고 했으니, 이는 모두 타성일편의 경지를 설파하여, 공부하는 바른길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먼저 공부의 바른 법을 알고 바른 법대로 쉼 없이 정진하는 것을 올바른 참선이라 할 것이다. 
 
혜거스님 / 서울 금강선원장
[불교신문 2532호/ 6월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