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선의 강의·혜거스님

〈22〉좌선의 공능 (坐禪功能)/사람 소견과 업을 바꾸어 안락하게 해

通達無我法者 2009. 6. 21. 17:31

 

 

사람 소견과 업을 바꾸어 안락하게 해

〈22〉좌선의 공능 (坐禪功能)

 
 
절위좌선(竊謂坐禪)은 내안락법문(乃安樂法門)이로되 이인다치질자(而人多致疾者)는 개불선용심고야(蓋不善用心故也)일새니라 약선득차의(若善得此意)면 칙자연사대경안(則自然四大輕安)하고 정신상리(精神爽利)하며 정념분명(正念分明)하고 법미자신(法味資神)하야 적연청락(寂然淸樂)이니라 약이유발명자(若已有發明者)는 가위여용득수(可謂如龍得水)요 사호분산(似虎山)이어니와 약미유발명자(若未有發明者)는 역내인풍취화(亦乃因風吹火)하야 용역불다(用力不多)니라 단변긍심(但辨肯心)이면 필불상잠(必不相)이니라.
 
은밀히 말하자면 좌선은 안락의 법문이지만 사람들이 병에 많이 걸리는 것은 대체로 마음을 잘못 쓰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뜻을 잘 이해한다면 자연히 사대(四大)가 가볍고 편안해지며, 정신이 상쾌하고 예리해지며, 정념(正念)이 분명해지고, 법미(法味)가 정신을 도와 적연하고 청정하여 즐겁게 된다.
만약 이미 깨달았다면 용이 물을 얻은 것 같고 호랑이가 산에 들어간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지만, 아직 깨닫지 못했더라도 또한 이는 바람 부는 쪽으로 불을 불어주는 것과 같아서 힘을 많이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다만 긍정하는 마음을 지닌다면 반드시 잘못되지 않을 것이다.
 
이 장에서는 좌선으로 얻어지는 공능(功能)과 견성(見性)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좌선의 공능을 좌선의 공덕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좌선 수행의 결과로 자연히 얻어지는 것이다.
 
여기서는 좌선의 공능을 4가지로 말하고 있다. 먼저 4대(四大)가 경안(輕安)해 지고, 정신이 상쾌하고 예리해지며, 정념(正念)이 분명해지고, 법미(法味)가 정신을 도와 적연하고 청정하여 즐겁게 된다는 것이다.
 
먼저 좌선은 안락법문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좌선이 사람의 소견을 바꾸고 업을 바꾸어 나와 더불어 세상을 안락하게 하는 공부이기 때문이다.
안락(安樂)이란 고통에서 벗어남을 말하는 것으로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지혜의 문이 열려야만 한다.
따라서 좌선은 나를 버리고 지혜의 문으로 들어서는 공부이다.
이 문에 들어서서 공부가 성취되어야 몸과 마음에 안락을 이루고 법계에 자재함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 문에 들어서는 방법을 몰라서 대부분 허덕이다가 다른 길로 잘못 들어 오히려 병을 얻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四大가 가볍고 편안해지고
 
정신이 상쾌하고 예리해지며
 
正念이 분명해지고, 法味가 정신을 도와
 
적연하고 청정하여 즐겁게 된다
 
 
좌선이 안락 법문이 되는 것은 좌선이란 오로지 참구하고 참구하여 오직 참구하는 마음뿐 구하는 마음이 없어서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고, 시공을 초월하여 사물을 대함에 응하지 않음이 없고, 이치마다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법화경> ‘안락행품(安樂行品)’에서는 정신(正身).정어(正語).정의(正意).대비(大悲) 등 4법을 안락행이라고 한다.
이 4가지 행이 바르면 한 마음이 편안하고, 담담하여 고요함으로 더불어 도가 합하고, 움직임으로 더불어 마음이 회통하게 된다.
 
완성된 경지에서는 만물에게 꺽임을 당하지 않으므로 비록 위태롭고 험난한 곳에 임하더라도 그 위태롭고 험난함을 당하지 않고, 그 견고한 경지에서는 만물에게 전복됨을 당하지 않는다.
비록 욕심 있고 악한 이를 만나더라도 그 욕심과 악행을 당하지 않으므로 몸소 이 4가지 행을 행하여 악한 세상을 거두어 안락하고, 시끄럽고 번다한 곳에서도 만물에 응하되 가는 곳마다 편안하고 또한 즐겁지 않음이 없으니 안락법문이란 바로 이러한 문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무한한 공능을 성취하기 원한다면 좌선을 할 때 반드시 용심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용심이란 마음을 쓰는 것이다.
세간에서도 마음을 잘 써야 잘 살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하물며 좌선을 하는 데에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좌선을 하면서 마음을 잘못쓰기 때문에 병에 걸리는 것이다.
좌선이란 마음을 정화하는 공부인 것을 알지 못하고 무언가를 구하는 마음이 있고, 빨리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병에 걸리는 것이다.
그래서 ‘좌선은 안락의 법문이지만 사람들이 병에 많이 걸리는 것은 대체로 마음을 잘못쓰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구하는 마음과 빨리 이루고자 하는 마음은 모두 마음을 정화하는 본래 뜻과 정반대되는 마음이기 때문에 병통이 된다.
마음을 정화한다는 것은 마음을 비운다는 뜻이고,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탐.진.치의 마음을 없앤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대부분 탐.진.치를 없앤다는 말의 뜻을 잘못 이해하거나 아예 탐.진.치를 없애는 정도는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되는데 탐.진.치를 끊기가 정말 어렵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 수행의 방향을 잡은 것이 된다고 하겠다.
 
사람에게는 이성적 사고와 감성적 사고가 있다.
이성적으로는 탐.진.치를 끊는 것이 별 문제 될 것이 없으나, 감성적으로 탐.진.치를 끊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감성적으로 탐.진.치가 끊어지고 나서도 잠재적인 탐.진.치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탐.진.치를 뿌리 채 끊어 없애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것을 인식하게 되면 공부의 가닥이 잡혔다고 할 수 있다.
 
마음을 비워야 비로소 지혜가 생긴다.
지혜가 생겨야 용심을 잘할 수 있다.
그러므로 털끝만큼이라도 남아있으면 안 된다.
선은 하나씩 보태는 것이 아니라 하나씩 덜어내는 것이다.
탐.진.치를 덜어내고, 관념을 덜어내고 평생 내 안에 쌓아놓았던 지식을 덜어내고, 본 것을 덜어내고, 들은 것을 덜어내고 궁극에 가서는 수행해서 얻은 경지까지도 덜어내고, 버린다는 생각까지도 버린 상태야말로 진정한 선의 세계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인 것이다.
즉, 조금이라도 얻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선이 아니다.
오히려 짐을 덜어 버리려다 더 큰 짐을 짊어진 격이 되고 만다.
 
<유마경(維摩經)>에서도 “선정에 탐착하는 것은 보살의 속박인 것이며, 뛰어난 방편으로 중생들을 교화하며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보살의 해탈이다”라고 하여 선정에 탐착하는 것조차도 보살의 속박이라고 하였다.
 
요즈음 참선을 수행하고자 하는 일반 재가불자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시점에서 반드시 점검해 봐야할 것은 첫째는 원력이요, 둘째는 지구력이요, 셋째는 방편이다.
 
원력이란 중생의 업을 벗어버리고 보살도를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살피고 살펴서 온 마음에 가득해야 하는 것이고, 지구력이란 한번 세운 서원은 반드시 이루어 질 때까지 잠시도 방심하지 말고 열심히 정진하는 것이며, 방편이란 이루어진 공부를 중생에게 회향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마음이 바른 것이 용심을 잘하는 것이다.
 
 
혜거스님 / 서울 금강선원장
[불교신문 2534호/ 6월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