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붓다의수행법·위빠사나·묘원법사

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1

通達無我法者 2010. 12. 21. 23:33

 

 

붓다의 수행법, 위빠사나 11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보니, 거기 세상이 있습니다.

세상을 보는 순간에는 단지 보이는 대상과 보는 마음만 있습니다.

세상이 없으면 보지 못하며 보는 마음이 없으면 세상이 없습니다.

이 두 가지만 가장 진실한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을 보고 좋다거나 싫다고 하는 것은 공연히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세상은 세상의 일 일뿐이고 보는 마음은 보는 마음일 뿐입니다.

세상에는 세상의 일이 있고 보는 마음에는 보는 마음의 일이 있습니다.

 

단지 거기에 있어서 볼 뿐인 세상의 일들을 시비치 마십시오.

오직 대상이 있어서 지켜보는 자신의 마음을 보십시오.

보이는 대상이나 보는 마음은 지속되지 않습니다.

일어난 순간에 즉시 사라집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수행을 위한 장소와 관련해서 청정도론에

계절, 유머, 기질에 대한 재미있는 분류가 있습니다.

 

더운 계절에는 산림이 알맞고, 추운 계절에는 나무 밑,

장마철에는 열려있는 공간이 알맞습니다.

냉담하며 유머를 잘 이해하는 점액질의 성격인 사람은 산림이 알맞고

성미가 까다로우며 유머를 잘 이해하는 이는 나무 밑이 알맞고,

수다스러우며 유머를 이해하는 이는 열려있는 공간이 알맞습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기질은 산림이, 미워하는 기질은 나무 밑이,

탐욕스런 기질은 열려 있는 공간이 알맞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은 사실 인도라는 특수성에서 말씀을 하신 것이고

또 사마타 수행의 호흡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사마타 수행은 특히 조용한 곳이 좋습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에는 이런 조건이 상당 부분 완화된 상태에서

수행을 할 수가 있습니다. 다음 경전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가부좌를 하고 상체를 반듯하게 세우고 앉아서 전면의 호흡에 알아차림을 확립한다.’

 

수행자 여러분! 이 말씀으로 부처님께서 수행자가 수행을 위하여

어떤 준비를 해야 하고,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가를 가르치셨습니다.

전통적으로 가부좌를 하여 앉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동양 사람들은 바닥에 앉는 것이 익숙해져서

다리를 겹쳐 앉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수행자는 이 자세로 앉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것은 수행을 위해 아주 좋은 자세이며

게으름이나 산만함을 조성하지 않는 평화로운 자세입니다.

 

가부좌를 하여 앉는 데에는 세 가지 자세가 있습니다.

첫 번째, 유지하기 가장 힘든 자세가 결가부좌입니다.

이것은 연습을 하지 않으면 오랫동안 앉아있지 못합니다.

다리가 꼬여 있는 이 자세로 몇 분간 앉아 있으면 아픔을 느낄 것입니다.

 

두 번째 자세는 반가부좌입니다.

한 다리를 다른 다리 위에 놓는 것으로 다리가 꼬이지 않습니다.

이 자세로 더 오래 앉아 있을 수 있지만 눌리는 것 같은 느낌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면 몇 분 후에 다리가 저려올 것입니다.

 

세 번째는 쉬운 자세입니다.

이 자세는 한 쪽 다리를 다른 한 쪽 다리 위에 두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평좌라고 합니다.

그래서 두 다리를 포개지 않고 가지런히 놓는 자세입니다.

이 자세는 초보자에게 제일 좋을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편한 자세이므로 초보자들이 큰 불편 없이 오랫동안

이 자세로 앉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다리를 겹쳐 앉는 것이 아주 힘듭니다.

너무 힘이 들어서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수행에 지장을 줍니다.

이런 사람은 방석, 의자, 긴 의자에 앉아도 됩니다.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수행을 하기 위해 어느 정도 편안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무 편안해서는 안 되며 어느 정도는 수행을 계속하기 위해서

이러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다리를 뻗는다든가 등을 벽에 기댄다든가 하면

몸이 부딪히는 곳이 많아서 편안해짐으로 쉽게 졸음에 빠지기 때문에,

가능하면 세 가지 자세 중에 하나를 선택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상체를 반듯이 세우고 앉아서는’ 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다리를 겹쳐 앉을 때 몸을 똑바로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척추가 똑바르면 척추에 있는 18개의 등뼈들이 차례로 다른 것들 위에 놓입니다.

똑바로 앉으면 근육, 힘줄, 피부와 살이 꼬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근육 등이 꼬였을 때처럼 아픈 느낌이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음이 수행 중에 안정되고 통증의 증가로 좌절하지 않아서

알아차림을 유지하는데 힘쓸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다리를 겹쳐 앉고 수행자는 윗몸을 똑바로 세우는 것은

아주 적절한 자세로 집중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수행자가 지나치게 허리를 곧추 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허리를 지나치게 곧추세우면서 신경을 쓰면 몸이 긴장됩니다.

그래서 집중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부드러우면서도 적절하게 편한 자세가 좋습니다.

 

다음에 ‘전면의 호흡에 알아차림을 확립한다.’ 고 할 때

전면을 빨리어로 ‘빠리무깡’ 이라고 합니다.

빨리어 ‘빠리무깡’ 은 ‘전면에서’ 또는 ‘앞에서’ 라는 뜻입니다.

이때의 전면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요약을 하자면 호흡을 몸에서 알아차리지 않고 전면에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의 전면이 바로 마음자리입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때는 모두 전면에서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전면’ 이라는 말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들의 수행방법입니다.

물론 부처님께서 전면에서 호흡을 알아차리라는 말씀을 하신 것으로 봐서

부처님께서도 이렇게 전면에서 알아차리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집중력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그러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의 지도자를 만나야

비로소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을 알아차리는 심념처 수행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제가 미얀마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처에 가서 심념처 수행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마음을 알아차리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게 되자 스승님께서는

다시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라는 주제를 주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혼란이 왔습니다.

 

우선 마음이 비물질이라서 간신히 알아차렸는데 다시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라고 하니

복잡한 생각이 들어서 도무지 이 말의 뜻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러 차례 질문을 했지만 이런 유의 정신적 상태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어서 계속 알아차리라는 얘기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일하고 있는 그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이때의 상태가 바로 ‘빠리무깡’ 이었습니다.

 

심념처 수행을 하는 수행자는 알아차리는 마음을 가만히 전면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면 현재를 지켜보는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때 호흡이 몸이 아닌 전면에서 뜹니다.

가슴의 느낌도 가슴에서 알아차릴 수 있고 전면의 마음으로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수행을 하면 자연스럽게 발의 움직임도 마음이 발로 가지 않고

전면에서 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일하고 있는 그 마음을 다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전면이라고 할 때의 전면은 몸이 아닌 어느 곳이지, 꼭 앞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가령 옆이나 위에서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은 마음이 밖에 있어서 알아차리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몸을 떠나지 않습니다.

 

마음은 매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나중에 일어난 마음이

먼저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데서 오는 입체적 현상인 것입니다.

이것을 전면의 영상의 스크린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생각을 머리로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몸이 아닌 전면에서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이론으로 알려고 하면 어렵습니다.

 

그래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서 집중력이 생기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이므로 그냥 대상을 지켜보셔야 하겠습니다.

사실 누구나 이런 것들을 경험하고 있지만 이론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다음에는 ‘호흡에 알아차림을 확립한다.’ 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마음을 수행의 대상에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수행의 대상은 호흡입니다.

따라서 수행자는 들숨과 날숨에 마음을 둡니다. 즉 이것을 집중이라고 합니다.

 

수행자는 호흡을 알아차릴 때 먼저 대상을 겨냥하여 알아차리고

그 다음에 알아차림을 지속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말을 ‘호흡의 알아차림을 확립한다.’ 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숨을 들이쉬는 것을 알아차리고 숨을 내쉬는 것을 알아차린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심념처 수행을 할 때 수행자는 마음을 호흡에 둡니다.

마음을 모아 숨을 들이 쉬고 내쉽니다.

 

실제로 수행자는 마음을 콧구멍 입구에 두고

들숨 날숨, 들숨 날숨을 통해 호흡을 알아차립니다.

마음은 코끝에 머물러야 하며 호흡을 따라서 몸으로 들어가고 나오고 하면 안 됩니다.

 

들숨과 날숨을 구분해야 합니다.

들숨은 숨을 내 쉴 때 존재하지 않고 날숨은 숨을 들이 쉴 때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무엇이나 할 때, 하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한 곳에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곳저곳 대상을 따라 다니면 안 됩니다.

수행자가 호흡에 대한 수행을 할 때,

수행자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호흡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네 가지를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숨을 길게 들이쉴 때는 길게 들이 쉰다고 알아차리고

숨을 길게 내쉴 때는 길게 내 쉰다고 알아차린다. ‘

그렇습니다. 호흡을 알아차리는 과정 중 때로는 긴 숨을 쉴 수도 있습니다.

그 때는 수행자는 숨을 길게 마신다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호흡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것을 알아차리는 데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길게 호흡을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일부러 길게 호흡을 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겉으로가 아니고 철저하게 안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 ‘숨을 짧게 들이쉴 때는 짧게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숨을 짧게 내 쉴 때는 짧게 내쉰다고 알아차린다.’

 

그렇습니다. 때로는 짧은 숨을 쉴 수도 있습니다.

이 때 수행자는 짧은 숨을 쉰다는 것을 철저하게 알아차리고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알아차려야 합니다.

 

또한 일부러 호흡을 짧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단지 짧은 숨을 쉴 때 짧은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아시면 됩니다.

 

다음에, ‘온 몸을 알아차리면서 숨을 들이 쉬리라고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을 하며,

자연스럽게 호흡을 하면서 숨을 내 쉬리라고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을 한다.‘

이 구절에서 보면 수행자는 호흡을 알아차릴 때

모든 호흡을, 마음을 다지면서 보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마음을 다지면서 호흡을 알아차리려고 할 경우에는 꾸밈없도록 하고

선명하게 보려고 노력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빨리어 원전에 ‘들숨에 온몸을’ 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빠까야’ 의 직역인데 몸 전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까야’는 즉, 몸은 물질적 몸 전체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호흡을 하는 온몸을 뜻합니다.

 

빨리어인 ‘까야’ 는 물질적인 몸과 무리를 뜻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신체 기관의 몸을 말할 때와 비슷합니다.

여기서 그것은 물질적인 온몸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호흡만을 뜻하는 것으로,

여기서 온몸이라고 할 때 ‘온’ 은 시작과 중간과 끝을 말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붓다.bmp
0.81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