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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3

通達無我法者 2010. 12. 24. 21:53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이 한문으로 사량(思量)입니다.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이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사랑이란 생각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서로가 대상을 잊지 않고 생각하는 것이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대상에 마음에 보내서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것을 숙고라고 합니다.

사량(思量)이 사랑이고, 사랑이 숙고(熟考)하는 것입니다.

숙고는 대상을 기억하여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많이 사랑한다고 해서 모두 좋은 사랑은 아닙니다.

알아차림이 있으면 좋은 사랑을 하며, 알아차림이 없으면 나쁜 사랑을 합니다.

지혜가 있으면 바른 것을 사랑하고, 무지하면 나쁜 것을 사랑합니다.

지혜와 무지는 한 마음에 있는 두 가지의 뿌리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호흡을 알아차릴 때,

안으로, 밖으로, 안팎으로 알아차리는 세 가지 방법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몸에서 몸을 알아차린다고 할 때에 그것은,

다른 사람을 쳐다보고 그들의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호흡을 생각하게 된 경우에는

수행자는 다른 사람의 호흡도 알아차려야 합니다.

 

어떤 때는 수행자는 자기 자신의 호흡을, 그런 다음에 다른 사람의 호흡을,

그런 다음에 다시 자기 자신의 호흡을 알아차립니다.

자신의 호흡과 다른 사람의 호흡 사이를 왔다 갔다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수행자는 안팎으로 몸에서 몸을 알아차린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쳐다보고 그들의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수행자 여러분!

여기서 호흡을 안에서, 밖에서, 안팎에서 알아차리는 것에 대해서

잠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호흡을 알아차릴 때,

안으로는 자신의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하고,

밖으로는 상대의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하고,

안팎으로는 자신의 호흡과 상대의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밖으로 알아차린다고 하는 이 부분이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자신의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은 당연하나 남의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에 대해서는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어떤 수행자는 안에서 알아차리는 것을

호흡이 일어날 때 몸 안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말하고,

밖에서 알아차리는 것을 몸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래 된 주석서는 일관되게 자신의 호흡과 남의 호흡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가 수행을 하면서 호흡을 알아차릴 때 먼저 자신의 호흡을 알아차립니다.

그런 뒤에 얼마가 지나서 집중력이 생기면 그때는 누구의 호흡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단지 대상으로서의 호흡과 그것을 아는 마음만 있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다가 불현듯이 ‘이것이 누구의 호흡이지?’하고 의문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집중의 상태에서 어느 특정인의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었다는 것을

경험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상대의 호흡을 알아차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가령 아기가 잠을 잘 때, 몸이 흔들리면서 일어나고 꺼지는 호흡의 움직임을

볼 수 있을 때도 사실은 상대의 호흡을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때 밖에서 알아차린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의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 항상 있는 일은 아닙니다.

예외적으로 알아차려야 할 때가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가령 애완견이 잠을 잘 때 일어나고 꺼지는 움직임이 보일 경우에도,

조용히 개의 호흡을 알아차리는 순간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안으로, 밖으로, 안팎으로’ 라고 할 때

호흡에만 국한된 말이 아니고 여러 가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할 때

모두 사용함으로써 호흡에서도 함께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의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에 크게 걸릴 것이 없습니다.

이런 표현은 지엽적인 분석보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다시 경전 구절을 살펴보시겠습니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

‘혹은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

 

수행자 여러분! 여기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것이란,

호흡이 일어나도록 하는 요소들을 뜻합니다.

주석서에서는 그것을 비유를 통해서 설명합니다.

대장장이가 불이 필요할 때 풀무를 씁니다.

여기 풀무가 있고 풀무 끝에 대롱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장장이의 노력이 있습니다. 이들 세 가지 것,

풀무와 대롱과 대장장이의 노력에 따라 바람이 생겨서 불을 만듭니다.

 

같은 방식으로 호흡을 생기게 하기 위해서 몸, 콧구멍,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들 세 가지 것에 따라서 각각의 호흡이 몸에서 일어납니다.

그것들 없이 호흡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들 세 가지를 호흡을 일어나게 하는 요소라고 부릅니다.

 

호흡에 대한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몸이 있기 때문에, 콧구멍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있기 때문에 호흡이 있다. ‘

라는 생각이 가끔 수행자에게 떠오를 것입니다.

수행자가 이것을 바라볼 때 ‘호흡을 일어나게 하는 요소를 알아차린다.’고 말합니다.

 

사라지게 하는 요소는 정 반대를 뜻합니다.

몸이 없을 때 호흡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콧구멍이 없을 때 호흡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없을 때 호흡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들 세 가지를 호흡을 사라지게 하는 요소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들 세 가지 요소를 알아차릴 때

호흡을 사라지게 하는 요소를 알아차린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섯 가지 요소 모두를 알아차릴 때

호흡을 일어나게 하는 요소와 사라지게 하는 요소를 함께 알아차린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일어나게 하는 요소와 사라지게 하는 요소를 일부러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수행을 하는 동안 이들 요소에 대한 생각이 일어날 때 마다 수행자는

호흡을 일어나게 하는 요소, 또는 사라지게 하는 요소를 단지 인정하면 됩니다.

이 해석은 매우 오래된 주석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미얀마의 마하시 스님께서 추가한 말씀에 의하면

호흡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리는 것도 이 구절에서 뜻하는 것입니다.

 

빨리어로 일어나게 하는 요소는 ‘사무다야 담마’ 입니다.

그것은 어떤 것을 일어나게 하는 요소들을 뜻할 수도 있고

또한 일어남의 상태나 성품, 또는 단지 일어남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사라지게 하는 요소도 마찬가지입니다.

빨리어로 사라지게 하는 요소를 ‘와야 담마’ 라고 합니다.

이것은 어떤 것을 사라지게 하는 요소를 뜻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사라짐의 상태, 또는 단지 사라짐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큰 스님의 의견으로는 매순간 호흡이 일어나는 어느 곳이건

호흡이 일어남을 조금씩 면밀히 알아차리는 수행자는

호흡의 ‘사무다야 담마’ 즉 ‘호흡의 일어남을 알아차림’ 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매 순간 그리고 어느 곳이든

호흡의 사라짐을 조금 씩 면밀히 알아차리는 수행자는

호흡의 ‘와야 담마’ 즉 ‘호흡의 사라짐을 알아차린다.’고 말합니다.

 

호흡을 알아차릴 때 수행자는 우선 호흡의 시작을 보고,

다음에 호흡의 끝을 보고, 그 다음에 호흡의 사라짐을 봅니다.

이것이 호흡의 시작과 중간과 끝입니다.

 

이것을 또 다른 말로 하면 일어남, 꺼짐, 쉼입니다.

꺼진 뒤에는 잠시 휴지(休止)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호흡의 시작과 중간과 끝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호흡의 일어나고 사라짐의 요소들을 본다기보다

호흡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본다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렇다고 수행자가 수행 중에 일어나고 사라짐의 원인을 보는 것을

제외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모두 설명이 적절합니다.

 

여기서 호흡의 일어남과 사라짐은 사실 일어남과 꺼짐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보통 수행자들이 일어남과 사라짐이라고 할 때에는 무상(無常)을 말합니다.

 

그러나 호흡은 수축하고 팽창하고, 부풀고 꺼지고, 일어나고 꺼지는

그런 현상이 더 실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흡은 일어남과 꺼짐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일어나고 사라짐은 무상(無常)을 말할 때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다음, ‘비구는 단지 몸이 있다는 알아차림이 확립될 때까지’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경전에서 몸을 말하는 말은 많은 용도가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뜻을 해석해야 합니다.

 

여기에 호흡에 대한 절(節)이 있습니다. 이 절(節)이 바로 일어남, 꺼짐, 쉼입니다.

그러므로 몸이라는 단어가 보일 때 마다 그것은 ‘호흡의 몸’ 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호흡에 대하여 알아차릴 때 알아차림은 오직 호흡하는 몸에 있다.’ 라고

알아야합니다.

 

수행자가 마음을 호흡에 둘 때 호흡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몸만 있고,

사람도 없고, 존재도 없고, 여자도 없고, 남자도 없고, 개인도 없고, 나도 없고,

나에 관한 아무 것도 없고, 영혼도 없고, 영혼에 관한 아무 것도 없고,

그리고 다른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호흡만 있으며, 아무도 호흡을 규제하거나 호흡에 대하여 명령하거나

호흡을 만들지 않습니다. 다만 호흡만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알아차림이 확립됩니다.

 

어느 경우에는 온 우주에 호흡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호흡과 단지 그 호흡을 아는 마음만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호흡도 언젠가는 소멸합니다.

그래서 호흡이 사라진 것을 아는 마음만 가지고 있을 때도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점진적으로 지혜가 성숙됨에 따라서 소멸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반드시 호흡도 사라지는 과정을 거치고, 몸의 느낌도 사라지는 과정을 거치고,

그리고 아는 마음까지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면 그것을 열반이라고 말합니다.

다음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몸의 현상들에 대한 분명한 앎과 알아차림을 확립하고 유지한다.’

수행자 여러분! 이것은 더 높은 지혜와 알아차림을 목적으로

오직 호흡에 몸만 있다는 알아차림이 필요한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과 같은 호흡 수행을 할 때에는 수행자는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낮은 단계의 지혜에서 더 높은 단계의 지혜로, 그리고 가장 높은 지혜로 나아갑니다.

더 높은 단계의 지혜와 집중으로 계속 나아가도록 돕기 위하여

우리는 지속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오직 호흡만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이 호흡이 영원하다거나,

소유자, 영혼, 자아, 어떤 영원한 실체를 가졌다고 이해할 때

수행자는 위빠사나의 지혜의 길로 전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호흡에 몸만 있다.’라는 알아차림이 지혜의 계발을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호흡과 단지 그것을 아는 마음만 있다면 유신견이 자리 잡을 수 없으며,

그것은 원인과 결과라는 조건에 의해서 단지 무상, 고, 무아라는 지혜가 나게 하는

유일한 과정입니다.

 

다음에, ‘비구는 갈애와 잘못된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지낸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마음을 호흡에 머물게 하고 숨을 주시하여, 매순간 숨이 오고 가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때

우리는 애착할 어떤 것도 볼 수 없습니다. 호흡은 일어나고 꺼집니다.

이러한 호흡에는 애착할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다만 호흡일 뿐입니다.

 

수행자가 더 높은 단계의 위빠사나의 지혜에 도달했을 때

수행자는 정신적, 물질적 현상들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갈망으로 또는 그릇된 견해로 애착하는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수행자는 어떤 애착이나 갈망을 계속합니다.

어떤 것을 원하고 좋아하고 그것을 집착합니다.

어떤 때는 수행자는 이것에 대하여 잘못된 견해를 갖습니다.

수행자가 사물들이 영원하다고 생각하면 잘못된 견해를 가진 것입니다.

 

그것이 영원히 존속하고 사랑스럽고,

또는 사람일 경우 영원한 실체나 영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견해를 가졌을 때 우리는 잘못된 견해를 가졌다고 말합니다.

 

잘못된 견해로 또는 갈망으로 우리는 사물을 애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호흡과 마음과 몸의 참된 성품을 이해하게 될 때,

수행자는 애착으로 의존할 어떤 것도 찾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단지 호흡과 그것을 아는 마음만 남아있을 것입니다.

이런 상태가 수행자의 지혜를 더욱 발전시키는 과정으로 갈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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