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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55

通達無我法者 2010. 12. 28. 00:08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몸이라고 하는 물질적 현상과

그것을 아는 마음인 정신적 현상이 함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이 두 가지를 연결하는 알아차림이란 행위가 있어서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이란 깨어서 마음을 대상에 보내는 행위입니다.

만약 몸이라는 물질현상에 알아차림이란 행위가 없으면

아는 마음인 정신현상이 없기 때문에 수행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몸이라는 대상과 그것을 알아차리는 행위에 의해 아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는 정신과 물질의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수행입니다.

이것이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마타 수행을 거치지 않고 처음부터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할 때는

얼마간 명칭을 사용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적당한 시기부터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만약 명칭이 떨어지지 않고 습관적으로 붙을 때는

명칭을 붙이려고 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면 수행자가 명칭을 집착하고 있는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알아차리면 차츰 명칭이 붙지 않습니다.

명칭이 자동적으로 붙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기 마음이 좋아서 습관적으로 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을 알아차리면 쉽게 개선될 수 있습니다.

 

명칭이 저절로 제거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명칭을 붙이는 마음을 알아차려서

집착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수행자가 명칭을 붙이는 것을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쉽게 명칭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수행자 여러분!

위빠사나 수행의 궁극의 목표는 정신과 물질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 특성인 무상, 고, 무아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를 초기 수행자가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이것은 바르게 알아차린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괴롭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수행을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처음부터 해탈이나 열반을 생각을 할 수는 없습니다.

아직 법이 무엇인지를 헤아리기가 어렵기 때문에

단지 괴롭기 않기를 바라는 것으로 수행을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만약 누가 그런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수행을 시작했다면

사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하나의 막연한 바람일 뿐입니다.

그것보다는 절실한 현재의 괴로움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

더 실제적인 수행을 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히려 무엇인가를 바라고 시작한다면 결코 궁극의 목표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런 바람이 없어야 비로소 대상의 바른 성품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라는 것이 있으면 탐욕과 어리석음으로 보기 때문에 대상을 지혜의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자에게 이상은 있어야 하지만 행함에 있어서는 바라는 마음 없이 해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릴 때 마지막에 최고의 지혜가 납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들에게 이상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상은 단지 이상이어야 합니다.

그 이상을 실제 알아차릴 때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실재하는 현상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상은 이상으로 그쳐야 하고 알아차릴 때는 단지 단순하게 대상을 지켜보아야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일어났다. 지혜[智]가 일어났다.

통찰지[慧]가 일어났다. 명지[明]가 일어났다. 광명[光]이 일어났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상은 몸과 마음을 통하여 무상, 고, 무아를 알고 나서 깨달음을 얻은 지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상 말씀드린 것들이 모두 지혜에 관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선언을 하신 뒤에 전법을 시작하셨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는데 여러 단계의 과정이 필요하지만

그 중에 마음을 알아차리는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하는데 그 마음의 역할을 모른다면 대상을 바르게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는 등잔 밑이 어두운 것입니다.

여기서 궁극의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 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법의 바른 성품인 무아를 알아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자가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이 대상은 법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대상을 아는 마음이 있어서 대상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아는 마음이 없는 대상은 이미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대상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그것을 보고 아는 마음이 없으면

대상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대상이 법이 아니고 대상을 아는 마음이 법입니다.

 

이때 대상은 단지 아는 마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대상을 아는 마음이 없으면 대상이 법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최종적인 법은 대상을 아는 마음입니다.

 

만약에 대상만 있다면 대상의 변하는 실재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큰 의미에서는 대상과 아는 마음이 모두 법의 범주에 있지만

사실 법의 실재는 대상을 아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마음으로 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때의 대상도 반드시 자신의 몸과 마음이어야 합니다.

수행자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릴 때만이 대상의 실재를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밖에 있는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무상을 알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때 내가 낙엽을 본다는 유신견으로 보는 것이지 있는 그대로의 낙엽을 보지 못합니다.

낙엽을 볼 때 낙엽이 주는 감성적 정보가 먼저 작용하여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부모님의 죽음을 볼 때도 있는 그대로의 무상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동안 살면서 생긴 수많은 생각들이 부모님의 죽음의 의미를 가려버립니다.

그래서 누구를 막론하고 오직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르게 알아차릴 때만이

유신견이 없이 바른 성품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세상에 있는 것이 모두 법이라는 견해도 잘못된 것입니다.

오직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하지 않으면 법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인식의 영역을 벗어난 것은 이미 법이 아닙니다. 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상을 아는 마음이 없으면 그것은 법이 아닙니다.

단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마음이 있어야 그 대상들이 법을 성숙시킬 수 있습니다.

 

12연기의 원인과 결과의 지혜와 위빠사나 수행의 통찰지혜로 보면

모든 것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만 있지 이것을 주관하는 어떤 존재도 없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릴 때 바른 알아차림을 하면 내 몸, 내 마음이라는 생각 없이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바른 알아차림이 있으면 단지 대상과 아는 마음만 있지

나라고 하는 자아가 개입될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때는 유신견이 붙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때 완전하게 무아를 아는 지혜가 난 것은 아닙니다.

 

마음을 알아차릴 때만이 내가 본다는 유신견이 없이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유신견이 없이 볼 때라야 완전한 무상의 지혜가 납니다.

바로 이 무상의 지혜는 마음이 매순간 변한다는 사실을 통해서 압니다.

이때의 마음은 대상이지만 이것을 알고 있는 것도 바로 마음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릴 대상에 법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알아차리고 있는 마음에 법이 있습니다.

 

이처럼 대상은 법을 알게 하는 원인이고 결과는 법을 아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대상이 법이 아니고 마음이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을 찾아서 다른 것을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할 때만이 실재하는 바른 법을 볼 수가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이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수행자는 대상을 쫓아서 여기저기로 가서 이것저것을 기웃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수행자가 어디에 있거나 어느 시간에나 자신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먼저 알아차리기 쉬운 몸을 대상으로 알아차린 뒤에 차츰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알아차릴 때만이 알아차리는 자아가 없고

단지 그 순간의 마음이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라는 지혜가 납니다.

 

수행자가 머물러야 할 장소가 있습니다.

이 장소를 벗어나면 온갖 괴로움의 가시밭길을 가야합니다.

이것이 몸과 마음입니다.

이 몸과 마음이란 6가지 감각기관과 6가지 감각대상이 부딪치는 12처입니다.

이것을 12가지 장소라고 합니다.

그리고 6가지 아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합쳐서 18계라고 합니다.

이것이 정신과 물질의 세계입니다.

모든 번뇌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 18가지 세계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을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벗어나면 우주를 떠도는 나그네가 되어서 끝없는 윤회를 계속해야 합니다.

 

이러한 지혜가 나도 지혜를 얻은 자는 없습니다.

단지 그 순간의 마음에 의해 지혜가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 지혜는 나의 지혜가 아닙니다.

위빠사나의 지혜라는 것이 자아가 없는 것을 아는 것이라서 자연스럽게 이러한 지혜를 얻습니다.

 

내가 없다는 지혜가 나지 않고서는 집착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떤 방법으로도 어리석음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어리석은 나도 없다고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수다원이라는 정신적 지혜는 있어도 수다원을 얻은 자는 없습니다.

아라한이라는 정신적 지혜는 있어도 아라한을 얻은 자는 없습니다.

자아가 없는 것이 최고의 깨달음이기 때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제 마음을 풀어놓지도 말고 그렇다고 마음을 속박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풀어놓는 것도 과보심에 의해 조정되는 것이고 속박하는 것도 과보심에 의해 조정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과보심의 지배에서 벗어나 스스로 알아차리는 마음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마음에 대해서 잘 몰랐습니다.

마음이 변하지 않고 항상 하는 것 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이 마음이 나의 마음이 아닌 것이며 그래서 이 마음을 집착할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은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로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나 오랜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노력해서 새로운 원인을 만들면 현재에도 자유로울 수 있으며

미래에도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지혜수행이라서 대중적이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더욱 접하기 어렵지만 하기도 어려운 수행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혜보다 사회적 명예나 감각적 쾌락을 원합니다.

하지만 선업의 과보가 있으면 감각적 쾌락 보다는 지혜에 마음을 기울일 것입니다.

이제 이 길을 가십시오.

이 길은 혼자서 가는 고독한 길입니다.

하지만 그 끝은 지고의 행복을 얻는 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제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모든 성인들이 가신 길을 함께 갈 것을 권합니다.

특히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서 하루빨리 번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합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첫째, 있는 마음 알아차리기,

둘째, 일어난 마음 알아차리기,

셋째, 하려는 마음 알아차리기,

넷째,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입니다.

 

이 방법 외에 또 다른 마음 알아차리기를 스스로 계발해서

얼마든지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모든 수행자들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통해서 지고의 행복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