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붓다의수행법·위빠사나·묘원법사

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56

通達無我法者 2010. 12. 28. 00:10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법은 대상의 법과 진리의 법이 있습니다.

어느 것이나 알아차릴 대상에 속합니다.

법은 항상 있는 것이지만 손에 쥐어주어도 알기가 어렵습니다.

아직 조건이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법은 준비된 사람에게만 법입니다.

법은 알아차리는 사람에게만 법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법이 아닙니다.

 

수행을 시작한다는 것은 대상의 법을 맞이하는 것이며

수행의 결과는 진리의 법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좋은 결과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좋은 결과는 준비하는 것으로 그친 자에게만 나타납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부터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수행을 법념처(法念處)라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과,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공부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이상의 4가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모두 합쳐서 사념처라고 합니다.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들숨과 날숨의 호흡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시작으로 해서,

4가지 자세를 알아차리는 수행,

4가지 분명한 앎을 하는 수행,

32가지 몸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수행,

4가지 요소를 알아차리는 수행,

9가지 묘지에서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기본적으로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덤덤한 느낌이 있습니다.

그러나 느낌을 자세하게 분류하면

맨느낌, 육체적 느낌, 정신적 느낌으로 나눕니다.

그래서 몸의 느낌과 마음의 느낌이 있습니다.

 

느낌을 통해서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느낌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큽니다.

특히 느낌은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이며

깨달음으로 가는 가장 중요한 길목으로 있는 대상입니다.

 

몸과 마음을 느낌으로 알기 때문에 느낌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느낌을 통하여 찰나삼매가 생겨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이 발견되었던 것입니다.

오직 느낌을 통해서만이 무상, 고, 무아의 법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느낌을 깨달음의 황금의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해서는

부처님께서 자세하게 설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대념처경에서는 16가지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그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 16가지의 마음 안에 모든 마음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소홀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마음에 대한 것은 논장에서 자세하게 밝혔기 때문에

대념처경에서는 간략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뿐더러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가장 중요한 수행이지만

수행자들에게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몸과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보다는

자세하게 다루지 않으신 것으로 이해됩니다.

 

사실 논장도 대중들이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대중들에게는 설하지 않고 천인들에게 설하신 법문입니다.

그리고 지혜가 수승한 사리뿟다 존자에게만 설하셨습니다.

이천 오백년 전에 몸을 알아차리기도 힘든 시기에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 알아차리는 것이

결코 쉬운 수행방법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발표한 대념처경에서는

마음에 대해서 다각도로 접근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이번에 밝힌 내용은 경전에 없는 내용을 많이 보완하였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서는

처음에 마음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논장에 있는 내용을 요약하였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16가지 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모곡 사야도의 13가지 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국 명상원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방법 4가지를 공부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에서부터 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이

다양하게 제시되었기 때문에 심념처 수행에 한걸음 가까이 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 때 다음 단계인 법에 대한 바른 견해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림으로 인해 법이 완성되어야 비로소 도과를 성취하여 행복을 얻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법(法)을 빨리어로 담마(dhamma)라고 합니다.

빨리어에서 담마라는 말처럼 다양하게 쓰이는 말이 없을 것입니다.

빨리어 사전에는 담마에 대한 해석이 무려 30여 가지가 있을 정도입니다.

 

그중에 일부만 소개하면 담마라는 뜻이

법(法), 진리, 이론, 정리(正理), 상태, 성질, 사물, 도(道) 등등이 있습니다.

이 담마를 산스크리트어로 말하면 다르마라고 합니다.

 

이 법이라는 말을 크게 2가지로 요약하면

진리로서의 법이 있고, 마음의 대상으로서의 법이 있습니다.

진리로서의 법은 무상, 고, 무아입니다.

마음의 대상으로서의 법은 사념처 수행입니다.

 

수행자가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이때 알아차릴 대상을 마음의 대상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법인 것입니다.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는 진리의 법으로 쓸 때는

영어 첫 글자를 대문자로 써서 담마(Dhamma)라고 표기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대상으로 쓸 때는

영어의 첫 글자를 소문자로 써서 담마(dhamma)라고 표기하기도 합니다.

 

법을 나눌 때 관념적인 법이 있고, 궁극적인 법이 있습니다.

관념적인 법은 세속의 관점에서 본 진리입니다.

궁극의 법은 출세간의 관점에서 본 진리입니다.

이것을 세속의 법과 출세간의 법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세속에 있는 실재하는 것이라면 그것도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세속의 진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개념은 매우 포괄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좋건 나쁘건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에서 가져야할 바른 인식입니다.

이런 인식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결코 궁극적 진리에 도달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것에 대해서나 선입관을 갖지 않고 수행을 시작하는 것이 기본자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관념의 벽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런 알아차림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크다고 했을 때도 크다는 것은 관념입니다.

크다는 기준은 온전하게 자신의 판단에 의한 것입니다.

무엇에 비해서 크다는 것인가요?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설정한 기준일 뿐입니다.

작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에 비해서 작다는 것입니까?

 

사회통념과 진실은 항상 다른 것입니다.

이처럼 대상이 가지고 있는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이 되었거나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에게 법이라고 할 때는 먼저 알아차릴 대상으로서의 법을 말합니다.

이것이 사념처로 몸, 느낌, 마음, 마음의 대상인 법입니다.

이렇게 4가지 대상을 알아차려서 지혜가 성숙되면

자연스럽게 무상, 고, 무아를 알게 됩니다,

이때 진리로서의 법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대상으로서의 법이

나중에 수행을 해서 지혜가 나면 진리의 법이 됩니다.

 

신념처 수행에서는 기본적으로 몸을 대상으로 알아차리고,

수념처 수행에서는 느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고,

심념처 수행에서는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합니다.

그러나 법념처 수행에서는 신념처와 수념처와 심념처를 모두 포함합니다.

법념처는 이상 3가지 수행을 모두 포함할 뿐만 아니라

3가지 수행을 하면서 나타나는 다양한 장애와 지혜를 모두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래서 수행의 완성은 법념처로 이루어집니다.

 

이처럼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이 4가지라서 이것을 4념처라고 합니다.

사실 알아차릴 대상은 몸과 마음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느낌이 포함됨으로써 수행이 구체화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3가지가 모두 알아차릴 대상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법념처가 포함되어 완벽한 수행체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마음은 대상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대상을 가진다는 것이 수행의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상이 갖는 의미가 중요합니다.

만약 알아차릴 대상이 없다면 수행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법이 없는 수행은 없습니다.

 

수행을 할 때는 왜 4가지 대상을 알아차려야 하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수행자가 과연 무엇을 알아차리고, 어떻게 알아차릴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수행을 말할 때 ‘무엇이’ 중요하다는 것만 강조합니다.

그래서 관념에 머무는 수가 많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을 ‘어떻게’ 알아차릴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관념에 머물지 않고 실재를 알아차리도록 합니다.

 

사실 관념의 입장에서는 실재를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구체적 실천방법을 제시할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알면 말할 수 있지만 모르기 때문에 그냥 관념에 그치고 마는 것입니다.

 

법은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그 대상이 바로 사념처입니다.

그런데 이 사념처에 포함된 것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행의 대상은 선심이나 선행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선심이나 불선행만을 대상으로 하지도 않습니다.

몸과 마음을 가지고 수행을 할 때는 몸과 마음에 나타나는 모든 것이 대상입니다.

그래서 특정한 것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은 선악이 없고 좋고 나쁜 것이 없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할 때 몸과 마음을 가지고 살면서 나타나는

모든 것들을 모두 대상으로 삼아야합니다.

만약 이 대상들 중에서 어떤 것은 되고, 어떤 것은 안 된다고 한다면

이것은 실재를 알아차리는 수행이 아닙니다.

 

몸과 마음을 가지고 살면서 나타나는 모든 것이 수행의 대상이어야

비로소 사실에 입각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에 입각한 것이어야 그것들의 진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알아차릴 대상에 대해서 차별이 없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에서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위빠사나가 아닌 사마타 수행에서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관념을 대상으로 수행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수행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대상에 차별을 두지 않는 것이

수행을 시작할 때부터 바른 견해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있는 그대로의 것을 알기 위해서 하는 수행입니다.

그래서 대상이 가지고 있는 성품이 무엇인지를 알아 근본적인 방법으로 대처하는 수행입니다.

 

수행자들이 처음부터 이런 시각을 가지고 수행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누구나 윤회하는 생명은 불선업의 과보를 받아서 사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세계를 벗어난 정신세계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을 통찰하여 스스로 길을 찾아야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법념처는 5가지 장애로부터 시작됩니다.

일반적으로 법이라고 하면 진리를 연상하기 마련인데

법의 첫 번째 대상이 5가지 장애라는 것입니다.

5가지 장애는 불선심과 불선과보로 인해서 일어나는 현상들입니다.

이처럼 5가지 장애가 법의 첫 번째 대상이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섯 가지 장애 속에서 살아왔다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은 5가지 장애 속에서 성숙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견해는

이러한 불선심과 불선행의 정보를 바탕으로 두고 형성된 것들입니다.

 

그래서 법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해도

대상을 바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토양이 조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반드시 스승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법은 알아차릴 대상이고,

그 대상은 실재하는 것으로 어떤 것이나 진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정관념으로 판단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바르게 법념처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