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초기불교

12연기/마하시 사야도(Mahāsi Sayādaw) 법문

通達無我法者 2011. 8. 6. 01:39

 

 

십이 연기

(十二緣起, paṭicca-samuppāda)













마하시 사야도(Mahāsi Sayādaw) 법문

우 에 마웅(U Aye Maung) 영어 번역

First printed and published in the Union of Myanmar, March, 1982


김한상(수마나) 우리말 번역










       한국 위빠사나 선원(도서출판) 행복한 숲



마하시 사야도의 생애와 업적

  

   

마하시 사야도(Mahāsi Sayadaw)라고 더 잘 알려져 있는 우 소바나 대장로(U Sobhana Mahāthera)는 1904년 7월29일 농민 우 칸 토(U Kan Htaw)와 도 쉐 옥(Daw Shwe Ok)의 아들로 태어났다. 미얀마 북부의 쉐보(Shwebo)에서 서쪽으로 7마일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세익쿤(Seikkhun)이라는 마을이 사야도의 고향이다.

  

마하시 사야도는 여섯 살 때 마을의 승원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12살 때 소바나(sobhaṇa)라는 법명으로 사미계를 받았다. 20세가 되던 1923년 11월26일 비구계를 받고, 이후 3년 동안 미얀마 정부의 초· 중· 고급의 빨리어 시험을 모두 통과했다.

  

비구계를 받고 4년이 지나 불교학의 중심지로 알려진 만달레이(Mandalay)로 가서, 명망 있는 여러 학인스님 밑에서 공부를 계속 했다. 5년째가 되는 해에는 몰라먀잉(Mawlamyaing)으로 가서 따웅 와잉 갈라이 따익 캬웅(Taungwaing-galay Taik Kyaung)수도원에서 경전을 가르치는 임무를 맡았다.

  

비구가 되고 8년이 되자, 사야도는 동료 비구 한명과 함께, 비구에게 허락된 최소한의 소지품인 발우와 가사 세벌만 지니고 정확하고 효과적인 명상수행 방법을 찾고자 몰라먀잉을 떠났다. 따톤(Thaton)에서 밍군 제타완 사야도(Mingun Jetawun Sayādaw) 1세로 알려진 이름난 명상 스승인 우 나라다(U Nārada)스님을 뵙고 사야도의 지도하에서 곧바로 강도 높은 수행을 했다.

  

수행에서 뛰어난 진전을 이룬 마하시 사야도는 1938년 세익쿤을 방문했을 때, 세 명의 첫 제자들에게 명상법을 훌륭하게 지도할 수 있었다. 이 세 명의 재가 제자들도 수행에서 놀라운 진전을 이루었으며 이 세 명의 재가 제자들을 보고 마을 사람 50여 명이 크게 고무되어 함께 강도 높은 수행 코스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마하시 사야도는 몰라마잉 승원으로 긴급히 돌아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기 때문에 원하는 만큼 그곳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와병 중이던 연로한 주지스님은 마하시 사야도가 돌아오자 얼마 지나지 않아 입적하였고, 마하시 사야도는 몰라먀잉의 수도원을 맡아 비구들을 가르치는 일을 다시 시작했다. 이때 그는 미얀마 정부가 처음 주관하는 빨리어 성전 시험을 준비했는데, 1941년 단번에 이 시험에 합격하고 사사나다자 스리빠와라 담마짜리야(Sāsanadhaja Sripavara Dhammacariya)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리고 일본이 미얀마를 침략했을 때, 정부 당국은 몰라먀잉의 따웅 와잉 갈라이 따익 캬웅 승원과 비행장이 가까워 공습의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그 주변에 사는 사람들에게 피난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일은 마하시 사야도는 고향마을 세익쿤으로 돌아가서 위빠사나 명상에 전념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것을 가르칠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가 되었다.

  

당시 마하시 사야도는 마하시 카웅(Mahā-Sī Kyaung)이라는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이 승원에는 유별나게 큰(Mahā) 북(sī)이 소장되어 있었는데, 마하시라는 이름은 이 승원의 큰북(Mahāsi)에서 유래하였다.


1945년, 바로 이 시기에 마하시 사야도는 위대한 저술 위빠사나 수행 입문서(Manual of Vipassana Meditation)를 썼다. 이 책은 사념처 수행 방법론에 대한 이론과 실제를 상세하게 설명한 정통 입문서인데, 모두 두 권, 858쪽이나 되는 대작이다. 이 책을 쓰는 동안 근처 쉐보에서는 매일 공습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까지 이 책 중 한 단원만 영어로 번역되어 스리랑카 불교출판협회(BPS)에서「실용 위빠사나, 그 기초와 진행 단계(Practical Insight Meditation: Basic and Progressive Stages)」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마하시 사야도가 지도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위빠사나 명상을 훌륭하게 지도하는 스승이라는 명성이 쉐보와 사가잉 지역 전체에 퍼져나갔고, 미얀마의 원로 정치가이며 독실한 불교 신자인 우 뜨윈(U Thwin)경의 주목을 받았다. 우 트윈경은 덕망과 능력을 갖춘 명상 스승이 지도하는 수행 센터를 지어 미얀마에 참된 불교를 육성하고자 하는 뜻을 품고 있었다. 마하시 사야도를 친견하고 법문과 사가잉의 띨라신(Thilashin)1에게 주는 명상의 지침을 듣고 나서, 우 뜨윈 경은 자신이 찾고 있던 이상적인 분을 마침내 찾았다고 확신했다.

   

1947년에 우 뜨윈 경을 초대 원장으로 교학(pariyatti)과 수행(paṭipatti)의 진흥을 목표로 한 불교진흥원(Buddha Sāsana Nuggaha Organization)이 양곤에 세워졌다. 1948년 우 Em윈 경은 양곤 꼬까인(Kokine)지역의 5에이커 규모의 대지를 수행 센터 설립을 위해 불교 진흥원에 내놓았다. 이곳이 바로 현재의 싸사나 에익따(Sasāna Yeikthā), 즉 불교 수련원이 있는 곳으로 약 20 에이커 규모에 수많은 건물이 들어서 있다.

  

1949년 당시 미얀마의 총리 우 누(U Nu)와 우 뜨윈 경은 마하시 사야도에게 양곤으로 와서 수행을 지도해달라고 청을 드렸고, 그 해 12월 4일 사야도는 양곤에서 처음으로 25명의 수행자에게 위빠사나 수행법을 지도하였다. 사야도가 양곤에 도착한 이후 유사한 명상 센터가 미얀마 전역에 백여 군데 이상 생겨났다. 새로 설립된 센터에서도 똑같은 명상법을 가르쳤다. 1972년의 조사에 따르면, 이러한 미얀마 및 해외의 수행 센터에서 지도받은 수행자의 수가 70만 명을 넘었으며 동서양에서 위빠사나 코스가 계속 확산하고 있다.

  

불기 2500년(서력 1956년)을 기리는 역사적인 6차 결집(Chaṭṭha Sanghāyāna)이 2년 동안 양곤에서 열렸을 때, 마하시 사야도는 합송되는 삼장을 승인하는 최종 편집자로써 중요한 역할을 하셨다. 그뿐 아니라, 사야도는 합송된 성전 내용에 대해 질의를 하는 질문자(pucchaka)역할도 맡았다. 그리고 답변은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박학

다식한 위찟따사라왐사(Vicittasārābhivamsa)스님2이 하셨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백일 후 열린 첫 결집 때는 마하 깟사파(Maha Kasappa)가 질문자 역할을 맡았고, 우빨리와 아난다 존자가 답변자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성전 암송이 끝나고 삼장(Ti-Pitaka)이 완성이 되면, 고대 주석서와 복주석서에 대한 합송이 결정되고 비판적인 편집과 면밀한 검토가 진행되는데, 이 일에도 마하시 사야도는 큰 역할을 하셨다.

   

이러한 여러 가지 임무를 하면서도 마하시 사야도는 학문적으로 깊이 있고 뛰어난 저서를 여러 권 남겼다. 사야도가 저술하거나 번역한 70권 가량의 책이 대부분 미얀마어로 되어있고, 몇 권은 빨리어로 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돋보이는 것은 빨리어 원저(原著)를 미얀마어로 번역하여 주석을 달아 편찬한「청정도론」의 대주석서인「마하띠까(Mahāṭīkā)3이다. 모두 두 권으로 된 빨리어 원전은 해석하는데 언어학적 어려움이 있는 책이다.

이 책을 편찬한 공로로 사야도는 1957년 악가 마하 빤디따(Agga-Mahā-pandita)란 칭호를 받았다.

  

그 외에도 불법을 전파하기 위한 마하시 사야도의 놀라운 활약은 그침이 없었다. 6차 결집 준비를 위해 다녀온 두 차례의 해외 순방 이후, 위빠사나 수행지도와 설법을 하기 위해 많은 국가를 방문하셨다.

  

힘차게 일을 하면서도 사야도는 자기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아  날카로운 수행지도력이 결코 무디어진 적이 없었으며 1982년 8월 14일, 78세에 심장마비로 열반하시기 바로 전까지 원기왕성한 몸과 마음으로 법(Dhamma)에 대해 깊은 헌신을 하셨다. 바로 돌아가시기 전날 저녁에도 새로운 수행자에게 입문지도를 하셨다고 한다.

  

마하시 사야도는 날카로운 지성과 심오한 학문과 깊은 명상체험을 균형 있게 두루 갖춘, 아주 보기 드문 스승이다. 한평생 저서와 법문을 통하여 동서양의 수많은 사람에게 커다란 이익을 주셨고 개인적인 성취와 업적으로 당대 불교계에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세존, 아라한, 정등각자께 귀의하옵니다.




  










차례



1. 12연기의 중요성   10

2. 보살의 숙고   11

3. 순관(順觀)으로 추론하다   11

4. 추론과 사유를 넘어서   12

5. 법은 현자들만 이해할 수 있다   14

6. 이해하기 어려운 가르침   15

7. 무명(無明)이란 무엇인가   17

8.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무지   19

9. 멸성제(滅聖諦)와 도성제(道聖諦)에 대한 무지   21

10. 바른 견해[正見]   23

11.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상카라[行]가 일어난다   25

12. 불선업   27

13. 선업의 거부는 악업을 의미한다   30

14. 무명과 전도된 인식   31

15. 상카라[行]를 조건으로 식(識)이 일어난다   36

16. 상카라[行]에서 어떻게 재생연결식[識]이 일어나는가   38

17. 상견(常見)과 단견(斷見)   41

18. 임종 때의 표상   44

19. 마하담미까 이야기   45

20. 식(識)에서 정신-물질[名色]이 일어난다   51

21. 화생(化生)   54

22. 습생(濕生)   55

23. 인식과정   56

24. 의문(意門) 인식과정   59

25. 오문전향에 이어지는 의문(意門) 인식과정   60

26. 식(識)을 조건으로 정신-물질[名色]이 일어난다   61

27. 짝꾸빨라 장로 이야기   67

28. 목갈리뿟따띳사의 평결   68

29. 선한 생각과 행복   70

30. 정신-물질[名色]과 여섯 감각장소[六入]   72

31. 물질과 여섯 감각장소[六入]   73

32. 요약   75

33. 수행을 강조하시는 부처님   79

34. 난해한 연기법   81

35. 마노의 문[意門]과 식(識)의 관계   104

36. 재요약   109



37. 느낌[受]을 조건으로 갈애[愛]가 일어난다   111

38. 여섯 종류의 갈애   111

39. 갈애와 윤회   114

40. 갈애의 소멸   115

41. 마하띳사 장로 이야기   116

42. 앵무새 이야기   117

43. 관찰과 소멸   118

44. 토대를 잘라냄   120

45. 번뇌와 알아차리지 못함   121

46. 생각과 감촉   123

47. 세 가지 갈애   124

48. 갈애[愛]를 조건으로 집착[取]이 일어난다   125

49. 감각적 즐거움의 토대   127

50. 바른 견해[正見]   130

51. 저 세상을 봄    131

52. 바라밀과 업   132

53.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   134

54. 꼬라캇띠야 이야기   135

55. 다른 계율과 의식에 의한 수행   138

56.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   139

57. 집착[取]을 조건으로 존재[有]가 일어난다   141

58. 멘다까 이야기   143

59. 집착[取]과 업으로서의 존재[業有]   144

60. 뿝파랏따 본생경   145

61. 바른 선행과 그릇된 선행   145

62. 업과 윤회   147

63. 네 가지 업의 종류   147

64. 아자따삿뚜 이야기   148

65. 습관적인 업과 임종할 무렵에 지은 업   150

66. 태어남과 괴로움   152

67. 슬픔과 탄식   153

68. 수브라흐마 천신 이야기   156

69.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은 지나친 갈애를 뜻한다   157

70. 재생의 원인이 되는 사견에 대한 집착   158

71. 미신과 나쁜 재생   161

72. 종교에 대한 집착   163

73.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    164

74.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   165

75. 욱가 장자 이야기   168

76. 위빠사나 수행과 집착    169

77.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   171

78. 과거의 다섯 가지 원인   172

79. 상카라[行]와 업으로서의 존재[業有]   172

80. 과거의 원인에서 비롯된 현재의 결과   173

81. 위빠사나 수행에 필요한 지식   174

82. 현재 원인의 제거   175

83. 아라한의 인생관   176

84. 단멸이 아닌 괴로움의 소멸   178

85. 야마까 비구 이야기   178

86. 오온의 성질에 대한 와지라 비구니의 말   180

87. 네 가지 층, 세 가지 연결, 스무 가지 형태   181

88. 세 가지 회전   181

89. 연기의 네 가지 측면   182

90. 사띠 비구의 사견   183

91. 각 현상의 분명한 특성   184

92. 노력 없음   185

93. 결과에 대한 원인의 관련성   186

94. 결론   187

95. 번뇌의 회전을 끊어버림   188

96. 아라한과 부처님의 특성   189

97. 바까 대범천 이야기   191

98. 정등각자   192

99. 부처님의 명성   193

100. 사성제의 개요   194

101. 부처님과 정등각자   195

102. 요약   196





역주(譯註)-----------------201






*약어------------------------------------288

*일러두기

*참고문헌

*도표--------------------------------291


    1. 마음의 개관

    2. 52가지 마음 부수법

    3. 욕계의 선한 마음

    4.불선한 마음

    5. 89가지 마음과 선. 불선. 무기

    6. 89가지 마음과 세계

    7. 물질의 개요

    8. 오문전향의 인식과 등급

    9. 眼門에서의 인식과정

   10. 의문인식과정의 제한된 속행과정

   11. 24가지 조건

   12. 네 가지 색계선과 다섯 가지 색계선
















1. 연기의 중요성



연기는 불교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보살¹은 연기로 존재의 속성에 대해 깊은 숙고를 시작해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보살은 다른 보살들이 마지막 생에서 깨달음을 얻기 직전 늘 그랬던 것처럼 먼저 늙음과 죽음을 관찰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늙은이와 병든 사람, 그리고 시체를 보고 나서 한 사문(沙門)²을 만났고 늙음과 죽음이 없는 법을 구하기 위해 출가했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늙음, 병듦, 죽음이라는 삶의 괴로움을 보았습니다.

  

 모든 중생들은 이러한 삶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한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따라다니는 이런 괴로움에는 끝이 없습니다. 끊임없는 삶의 유전(流轉)에 비추어볼 때, 모든 중생은 속박에 얽매어 있고 괴로움을 겪어야만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삶은 태어남과 죽음의 무한한 연속입니다. 닭과 오리의 운명은 참으로 비참합니다. 몇몇은 아직 부화되기도 전에 잡아먹힙니다. 알에서 부화해도 얼마 살지 못하고 조금 자랐을 때 도살당합니다. 가금류는 오직 인류의 소비를 위해 도살되려고 태어났을 뿐입니다. 만약 한 생명이 이렇게 계속해서 도살되는 운명이라면 참으로 암울하고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하지만 닭과 오리는 삶에 무척이나 만족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서로 싸우거나 꽥꽥거리거나 모이를 주어먹거나 하며 확실히 삶을 즐깁니다. 그들은 살아갈 시간이 많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즐거워할 시간이 거의 없습니다. 닭과 오리의 수명은 며칠이나 몇 달에 지나지 않고, 심지어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죽습니다.

 

사람의 수명 또한 그다지 길지 않습니다. 50, 60세가 되면, 과거를 마치 어제 일처럼 회고합니다. 지상의 60년 또는 70년은 천신³의 하루에 해당합니다만, 겁(劫)⁴단위로 사는 범천(梵天)의 눈으로 볼 때는 천신의 수명도 짧은 것입니다.


하지만 몇 백겁 이상을 사는 범천도 영원한 윤회⁵에 비추어볼 때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천신과 범천도 언젠가는 늙어서 죽습니다. 그들은 비록 질병이나 드러나는 노화의 징후는 겪지 않을지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불현듯 나이가 들어갑니다. 그래서 모든 중생은 늙음과 죽음을 겪어야 하고, 아무도 이러한 삶의 괴로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2. 보살의 숙고



 늙음의 원인을 숙고하면서 보살은 처음부터 연기법의 사슬을 추적해나갔습니다. 늙음과 죽음은 다시 태어남을 원인으로 하고, 이 다시 태어남은 업으로서의 존재(業有 kamma-bhava)⁶에 기인합니다.


이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는 갈애(愛 taṇhā)로 일어나는 집착(取 upādāna)에 기인합니다. 갈애는 눈[眼]과 형상[色]⁷등의 감각장소[處]⁸에 의해 생기는 느낌[受]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여섯 감각장소[六入]는 식(識)을 조건으로 일어난 정신-물질[名色]⁹의 부산물이며, 이 식은 다시 정신-물질[名色]에 의해 일어납니다.


12연기에 대한 완전한 빨리어 경문은 식(識)의 원인을 업 형성력인 상카라[行]로 돌리고, 이 상카라[行]의 원인을 무명(無明)에 돌립니다. 하지만 보살의 숙고는 현생의 정신-물질[名色], 식(識)의 상호의존에만 국한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보살은 과거생과 관계된 이야기는 남겨둔 채, 식(識)과 정신-물질[名色]의 상호관계만을 숙고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행자가 현생에 대해 숙고를 한다면, 충분히 위빠사나 수행을 할 수 있으리라고 짐작합니다.




3. 순관(順觀)으로 추론하다



보살은 식(識)과 정신-물질[名色]과의 상호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론했습니다. 

“이 식(識)은 정신-물질[名色]외에 다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정신-물질[名色]에서 식이 생기고, 식에서 정신-물질[名色]이 생겨난다. 그래서 식과 정신-물질[名色]사이의 상호관계에서 태어남[生]이 일어난다. 그래서 태어남과 죽음이 연속하여 일어난다.”


또 식(識)은 정신-물질[名色]을 일으키고, 정신-물질[名色]은 또 여섯 감각장소[六入]를 일으킵니다. 여섯 감각장소[六入]에서 감각접촉[觸]이 일어납니다. 감각접촉[觸]에서 느낌[受]이 일어나고 느낌에서 갈애[愛]가 일어납니다. 갈애[愛]에서 집착[取]이 생기며 집착에서 태어남[生]이, 이로써 늙음, 죽음, 불안, 슬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일어납니다. 

 

그러고 나서 보살은 12연기를 역관(逆觀)하였습니다. 만약 식(識)이 없으면

정신-물질[名色]도 없고, 정신-물질[名色]이 없으면 여섯 감각장소[六入]도 없을 것입니다. 인과관계라는 사슬의 첫 번째 고리를 부정하는 것은 무한한 윤회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핍박하는 괴로움의 종식으로 인도합니다.


12연기에 대한 순관과 역관을 하고 난 후 보살은 오취온(五取蘊)의 속성을 관찰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성스러운 도의 도과를 연속적으로 얻고 마침내 바르게 깨달은 부처님이 되었습니다.


모든 보살들은 그렇게 숙고하고 나서 위없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보살들은  무엇을 어떻게 명상할지 남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윤회를 거치면서 쌓아온 바라밀(pāramī)10로 인하여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앞서 언급한 대로 명상하여 깨달음을 얻습니다.





4. 추론과 사유를 넘어서



 부처님은 설법할 때가 되자 이렇게 생각하셨습니다. “내가 깨달은 이 법은 너무나 심오하다. 이해하기 어려우며 매우 고귀하고 내적인 평화를 안겨준다. 지성과 논리로는 접근할 수 없다. 미묘하여 오직 현자만 이해할 수 있다.”

 

 전 세계의 철학자들은 늙음, 병듦, 죽음을 벗어나는 길에 관해 고민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런 괴로움에서 벗어난 것은 열반을 의미하며, 열반은 사유와 지성의 범위를 뛰어 넘습니다. 그리고 이 열반은 오직 중도11를 실천하고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철학자는 지성과 논리에만 의지하고 있으며, 그들이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고안해낸 다양한 사상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유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이러한 사상은 열반이라는 지고의 목표는 고사하고, 위빠사나의 지혜를 얻는데도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위빠사나 지혜의 가장 낮은 단계인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nāma-rūpa-pariccheda-ñāṇa)조차도 지성적으로는 접근할 수 없습니다. 수행자가 집중을 계발함에 따라 통찰은 분명해지고 사념처 수행법12에 따라 정신-물질을 관하고, 아는 마음과 물질을 구별합니다. 예를 들면, 손을 구부리고자 하는 의도와 손을 구부리는 동작, 귀[耳]와  소리[聲], 그리고 이식(耳識)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지식은 모호하거나 추론적이지 않으며 명백하고 경험적입니다.


 권위 있는 경전은 정신-물질[名色]은 끊임없는 흐름에 있으며, 우리는 정신과 물질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주시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말하기는 쉽지만 행하기는 어렵습니다.


초심자는 힘차게 노력해서 장애[五蓋]13를 극복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장애로부터 벗어남이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도록 도와는 줄지언정, 이것이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한 지혜(udayabbaya-ñāṇa)까지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 지혜는 오직 집중이 계발되어 사념처 수행으로 지각이 예민해지고 나서야만 비로소 얻을 수 있습니다.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한 끊임없는 알아차림(sati)14을 통해 모든 현상의 무상· 고· 무아에 대한 통찰지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위빠사나의 초보단계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러한 지혜는 도과(道果)와는 아주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법을 논리와 사유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묘사합니다.





5. 법은 현자들만 이해할 수 있다



법은 미묘한 것이며, 오직 현자들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현자는 위빠사나와 도과와 관련된 통찰지(慧 paññā)를 가진 사람을 뜻합니다. 세계적인 철학자, 종교의 창시자, 작가 또는 원자를 분해할 수 있는 대 과학자가 지닌 세속적인 지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하지만 법은 성별, 나이, 교육에 상관없이 위빠사나 통찰로 점진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정신과 물질을 관찰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깨달을 수 있고, 성스러운 도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모든 중생의 본성을 찬찬히 살펴본 부처님은, 중생들이 감각적 쾌락에 빠져있음을 아셨습니다. 물론 싯달타 태자가 숲속에서 정진할 때 수행 도반이었던 다섯 비구15나 나중에 부처님의 상수제자가 된 우빠띳사(Upatissa)와 꼴리따(Kolita)와 같은 두 바라문처럼 약간의 예외는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쾌락을 누리는 것이 인생의 최대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하루 종일 장난감을 갖고 놀며 즐거워하는 아이와 같습니다. 아이의 장난감과 놀이는 어른에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른들도 감각적 세계라는 장난감, 즉 아이와 손자들 속에서 쾌락을 즐깁니다.


부처님이나 아라한에겐 이러한 감각적 즐거움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선(禪)16, 위빠사나, 열반과 같은 숭고한 가치에 대한 개념이 없는 범부17와 천신들만 감각적 쾌락을 대단하게 생각합니다.

 

 감각적 쾌락을 좋아하는 사람은 외딴 벽지에 사는 농부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도회지 사람에게 이런 곳은 삶의 쾌적한 설비가 없고 나쁜 음식, 초라한 옷, 더러운 주거지, 진흙길 등으로 매우 불편한 곳일 뿐입니다. 그러나 시골 사람들은 행복해할 뿐만 아니라 고향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범부와 천신은 감각적 대상을 좋아합니다. 부처님과 아라한의 가르침이 무엇이건 간에, 쾌락을 좋아하고 쾌락에 빠져서 모든 시간을 보냅니다. 또 감각적 대상이 없으면 쉽사리 불안해합니다.


그들은 가족과 시종과 소유재산을 지나치게 좋아하기 때문에 감각적 쾌락보다 더 수승한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쾌락에 대한 집착이 뿌리 깊어서 미묘하고 심오한 12연기와 열반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6. 이해하기 어려운 가르침



 불법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추구하는 감각적 욕망에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인 법문은 말할 것도 없고, 감각적인 재미가 없다면 열반에 대한 법문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가르침에 관심이 없는 듯하며, 그도 그럴 것이 선율적인 독송, 감동적인 이야기와 재미나는 웃음거리와 다른 매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르침은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있거나, 믿을 만한 명상법이나 번뇌18를 소멸하는 방법을 찾고 있던 사람들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처럼 설화와 웃음거리가 담긴 법문을 비난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상응부』「무아상경(Anattalakkhana sutta)」(S22:59), 『중부』「대념처경(Satipaṭṭhāna sutta)」(D22)등에서 보듯 경전은 심오하기 때문에 대중적인 법문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연기법은 경장에 속하지만, 아비담마로 분류되는 이유는 아비담마의 형식으로 설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르침은 순일한 법이기 때문에 몇몇 사람들은 이를 아비담마19와 혼동해서  가르침이 강조하는 도와 열반을 이해하기는커녕 따라오지도 못합니다. 연기는 원인과 결과가 서로 결부되어 있어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연기법에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자아라는 실재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법을 선포하시기 전에는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주석서에는 이 연기법의 심오한 성질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사성제, 생명 있는 존재의 본성, 재생과 연기의 성질은 이해하기 어려운 네 가지 법이라고 합니다.


(1) 괴로움의 진리[苦諦]와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集諦],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滅諦],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의 진리[道諦]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사성제(四聖諦)20의 깊은 뜻을 파악하기는 더 어렵고 남에게 가르치기는 더욱 더 어렵습니다.


(2) 중생은 어떠한 개별적인 자아가 없는 정신-물질[名色]의 과정이며, 그러한 정신-물질의 복합체는 자신의 선업과 악업에 따라 내생을 결정짓는 업의 법칙에 따른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3) 전생에서 정신-물질의 전이 없이 번뇌와 업의 과보로 어떻게 재생(再生)이 일어나는지를 알기란 어렵습니다.


(4) 연기를 이해하는 것도 역시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연기는 앞서의 세 가지 심오한 법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연기의 소극적인 측면은 고제(苦)와 집제(集), 중생과 태어남의 성질이고 그 적극적인 측면은 멸제(滅諦)와 도제(道諦)를 포함합니다. 그래서 이 연기법을 이해거나 가르치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어쩌면 도와 열반을 얻었거나 삼장(三藏)을 공부한 사람은 연기의 교의를 쉽게 배우겠지만, 경전지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의미 없는 일입니다.


 연기법에 대해 해설한 「청정도론」의 저자 붓다고사는 적어도 도의 가장 낮은 단계인 예류과를 얻었거나 삼장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갖추었기 때문에 연기법을 해설할 자격이 되었습니다.


붓다고사는 후대사람들이 그 해설을 진지하게 공부하도록 하기 위해서, 어쩌면 그 어려움을 언급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붓다고사는 이 어려움을 바다에 뛰어들어 바다 밑바닥에 이르지 못한 사람의 곤경에 빗대고 있습니다. 또한 붓다고사는 구전에 의해 전해 내려온 삼장과 옛 주석서에 기초하여 주해를 썼다고 인정합니다21.


우리의 가르침도 또한 이와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리를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수행자는 반드시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만약 가르침을 피상적으로만 따른다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연기법에 대한 어떤 지혜도 얻지 못한 채 윤회의 황야 속에서 괴로움을 겪어야 합니다.



연기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무명(無明)에서 업형성력인 상카라[行]가 일어납니다.

상카라[行]에서 재생연결식[識]이 일어납니다.

재생연결식[識]에서 정신-물질[名色]이 일어납니다.

정신-물질[名色]에서 여섯 감각장소[六入]가 일어납니다.

여섯 감각장소[六入]에서 감각접촉[觸]이 일어납니다.

감각접촉[觸]에서 느낌[受]이 일어납니다.

느낌[受]에서 또 갈애[愛]가 일어납니다.

갈애[愛] 때문에 집착[取]이 생겨납니다.

집착[取]이 있기 때문에 업으로서의 존재[業有]가 있습니다.

업으로서의 존재[業有]에서 태어남[生]이 있고

태어남[生]은 늙음, 죽음, 근심, 탄식, 비탄으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괴로움의 총체적인 무더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7. 무명(無明)이란 무엇인가?



 부처님에 따르면 무명(無明)은 고· 집· 멸· 도의 사성제(四聖)에 대한 무지입니다. 적극적인 의미로 무명은 착각이나 전도된 인식을 뜻합니다. 무명으로 인해 허망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무명은 중생을 타락된 길로 인도하기 때문에 그릇된 도 닦음의 무명(micchā-paṭipatti-avijjā)으로 분류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명은 일반적인 무지와는 다릅니다. 사람이나 마을의 이름을 모르는 것은 반드시 그릇된 정보를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12연기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은 단순한 무지 이상입니다. 이는 오해로 방향감각을 완전히 상실하여 동쪽이 서쪽이고 북쪽이 남쪽이라고 생각하는 무지한 사람과 같습니다. 괴로움의 진리[苦諦]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괴로움으로 가득 찬 삶에 대해 낙천적인 생각을 갖습니다.

 

괴로움의 진리[苦諦]는 자신의 몸 안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책에서 찾는 것은 잘못입니다. 보고 듣는, 즉 여섯 감각장소[六入]에서 일어나는 정신-물질[名色]은 모두 괴로움입니다. 왜냐하면 현상의 존재는 무상하고 바람직하지 않으며 즐겁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상의 존재는 어느 때라도 끝날 수 있어서 모든 것은 고통과 괴로움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좋고 축복된 것으로 여기는 중생들은 이러한 괴로움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즐거운 형상, 좋은 소리, 맛있는 음식 따위의 감각대상을 찾아다닙니다. 이 세상에서 좋은 것으로 믿어지는 것을 얻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은 존재에 대한 전도된 인식 때문에 생깁니다. 여기서 무명은 말에게 푸른색 안경을 씌워 마른 풀을 푸른 풀이라고 착각하게 하여 그것을 먹이는 것과 같습니다. 중생들은 장밋빛 안경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기 때문에 감각적 쾌락에 탐닉해 있습니다. 그들은 감각대상과 정신-물질[名色]의 성질에 대해 환상을 품고 있습니다.

 

 앞을 못 보는 장님에게 싸구려 롱지(Longyi)22를 건네주면서, 이것은 값비싸고 훌륭한 재질의 롱지라고 하면 쉽게 속아 넘어갑니다. 장님은 그 사람을 믿고 건네받은 롱지를 아주 좋아할 것입니다. 하지만 장님이 시력을 회복하고 나면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고는, 즉시 그 롱지를 내던져버릴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명으로 덮인 범부는 무상· 고· 무아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삶을 즐깁니다. 그러나 정신과 물질에 대한 성찰로 자기 존재의 불건전한 속성을 알아차리면 뒤바뀐 인식은 사라집니다.


 정신-물질에 대한 내관(內觀)이나 위빠사나의 통찰은 책속의 지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감각대상과 그에 상응하는 식(識)으로 구성된 정신-물질적 현상을 철저히 주시하고 끊임없이 알아차리는 것을 뜻합니다. 수행23은 정신-물질의 본성을 철저히 알도록 해줍니다. 집중이 계발됨에 따라 수행자는 정신과 물질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알아서 무상· 고· 무아에 대한 통찰지를 얻습니다.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무명이 우리로 하여금 실상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알아차리지 못해서 인습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인 남자, 여자, 손, 다리 등과 같은 전도된 인식이 생깁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보는 것이 무상하고 불만족스러우며 실체가 없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 단지 마음과 몸, 즉 정신-물질의 진행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한 번도 수행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정신-물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죽습니다. 하지만 알아차림이 있는 사람은 정신-물질과정의 진정한 본성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중이 계발되기 전에 처음부터 통찰지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전도된 인식, 즉 자연스러운 마음의 방식이 관찰에 앞서기 때문에 초보 수행자는 정신-물질의 성품에 대한 분명한 통찰지를 얻지 못합니다. 꾸준한 수행을 통해서만 집중력과 지각력이 계발되어 통찰지에 이릅니다. 

 

 예를 들어 만일 사념처(四念處)를 닦는 중에 수행자가 가려움을 느낀다면 수행자는 그냥 가렵다는 것을 알 뿐입니다. 그에게는 손이나 다리, 몸의 어느 부분이 가렵다거나, 가려움을 느끼는 것이 자기라는 생각, ‘내가 가렵다’라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단지 지속적으로 가려운 감각이 일어날 뿐입니다. 그러한 감각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시하면 사라집니다. 지켜보는 마음은 모든 정신-물질적 현상을 바로 주시하여 손, 다리라는 전도된 인식이 일어날 여지가 없습니다.


 알아차림이 없는 사람은 전도된 인식에 지배되어 모든 감각 대상의 불만족스런 성품인 둑카(dukkha)를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알게 됩니다. 참으로 무명은 실체를 모를 뿐만 아니라, 실체를 왜곡하는 전도된 인식입니다.  


 사람들은 괴로움의 진리[苦諦]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즐거운 감각 대상을 추구합니다. 이렇게 무명은 노력[業]과 상카라[行]로 인도합니다. 경전에 따르면 무명으로 인해 상카라[行]가 일어나지만 그 사이에는 갈애[愛]와 집착[取]이라는 두 개의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무명(無明)은 갈애[愛]를 일으키고 갈애[愛]는 이후 집착[取]으로 발전합니다. 갈애와 집착은 감각적 욕망(kāmā)에서 나오는데, 이는 연기법의 중간 부분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연기와 관련된 과거는 무명(無明), 갈애[愛], 집착[取], 업(業), 상카라[行]입니다.





8.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무지



 사람들은 갈애가 괴로움의 일어남(samudaya)이란 것을 모릅니다. 오히려 집착으로 인해 행복해 하고, 집착이 없으면 삶이 따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즐거운 감각대상, 음식, 의복, 무리, 벗들을 찾습니다. 집착할 대상이 없으면 불안해하고 삶을 무료하게 여깁니다.

 

 범부들은 집착이 없으면 삶에 아무런 즐거움이 없습니다. 삶의 즐겁지 못한 모습을 가리고, 그것을 즐거운 것으로 착각하게 하는 것이 바로 갈애입니다. 그래서 갈애를 제거한 아라한은 삶을 즐기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아라한은 조건 지어진 괴로움이 소멸된 열반에 항상 마음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수행자가 위빠사나 수행에 매진하면 갈애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몇몇 수행자는 과거와는 달리 삶을 즐기지 않게 됩니다. 집중 수행처에서 집으로 돌아가면 종종 가정생활을 지루해 하고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것에 대해 불안해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수행자가 잘난 체하는 듯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상 그의 행동은 이 무미건조한 세상사에 대해 흥미를 잃었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나  감각적 욕망을 여전히 극복할 수 없다면 수행자가 느끼는 따분함은 일시적인 것으로 머지않아 가정생활에 다시 적응하게 될 것입니다. 가정생활에 대해 완전히 환멸을 느낀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가족들이 수행자의 이런 일시적 기분 상태나 행동에 대해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자신을 조사해보고 얼마나 진정으로 삶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지를 가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즐거움에 대한 욕망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여전히 갈애에 휘둘리고 있다고 알아야 합니다.


갈애가 없다면 좌절감을 맛볼 것입니다. 무명과 갈애로 인하여 우리는 괴로움(dukkha)을 보지 못하고 행복(sukkha)에 대한 환상을 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친듯이 즐길 거리를 찾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영화나 연극을 좋아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유흥에는 시간과 돈이 들지만 사람들은 갈애로 인하여 이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갈애가 없는 사람에게는 이들 유흥거리는 괴로움의 원천일 뿐입니다.

 

 더 분명한 예는 흡연입니다. 흡연자는 담배연기를 들이마시는 것을 즐기지만 비흡연자에게는 일종의 자학적 괴로움입니다. 비흡연자는 흡연자를 괴롭히는 여러 가지 번거로움이 없습니다. 비흡연자는 담배에 대한 갈애가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걱정 없고 행복한 삶을 누립니다.


괴로움의 원천인 갈애는 비틀(betel)잎24을  씹는 습관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틀잎 씹기를 즐기지만 실제로는 번거롭기 짝이 없는 습관입니다.


 흡연자와 비틀잎 씹는 사람처럼, 사람들은 갈애를 충족시키고자 하며, 이 갈애가 부추긴 노력이 늙음, 병듦, 죽음으로 이어지는 재생의 주된 원인이 됩니다.


괴로움과 그 원인인 욕망은 일상생활에서 분명히 볼 수 있지만 이러한 진리를 전체적으로 알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 진리는 심오하며, 사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9. 멸성제(滅聖)와 도성제(道聖)에 대한 무지



무명은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滅諦]와 소멸에 이르는 도의 진리[道諦]를 모르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 진리는 심오하여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滅諦]는 열반에 관한 것이며, 열반은 오로지 성자의 성스러운 도에서 실현할 수 있는 것이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의 진리[道諦]는 도를 증득한 수행자만이 분명하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진리에 대해 무지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무지는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종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궁극의 목적을 설교합니다. 어떤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 괴로움이 저절로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감각적 쾌락이 최고선이라고 생각하고 내생을 부정합니다.


이 다양한 설교는 모두 진정한 열반을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심지어 일부 불교신자들도 열반을 어떤 거처나 극락세계로 여기고 있으며, 이 열반에 대한 이론이 분분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열반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제 열반이란 인과 관계를 기반으로 하여 끊임없이 일어나는 정신-물질 과정의 완전한 소멸입니다. 즉 연기법에 따르면 무명과 상카라[行]등이 정신-물질[名色]을 일으키고 이러한 인과의 과정으로 인해 늙음, 죽음 등 기타 삶의 괴로움이 수반되어 따라오는 것입니다. 성스러운 도(ariya-magga)에 의해서 무명이 소멸하면 그 결과물인 모든 괴로움이 소멸하며, 이러한 고통의 완전한 소멸이 바로 열반입니다.


예를 들면 기름을 부으면 등불이 계속하여 타오를 것이나 기름을 붓지 않으면 불꽃이 완전히 꺼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성스러운 도를 닦아 열반을 증득한 수행자는 무명 등 모든 원인을 제거하여 태어남이라는 결과가 없습니다. 이것은 수행자가 실제로 열반을 증득하기 전에 반드시 이해하고 숙지하고 있어야 할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인 열반을 뜻합니다.


 이 열반의 개념은 삶에 강한 갈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호소력이 없습니다. 이들에게 정신-물질의 과정이 소멸한다는 것은 단지 영원한 죽음만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반을 지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수행자의 열과 성을 다하는 부단한 노력은 이러한 이해와 받아들임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넷째 진리, 즉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의 진리[道諦]를 아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오직 부처님들만이 바른 도를 보여줄 수 있고 천신이나 범천, 인간과 같은 다른 존재들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도에 대한 갖가지 추론과 가르침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 박애, 인욕, 보시 등과 같은 일반적인 도덕을 설파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세간의 선 수행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모든 수행은 칭찬할 만한 것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런 것들은 천신계나 범천계에 태어나는 상대적인 행복에 이르지만 늙음과 같은 윤회고로부터 자유를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비록 열반을 얻기 위한 노력에 도움이 됨에도 불구하고  열반에 이르는 바른 도를 이루지는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절식을 한다든지, 원시인처럼 산다든지 하는 고행에 의지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신이나 동물을 숭배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동물처럼 삽니다. 불교의 견지에서 볼 때 이 모든 것은 팔정도(八正道)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수행으로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戒禁取 sīlabbata-parāmāsa)25을 나타냅니다.

  

팔정도는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알아차림[正念], 바른 삼매[正定]입니다. 도에는 근본 도(mūla-magga), 예비단계의 도(pubbabhāga-magga), 성스러운 도(ariya-magga)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도는 성스러운 도이지만 이것이 수행자의 일차적 목적이 되거나 그것에 지나치게 시간을 많이 쓴다든가 정력을 쏟아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예비단계의 도에서 위빠사나 수행이 발전함에 따라 성스러운 도의 통찰지가 한 의식 찰나에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마찰에 의해 불을 일으키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발화는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도에서 통찰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생기지만 이는 예비 수준의 도에서 위빠사나 수행이 충분히 이루어졌을 때를 전제로 합니다.



 위빠사나의 통찰지는 알아차리는 매 순간에 일어납니다. 일어나는 모든 정신-물질 현상을 주시하는 수행자는 그것의 진정한 성품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수행자가 팔과 다리의 구부림에 주의를 집중하면 단단함과 움직임의 요소를 깨닫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람의 요소[風大]와 관련된 바른 견해[正見]를 뜻합니다.  알아차림이 없으면 “이것은 손이다.” “이것은 사람이다.”와 같은 착각이 일어날 것입니다. 알아차림이 있는 수행자만이 현상을 있는 그대로 봅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인 열이나 통증 또는 정신적 행위인 상상이나 의도와 관련된 바른 견해(正見)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대상에 집중해서 고요해지면 수행자는 정신-물질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고, 대상의 본성은 무상· 고· 무아라는 통찰지를 얻습니다.


바른 믿음이란 바른 의도와 기타 도에 연관된 법을 뜻합니다. 도에 대한 통찰지는 알아차리는 매 순간에 일어납니다. 존재의 삼특상26에 대한 완전한 통찰지를 얻으면 수행자는 열반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열반이 지금 여기27에서 실현되는 것이라면 수행은 필수입니다.


아직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위빠사나 수행의 기본이 되는 근본도(mūla-magga)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이 근본도라는 것은 업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선행(善行)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열반의 증득을 바라며 보시와 지계 등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근본도(mūla-magga), 예비단계의 도(pubbabhāga-magga), 성스러운 도(ariya-magga)는 열반에 이르는 세 가지 도입니다. 특히 수행자는 성스러운 도를 열망하고 소중히 하고 받들어야 할 법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이렇게 인식함으로써 위빠사나 수행에 열성적인 노력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수행자는 또한 위빠사나의 도(vipassanā-magga)를 고귀한 법으로 받아들여 그 수행법을 제대로 알아야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열반에 이르는 도에 대해 무지합니다. 그래서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 행하는 선한 행위를 대수롭지 않게 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위빠사나를  제대로 수행해 본 적도 없으면서 다른 사람의 가르침과 수행을 비난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잘못된 방법에 집착하여 바른 수행법을 비난하기도 합니다. 무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바른 도를 알지 못하고 오해합니다. 보시, 지계, 수행28이 열반으로 인도함을 모르는 것이 무명이며, 보시 등의 선한 행위가 자신의 이익을 해친다고 잘못 아는 것도 무명입니다. 더욱 해로운 무명은 바른 명상 수행법에 대한 무지와 환상입니다.


 바른 도에 대한 무지는 가장 끔찍한 무명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무명에 휘말리는 사람은 선한 행위를 보지 못하고 전도된 인식을 품어서 성스러운 도와 열반뿐 아니라 인간의 행복이나 천상의 지복마저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보시, 지계, 수행을 닦아야 할 필요성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11.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상카라[行]가 일어난다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이 행복의 원천이고, 정신-물질의 소멸인 열반은 탐탁스럽지 못하며, 열반에 이르는 길은 험난하고 고통스럽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세 가지 행위를 통해 욕망을 채우려고 합니다. 이중 어떤 행위는 도덕적으로 선할 것이며 어떤 행위는 도덕적으로 불선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내생의 행복을 바라고 보시를 행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부자가 되기 위해 사기를 치고 강도짓을 할 것입니다.


빨리어 깜마(kamma)29의 동의어는 상카라(saṅkhāra)30입니다. 상카라는 세 종류인데 생각으로 짓는 상카라, 말로 짓는 상카라, 몸으로 짓는 상카라가 있습니다. 그리고 상카라는 의도(cetanā)를 전제로 합니다. 의도의 기능은 무언가를 생각해내고, 하도록  부추기는 것으로서, 모든 행위의 주요 동기가 됩니다. 의도는 살생이나 보시 등의 행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수행자는 관찰을 통해서 의도의 본성을 경험으로 압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행위(상카라)에는 선업의 과보를 낳는 (1)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ā-abhisaṅkhāra)와 악업의 과보를 낳는 (2)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 (apuññā-abhisaṅkhāra), 그리고 부동선(不動禪)을 뜻하는 선한 무색계선(arūpa-jhāna)에 이르는 (3) 흔들림 없는 행위(aneñja-abhisaṅkhāra)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색계 선(rūpa-jhāna)과 욕계에서 업보를 받는 욕계 선행(kāmā-vacara-kusala)을 모두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ā-abhisaṅkhāra)라고 합니다.


 공덕(puñña)이라는 말은 깨끗이 하는 것, 또는 정화하는 것을 뜻합니다. 비누로 몸에 있는 때를 씻어 내는 것처럼, 우리는 보시. 지계. 수행을 통해 업의 더러움을 제거해야 합니다. 이러한 선행은 현생과 내생에 행복과 번영을 가져다줍니다.


 공덕의 또 다른 의미는 선행을 한 사람의 소원을 성취하게 하는 경향성입니다. 선행은 건강, 장수, 부귀 등 다양한 소원을 성취하도록 도와줍니다. 만약 열반에 대한 소원으로 선행을 하였다면 이 선행으로 인해 열반을 얻을 수 있는 삶으로 가거나, 마지막 생에 이르기 전까지 행복과 안녕을 보장받습니다.


업 지음(abhisaṅkhāra)은 행복을 얻기 위해 무언가를 하는 노력입니다. 이는 선하거나 불선한 과보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ā-abhisaṅkhāra)는 선업의 과보를 가져오는 선행입니다. 욕계의 선행(kāmā-vacara-kusala)에는 여덟 가지가 있고 색계의 선행(rūpa-vacara-kusala)에는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선행은 보시, 지계, 수행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보시를 하는 것은 업의 과보가 대단히 큰 선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보시자는 보시를 하기 전이나 보시를 하는 동안이나 보시를 하고 난 후에 기뻐해야 합니다. 경전에 따르면 이러한 보시는 엄청난 업의 과보를 받은 것입니다.


보시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평온(upekkhā)31의 상태일지라도, 보시자의 마음이 깨끗하다면 이 보시행은 매우 큰 업의 효력을 지닙니다. 업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보시행은 합리적인 것으로 탐욕, 성냄, 무지의 성향32이 없는 재생의 과보를 받을 것입니다.


도덕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나 업의 과보에 대한 믿음과 관련이 없는 보시행도 선하기는 하지만, 지혜가 결여된 것입니다. 이런 보시는 살아가면서 보시행에 대한 선한 과보는 받겠지만, 다음 생에 도(道)를 얻을 수 있을 만큼의 지혜를 갖추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권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선한 행위를 할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남의 부추김을 받아서 선한 행위를 할 것입니다33. 이러한 두 종류의 선한 행위 중에 자발적으로 한 선한 행위가 더 큰 과보를 받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선한 행위 네 가지를 마지막 두 가지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 여덟 가지 욕계의 선한 마음(kāmā-vacara-kusala-cittā)34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한 행위를 할 때마다 우리는 이들 선법(kusala-dhamma) 중의 하나에 의해 유발되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집중과 명상을 할 때, 우리는 이런 여덟 가지 선법을 가지고 시작해야 합니다.


만약 선에 이르게 하는 것이 수행(bhāvanā)이라고 한다면, 수행자가 삼매를 잘 계발하면 색계 선(rūpa-vacara-jhāna)을 얻습니다. 선이란 대상에 오롯이 집중된 마음인 심일경성(心一境性)35을 뜻합니다.


사마타 선(samatha-jhāna)은 순일하게 고요한 상태를 얻기 위해 집중을 합니다. 선 삼매(jhāna-samādhi)36는 바람이 불지 않는 허공에서 타오르는 불꽃과 같습니다. 경전에 의하면 색계 선에는 네 가지가 있고, 아비담마에서는 색계선을 다섯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12. 불선업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ā-abhisaṅkhāra)의 반대는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apuññā-abhisaṅkhāra)37입니다. 이러한 부도덕한 행위로 악처38 에 태어나기도 하고, 사람으로 태어나도 용모가 추하거나 병약한 몸을 갖게 됩니다.


이들 불선한 마음(akusala-citta)39은 모두 열두 가지인데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lobha-mūla-citta) 여덟 가지, 성냄에 뿌리박은 마음(dosa-mūla-citta) 두 가지, 어리석음에 뿌리박은 마음(moha-mūla-citta) 두 가지, 이렇게 모두 열두 가지입니다.

                

탐욕에 뿌리박은 불선한 마음(법)은 사견과 결부된 네 가지와, 사견과 결부되지 않은 네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견과 결부된 네 가지 마음(법)가운데 두 가지는‘기쁨이 함께하고 자극받지 않은 마음(asaṅkhārika-citta)’과 ‘기쁨이 함께하고 자극받은 마음(sasaṅkhārika-citta)’입니다.


‘평온(upekkhā)이 함께하는 불선한 마음’도 위와 같이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쁨이 있고 사견이 없이 탐욕에 뿌리를 둔 마음’이 두 가지이고, ‘기쁨과 사견이 없이 탐욕에 뿌리를 둔 마음’이 두 가지입니다.


모든 업은 이 여덟 가지의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법) 중 하나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성냄에 뿌리박은 마음(dosa-mūla-citta)은 ‘자극이 있는 업’과 ‘자극이 없는 업’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성냄에 뿌리박은 마음은 화냄, 낙담, 두려움, 혐오의 근원입니다.


 두 가지 어리석음에 뿌리박은 마음은 의심(vicikicchā)과 들뜸(uddhacca)40입니다. 의심이란 불, 법, 승, 지계, 삼매, 내생 등에 대해 의심하는 것입니다. 들뜸은 심난하고 얼빠진 사람을 가리킵니다. 수행을 해서 제어하지 않으면 마음은 좀처럼 고요해지지 않고 보통 이리저리 방황합니다.


그러나 들뜸이 악처로 떨어지게 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들뜸 이외의 다른 열한 가지 불선업은 어떤 경우에는 악처로 이끌고,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경우에도 병약함과 같은 나쁜 업의 과보를 받게 합니다. 이 열두 가지의 불선한 의도(cetanā)를 일러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apuññā-abhisaṅkhāra)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지길 바라기 때문에 현생과 내생에서 물질적 복리를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을 특징짓는 것은 대체로 탐욕과 성냄입니다. 선한 마음은 좋은 친구를 사귀고 법을 들으며 합리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일어납니다.


 이기적인 스승에게 잘못된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타락합니다. 부처님 당시에 한 재가신자가 선한 비구를 헐뜯었는데 죽어서 자신이 생전에 보시한 승원의 변소에 사는 아귀가 되었습니다.


그 아귀는 하늘 눈[天眼]으로 자기를 알아본 목갈라나 존자41에게 자기가 지은 악업을 말씀드렸습니다. 내생의 행복을 위해 물질적으로 승가42에 보시했지만 스승에 의해 잘못된 지도를 받은 사내의 운명은 얼마나 끔찍합니까! 이 이야기는 우리가 찾아야할 스승은 학식뿐 아니라 선한 기질도 함께 지녀야 함을 보여줍니다.


선한 사람의 특징은 남을 해롭게 하려는 행동, 말,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이나 선한 비구와 사귀는 사람은 좋은 법을 들을 기회가 생기고, 만약 현명하게 생각하면 그의 마음은 선한 업으로 이어집니다. 반면에 못된 스승이나 친구, 그릇된 가르침과 부적절한 사유는 도덕적 붕괴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처음엔 결점 없는 성품을 지녔지만 타락된 사상으로 무너집니다.


이들은 도둑질, 강도, 횡령 등으로 유죄판결을 받아, 오랜 동안 쌓아온 명성이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이 모든 고통은  행복에 대한 전도된 인식에서 비롯합니다.  기대와는 반대로 곤란에 봉착해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습니다.


어떤 악행은 즉각적인 과보가 생기지는 않지만, 때가 되면 과보가 무르익어 고통에 빠지게 합니다. 만약 현생에서 악을 행한 자에게 업의 과보가 생기지 않는다면, 아귀가 된 승원 보시자의 경우처럼 내생에는 반드시 과보를 받습니다.

 

 재가신자를 잘못 지도했던 스승은 죽은 후 운명이 더 비참했습니다. 자기 제자의 아랫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그 제자의 똥을 먹으며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악업의 과보는 참으로 무시무시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저지른 행위의 과보가 거꾸로 자기를 덮쳐서 무시무시한 고통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밀림의 어떤 부족은 풍작과 안전 등을 기원하며 신에게 동물을 제물로 바칩니다. 이러한 원시적인 믿음은 도시에 사는 일부 사람들에게도 아직 남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유력한 낫(Nat)43을 부처님처럼 숭배합니다.


또 종교적인 공양의식에서 동물을 잡아서 손님을 접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평범한 불교신자들도 이러한 관습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품고 있습니다. 보시하는 사람의 목적이 무엇이든 살생은 나쁜 업보를 받으며, 살생을 한 사람이 믿는 바와는 반대로 선한 행위가 아닙니다. 

 

선한 행위는 도덕적인 청정을 특징으로 합니다. 희생자와 처지를 바꿔놓고 볼 때 생명체를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행위는 어떠한 의미로도 도덕적으로 청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피해자는 어쩔 수 없이 죽음과 학대를 당해야 합니다.


피해자가 만일 보복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반드시 보복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복수를 기원하며, 살생을 저지른 자가 내생에 죽임을 당하거나 악행으로 인해 지옥에서 고통을 받습니다. 경장(經藏)에는 살생의 과보에 대한 일화가 많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이나 천신으로 태어나기를 바라며 보시, 지계, 수행에 힘씁니다. 물론 자기가 지은 선한 행위로 인해 바라던 바가 이루어져 내생에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늙고 병들고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운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범천계에 가기를 갈망하여 선정을 닦습니다. 이들은 범천이 되어 여러 겁에 걸쳐 행복하게 살 것입니다. 그러나 수명이 다하면 인간이나 천신으로 다시 태어나고, 만일 악업을 지었다면 악처에서 태어날 것입니다. 결국 범천이 누리는 영광된 삶이란 것도 단지 전도된 인식일 뿐입니다. 


 행복이라는 환상은 범부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여기도록 하는 전도(顚倒,vipallāsa)44와 무명(avijjā)은 성스러운 도의 첫째와 둘째 단계(예류와 일래)에서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으며, 불환도에 들어서도 수행자는 색계의 존재(色界有 rūpa-bhava)와 무색계의 존재(無色界有 arūpa-bhava)를 삶의 지복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 단계(예류, 일래, 불환)에 들어선 성자들은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범부의 경우에는 무상을 항상한 것으로, 정신-물질의 괴로움을 행복으로, 무아를 자아로, 괴로운 것을 즐거운 것으로 여기는 네 가지 전도45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이러한 전도와 결부된 것이 네 가지 무명입니다. 이러한 전도와 무명으로 인하여 몸, 말, 생각으로 짓는 모든 행위는 선하고 불선한 업을 일으킵니다. 선업은 믿음, 알아차림 등과 함께 의도적인 노력이 있을 때 생겨납니다. 마음을 그냥 내버려두면 악업을 짓기 쉽습니다.





13. 선업의 거부는 악업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은 아라한이 선업이나 악업을 짓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못 이해해서, 선업도 짓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보통사람이 선업을 거부하면 마치 도시에 선량한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 버려서 오직 바보와 불량배만 남는 것과 같이, 또 유용한 나무를 제거해버리면 쓸모없는 풀이나 잡초만 무성해지는 것과 같이 악업만 증대합니다. 선업을 거부하는 사람은 악처에 떨어지는 악업만 짓습니다. 그리고 일단 악처에 떨어지면 인간계로 되돌아오기 힘들어 집니다.


 아라한이 선업에서 벗어나있다는 것은, 무명을 제거했기 때문에 모든 행위가 업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실 아라한은 윗스님을 공경하거나, 설법을 하거나, 보시를 하거나, 곤경에 처해있는 중생을 도와주는 등의 선행을 합니다.


하지만 사성제를 완전히 체득하고 무명을 제거하였기 때문에 아라한의 선행은 어떠한 업의 효력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선업을 짓지 않는다는 것이지 선행을 아예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명과 잘못된 견해로, 선행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 범부는 악처에 떨어지는 악업만 짓습니다. 사실 선행을 하려는 욕구가 없다는 것은, 성스러운 도와 열반에서 멀어지는 깊은 무명의 표시입니다. 무명이 엷어질수록 마음은 선행을 하려는 쪽으로 기웁니다.


예류자가 된 수행자는 범부였을 때보다 더 많은 선행을 하고 싶어 합니다. 성스러운 도의 상위 단계에 있는 성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차이점이라면 도와 상관없는 일을 하지 않으려는 욕구가 더 커지고, 더 많은 시간을 명상을 하면서 보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행위를 악한 행위와 하나로 뭉뚱그려서 의도적으로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무명과 결부된 모든 행위는 선업이나 악업 가운데 하나입니다. 선업이 없다면 모두가 악업이 됩니다.



  


14. 무명과 전도된 인식



 진실과 거짓은 서로 배척합니다. 진실을 모르면 거짓을 받아들이고, 거짓을 모르면 진실을 받아들입니다. 사성제를 모르는 사람은 괴로움에 대한 잘못된 생각으로, 행복을 가장하거나 자신을 기만하고 억누릅니다.  

 

갈애는 충족되면 잠깐 즐거움을 줄 뿐,  감각적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은 괴로움입니다. 감각 대상은 모두 끊임없이 변하고 불확실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무지한 사람들은 이러한 감각대상을 좋고 즐거운 것으로 여깁니다. 이러한 전도된 인식으로 인해, 과거에 행복하다고 여겼던 날들에 대해 향수를 느끼거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 생각을 품습니다.


무지한 사람들은 그릇된 인식 때문에 삶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것을 갈망합니다.  바로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지만 깨닫지 못하고 거꾸로 행복은 이러한 욕망의 충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대해서 어떠한 잘못도 보지 못합니다.


사실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滅諦]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의 진리[道諦]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낯선 것입니다. 남에게 배우거나 지적(知的)으로 받아들인 사람도 이 진리의 참다운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그 사람들은 열반이나 열반에 이르는 도에는 참된 관심이 없고, 다만 이 도는 고난과 결핍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행복을 바라는 것은 인간 행위의 주요 동기입니다. 몸과 말과 생각으로 표출되는 행위를 업 또는 상카라라고 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세 가지 상카라와, 욕계의 여덟

가지 선업과 색계의 선업인 첫째 상카라로 이루어져 있는 두 가지 선업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지혜가 있거나 지혜가 없는 두 가지의 선업 또는 선한 마음에 대해서도 언급하였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통하여 정신과 물질의 진정한 성품인 무상· 고· 무아를 알아차리면 수행자는 지혜로워집니다. 그렇지만 빨리 단어만 암송한다든지 피상적인 관찰에 머문다면 수행자는 지혜로워지지 않습니다. 통상적인 도덕에서는 도덕적 가치 분별이 업의 법칙에 대한 믿음과 결부되어 있으면 지혜롭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혜로운 보시행을 하려면 반드시 보시자와 보시를 받는 사람과 보시물의 무상· 고· 무아를 관찰하는 것이 결부 돼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견해는 보시를 하고나서 모든 것의 무상함에 대해 관찰하라고 언급하고 있는「앗타살리니」에 근거를 둔 견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보시행을 하기 전이나 하는 도중이 아닌 보시를 하고 나서의 관찰에 대한 언급입니다.  더욱이, 그 목적은 보시행을 지혜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위빠사나 수행에서 선업을 짓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보시가 이러한 알아차림을 전제로 한 보시를 뜻하는 것이라면 불자가 아닌 사람이 하는 모든 보시는 지혜롭지 못한 보시라고 해야할 텐데, 이는 물론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보시에 대한 이야기에는 알아차림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부처님 또한 알아차림이 보시행에 꼭 필요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경전에서는 보시 받는 사람의 정신적인 단계에 따라 보시의 과보가 다르다고만 설하고 있으며, 이것이 보시를 할 때 우리가 고려해야 할 유일한 가르침입니다.


보시자와 보시 받는 사람을 무상 등의 영향을 받는 정신과 물질이라고 여기면 그 둘은 평등한 관계가 되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보시행은 그것을 행하고자 하는 영감과 보시라는 선업에 잠재되어 있는 힘이 적어질 것입니다.


사실 보시의 목적은 위빠사나 관찰이 아니라 보시자가 얻는 이익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누구에게 보시를 해야 커다란 이익을 받을 수 있는지와 바른 숙고(업 대한 믿음)의 중요성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율장』「대품」(Vin.I.293-94)에 따르면 여신도 위사카(Visākha)46는 부처님께 평생 동안 승가에 (1) 비구를 위한 목욕용 가사 (2) 객승을 위한 음식 (3) 여행을 떠나는 비구를 위한 음식 (4) 병든 비구를 위한 음식 (5) 병든 비구를 돌보는 비구를 위한 음식 (6) 병든 비구용 약 (7) 승가를 위한 쌀죽 (8) 비구니를 위한 목욕용 가사의 여덟 가지를 보시하게 해달라는 청을 드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위사카에게 그런 것들을 보시함으로써 바라는 이익이 무엇인지를 물으시자 위사카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안거가 끝나면 전국 각 지방에서 비구들이 부처님을 뵈러 올 것입니다. 그들은 세존47께 어떤 비구의 죽음을 알려드리고 그들이 어디에서 다시 태어났는지, 성스러운 도의 어떠한 단계를 성취했는지를 여쭈어 볼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그 비구들의 정신적인 성취를 알려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방문한 비구에게 다가가서 작고한 비구도반이 사왓티(Sāvatthi)48를 방문한 적이 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대답하면 저는 성스러운 도에서 예류자나 그 밖의 과위를 얻은 그 성자가 제 공양을 받은 적이 있다고 확신할 것입니다. 저의 선업에 대한 이러한 회상은 저를 기쁨으로 가득 차게 합니다. 그것은 평화와 고요함, 자기계발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작고한 비구의 정신과 물질의 무상에 대한 관찰이 아닌 내생에서 돋보이는 정신적인 성취에 대해 언급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희열(pīti)과 자기계발의 수련에 이르는 관찰에 중점을 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시를 하면서 관찰의 가장 적절한 대상은 보시 받는 사람의 고귀한 덕성입니다. 예를 들면 성소(聖所)에 꽃을 바치면서 부처님의 고귀한 덕성을 계속해서 회상하고, 비구에게 음식 공양을 올릴 때에는 그 비구의 청정한 삶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등입니다.


 법문을 설하거나 듣는 것은 선한 업으로 그 법문을 이해하였다면, 이는 지혜로운 행위입니다. 업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모든 선행은 지혜로운 업입니다. 믿음이 없는 선행은 마치 어린이가 어른을 따라서 불상에 절을 하는 선행이나 업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행하는, 도움 되고 친절하고 자비로운 일처럼 선하기는 하나 지혜롭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다섯 가지 색계 선법(rūpa-kusala-dhamma)은 다섯 가지 선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선에 이르는 사마타 수행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욕계의 여덟 가지 선법과 색계의 다섯 가지 선법은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ā-abhisaṅkhāra)를 이룹니다.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apuññā-abhisaṅkhāra), 즉 불선업은 열두 가지 불선한 마음입니다. 여기서 상카라(saṅkhāra)는 의도(cetanā)를 뜻합니다. 열두 가지 불선한 상카라 가운데 여덟 가지는 탐욕에, 두 가지는 성냄에, 나머지 두 가지는 어리석음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lobha-mūla-citta)은 여덟 가지인데, 네 가지는 기쁨과 탐욕이 있는 마음이며 다른 네 가지는 기쁨은 없지만 탐욕은 있는(upekkhā-sahagutta) 마음입니다. 기쁨과 탐욕이 있는 네 가지 마음 중 두 가지는 사견이 있는 마음이며, 나머지 두 가지는 사견이 없는 마음입니다. 사견이 있는 마음 중의 한 가지는 자극받은 마음(saṅkhārika-citta)이고 나머지는 자극 받지 않은 마음(asaṅkhārika-citta)입니다.


사견에는 자아가 있다는 유신견(有身見), 자아가 영원히 존재한다는 상견(常見), 선행이나 악행에 대해 아무런 과보를 받지 않고 자아가 소멸한다는 단견(斷見)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유신견(有身見)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극히 적습니다. 생명이란 영혼이나 존재는 없고 다만 정신-물질의 과정일 뿐이라는 것을 모르면 유신견에 휘말립니다.


불교 경전을 좀 아는 사람은 그마나 유신견에 덜 휘말리지만, 그러한 경전의 지식만으로는 유신견을 완전히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지는 못합니다. 알아차림을 통해서 정신-물질의 본성을 보는 명료한 통찰지를 가진 수행자는 대체적으로 유신견에서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수행자가 도를 얻기 전에 알아차림을 그만둔다면 다시 유신견에 휘말리게 될 것입니다. 유신견은 범부들에게는 너무나 깊이 뿌리박혀 있어서 무엇을 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행위자는 자아라고 생각합니다.


또 죽은 다음에는 모든 것이 완전히 소멸한다고 믿고 내생과 업을 부정하는 사람은 허무주의적 견해와 결부된 불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냄에 뿌리박은 마음(dosa-mūla-citta)은 자극받지 않은 마음(asaṅkhārika-citta)과 자극받은 마음(saṅkhārika-citta)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 성냄에는 분노, 질투, 불안, 걱정, 슬픔, 두려움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리석음에 뿌리박은 마음(moha-mūla-citta)은 의심과 들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의심(vicikicchā)은 부처님, 열반, 무아 등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이리저리 방황하면 의심에 휘말리게 됩니다. 이것이 들뜸(uddhacca)입니다.


그래서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apuññā-abhisaṅkhāra)는 여덟 가지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 두 가지 성냄에 뿌리박은 마음, 두 가지의 어리석음에 뿌리박은 마음을 뜻합니다.


그것은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ā-abhisaṅkhāra)에 반대됩니다. 공덕이 되는 행위는 정신과 물질을 청정하게 하여 선한 과보를 받아서 좋은 재생에 이르고,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는 정신과 물질의 과정을 오염시켜 나쁜 과보를 받아 나쁜 재생에 이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악행을 저지릅니다. 그들은 잘 살기 위해서 죽이고, 훔치고, 강탈하거나 법정에서 거짓 증언을 합니다. 심지어 제 부모를 죽이는 사람들조차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러한 행동을 합니다. 예를 들면 아자따삿뚜(Ajātasattu) 태자49는 왕이 되기 위하여 예류자인 부왕을 죽였습니다.


 스승인 데와닷따(Devadatta)50의 사주를 받아 부왕을 제거하고 왕좌를 차지하면 보다 더 오랫동안 왕으로서 삶을 즐길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예류자인 아버지를  죽인 무거운 죄로 인하여 그는 후회와 불안에 사로잡혀 육체적인 병까지 얻었습니다. 나중에 데와닷따는 자기 아들의 손에 죽고 지옥에 떨어져서 지금  무간업의 고통을 혹독히 받고 있습니다.


 까꾸산다 부처님 당시에 두시(Dūsī)51라는 마라(Māra)52가 부처님과 승가를 해치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습니다. 하지만 이 목적을 이루지 못하자, 마라는 한 사내의 몸에 깃들어 부처님 뒤에 있던 한 상수제자를 돌을 던져 죽였습니다.


이 끔찍한 악업으로 인해 마라는 그 즉시 서른한 가지 중생계중 제일 낮은 무간지옥53에 떨어졌습니다. 마라였을 때, 그는 중생들 위에 군림하였지만 무간지옥에서는 지옥지기의 발에 짓밟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마라는 못된 욕망을 성취함으로써 기뻐하고자 했지만 오히려 악업에 대한 대가로 고통 받았습니다. 이는 전 세계 어디서나 악업을 짓는 자들의 현실입니다


 다른 두 가지 형태의 행위, 즉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ā-abhisaṅkhāra)와 네 가지 무색계 선법(arūpa-jhāna-kusala-dhamma)을 뜻하는 흔들림 없는 행위(aneñja-abhisaṅkhāra)의 주요 동기도 행복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넨쟈 (aneñja)는 평온, 즉 침착함을 뜻합니다.


주변의 시끄러운 소리는 색계선(rūpa-jhāna)에 들어 있는 수행자의 증득(等持 samāpatti)54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색계선(arūpa-jhāna)는 그러한 소란에 방해받지 않습니다.


무색계선에는 (1) 공무변처(空無邊處) (2) 식무변처(識無邊處) (3) 무소유처(無所有處) (4)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네 가지가 있습니다. 이들 네 가지 선정은 네 가지 무색계로 인도하는 상카라(saṅkhāra)입니다.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apuññā-abhisaṅkhāra)는 사악도에 이르게 하고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ā-abhisaṅkhāra)는 인간계, 천신계, 색계 범천계로 인도합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위해 이러한 세 가지 업(kamma)과 행위(saṅkhāra)를 지으며 그 결과로 식(識)이 생겨납니다. 그 식(識)을 조건으로 새로운 존재의 정신-물질[名色], 여섯 감각장소[六入], 감각접촉[觸]등이 생깁니다.


    



15. 상카라[行]를 조건으로 식(識)이 일어난다



무명을 원인으로 상카라[行]가 생기고, 다시 상카라는 식(識)의 원인이 됩니다. 전생의 선업이나 불선업을 원인으로 하여, 새로운 생에서 재생연결식55을 시작으로 하는 식(識)의 흐름이 생깁니다.


예를 들면 악행은 네 가지 낮은 세계에 떨어지게 합니다. 재생연결식이 일어나고 난 다음에 바왕가의 마음(bhavaga-citta)56이라고 하는 식(識)의 흐름이 일어납니다. 이 바왕가의 마음이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감촉하고, 생각하는 여섯 가지 식(識)이 일어나지 않을 때 끊임없이 작용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바왕가는 잠들어 있을 때의 잠재의식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도 이 잠재의식을 가지고 가는데 이를 죽음의 마음(cuti-citta)57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재생연결식, 바왕가, 죽음의 마음은 전생의 업에서 기인한 마음을 나타냅니다.


 즐겁지 않은 안식(眼識)과 이식(耳識)과 같은 다섯 가지 괴로운 감각대상과 결부된 다섯 가지 마음은 불선업에 기인하고 (1) 받아들이는 마음(sampaṭicchana-citta)58 (2) 조사하는 마음(santīraṇa-citta)도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apuññā-abhisaṅkhāra)에 기인하는 마음에는 모두 일곱 가지가 있습니다. 흔들림 없는 행위(aneñja-abhisaṅkhāra)에는 네 가지 무색계 선법(arūpa-kusala-dhamma)이 있기 때문에 그 결과로 네 가지 무색계에서 초기에는 재생연결식, 중간에는 바왕가, 존재의 마지막 순간에는 죽음의 마음의 형태로 무색계 과보의 마음59이 생깁니다. 


마찬가지로 다섯 가지 색계 선법(rūpa-kusala-dhamma)으로 인하여 색계 범천계에서 다섯 가지 색계과보의 마음(rūpa-vipāka-citta)이 생깁니다. 그리고 욕계의 여덟 가지 선업에 상응하는 여덟 가지 큰 과보의 마음(mahā-vipāka-citta)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계와 욕계천상의 재생연결식, 바왕가, 죽음의 마음을 이룹니다. 그것은 또한 즐거운 감각대상을 등록(tadārammaṇa)하는 기능도 합니다.


또한 욕계의 선업으로 인하여, 다섯 가지 즐거운 감각대상과 연관된 다섯 가지 종류의 마음, 받아들이는 마음, 기쁨이 함께하는 조사하는 마음, 평온이 함께하는 조사하는 마음, 모두 합쳐서 여덟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보의 마음(vipāka-citta)에는 32가지, 즉 불선한 과보의 마음(akusala-vipāka-citta) 7가지, 무색계 과보의 마음(arūpa-vipāka-citta) 4가지, 색계 과보의 마음(rūpa-vipāka-citta) 5가지, 선한 과보의 마음(kusala-vipāka-citta) 16가지가 있습니다. 이 모든 32가지 과보의 마음은 상카라(saṅkhāra)의 결과입니다.



 


16. 상카라[行]에서 어떻게 재생연결식[識]이 일어나는가?



 상카라[行]에서 어떻게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지만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레디 사야도(Ledī  Sayādaw)는 연기법에서 이 부분이 오해의 소지가 많다고 지적하셨습니다.60


아직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한 중생은 선업이나 불선업의 결과로 마지막 마음, 즉 죽음의 마음(cuti-citta)과 함께 모든 정신과 물질이 소멸되자마자, 새로운 정신과 물질과 함께 재생연결식이 일어난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영혼의 전이에 대한 믿음인 상견(常見)이나, 죽으면 모든 것이 소멸한다는 단견(斷見)에 빠지기 쉽습니다.


단견은 죽은 다음의 원인과 결과간의 관계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무명이 어떻게 상카라[行]에 이르고, 여섯 감각장소[六入], 감각접촉[觸], 느낌[受], 갈애[愛]등이 어떻게 인과관계의 사슬을 구성하고 있는지는 현실의 삶에서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에 알기 쉽습니다.


하지만 죽은 다음에 새로운 생이 일어나는 것은 분명히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죽은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견해가 생기는 것입니다.

  

 믿음에 기반을 두어 사유하는 배운 사람들은 대체로 상카라가 재생연결식을 일으킨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이는 완전히 합리적이고 체험적인 접근방법이 못되기 때문에 오늘날 유물론적 인생관의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어떻게 재생이 일어나는지를 맑고 투명하게 봅니다.


수행자는 마음의 단위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또 차례로 일어났다가는 번개 같이 사라지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수행자가 체험으로 발견하는 것이지 스승에게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수행자는 처음에 그렇게 많이 알지는 못합니다. 수행자가 명상의 지혜(sammāsana-ñāṇa)와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한 지혜(udayabbaya-ñāṇa)를 얻었을 때야 비로소 그 실상을 볼 수 있습니다.


원인과 결과를 구별하는 지혜(paccaya-pariggaha-ñāṇa)가 생기면서 수행자는 죽음의 마음과 재생연결식에 대한 어렴풋한 개념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재생에 대해서 어떤 의심도 없어지는 시기는 명상의 지혜와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한 지혜를 얻고 나서부터입니다.


수행자는 이러한 지혜를 토대로 죽음이란 위빠사나 수행에서 본인이 주시하는 마음 단위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처럼 마지막 마음의 단위가 사라짐을 뜻하고 또 재생이란 그러한 첫 마음의 단위가 일어남을 뜻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점을 간과합니다. 그들은 영원한 자아가 있다고 믿으며 그것을 마음과 동일시합니다. 아비담마에 대한 깊은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견해를 부정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여러 전생에서 그러한 견해에 집착해왔기 때문에 여전히 유신견(有身見)61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지혜가 아직 완전히 성숙되지 않은 위빠사나 수행자도 때로는 유신견을 받아들이려는 유혹을 느낍니다.


  



17. 상견(常見)과 단견(斷見)



 유신견에 사로잡힌 범부들에게 죽음은 한 개별적 실체의 소멸이나 또 다른 보금자리나 존재로 뒤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바로 단멸론에 대한 믿음인 단견(斷見)과 영혼이 다른 몸이나 보금자리로 옮겨간다는 믿음인 상견(常見)62의 전도된 견해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몸이 자라고 성장함에 따라 마음도 저절로 성장한다는 원인을 부정하는 견해[無因論]63를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신과 물질의 흐름인 윤회에 대해서 그릇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몸을 삶의 주인공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가는 일시적 거주처로 여깁니다.


육체가 분해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머지않아 육체가 부활한다고 굳게 믿고 시신을 소중히 다루기도 합니다. 이러한 견해는 상카라[行]와 재생연결식[識]의 인과관계에는 오해의 소지가 많다는 레디 사야도(Ledī Sayādaw)64의 말씀에 힘을 실어주고 있습니다.


평범한 불교신자도 이러한 전도된 인식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불교의 교리인 무아를 믿기 때문에 위빠사나 수행을 하지 못할 정도로 이런 환상을 맹목적으로 지니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죽음, 재생, 정신과 물질에 대한 완벽한 지식이 없어도 명상 하여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직후에 찬나(Channa)장로65는 위빠사나 수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신견 때문에 수행에 진전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 후 아난다(Ānanda) 존자66의 연기 법문에 따라서 명상을 했으며 전도된 인식을 극복하고 아라한과를 얻었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부처님 당시의 야마까(Yamaka)비구는 아라한은 완전한 열반에 들고 나면 단멸한다고 믿었습니다. 사라뿟따(Sāriputta)가 그를 불러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법문을 들으면서 야마까 장로는 명상 하여 해탈을 성취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 믿음을 지닌 사람들은 낙담할 필요가 없습니다. 열과 성을 다해 위빠사나를 수행하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죽음과 수태의 본성에 대한 무지와 의심, 그리고 단견에 집착하는 성향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사후에 내생이란 게 과연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자체가 한 생명 안에 있는 자아니 영혼이니 진아(眞我)니 하는 것들을 전제로 합니다.


유물론은 영혼의 개념을 부정합니다만 죽은 자와 산 자를 구별 짓는데 있어서 자아에 대한 전도된 인식이 은연중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노골적으로나 은연중에 자아를 수용하는 사람들의 질문에 불교적 관점으로 답변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만약 우리가 내생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우리가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지지한다고 결론을 내릴 것입니다.


하지만 불교는 무조건 내생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런 질문에 답변하지 않으셨습니다. 더구나 보통사람들에게 증거를 제시하기는 더 어렵습니다. 신통이 있는 사람은 지옥이나 천신계를 보여줄 수 있겠지만 회의적인 사람들은 이를 마술이나 속임수라고 치부해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선 이런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번뇌가 소멸하지 않은 경우에는 죽음 뒤에 정신과 물질 과정이 계속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생의 문제는 지적으로는 접근할 수 없고 특별한 불교수행을 통해서만 해결됩니다. 이러한 수행을 통하여 수행자는 신통을 얻어서 선한 사람은 천신계에 태어나고 악한 사람은 악처에서 고통 받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보는 것은 두 집을 다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한 집에서 다른 집으로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는 것처럼 선명합니다. 수행자는 높고 낮은 세계의 수많은 천신, 동물들 중에서 자신이 보고자 하는 사람을 쉽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수행자는 선정과 신통을 얻을 수 있으며 이러한 가능성을 배제하는 가르침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실제로 저 세상(para-loka)67과 신통으로 접촉을 갖는 수행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신통을 얻기는 어렵습니다. 그러한 신통은 강력한 집중에 의지하기 때문에 위빠사나 수행이 더 쉬운 길입니다.


원인과 결과를 구별하는 지혜(paccaya-pariggaha-ñāṇa)가 계발되어 수행자가 죽음과 수태의 본성을 잘 알게 되면 삶의 문제가 더욱 명확해집니다. 명상의 지혜(sammāsana-ñāṇa),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한 지혜(udayabbaya-ñāṇa), 그리고 무너짐의 지혜(bhaṅga-ñāṇa)를 성취하면 삶의 문제는 보다 더 명확해집니다. 왜냐하면  식(識)의 단위들이 어떻게 일어나고 사라지는지를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음이란 현생의 마지막 식이 사라진 다음에 수태, 즉 내생의 처음 식(識)이 뒤따라서 일어나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지혜도 아직은 취약한 것으로 수행자가 최종적으로 예류의 성위를 얻고 나서야 비로소 내생에 대한 모든 의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위빠사나 수행은 하지 않고 내생에 대해서 묻기만 하려는데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서양의 과학자와 철학자의 의견을 구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신통을 지닌 아라한이라고 믿어지는 분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남에게 의지하기 보다는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해답을 구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한 지혜(udayabbaya-ñāṇa)의 단계에서 수행자는 사라진 식(識)단위의 흐름에서 감각대상에 집착하는 새로운 식(識)의 단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수행자는 전생에서 죽은 마지막 순간에 한 대상에 대한 집착에 의해 조건 지어진 식의 단위와 함께 새로운 생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죽기 직전의 식의 흐름은 물질적인 몸에 의존하면서 하나의 식 단위가 다음 식 단위로 끊이지 않고 계속됩니다. 죽은 다음 몸은 분해되고 식의 흐름은 다른 세계의 물질적인 과정으로 옮겨갑니다.


이것은 전기를 끊임없이 공급받는 전구가 지속적으로 빛을 내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전구가 나가면 불은 꺼지지만 전기는 계속해서 들어옵니다. 낡은 전구를 새 전구로 갈아 끼우면 빛이 다시 들어옵니다. 여기서 전구, 전기, 빛은 모두 변화하는 물질적 과정이며, 우리는 이들의 무상한 성질을 주의 깊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주석서는 메아리, 등불, 도장의 인각, 거울에 비친 영상의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메아리는 음파가 벽이나 숲 등에 부딪쳐서 나오는 소리의 반향입니다. 우리가 소리와 메아리의 인과관계를 부정할 수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소리가 먼 곳까지 전이했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이 거울을 볼 때 여러분의 얼굴이 그 거울 속에 비치는데 비록 자신의 얼굴과 거울에 비친 영상이 인과적으로 관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두 가지를 서로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불이 붙어 있는 등불은 다른 등불을 켜는데 쓸 수 있습니다.


불을 붙여준 등불이 여전히 타고 있으므로 새로운 등불의 불꽃은 이전의 등불이 분명히 아니지만, 이전의 두 등불과 두 개의 불꽃이 인과적으로 무관하지는 않습니다. 끝으로 도장은 그 표면과 같은 각인을 남기지만 실제로는 도장의 표면은 아니며 도장 없이 표면은 찍히지 못합니다.


 이 비유는 재생의 성질을 어렴풋이 알게 해줍니다. 사람이 죽어갈 때 자신의 업(kamma), 업의 표상(kamma-nimitta),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이 나타납니다. 죽은 뒤에 전생의 마지막 순간에 나타나는 이들 표상 중의 어느 하나에 조건 지어진 재생연결식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재생은 식의 마지막 단위가 다른 생으로 옮겨감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임종 때의 표상에 의해 조건 지어집니다. 그래서 재생은 죽어가는 사람이 보는 표상이  인도하는 무명, 상카라 등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재생연결식은 전생과 인과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두개의 연속되는 식 단위들은 분리되어 있지만, 우리는 한사람을 하루 종일, 일 년 내내, 또는 전 생애동안 같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임종의 마지막 식을 재생연결식과 함께 동일한 사람을 나타내는 것으로 말합니다. 사람이 천신계나 다른 세계에 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전체로서의 정신과 물질의 전이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재생은 인과적으로 관련된 정신단위의 흐름과 관련 있기 때문에 동일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죽음과 동시에 소멸되어 버리기 때문에 전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믿는 것은 단견입니다. 이에 따르면 죽음과 동시에 모든 것이 끝납니다. 대부분의 불교신자들은 이러한 단견으로부터 벗어나 있습니다. 두 개의 연속된 삶이 인과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관습적인 용어로 같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재생이란 자아가 새로운 보금자리로 옮겨가는 것을 뜻하는 상견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합니다.

 

 성숙한 위빠사나 지혜를 가지고 있는 수행자는 현생의 정신적 단위들의 일어나고 사라짐과 그들의 인과관계를 철저히 알기 때문에 이러한 단견과 상견을 지니지 않습니다. 이렇게 알면 개인이 불멸하거나 단멸한다는 전도된 인식에 휘말릴 소지가 없습니다.


식(識)의 본성은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분명합니다.  낙담 다음에 기쁨이 오고 또 기쁨 다음에 낙담이 옵니다. 고요한 마음 다음에 짜증이 오고

짜증 다음에 고요한 마음이 옵니다. 이러한 식(識)의 변화는 명확히 그 이질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식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밤에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면 그 다음 날 아침에 다시 나타날 것입니다. 식들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인과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두 가지 연속된 식들 간의 이러한 관계를 이해하는 사람은 죽음으로만 격리되었을 뿐인 죽음의 마음과 재생연결식의 두 가지 식 사이에도 똑같은 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8. 임종 때의 표상



 새로운 존재의 식(識)에는 재생연결식과 일생에 걸쳐 일어나는 식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재생연결식은 악처에 하나, 인간과 천신의 욕계에 아홉, 색계범천계에 다섯, 무색계 범천계에 넷, 이렇게 모두 19가지입니다.


재생연결식이 일어나고 나서 일생에 걸쳐 일어나는 과보식(vipāka-viññāṇa), 즉 과보의 마음은 모두 32가지입니다. 이러한 목록은 아비담마를 공부한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살면서 지었던 행위의 회상인 업(kamma), 업과 연관된 주변 조건인 업의 표상(kamma-nimitta),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이 나타납니다. 업은 과거에 대한 회상이나 현재에 대한 환상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부는 임종하는 순간 마치 물고기를 잡는 것처럼 말하거나 보시를 많이 한 사람은 죽기 얼마 전 보시를 행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나는 쉐보에서 만달레이와 양곤의 파고다를 참배하는 성지순례단을 이끌었던 적이 있습니다. 순례단에 있던 한 노인이 쉐보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습니다. 그는 성지순례의 경험을 회상하는 말을 되뇌면서 죽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은 또한 보시행과 관련된 가사, 승원, 비구, 불상등과 같은 행한 업의 환경을 보거나 살인자의 경우 흉기, 범행 장소, 피해자를 봅니다.


 그리고 내생에 받게 될 운명을 봅니다. 예를 들면, 지옥으로 갈 예정이라면 지옥의 불이나, 지옥지기들을 볼 것이며, 천신계에 태어날 운명이라면 천궁, 천신을 볼 것입니다.


한때 죽어가는 바라문이 자신이 본 불꽃의 표상은 범천계를 가리킨다는 말을 친구들에게 들었습니다. 바라문은 그렇게 믿었지만 죽은 다음에 지옥에 떨어진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릇된 견해는 참으로 위험합니다. 죽어가는 친구에게 유익하다고 믿고, 보시를 위해 소를 죽인 행위를 마음속에 떠올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19. 마하담미까 이야기



「법구경」주석서(DhA.i.129ff)에 따르면 부처님 당시 사왓티에 남자신도 500명이 각각 500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수행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중  가장 연장자인 마하담미까(Mahā-dhammika)는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일곱 명의 아들과 일곱 명의 딸이 있었습니다.


마하담미까는 나이가 듦에 따라 병들고 쇠약해졌습니다. 집으로 모셔온 비구들이 독경하고 있을 때 천상의 마차가 천신계로 자신을 데리러 온 것을 보았습니다. 마하담미까는 천신들에게 “기다려 주세요!”라고 소리쳤습니다.


비구들은 죽어가는 사람이 하는 말인 줄로 알고는 독경을 그만두었습니다. 아들과 딸들은 아버지가 죽음의 두려움에 혼미해서 중얼거린다고 생각하고는 울었습니다. 비구들이 떠난 다음에, 마하담미까는 또렷한 목소리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화환을 공중에 던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자 화환이 공중에 둥둥 떠 있었습니다. 그러자 마하담미까는 화환이 있는 곳이 도솔천을 가리킨다고 말하고 아들과 딸들에게 천신계에 재생하기 위해 자기처럼 선행을 많이 하라고 충고하고는 죽어서 도솔천에 났습니다.


이 이야기는 선한 사람이 임종할 때 천신계의 표상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줍니다. 몰라먀잉(Mawlamyaing)의 한 남자신도는 죽기 바로 직전에 아주 훌륭한 푸쨔(pucca)건물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이것도 천신계의 표상일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날 운명의 어떤 죽어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부모가 될 사람, 거처 등의 표상을 봅니다. 몰라먀잉의 한 사야도는 강도에게 살해당했습니다. 3년 후에 한 어린이가 메르귀(Mergui)에서 몰라먀잉으로 와서 전생에 자신과 같이 살았던 사야도들의 이름을 확인해주었습니다.


그는 강도들이 돈을 얻지 못하자 자신을 칼로 찔렀고 부두로 도망쳐와서 배를 타고 메르귀에 와서 현재의 부모집에 살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한 도주, 배를 탄 것등은 어쩌면 사야도의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이었을 것입니다.

 

 업의 표상(kamma-nimitta)과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은 즉사할 경우에도 나타납니다. 주석서에 따르면 철봉위에 앉아 있는 파리를 망치로 내리칠 때도 일어난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는 큰 도시 하나를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핵무기가 있습니다. 불교적 견해에 따르면 이런 핵무기는 잠재적 피폭자의 악업으로 인해 생겨난 것입니다.


이 핵폭탄에 죽는 사람들도 회상과 표상을 봅니다. 마음의 매커니즘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터무니없게 들리겠지만, 정신- 물질을 찬찬히 관찰하는 수행자는 이를 쉽게 수긍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눈 한번 깜짝할 찰나에도 마음의 단위들은 수십억번이나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경전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한 지혜(udayabbaya-ñāṇa)를 얻은 수행자는 한 찰나에도 수없이 많은 마음의 단위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경험적으로 압니다. 그러므로 사고나 갑자기 죽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회상과 표상들에 집중된 마음의 가능성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항상 대상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우리들은 자주 이전에 한 행위를 회상하거나 천신계나 인간계를 생각합니다, 선행을 한 사람이 만약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죽는다면 천신이나 사람으로 재생할 것입니다.


임종 때 가지는 이러한 생각의 대상을 태어날 곳(gati-nimitta)의 표상이라고 하고, 업과 관련된 대상의 표상을 업의 표상(kamma-nimitta)이라고 합니다.


 임종할 때의 현상들에 대한 언급은 주석서뿐만 아니라 빨리68 성전에서도 발견됩니다.『중부』「우현경(愚賢經 Balapandita Sutta)」(M129)과 그 밖의 다른 경들에서 부처님께서는 임종 때의 선행이나 악행에 대한 기억을 말씀하시면서, 이를 저녁때 들판에 드리워진 산의 그림자로 비유하셨습니다. 그것은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한때 나는 죽어가는 여인이 잔인하게 학대당하는 것처럼 극도의 두려움을 보이는 것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여인은 말을 하질 못했고 친척들이 안심시키려 했지만 허사였습니다. 아마도 그녀는 악업의 결과로 태어날 불행한 내생을 미리 맛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업을 지어서 죽는 순간에 선업과 연관된 대상이나 사람의 표상과 좋은 내생의 표상이 생기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선행이 지혜롭고 목적의식이 강하며 욕계의 여덟 가지 유익한 마음중의 하나라면 과보식은 네 가지 지혜가 있는 식(識)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면 재생은 어리석지 않음(amoha)과 결부되고, 그렇게 어리석지 않음(amoha), 성냄 없음(adosa), 탐욕 없음(alobba)의 세 가지 뿌리와 조건, 즉 원인(hetu)과 함께 일어납니다.


이러한 선근을 타고난 사람이 사마타를 닦을 경우에는 선정과 신통을 얻을 수 있고 위빠사나에 매진할 때에는 성스러운 도와 닙바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열반에 대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행한 선행들은 그러한 선한 재생으로 인도하고 궁극에 가서는 명상이나 법문을 통해 도와 열반에 이르게 됩니다.


 만약 열반에 대한 목적의식이 약하거나 선하기는 하지만 지혜가 모자란 행위, 즉 업에 대한 믿음이 결여된 선행일 경우에는 네 가지 어리석은 과보심(moha-vipāka)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리석지 않음(amoha)이 없이 다른 근본 조건, 즉 탐욕 없음(amoha)과 성냄 없음(adosa)만을 가지고 재생이 일어납니다. 이를 두 가지 원인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dvehetupaṭisandhika)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태어난 사람은 선천적인 지혜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선정이나 도를 얻을 수 없습니다.


 만약 선행이 지혜와 결부되지 않았거나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라면 어떠한 선근도 없이 선한 재생연결식만을 낳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불완전한 눈과 귀 등을 가지고 태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므로 선행을 할 때에는 열반을 목표로 하고 열과 성을 가지고 해야만 합니다. 마음을 열반으로 향하게 한다면 선행은 열반으로 인도할 것이며 선행을 할 때의 열과 성은 선근을 가지고 재생하도록 할 것입니다.


지혜롭게 열과 성을 다해 선행을 한다면 고귀하게 재생한다는 것은 틀림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선행을 함에 있어서 열과 성이 없다면 탐욕 없음(alobha)과 성냄 없음(adosa)이 없는 재생이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보시와 지계는 재생과 윤회고에 이르는 무명에 뿌리박은 선한 업 형성력인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ā-abhisaṅkhāra)를 뜻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무지에서 비롯된 그릇된 견해입니다. 열반을 바라는 마음에서 보시와 지계를 행하면 가장 고귀한 재생을 보장하고 최고의 목표에 이르도록 합니다.


사리뿟따와 다른 부처님의 제자들이 궁극적으로 열반을 얻은 것은 보시와 지계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벽지불69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보살도 또한 자신의 선행이 일체를 아는 지혜를 얻게 해달라고 서원하면서 그렇게 했기 때문에 위없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여기서 부처님이 될 보살의 태어남과 관련된 어리석지 않음(amoha), 성냄 없음(adosa), 탐욕 없음(amoha)의 세 가지 선한 근기를 가진 재생은 기쁨(somanassa)과 함께하는 마음과 평온(upekkhā)이 함께하는 마음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두 가지 마음은 각각 자극받지 않은 마음(asaṅkhārika-citta)과 자극받은 마음(sasaṅkhārika-citta)이 있습니다. 보살의 재생연결식은 강력하고 열정적이고 자극받지 않은 마음이었습니다.

 

 옛 주석서에 따르면 그것은 기쁨(somanassa)이 함께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모든 중생이 행복해지길 간절히 바랐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모든 중생들에 대해 무한한 자애(mettā)를 가졌습니다. 강력한 의지의 자애는 보통 기쁨(somanassa)과 함께하므로 보살의 재생연결식은 기쁨과 함께한 것입니다.

 

하지만 마하시와(Mahāsiva) 장로70는 평온(upekkhā)이 보살의 재생 마음부수로 함께 하지 않겠느냐는 견해를 피력합니다. 장로의 견해에 따르면 보살의 마음은 확고하고 심오하기 때문에 기쁨보다는 평온이 보살의 재생연결식의 특징이라고 합니다.


여하튼 이 재생연결식은 위없는 깨달음을 바라는 욕구에서 자극받은 선행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롭고 선한 업형성력(sakhāra)이 재생에 이르게 했지만 윤회를 연장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윤회로부터 해방되도록 했습니다.

 

 마음은 재생연결식이거나 다른 것이거나 간에 매우 짧은 시간만 머묾니다. 그것은 시간적인 측면에서 일어남(生 upāda), 머묾(住 ṭhiti), 무너짐(滅 bhaṅga)이라는 세 가지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주석서에 따르면 이들 마음의 단위는 눈 깜짝할 동안에 수백만 번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합니다. 각 단위의 순간들은 너무나 짧아서 백만분의 1초도 머물지 않습니다71.

  

 재생연결식이 소멸한 다음에는 다른 식들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 한, 보고 듣는 것과 결부된 정신활동의 일종인 인식 과정(vīthi)이라고 하는 잠재의식인 바왕가의 흐름(bhavaga-sota)이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삶이 이어지는 한 이 바왕가의 흐름은 계속되며 그것의 주요 원인은 재생연결식과 마찬가지로 상카라(sakhāra)입니다.


바왕가의 흐름이 지속되는 기간도 주로 상카라, 즉 업(kamma)에 의존합니다. 이는 마치 하늘에 던져진 돌과 같습니다. 돌을 던진 손의 힘이 세다면 돌은 멀리 올라가겠지만 힘이 약하다면 그다지 멀리 올라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업의 힘은 또한 총알이나 로켓 따위가 처음 발사되었을 때의 속도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죽음은 그와 같은 업의 힘에서 나온 식(識)의 소멸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때 맨 처음 일어나는 재생연결식, 바왕가의 흐름, 마지막 죽음의 마음(cuti-citta)은 전적으로 과거업에 뿌리를 두고 있는 정신적 생명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또한 업, 즉 상카라(sakhāra)로 인하여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는 것과 결부된 오문인식과정이 있으며 감각대상에 초점을 둔 정신적 단위, 조사하는 마음(santīraṇa-citta)72, 자와나(javana)73의 대상을 등록하는 마음(tadārammaṇa-citta)74이 있습니다. 이들은 재생에 이르게 하는 원래의 업이나  다른 종류의 업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논장(論藏)에 따르면 선한 마음, 불선한 마음, 업이 되지 않는 작용만 하는 마음(kiriya-citta)을 포함하는 모든 식(識)의 원인은 상카라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작용만 하는 마음(kiriya-citta)도 상카라에 뿌리를 둔 바왕가의 마음(bhavaga-citta)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이러한 견해는 합리적입니다. 그리고 연기법은 특히 번뇌의 회전(kilesa-vaṭṭa), 업의 회전(kamma-vaṭṭa), 과보의 회전(vipāka-vaṭṭa)과 그들의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업의 회전(kamma-vaṭṭa)에서 나온 32가지 세간의 과보심의 원인을 상카라에 돌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32가지 마음 가운데 우리는 재생연결식, 바왕가(잠재의식), 죽음의 마음 등으로 이루어진 19가지 마음을 설명하였습니다. 나머지 마음 중 일부는 상카라에 따라서 선한 것도 있습니다.


 12연기의 가르침은 처음의 두 요소인 무명(無明)과 상카라[行]는 전생의 원인으로 설명하고,  식(識), 정신-물질[名色], 감각접촉[觸], 느낌[受]은 현생의 결과로 설명하고,  현세의 갈애[愛], 집착[取], 존재[有]로 인해서 내생에 태어남[生], 늙음-죽음[老死]이 일어난다고 설명합니다.

 







20. 식(識)에서 정신-물질[名色]이 일어난다.



 12연기에 따르면 식(識)에서 정신-물질[名色]이 일어납니다. 이 말은 재생연결식이 일어남에 따라 정신-물질[名色]도 함께 일어난다는 것을 뜻합니다.


재생연결식은 임종 때 보는 표상들과 결부된 느낌[受], 인식[想], 감각접촉[觸], 의도, 주의 기울임[作意]75등의 마음부수들과 반드시 함께 합니다. 모든 마음(citta)에는 이러한 마음부수들이 결부됩니다.


일부 범천, 천신, 사람들의 높은(tihetu)재생도 또한 어리석지 않음(amoha), 성냄  없음(adosa), 탐욕 없음(amoha)라는 세 가지 선근(善根)를 타고 나는 반면 땅에 붙어사는 신[地神]들과 성기능이 불완전한 중성(paṇḍka)은 그러한 선근을 가지지 않고 태어납니다. 하지만 그들의 재생은 원인 없는(ahetu) 선한 재생연결식이므로 태어날 때부터 선근이 없는 악처중생의 불선한 원인 없는(ahetu) 재생연결식과는 구분됩니다. 


 태어남은 (1) 모체의 자궁 안에서 태어나는 태생(jalābuja) (2) 오폐물에서 태어나는 습생(sasedaja) (3) 완전히 성장한 육체를 가지고 갑자기 자연발생적으로 태어나는 화생(opapātika)의 세 가지 형태중 하나로 이루어진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또 태생(jalābuja)은 사람과 포유류와 같이 탯줄과 함께 태어나는 태아입태(胎兒入胎 gabbhaseyaka-paisandhi)알에서 깨어 나오는 조류와 같은 난생입태(卵生入胎 aṇḍhaja-paisandhi)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 중생들은 크기나 임신기간, 혹은 부화기간이 다르기 때문에 기원에 있어서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그 정도로만 해두고, 지금부터는 주석서에 나와 있는 사람의 태어남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재생연결식이 일어남과 동시에 3가지 업에서 생긴 물질의 깔라빠(kamma-jā-rūpa-kalāpa)76인 30가지 물질(rūpa)들이 생깁니다. 이들은 업에 근원을 둔 물질로 10가지 몸의 물질(kāya-rūpa), 10가지 성의 물질(bhāva-rūpa), 10가지 토대의 물질(vatthu-rūpa)입니다.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 형상, 냄새, 맛, 자양분(ojā), 생명기능과 몸의 감성(kāya-pasāda)77이 10가지 몸의 물질(kāya-rūpa)을 이루고 성의 물질과 땅의 요소[地大] 등이 10가지 성의 물질(bhāva-rūpa)을 이룹니다.


성의 물질(bhāva-rūpa)은 2가지 생식에 관련된 물질을 뜻하는데, 하나는 남성이고 다른 하나는 여성입니다. 성전환 수술을 거친 사람의 경우에서 보듯이, 이러한 물질들이 성숙함에 따라 남자와 여자의 정신과 신체적 특성이 구분됩니다.


「법구경」주석서(DhA.i.324ff)에 따르면 부처님 당시의 쏘레야(Soreyya)78라는 장자의 아들은 마하깟쨔야나(Mahā-kaccāyana) 존자79에게 불선한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여자로 변했습니다. 남자의 모든 특성은 사라지고 여자의 특성이 나타났습니다.


소레야는 나중에 두 명의 아이까지 낳았습니다. 존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나서야 남자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승가에 들어가서 아라한으로 죽었습니다. 이는 광견병에 걸린 개에게 물리고 나서 광견병 증상이 나타나는 사람의 경우와 어느 정도 유사합니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중성(paṇḍaka)은 성의 물질(bhāva-rūpa)이 없습니다. 중성은 열 가지 몸의 물질(kaya-rupa)와 열 가지 토대의 물질(vatthu-rūpa)만을 지니고 있습니다. 토대의 물질(vatthu-rūpa)은 재생연결식과 바왕가, 죽음의 마음, 기타 마음의 물질적 토대입니다.


그러므로 수태의 순간 재생연결식을 위한 물질적 토대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가지 깔라빠(kalāpa), 즉 30가지 물질은 깔랄라(kalala)80를 이루는데, 옛 불전(佛典)에 따르면 이 깔랄라가 생의 출발점이라고 합니다.

 

 이 배아기의 물질은 가느다란 모직으로 된 실에 붙은 작은 버터 기름 덩어리만한 크기입니다. 너무 작아서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으며, 단독으로는 생존하지도 못합니다. 깔랄라는 부모의 정액(sukka)과 피(sanita)의 결합으로 생긴 것 이라고 봐야 합니다. 이러한 견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린이가 육체적으로 부모를 닮는 것을 설명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경전에서도 육체는 네 가지 근본 요소[四大]81와 부모의 정액의 산물이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삼장(三藏)은 잉태를 위해서는 부모의 성교, 모체의 월경, 태아가 되기에 적합한 어떤 것, 즉 간답바(gandhabbha)82의 3가지 조건들이 필요하다고 상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부』「대애진경(Mahātaṇhāsankhaya Sutta)」(M38)에 따르면, 태아의 깔랄라(kalala)는 부모의 정액과 피의 결합에 그 근원을 두고 있음이 분명합니다83.


 부모에게서 나온 정액과 피는 온도에서 생긴 물질(utuja-rūpa)입니다만, 업에서 생긴 물질(kammaja-rūpa)과 같은 것으로 보아도 좋습니다. 현대의 의사들은 건강하지 못한 조직을 떼어내고 건강한 조직을 이식합니다. 이식된 조직은 몸에서 떼어져 나올 때에는 온도에서 생긴 물질이지만 다른 조직에 이식되어 전체의 일부가 된 다음에는 몸의 감성 물질(kāya-pasāda-rūpa), 즉 업에서 생긴 물질로 나타납니다.


또 병든 장기(臟器)대신에 염소의 내장이나 사람의 눈을 이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이식된 장기는 의심의 여지없이 몸의 감성과 눈의 감성의 형태로 업에서 생긴 물질로 성장합니다. 마찬가지로 세 가지 업에서 생긴 깔라빠(kammaja-kalapa)들은 부모로부터 분리된 정액과 피의 온도에서 생긴 물질의 결합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서양의 생물학자들에 따르면 점차 성장하여 아이가 되는 것은 어머니의 난자와 아버지의 정자의 결합이라고 합니다. 초기의 태아는 너무나 작아서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과학자들의 이러한 발견은 불전(佛典)에서 설하는 수태와 완전히 일치합니다.


부처님께서는 현미경이나 다른 기구의 도움 없이 오직 지혜의 힘으로 부모의 정액과 피를 토대로 한 깔랄라로서의 세 가지 깔라빠, 즉 서른 가지 물질로 어떻게 생명이 시작되는지를 아셨습니다. 이것이 2500년 전의 부처님의 가르침이었으며 서양의 과학자들은 불과 지난 300년간의 현미경을 이용한 긴 조사 끝에 비로소 수태에 대한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러한 발견은 부처님의 일체를 아는 지혜[一切智]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서른 가지 물질의 기원은 아직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지극히 미세한 업에서 생긴 물질(kammaja-rūpa)이 현미경을 이용한 조사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부수(cetasika)와 업에서 생긴 물질(kammaja-rūpa)은 재생연결식에서 생긴 정신과 물질입니다. 온도에서 생긴 물질(utuja-rūpa)이 열로 인해 매 심찰나84마다 새롭게 바뀌는 것처럼 업에서 생긴 물질도 그러합니다. 


첫 번째 바왕가의 마음(bhavaga-citta)이 일어날 때부터 마음에서 생긴 물질도 마음(citta)이 일어나는 순간에 일어납니다.  하지만 보임 등을 그냥 알게 하는 마음은 물질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날 때 느낌(受) 등과 같은 마음부수는 다른 모든 종류의 마음과 업에서 생긴 물질, 온도에서 생긴 물질, 마음에서 생긴 물질과 같은 다른 모든 종류의 물질들이 함께 차례대로 일어납니다.


1주일 후에 깔라빠는 압부다(abbuda)가 되고, 이것이 다시 1주일 후에 한 덩어리의 살로 변합니다. 다음 주에 이것은 가나(ghana)로 단단해지고 5주가 되면 손과 발이 될 네 개의 혹과 머리가 될 하나의 큰 혹을 가진 빠사카(pasākhā)로 성장합니다.

 

 불전(佛典)은 5주 뒤의 태아의 성장에 대해 상세히 서술하고 있지 않지만 77일후에는 모체가 섭취한 자양분(ojā)의 산물인 음식에서 생긴 물질(āhāra-rūpa)85과 함께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는 네 가지 감성의 물질(pasāda-rūpa)이 나타난다고 쓰여 있습니다. 또한 태아는 손톱과 발톱 등이 있다고 쓰여 있습니다.


수행자가 자세히 알 필요는 없기 때문에 불전에는 그 이상의 상세한 설명이 없습니다. 그러한 지식은 의사에게나 유용할 것입니다.





21. 화생(化生)



사대왕천(四大王天)86같은 천신들은 재생연결식이 일어남과 동시에 70가지 물질인 일곱 가지 각기 다른 깔라빠(kalāpa)들, 즉  눈, 귀, 코, 혀, 몸의 십 원소(kāya-dasaka), 성의 십 원소(bhāva-dasaka), 토대의 십 원소(vatthu-dasaka)도 생깁니다.


천신들의 눈, 귀 등의 크기에 따라서 같은 종류의 깔라빠가 무수히 많습니다. 초선천(初禪天), 이선천(二禪天), 삼선천(三禪天), 광과천(廣果天), 정거천(淨居天)에 태어나는 범천에게는 코의 십 원소, 혀의 십 원소, 몸의 십 원소, 성의 십 원소라는 십 원소 깔라빠(dasaka-kalāpa)가 없습니다.


그들은 눈, 귀, 토대의 십 원소 물질 깔라빠(dasaka-rūpa-kalāpa)와 한 가지의 구 원소 깔라빠 (navaka-kalāpa), 즉  네 가지 각기 다른 깔라빠의 총합이나 39가지 물질이 재생연결식과 함께 생깁니다. 이러한 네 가지 깔라빠 중에서 생명의 구 원소 깔라빠(jīvita-navaka-kālapa)가 몸의 십 원소의 성질을 띱니다.  천신의 몸에 몸의 십 원소 깔라빠(kāya-dasaka-kālapa)가 퍼져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범천의 몸은 생명과 아홉 가지 물질이 퍼져 있습니다.


무상유정(無想有情)87이라는 범천은 태어날 때부터 마음이 아예 없습니다. 그들은 오직 범천의 모습을 나타내는 생명의 구 원소 깔라빠만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과 마음에서 생긴 물질(cittaja-rūpa)이 없기 때문에 이 범천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움직임이 없습니다. 마치 나무로 조각한 상과도 같습니다.


이 범천보다 더 놀라운 것은 물질이 없이 마음과 마음부수의 잇따른 재생성을 거쳐 무색계에서 수천 겁을 사는 무색계범천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과학적인 조사로는 접근할 수 없으며 오직 신통을 지닌 부처님과 성자만 알 수 있습니다.


 항상 몸이 불타는 지옥중생과 항상 굶주리는 아귀는 모태에서 태어나거나 순수한 물질에서 태어날 수 없습니다. 악업으로 인해 그들은 화생(化生)으로 생겨납니다. 앞서 언급한 천신들처럼 홀연히 7개의 깔라빠(kālapa)나 70개의 물질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나쁜 감각대상과 감각접촉[觸]을 통해 괴로움을 받아야 할 운명이기 때문에 대개는 불완전한 시각이나 청각 등을 지니지 않습니다.


 



22. 습생(濕生)



오폐물에서 생겨난다고 하는 습생(sasedaja)은 점진적으로 형성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불전(佛典)에서는 이들이 불완전한 시각 등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다 자란 형상으로 생겨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점진적으로 형성되게 맞는지, 아니면 다 자란 형상으로 생겨나는 게 맞는지를 단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업에서 생긴 물질(kammaja-rūpa)은 과학적인 탐구로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당분간은 경전에서 설하고 있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습생과 화생에서의 업에서 생긴 물질과 다른 물질들의 성장은 일반적으로 태생과 같습니다. 유일한 차이점이라면 습생의 경우 음식에서 생긴 물질(āhāraja-rūpa)은 그들이 먹을 것을 먹거나 침을 삼켰을 때 생긴다는 것뿐입니다.

 




23. 인식과정



인식과정(vīthi-citta)88은 바왕가의 마음(bhavaga-citta)과는 다른 종류의 마음입니다. 바왕가의 마음은 대상과 과정의 측면에서 재생연결식과 유사합니다. 


바왕가의 마음이란 업에 뿌리를 두고 있는 재생연결식을 따라 일어나는 잠재의식의 흐름으로, 전생의 업(kamma), 업의 표상(kamma-nimitta),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이라는 세 가지 표상 중 하나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바왕가의 마음은 현생의 표상과는 관련이 없으며 깊은 잠에 들었을 때의 마음 상태의 일종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먹고, 몸으로 감촉할 때 어떤 변화가 생기는데 정신 현상에서의 이러한 변화를 여섯 가지 인식과정(vīthi-citta)이라고 합니다.   

 형상[色]이 눈의 감성 물질(cakkhu-pasāda)에 반영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매번 일어날 때 마다 단지 17번의 심찰나 동안만 지속되는 이 물질들은 형상[色]과 그 정신적 표상들과 함께 끊임없이 새롭게 변합니다. 눈의 물질과 형상[色]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하지만 물질은 일어나는 순간에는 강력하지 않기 때문에 바왕가의 마음이 지속되는 순간에는 눈과 그 대상사이에는 접촉이 일어나지 않습니다89.


다른 말로 하면, 형상[色]이 눈에 반영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반영되기 전에 사라지는 바왕가를 지나간 바왕가(atīta-bhavaga)라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또 다른 바왕가의 마음이 일어나고 전향됩니다. 그 결과 바왕가의 마음은 끊어집니다. 익숙한 대상에 대한 바왕가의 마음의 주의력은 떨어지고 형상[色]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이를 바왕가의 동요(bhavaga-calana)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다른 바왕가가 그 자리를 대신하지만 너무나 약하기 때문에 바왕가의 흐름이 끊어지는데 이를 바왕가의 끊어짐(bhavaga-uppaccheda)이라고 합니다. 마음은 눈에 보이는 형상[色]에 관심을 두기 시작합니다. 이 알려고 하는 마음을 전향하는 마음(āvajjana-citta)이라고 하며 다섯 감각기관에 해당하는 오문전향식(pañca-dvārāvajjana-citta)90이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안식(眼識)이 일어나고 안식이 소멸하면 형상(色)을 수용하고 살피는 받아들이는 마음(sampaṭicchana-citta)이 일어납니다.


바왕가는 상카라에서 기인한 과보의 마음(vipāka-citta)이며, 안식(眼識)과 받아들이는 마음도 역시 상카라에서 기인합니다. 선하거나 불선한 상카라에 따라서 선하거나 불선한 과보의 마음이 있습니다.


반면에 전향하는 마음(āvajjana-citta)은 도덕적으로 선하지도 불선하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무기(無記)91의 마음을 업의 효력이 없는 단순한 행위를 뜻하는 작용만 하는 마음(kiriya-citta)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종류의 마음(citta)은 일반적으로 아라한의 특성입니다.


 마음이 형상[色]을 받아들인 다음에는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등의 특성에 대해서 조사하는 마음(santīraṇa-citta)이 이어집니다. 그러고 나서 좋은 것이라는 등을 결정하는 마음(voṭṭhapana-citta)92이 뒤따릅니다.


이것이 일곱 번 연속하여 번쩍이는 충격의 순간을 뜻하는 자와나(javana)에 이릅니다. 자와나는 아주 재빠르게 일어납니다. 그것은 바왕가 과정의 다른 요소에는 없는 속도와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탐욕(lobha)이나 탐욕 없음(alobha)과 같은 선하거나 불선한 강력한 마음부수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악한 마음이 그 대상에 재빠르게 돌진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탐욕이 우리로 하여금 원하는 대상을 쟁취하고 힘으로 거며 쥐도록 하고 분노는 그 대상에 맹목적으로 돌진하여 파괴하려는 욕구가 내면에 치밀어 오르게 합니다. 의심, 들뜸, 무명도 각각의 대상들과 빠르게 연관됩니다.


선한 마음부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필사적이고 충동적인 특성 때문에 감각적 욕망은 감각적 욕망의 자와나(kāma-javana)이라고도 합니다. 일곱 개의 자와나의 심찰나 다음에는 두 개의 등록하는 마음(tadārammaṇa-citta)순간들이 일어납니다. 이 마음은 자와나의 대상과 관련 있는 것으로, 그 기능은 선행하는 마음의 거며 쥐려는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바왕가의 과정에서 눈의 감성 물질(cakkhu-pasāda)에 의존하는 안식(眼識)은 지나간 바왕가(atīta-bhavaga)와 함께 일어납니다. 다른 식들은 다른 마음(citta)과 함께 일어나는 심장토대(hadaya-vatthu)의 물질에 의존합니다. 전향하는 마음(āvajjana-citta)에서 두 번째 등록하는 마음(tadārammaṇa-citta)까지의 14개의 마음은 오직 현재의 대상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 14개의 마음은 바왕가의 마음과는 성질이 다른 인식과정(vīthi-citta)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활동하는 마음입니다. 바왕가 과정의 마무리인 두 번째 등록하는 마음(tadārammaṇa-citta)이 소멸한 다음에는 정신적 생명은 수면상태와 같은 바왕가의 상태로 되돌아갑니다.

 

 다음의 비유는 바왕가의 인식과정(vīthi)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내가 망고나무 밑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망고하나가 떨어지는 바람에 잠을 깼습니다. 사내는 망고를 집어 들고 조사합니다. 냄새를 맡아보고 잘 익었다는 것을 알고는 먹습니다. 사내는 그 맛에 대해 생각해보고는 다시 잠에 듭니다.


여기서 대상으로서의 업(kamma), 업의 표상(kamma-nimitta),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을 가지는 바왕가 상태는 잠자고 있는 상태와 같습니다. 망고가 떨어져서 깨어남으로써 시작하는 것은 바왕가의 마음의 일어나고 사라짐에 비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잠이 깬 다음에 회상하는 것은 전향하는 마음(āvajjana-citta)입니다. 형상[色]을 보는 것은 망고를 보는 것입니다.


조사하는 마음(santīraṇa-citta)은 사내가 망고를 조사할 때와 관련 있습니다. 망고가 익었다고 결론내리는 것은 결정하는 마음(voṭṭhapana0-citta)입니다. 자와나(Javana)는 망고를 먹는 것과 같고 등록하는 마음(tadārammaṇa-citta)은 그 맛을 생각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바왕가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은 다시 잠에 드는 것과도 같습니다.


형상[色]이 그다지 눈에 선하지 않다면 지나간 바왕가(atīta-bhavaga)가 두세 번 일어난 다음에 눈의 감성 물질(cakkhu-pasāda)에 나타납니다. 그러한 대상의 경우에는 인식과정(vīthi)이 등록하는 마음(tadārammaṇa-citta)이 나타나기 전까지 가지 않고 자와나에서 끝난 다음에 바왕가 상태로 가라 않습니다.

 

 형상[色]이 더 약할 때에는, 다섯 번에서 아홉 번까지 지나간 바왕가(atīta-bhavaga)가 일어난 다음에서야 비로소 회상됩니다. 인식과정(vīthi)은 자와나까지 가지 않고 결정하는 마음(voṭṭhapana-citta)이 두세 번 일어난 뒤 끝납니다.


그렇게 결정(voṭṭhapana)에서 끝나는 인식과정(vīthi)은 위빠사나 수행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끊임없이 사념처를 닦는 수행자는 감각대상을 찾거나 번뇌로 오염시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회상이 느려서 전향하는 마음(āvajjana-citta)이 약해지고, 안식(眼識)이 명확하지 않으며, 받아들임(sampaṭicchana)은 적절하지 않고, 조사하는 마음은 효과적이지 않으며, 결정하는 마음(voṭṭhapana-citta)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두세 번 결정하는 마음이 일어난 다음에, 마음은 바왕가의 상태로 들어갑니다.


대상은 마음을 번뇌로 오염시킬 정도로 분명하지는 않으며 수행자는 현상의 무상· 고· 무아를 알게 됩니다. 봄에는 오직 맨 그대로의 앎만이 있을 뿐이며 인식과정(vīthi)은 번뇌들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지금까지 눈[眼]에 대해서 개략적으로 설명한 인식과정(vīthi)은 귀[耳], 코[鼻], 혀[舌], 몸[身]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24. 의문(意門) 인식과정



의문인식과정(mano-dvārā-vīthi)93은 관련된 자와나에 따라서 (1) 업의 자와나(kamma-javana) (2) 선의 자와나(jhana-javana) (3) 도과의 자와나(magga-phala-javana)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업의 자와나(kamma-javana)의 인식과정(vīthi)입니다.


바왕가의 흐름이 흘러가고 있는 동안 경험했거나 때로는 경험해보지 못한 감각대상의 정신적 표상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바왕가가 흔들려서 다음에는 끊어집니다. 그 다음에 다섯 감각기관에서 결정하는 마음(voṭṭhapana-citta)과 어느 정도 비슷한 전향하는 마음(āvajjana-citta)인 의문전향식이 일어납니다.


결정하는 마음과 마찬가지로 의문전향식은 두려움, 분노, 혼란, 신심, 경외감, 연민 등의 좋거나 싫은 감정이 생기게 하는 자와나(javana)에 이릅니다. 다섯 감각기관에서 일어나는 자극은 약해서 선하거나 나쁜 재생에 이르게 하지도 못하고 더 큰 다른 과보도 생기게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마음에서의 자극은 재생의 질과  다른 모든 과보들을 결정할 정도로 강력합니다.


그러므로 이 자극을 보호하고 제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곱 개의 자와나 심찰나 다음에 두 개의 등록하는 마음(tadārammaṇa-citta)의 심찰나가 일어난 다음, 마음은 바왕가의 상태로 들어갑니다.


  

 이와 같이 의문 인식과정은 하나의 전향하는 마음(āvajjana-citta)의 심찰나, 일곱 개의 자와나 심찰나, 두 개의 등록하는 마음(tadārammaṇa-citta)의 심찰나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희미하고 불분명한 대상의 경우 마음은 등록하는 마음을 건너뛰고, 자와나를 거쳐서 바왕가로 돌아갑니다. 대상이 아주 약하다면, 마음은 자와나 조차도 얻지 않고 두 세 개의 전향하는 마음의 심찰나만 있습니다.


우리가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마노의 대상[法]들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한다면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 의문인식과정에서 유일한 과보의 마음(vipāka-citta)은 등록하는 마음(tadārammaṇa-citta)이고 다른 두 가지는 작용만 하는 마음(kiriya-citta)으로 상카라에서 기인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25. 오문전향에 이어지는 의문(意門)인식과정                                     


                                                            

의문 인식과정은 각각의 감각기관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인식과정(vīthi)에 뒤이은 바왕가의 상태에서 빠져 나와 감각대상을 조사하는 것과 관련될 것입니다.


이 인식과정(vīthi)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마노[意]94는 구경법의 물질(paramattha-rūpa)만을 그 대상으로 삼습니다. 남자, 여자 등과 같은 관습적인 용어인 개념(paññātti)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순간 수행자는 구경법(究竟法 paramattha-dhamma)95을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에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수행자는 보거나 듣는 즉시 관찰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행자가 두는 주의력의 초점으로써 지금 이 순간과 즉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노의 인식과정(mano-vīthi)이 일어난 뒤에 수행자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형상[色], 소리[聲]등과 관련하여 또 다른 마노의 인식과정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되면 감각대상은 관습적인 형태와 모양으로 특별한 주의의 대상이 되어 버립니다.


 이 인식과정(vīthi)은 강하고 불선한 자극에 노출되게 됩니다. 그것은 남자, 여자 등과 같은 관습적인 명칭에 초점을 맞추는 또 다른 마노의 인식과정으로 이어지고, 거기서 더욱 강한 불선한 자극들의 영향을 받기 쉽게 됩니다.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대상을 접하면, 인식과정은 봄, 조사, 관습적인 용어로 모양과 실재를 인식하는 세 가지 단계를 포함합니다. 인식과정은 관습적인 명칭을 인식하는 데까지는 가지 않습니다. 관습적인 명칭과 관련하여 일어나는 인식과정의 경우는 들음, 조사, 관습적인 명칭으로 인식, 관련된 모양과 실재를 아는 것을 포함합니다. 

 




26. 식(識)을 조건으로 정신-물질[名色]이 일어난다



 재생연결식 때문에 그와 관련된 느낌[受], 기억, 인식[想], 조사 등의 마음부수가, 30개의 물질인 세 개의 깔라빠(kalāpa)와 함께 생깁니다. 재생연결식이 소멸한 다음에 마음부수가 식의 활동에 뒤이어 일어나고 마음(citta), 업(kamma), 온도(utu), 음식(āhāra)에 조건 지어진 물질이 그렇게 일어납니다.


마음과 마음부수가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마음이 활동하고 있을 때 우리는 느끼고, 기억하고, 생각하고, 탐욕, 성냄, 믿음 등이 생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에서 물질적 현상이 생기는 것도 명백합니다. 우리는 서고, 앉고, 가거나, 하고자 하는 행동을 합니다.


주석서에 따르면, 이 명백한 사실은 수태 순간의 재생연결식이 서른 개의 물질인 세 가지 깔라빠에 이른다는 지식의 근거가 됩니다. 사실, 수태의 순간 재생연결식과 물질은 눈 깜짝할 사이에 생기기 때문에 하늘 눈[天眼]으로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늘 눈[天眼]은 죽기 바로 직전과 재생 뒤에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죽음의 마음과 재생연결식을 직접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부처님의 일체를 아는 지혜[一切智]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물질적 현상의 원인에 대한 지식을 통해 수태되는 순간의 재생연결식에서 물질이 생겨난다고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물질적 현상은 마음이 아닌 업, 온도, 음식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마음이 없다면 생명도 없을 것입니다. 송장은 온도에서 생긴 물질(utuja-rūpa)로 이루어져 있지만 생명이 없습니다.


업, 온도, 음식에 기반하고 있는 물질이 존재하고 지속적인 삶의 흐름을 이루는 것은 바로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식의 흐름이 끊어져서 죽으면 마음부수와 살아있던 물질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에서 정신-물질[名色]이 식에 의해서 조건 지어진다는 가르침이 나옵니다.


 선하거나 불선한 상카라가 있기 때문에 새로운 생에서 식의 흐름이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각각의 마음과 결부된 것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정신-물질입니다. 마음이 한 시간 동안만 지속한다면 정신-물질도 그러합니다.


만약 마음의 흐름이 100년 동안 지속한다면, 우리는 정신-물질의 수명도 100년이라고 말합니다. 요컨대, 삶이란 정신-물질과 식의 끊임없는 인과관계의 연속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요약합니다. 무명이 상카라[行]를 일으킵니다. 사성제에 대한 무명 때문에 사람들은 행복해지려고 노력을 기울입니다[saṅkhāra].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얻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원하는 대상은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움에 이릅니다.


괴로움의 진리[苦諦]를 모르기 때문에 현생과 내생의 행복을 위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이러한 업지음은 낮거나 높은 세계에서 재생연결식에 이릅니다. 이 재생연결식으로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마음의 흐름이 계속해서 진행하고, 이러한 정신적 생명의 본성은 업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물질적인 몸도 (1) 업(kamma) (2) 마음(citta) (3) 온도(utu) (4) 음식(āhāra)의 네 가지에 의해서 조건 지어집니다.

 

움직이고 말하는 등의 몸과 말로 하는 행동이 다 마음에 근거를 두고 생기기 때문에 물질적 현상은 마음(citta)에 의해 조건 지어진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수행자는 이러한 마음에서 생긴 물질(cittaja-rūpa)에 기반을 두고 알아차려서 그것을 체험으로 체험으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념처경」(D22)에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나옵니다.“비구는 걸을 때 자신이 걷고 있음을 알고, 서 있을 때 서 있음을 안다.”주석서에 따르면 마음에서 생긴 물질(cittaja-rūpa)이 마음에 의존함을 체험으로 안다면 우리는 식이 업에서 생긴 물질(kammaja-rūpa), 마음에서 생긴 물질(cittaja-rūpa), 온도에서 생긴 물질(utuja-rūpa), 음식에서 생긴 물질(āhāraja-rūpa)에 기여함을 추론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식(識)으로 인하여 정신-물질[名色]이 일어난다.”라는 12연기의 가르침이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경험적으로는 재생연결식을 알 수 없으며, 그러한 측면에서 과거의 다른 어떤 마음도 그 궁극적인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식은 바로 지금 작용하고 있고 수행자가 항상 알아차리고만 있다면 알 수 있기 때문에, 수행자가 알 수 있는 모든 것은 식에 대한 실체입니다.


수행자가 현재의 식에 주의력을 모으면 정신-물질[名色]을 아주 잘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봄, 봄”이라고 주시하면, 안식을 알게 되며 그 안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정신-물질[名色]도 알게 됩니다. 여기서 안식이라 함은 단지 안식만이 아니라 보는 전체 안문인식과정(cakkhu-dvāra-vīthi)을 뜻합니다.


수행자는 이를 한 단계별로가 아닌 전체과정으로 주시합니다. 게다가 인식과정(vīthi)은 한 개 단위의 식으로써 수행자에게 나타납니다. 이러한 통찰 방식은 「무애해도」96의 다음과 같은 가르침과 일치합니다. “물질에 주의력이 모아진 마음은 일어나고 사라진다. 그러면 수행자는 물질의 소멸을 주시한 마음의 소멸을 관찰한다.”


다른 말로 하면, 물질이 나타나면 마음은 그것을 주시합니다. 하지만 마음이 무너짐의 지혜(bhaṅga-ñāṇa)를 증득했기에 마음은 물질의 무상함도 보고 사라집니다. 사라지는 위빠사나의 마음자체는 관찰의 대상이 됩니다.


이 위빠사나의 마음은 단순한 마음이 아닙니다. 적어도 하나의 전향하는 마음(āvajjana-citta)과 7개의 자와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여덟 가지 마음은 하나하나씩 주시할 수는 없으며 전체 인식과정이 주시의 대상이 됩니다.

 

여기서 안식은 보는 정신적 인식과정 전체를 뜻하며 선업이나 불선업, 그리고 자와나를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안식에 주의를 기울이면 느낌[受], 인식[想], 감각접촉[觸], 주의 기울임[作意], 의도(cetanā) 등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의도는 생각하는 것과 관련해서 더 확연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밤에 다음 날 하지 않으면 안될 일에 대해서 생각할 때, 의도가 왕성하게 활동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를 부추키고 재촉하며, 그 기능은 명백합니다.


자신의 정신-물질을 계속해서 지켜보는 수행자는 말하거나 자신의 몸의 어느 부분을 움직일 때마다 항상 의도를 알아차립니다. 예를 들면, 알아차림(sati)을 하는 동안 가려움이 느껴지면 그 가려움을 없애고자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의도를 주시하고 그 가려움을 없애려는 부추김이 일어나는 것처럼 느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으로 하여금 행하도록 재촉하는 의도로, 이 의도는 매일의 행동과 말과 생각으로 표출됩니다.


요컨대, 관찰을 통하여 안식(眼識)을 알면, 안식에서 일어나는 정신의 무더기[名蘊]뿐 아니라 안식의 토대를 이루는 전체 몸의 물질도 알게 됩니다. 이는 다음 가르침과 일치합니다.“식(識)에서 정신-물질[名色]이 일어난다.”


들음 등과 관련된 식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식을 아는 것은 식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모든 정신-물질[名色]을 아는 것을 뜻합니다. 감각접촉을 아는 것은 즐겁고 괴로운 느낌이 생길 때 그것을 기반으로 합니다. 감각접촉은 움직임과 딱딱함이 드러날 때도 그들에 기반을 둡니다. 팔을 굽히고자 하는 욕구를 주시할 때는 그 뒤에 있는 의도를 압니다.


생각하고 있는 식을 관찰할 때는 그것과 결부되어 있는 정신-물질을 압니다. 무언가를 기억하려는 것을 알 때는 인식(saññā)을 압니다. 어떤 것을 하거나 말하려는 의도를 주시할 때는 의도를 압니다.


자신이 무언가를 바라고 있는 것을 주시할 때, 그것이 자신의 탐욕(lobha)임을 압니다. 자신의 짜증을 주시할 때 그것이 성냄 (dosa)이라고 알며, 존재를 영원하고 행복한 자아로 보는 자신의 견해를 주시할 때는 그것이 어리석음(moha)임을 압니다.


내 안에 바라는 것이 없다고 알 때, 탐욕 없음(alobha)을 압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행하거나 말하려는 자신의 의도에 뒤이어 행동이나 말을 하면, 관찰을 통해 몸에 있는 물질의 원인으로서 식과 마음(viññāṇa-citta)을 알게 됩니다. 

 

식과 정신-물질[名色]은 상호 의존합니다. 식이 정신-물질[名色]을 생기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물질[名色]도 식을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정신-물질[名色]은 함께 생긴 조건(俱生緣 sahajāta-paccaya), 의지하는 조건(依止緣 nissaya-paccaya)97등으로 식에 기여합니다. 모든 마음부수가 함께 기여하거나 물질적 기반인 몸(rūpa)이 기여해야 식이 일어납니다.


비록 식(識)과 정신-물질[名色]이 상호 의존하기는 하지만, 식이 결정하는 요인이므로 정신-물질[名色]의 원인으로 설해집니다. 사실상, 상카라로 인하여 식이 생길 때 식의 부수물인 마음부수와 상카라에서 생긴 물질이 동시에 존재[有]로 들어옵니다.


그러므로 재생의 순간부터 식(識)과 정신-물질이 함께 생깁니다. 식과 정신-물질[名色]은 여섯 감각장소[六入]와 감각접촉[觸]과 느낌[受]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식은 정신-물질[名色]의 원인이고, 정신-물질[名色]은 여섯 감각기관[六入]이 원인이므로 부처님께서는 원인과 결과를 구분하기 위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식(識)을 조건으로 정신-물질[名色]이 일어나며...” 마찬가지로 「법구경」은 이렇게 설하고 있습니다. “마음(mano 또는 viññāṇa)이 마음부수(cetasika)를 앞서간다. 불선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뒤따른다. 마치 수레가 소의 뒤를 따르듯이.”

 

 실제로는 마음과 마음부수가 함께 생기지만, 마음의 지배적인 역할 때문에 마음이 마음부수를 앞서 간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마음이 악하면  나쁜 행동을 하고 나쁜 말을 하고 나쁜 생각을 품습니다. 이 세 가지 종류의 업은 무명에서 생긴 상카라입니다.


그것은 악한 과보의 잠재력이 됩니다. 모든 행동이나 말이나 생각의 뒤에는 몇 번씩 나타나는 일곱 개의 자와나가 따라옵니다. 만약 첫째 자와나가 우위에 서면 현생에서 업은 효력을 발생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 효력을 상실합니다.


만약 일곱 개의 자와나 중 하나가 우위에 서면, 임종의 순간에 업의 표상, 또는 태어날 곳의 표상을 일으키며, 내생에 업의 효력을 발생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효력을 상실합니다.


다른 다섯 개의 자와나는 적절한 환경을 만났을 때, 셋째 생에서 마지막 생(열반을 성취할 때의 생)까지 업의 효력을 발생합니다. 열반을 성취하고 나서야 비로소 효력을 상실합니다.


열반을 성취하기 전에는 수많은 생애 동안 업의 잠재력이 원래대로 남아 있어서, 환경이 조성되면 과보를 맺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보다 낮은 세계에서 정신적 육체적인 면에서의 고통을 가져옵니다. 선업의 공덕으로 사람으로 태어난다 해도 삶의 지위와 상관없이 악업이 따라와서 괴로움에 시달릴 것입니다.


『중부』「대전기경(大傳記經 Mahapadana sutta)」(D14)은 깨달음을 얻기 바로 직전에 보살이 어떻게 연기를 숙고했는지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보살은 정신-물질[名色], 여섯 감각장소[六入], 감각접촉[觸], 느낌[受], 갈애[愛], 집착[取]과 존재[有]가 늙음과 죽음[老死]에 이르는 인과의 사슬이 됨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는 정신과 물질은 식을 조건으로 하며, 거꾸로 식은 명색을 조건으로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대전기경」위빠시(Vipassi) 보살98이 식과 정신-물질[名色]의 상호관계에 대해 숙고한 것이라고 하고 있지만 모든 보살들이 위없는 깨달음을 얻기 전에 발견한 사실이라고 이해하여야 합니다.





27. 짝꾸빨라 장로 이야기



 앞서 인용한「법구경」의 게송은 부처님께서 짝꾸빨라(Cakkhu-pāla)99 장로와 관련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법구경」주석서 (DhA.i.15ff)에 따르면 장로는 과거생의 어느 때 내과 의사였는데 한 눈먼 여인을 치료시켜 시력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자신의 시력을 회복시켜주면 평생 종노릇을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전보다 더 눈이 나빠지고 있다고 거짓말을 해댔습니다. 속임수를 간파한 내과의사는 아예 눈이 멀어버리는 안약을 주었습니다.


그는 이 악업으로 인하여 수많은 생에 걸쳐 괴로움을 겪었으며 마지막 생에서 짝꾸빨라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는 60명의 다른 비구들과 함께 숲속의 집중 수행처에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명상을 하였습니다..


명상을 하는 동안 전혀 눕지 않고 계속 수행했기 때문에 눈병에 걸렸습니다. 안약을 넣기 위해서는 누워야 하는데 눕고자 하지 않아서 의사는 치료를 포기하였습니다. 장로는 반드시 닥쳐올 죽음을 계속해서 생각하면서 더욱 열심히 노력하였고 한 밤중에 눈이 멈과 동시에 아라한과를 얻었습니다.


보통 사람은 장로가 눈이 먼 것은 지나치게 정진한 대가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된 원인은 전생에 저지른 악업이었습니다. 그러니 명상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장님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라한과를 성취한 것은 짝꾸빨라의 노력과 용맹정진에서 생겨난 커다란 이익이었습니다.


 짝꾸빨라 장로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두 가지입니다. 용맹 정진하는 비구로써 장로는 아라한이 된 뒤에도 위빠사나 수행을 했습니다. 경행을 하면서  길 위의 벌레들을 밟아 죽였습니다. 이 사실을 부처님께 보고했을 때, 세존께서는 장로는 벌레를 죽이려는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곤충들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도덕적 책임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1) 의도(cetanā)없는 살생은 과보가 없다는 것 (2) 신통이 없거나 있더라도 신통을 써서 몸무게를 제어하지 않고 걸으면 아라한일지라도 몸무게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유념해야 합니다.


일부 불교신자들은 채소를 요리하거나 미생물이 있는 물을 마실 때 계를 범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워합니다. 물론 눈으로 보이는 생명체는 걸러내야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행위로 우연히 죽은 생명체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자이나교도는 불타는 등잔불에 날아드는 벌레의 죽음에 대해 죄의식을 느낀다고 합니다.


이러한 견해는 극단적인 것으로 업의 법칙에서 도덕적인 문제의 요지는 의도라는 것이 아소카(Asoka)왕100에게 답한 목갈리뿟따띳사(Moggaliputta-tissa)장로의 평결에서도 확인됩니다.




28. 목갈리뿟따띳사의 평결



 아소카왕이 불법을 지원하던 때 외도(外道)101들이 물질적인 이익을 탐하여 승가에 들아왔습니다. 참된 비구들은 거짓 비구와 어떤 것도 함께 하기를 거부하여 빠딸리뿟따(Pāṭaliputta)102의 아소카라마(Asokarama) 승원에서 7년 동안 포살(uposatha)의식이 행해지지 않았습니다103.


그래서 아소카왕은 비구들이 포살의식을 행하는지 살펴보라고 대신 한명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비구들은 왕의 바람에 불응하였습니다. 포살의식은 참된 비구로 구성된 승가만이 행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만일 도덕적으로 청정하지 못한 비구가 승가에 있다면 그 비구는 율의 계목(戒目)104위반에 대한 훈계와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승가는 모든 구성원이 청정하다고 믿어질 때에만 포살의식을 개최했고 가짜 비구들과는 의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을 행하면 중대한 계율위반이 될 것입니다.


대신은 이러한 대답을 어명을 거역하는 것으로 보고 선한 비구를 칼로 베어 죽였습니다. 왕의 동생인 띳사(Tissa) 장로는 대신이 늦기 전에 알아봤기 때문에 겨우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크게 충격을 받아서 목갈리뿟따 장로에게 자신이 비구들의 죽음에 업의 측면에서 책임이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장로는 왕에게 비구들을 죽이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는지 물었습니다. 왕의 그러한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대답하자, 장로는 왕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장로는 『증지부』(A6.63)에 나오는“나는 의도(cetanā)를 업(kamma)이라고 말한다.”라는 부처님 말씀을 근거로 그렇게 평결한 것입니다. 장로는 보살이 선인(仙人)으로 있을때 업의 법칙의 작용에서 의도가 제일 중요함을 강조하는「띳티라 본생경(Tittira Jākata)」105(J.319)을 인용하였습니다.


 짝꾸빨라 장로 이야기는 아라한도 신통이 없는 경우는 보통 사람처럼 몸무게가 나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장로의 발에 밟혀 죽은 벌레가 이를 말해줍니다. 지난 15년간 미얀마에서는 아라한으로 알려진 성자 몇 분을 배출하였습니다.


어떤 여자 신도는 성자로 하여금 꽃이나 자기의 손을 밟게 하여 정말 성자인지를 시험하였다고 하는데, 꽃이 으깨지거나 손이 다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신통이 없거나 신통을 발휘하지 않는 아라한은 어떤 물체를 직접 밟는다면 으깨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라한인지의 여부를 시험하는 믿을 만한 방법은 갈애, 쾌락을 좋아하는지, 집착, 성냄, 우울, 두려움, 불안, 들뜸, 남을 헐뜯는 경향, 큰 소리로 웃는 습관, 부처님의 앞에서 불경스러운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도덕적 약점들을 가지고 있다면 확실히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철저하게 조사하여 이러한 도덕적 약점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아라한의 공경할 만한 성품을 지니고 있거나 적어도 아라한에 가까운 성자의 품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9. 선한 마음과 행복



 불선한 마음에 뒤이어 괴로움이 따라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한 마음에 뒤이어 행복이 따라옵니다. 선한 마음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선한 업의 상카라(kamma-sakhāra)를 짓습니다. 선업은 현생과 내생에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법구경」주석서(DhA.i.20ff)의  맛타꾼달리(Maṭṭhakuṇḍali)106이야기에서 강조하신 바입니다.

 

 맛타꾼달리는 결코 보시하지 않는 바라문의 아들이었습니다. 맛타꾼달리가 중병에 걸리자 아버지는 그 치료를 위해 돈을 쓰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냥 운에 맡겨버렸습니다.


그리고 문병 오는 사람들이 자기 재산을 보지 못하도록 죽어가는 아들을 집 밖으로 내다 놓았습니다. 바로 그날 부처님께서는 하늘 눈[天眼]으로 죽어가는 소년을 보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소년이 죽기 전에 여래107를 보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하리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비구들과 탁발을 다니다가 그 바라문의 집을 지나셨습니다. 소년은 세존을 뵙자 깊은 믿음108으로 충만하였고, 세존께서 떠나시자 곧 죽어서는 삼십삼천에 태어났습니다.


 맛타꾼달리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해보니 부처님에 대한 믿음으로 자신이 천신계에 태어났음을 알았으며, 또 자기 아버지가 묘지에서 슬퍼하고 있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아버지를 훈계하고자 맛타꾼달리와 닮은 소년의 모습으로 변해서 묘지로 가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늙은 바라문이 왜 우냐고 묻자 자신의 황금마차에 장착할 한 쌍의 바퀴가 필요한데, 그 바퀴는 해와 달로 된 것이어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바라문이 소년의 허황된 욕구를 지적했습니다. 그러자 소년은 자신이 바라는 대상은 보이는 것이지만 바라문은 더 이상 볼 수 없는 죽은 아들을 슬퍼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가 더 어리석은지 아니면 바라문이 더 어리석은지 물었습니다.


바라문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습니다. 천신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자기가 임종의 순간에 부처님에 대해 깊은 믿음을 일으킨 것이 얼마나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었는지를 밝혔습니다. 천신은 전생의 아버지에게 부처님과 법과 승가에 귀의하고 오계109를 지킬 것을 권했습니다.

 

 바라문은 자기 집으로 부처님과 승가를 초대하여 아침공양을 올렸습니다. 그 잔치에는 불교를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모두 참가했습니다. 잔치가 끝난 다음에 바라문은 세존께 법을 한 번도 듣지 못했고 비구들에게 공양을 올린 적도 없고 팔계를 지킨 적도 없지만, 부처님에 대한 믿음만으로 천신계에 태어난 사람이 있는지 여쭈었습니다.


세존께서는 그런 사람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 때 맛타꾼달리 천신이 자기의 저택과 함께 도착했습니다. 그리고는 세존께 자신이 임종할 때의 믿음으로 천신계에 태어났음을 말씀드렸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죽기 전에 선행을 많이 하지 않은 젊은이를 그렇게 엄청나게 이롭게 한 부처님에 대한 믿음의 힘에 대해서 크게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앞에서 설한 다음의 게송을 읊으셨습니다.“ 마음이 모든 법을 앞서간다, manopubbaṅgama dhamma.”

 

「법구경」주석서(DhA.i.20ff)에 따르면 이 게송을 듣고 바라문과 천신은 성자의 첫 번째 단계인 예류과를 성취하였다고 합니다. 단지 부처님에 대한 생각만으로 소년이 천신계에 태어났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합니다.


소년은 열반을 얻겠다는 어떠한 바람이나 욕구도 가졌던 것 같지 않습니다. 소년은 실제로 지혜가 없이 천신으로 태어났지만 부처님의 게송을 듣고는 예류자가 되었습니다.


법구경의 이 두 개의 게송은 상카라[行]로 인하여 식(識)이 생긴다110는 연기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합니다. 왜냐하면 게송은 행복이나 불행은 상카라로부터 생긴다고 설하고 있고, 실제로 행복(sukha)이나 불행(dukkha)은 식과 함께 생깁니다.


다시 식은 연관된 마음부수와 그 물질토대를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식으로 인해 정신-물질[名色]이 일어난다는 가르침이 있는 것입니다. 





30. 정신-물질[名色]과 여섯 감각장소[六入]



정신-물질[名色]을 원인으로 여섯 감각장소[六入]가 생겨납니다. 이는 참으로 심오하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서 정신(名 nāma)은 세 가지 마음부수(cetasika)의 무더기인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인 반면 물질(色 rūpa)은 네 가지 근본 요소[四大], 여섯 감각장소[六入], 생명, 음식111의 물질을 가리킵니다112.


정신-물질[名色]을 조건으로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마노[意]의 여섯 감각장소[六入]가 일어납니다. 이 여섯 감각장소의 문[六門]113을 통해 인식과정에 이릅니다.114


무색계에서는 전 생애에 걸쳐 모든 마음단위들이 관련된 마음부수에서 생깁니다115.

하지만 이는 무색계의 성자들만 이해하는 것이므로 범부들에게는 이론적인 지식일 뿐입니다.

  

더구나 사람처럼 정신과 물질을 모두 가지고 있는 중생은 수태하는 순간부터 일어나는 모든 과보의 마음(vipāka-citta)은 관련된 마음부수에서 기인합니다. 과보의 마음이란 즐겁거나 즐겁지 못한 대상을 그냥 보고 듣고 하는 등의 마음을 뜻합니다.


여기서 보는 마음은 형상에 주의 기울임[作意], 대상과의 감각접촉[觸], 대상을 보려고 하는 의도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혼자서 일어날 수 없습니다.


보는 마음은 마음부수들이 집합적으로 동시에 일어날 때에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식의 조건을 빨리어로 함께 생긴 조건[俱生緣]이란 뜻인 사하쟈따 빠쨔야(sahajāta-paccaya)116라고 합니다. 네 명이 힘을 합쳐야만 들 수 있는 짐을 팀장 혼자서 들려고 한다면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식이 정신적 생명의 주요 동력이기는 하지만 혼자서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다른 마음 부수와 함께 하는 경우에만 기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관련된 마음부수는 재생연결식에 의해 눈[眼], 귀[耳]와 같은 다섯 가지 감각장소에 기여합니다. 물론 수태의 순간에는 몸, 즉 물질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모태를 거치지 않고 재생하는 경우에는 처음부터 다섯 감각장소가 모두 있을 것입니다.


수태의 순간에 식과 마음부수에 의해서 다섯 감각장소가 조건 지어지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부처님의 권위에 근거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른 때에는 과보의 마음과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kiriya-citta)117, 두 가지가 모두 감각장소가 유지되는 것을 돕습니다. 이는 이해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마음 없이 물질이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31. 물질과 여섯 감각장소[六入]



 재생연결식은 심장토대(hadaya-vatthu)에서 일어납니다. 마노의 감각장소[意處]는 눈[眼], 귀[耳]등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생각과 식도 심장을 그 물질적 토대로 합니다. 눈[眼], 형상[色]등과 같은 모든 이차적 물질현상은 다 땅의 요소[地大], 물의 요소[水大], 불의 요소[火大], 바람의 요소[風大]와 같은 네 가지 근본 요소[四大]에 의지합니다.


눈[眼], 귀[耳]와 같은 다섯 가지 감성 물질(pasāda-rūpa)은 네 가 근본 요소[四大]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생명의 물질(jīvita-rūpa)안에 있는 업에서 생긴 물질(kammaja-rūpa)을 기반으로 합니다. 다섯 감각장소의 물질도 자양분(āhāra)의 물질에 의존합니다.

 

요약하면, 마음과 식(citta-vinñāṇa)은 최소한 주의 기울임[作意], 감각접촉[觸], 의도의 세 가지 마음부수에 의해 조건 지어집니다. 때로는 탐욕, 갈애, 성냄, 환상, 자만, 의심, 들뜸, 걱정, 질투, 악의, 불안, 두려움 등이 되풀이 하여 일어납니다.



이 모든 마음의 상태는 불선한 마음부수 때문에 일어납니다. 마찬가지로 믿음, 동정, 도덕관념, 집착 없음, 연민[悲], 더불어 기뻐함[捨], 업의 법칙의 수용, 무상, 고, 무아에 대한 사유 등이 가끔 일어납니다. 이런 마음의 상태는 선한 마음부수에서 일어납니다.


그리하여 수행자는 식이 선하거나 불선한 마음부수들에 의존하고, 안식(眼識)은 눈[眼]에 의존함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마노의 감각장소[意處]가 정신-물질에 의존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마음도 생명체가 존재하는데 필수적인 것입니다. 감각기관을 생성하는 다섯 감각장소는 마음에 의존합니다. 유리라는 거친 물질이 없이는 비추는 거울이 존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감성의 물질(pasāda)들은 거친 물질의 토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눈은  땅의 요소[地大], 물의 요소[水大], 불의 요소[火大], 바람의 요소[風大]라는 거친 물질을 전제조건으로 합니다. 요컨대, 보는 기능은 눈이라는 거친 물질인 몸에 의존합니다. 듣는 기능, 냄새 맡는 기능 등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서 생명물질(jīvita-rūpa)과 자양분이 있어야만 우리는 지속적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은 다섯 감각장소의 물질(āyatana-rūpa)이 어떻게 정신-물질에서 비롯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생각, 조사, 의도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여섯째 감각장소인 마노의 감각장소[意處]는 탐욕, 믿음과 같은 선하거나 불선한 마음상태와 감각접촉(觸 phassa)과 같은 마음부수들과 그 물질적 토대에 의존합니다. 그것은 감각접촉과 심장토대에도 의존합니다. 마노의 감각장소[意處]는 그 뿌리인 바왕가에서 일어나고, 이 바왕가는  의문 인식과정의 기반이 됩니다.





32. 요약



 다시 요약합니다. 본다는 것은 눈의 감각기관[眼根]과 식(識)이 결부되어 나타납니다. 눈[眼]은 식과 생명기능과 자양분과 물질적 토대에 의존합니다. 눈의 감각기관[眼根]은 조사, 주의 기울임, 감각접촉[觸]의 세 가지 마음부수에 의존합니다. 요컨대, 눈[眼]은 안식(眼識)과 마찬가지로 정신-물질[名色]에 의존하며, 다른 다섯 감각장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물질[名色]을 토대로 한 여섯 감각장소[六入]의 원인을 모두 아는 지혜는 오직 보살들만 가능합니다. 부처님의 상수제자였던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존자조차도 예류자가 되기 전까지는 그것을 포괄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나중에 사리풋따 장로가 된 우빠띳사(Upatissa) 사문은 앗사지(Assaji)장로가 읊은 게송을 듣고 성자의 첫째 단계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원인을 가르치셨고, 원인이 소멸하면 그 결과도 소멸함을 가르치셨다.”118(Vin.i.40) 우빠띳사와 꼴리따(Kolita)는 이 게송을 듣고 예류과를 얻었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짧은 시간에 연기법을 깊이 있게 고찰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지적 능력에 따라 부처님의 연기법에 대한 가르침을 깊이 이해할 수는 있겠지만 그 모든 것을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주석서는 이 게송을 사성제의 측면에서 설명합니다. “모든 법은 다른 법의 결과이다.”라는 말은 갈애에 그 원인을 두고 있는 괴로움의 진리[苦諦]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게송에서 원인은 괴로움의 원인으로서의 갈애를 뜻합니다. 그래서 게송은 괴로움과 그 원인에 대한 진리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영혼은 불멸하여 죽으면 다른 몸으로 이동한다든지, 육체가 무너진 다음에 영혼은 완전히 단멸한다든지, 영혼은 신이 창조했다든지, 영혼의 무한성과 같은 자아(atta)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었습니다. 그 게송은 원인과 결과만을 인정하고 영혼의 불멸이나 단멸을 부정했으며, 이 가르침으로 두 사문은 삶의 본성을 꿰뚫는 특별한 통찰지가 생겼던 것입니다.

 

「청정도론」의 대복주석서인「마하띠까(Mahā-ṭikā)」는 이 게송을 연기법에 대한 가르침과 동일하게 취급하면서 다음과 같은『상응부』의 한 경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원인이 일어나면 저 결과가 일어난다. 이 원인이 멈추면 저 결과도 멈춘다. 그러므로 무명을 원인으로 상카라가 일어나고 괴로움이 있게 된다. 무명의 소멸과 함께 괴로움이 소멸할 때까지 상카라 등의 소멸이 뒤따른다.”「마하띠까」에 따르면 괴로움의 순관(順觀)과 역관(逆觀)의 두 가지 측면에서 연기법의 요지가 앞의 게송에 함축되어 있다고 합니다.


대승불교의 경서는 이 게송은 연기법을 요약한 경이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또 그 게송에 대한 글들을 탑묘119에 안치하면 유익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많은 글이 아주 오래된 탑묘 안에서 발견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주석서와「마하띠까」의 견해는 모두 타당해보입니다. 왜냐하면 고제와 집제는 괴로움과 그것이 일어나는 측면에서 연기를 뜻하는 반면에 멸제와 도제는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측면에서 연기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인과관계의 사슬에서 원인과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전생에서의 무명은 행위와 말과 생각이 원인이 되고, 이 상카라가 식을 생기게 합니다. 그러면 현생에서 식(識), 정신-물질[名色], 여섯 감각장소[六入], 감각접촉[觸], 느낌[受]의 다섯 가지 결과가 생깁니다.


 인과의 사슬에서 원인과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전생에서의 무명(無明)으로 인해 행위와 말과 생각이 나타나고 이러한 상카라[行]로 인해 식(識)이 생깁니다.


그러고 나면 현생에서 식(識), 정신-물질[名色], 여섯 감각장소[六入], 감각접촉[觸], 느낌[受]이라는 다섯 가지 결과가 있습니다. 이 결과들이 이번에는 내생의 원인이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갈애와 집착과 태어남[再生]이라는 씨를 내생에 뿌립니다. 그 결과로 늙음, 죽음, 슬픔, 괴로움의 싹이 내생에 트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아난다 존자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서 연기법이 얼마나 심오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난다 존자는 연기법을 순서대로 관하고 또 역으로도 관했습니다. 존자에게는 연기법이 너무나도 명확했으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께 가서 말씀드렸습니다.“세존이시여, 이 연기법은 아주 심오합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이해하기 아주 쉽게 느껴집니다.”부처님께서는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아난다야,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주석서에 따르면 부처님의 이 말씀은 아난다 존자에 대한 칭찬이기도 하고 꾸지람이기도 합니다. 부처님 말씀의 참뜻은 이런 것입니다.“아난다야, 너는 지혜가 출중하기 때문에 연기법을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남들도 너처럼 쉽게 이해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난다 존자가 연기법을 쉽게 이해한 것은 (1) 전생에 쌓아온 바라밀, (2) 스승들의 지도, (3) 폭넓은 지혜, (4) 예류과의 증득이라는 네 가지 요소에 기인합니다.


 까마득히 먼 옛날 아난다는 빠두뭇따라 부처님(Padumuttara Buddha)120의 동생인 수마나(Sumana) 왕자였습니다. 지방 영주였던 왕자는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했습니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왕자에게 원하는 바를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왕자는 안거 석 달 동안 부처님을 시봉하기를 허락해 달라고 했습니다. 왕은 이 소원을 들어줄 생각이 없어서 부처님의 마음은 참으로 알기 어렵다고 하면서 세존께서 왕자의 거처로 가는 걸 내켜하지 않으신다면 자신도 어쩔 수 없다고 했습니다.


 비구들의 조언에 따라 왕자는 수마나 장로에게 부처님과의 면담을 주선해줄 것을 청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부처님을 뵌 왕자는 세존에게 수마나 장로가 어떻게 다른 비구들의 능력을 넘어선 일을 할 수 있었는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선업을 지어야 그렇게 세존과 긴밀한 관계가 될 수 있는지를 여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보시와 지계를 실천함으로써 수마나처럼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왕자는 선업을 지어서 미래 부처님의 거룩한 승가에서 수마나 장로와 같은 특권을 가진 비구가 되고자 했기 때문에 부처님께 자신의 도시로 오셔서 안거를 지내시도록 청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곳을 방문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이로울 것이라는 것을 내다보시고 “수마나여, 여래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초청을 넌지시 수락하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자 왕자는 부처님이 오실 길을 따라서 부처님과 승가가 밤에 편히 쉴 수 있도록 있도록 100개 이상의 승원을 지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왕자는 동산을 하나 사서 부처님과 많은 비구들을 위한 숙소와 웅장한 승원을 지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준비되자 부왕에게 보고한 다음에 부처님께 자신의 도시로 오시도록 초청했습니다. 왕자와 백성들은 부처님과 제자들을 꽃과 향으로 환영하면서 승원으로 모셨습니다. 거기서 왕자는 승원과 동산을 부처님께 정식으로 보시했습니다.


 이러한 보시의식을 마친 왕자는 비빈들과 대신들을 불러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연민으로 여기에 오셨소. 부처님께서는 물질적인 이익에는 관심이 없으시고 법을 닦는 데에만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수행으로 부처님을 공경하면 부처님은 기뻐하실 것이오. 나는 10계를 지키면서 부처님 계신 곳에 머물 것이오. 여러분은 오늘 내가 한 것처럼 우안거동안 모든 아라한에게 공양을 올리고 돌봐드리기 바라오."





33. 수행을 강조하시는 부처님



 부처님께서 수행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시는지 보여주는 이야기를 하나 해드리겠습니다.『중부』주석서(MA.i.347f)에 따르면 어느 날 부처님께서는 여행을 떠나시려고 비구들과 함께 기원정사(祇園精舍)121를 출발하였습니다.


꼬살라 왕과 아나따삔디까 장자와 다른 재가신자들이 여행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청을 드렸습니다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나타삔디까 장자122는 부처님의 법문을 듣지 못하고 세존과 비구들에게 공양을 올리지도 못하게 되므로 즐겁지 않았습니다.


그 때 뿐나(Puṇṇā)라는 장자의 여자 노예가 부처님께서 돌아오시도록 말씀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장자는 그녀가 부처님을 승원으로 되돌아오시도록 한다면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자 뿐나는 금방 부처님께 달려가서 돌아오시라고 간청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여래를 위해서 무엇을 하겠냐고 물으셨습니다. 뿐나는 드릴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세존께서 안거를 사왓티(Sāvatthi)123서 보내신다면 부처님과 법과 승가에 귀의하고 5계를 지키겠다고 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사두124!”라는 말씀으로 축복해주시고 기원정사로 돌아오셨습니다.


 이러한 소식이 널리 퍼지자, 장자는 뿐나를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고 양녀로 삼았습니다. 뿐나는 이제 바라는 바를 마음대로 행하고 자신의 앞날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고 전생의 바라밀에 힘입어 뿐나는 거룩한 승가에 들어갔습니다. 뿐나는 위빠사나 수행을 하여 통찰지를 계발하여서 정신-물질의 무상함을 보게 되자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경책하셨습니다.“ 내 딸아, 15일이 되면 달이 둥근 보름달이 되듯이 끝까지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한다. 위빠나사의 지혜가 완전히 성숙하면 괴로움의 소멸을 이룰 것이다.”


부처남의 이러한 경책을 들은 뿐나 장로니는 성스러운 도의 마지막 단계를 얻어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물론 뿐나의 앞날을 내다보셨으며 뿐나의 간청에 따라 예정된 여행을 취소하고 돌아오신 것은 뿐나의 정신적인 행복에 대한 부처님의 배려였습니다. 이는 고따마 부처님이 법의 수행을 중요하게 여기는 예로서, 이것은 다른 부처님들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왕자는 10계를 지키며 부처님이 계신 곳에 머물면서 뛰어난 시자인 수마나 장로 곁에 머물면서 극진히 부처님을 시중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안거가 끝나기 바로 직전 집으로 돌아와 부처님과 승가에 푸짐한 보시를 올리고는 부처님 앞에서 미래 부처님의 시자가 되겠다는 서원을 세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왕자를 축복해주었으며, 왕자는 이후 수없는 생에 걸쳐 바라밀을 닦았습니다.「본생경」에는 아난다가 고따마 부처님의 전신인 보살과 함께 많은 생에 걸쳐 바라밀을 쌓는 내용이 나옵니다. 때로는 보살이 왕이고 아난다는 대신이었으며, 때로는 보살은 인간이고 아난다가 천신이나 제석125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지위는 가끔 뒤바뀌기도 하고 어떤 생에서는 형제이기도 했습니다.


 둘은 그렇게 기나긴 윤회의 여정을 함께 거치며 바라밀을 닦았고 마지막 생에서 아난다는 숫도다나 왕126 조카가 되었습니다. 첫째 안거를 베나레스(Benares)  근처에서 보낸 다음 부처님께서는 라자가하(Rājagaha)로 갔고, 거기서 부왕의 초청을 받아 까삘라왓투(Kapilavatthu)로 향했습니다. 부처님께서 고향을 떠날 때 아난다와 몇 명의 석가족 왕자들은 부처님을 따라 승가에 들어갔습니다.

 

 수많은 생에 걸쳐 쌓아온 바라밀로 인해 아난다는 많은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연기법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아난다는 스승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아난다는 스승들과 같이 살았을 뿐 아니라 교리에 대해서 배우고, 질문하고, 기억했습니다.


이런 식의 공부로 아난다는 연기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아난다는 저명한 설법가인 뿐나(Puṇṇā) 장로의 설법을 들은 다음에 예류과를 성취했습니다. 아난다 존자는 뿐나 장로의 감로(甘露) 같은 법문에 깊은 찬사를 보냈습니다. 그 법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자만(māna)은 몸, 느낌, 기억, 업형성력(saṅkhāra), 식에 대한 집착에서 생깁니다. 거울이 없이는 거울에 비친 사람의 얼굴이 생기지 않는 것처럼 오온(五蘊)127 없이 자만은 생기지 않습니다. 몸, 느낌 등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영원하지 않으므로 오온 가운데 그 어느 것도 과거나 현재나 미래의 것이거나 내적이거나 외적이거나 거칠거나 미세하거나 좋거나 나쁘거나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거나 간에 ‘나의 것’이거나 ‘나’라거나 ‘자아’가 아니라고 관찰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게 관찰하고 진리를 깨달은 잘 배운 부처님의 제자는 오온에 대한 환상을 깹니다. 그리고 집착을 버리고 해탈을 합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 해탈했음을 알고 해야 할 일을 다 했음을 알며, 해탈을 위해서 달리 해야 할 일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이 뿐나가 아난다에게 설한 것입니다. 예류자로서 아난다는 연기법의 원인과 결과를 깨달았습니다. 아난다는 위빠사나 수행을 하여 이러한 지혜를 얻었습니다. 뿐나는 무명, 갈애, 집착, 업, 재생, 식 등이 인과관계라는 사슬의 연결고리를 이루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여기서 전도된 인식 또는 무명이 아위자(avijiā), 갈애는 딴하(taṇhā), 집착은 우빠다나(upādāna), 노력은 깜마(kamma)입니다. 그래서 업이 재생에 이른다고 했을 때 우리는 재생이 또한 집착 등에 의해 조건 지어짐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무명, 갈애, 집착, 업이 원인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신과 물질을 관찰하여 이를 깨달은 수행자는 단지 배우고 사유하기만 해서는 결코 제거할 수 없는 모든 의심들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부처님의 제자들 중 다문(多聞)제일인 아난다 존자는 지식에 있어서도 스승에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아난다는 대개 부처님의 전법여행에 동행했고 모든 법문을 기억했습니다. 또 일단 한번 들은 법문은 그대로 되풀이 할 수 있었습니다. 아난다가 없을 때 부처님이 하신 법문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워서 기억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난다가 배운 법은 8만 4천개에 이른다고 합니다128.


 아난다 존자는 뛰어난 기억력으로 유명했는데 『중부』「유명대경(有明大經 Mahāvedalla sutta)」(M.i.292) 주석서에 따르면 아난다는 짧은 시간에 수백 개의 게송을 외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불법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을 가진 부처님의 주요한 제자였던 아난다에게 연기법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삼장에 정통한 사람은 연기법의 인과관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34. 난해한 연기법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기법은 결과, 원인, 가르침과 경험적인 지혜인 꿰뚫음(paṭiveda)129의 측면에서 볼 때 난해합니다.


먼저, 무명과 다른 원인의 결과로서의 상카라를 이해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과 물질에서 생기는 괴로움을 행복이라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위자(avijja)로, 사람들은 이를 전도된 무명으로 알지 못합니다. 


생각하는 것은 실재하는 자아라고 믿고 업형성력인 상카라(sakhāra)가 무명의 결과라는 것을 모르며, 노력하는 것은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무명의 결과로서의 선업과 불선업을 알기 어렵습니다.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전생의 상카라와 현생의 재생연결식사이의 인과관계입니다. 마찬가지로 정신-물질[名色]과 여섯 감각장소[六入] 등이 식(識)에 의해서 조건 지어진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파악하기 어려운 것은 연기에 포함되어 있는 원인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이나 범천이 자신을 창조했다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은 우연히 발생한다고 주장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존재의 주요원인으로서의 무명을 알지 못합니다.


 또한 연기에 대한 부처님의 어떤 가르침은 무명(無明)에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납니다. 다른 가르침은 역순으로 전개됩니다. 또 어떤 가르침은 12연기 사슬의 중간고리에서 시작해서 처음이나 끝으로 전개됩니다. 연기법의 이러한 다양한 설명은 그것을 더욱 더 이해하기 어렵게 합니다.


 연기법에 대한 통찰지를 얻으려면 실제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인과관계의 사실을 체험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이렇게 연기를 위빠사나로 접근하여 공부하는 것은 반드시 올곧아야 할 수 있으니  방법상 결코 쉬운 것이 아니며 꾸준하고 철저하게 수행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난다 존자에게는 남다른 특성이 있기 때문에 연기법이 명확해보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난다야, 그렇게 말하지 말거라.”라고 하신 부처님의 말씀은 암묵적인 칭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석서에 따르면 부처님의 말씀은 간접적인 나무람 일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실제로는 이런 뜻일 것입니다.“아난다야, 너는 연기법이 이해하기 쉽다고 했다. 그런데 너는 왜 내게서 가르침을 받고 나서야 예류자가 되었느냐?  왜 아직 도의 첫 단계보다 더 높은 어떠한 단계도 얻지 못했느냐? 너는 자신의 단점을 생각해야 한다.


너는 보통의 제한적인 지혜를 지닌 내 제자이고, 네가 말하는 것은 나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런 말은 너와 같은 시자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연기법을 알기 위해 수없는 겁 동안 지혜를 계발해야 했기 때문에, 너는 이 연기법을 가볍게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몇 마디로 아난다를 암묵적으로 꾸짖으신 부처님께서는 연기법의 심오함을 이렇게 강조하셨습니다.“아난다야, 이 연기법은 참으로 심오하다. 이 법칙을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실에 꿰어진 구슬처럼 얽히게 되고 베짜는 사람의 실타래처럼 헝클어지고 문자 풀처럼 엉키어서 악처, 지옥,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


다른 말로 하면, 식(識), 정신-물질[名色] 등이 무명과 상카라[行]를 조건으로 일어난다는 이 법칙은 대단히 심오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직 원인과 결과의 관계만 있을 뿐이며 영원한 존재는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수태의 순간부터 생명이 영원한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과 이 존재 뒤에 성장하는 어떤 영원한 실체가 있다고 믿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존재의 핵심인 영혼이 수많은 전생을 계속 살아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모든 전도된 인식은 연기법의 근저에 있는 실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중생의 행위와 말과 생각은 명백히 사성제(四聖諦)와 연기를 모르는 무명에서 비롯합니다. 선한 행위는 선한 결과를 가져오고 불선한 행위는 불선한 과보를 가져오며, 모든 중생은 자신의 행위에 상응하는 과보를 받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무명은 업(kamma)이나 상카라(sakhāra)에 이르고 그 결과 태어남[再生]과 식 등이 생깁니다. 지혜로운 사람에게 이 사실은 명백합니다.


 중생들은 연기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끊임없이 방황하면서 윤회에서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중생들은 대부분 악처에 떨어지며 선업의 힘으로 가끔씩 천신계에 태어납니다. 그리고 선업의 공덕이 다하면 다시 악처로 되돌아갑니다.


 악처 중생들이 인간계나 천신계에 태어나는 것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임종의 순간에 선행에 대한 기억이나 표상이 떠오를 때에만 선처에서 태어나는 것이 가능한데 악처 중생으로 있으면 선행 자체를 떠올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축생계에서는 서로 죽고 죽이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기 때문에 사랑, 연민이나 기타 영적인 가치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대개 고통과 두려움에 휩싸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악처 중생들은 악처에서 다시 태어날 확률이 높습니다.


 연기를 알지 못하는 무명 때문에 중생은 윤회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그는 마치 절구에 묶여 있는 소와 같습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돌고 또 돌아도 소는 움직일 수 있는 범위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사람은 대개는 악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윤회 속에 허우적거리며 수많은 겁(劫)동안 재생을 되풀이합니다. 

 

 연기를 이해하는 것은 사성제를 이해하는 것과 함께 영적인 해탈에 필수불가결한 것입니다. 사실 사성제는 연기와 동의어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목적은 이 가르침에 대한 통찰지를 지혜와 체험으로 얻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가르침은 심오하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심지어는 위빠사나 수행에서도 무명과 상카라 등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갖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위없는 깨달음을 얻기 전과 얻고 난 뒤에 연기를 숙고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7일 동안 해탈의 즐거움(vimutti-sukha)을 누리고 계시다가 일곱째 날 밤에 인과관계, 즉 조건(paccaya)의 관점에서 연기를 관찰하셨습니다.

    

 인과관계의 사슬에서 첫째 사슬에 대해서 설명했으니 지금부터는 여섯 감각장소[六入]을 조건으로 일어나는 감각접촉[觸]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여섯 감각장소[六入]란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마노[意]의 여섯 감각기관과 형상[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감촉[觸], 마노의 대상[法]의 여섯 감각대상[六境]을 뜻합니다. 감각기관과 그에 해당하는 감각대상 사이의 접촉을 감각접촉(觸 phassa)이라고 합니다.


감각접촉[觸]은 감지하기 어려운 정신적 생명의 현상이지만 대상이 마음에 확실한 충격을 주었을 때에는 그것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학대받고 있는 것을 보면 충격을 받습니다.


나무 위에 어떤 사람이 목매어 죽은 것을 보면 부들부들 떱니다. 유령을 보면 등골이 오싹해질 것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거나 읽으면 강력한 인상이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마음에 감각대상과의 맞부딪침인 감각접촉[觸]이 있을 때 벌어지는 현상을 뜻합니다.

 

 감각접촉[觸]은 때때로 매우 폭발적이며 폭발적 감정과 욕정, 분노 등을 표출하게 합니다.『증지부경』주석서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대 스리랑카의 둣타가마니(Duṭṭhagāmaṇi) 왕 때 한 젊은 비구가 소녀를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소녀도 비구를 쳐다보았고, 그 둘은 불타는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급기야 죽게 되었습니다. 또 어떤 장로 비구도 마하나가(Mahā-nagā) 왕의 왕비를 알아차림 없이 쳐다보았다가 미친 일도 있습니다.

    

「무둘락카나 본생경(Mudulakkhaṇa jātaka)」(J.66)에 따르면 보살은 선인(仙人)이었는데 공양을 받기 위해 왕궁으로 갔습니다. 선인은 신통이 있었기 때문에 날아서 갔는데 선인이 갑자기 나타나자 왕비가 급하게 일어나는 바람에 걸치고 있던 옷이 흘러내렸습니다. 왕비의 매혹적인 몸매는 곧바로 오랫동안 잠재하고 있던 선인의 성욕을 솟구치게 했습니다. 선인은 음식을 전혀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통도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걸어서 거처로 돌아간 선인은 욕정과 애욕의 불꽃으로 괴로워하며 누워 있었습니다.

    

 사건의 전모를 들은 왕은 언젠가는 이전의 높은 본성을 되찾을 성자의 능력을 확신했기 때문에 선인에게 왕비를 바쳤습니다. 그리고는 왕비에게 선인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은밀히 지시했습니다.

 

 선인은 왕비를 데리고 왕궁을 떠났습니다. 일단 왕궁 문을 나오자 왕비는 선인에게 되돌아가서 왕에게 집을 요구하라고 하였습니다. 낡은 집을 받았지만 똥과 오물을 치우기 위한 광주리 및 손도끼를 가지고 와야 했습니다. 선인은 몇 번이고 필요한 다른 물건들을 요구하러 왕에게 가야 했습니다. 왕비의 요구대로 여기저기 다니면서 집안의 허드렛일을 하느라고 기진맥진 했지만, 선인은 아직도 욕정과 애욕에 사로잡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시킨 일을 모두 다 한 다음에 선인은 좀 쉬려고 왕비 곁에 앉았습니다. 그러자 왕비는 선인의 수염을 확 잡아당기면서 말했습니다. “당신은 애욕과 욕망을 없애는 것이 목적인 사문(沙門)이라는 사실을 모르시나요? 왜 그렇게 정신을 못 차리세요?” 이 말에 정신이 번쩍 든 선인은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명을 알아차렸습니다. 왕비를 왕에게 돌려준 다음 히말라야의 숲으로 가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여 신통도 회복하고 죽어서 범천계에 이르렀습니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보살과 같이 정신적으로 뛰어난 존재도 번뇌의 불길을 피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선인은 전에도 왕비를 우연히 보았겠지만 감정을 뒤 집어놓을 정도로 감각접촉[觸]이 강력하지는 않았습니다. 선인이 며칠 동안 욕정과 애욕의 불길에 휩싸이는 고통을 받은 것은 바로 왕비의 육체적인 형상에 대한 분명하고 생생한 감각접촉[觸] 때문이었습니다.  

 

「움마단띠 본생경(Ummādantī jātaka)」(J.527)에서 시위(Sivi)왕은 사령관의 아내인 움마딘띠(Ummādantī)를 본 다음에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움마단띠는 미모로 이름을 날렸기 때문에 왕은 바라문 고문관을 보내어 그녀가 왕비의 자질이 있는지를 알아보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움마단띠를 보자마자 미모에 매혹되어 자제를 못하고 그들을 위해 베푼 잔치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바라문들의 문란한 행동에 넌더리를 낸 움마단띠는 그들을 집밖으로 내쫒았습니다. 심술이 난 바라문들은 왕비의 자질이 없다고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왕은 움마단띠에 대한 관심이 없어졌고 그녀는 사령관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움마단띠는 자신에 대한 왕의 생각을 바꾸어 놓겠다고 결심하고 왕이 축제 기간 동안 성내를 시찰할 때 자신의 미모와 매력을 최대한 보여줬습니다.


왕은 움마단띠에게 반해서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잠을 이룰 수 없게 된 왕은 움마단띠에 대해 미친 사람처럼 헛소리를 해대면서 제석이 은혜를 베풀어서 움마단띠와 하루나 이틀 밤을 같이 잘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다는 게송으로 자신의 맹목적인 열정을 발산했습니다.


감각대상과의 맞부딪침은 대상이 전달하는 감각접촉[觸]의 본성에 대부분 좌우됩니다. 감각접촉[觸]이 불분명하고 흐릿하면 부드러운 느낌과 갈애를 만들어 낼 뿐이지만 분명하고 생생한 감각접촉[觸]의 뒤에는 더 많은 느낌과 갈애 등이 따라옵니다.


 감각접촉[觸]으로 인해 감정이 폭발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적대적인 대상을 보면 분노하고 무서운 대상을 보면 두려워합니다. 불쾌한 말은 우리를 짜증나게 합니다. 자아를 북돋는 것을 생각하면 자만심이 생깁니다.


영혼이 있다는 생각이나 업과 그 과보를 비웃는 가르침을 들으면 그릇된 견해를 갖습니다. 부러운 대상은 부러워하게 만들고, 자기만 갖고 싶은 대상은 우리를 인색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불선업을 조장하는 감각접촉[觸]의 예입니다.  

 

 선업도 감각접촉[觸]에서 생깁니다. 예를 들면 신앙의 대상은 믿음을 생기게 하고 용서해야 하거나 인내해야 할 사람들은 우리의 인욕을 길러주고 부처님과 아라한을 계속해서 생각하면 알아차림이 강해지고 자비로워집니다.


그래서「무애해도」에는 “감각접촉[觸]을 조건으로 50가지 마음부수들이 생긴다.”라고 설명합니다.「무애해도」는 느낌[受], 인식[想], 업형성력인 상카라의 원인을 이 감각접촉[觸]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감각접촉[觸]이 있기 때문에 볼 수 있으며 이 감각접촉[觸]은 눈[眼]과 형상[色]과 안식(眼識)이 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안식(眼識)과 형상[色]을 구분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안식(眼識)과 형상[色]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지만 부처님은 안식(眼識)은 눈[眼]과 형상[色]에서 일어나며 감각접촉[觸]은 눈[眼]과 형상[色]과 안식(眼識)의 결합을 뜻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결합이 바로 봄의 감각접촉[眼觸]으로, 눈[眼], 형상[色], 안식(眼識)의 세 가지가 맞부딪침으로써 필요충분조건을 이룹니다. 사념처 수행자는 감각접촉[觸]의 본성을 체험으로 깨닫습니다. 수행자는 보는 매 순간마다 “봄, 봄”하고 주시하고 그로써 집중이 계발되면 봄이란 원인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 또는 누군가가 만들어졌거나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다시 말하면 봄은 눈[眼]과 형상[色]을 원인으로 하고 안식(眼識)을 그 결과로 하는 정신과 물질의 현상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감각접촉[觸]은 감각대상의 본성에 따라서 즐겁거나 괴롭거나 무덤덤한 느낌을 생기게 합니다. 대상이 아름다우면 즐거운 느낌이, 못생겼으면 괴로운 느낌이, 못생기지도 사랑스럽지도 않으면 무덤덤한 느낌(upekkhā-vedanā)이 됩니다.


이 무덤덤한 느낌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생각이 들지 않고 심지어는 느낌으로 인지되지도 않지만 자아에게는 수용됩니다. 사실상 이 세 가지 느낌들은 자아나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감각접촉[觸]에서 생기는 정신적 과정의 측면입니다.


 연기법을 이해한다는 것은 회의주의와 전도된 인식에서 벗어남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벗어남은 예류과를 얻은 수행자에게 꼭 필요한 특성이고 연기법을 이해하는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연기법에 대한 무명은 부처님, 법, 승가에 대한 의심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의심에는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가 있습니다.


(1) 부처님에 대한 의심입니다. 이것은“부처님은 실제로 모든 번뇌에서 벗어난 분이었을까? 아니면 제자들에게 맹목적으로 믿도록 한 보통사람이 아니었을까?”와 같은 의문을 회의주의자로 하여금 제기하게 합니다. 


(2) 가르침에 대한 의심입니다.“도와 열반은 진정으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소멸을 보장하는 것일까?”

 

(3) 승가에 대한 의심입니다.“진정으로 번뇌에서 벗어난 성자(ariya)들은 있는 것일까? 전도된 인식과 의심을 극복한 예류자는 절대 악처에 태어나지 않는 것일까? 감각적 욕망과 성냄이 희미해진 일래자가 있는 것일까? 감각적 욕망과 성냄에서 완전히 벗어난 불환자가 있는 것일까? 모든 번뇌에서 벗어난 아라한은 있는 것일까?”


(4) 수행에 대한 의심입니다. “계를 지키고 관찰하는 수행은 더 높은 영적인 진보에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 것 일까?”


(5) 과거에 대한 의심입니다. “나는 과거에 존재했을까?  나는 과거에 왜 그리고 어떻게 존재했을까? 나는 전생에 어떠한 사람이었을까? 나는 덩어리에서 생겨났을까 아니면 자연발생으로 생겨났을까?”


(6) 미래에 대한 의심입니다. "나는 죽고 나서 존재할 것인가? 내생에 나는 어떠한 사람이 될 것인가?"

 

(7) 과거와 미래 모두에 대한 의심입니다. 복주석서에 따르면 이 의심은 삶의 수레바퀴의 과거와 미래 가운데서 현재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이 해석은 다음과 같은 빨리 성전의 말씀과 일치합니다. “이 현생에서 자아에 대한 의심이 생긴다.”그러한 의심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나는 진정 나 자신인가? 자아는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만약 자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자아인가? 그것은 큰가, 작은가? 왜, 어떻게 자아가 존재하는가? 그것은 창조되었는가? 자연발생으로 생겨났는가? 자아는 어디서 왔으며 마지막에 몸이 무너지고 난 다음에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은 과거에 대한 다섯 가지 의심, 미래에 대한 다섯 가지 의심, 현재에 대한 여섯 가지 의심을 나타냅니다. 수행자가 자아나 나에 대한 모든 전도된 인식에서 벗어나게 될 때 이러한 모든 의심들을 극복하게 됩니다. 이것을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度疑淸淨 kaṅkhāvitaraṇa-visuddhi)이라고 합니다.

 

(8) 많은 의심이 일어나는 마지막 주제는 중생계의 인과관계의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연기법입니다. 상카라[行]는 정말 참된 법에 대한 무명(無明)에서 비롯되는 걸까? 재생은 정말로 업을 조건으로 일어나는 것일까? 정말 내생에 악업은 해롭고 선업은 유익한 것일까? 모든 현상에 정말 원인이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은 원자와 전자가 우연히 결합된 결과가 아닐까? 이러한 의심들은 연기법에서 설명하고 있는 인과관계의 사슬에서 원인 고리인 무명(無明), 상카라[行]와 그 결과 고리인 식(識)과 재생을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이러한 의심은 결국 그릇된 견해를 생기게 합니다. 연기와 모순되는 그릇된 견해는 이러한 의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자신의 지적수준을 넘어 삶의 본성에 대해 추론하면 처음에는 의심이 생기지만 나중에는 전도된 인식에 집착하는 회의주의자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한 회의주의와 그릇된 견해는 연기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연기법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전도된 인식은 말할 것도 없고 의심도 갖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분석하면 지구, 태양, 나무 등의 무정물(無情物)이 그렇듯이 중생도 원인과 결과의 복합체입니다. 우주를 지배하는 인과법은 창조나 우연발생의 여지를 두지 않습니다.


현대 과학은 생명 없는 물질계가 원인과 결과의 상호작용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압도적인 증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생명이거나 마음이거나 물질이거나 간에, 이 세상 모든 것은 조건 지어져 있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진리를 확인 시켜줍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람의 내적인 삶의 조건 지어진 본성을 강조하셨습니다. 물질계는 윤회가 없고 재생과 괴로움을 받지 않기 때문에 불교에서 외적인 무정물(無情物)의 세계는 관심사가 아닙니다.


불교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중생입니다. 중생을 이루고 있는 정신· 물질은 수없이 많은 생을 거치면서 대부분 악처에서 괴로움을 겪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신· 물질의 과정을 이해하고 지혜롭게 행동한다면 해탈에 이르는 도에 점점 전진해 나갈 것입니다. 설령 아직 해탈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윤회에서 더 좋은 삶과 행복한 운을 얻을 수 있습니다. 12연기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번뇌를 완전히 소멸시키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는 상카라[行]의 원인으로써 무명과 재생의 원인으로써 업의 결과를 설명했습니다. 이제 재생연결식의 근원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증지부』의「존재경(Bhava-sutta)」(A3:76)에서 의도를 가진 선업과 불선업을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들판에, 식(識)을 씨앗에, 갈애를 들판을 촉촉하게 하는 수분에 비유하셨습니다.130


나무를 심으려면 들판과 묘목이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재생연결식은 업이라는 기름진 들판을 전제조건으로 합니다. 업은 재생의 잠재력을 생기게 하고 앞선 식의 상태는 사라졌지만 재생의 잠재력은 정신과 밀접하게 남아 있습니다.


마치 초목이 아직 싹이 트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조건이 갖추어지면 실제로 싹이 트는 것과 같고, 죄를 저지른 사람이 잠재적인 죄수와 같으며, 국영공장에서 두각을 나타낸 근로자가 그 공로를 치하하여 정부에서 주는 상의 잠재적인 수상자인 것과 같습니다.


 초목이 발아하려면 씨앗에 의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재생은 선하거나 불선한 식에 의존합니다. 선한 식이나 불선한 식이 일어나고 소멸하지만 유사한 상태의 식이 끊어지지 않고 흐르도록 자극을 줍니다.


 이런 작용은 뱀이 허물을 벗는 것처럼 앞선 업식의 결과입니다. 그러한 식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업(kamma)이나 업의 표상(kamma-nimitta)이나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에 중심을 둔 임종할 때의 죽음의 마음(cuti-citta)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이 만나는 이러한 표상을 업형성력(saṅkhāra-kamma)을 조건으로 한 내생의 전조를 의미하는 나타남의 구족(upaṭṭhāna-samagitā)이라고 합니다. 죽음의 마음이 재생연결식으로 전이됨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씨앗이 싹터 초목으로 성장하는 것과 어느 정도 유사합니다.


 씨앗이 초목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합니다. 물 또는 적어도 공기 중의 습기가 없으면 씨앗은 싹이 트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업이 내생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하더라도 갈애가 없으면 재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라한의 경우는 범부들처럼 짓는 업이 있고 식이 있다는 점에서 재생의 조건이 있지만 갈애가 소멸했기 때문에 재생연결식이 생길수가 없습니다.


 갈애는 아라한이 아닌 사람에게 내재해 있으며 범부에게 가장 강력합니다. 갈애는 감각대상을 즐겁고 매력적이고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게 합니다. 갈애는 즐거움, 행복, 희망이라는 전도된 인식을 일으킵니다. 갈애는 좋은 것을 기뻐하고 행복과 번영을 인생의 주목적으로 삼게 합니다.


갈애는 다른 마음 상태에 이르는 업의 마음을 자극합니다. 임종이 다가올 때  이 마음상태가 표상을 일으킵니다. 죽어가는 사람은 즐거운 표상을 보고 기뻐하며 활기가 차고 유쾌해집니다.


이것은 업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괴로운 표상들을 환영하진 않겠지만 이 표상들도 자신과 어떤 관계가 있으며 이러한 자신에 대한 집착도 업의 씨앗을 싹트게 합니다.

 

 그러므로 보통 사람인 경우에 재생은 업, 업식과 연결되어 있는 마음과 식(citta-vinñāṇa), 갈애를 조건으로 일어납니다. 재생의 기름진 토양인 업은 임종의 표상에서 부각되고, 이러한 표상들과 죽어가는 사람이 보이는 관심으로 씨앗이 싹트는 것이 보입니다. 그래서 죽은 다음에 전생의 마지막 순간의 마음상태를 조건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납니다.


재생연결식은 전 생애와 관계된 정신-물질[名色], 여섯 감각장소[六入], 감각접촉[觸], 느낌[受]과 그들 간의 상호관계를 작동하게 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재생연결식을 현생의 씨앗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재생연결식은 정신· 물질[名色]과 피할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몸 안에 있거나 바깥에 있거나 간에 모든 정신· 물질[名色]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괴로움입니다. 하지만 무명으로 인해 우리는 괴로움을 보지 못하고 전도된 인식과 집착을 일으키며 감각적 대상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이로써 새로운 존재로 태어납니다.


 새로운 존재의 토대인 재생연결식과 함께 그 재생연결식의 토대인 물질적인 몸과 감각접촉[觸], 느낌[受]과 같은 마음부수들이 생겨납니다. 재생연결식이 사라지면  탐욕, 분노, 만족, 인욕 등과 같은 선업이나 불선업을 촉발시키는 다른 마음 부수들이 뒤이어 일어납니다. 이 마음부수들이 이번에는 앉음, 일어섬 등의 육체적 동작들에 이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상응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이 세상을 이끄는 것은 마음(citta)131이다. 세상은 마음에 의해 끌려간다. 바로 마음이 그 모든 것 위에 있어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한다.”여기서 세상(loka)132은 중생계를 가리킵니다. 마음은 중생을 바르거나 나쁘게 인도합니다.


믿음과 계행 등을 닦는 선한 사람의 마음은 선행을 하도록 이끌 것이고 법문을 듣고 위빠사나 수행을 하게 할 것입니다. 마음은 그를 높은 중생계에 태어나게 하든지 열반이라는 목표로 인도할 것입니다. 반면에 못된 사람의 마음은 감각대상을 추구하고 악행을 하게 할 것이고 죽은 다음에 악도에 태어나서 더 큰 괴로움을 받도록 할 것입니다.


이 게송은 마음이 모든 정신-물질을 지배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식을 조건으로 감각접촉[觸]등의 정신-물질 현상이 일어난다는 연기의 가르침과 일치합니다. 눈에서 일어나는 감각접촉[眼觸]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했으니, 이제 듣는 감각접촉[耳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보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듣는 것도 귀[耳], 소리[聲], 안식(眼識)의 세 가지를 포함합니다.


귀[耳]와 소리[聲] 없이 듣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과학자들은 음파의 속도가 초당 340M 라고 합니다. 이는 자연적인 소리의 속도이고 라디오 방송은 한 순간에 전 세계에 소리를 내보낼 수 있습니다. 소리가 귀와 맞부딪칠 때에는 거울에 비추는 것과 같이 들림이 있게 됩니다.


 하지만 귀의 본래 주인이 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귀의 감성 물질은 끊임없는 흐름에 있으며 관련된 물질은 항상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습니다. 귀의 감성 물질은 흐르는 시냇물의 바뀌고 있는 물과도 같습니다. 물질의 흐름과 음파가 맞부딪침으로써 이식(耳識)을 촉발합니다.


이식은 한 순간만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그 다음에 소리를 계속해서 받아들이는 마음과 조사하는 마음과 결정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 각각의 마음은 한 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그리고는 매우 빠른 속도로 일곱 개의 자와나가 연달아 일어나고 그 다음에 소리에 초점을 맞춘 두 개의 등록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런 것들이 들림에 포함된 인식과정입니다. 하나의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귀[耳]와 소리[聲]를 토대로 하여 이식(耳識)이 새로워집니다. 그래서 사념처 수행자는 들음이 귀와 소리를 조건으로 있다는 것을, 그리고 거기에는 듣는 사람이나 존재가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사실, 수행자는 볼 때보다는 들을 때 인과관계를 훨씬 더 잘 압니다.

 

 이와 같이 들음이란 귀[眼]와 소리[聲]와 이식(耳識)의 결합을 뜻합니다. 소리의 맞부딪침이 바로 귀의 감각접촉[耳觸]이며, 명상하는 수행자에게는 아주 분명합니다. 어떤 수행자는 너무 민감한 나머지 거친 말을 들을 때 마치 그 소리가 귀를 향해 맹렬히 돌격해와 사정없이 후려치는 것처럼 느낍니다.


어떤 수행자는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에  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귀에 들어오는 다양한 소리가운데, 듣고자 하는 소리를 골라서 귀를 기울이면 그 감각접촉은 두드러집니다. 크고 거칠고 귀청을 찢는 소리는 듣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습니다. 즐겁지 못한 대상은 안볼 수는 있어도 소리는 그렇게 무시해 버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듣는 즐겁거나 괴로운 소리에 따라서 우리는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을 갖습니다. 노래와 감미로운 목소리는 귀에 들리는 것을 환영하지만 거친 소리와 욕설은 듣기 싫습니다. 평범한 소리를 들을 때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듭니다. 그런 경우에는 우리의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무덤덤한 느낌(upekkhā-vedana)는 너무나도 미세하여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사실 아비담마 논서에는 안식(眼),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을 가질 때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이 생기는 것을 부정하고 오직 무덤덤한 느낌(upekkhā-vedana)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행자에게 안식 등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하는 것은 권할 만하지 않습니다.


수행자는 즐거운 느낌과 함께 조사하는 마음(santīraṇa-citta), 등록하는 마음(tadārammaṇa-citta)과 같은 몇 개의 심찰나와 괴로운 느낌과 함께 자와나(javana)을 포함하는 전체 인식과정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게다가 안식 등이 일어나는 순간에 무덤덤한 느낌(upekkhā-vedanā)이라 할지라도 두려움과 같은 괴로운 느낌을 생기게 하는 괴로운 감각대상과 접촉했을 때 명백하듯이, 안식이 불선업에 대한 과보일 경우에는 안식은 괴로운 느낌을 수반할 것입니다.


 시끄러운 소리는 귀를 먹게 할 수도 있고 고약한 냄새는 두통을 일으킬 수 있고 상한 음식은 건강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네 가지 즐거운 감각대상을 조건으로 생긴 무덤덤한 느낌(upekkhā-vedanā)은 즐거운 느낌을 내포합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대상을 보고 즐거운 소리를 듣는 것을 즐깁니다. 이 무덤덤한 느낌이 선업에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즐거운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청정도론」의 복주석서는 이렇게 설하고 있습니다.


“저급한 업의 무르익은 과보인 무덤덤한 느낌은 고통스러우며 그렇기 때문에 저급한 성품을 지니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불선업을 기반으로 하는 무덤덤한 느낌은 무덤덤하고 중립적일 수 있지만, 그것은 악업에서 생겼기 때문에 마치 똥 무더기에서 피어나는 꽃처럼 저급하다.


게다가 괴로운 느낌(dukkha-vedanā)만큼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참을 수 없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저급하다. 사실, 악업의 과보는 결코 아픔이나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롭거나 선할 수 없다.

 

그 다음에 인과의 사슬에서 느낌의 기능을 설명하면서 복주서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불선업에서 기인한 무덤덤한 느낌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고통(dukkha)이라고 해야 한다. 선업의 과보에서 기인한 무덤덤한 느낌은 바람직하기 때문에 즐거움(sukha)이라고 해야 한다.”


즐거운 소리를 들으면 우리에게 즐거운 느낌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달콤한 말은 귀가 환영하는 반면에 거친 말은 귀에 거슬립니다. 평범한 소리로 일어난 어떤 느낌들은 불분명하기 때문에 무덤덤한 느낌이라고 합니다.”

 

 들림으로 생기는 세 가지 느낌은 항상 알아차리고 있는 수행자에는 매우 익숙합니다. 수행자는 소리와 귀의 맞부딪침에서 괴로운 느낌(dukkha-vedanā)이나 즐거운 느낌(sukha-vedanā)이 생기고 그러한 느낌에 영향을 받는 자아(atta)나 영혼은 없으며 느낌은 순간적으로 일어났다 사라지며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것을 압니다. 수행자의 집중이 계발됨에 따라 세 가지 종류의 모든 느낌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게 됩니다.


 들림과 마찬가지로 냄새 맡음도 조건 지어져 있습니다. 비식(鼻識)은 코와 냄새의 맞부딪침에서 일어납니다. 냄새나 코의 감성 물질(ghāna-pāsada)없이 냄새를 맡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 코의 감성 물질이 없는 사람은 드뭅니다. 나는 향수에 적신 손수건을 냄새 맡아도 특별히 아무런 향기를 못 느낀다고 하는 비구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설사 코의 감성 물질이 있더라도 코가 막혀 있거나 향기 나는 것이 없으면 냄새 맡지 못합니다. 향기는 공기에 의해서 풍겨 나와서 코의 감성 물질과 맞부딪쳤을 때만 감지됩니다.


보통 사람들은 냄새 맡는 자가 사람 혹은 존재라는 전도된 인식에 빠져 있습니다. 사실 비식을 생기게 하는 것은 공기에 의해 전해진 향기와 지속적인 흐름인 코의 감성 물질의 맞부딪침입니다.


봄, 들림과 마찬가지로 이 비식(鼻識)은 전향하는 마음(āvajjana-citta), 자와나(javana), 조사하는 마음(santīraṇa-citta)과 다른 단계를 포함하는 하나의 인식과정입니다. 물론 문제의 핵심은 물론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비식이 코와 냄새에 의존해서 끊임없이 생기고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썩은 물질의 역겨운 냄새나 꽃향기에 모두 익숙합니다. 보통사람은 냄새 맡는 것은 자신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냄새 맡음은 단지 코와 향기와 비식의 결합에서 생기는 현상일 뿐이라고 알며 끊임없는 흐름과 모든 것의 무상함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수행자와 보통사람의 차이입니다.


 느낌[受]은 감각접촉[觸]의 본성에 따라서 즐거울 수도 있고 즐겁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꽃향기나 향수의 냄새는 즐거운 느낌을 생기게 하고 물질의 썩는 냄새는 불쾌하게 합니다.


평범한 냄새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생기게 하는데,  이 느낌이 바로 무덤덤한 느낌(upekkhā-vedanā)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미세하기 때문에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수행자는 비식(鼻識)을 주시해서 세 가지 느낌과 그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압니다.


 맛을 아는 마음인 설식(舌識)은 혀와 음식이 맞부딪쳐서 생깁니다. 혀나 음식 맛이 없다면 설식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혀가 건강하지 못해서 감성을 상실했다면 음식 맛을 못 느낄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먹고 맛을 즐기는 것은 살아 있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상 혀의 감성 물질은 항상 변화하는 흐름에 있으며 이 물질과 음식의 맛과의 맞부딪침에서 앞에서 설명한 심찰나를 포함하는 설식이 일어납니다. 이 단계는 너무나 빨리 전개되기 때문에 단 하나의 심찰나로 여겨집니다. 이 설식은 혀와 맛에 따라서 매 순간마다 변합니다. 달고 시고 쓴 것 등을 아는 것이 바로 마음(citta)입니다.


 혀와 맛과 식의 결합은 빨리어로 팟사(phassa)라고 하는 감각접촉[觸]을 뜻합니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는 친숙하지만 보통 사람은 맛을 느끼는 주인공은 살아 있는 존재인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먹는 동안 일어나는 모든 정신-물질 사건을 주시하는 수행자만이 그러한 정신-물질 사건이 혀와 맛과 식에 의존하는 하나의 현상이라고 압니다. 나중에 수행자는 그러한 정신-물질 사건의 끊임없는 흐름과 무상에 대한 분명한 통찰지를 얻습니다.


 맛의 감각접촉[舌觸] 뒤에는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이 따라옵니다. 좋은 음식을 먹으면 즐겁고 그 음식을 좋아하지만 나쁜 음식이나 어떤 약의 쓴맛은 싫어합니다. 어떤 음식을 먹을 때의 느낌은 무덤덤함입니다.


이는 무덤덤한 느낌이지만 그 먹는 기회는 선업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음식을 먹는 것도 즐거운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집착에 이릅니다. 그러나 매순간 정신· 물질을 주시하여 계발된 삼매를 가진 수행자는 모든 (즐겁고, 괴롭고, 무덤덤한)감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체험으로 알게 됩니다.  


 감촉, 느낌 등의 또 하나의 근원은 몸의 문(kayā-dvāra)의 감성 물질입니다. “신식(身識)은 몸(몸의 감각기관)과 감촉대상에서 생깁니다. 몸의 감각접촉[觸]은 몸과 감촉대상과 신식의 결합에서 생기고 감각감촉은 (감촉의) 느낌을 조건 짓는다.”라고 합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좀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봄, 들음, 냄새 맡음, 먹음과 같은 각각의 물질적 사건은 눈[眼], 귀[耳]와 같이 단지 해당하는 기관과 관계됩니다. 그들과 관련된 식(識)은 또한 머리의 어느 일정부위에서만 일어납니다.


이러한 정신· 물질적 사건들은 위치와 지속시간에서 제한이 있습니다. 먹을 때에는 오직 맛봄만을 알고 들리는 것이 있을 때에는 들림만 압니다. 하지만 신식은 몸의 모든 부위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언제 어느 때나 몸의 어느 한곳의 감촉을 생각할 때에는 언제나 그 감촉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촉의 영역은 광범위하고 그 지속시간은 깁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초보자는 감촉을 관찰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므로 여기에 대해서 좀 알아야 합니다.


 감촉을 받아들일 수 있는 미세하고 민감한 감성 물질이 몸 전체에 두루 퍼져있습니다. 그것은 몸의 모든 건강한 부위에 존재하기 때문에 외부나 내부 물질과 맞부딪침으로써 몸의 어디에서든지 신식을 생기게 할 수 있습니다. 이 물질적 현상은 무상하고 순간에서 순간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구로 들어가서 빛을 내는 전기 에너지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상태에서 아직 사라지지 않은 몸의 감성 물질이 외부나 내부의 물질과 충돌하면 그것에 의해서 신식이 생깁니다. 봄 등과 마찬가지로 이 신식(身識)도 감촉대상을 조사하는 마음, 받아들이는 마음, 등록하는 마음과 같은 심찰나의 연속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이 마음은 너무나 빨리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신식은 단 하나의 심찰나만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감촉을 아는 마음[身識]은 항상 있습니다. 마음이 몸 이외의 다른 대상에 몰두하고 있을 때에만 분명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나 몸에 주의를 기울이면 어딘가에는 몸과 바닥의 접촉, 몸과 옷의 접촉 등과 같은 감촉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몸의 물리적 접촉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수행자는 그 조건을 압니다. 즉, 몸의 물리적 접촉은 원인이 없는 것도, 창조된 것도 아니며 사실상 감촉대상과 건강한 상태의 감성 물질과의 결합에 의존한다는 것을 압니다. 감촉의 대상을 빨리어로 뽓따바(phoṭṭhabba)라고 하며 여기에는 땅의 요소[地大], 불의 요소[火大], 바람의 요소[風大]라는 세 가지 종류133가 있습니다.


땅의 요소[地大]는 견고함, 혹은 거침의 특성이 있으며 이 특성은 분명한 감촉을 느끼게 하는 몸의 일부에 주의를 집중하거나 조사하면 드러납니다. 부드러움 또한 땅의 요소[地大]로 간주되는데 부드러움과 거침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둘투둘한 표면은 그보다 거친 많은 것들과 비교했을 때엔 부드러운 대상이라고 하지만 사람 눈의 부드러운 부위에 맞닿았을 때는 거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부드러움과 거침은 종류가 다른 것이 아니라, 정도에서 다를 뿐인 상대적인 용어입니다. 부드러움과 거침은 땅의 요소의 특성인 견고함을 나타냅니다.

 

 주석서에 따르면 땅의 요소[地大]의 핵심인 견고함은 다른 요소들이 의지해야 하는 거처인데 이는 마치 모든 대상이 땅에 의지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면, 쌀가루를 물로 반죽하면 덩어리로 변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견고함, 즉 단단한 성질이 훨씬 더 많기 때문에 그것은 땅의 요소[地大]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분말의 입자는 물의 요소[水大]에 의해 서로 결합되고 뭉쳐집니다. 그 덩어리는 또한 열이나 차가움과 관련된 불의 요소[火大]와 딱딱함과 뻣뻣함을 지원하는 바람의 요소[風大]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쌀가루로 만든 덩어리는 네 가지 요소[四大]를 모두 함유하고 있고 그중에서도 땅의 요소[地大]는 다른 요소들의 기반입니다. 그래서 마치 쌀가루가 물의 요소[水大]등을 지탱해주듯이 땅의 요소[地大]는 그것과 관련된 물질을 지탱해줍니다. 이것이 땅의 요소의 역할(rasa)입니다.

 

 그런 식으로 수행자에게는 땅의 요소[地大]가 다른 요소들의 기반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땅의 요소[地大]의 나타남(paccupaṭṭhāna)으로 무거움과 가벼움입니다. 아비담마 칠론의 하나인「법집론」과 그 주석서인「아따살리니」는 땅의 요소는 무거움과 가벼움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물건을 옮길 때 무거움과 가벼움을 느낀다면, 그 느낌 혹은 생각은 땅의 요소[地大]의 나타남(paccupaṭṭhāna)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거침이나 부드러움이나 반드러움을 통해서 땅의 요소[地大]의 특징을 압니다.


수행자는 땅의 요소[地大]가 다른 물질의 기반이 된다는 것을 알 때 그 기능도 알게 됩니다. 또 수행자는 다른 물질은 땅의 요소[地大]에 있고 그것은 다른 물질을 생기게 하고 무거움이나 가벼움이라고 알 때 땅의 요소[地大]의 나타남을 압니다.

수행자가 다른 물질은 땅의 요소[地大]에 의존해 있고, 땅의 요소[地大]는 다른 물질을 지탱해고, 또 땅의 요소[地大]는 무거움과 가벼움이라고 알 때, 그것의  나타남을 압니다. 그렇게 땅의 요소[地大]를 특성(lakkhaṇa)과 역할(rasa)과 나타남(paccupaṭṭhāna)으로 아는 것은 진리의 깨달음과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nāmarūpa-pariccheda-ñāṇa)를 뜻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땅의 요소[地大]와 접촉할 때 일반적으로 손과 발과 옷과 사람 등으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잘못된 것으로 수행자는 사념처 수행으로 진실을 깨닫습니다.

 

 불의 요소[火大]는 열을 뜻합니다. 몸의 어떤 부분이 뜨겁고 눌려 있기 때문에 자세를 바꿀 때 불의 요소[火大]가 두드러집니다. 차가움도 약한 불의 요소[火大]의 일종입니다. 어떤 물체는 다른 것에 비해 뜨겁거나 차갑습니다.


나무 그늘은 태양의 열기에 비해서는 서늘하겠지만 동굴이나 집의 내부에 비해서는 뜨겁습니다. 항아리속의 물은 노천에 있는 물에 비해서는 시원하겠지만 얼음물에 비하면 뜨겁습니다. 뜨겁고 따뜻하고 차가운 것은 본질적으로 불의 요소[火大]를 뜻하는 상대적인 용어입니다.


 불의 요소[火大]인 열은 성숙과 성장에 꼭 필요합니다. 열의 역할은 유기체를 성숙하고 숙성하게 합니다. 나무, 건물, 대지, 바위, 등이 낡아가고 쇠퇴해가는 것은 태양 때문이고 흰 머리카락, 이가 빠짐, 주름살, 다른 노화의 징후가 생기는 것은 몸의 열 때문입니다.


열이 많으면 성숙의 과정은 더욱 더 빨라집니다. 불의 요소[火大]는 물질을 부드럽고 유연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수행자가“뜨거움, 뜨거움”을 주시하면 부드럽고 느슨하게 불의 요소[火大]의 역할을 깨닫습니다.


 열이나 차가움이 몸 안에서 드러나면 사념처 수행자는 불의 요소[火大]를 그 특성으로 아는 것입니다. 불의 요소가 사물을 부드럽고 유연하게 한다는 것을 알면 그 역할(rasa)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수행자는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nāmarūpa-pariccheda-ñāṇa)를 얻어서  불의 요소[火大]를 손, 남자, 여자 등과 같은 본질과 실체로 생각하는 전도된 인식에서 벗어납니다.


 바람의 요소[風大]는 뻣뻣함과 경직됨의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똑바로 앉아서 등을 펴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뻣뻣함을 발견할 것입니다. 다시 팔을 펴고 마음을 팔에다 고정시켜 보십시오. 뻣뻣함을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앉아있음”을 정신적으로 주시하면 특성으로서 바람의 요소[風大]를 알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자아나 아뜨만(atman) 등이 아니라 그냥 뻣뻣함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바람의 요소[風大]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이러한 통찰지가 참 중요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수행자의 통찰지가 반드시 뻣뻣함이라는 실체에 국한될 필요는 없습니다. 실체나 자아 등에 대한 관념이 마음에 끊임없이 떠오릅니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은 초기에 집중력이 약해서 마음을 자유로이 방황하게 내버려 두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고요함이나 통찰지와 상충하고 정신적 진보를 방해하는 감각적 욕망이나 다른 장애[五蓋]들에 의해 휘둘립니다. 그 결과 마음은 근본 요소[四大]들의 실체에 고정되지 않습니다. 어떤 스승들은 모든 관습적 개념은 처음부터 떨어져 나간다고 믿게끔 하였지만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초보자가 장애[五蓋]로부터 자유롭고, 마음과 견해가 청정해지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부처님에게 직접 법을 듣고 성스러운 도를 성취한 사람들은 예외겠지만 그렇지 않은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러한 성취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고 처음부터 통찰지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정신-물질을 관찰하는 동안 수행자가 집중력이 강해져서 망상할 여지가 거의 없어지면 지속적으로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렇게 마음이 청정해진 단계가 되어야만 정신과 물질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통찰지가 생깁니다. 그렇게 된 다음에도 무너짐의 지혜(bhaṅga-ñāṇa)를 얻기 전까지는 관습적인 개념들이 좀처럼 떨어져 나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어남과 사라짐에 대한 지혜(udayabhaya-ñāṇa)의 초기단계에서 수행자는“파고다 난간 위의 광명, 꽃이나 바다 속의 물고기와 거북이”를 보려하는 경향이 있다고 「청정도론」(Vis.XX.107~109)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관찰의 대상인 정신-물질, 그리고 관찰하는 마음이 차례대로 사라짐을 발견합니다. 「청정도론」에서“주의력은 소멸, 사라짐, 무너짐에 모아져 있다.”라고 설하듯이 모양, 형태 등과 같은 관습적인 개념들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초기에 자신이 관찰하고 있는 대상만 바르게 알고 있으면 됩니다. 발을 들어 올리는 순간 뻣뻣함, 즉 바람(vāyo)이 분명해집니다. 우리에게 이를 알게 하려고 부처님께서는 “수행자는 자신이 걷고 있을 때, ‘걷고 있다’고 안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수행자는 자신이 걷고 있다는 사실을 그냥 알고 있도록 지시를 받는 것이지 뻣뻣함, 즉 바람의 요소[風大]를 숙고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때 명칭은 적절하지 않고, 가장 중요한 것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며, 또 수행자는 통속적인 습관으로 현상을 주시할 수 있음을 뜻합니다.


또 바람의 요소[風大]는 몸의 어느 부위의 움직임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러한 움직임과 배가 일어나고 꺼짐에서 뻣뻣함을 아는 것은 바람의 요소[風大]의 진정한 특성을 아는 것을 뜻합니다. 느슨함도 바람의 요소[風大]의 한 특성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것의 팽팽함과 느슨함을 언급할 때 상대적으로 그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움직이고, 숙이고, 기울이고, 옮기는 것도 바람의 요소[風大]의 역할입니다. 손을 구부릴 때 손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수행자는 바람의 요소[風大]의 참된 본성을 알게 됩니다. 걸음 등에 주의를 집중할 때에도 그것을 압니다. 그러한 움직임에서 대상을 남자나 여자나 몸 등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수행자는 바람의 요소[風大]의 참된 본성을 뜻하는 점진적 움직임이라고만 알 뿐입니다. 수행자는 또한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움직일 때에도 무언가가 밀고 있다든지 다른 것을 끌고 있는 것을 압니다. 그런 식으로 수행자는 정신의 시계 내에 나타나는 현상을 통해서 바람의 요소[風大]를 압니다. 이것이 바로 경전에서“인도함으로  나타남(abhinīhāra-paccupaṭṭhāna)”이라고 설하는 나타남(paccupaṭṭhāna)에 의한 앎입니다.

 

 땅의 요소[地大]와 불의 요소[火大]와 바람의 요소[風大]라는 세 가지 근본 요소는 모두 감촉(phoṭṭhabba)을 통해서만 알려집니다.134 들음 등을 통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물의 소리를 들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거친지 부드러운지, 뜨거운지 차가운지, 뻣뻣한지, 견고한지, 움직이는지 말할 수 없습니다. 사물의 냄새[香]나 맛[味]이나 형상[色]도 그 사물의 근본 성품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봄을 통해서 근본요소[四大]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대중화된 믿음입니다.


 바위나 쇳덩어리가 확실히 우리에게 단단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상은 봄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과거의 감촉을 토대로 한 귀납적인 일반화 일뿐입니다.


봄에 의해서 우리가 아는 것은 시각적인 형상[色]일 뿐으로, 단단한 땅이라고 믿고 디뎠다가 수렁에 빠진다든지, 뜨거운 쇠막대기를 모르고 잡았을 때 화상을 입는 경우처럼, 시각적인 형상은 때때로 그릇된 인상을 줍니다.

 

바람의 요소[風大]도 봄으로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체험해야만 알 수 있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물체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는데 왜냐하면 그것을 여기저기서 보기 때문이며 그 움직임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 움직임을 관찰해서 얻은 추론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멈추고 있던 두 대의 기차 중 한 대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움직이지 않고 있는 다른 기차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고, 달리고 있는 기차에 타고 있는 승객에게는 창밖의 나무들이 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시각적인 착각은 움직임의 진리에 대해서 우리가 눈에 의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한때 명상에 관심이 많은 나이 지긋한 남자 신도가 스승인 비구와의 대화를 우리에게 전해주었습니다. 베개를 집어 흔들면서 비구에게“자, 스님, 지금 어떤 법이 사라지고 있음을 보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음, 바람의 요소[風大]가 사라지고 있음을 봅니다.”


“스님, 틀렸습니다. 스님께서 눈으로 보고 계신 것은 형상일 뿐입니다. 보는 순간을 알아차리신다면 스님은 형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만 아실뿐입니다. 보는 순간에는 바람의 요소[風大]에 대해서 아무것도 체험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위빠사나는 내관에 의해서 실제로 아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수행입니다. 추론에 의해서 다른 사실을 주시하고 깨닫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감각대상에 해당하는 감각기관을 통해서만 각 감각대상을 관찰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바람의 요소[風大]는 몸의 접촉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대상입니다.


만약 우리가 걷거나 구부리거나 하는 동안 내관한다면 바람의 요소[風大]의 움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스님께서는 바람의 요소[風大]와 접촉하지 않으면서 그 소멸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부자연스럽고 틀렸습니다.”


 이 남자 신도의 비평에는 많은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어떤 스승들은 「염처경」과 다른 경전들을 참고용으로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자연 현상만 다루는 논서를 근거로 순전히 이론적인 가르침만을 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수행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수행이 수행자들을 영적으로 이롭게 할지는 모르지만 진정한 통찰지나 성스러운 도의 단계를 증득하기 위해서는 의지할 것이 못됩니다. 추론적인 내관을 통해서도 통찰지를 얻는 근기를 타고난 일부 수행자들만이 유일한 예외입니다.


 「염처경」에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여섯 감각기관[六根]에서 일어나는 정신-물질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유일한 길(eka yāno maggo)135”입니다.


신식(身識)에 대응하는 감촉의 경우 우리는 내· 외부적으로 몸의 맞부딪침을 알 때 감촉을 주시하고 인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촉은 무명이나 다른 번뇌와 결합해서 우리를 지배하기 십상입니다.


그렇게 되면 항상하고, 행복하고, 자아가 있다는 전도된 인식136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감촉을 통해 몸의 어떤 부위들에 집착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들을 영원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선호도에 따라 차별을 두게 됩니다. 모든 감촉을 주시하여 그 감각의 무상하고 불만족스럽고 실체 없는 본성을 깨닫는다면, 거기에는 집착이 없을 것이며 우리는 깨달음과 열반에 확실히 이르는  위빠사나의 바른 도위에 서게 됩니다.


 몸의 감성(kāya-pāsada)은 몸이 건강한 상태일 때는 전신에 고루 퍼져있는 것이 특성입니다. 옷, 공기등과 같이 감촉을 줄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몸도 머리카락, 피부등과 같이 감촉에 알맞은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몸의 감성과 접촉하는 외부적이고 내부적인 대상들이 항상 존재합니다.


숙고해보면 몸의 모든 부위에는 감촉의 가능성이 있으며 몸에는 아무리 작은 부위라도 접촉을 허용하지 않는 부위가 없음을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며 이러한 감촉이 신식(身識)을 생기게 합니다.


몸의 감성과 감촉 대상과 신식(身識)의 결합에서 아주 분명한 감각접촉(phassa)이 생깁니다. 즐거운 감각접촉은 즐거운 느낌을 생기게 하고, 괴로운 감각접촉은 괴로운 느낌을 생기게 합니다. 감각접촉[觸]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느낌도 더욱 더 강렬해집니다.





35. 마노의 문[意門]과 식(識)의 관계


 

생각하고 사고하고 인지하는 의식(意識)은 마노[意]와 마노의 대상[法]에 토대하고  있습니다. 그 기반을 형성하고 있는 마음이 우리가 수태된 순간부터 지니고 있는 바왕가의 마음(bhavaga-citta)입니다. 이 바왕가의 마음은 업에 따라서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또한 그것은 인식과 인지의 기반입니다.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와 마음이 다른 것에 사로잡혀 있지 않을 때의 정신적 삶은 모두 바왕가입니다.


바왕가가 마노의 대상[法]들과 맞부딪치면 활발해져서 의도와 인지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왕가를 토대로 해서만이 생각하고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의도와 인지가 없어도 바왕가는 항상 존재하지만 바왕가가 강할 때에만 정신 활동을 이끌 수 있습니다.


 때때로 졸리기 때문에 생각을 할 수 없거나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생각이 잘 되지 않는 것은 바왕가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바왕가는 혼자서는 거의 기능하지 못하고 새로운 감각대상과 맞부딪치는 경우에만 활발해집니다. 그것을 바왕가의 동요(bhavaga-calana), 바왕가의 끊어짐(bhavaga-uppaccheda)137이라고 합니다.


이 마지막 바왕가가 의도와 인지를 일어나게 합니다. 주석서에 따르면 전향(āvajjana)도 정신 활동을 위한 토대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전향은 인식 과정에서 첫째 단계입니다. 그것은 대상과 관련하여 조사하는 마음 상태로 일어납니다. 전향이 깨어 있고 날카로우면 모든 중요한 사실과 대상에 대해서 알아차립니다.


 훌륭한 작가는 책을 쓸 때 중요한 사실을 고려하고 훌륭한 웅변가는 연설할 때 적절한 단어를 선택함으로써 글과 연설을 완벽하게 만듭니다. 더 나아가서 이 전향이 선한 대상이나 불선한 대상들로 향함에 따라서 선하거나 불선한 업의 마음에 이릅니다.


우리는 전향에서 의도와 앎이 생기는 것을 실제로 알 수 있기 때문에 내관과 인지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식의 기반인 마노[意]는 조사와 전향(āvajjana)으로 이해해야 한다.”라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정신 활동에 또한 중요한 것은 마노의 대상[法]입니다. 우리가 사유할 때에는 언제나 대상이 일어납니다. 마노의 대상[法]이 없으면 정신 활동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려고 해도 그 생각을 포기해야만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왜냐하면 중요한 사실, 즉 대상들을 불러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 활동은 마음(바왕가)과 조사하는 마음(전향)과 마노의 대상[法]의 결합에 의존합니다.

 

 주석서에 따르면 심장은 모든 정신 활동의 물질적 토대가 됩니다. 하지만 오늘날 서양의사들은 환자의 병든 심장을 제거하고 건강한 대용물로 바꾸어 놓습니다. 이 실험이 완전하게 성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보도에 따르면 이식된 심장이 며칠 동안은 기능했다고 합니다. 이 뉴스는 인간의 정신생활에 있어 심장의 역할에 의문이 들게 할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은 두 가지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마치 도마뱀붙이의 꼬리가 잘려진 뒤에도 움직이는 것처럼 심장은 제거되었지만 그 잠재력은 소멸되지 않을 수도 있고 바왕가의 마음은 심장이 있던 자리에 여전히 머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식된 새로운 조직이나 안구가 새로운 감성을 가지듯이 이식된 심장이 몸에서 공급받은 피에 의해 활기를 되찾아 바왕가의 마음이 다시 활성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논서에 근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비담마 칠론138중의 하나인「발취론(發趣論)」에 보면 의식(意識), 즉 마음의 육체적 토대를 “마음의 토대로써 마음을 조건지우는 육체적 기관이다.”라고만 단순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발취론」은 몸의 어느 특정 기관이나 부위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논서에 따른다면 몸의 어느 특정부위가 마음의 토대139라고 가정해도 좋을 것이며 아마도 그것은 심장이나 머리의 어떤 부위일 것입니다. 마음을 심장에 위치시키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머리를 그 육체적 토대라고 간주해도 좋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논장의 주석서에 나와 있는 거미와 마음이 전개되는 유사성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거미는 파리를 잡기 위하여 그물의 일종인 거미줄을 칩니다. 거미는 태어난 지 며칠만 지나면 본능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지만 태어난 지 1년이 된 아이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거미는 거미집의 중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줄에 걸리는 생명체는 모두 먹어치우고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옵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바왕가, 즉 의식(意識)은 거처로써 심장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 거처와 그 주변을 연결하고 있는 거미집의 거미줄처럼 심장에 의해 주입된 피가 혈관을 통해서 온 몸에 퍼집니다. 그리고는 눈에 있는 형상이 심장에 있는 바왕가를 자극하면 그것은 안문(眼門) 인식과정을 통해서 안식(眼識)등으로 변환됩니다. 그리고 나서 바왕가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소리[聲]와 냄새[香] 등에 대해서도 각각에 해당되는 감각기관과 함께 같은 방법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제 바왕가와 더불어 그 바왕가의 원래 활동인 생각과 앎이 정신적 삶의 주요 원천을 이룬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형상[色]이 있을 때 안식과 그 기반인 눈이 일어나고 그러면 의식(意識)이 그것을 사고합니다. 귀, 코 등을 토대로 한 이식(耳識), 비식(鼻識)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식(身識)의 경우는 몸의 크기에 좌우되므로 미치는 영역이 넓습니다.

   

 감각대상이 분명하지 않을 때에는 생각과 앎을 이루는 의식(意識)인 마음이 정신적 삶을 지배합니다. 때때로 너무 생각에 골몰하여 감각대상을 모두 알아차리지 못하기도 합니다. 어떤 중요한 일에 전념하면 잠이 안 오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바왕가와 전향과 마노의 대상[法]을 조건으로 한 정신 활동을 토대로 잇따라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의 지배를 받습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주시하는 수행자에게는 이러한 생각이 산산조각으로 분리되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모든 정신 활동은 마노[意]와 마노의 대상[法]과 인식에 의존합니다. 그 다음에 정신적 표상과의 감각접촉[觸]이 뒤따릅니다. 실재이거나 실재가 아니거나, 현존하거나 현존하지 않거나 간에 이러한 표상은 우리가 생각하거나 무언가 하려고 할 때마다 상상 속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본생경의 이야기를 읽어본 이들에게 이것은 낯설지 않습니다. 본생경의 이야기를 읽으면 미얀마의 신앙과 전통으로 각색된 도시와 왕들의 정신적 표상이 미얀마 사람들에게 떠오릅니다. 본생경 이야기의 배경은 인도로써, 본생경에 나오는 사람들이나 장소들은 인도의 문화와 생활방식에 준하는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이러한 표상은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멉니다.


현대의 소설은 도시, 마을, 남자, 여자, 범인 등의 표상이 떠오르게 합니다. 독자는 이 모두는 순전히 허구이고 가공이라는 것을 알지만, 읽는 동안에는 사실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좋은 이야기로써 기쁨과 슬픔과 다른 감정들이 생깁니다.

이 모든 것은 정신적인 표상과의 맞부딪침인 감각접촉[觸]에서 기인합니다.

 

이는 「범망경(梵網經)」(D1)에서“이러한 가르침과 견해들은 분명하고 실재처럼 보이게 하는 생생한 감각접촉[觸]에서 나온다.”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요컨대, 우리가 말하거나, 쓰거나, 견해를 갖거나, 생각하거나, 마음이 자유롭게 망상하도록 그냥 내버려 둘 때에는 생생한 상상, 즉 감각접촉[觸]이 필요합니다.

 

 상상, 즉 감각접촉[觸]에서 느낌이 생깁니다. 예를 들면 과거의 풍요로움이나 미래에 풍요롭게 되리라는 예상과 관련된 표상처럼 즐거운 감각접촉[觸]은 즐거운 느낌을 일으킵니다. 반면에, 괴로운 감각접촉[觸]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과거의 괴로움을 생각하면 괴로운 기억이 되살아나고, 미래에 발생해서 우리를 괴롭힐 것 같은 문젯거리를 예상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괴롭습니다. 그러한 괴로움의 원인은, 친척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비통해했는데, 나중에 그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의 경우처럼 순전히 가공일수 있습니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감각접촉[觸]은 무덤덤한 느낌(upekkhā-vedanā)이 생기게 합니다. 그러면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전혀 아무런 느낌이 없는 감각접촉[觸]을 지니고 있지만 이는 단지 무덤덤한 느낌의 미세한 본성을 그냥 암시하는 것입니다. 주석서에 따르면 이 무덤덤한 느낌의 미세한 본성은 사슴의 발자취의 비유로 알 수 있습니다.


사슴이 커다란 바위를 뛰어넘어 가면 발자국을 남기지 않기 때문에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위의 양쪽에 발자국이 있는 것을 발견한다면 사슴이 바위를 뛰어 넘어 갔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행자는 즐거운 느낌인지 괴로운 느낌인지를 잘 압니다.


무덤덤한 느낌이 있을 경우에는 주시하지 못하고 봄과 들음 등만 알아차릴 뿐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다시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을 느낀다면, 수행자는 평범한 정신 활동들을 알아차리고 있는 동안 무덤덤한 느낌이 있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중부』「밀환경(蜜丸經 Madhupindika Sutta)」(M18)에서 부처님은 “마노[意]와 마노의 대상[法]을 조건으로 하여 의식(意識)이 생긴다. 마노[意]와 마노의 대상[法]과 의식(意識)의 결합에 의해서 감각접촉[觸]이 생기고, 이 감각접촉[觸]으로 인하여 느낌[受]이 생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존재나 자아나 창조주나 우연한 사건과는 무관한, 순전한 인과관계의 과정입니다. 빨리어로 “담마(dhamma)”라고 하는 이 가르침은 상상한 대상들과 함께 다섯 가지 감각대상(색〮∙성∙향∙미∙촉)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다섯 가지 감각대상은 또 정신 활동의 초점이 됩니다. 그리하여 의식(意識)은 본 것, 들은 것 등과 보지 않은 것, 듣지 않은 것 등 모든 여섯 가지 감각대상(색〮∙성∙향∙미∙촉∙법)을 포함합니다. 모든 감각대상은 감각접촉[觸]을 생기게 하고 다시 감각접촉[觸]은 느낌[受]을 생기게 합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정신 활동들이 나와 자아(atta)라는 생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생각은 인과의 사슬과는 무관한 전도된 인식입니다. 사념처 수행자는 체험으로 이를 깨닫습니다. 수행자는 모든 정신 활동을 알아차리고 그 원인을 추적합니다.


그러면 바왕가와 전향과 마노의 대상[法]을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수행자는 모든 정신 활동은 자아나 창조주나 우연의 여지가 없는 원인과 결과의 상호관계만을 뜻할 뿐임을 체험으로 압니다.


 수행자는 또한 정신 활동으로 감각접촉[觸]이 생기고 그 감각접촉[觸]은 느낌[受]을 생기게 한다는 것도 압니다. 수행자는 이론이 아닌 체험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는 모든 정신 활동을 바로 붙어서 주시합니다. 만약 수행자가 집중수행처에서 수행하고 있는 동안에 마음이 집으로 가 있을 때, 주의를 그쪽으로 돌리면 마음과 그 대상인 집 사이에 감각접촉[觸]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을 들뜨게 하는 쉐다곤 파고다나 외국의 생각을 우리가 바로 붙어서 주시할 때 그에 상응하는 감각접촉[觸]이 생겨납니다. 이러한 마노의 대상[法]과 맞부딪치는 것이 바로 빨리어로 팟싸(phassa)라고 하는 감각접촉[觸]입니다.

 

감각접촉[觸]의 결과로 생기는 느낌[受]도 수행자에게 분명합니다. 수행을 하는 동안 수행자가 어쩌다 자신을 즐겁게 하는 뭔가를 생각하게 되면 기쁨을 느끼고 슬펐던 일을 생각하게 되면 슬픔을 느끼고 뭔가 우스운 것을 생각하면 웃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느낌[受]은 단지 감각접촉[觸]의 결과라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정신과 물질이 매번 일어날 때마다 주시하는 수행자의 통찰지는 느낌의 원인에 대한 지혜보다 더 깊습니다. 왜냐하면 집중과 고요함인 삼매가 계발됨에 따라 수행자는 내관의 모든 대상과 내관하는 주체인 아는 마음[識]이 사라지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수행자는 생각, 느낌 등과 같은 모든 정신 활동의 무상함[無常]과, 불만족스러움과 의지할 수 없음[苦], 그리고 자아 없음과 비실체성[無我]을 꿰뚫어 보는 분명한 통찰지를 얻습니다. 그러한 통찰지가 체험적인 깨달음이며 연기의 참다운 이해를 뜻합니다.

 




36. 재요약



법문의 앞머리에서 인과관계의 회전에서 감각접촉[觸]에서 생기는 느낌[受]까지 설명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을 요약해보겠습니다.


무명이란 사성제를 모르는 것입니다. 무명으로 인해 범부들은 감각대상이 무상하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범부들은 현생이나 내생에서 행복을 얻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이러한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표출되는 행위들은 선하거나 불선한데 그러한 행위를 업형성력인 상카라(saṅkhāra)라고 합니다.
 

상카라는 새로운 존재를 생기게 합니다. 죽어가는 사람은 새로운 생의 재생연결식(바왕가)을 조건지우는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을 가집니다. 재생연결식에 관여하는 특별한 대상이 없는 경우에는 태어날 곳의 표상이 전생의 임종할 때의 표상과 함께 재생연결식의 대상으로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이 바왕가의 마음은 보는 등의 순간에 활동하게 됩니다. 그러면 눈[眼]과 형상[色]에 의존하는 안식(眼識)이 일어납니다. 이 안식은 식의 상태, 즉 상카라에 의해 조건 지어진 정신적 삶의 일부입니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은 즐거울 수도 괴로울 수도 있으며 이에 상응하는 안식(眼識)과 이식(耳識)등의 본성은 전생의 선하거나 불선한 업인 과거 행위의 도덕적 특성에 기인합니다.


 이것은 여섯 감각대상[六境]에서 생기는 여섯 가지 식[六識] 모두에 적용됩니다.

생각, 상상, 의도 따위로 구성된 정신 활동을 뜻하는 의식(意識)은 바왕가의 마음(bhavaga-citta), 전향하는 마음(āvajjana-citta), 육체적 토대, 정신의 표상에 의존합니다.


이 정신활동, 즉 의식(意識)은 일곱 개의 자와나와 두 개의 등록하는 마음(tadārammaṇa-citta)을 포함합니다, 여기서 등록하는 마음은 선업이나 불선업의 결과입니다. 자와나는 업의 과보는 아니지만 논장에서는 상카라의 결과인 바왕가에서 생긴다는 뜻에서“상카라에 기반을 둔 식”이라고 합니다.

 

 식이 일어남과 함께, 다른 부수되는 정신-물질 현상(마음작용과 물질)도 덩달아 일어납니다. 그래서 식을 조건으로 정신-물질[名色]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식이 일어난 다음에는 여섯 감각장소[六入]와 여섯 감각접촉[六觸]까지 따라 일어납니다.


감각접촉[觸]이란 마노[意]와 마노의 대상[法]과 감각기관[境]의 결합을 뜻합니다. 감각접촉[觸]은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생기게 합니다. 무덤덤한 느낌은 아무런 느낌도 없다는 인상을 주지만 아비담마에 따르면 사실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 없는 것뿐인 일종의 미세한 즐거움입니다.





37. 느낌[受]을 조건으로 갈애[愛]가 일어난다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140가 일어납니다. 갈애란 끊임없는 갈망이나 배고픔입니다. 갈애는 가지고 있지 않은 감각대상을 갈망하거나 이미 가지고 있는 감각대상을 더 많이 갈망하는 것입니다. 갈애는 물림이나 만족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갈애의 배고픔을 충족시키는 모든 감각대상에는 만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천신은 천신들이 먹거나 마실 것도 없이 극도로 굶주리는 아귀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천신은 온갖 감각적 쾌락을 누릴지라도 항상 굶주립니다. 이는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왜냐하면 삼십삼천(三十三天)의 수명은 지상의 수백만 년에 해당하기 때문이며 야마천(夜摩天)이나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처럼 더 높은 천신계의 수명은 그보다도 훨씬 더 깁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그리고 무한한 쾌락을 누림에도 불구하고 천신들은 채워지지 않는 갈애로 인해 결코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능력껏 감각적 쾌락을 추구합니다. 물론 가난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욕구를 채우지 못합니다만 부유한 사람, 고위관리, 사회의 상류층도 마찬가지로 갈애를 채울 수 없습니다. 이는 갈애의 속성 때문입니다. 채우면 채울수록 갈애는 더욱 더 심해집니다. 그래서 이 갈애는 가난한 사람보다는 부유한 사람들에게, 가난한 나라보다는 부유한 나라로 갈수록 더 심해집니다.


 



38. 여섯 종류의 갈애



갈애는 즐거운 대상이나 좋아하는 남자나 여자를 아무리 보아도 싫증내지 않습니다. 갈애는 또 감미로운 소리를 추구하고 향기로운 냄새, 맛있는 음식과 음료수도 애타게 구합니다. 갈애는 감촉을 갈구하기도 하는데, 이는 감각적 쾌락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심한 갈애임에 틀림없습니다.


갈애는 또한 눈[眼], 귀[耳]등의 다른 육체적 기관에는 감지되지 않는 마노의 대상[法]을 좋아하는 것도 뜻합니다. 그것은 정신적으로만 알 수 있는 대상입니다. 경전에 따르면 마노의 대상[法]은 다섯 가지 감성 물질들, 물의 요소[水大]등의 네 가지 미세한 요소들, 마음부수들, 그리고 형상, 특성, 이름 등의 개념들을 뜻합니다.  


사람들은 선명하게 보고, 분명하게 듣고, 예민한 감각이나 촉감을 지니고자 하기 때문에 건강한 감성의 물질을 갈망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입과 목과 피부가 촉촉이 젖어 있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물의 요소[水大]를 추구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남자, 혹은 여자임과 이성(異性)을 좋아하기 때문에 남자다움과 여성스러움을 갈망합니다.


사람들은 장수하고 경쾌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도 바라는데, 이러한 욕망이 미세한 생명의 물질(jīvata-rūpa)과 몸의 가벼움(kāya-lahuta)등에 대한 그들의 갈망을 나타냅니다. 행복, 좋은 기억력, 탁월한 지성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은 어떠한 정신적 능력에 대한 갈애를 나타냅니다. 자신의 외모와 이성의 외모에 대한 사랑, 그리고 칭찬과 명성에 대한 욕망도 개념에 대한 갈애입니다.


 여섯 감각대상[六境]에 대해서 여섯 가지 갈애가 있습니다. 이 여섯 종류의 갈애는 단순히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를 뜻한다고 할 수 있고, 상견(常見)을 의미하는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와 결부될 수도 있습니다. 갈애는 또한 몇몇 사람들을 지나치게 감각적 쾌락에 집착하게 만드는 단견(斷見)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를 비존재에 대한 갈애[無有愛]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有愛]라는 세 가지 갈애에 여섯 감각대상[六境]에 대응하는 여섯 가지 갈애를 더하면 18가지 갈애가 있습니다.


이 18가지 갈애 각각은 내부의 대상과 외부의 대상이 있을 수 있으므로 모두 36가지 갈애가 됩니다. 각각의 갈애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와 관련될 수 있으므로 모두 108가지 갈애가 있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갈애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비존재에 대한 갈애[無有愛]라는 세 가지 갈애로 요약됩니다.


 괴로운 감각대상과 맞부딪치는 사람은 즐거운 대상을 갈망합니다.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은 고통이 없음을 갈망합니다. 요컨대, 주석서에 의하면 괴로운 사람은 행복을 갈망합니다. 사람들은 고통, 빈곤, 괴로운 대상과 느낌 등에서 벗어나기를 추구합니다.


괴로움이 없는 것은 행복(sukha)을 뜻합니다. 우리는 괴로운 생각으로 비롯되는 번민과 의· 식· 주에 대한 걱정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하지만 일단 생활의 필수품이 풍족하게 갖추어지게 되면 또 다른 갈애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주석서에는“부자는 재산을 더욱 더 늘리고자 한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족을 모르는 것이 갈애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삶의 좋은 것들을 누리고자 하고 가진 재산을 늘리고자 합니다.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이 원하고 삶의 질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것을 더 향상시키려는 욕망이 커집니다. 느낌[受]에 의해 자극받고 지속되므로 갈애는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무덤덤한 느낌(upekkhā-vedanā)과 연관된 갈애에 대해, 주석서는 그 평온함과 미세함 때문에 그 부수되는 느낌을 즐거움(sukha)으로 설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감각대상과 맞부딪치는 경우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현저합니다. 하지만 이 무덤덤한 느낌은 섬세하고 미세해서 즐거움의 색조를 띠고 있기 때문에 보다 더 명확한 즐거움을 갈망하게 합니다.


무덤덤한 느낌은 일반적인 감각대상에 만족하지 못하게 하고, 보다 좋은 음식과 보다 좋은 옷과 보다 좋은 감각대상과 보다 낳은 생활여건을 바라도록 부추깁니다.


 요컨대, 즐거운 감각대상은 보다 좋은 대상에 대한 갈애와 집착을 생기게 합니다. 괴로운 대상은 그것을 없애고자 하는 욕망을 생기게 합니다. 감각대상들이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생기게 해도 여전히 운명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좋은 것들을 갈망합니다. 이 모든 것은 느낌이 어떻게 갈애를 생기게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39. 갈애와 윤회



 봄 등의 순간에 식이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정신-물질[名色]과 여섯 감각장소[六入]와 감각접촉[觸]과 느낌[受]이 일어납니다. 번뇌로부터 아직 자유롭지 않은 모든 범부에게 느낌[受]은 갈애[愛]을 일으킵니다. 그러면 갈애는 선하거나 불선한 업을 짓도록 하는 집착[取]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바로 업으로서의 존재(業有 kamma-bhava)입니다. 특정한 조건하에서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는 중생으로 하여금 늙음, 병듦, 죽음, 근심과 다른 모든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받도록 하는 재생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바로 느낌[受]이 어떻게 윤회고에 이르는지를 보여줍니다.


 식(識)의 부수물로 정신-물질[名色]과 여섯 감각장소[六入]와 감각접촉[觸]과 느낌[受]이 일어나는 것을 아무도 막지 못합니다. 부처님과 아라한도 감각접촉[觸]으로 인해 즐겁거나 괴롭거나 무덤덤한 느낌이 생깁니다. 그분들도 육체적인 고통에서 생기는 통증을 느낍니다.


하지만 부처님과 아라한은 정신적으로 괴로워하지 않으며 즐거운 감각을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갈애와 집착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그분들은 즐거움이나 행복을 얻으려고 애쓰지 않으며  업을 짓지 않고 살기 때문에 재생과 정신-물질[名色]과 기타 괴로움의 원인을 없앱니다. 이것이 바로 번뇌에서 완전히 벗어난 아라한의 괴로움의 소멸입니다.


그래서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에 뿌리를 두고 있는 갈애[愛]의 완전한 소멸로 성스러운 도에서 집착[取]이 소멸하게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라한이 아닌 사람들이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면 삶의 좋은 것들에 대한 갈애가 생깁니다. 하지만 성스러운 도의 연 이은 단계들을 모두 거친 다음 아라한과를 얻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습니다.


보통 사람에게는 이러한 말이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 자신의 행복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 아라한에게는 아무리 매혹적인 감각대상에도 끌림이 없습니다. 아라한은 갈애와 집착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우며, 이는 업형성력인 상카라와 재생과 그에 수반되는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을 뜻합니다.


 그래서 “집착이 소멸되면 태어남의 원인인 업형성력이 소멸한다. 업형성력이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한다.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 죽음, 근심 등이 소멸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40. 갈애의 소멸



요컨대, 아라한과를 증득하여 갈애가 완전히 소멸하면 그 모든 결과들이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고, 이는 괴로움의 소멸을 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행복이나 중생이 사라졌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괴로움의 근원인 정신-물질 과정이 소멸한 것일 뿐입니다.


 아라한과의 성취가 갈애의 완전한 소멸을 뜻하는 것처럼 불환과의 성취는 욕계의 재생, 늙음과 죽음, 감각적 갈애가 소멸함을 뜻합니다. 예류과를 성취한 수행자는 악처에 이르게 하거나 일곱 번 이상 다시 태어나는 모든 갈애의 소멸이 보장됩니다.


그래서 예류자는 악처의 모든 괴로움과 욕계에서 일곱 번 이상 태어나는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이처럼 연기법의 함축된 의미는 갈애가 약화되면 괴로움도 적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위빠사나 지혜는 갈애의 순간적인 소멸을 보장합니다. 여섯 감각대상[六境]들은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들이 일어나게 하는데, 위빠사나 지혜가 없는 경우에는 결국 갈애와 그에 수반되는 괴로움으로 귀결됩니다.


 하지만 끊임없는 알아차림을 닦아서 위빠사나 지혜를 계발한 수행자는 모든 현상들의 일어나고 사라짐과 그것들의 무상· 고· 무아만을 발견합니다. 수행자는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이 즉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도 발견합니다.


그리하여 수행자는 일어나는 느낌을 기뻐하지도 않고, 또 다른 느낌을 갈망하지도 않기에 모든 갈애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수행자는 또한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은 일어났다가는 곧장 사라짐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일어나는 느낌을 즐거워하지 않고 또 다른 느낌을 갈망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그는 모든 갈애에서 벗어납니다.


 성스러운 도의 갈애의 소멸은 영원한 것이며 모든 감각대상과 관련된 것임에 반하여 위빠사나에 의한 소멸은 소멸이 영원하지도 않고 보편적이지도 않다는 면에서 위빠사나에 의한 소멸과는 다릅니다.


관찰하는 순간만, 그리고 관찰되는 대상에 대해서만 갈애가 소멸됩니다. 그런 이유로 위빠사나에 의한 소멸을 번뇌의 부분적인 혹은 일시적인 적멸(tadaṅga-nibbuti)이라고 합니다.

   

 명상하는 수행자는 봄, 들음 등을 있는 그대로 압니다.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아는 상태에서는 갈애가 생길 여지가 없으며, 그 결과 집착, 업, 재생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갈애가 소멸됨으로써, 윤회의 바퀴가 부분적으로 단절되며 이를 일시적인 적멸(tadaṅga-nibbuti)이라고 합니다.


 



41. 마하띳사 장로 이야기



 「청정도론」(Vis.Ⅰ.55)에는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함께 닦아서 갈애를 극복한 스리랑카의 마하띳사(Mahā-tissa) 장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루는 장로가 탁발하기 위해서 아침 일찍 숲속 집중수행처를 떠나 아누라다푸라(Anurādhapura)로 가는 도중에 남편과 말다툼을 하고서 집을 뛰쳐나온 한 여자를 만났습니다.


여자는 장로를 보자 욕정이 생겨서 요염하게 큰 소리로 웃었습니다. 그러나 마하띳사는 그 여자를 바라보는 순간 이빨을 주시하였습니다. 장로는 뼈(aṭṭhi)를 관찰해왔기 때문에, 여자의 전신은 뼈 무더기로 보였습니다. 장로는 이 정신적 표상에 집중해서 선정을 얻었습니다141. 그리고는 이 선정상태에서 해골의 표상을 관찰한 다음에 아라한과를 얻었습니다.


 장로는 계속 길을 가다가 도중에 여자의 남편을 만났습니다. 사내는 장로에게 어떤 여자를 못 봤냐고 물었습니다. 장로는 뭔가를 보기는 했는데 그게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장로가 본 것은 도중에 지나쳐간 뼈 무더기가 전부였습니다.


 장로가 실제로 본 것은 여자의 이빨이었지만 관찰수행으로 여자 몸과의 감각접촉[觸]을 뼈의 표상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장로의 마음에 여자와의 감각접촉[觸]에서 욕정이나 다른 번뇌가 생길 틈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선정의 마음을 토대로 위빠사나를 닦아 번뇌에서 벗어나고 아라한과를 얻었습니다.


 수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사람의 이빨을 보고 해골의 표상을 떠올렸다는 이 이야기 에 대해 의구심이 들지 모릅니다. 하지만 명상을 해보지 않고서는 수행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 분명히 인식할 수 없습니다. 아무런 수련 없이 그냥 집중만으로는 정신적 표상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이러한 정신적 표상은 꾸준하고 장기간의 관찰수행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상상은 인식[想]의 힘입니다. 계속해서 관찰하면 인식[想]이 강해지는데 그렇게 강해진 인식[想]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어떠한 표상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장부』「염처경」(D21)주석서에 나오는 다음의 이야기가 입증하듯이 마음의 이러한 기능은 앵무새도 가능합니다. 




 

42. 앵무새 이야기



 어떤 무용수가 비구니 처소에 하룻밤 머물고 난후 영리한 앵무새 한 마리를 남겨 두고 갔습니다. 앵무새는 사미니들이 돌봐 주었는데 붓다락키따(Buddha-rakkhita)라고 불렸습니다. 비구니 승원의 주지 비구니는 영적인 진보를 추구하는 이들 가운데 사는 이 앵무새에게 관찰할 뭔가가 있으면 좋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주지 비구니는 앵무새에게 뼈(aṭṭhi)를 관찰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앵무새는 독수리에게 채였습니다. 어린 비구니들의 고함과 울부짖음에 독수리는 화들짝 놀라 앵무새를 떨어트렸습니다. 비구니들은 주지 비구니에게 앵무새를 데려갔습니다. 주지 비구니는 독수리에게 잡혔을 때 무엇을 관찰하였는지 물었습니다.


앵무새는"낚인 해골을 생각하였고 이 해골이 어디에서 흩어질지 생각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주지 비구니는 "잘 했다! 이 관찰은 네가 윤회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것을 끊임없이 관찰하면 언젠가는 마음이 하나로 고정될 것입니다. 앵무새조차도 뼈를 관찰할 수 있는데 사람이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앵무새는 자신과 다른 이들을 뼈로 상상했습니다. 이러한 관찰 때문에 앵무새는 독수리에게 잡혀 갈 때 두려움, 성냄, 걱정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념처 명상은 근심과 불안을 극복하고 정신· 육체적 고통을 없애는데 도움이 되는 수행으로 극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법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또 법을 관찰하지 않기 때문에 이 이야기의 앵무새만큼이나 지혜롭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 입니다. 수행자는 이 앵무새를 능가하겠다고 굳게 다짐해야 합니다.


 만약 마하띳사 장로가 웃는 여인을 뼈로 인식하지 못했다면 인적 없는 숲속에서 욕정을 일으켜 유혹에 넘어갔을지도 모릅니다. 설사 당시에 성욕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여자의 남은 인상은 언제가 마하띳사를 유혹에 빠지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위빠사나 수행을 하며 닦은 뼈에 대한 관찰 덕분에 번뇌를 극복하고 윤회에서 벗어난 최종 해탈을 얻었습니다. 여기서 위빠사나를 통한 갈애의 소멸을 “부분적, 또는 일시적 소멸(tadanga-nibbuti)”이라고 하고 아라한과를 통한 갈애의 소멸을 “완전한 소멸”이라고 합니다.





43. 관찰과 소멸



 그리하여 느낌에서 생긴 갈애가 완전한 소멸되면 갈애의 모든 산물을 뜻하는 집착도 함께 소멸합니다. 무상· 고· 무아에 대한 관찰은 갈애, 집착, 업 등의 부분적 소멸을 보장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목적은 번뇌와 윤회고를 끝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는 완전한 해탈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주목할 만한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위빠사나 수행을 하지 않으면 보는 순간 마다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 갈애, 업, 재생에 이릅니다.


 보는 순간과 관련된 식(識)은 전생의 무명과 상카라[行]에서 기인합니다. 보는 행위는 식(識), 여섯 감각장소[六入], 감각접촉[觸], 느낌[受]과 함께 일어납니다. 경장은 이러한 각각의 법들을 인과관계의 측면에서 따로 따로 다루고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이들은 하나가 일어나고 다음 것이 개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식이 상카라에서 일어날 때는 식은 그에 해당하는 정신-물질[名色]과 여섯 감각장소[六入]과 감각접촉[觸]과 느낌[受]과 함께 일어납니다. 이 법은 과거 상카라인 업의 과보입니다.


그들을 과보의 회전(vipāka-vaṭṭa)이라고 합니다. 또 무명, 갈애, 집착이라는 번뇌의 회전이 상카라, 즉 업의 회전(kamma-vaṭṭa)을 일으킵니다. 이 업의 회전은 식(識), 정신· 물질[名色], 여섯 감각장소[六入], 감각접촉[觸], 느낌[受]라는 과보의 회전을 일으키고, 이 과보의 회전은 또 다시 번뇌의 회전(kilesa-vaṭṭa)142을 일으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보는 순간에 이 다섯 가지 과보143가 일어나는 것은 그냥 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실 보는 것은 식(識)과 정신· 물질[名色], 여섯 감각장소[六入], 감각접촉[觸], 느낌[受]의 과보이며, 이는 들음과 냄새 맡음 등의 다른 정신· 물질적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는 행위는 식(識), 주의 기울임[作意], 의도(cetanā), 그리고 정신·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 눈의 기관[眼根]을 포함합니다. 보는 행위는 또 눈의 감성, 형상[色], 안식(眼識), 마노의 대상[法]이라는 네 가지 감각장소[處]도 포함합니다.


형상[色]과 맞부딪치는 것이 감각접촉[觸]이며, 그 대상이 불러일으키는 즐거움, 혹은 괴로움이 바로 느낌[受]입니다. 그러므로 다섯 가지 과보가 모두 봄의 모든 순간과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들음과 냄새 맡음 등에서 생기는 다른 현상에 대해서도 똑같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44. 토대를 잘라냄



이 다섯 가지 정신-물질의 과보나 현상은 하나가 일어난 다음에 다른 하나가 끊임없이 일어나서 우리가 사람, 천신, 중생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합니다.


이것은 사실상 다섯 가지 정신-물질 무더기의 조합인 오온(五蘊)을 일컫는 관습적인 용어입니다. 견고한 단일체로서의 영원한 존재는 없습니다. 정신· 물질의 일어나고 사라짐만이 유일한 실재이며 ,이러한 통찰지는 사념처 수행자에게 보통 사람들의 경우 느낌[受]에서 비롯되는 갈애[愛], 집착[取], 업, 재생의 괴로움이라는 과보의 사슬이 멈춤을 뜻합니다.


 이것이 바로 느낌[受]을 조건으로 일어나는 갈애[愛]라는 핵심 연결고리를 제거함으로써 연기, 즉 삶의 수레바퀴를 멈추는 방법입니다. 보는 매 순간 느낌에서 갈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수행자는 여섯 감각기관[六入]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주시해야 합니다. 여기서 이러한 감각접촉[觸]들 가운데 가장 분명한 것이 거친 근본요소[四大]와 관련된 몸의 감촉144이므로 초보자는 몸의 감촉을 관찰하는 것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방법은 『중부』「염처경」(M10)에 나오는 부처님 말씀, 즉“걸을 때 걷고 있음을 꿰뚫어 안다, gacchanto vā-gacchamiti pajanāti”와 일치합니다. 어떻게 알까요? 수행자는 정신적으로“걸음, 걸음”을 주시하여 압니다. 수행자는 서고, 눕고, 팔을 굽히거나 그 밖의 다른 동작을 할 때에도 사념처 수행을 합니다. 주시할 몸의 행위나 움직임이 없을 때에는 배의 일어남과 꺼짐에 주의력을 모아야 합니다.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생각, 정신 활동이나 어떠한 느낌도 주시해야 합니다. 요컨대, 수행자는 여섯 감각기관[六根]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신-물질 현상을 반드시 알아차려야 합니다.


집중이 향상됨에 따라 그러한 알아차림은 무상· 고· 무아를 꿰뚫는 통찰지에 이르며 그 통찰지로 갈애가 생겨날 여지가 없게 됩니다. 갈애가 소멸함으로써 집착과 재생과 그에 뒤따르는 모든 괴로움도 끝이 납니다. 이것이 바로 근본 원인, 즉 갈애를 제거함으로써 윤회를 종식하는 방법입니다.


 오늘날의 과학과 기술은 작동방법을 모르면 작동시키거나 멈출 수 없는 기계를 발명하였습니다. 그 비밀을 아는 사람만이 핵심 버튼을 조작해서 기계를 돌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식으로 윤회의 기본은 연기법에서 설명된 것처럼 느낌[受]을 원인으로 한 갈애[愛]지만 느낌[受]이 산딴아누사야(santānānusaya)와 알람만아누사야(ārammaṇānusaya)라는 두 가지 잠재성향(anusaya)145과 결부될 때만 해당됩니다.


아라한은 이러한 잠재성향에서 벗어났으며 그래서 비록 아라한이 느낌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갈애는 소멸됩니다. 이렇게 갈애가 소멸되면 새로운 업이 일어날 여지가 없고 과거의 업은 중화되고 완전한 열반[般涅槃]에 든 다음에는 더 이상의 재생이 없습니다.

 

 하지만 범부는 어딘가에 잠복해 있는 악한 욕망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되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뜻하는 잠재성향의 번뇌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경향성을 일러 빨리어로 산딴아누사야 낄레사(santānānusaya-kilesa), 즉 오온(五蘊)의 흐름에 잠재해 있는 번뇌라고 합니다.


이러한 잠재성향의 번뇌는 정신-물질을 관찰하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 탐욕, 성냄, 어리석음과 다른 불선법으로 변해서 항상 하고, 행복하고, 자아가 있다는 전도된 인식에 놀아나게 만듭니다.


위빠사나 지혜가 없이 감각대상을 접하면 이러한 번뇌가 일어나고, 이것을 빨리어로 알람만아누사야 낄레사(ārammaṇānusaya-kilesa), 즉 감각대상에 잠재하는 번뇌라고 합니다.





45. 번뇌와 알아차리지 못함



 보거나 들은 것과 관련하여 일어나는 탐욕과 성냄은 두 번째 잠재성향이 발현된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인상은 항상 하거나 사랑스럽거나 혐오스러운 존재나 사물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상을 떠올리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생겨납니다.


 탐욕은 갈애의 다른 이름입니다. 탐욕은 즐거운 느낌에서 비롯하지만 괴로운 느낌 때문에, 우리가 즐거운 감각을 갈망할 때 생기기도 합니다. 어리석음도 자기만족, 애착, 갈애를 가져옵니다.


그렇게 탐욕, 성냄, 어리석음은 느낌[受]을 일으키고 그 느낌은 갈애와 그에 뒤따르는 윤회고를 일으킵니다. 오로지 봄, 들음 등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수행만이 감관의 즐거운 느낌에 대한 갈애와 그리워하는 마음이 일어날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수행을 닦지 않으면 갈애가 우리를 지배하고 지금 여기와 내생의 괴로움에 이르게 합니다.


「모라 본생경(Mora Jātaka)」(J.159)에서 공작이었던 보살은 아침에 일어날 때와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 호주(護呪)를 읊곤 했습니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공작은 700년 동안 사냥꾼이 놓은 덫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사냥꾼은 암공작을 미끼로 썼고 그 암공작에게 홀린 공작은 게송을 읊는 것을 잊고는 그만 덫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증지부』주석서(AA.i.16f)에 따르면 베나레스(Benares)에 굿띨라(Guttila)146라는 하프연주자가 소녀에게 사랑을 고백했지만 거절 당했습니다. 그러자 굿띨라는 소녀의 집 앞으로 가서 아주 감미로운 노래를 부르며 하프를 연주하였습니다. 음악에 도취된 소녀는 무턱대고 달려 나오다가 발부리가 걸려 넘어져 죽었습니다. 괴로움과 죽음을 야기한 것은「모라 본생경」에서는 여자의 목소리였고 『증지부』주석서에서는 남자의 목소리였습니다.


 누구도 듣는 것이 무상하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듣는 모든 것은 그 즉시 사라지지만 우리는 연속성 때문에 노래와 음악을 즐깁니다. 우리가 모든 소리를 “들음”“들음”이라고 정신적으로 주시하면 소리의 무상을 깨닫게 되기 때문에 즐거운 느낌이 갈애로 전환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집착과 모든 그 과보인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음을 뜻합니다. 


 수행처는 특별한 냄새가 나는 환경이 아닙니다만 수행자는 냄새를 주시하고 갈애가 일어나지 않음을 봅니다.


 먹을 때의 알아차림은 매우 중요합니다. 알아차림이 없는 사람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즐거워합니다. 그러한 즐거움을 좋아하고 앞으로 내생에도 그 즐거움을 갈구합니다. 맛있는 음식에 대한 갈애는 강력합니다. 이는 나쁜 음식을 먹고 사는 존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중부』「우현경(愚賢經 Bālapaṇḍita Sutta)」(M129)에 따르면 맛있는 음식을 먹는 즐거움 때문에 악한 행동을 한 사람은 풀과 잎사귀, 또는 사람 똥을 먹고 사는 축생으로 태어난다고 합니다.

 

 맛없는 음식을 먹는 것도 맛있는 음식에 대한 갈애를 유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먹을 때 손과 입의 모든 움직임과 모든 감각을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알아차림 수행으로 수행자는 자기 행동, 감각, 느낌을 알게 됩니다. 수행자는 이러한 방식으로  모든 것의 무상을 꿰뚫어 보고, 갈애와 그 갈애에 뒤따르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통찰지를 얻습니다.


 



46. 생각과 감촉



 감촉은 몸에 골고루 퍼져 있습니다. 생각도 수행자가 잠들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각과 감촉은 대개 위빠사나 수행의 관찰 대상이 됩니다. 수행자는 달리 주시할 것이 없으면 몸의 감촉을 관찰합니다.


 수행자는 비록 생각이  즐겁지 않거나 달갑지 않더라도 주시합니다. 수행 초보자는  망상이 아주 많지만 수행이 깊어지고 집중이 향상되면 으레 사라집니다. 어떤 수행자에게는 법에 대한 생각이 가끔씩 떠오르는데 이것도 주시해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에 대한 내관은 또한 무상을 꿰뚫어 보는 통찰지와 괴로움의 소멸을 약속합니다.

 

연기에 대한 법문과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설명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의아해 할 수도 있습니다. 연기법은 각 원인을 조건으로 생기는 결과의 사슬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목적은 이러한 원인과 결과의 상호작용에서 생긴 윤회의 고통을 어떻게 끝낼 수 있는가 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필요할 때는 언제나 수행을  이야기 합니다.


예를 들어 “무명은 상카라에 이르고, 상카라는 재생에 이른다.”라고 할 때, 무명을 제거하는 방법을 보여줘야만 합니다. 그리고 또한 결국엔 괴로움을 초래하는 식 등과 관련해서는 괴로움의 주된 원인인 갈애[愛]와 느낌[受]사이의 연결고리를 제거해야 함을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47. 세 가지 갈애



감각대상과 맞부딪쳐서 일어나는 느낌[受]을 바르게 관찰하지 않으면 (1)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2)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3) 비존재에 대한 갈애[無有愛]라는 세 가지 갈애가 일어납니다.

 

(1)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는 감각적 대상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욕계중생에게 가장 보편적인 것입니다.

(2)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는 상견(常見)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상견은 중생은 영원하고 육신이 무너지고 난 뒤에도 자아는 불멸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불교인들에게  상견은 뿌리 깊지 않지만, 불교도가 아닌 사람들은 대부분 이러한 상견을 집착하기 때문에 정신적인 자유에 주된 장애입니다.


대개 비불교인들이 가지는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영원한 자아에 대한 전도된 인식과 감각적 쾌락에 대한 사랑을 보면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3) 비존재에 대한 갈애[無有愛]는 단견(斷見)에서 비롯됩니다. 불교인들 가운데 이 단견을 지닌 사람은 없는데, 만약 이를 가지고 있다면 진정한 불교신자가 아닙니다. 비존재에 대한 갈애[無有愛]는 죽은 다음에는 생명의 흐름이 자동적으로 끝나기를 바라는 욕망과 유물론적인 인생관을 토대로 하는 쾌락에 대한 사랑을 뜻합니다.


 이 세 가지 갈애는 느낌을 내관하여 무상· 고· 무아를 깨닫지 못한데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갈애와 그 결과인 재생과 괴로움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현상을 관찰하여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48. 갈애[愛]를 조건으로 집착[取]이 일어난다



 갈애[愛]를 조건으로 집착[取]이 일어납니다. 빨리어‘우빠다나(upādana)’는 ‘강렬한, 극심한’이란 뜻의 ‘upa’와 ‘움켜쥐다, 잡다’라는 뜻을 가진 ‘ādāna’의 합성어이므로, ‘꽉 움켜쥠’즉 극심한, 지나친 갈애를 뜻합니다. 


집착은 (1)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kāmā-upādāna) (2) 사견에 대한 집착(diṭṭhi-upādāna) (3)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sīlabbata-parāmāsa-upādāna) (4)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atta-vāda-upādāna)의 네 가지가 있습니다.

 

(1)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kāmā-upādāna): 감각대상들은 감각적 쾌락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든 중생들의 욕망을 부추깁니다. 이러한 감각대상들은 형상[色], 소리[聲], 향기[香], 맛[味], 감촉[觸]의 다섯 가지입니다.

   

형상[色]은 눈에 즐겁고 매력적인 대상입니다. 그것은 원래 아름다움을 지닌 것 일수도 있고 보는 사람의 눈에 아름답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실재하거나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건 간에 즐거운 형상은 남자, 여자, 소비상품에서 발견됩니다.


남자를 매혹시키는 것은 여자의 모습이고, 여자를 매혹시키시는 것은 남자의 모습입니다. 남자와 여자 모두 원하는 것은 옷, 보석, 자동차등입니다. 욕망을 부추기는 것은 단지 형상이나 색깔만이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는 외모만이 아니라  몸 전체로 서로를 끌어당기며, 사람을 탐욕스럽게 하는 소비상품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형상이나 색깔이 단지 욕망의 대상을 이끌어 들이거나 확인해주는 역할만 하는 것은 마치 동물의 울음소리가 사냥꾼으로 하여금 쫒아가 찾아내도록 하는 것과 같습니다.

   

 감각적 쾌락의 대상으로의 소리[聲]는 남자와 여자의 소리, 노래나 음악으로 대표됩니다. 어떤 소리와 목소리는 참으로 감미로운 반면에 어떤 소리와 목소리는 귀에만 감미로운 것처럼 들릴 뿐입니다.


우리가 소리나 목소리를 들어서 즐거워 할 때 우리를 매혹시키는 것은 단순한 소리만이 아니고, 그 소리를 내는 전체 물건이나 존재가 우리가 집착하는 초점이 됩니다.

 

 감각적 쾌락으로써의 냄새[香]는 향기, 분말, 향수와 같은 냄새를 모두 포함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몸에 이러한 향료는 바르고는 이 냄새를 즐거워합니다. 사람을 매혹시키는 것은 단지 냄새만이 아니라 그 냄새가 나는 몸 전체입니다.


 먹거나 마시는 감각적 쾌락은 음식과 음료수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좋거나 즐거운 맛은 어쩌면 실재로 그럴 수도 있고 주관적으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돼지와 개, 다른 동물에게는 음식찌꺼기, 오물과 똥이 감각적 쾌락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쓰거나 매운 음식을 너무나도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은 술을 좋아합니다. 이들의 즐거움은 일반사람들의 취향과는 다르기 때문에 실재 그렇다가 보다 더 주관적입니다. 먹는 즐거움은 음식에만 국한되지 않고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과 그 음식을 준비하는 남자나 여자에도 집중됩니다. 이는 아내의 음식솜씨가 다른 사람에게는 깊은 인상을 주지 못하지만 아내가 준비하는 음식을 맛있게 먹는 즐거움에서 잘 드러납니다.


 감각적 쾌락의 또 다른 원천은 몸의 감촉입니다. 부드럽고 푹신한 침대, 편안한 옷, 겨울에 따뜻한 것과 여름에 시원한 것, 이성(異性)의 몸, 이 모든 들이 감촉에 대한 갈애만이 아니라 생명체나 무생명체의 몸 전체에 대한 갈애를 일으키는 감촉 대상입니다. 감촉은 오로지 몸 전체에 대한 집착에 이르게 할 뿐입니다.




 

49. 감각적 즐거움의 토대



 감각적 즐거움의 근원이 되는 유정물과 무정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금, 은, 보석, 쌀, 가축, 가금류, 자동차, 집, 땅, 시종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즐거움의 원천을 얻고자 매일같이 일합니다. 우리는 좋은 음식, 좋은 옷, 좋은 집을 얻고 영화를 보고 기타 등등을 하기위해 이러한 것들을 추구합니다.


 감각적 욕망인 갈애(taṇhā)는 대개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kāmā-upādāna)으로 발전합니다.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면 새로운 습관을 즐거워합니다만 그 습관이 커감에 따라 흡연자는 담배에 중독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극도로 좋아하면, 그것을 얻지 못할 때 마음이 불안해지고 좌절감에 빠집니다. 이러한 식으로 갈애가 집착으로 발전합니다.


 집착은 갈애 없이는 생기지 않습니다. 외국의 음악과 노래는 미얀마사람의 취향에 맞지 않기 때문에 미얀마사람은 이를 애타게 갈망하지 않습니다. 미얀마사람은 개고기도 먹지 않습니다. 미얀마사람들은 개고기를 혐오스러워 하기 때문에 개고기에 집착이 없습니다.


(2) 사견에 대한 집착


 또 다른 종류의 집착은 사견에 대한 집착(diṭṭhi-upādāna)입니다. 이는 세 번째와 네 번째 집착의 범주에 있는 것147을 제외한 모든 사견을 포괄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견은 집착으로 간주됩니다. 이제 사람들이 꽉 잡혀 있는 열 가지 사견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① 첫 번째 사견은 보시란 좋은 업을 짓는 행위가 아니고 단지 돈만 날리는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이 견해는 선행의 가치와 과보를 부정합니다만 사실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보시행은 보시자를 기쁘게 하고 보시 받는 자를 물질과 정신으로 이롭게 하고 심지어는 굶주린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데 도움이 되기 합니다. 보시자는 평판이 좋고 큰 존경을 받습니다. 그리고 죽어서는 천신계에 태어납니다. 이렇게 죽은 뒤에 받는 보상을 회의론자들에게 납득시키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업의 세속적 과보는 신통력을 가진 아라한과 다른 성자들은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통력의 하나는 하늘 눈[天眼]입니다. 이러한 하늘 눈[天眼]으로 보시자가 천신계에서 잘 살고 있는 것과 악행을 일삼은 비보시자는 악처에서 고통을 겪고 있음을 봅니다.


그러한 광경은 신통력을 얻지는 못했지만 깊은 삼매를 얻은 일부 수행자들도 볼 수 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이러한 광경을 상상의 산물이라고 치부해버리겠지만 저 세상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를 수긍하는 것은 이야기의 신빙성에 더 무게를 싣는 것입니다.

 

② 두 번째 사견도 또한 큰 규모의 보시가 가져오는 업의 이익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③ 세 번째 사견은 새해를 맞이하여 손님을 대접하고 선물을 주는 등의 행위가 가져오는 업의 이익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 사견은 본질에 있어서 첫 번째 사견과 같습니다. 이는 당시 외도(外道)들이 무익하다고 치부해버린 고대 인도에서 성행하던 작은 보시행을 가리킵니다.


④ 네 번째 사견은 도덕적인 선행이나 악행이 가져오는 업보를 부정하는 견해(akiriya-diṭṭhi)입니다. 사람이 현생에서 짓는 행위에 대해 받는 업보와 다른 세속적인 과보에 대한 증거가 많이 있으며, 신통력으로 그것을 입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감각적 쾌락을 너무나도 좋아하는 사람들은 욕망에 그냥 내맡겨 두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물질적 향상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되는 도덕적 가치와 이상에 눈살을 찌푸립니다. 그래서 그들은 업의 법칙을 부정하는 자신의 견해를 정당화하기 위해 많은 논리를 제시합니다. 최종적인 분석결과 이는 그들이  감각적 쾌락을 지나치게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⑤ 다섯 번째와 ⑥ 여섯 번째 사견은 어렸을 때 우리를 사랑으로 돌보아준 부모에게 입은 은혜에 표하는 공경이나 경의, 후원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쩌다가 성관계를 맺어서 애를 가졌고 책임감에서 애를 키운 것이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감사해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를 돌보아 드리는 게 선행도 아니며 부모에게 못되게 구는 것도 죄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끔찍한 견해로 이러한 사견을 지닌 사람은 자신의 아이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⑦ 일곱 번째 사견은 인간계와 축생계를 제외한 다른 중생계를 부정합니다. 이 사견은 동물이 인간으로 재생할 수도 있다는 견해를 부정합니다.


⑧ 여덟 번째 사견은 인간이 천신계나 축생계, 또는 지옥에 재생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죽으면 삶이 끝난다는 단멸론(斷滅論)을 가르칩니다.

 

⑨ 아홉 번째 사견은 화생(化生)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모태에 들지 않고 완전히 성장한 성체를 지니고 나타나는 천신, 범천, 아귀, 아수라등과 같은 존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세계 도처에서 선하거나 악한 유령과 만났다는 보고가 있고 유령, 천신, 범천 등을 불러올 수 있는 무당과 심령술사가 있으며, 이들은 때로 위빠사나를 닦는 수행자에게 보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 견해는 지지할 수 없습니다. 


⑩ 열 번째 사견은 이 세상과 보이지 않는 저 세상을 설하고 자신들의 가르침에 충실한 사문이나 바라문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견해는 스스로의 실제적이고 남다른 경험을 토대로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독자적으로 설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그들의 모든 가르침은 다 추측과 공론이어서 거짓이며 삿된 것임을 뜻합니다.


 오늘날 이 견해는 종교를 조롱하는 사람들에 의해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부처님과 아라한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하지만 이 견해에 근거하고 있는 논리는 자기 당착적이고 파멸적입니다. 왜냐하면 이 견해를 지니고 있는 사람도 역시 이 세상과 저 세상에 대해 진정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똑같은 사유를 통하여 우리는 이 견해를 부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법은 최상의 지혜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법은 체험적인 조사에 적합하며, 불법을 증명할 만한 과학적인 증거가 많이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인도에서 불가지론(不可知論)148을 편 사람은 아지따(Ajita)였습니다.   아지따는 무조건 모든 종교의 가르침을 싸잡아 공격했으며 아라한과 부처님 또한 그러한 비난의 대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50. 바른 견해[正見]



 이 열 가지 사견은 결국은 업의 법칙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업의 부정은 보시행이나 효도나 다른 선행에서 얻어지는 공덕과 아라한과나 부처님의 지위를 얻기 위한 업의 잠재력을 부정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10가지 바른 견해[正見]는 업, 즉 도덕적 과보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1) 첫 번째 바른 견해는 보시는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보시자는 적어도 보시 받는 사람들이 칭찬합니다. 그렇게 보시를 받은 사람들은 보시자를 칭찬하고 보시자가 곤경에 처했을 때 도와줄 것입니다. 보시자는 좋은 임종의 표상을 지닌 채 평온하게 죽어서 천신계나 인간계의 좋은 생으로 태어납니다. 좋은 재생을 통하여 언젠가 보시자는 성스러운 도와 열반에 이를 것입니다. 부처님, 벽지불, 아라한의 목표에 이르는 기나긴 정신적인 여정을 시작한 보살과 다른 사람들은 대개 보시행과 함께 했습니다.


 보시의 과보는 일부 사람들의 물질적 번영을 보아도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업, 농사 등의 똑같은 일을 하는데 결과가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번창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나아지는 점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힘들이지 않고서도 성공을 이루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힘들게 일하고도 번영하지 못합니다. 다른 요소가 같다면 사람들의 재산 형성이 각기 다름은 의심할여지 없이 전생의 보시여부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2)와 (3)의 견해는 업의 법칙을 믿는 사람은 아낌없이 보시하거나 손님 접대, 선물을 주는 것과 같은 작은 보시행에서 오는 업의 과보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는 것입니다.


 (4) 이러한 세 가지 바른 견해는 도덕적 과보, 즉 업의 법칙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선행이나 악행에 따라 대접받는다는 것은 삶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부모와 스승의 지도에 따라 올바른 삶을 사는 사람은 인기를 얻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고 성공을 이루며 장성했을 때 성공한 신사가 됩니다. 이와 유사하게 전생에 이룬 선업으로 좋은 집안에 태어나 건강, 재산, 신체적인 아름다움, 참된 친구와 같은 축복을 얻습니다. 악업의 나쁜 효과는 병약함, 가난, 용모의 추함 등입니다.


 (5)와 (6)의 견해는 업에 대한 믿음은 또한 부모님에게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인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부모님은 임신한 순간부터 아이를 잘 보살핍니다. 어머니는 태안에 있는 아기를 위해 모체의 건강과 먹는 음식, 동작에 특별히 주의합니다. 만약 어머니가 좋은 불교신자라면 아이에게 정신적인 영향을 주고자하는 마음에서 포살일149을 지키며 부처님과 법과 승가를 생각합니다.


아이가 태어난 뒤에도 부모는 아이의 물질적 요구를 챙겨줘야 하고 교육을 시켜서 성년이 되면 살아갈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지원해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의 부모님을 공경하고 돌봐드리는 것은 우리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그리고 이는 헤아릴 수 없는 이익을 주는 선업입니다. 자기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은 아무리 못해도 자기 자식에게 공경을 받을 것입니다. 반면에 자기 부모를 박대하는 사람은 자기 자식들이 멸시할 것입니다.




 

51. 저 세상을 봄



 (7), (8), (9)번 견해는 이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 화생(化生)으로 생겨난 천신과 같은 중생에 대한 바른 견해입니다. 이러한 바른 견해에도 또한 업의 법칙에 대한 믿음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업의 법칙으로 중생은 죽은 뒤에 자신의 업에 따라 축생계나 천신계에서 사람으로 태어나거나 반대로 사람이 동물이나 천신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어느 정도까지는 증명할 수 있지만, 관찰하는 수행자는 신통력이나 위빠사나 지혜, 또는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닐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마타 선을 수행하면 수행자는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고, 죽어서 새로운 존재가 된 사람의 모습 따위를 분수 있는 하늘 눈[天眼]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통력은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사람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마타나 위빠사나 수행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추론의 힘에 의존해야 합니다.  여기저기에 자신들의 전생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으며, 불전(佛典)에는 태어남을 기억하는 지혜(jātissara-ñāṇa)150를 얻은 사람으로 나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사람, 동물, 유령, 귀신으로 살아온 자신의 전생을 이야기 합니다. 합리적인 사고를 해보면 이러한 전생의 이야기는 죽은 다음에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거나 반대로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오고, 또 어떤 중생들은 곧바로 화생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가리킵니다.

 

여기서 현자가 제시한 내생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방법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한 사람은 업과 내생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이고 또 다른 사람은 그러한 믿음을 부정한다고 가정해 봅니다. 업과 내생에 대한 믿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보시와 지계와 같은 선업을 짓지 않을 것이며 악업 짓기를 삼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는 욕망에 자신을 내맡겨 버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들이 존경하고 찬탄할 만한 어떠한 덕성도 없습니다. 만약 자신의 믿음과 반대로 업과 내생의 법칙이 사실이라면 그는 악처에 떨어질 것이며 윤회를 하면서 많은 생 동안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반면에 업과 내생을 믿는 사람은 악업을 삼가고 선업을 지을 것이며, 설사 업이나 내생이 없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덕성으로 인해 칭찬과 높은 명성을 얻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선업을 관찰하면 기쁨이 생길 것입니다. 선한 시민으로써 그는 평화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이익은 분명코 그가 현생에서 가지는 업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내생이 사실이라면 그는 내생의 행복을 보장받습니다. 어쨌든 내생에 대한 믿음은 현생이나 내생에서 이익을 가져오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부』「무희론경(無戱論經 Apannaka sutta)」(M60)에서 부처님이 권하신 절대 오류가 없는 사유 방법입니다.





52. 바라밀과 업



(10) 이 세상과 저 세상에 대한 최상의 지혜를 선언할 수 있고 자신의 가르침을 믿도록 할 수 있는 거룩한 덕성을 지닌 부처님과 아라한, 또는 성자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도 또한 업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왜냐하면 아라한과 부처님들의 영적인 성취는 본질에 있어 업과 다르지 않은 스스로의 바라밀에 부분적으로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바라밀을 계발하는 것은 일종의 배움입니다. 마치 아이가 교육 잘 받은 사람이 되기 위해 많은 것을 배우는 것처럼 보살도 깨달음을 얻기 위해 지혜를 구하고 바라밀을 닦아야 합니다.


 어떤 부모와 어른들은 자기 아이를 영화관이나 극장에 데리고 가는 반면 다른 부모와 어른들은 파고다와 절에 데리고 갑니다. 이렇게 해서 아이들은 좋거나 좋지 못한 습성을 기르게 되고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를 일으키거나 삶의 숭고한 것을 경험합니다. 좋은 습성과 좋은 수련은 일종의 바라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종교적인 삶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커다란 열정과 노력으로 위빠사나 수행을 합니다. 이러한 아이의 종교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나 어떤 사람의 영적인 삶에 대한 남다른 사랑은 전생의 바라밀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싯달타 태자는 수많은 겁(劫)에 걸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삶을 거치면서 보시, 지계, 출리 등과 같은 바라밀을 완성하고 점진적으로 계발함으로써 부처님이 되셨습니다. 한 생에서 쉽게 이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태자가 깨달음을 얻고자 호화로운 왕궁과 가족을 버릴 때, 그 의지를 다지게 한 것은 바로 축적해온 잠재업력, 즉 바라밀이었습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환멸을 이야기하지만 위대한 보살의 출가는 고사하고 모든 재산을 다 버리고 비구가 되는 것도 힘든 일입니다.


 보살은 지혜를 얻기 위해 여러 전생을 거치면서 꿋꿋하게 열과 성을 다해 다른 바라밀도 닦았습니다. 그 결과 마지막 생에 보살은 삶의 본성과 연기 등을 혼자서 성찰하고 깨달았습니다. 보살이 마침내 위없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보살의 바라밀 때문이었으며, 벽지불과 아라한의 영적인 성취가 있게 된 것도 바라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업에 대한 믿음으로 정신적인 진보에 큰 뜻을 품은 사람은 아라한, 벽지불,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것이고 업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부처님과 다른 성자들의 최상의 지혜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습니다.


 요약하면, 사견에 대한 집착(diṭṭhi-upādāna)은 대개는 업의 법칙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이는 부처님 당시나 불과 백 년 전만 하더라도 그리 보편화되지는 않았던 사상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과학적 지식이란 미명하에 업의 법칙을 비판하는 책들로 인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습니다.


경전 말씀대로 사견은 대체로 갈애에 뿌리를 두고 있고 물질에 대한 인류의 증대하는 갈망과 함께, 업에 대한 회의주의는 점점 커져가는 것 같습니다. 이들 사견에 맞서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은 선한 사람들에게 달렸습니다.

 

 업을 부정하는 것은 별개로 하고, 이 사견에 대한 집착은 유신견(有身見), 단견(斷見)등과 같은 모든 사견에 대한 강한 집착을 또한 뜻합니다. 예외는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sīlabbata-upādāna)과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atta-vāda-upādāna)입니다.





53.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sīlabbata-upādāna)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지 않는  그릇된 수행에 집착하는 것을 말합니다. 소와 개, 다른 동물들의 습관을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수행과 동일시하는 견해가 바로 그릇된 수행입니다. 이것은 부처님 당시의 일부 고행자에게서 발견되는 견해입니다. 고행자들은 동물처럼 발가벗고, 먹고, 똥을 누고, 네발로 기어 다니고, 맨땅 위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렇게 하면 모든 악업이 정화되고 새로운 업이 생기지 못하며, 죽은 뒤에 괴로움에 종지부를 찍고 영원한 지복이 보장된다고 믿었습니다.


 불교신자에겐  믿기지 않겠지만, 어떤 사람들의 취향은 아주 이상하여 보통사람과 다릅니다.『중부』「견서계경(犬誓戒經 Kukkuravatika Sutta)」(M57)에 따르면 소처럼 사는 뿐나(Puṇṇa)와 개처럼 사는 세니야(Seniya)라는 두 고행자가 부처님을 찾아 왔습니다. 뿐나와 세니야는 부처님에게 자신의 고행으로 무슨 이익을 얻는지를 여쭈었습니다.


세존께서는 대답하기를 꺼려하셨지만 재차 간청을 받자 완전히 소나 개처럼 사는 고행자는 죽어서 소나 개로 태어날 것이며, 그러한 수행으로 천신계에 이른다고 믿는 것은 잘못이며 그러한 사견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죽어서 지옥이나 축생계에 떨어지기 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부처님께서는 (1) 나쁜 과보를 맺는 나쁜 수행 (2) 선한 과보를 맺는 선한 수행 (3) 선한 수행과 섞여 있는 나쁜 수행 (4) 선업과 악업의 완전한 소멸로 인도하는 성스러운 도의 수행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설법을 들은 뿐나는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으며, 세니야는 승가에 들어가서 법을 닦아 아라한과를 얻었습니다.151



  


54. 꼬라캇띠야 이야기



 부처님 당시에 개처럼 사는 꼬락캇띠야(korakhattiya)라는 고행자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부처님께서 릿차위(Licchavī)152 의 후예 수낙캇따(Sunakkhatta)153라는 비구와 함께 그 고행자 옆을 지나가셨습니다.


수낙캇따는 그 고행자가 네발로 기어 다니면서 땅바닥에 있는 음식을 손을 사용하지 않고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고행자의 삶의 방식은 성자, 아니 아라한이라는 인상을 수낙캇따에게 주었습니다. 사실, 그 고행자의 삶의 방식은 사악도 중 하나에 떨어지게 하는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sīlabbata-upādāna)의 일종으로 높은 이상과 염원을 자닌 사람에게는 용납이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수낙캇따가 이에 감명을 받은 것은 그의 낮은 취향과 욕구 때문이었습니다. 릿차위 비구는 이런 면에서 유별한 인물입니다. 그 당시에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합되지 않는 삿된 견해와 삿된 수행을 선호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는 아마도 여러 전생을 거치며 삿된 집착을 지녀온 버릇이 남아서일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타심통(他心通)154으로 수낙캇따의 생각을 아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너는 저 고행자를 아라한으로 보는구나! 그러고도 네가 여래의 제자155라고 서원을 하느냐?”그러자 수낙캇따는 세존께서 고행자가 아라한이란 것을 시기한다고 비난했습니다. 물론 이는 누가 자신의 그릇된 스승에 대해 진실을 말해줄 때 어리석은 사람이 하는 반박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낙캇따에게 이익됨이 없는 전도된 인식을 없애주기 위한 것이 목적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는 7일 뒤에 그 고행자가 소화불량으로 죽어서 가장 낮은 아수라계에 떨어질 것이고, 시체는 어떤 묘지에 버려질 것인데, 수낙캇따가 그곳에 가서 지금 어디에 사냐고 묻는다면 시체가 알려줄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낙캇따로 하여금 여래에 대한 믿음을 되찾게 하려고 이러한 예언을 하신 것입니다. 수낙캇따는 사마타 수행을 해서 선정과 하늘 눈[天眼]을 얻었습니다. 이 하늘 눈[天眼]으로 수낙캇따는 남자 천신과 천녀를 보았지만 그들의 소리를  듣고 싶어서 부처님께 하늘 귀[天耳]를 얻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수낙캇따의 악업 때문에 하늘 귀[天耳]를 얻지 못하리라는 것을 아신 세존께서 그 청을 들어주지 않으시자, 수낙캇따는 세존은 하늘 귀[天耳]를 얻지 못했다고 비난했습니다.156 그럼에도 불구하는 수낙캇따는 세존이 자기 요청을 들어주지 않은 것은 시기심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세존에 대한 믿음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수낙캇따에게 감화를 주고 믿음을 회복시켜 주기 위해 고행자의 운명을 예언하셨던 것입니다.


 수낙캇따는 고행자에게 세존의 예언을 알려주며 과식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고행자는 6일을 굶었지만 7일째 되는 날에는 더 이상 먹을 것의 유혹을 참지 못하였습니다. 고행자는 한 재가 신도가 제공한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고는 그날 저녁 소화불량으로 죽었습니다.


 동료 고행자들은 부처님이 예언하신 묘지가 아닌 다른 장소에 내다 버리려고 그의 시체를 끌고 갔습니다. 묘지에 도착해보니 부처님이 예언하신 종류의 풀이 있어서 자신들이 피하려 했던 바로 그 장소임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은 시체를 끌고 가려고 했지만 덩굴 풀에 얽혀서 풀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지만 허사였습니다. 그래서 고행자들은 시체를 그냥 거기에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낙캇따도 그 소식을 들었지만 그래도 세존께서 하신 예언의 뒷부분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묘지로 가서 시체를 툭 툭 두드리면서 어디에 사느냐고 물었습니다. 시체는 일어나서 깔라깐지까(Kālakañjika) 아수라계에 있다고 말하고는 다시 땅바닥에 쓰러졌습니다. 깔라깐지까는 가장 낮은 아수라계입니다. 아수라는 괴물처럼 생기고 입이 너무 작아 제대로 먹거나 마실 수 없는 일종의 아귀입니다.


 주석서에 따르면 아수라인 아귀가 시체에 깃들게 된 것은 부처님의 신통력 때문이었다고 합니다.157 어떤 심령술사는 시체를 일으킬 능력이 있음을 감안한다면 부처님께서 신통으로 죽은 고행자를 부활시킨 것에 대해 의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수낙캇따는 풀이 죽어서 돌아왔고 세존의 예언이 모두 사실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낙캇따는 부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환속하여 세존을 비방하였습니다.

 




55. 다른 계율과 의식에 의한 수행



소와 개처럼 사는 것 외에도 잘못된 계율과 의식(sīlabbata)158이라고 할 만한 다른 수행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코끼리나 말과 같은 동물을 흉내 내기도 하고 동물을 숭배하기도 합니다. 주석서에는 미얀마 사람들이 다양한 낫을 숭배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는 왕 숭배자를 들고 있습니다.


미얀마 사람들이 낫을 숭배하는 것은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물질적인 이익을 얻기 위한 바람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sīlabbata-upādāna)의 범주에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이 낫 숭배를 위해서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입니다.


불 숭배, 용 숭배, 달 숭배, 태양 숭배, 정령 숭배 등도 있습니다. 숭배의 목적이

죽어서 행복을 얻거나 영적인 해탈을 위한 것이라면 이는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입니다. 요컨대, 사성제나 팔정도에서 벗어난 모든 수행은 그릇된 계율과 의식으로 분류되고 구원에 이르는 방법으로 거기에 집착하는 것이 바로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입니다.


 정신-물질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적어도 예류자가 된 수행자는 열반에 이르는 바른 길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잘못된 계율과 의식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그는 정신-물질에 대한 내관과 팔정도의 실천만이 괴로움의 종식에 이르는 길이란 것을 체험으로 압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이 우리 선원에서 쉐다곤 파고다까지 체험으로 어떻게 가는지를   안다면 누가 잘못된 길을 알려줘도 그릇된 길로 가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류자가 된 수행자는 열반에 이르는 바른 길을 알기에, 구원에 이르는 도로 통하는 신에 대한 신앙, 낫 숭배, 고행과 같은 믿음과 수행에 대하여 전도된 인식을 가지지 않습니다.


 바른 길을 모르는 사람은 그러한 전도된 인식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들은 어리석은 부모나 스승이나 친구의 영향으로 그런 전도된 인식을 가졌거나 기본적인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릇된 견해나 수행을 설하는 책을 통해서 호도되었을 것입니다.


범부는 열반에 이르는 바른 길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윤회하면서 수많은 스승과 수행법을 쫒아 다녀야만 할 것입니다. 만약 그릇된 스승이나 수행법에 빠지면 심한 괴로움을 겪을 뿐입니다. 고행은 단지 고난과 고통만을 가져오고, 동물을 공희제(供犧祭)의 제물로 희생시키면 반드시 악처에 떨어집니다.

 

 색계선정이나 선정이 완전한 구원임을 뜻한다고 믿는 것도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입니다. 요컨대, 심지어는 완벽한 계행이나 세간의 선정을 성취하는 것도 칭찬할 만하지만, 그것이 위빠사나의 성스러운 도를 벗어나 있고, 또 그것 자체를 완전한 해탈로 여긴다면,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에 이를 수 있습니다.


『상응부』 「웃다까경(Udaka Sutta)」(SN.xiii.04)에는 무색계 선으로 무색계에 이르러 괴로움의 원인을 근절하고 괴로움을 종식시켰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는 또 다른 사문 알라라(Ālāra)의 전도된 인식이기도 했습니다. 이 전도된 인식, 즉 집착 때문에 그들의 선업은 무색계에 재생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범천 바까(Baka)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나는 욕계, 색계, 무색계에 내재하고 있는 태어남, 늙음, 죽음의 위험을 본다. 나는 열반을 추구하는 이들이 여전히 존재에 얽매여 있음을 보기 때문에 어떠한 존재도 환영하지 않고 즐김을 움켜쥐지도 않는다.”(M.i.330)

 

 두 선인과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는 자는 자신의 목표를 절대로 이루지 못합니다. 비록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릇된 계율과 의식(sīlabbata)의 도를 걷기 때문에 윤회고에서 허우적거리며 헤어 나오질 못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바른 도를 걷는 바른 노력[正精進]은 매우 중요합니다.


 



56.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atta-vāda-upādāna)은 아따와다(atta-vāda)와 우빠다나(upādāna)의 합성어입니다. 아따와다(atta-vāda)는 자아의 교리, 즉 영혼의 실재에 대한 믿음을 뜻하기 때문에 아따와다 우빠다나(atta-vāda-upādāna)는 바로 모든 사람은 살아있는 영혼이라고 보는 견해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은 일반적인 집착과 깊게 뿌리박힌 집착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어리석은 불교신자들에게 팽배해있는 일반적인 집착은 성스러운 도를 닦아가는 데 해롭지는 않습니다. 불교신자는 영원한 영혼을 부정하고 정신-물질만이 중생에 내재하는 유일한 실재로 인정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아의 교리는 깊게 뿌리박혀 있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불교신자는 더 더욱 이 자아의 교리에 빠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고 듣는 것은 오직 눈(眼)과 귀[耳]의 감각기관들, 그에 상응하는 형상[色]과 소리[聲]의 감각대상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안식(眼識), 이식(耳識)과 서로 결부되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신견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위빠사나를 닦는 수행자도 때로는 유신견에 빠질 수 있으며, 성스러운 도를 얻지 않은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사실 유신견을 가르쳤던 사람들은 자아를 자유의지와 스스로의 결정권을 지닌 오온(五蘊)의 주인으로, 독립적인 실재로 설명했습니다.『중부』「짧은 삿짜까경(Cūla-Saccaka Sutta)」(M.i.227ff)에서 부처님께서 유행승(遊行僧)159 삿짜까(Saccaka)와의 대화 속에서 물으신 것도 바로 이 유신견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너는 이 몸이 너의 자아라고 하는데 그러면 이 몸을 항상 잘 간수하고 즐겁지 못한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느냐?”삿짜까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세존께서는 계속해서 질문 하tu서 사실상 오온 중의 어느 것에 대한 통제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답변을 유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옛 불교스승들은“물질은 무아다, rūpam anatta"를 “육체적 몸은 통제를 받지 않는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사실 이는 통제하는 실재로서의 자아(sāmīatta)에 대한 그릇된 견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범부들은 다 이 견해를 지니고 있으며 자유의지를 믿습니다. 오직 위빠사나 관찰을 통해서만 이러한 견해를 완전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자아에 대한 교리(atta-vāda)를 가르치는 스승들은 자아가 육체적인 몸에 영원히 존재한다고 설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는 전 존재의 일생에 걸쳐 지속한다고 하는 개체의 동일성을 뜻합니다.


 게다가 그들은 자아란 모든 행위의 주체라고 하고 상카라의 무더기[行蘊]와 동일하게 봅니다. 이는“보고 듣는 것은 나이다.”라는 믿음을 일으키는 전도된 인식입니다. 그들은 또한 자아는 느끼는 살아있는 실재이며 행복해하거나 불행해 하는 것은 자아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자아, 즉 영혼을 느낌[受]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자아의 교리를 주장하는 자(atta-vādī)가 자아와 오온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더라도 자아를 몸의 주인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자아는 몸 안에 영원히 머물고 있고, 주관자이며, 느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 그들은 자아를 오온(五蘊)과 동일하게 여깁니다. 자아에 대한 전도된 인식은 오온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관찰을 통해서 오온의 진정한 본성을 알게 될 때에만 비로소 그러한 전도된 인식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습니다.


 네 가지 집착 가운데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kāmā-upādāna)은 갈애(taṇhā)의 발전된 형태입니다. 다른 세 가지 집착은 그들의 대상에 따라 다를 뿐입니다. 이러한 집착은 기본적으로 유신견, 팔정도 이외의 수행이 효율적이라는 믿음, 다른 두 가지 집착(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과 사견에 대한 집착)의 범주에 드는 수행 이외의 모든 그릇된 믿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릇된 믿음은 갈애와 관련되어 일어납니다.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믿음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네 가지 집착은 의심할 여지없이 갈애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일어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 갈애가 원인이고 집착이 그 결과입니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유신견, 또는 성스러운 도와 무관한 수행이나 다른 그릇된 믿음이 원인이고 이 갈애는 감각적 쾌락, 유신견등에 대한 집착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결과가 됩니다.




57. 집착[取]을 조건으로 존재[有]가 일어난다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일어납니다. 존재(有 bhava)에는 (1) 업으로서의 존재(業有 kamma-bhava)와 (2) 재생으로서의 존재(生有 upāpatti-bhava)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업으로서의 존재(業有 kamma-bhava)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는 재생에 이르는 업을 뜻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낮은 욕계나 높은 색계와 무색계에 이르는 ①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a-abhisaṅkhāra) ②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apuñña-abhisaṅkhāra) ③ 흔들림 없는 행위(aneñja-abhisaṅkhāra)로 설명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를 새로운 생이 일어나게 하는 업과 동일하게 보셨습니다.


이 세 가지 행위 중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a-abhisaṅkhāra)는 욕계에서의 여덟 가지 선한 의도(cetanā)와 색계에서의 다섯 가지 선한 의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apuñña-abhisaṅkhāra)는 12가지 불선한 의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apuñña-abhisaṅkhāra)는 무색계에서의 네 가지 선한 의도를 뜻합니다.


또 재생에 이르게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재산에 대해 탐내는 생각이나 의도, 다른 사람의 삶을 해치려는 의도가 없으며, 바른 견해[正見]을 가지고 있는  색계의 선한 의도와 함께 일어나는 업들입니다.


이러한 업은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a-abhisaṅkhāra)에 내재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는 재생에 이르는 선하거나 악한 의도입니다.



(2) 재생으로서의 존재(生有 upāpatti-bhava)


재생으로서의 존재[生有]는 9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① 욕계 중생의 정신-물질을 뜻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재생으로서의 존재[生有]는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천신계의 존재를 가리킵니다. ② 색계존재(色界有 rūpa-bhava)는 물질[色]이 없는 범천의 오온(五蘊)입니다. ③ 무색계존재(無色界有 arūpa-bhava)는 물질[色]이 없는 범천의 정신 무더기[名蘊]입니다. ④ 인식을 가진 존재(想有 saññi-bhava)는 거친 인식[想]의 존재, 즉  무상유정천과 비상비비상천을 제외한 29가지 존재들의 정신-물질입니다.


⑤ 무상유정의 존재(無想有情有 asaññri-bhava)는 무상유정천의 정신-물질입니다. ⑥ 비상비비상의 존재(非想非非想有 nevasaññinasaññi-bhava)는 가장 높은 범천의 정신 무더기의 존재입니다. ⑦ 하나의 무더기를 가진 존재(一蘊有 ekavokāra-bhava)는 물질의 무더기[色蘊]뿐인 존재입니다. ⑧ 네 무더기를 가진 존재(四蘊有 catuvokāra-bhava)는 네 가지 정신의 무더기[名蘊]의 존재입니다. ⑨ 다섯 무더기를 가진 존재(五蘊有 pañcavokara-bhava)는 오온으로 구성된 존재입니다.



요컨대, 재생으로서의 존재[生有]는 업에서 비롯된 새로운 생의 정신-물질[名色]을 뜻합니다. 그것은 식(識), 정신-물질[名色], 여섯 감각장소[六入], 감각접촉[觸], 느낌[受]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집착[取]에서 일어나는 존재[有]는 기본적으로 업으로서의 존재[業有]이며, 재생으로서의 존재[生有]는 업으로서의 존재[業有]의 부산물일 뿐입니다.


 즐겁거나 괴로운 여섯 감각대상[六境]과 맞부딪쳐서 즐겁거나 괴로운 여섯 느낌[受]이 일어납니다. 느낌[受]은 갈애[愛]를 일으키고 갈애[愛]는 집착[取]으로 발전하며, 감각 대상에 대한 집착이 너무 지나치면 내생에 한 집안사람들이 함께 만나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 열반을 함께 성취하려는 갈애까지 이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지나친 집착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은 멘다까(Meṇḍaka) 장자의 이야기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58. 멘다까 이야기



멘다까는 전생에 부유한 장자였습니다. 기근이 닥치자 비축해둔 양식은 점차 줄어들어 마침내 시종들을 모두 내보내야 했고, 나중에는 부인과 아들, 며느리, 머슴 한 명만 남았습니다. 멘다까의 아내는 그들이 먹기에만 겨우 충분한 밥을 지은 후 막 그 밥을 먹으려던 찰나 벽지불이 탁발을 하러 왔습니다.


 벽지불을 보자 장자는 전생에 보시를 소홀히 하여 현생에 배고픔으로 허덕이게 된  자신의 악업을 떠올렸습니다. 장자는 벽지불에게 자신의 몫인 밥을 보시하고 음식의 풍족함과 내생에도 가족들과 함께하기를 기원하였습니다. 장자의 아내도 자신의 밥을 보시하고 비슷한 기원을 하였습니다. 그 아들과 며느리도 따라서 보시하면서  양식과 돈의 다함이 없는 공급과 같은 아내, 남편, 부모와 머슴들이 다시 상봉하기를 기원했습니다.

 

 장자와 그 가족의 기원은 욕계의 강렬한 집착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도 같은 집착에 얽매어 있습니다. 하지만 보다 섬뜩한 것은 머슴 뿐나의 집착입니다. 자신의 밥을 보시하면서 뿐나는 음식의 풍족함과 함께 내생에도 지금의 집안에 머슴으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빌었던 것입니다! 그는 왕이나 장자로 다시 태어나고픈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의 주인과 주인마님에 대한 집착은 너무나도 강해서 내생에도 오로지 그들의 머슴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한때 정부 관리에게 평판이 좋았던 촌장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미얀마는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때라서 대부분의 고위 관리들은 영국인이었습니다. 촌장은 그들에게 경례하는 것을 무척이나 즐거워했습니다. 촌장은 관리가 자신을 부를 때 "예, 주인님(phayā)”하고 답하는 것이 즐겁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집착은 본질에 있어 뿐나의 집착과 같습니다. 

 

 벽지불은 그들을 축원해주고 떠났습니다. 벽지불의 신통력으로 그들은 벽지불이 히말라야로 날아가서 다른 500명의 벽지불들과 음식을 나누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로 그날 장자와 그 가족들은 자신의 보시행이 놀라운 과보를 맺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쌀독이 쌀로 가득 찼고, 만족할 때까지 먹어도 쌀은 언제나 넘쳐 났습니다. 또 곡물 창고도 곡식으로 가득 차 넘치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고따마 부처님 당시에 마가다국161의 밧디야(Baddiya)시에서 똑같은 가족 구성원이 됨으로써 그들의 기도는 성취되었습니다. 그들의 기도가 성취되었다는 소식은 너무나도 신기하고 놀라운 것이어서 왕은 대신에게 조사해보도록 하였고 그것은 정말로 사실임이 판명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율장에 나옵니다.





59. 집착[取]과 업으로서의 존재[業有]



한 대상에 대한 감각적 욕망이 강렬한 갈애로 발전하면, 사람은 필사적이 되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을 손에 넣고자 합니다. 오늘날 만연하고 있는 도둑, 강도, 사기행각, 살인 등은 집착에서 비롯됩니다.


어떤 범죄는 감각적인 집착에 뿌리를 두고 있고 또 어떤 범죄는 집착에 토대를 둔 세 가지 전도된 인식 중의 하나에서 비롯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불선한 욕망뿐 아니라 아내나 남편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다음에 나오는「뿝파랏따 본생경(Puppharatta Jātaka)」(J.147) 이야기는 감각적 집착에서 비롯되는 불선한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60. 뿝파랏따 본생경



아주 오래전 베나레스에 가난한 사내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두꺼운 옷 한 벌밖에 없었는데 카띠까(Kattika) 축제기간에 입으려고 그 옷을 세탁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흰옷을 싫어하고 분홍색 옷을 간절히 원하였습니다. 아무리 아내를 설득해도 안 되자, 사내는 결국 아내의 옷을 염색하는데 쓰는 꽃을 훔치려고 왕궁의 내원(內苑)에 몰래 들어갔습니다.


사내는 경비병에게 붙잡혔고 왕은 그를 창으로 찔러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형벌을 받을 때 까마귀들이 눈을 쪼아대는 바람에 몹시 고통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육체적인 고통도 아내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고, 아내와 함께 축제를 즐기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 때문에 짓눌리는 정신적인 고통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중얼거렸습니다. 자신의 불운을 한탄하면서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랑하는 사람이 압력을 행사해서 악행을 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악행은 집착에서 비롯하며 악처에 이르는 업입니다. 그래서 「청정도론」(Vis. XVII.262)은 이렇게 설하고 있습니다.


“감각적 집착의 영향을 받아 사람들은 현생의 감각적 대상에 대한 갈애와 소유하고 있는 대상을 보존하려는 욕망 때문에 몸과 말과 생각으로 악행을 한다. 그러한 악행으로 대개 악처에 떨어진다.” 





61. 바른 선행과 그릇된 선행



어떤 선행은 바른 것이지만 어떤 선행은 그릇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행하는 이른바 선행이라고 하는 것은 해로운 것이기 때문에 악업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수명을 단축해 줌으로써 동물의 고통을 끝내주는 것은 좋은 행위라고 믿고 있습니다. 모든 중생은 죽거나 고통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동물에게 고통을 주고 죽게 하는 것은 확실히 잘못입니다.


어떤 사람은 고통스러운 불치병에 시달리는 사람을 빨리 죽도록 하는 것이 선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환자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긴 하지만 죽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비록 환자가 죽고 싶다고 말하더라도, 불교의 관점에서 볼 때 중생을 죽게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만약 직접적이나 간접적으로 부모를 그렇게 안락사 시키면 그것은 지옥에 떨어지는 무거운 업의 과실입니다.


“인간계와 천신계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와 그른 가르침으로 잘못된 길에 빠져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살생과 같은 악행을 범한다. 하지만 악업의 결과로 그들은 죽어서 악처에 떨어진다.”


주석서에 따르면 그런 사람들은 삿된 스승, 전생에 지은 선업의 부족, 그리고 자신을 보호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깁니다. 삿된 스승에 의지하면 악업을 짓고, 전생에 악업을 많이 지었으면 금생에 삿된 견해와 삿된 습관을 얻기 쉬우며 스스로 단속을 게을리 하면 유혹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참된 종교는‘선한 사람의 종교, 즉 바른 법(saddhamma)161이라고 합니다. 참된 종교를 따르는 사람은 좋은 가르침을 듣고, 나쁜 행동과 말과 생각을 피하고, 내생, 업과 그 과보 등에 대한 바른 견해[正見]을 가지고 있으며 선한 생각을 함양하며 자신의  행복을 위해 보시, 지계, 수행을 닦습니다.


보시, 지계, 수행은 해롭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참되고 선한 법입니다. 아무도 살생, 도둑질, 욕지거리나 다른 그릇된 행동을 삼가는 사람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서(here and now)의, 또는 내생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가 하는 선행은 욕계의 집착에서 비롯되는 선업입니다.


이러한 선업으로 인해 인간계나 천신계에서 태어납니다. 그래서「청정도론」은 이렇게 설하고 있습니다. “참된 가르침을 듣는 사람은 업과 선행의 효험을, 욕계에 부자나 귀족이나 천신으로 태어나서 유복한 삶을 살게 되는 여권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kāmā-upādāna)의 영향 속에서 선행을 하고 인간계나 천신계에 태어난다.”





62. 업과 윤회



“존재[有]를 조건으로 태어남[生]이, bhava paccaya jāti”라는 말씀대로 선업이나 악업의 과정 때문에 인간계나 천신계, 또는 악처에서 재생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태어남[生]은 집착[取]에서 비롯되며 갈애[愛]는 여섯 감각대상[六境]과 이에 상응하는 감각기관[六根]과 맞부딪쳐서 일어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무명(無明), 상카라[行] 등이 전생에서 일어난 것처럼, 현생에서는 식(識), 정신-물질[名色], 여섯 감각장소[六入], 감각접촉[觸], 느낌[受]이 일어납니다. 게다가 갈애와 집착은 새로운 재생을 일으킵니다. 이 상황은 과거의 유죄판결로 감옥에 들어가 있는 동안 또 죄를 범하는 사람이나, 빚진 것을 다 갚기도 전에 새로운 빚을 지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한 새로운 업은 단 한 번의 생에도 무수하게 쌓입니다. 어떤 조건하에서 이 업 중의 하나가 임종 때의 표상이 되어 재생으로 인도하는 반면에, 나머지 업은 윤회의 또 다른 때에 나타납니다. 전생에서 이어져온 큰 힘을 지닌 잔여 업이 있다면, 현생의 업보다 우선해서 임종의 표상으로 나타나, 낮은 세상이나 높은 세상에서 태어나게 합니다. 그런 경우에는 사후의 운명까지 이 업의 성질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63. 네 가지 업의 종류



업은 과보를 가져오는 방식에 따라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1) 무거운 업(garuka-kamma)

(2) 습관적인 업(bahula-kamma, āciṇṇaka-kamma)

(3) 임종에 다다라 지은 업(āsaṇṇa-kamma)

(4) 이미 지은 업(kaattā-kamma)


무거운 업(garuka-kamma)은 ① 어머니를 죽이는 것 ② 아버지를 죽이는 것 ③ 아라한을 죽이는 것 ④ 부처님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 ⑤ 승가를 분열시키는 것입니다. 선한 무거운 업에는 색계와 무색계의 선업이 있습니다. 무거운 업은 다른 업이 과보를 맺는 것을 가로 막고 재생하게 하며, 그 가운데 색계와 무색계선은 색계와 무색계에서 재생하게 합니다.


악한 무거운 업을 지으면 죽어서 곧장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래서 반드시 지옥에 떨어지는 다섯 가지 무거운 악업이란 뜻으로 오무간업(五無間業 pañcānantariya-kamma)이라고 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알고 죽이거나 모르고 죽이는 사람은 현생에서 절대로 선정이나 도과를 얻지 못하고 죽어서 곧장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선정이나 도과를 얻지 못할 뿐 아니라 어떠한 선업도 그를 지옥에서 구제할 수 없습니다. 이는 다음의 아자따삿뚜(Ajātasattu) 이야기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64. 아자따삿뚜 이야기



아자따삿뚜는 부처님의 헌신적인 제자인 마다가국의 빔비사라(Bimbisāra) 왕162의 아들 이었습니다. 태자를 낳기 전에 왕비는 왕의 오른 팔의 피를 마시고 싶은 욕망을 느꼈습니다. 이를 알게 된 왕은 피를 뽑아내서 왕비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었습니다.


그러자 예언가들이 왕비의 뱃속에 있는 아이는 왕의 적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하여 모태에 있을 때 이미 아버지의 잠재적인 적이라는 뜻인‘아자따삿뚜(Ajātasattu)’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왕비는 아이를 지우려고 애썼지만 왕의 업과 아이의 업의 방해로 낙태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왕은 임신 중인 왕비를 잘 보호하여 아이가 태어났고 나이가 찼을 때 황태자로 책봉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젊은 태자는 자신의 신통력을 이기적인 목적에 악용하는 사악한 데와닷따의 마수에 걸려들었습니다. 뱀을 허리에 칭칭 감은 소년의 모습으로 변하여 아자따삿뚜 앞에 나타나서는 다시 비구의 모습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태자는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은 기적에 매우 관심이 많고 그러한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을 맹신하기 때문에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태자는 데와닷따를 깊이 존경하게 되었고 헌신적인 추종자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데와닷따는 자신의 악한 의도를 이루기 위해 또 다른 계획을 꾸몄습니다. 태자에게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하니까 가장 혈기 왕성할 때인 지금 부왕을 죽이고 자신은 부처님을 죽이겠다고 말했습니다. 태자는 왕을 죽이는데 실패했지만 나중에 태자의 욕망을 알게 된 빔비사라 왕은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이동은 데와닷따의 음모에는 못 미치는 것이었습니다. 데와닷따의 사주를 받아 아자따삿뚜는 부왕을 감옥에 가두고 굶겼습니다. 왕비만이 감옥에 가서 왕을 만날 수 있게 허용된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왕비는 여러 가지 방법을 써서 왕에게 몰래 음식을 가져다 주었지만 마침내 왕비마저 감옥에 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 날부터 왕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지만 그래도 마루위에서 경행을 함으로써 그럭저럭 건강을 유지하였습니다. 그러자 왕의 명령을 받은 이발사가 걷지 못하도록 빔비사라 왕의 발에 상처를 내었습니다. 주석서에 따르면 빔비사라 왕이 그렇게 발을 다치게 된 것은 전생에 신발을 신고 탑묘의 앞마당을 걸었고, 씻지 않은 발로 비구들을 위한 방석을 밟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빔비사라 왕은 대략 67세쯤 되었을 때 죽었습니다. 그의 아들 아자따삿뚜의 본마음은 사악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선한 성품은 아버지에게 나쁜 짓을 한 뒤에 부처님께 헌신했던 점, 부처님의 사리를 숭배하고 소중히 안치하였던 점, 그리고 제1차 결집163때 열성을 다해 지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자따삿뚜가 아버지를 죽이는 죄업을 지을 정도로 잘못된 길에 빠진 것은 바로 사악한 스승과 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자따삿뚜의 삶은 우리가 특별히 명심해야 할 교훈을 줍니다.


빔비사라 왕이 죽던 바로 그날, 아지따삿뚜의 왕비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아지따삿뚜는 흥분하고 아이에 대한 엄청난 애정에 휩싸였습니다. 그러자 자기 아버지 생각이 나서 감옥에 갇힌 왕을 풀어주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나중에 어머니로부터 부왕이 어린 시절의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보살펴 줬는지를 들은 뒤 죄책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때부터 아지따삿뚜의 인생은 비참하고 불행해졌습니다. 그는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지옥의 환영과 부처님의 헌신적인 재가신도였던 아버지에게 지은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의사 지와까(Jīvaka)164의 인도로 아자따삿뚜는 부처님을 뵈러 갔습니다. 그때 세존께서는 천여 명의 비구들에게 둘러싸여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명상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말소리를 내거나 손이나 발을 움직이지 않고 모두 조용하였습니다.


깊은 감명을 받은 왕은 “내 아들 우다야밧다(Udayabaddha)가 이 비구들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고요함으로 축복받기를!”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아자따삿뚜는 자기 아들이 자신이 어떻게 권력을 쥐었는지를 알게 되면 자신의 전철을 밟을까봐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두려움은 증손자까지 현실로 이어져서 아들들은 아버지들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아지따삿뚜왕은 부처님께 거룩한 출가생활로 얻어지는 즉각적인 결실[沙門果]에 대해 여쭈었습니다. 세존께서는 재가자들의 비구에게 표하는 존경, 청정한 계행, 세간계의 초선과 다른 높은 상태의 마음, 신통, 번뇌의 소멸과 성스러운 도의 증득이 거룩한 삶[梵行]을 살아서 얻어지는 이익이라고 상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난 아자따삿뚜는 부처님의 제자임을 공식으로 선언하였습니다. 아버지를 죽이지만 않았더라면 아자따삿뚜는 도의 첫째 단계인 예류과를 얻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부터 아자따삿뚜는 마음의 평화를 얻었고, 부처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죽은 다음에 떨어졌을 무간지옥의 두려움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65. 습관적인 업과 임종할 무렵에 지은 업



아라한을 죽이고, 부처님에게 상처를 입히고, 의도적으로 승가를 분열시키는 다른 세 가지 무거운 업도 이 악업을 지은 자를 지옥에 떨어뜨립니다. 과보를  맺는 다른 업은 습관적인 업(bahula-kamma, āciṇṇaka-kamma)입니다. 선한 계행을 지키지도 못하고 나쁜 습관을 없애려는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면, 습관적인 업이 되어 내생에 나쁜 과보를 받습니다.


 그래서 재가자는 반드시 오계에 지키며 살아야 하고 계를 어겼을 경우는 더욱 더 경계하여 자신의 계행을 수지하겠다고 구두로 다짐해야 합니다. 계청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율장의 계목(戒目)을 일부러, 혹은 모르고 어겼을 경우에 그것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습관적인 업이 되기 때문에, 비구는 반드시 참회와 계목을 수지하겠다는 재확약을 통해서 계청정을 회복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날마다 행하는 보시, 부모와 스승에 대한 공경, 부처님을 계속해서 생각함165[佛隨念], 명상수행 등은 즉각적인 과보를 가져오는 습관적인 업입니다. 습관적인 업이 없을 때에는 임종에 다다라 지은 업(āsaṇṇa-kamma)이 업의 과보를 가져옵니다.


아비담마의 한 논서는 이 임종에 다다라 지은 업이 습관적인 업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고 설하고 있지만 어쩌면 이는 예외적인 경우에만 해당될 것입니다. 주석서에 나와 있듯이, 아마도 습관적인 업이 우선하고 과보를 맺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불전(佛典)에 있는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우리는 임종에 다다라 지은 업에 확실히 의지할 수 있습니다. 50여 년 동안 사형집행인으로 사람들을 죽였던 어떤 사람은 사리뿟따(Sāriputta) 존자166에게 음식을 보시하고 법문을 들은 다음 천신계에 태어났습니다. 이 이야기는 죽기 직전에 한 장로 스님과 만나고 나서 천신계에 태어난 한 스리랑카 어부의 체험에서 공감을 얻습니다.

 

임종에 다다라 지은 업의 긍정적인 면이 생산적인 것처럼 그 반대인 부정적인 면도 또한 생산적입니다. 스리랑카의 한 재가자는 여러 해 동안 명상을 닦았지만 빛조차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그 재가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해탈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고 단정하였고 이러한 삿된 견해로 말미암아 죽어서 아귀계에 떨어졌습니다.


명상 수행에서 빛 등을 보지 못하는 것은 그릇된 방법이나 그릇된 노력으로 명상을 했거나 기본 바라밀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수낙캇따167라는 비구는 하늘 눈[天眼]을 얻었으나 하늘 귀[天眼]는 얻지 못했는데 이는 하늘 귀[天耳]를 얻을수 있는 바라밀이 없던 데다 그의 악업이 장애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수행을 해도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낙담할 필요가 없습니다. 보통 바른 도를 따라서 수행을 하면 특이한 체험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고요해지고 청정해지면 정신-물질의 인과관계 및 그들의 끊임없이,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짐이 확연히 보이는 것처럼, 관찰의 대상인 물질과 관찰하고 있는 마음도 확연히 구별합니다.


이 단계에서 수행자는 빛을 보게 되지만 설령 빛을 분명하게 보지 못하더라도, 위빠사나 지혜의 계발에 아주 중요한 행복, 희열, 경안, 평온 등과 같은 깨달음의 구성요소[七覺支]168를 경험합니다. 정신-물질을 그냥 숙고만해서는 그러한 높은 마음상태에 이르지 않습니다.


습관적인 업이나 임종에 다다라 지은 업이 없는 경우에는 생애에 한번만 지은 업을 뜻하는 이미 지은 업(kaṭatta-kamma)169이 있게 됩니다.





66. 태어남과 괴로움



 우리가 이미 상세하게 설명한 바와 같이, 인과의 사슬에서 업의 역할은“상카라[行]를 조건으로 식(識)이 일어난다, sakhāra paccaya viññāṇani ”라는 가르침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죽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업과 관련된 표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죽은 뒤에는 임종 시의 집착에 의해 조건 지어진 업에서 생긴 물질(kammaja-rūpa)과 재생연결식이 뒤따릅니다.


감각접촉[觸]으로 느낌[受]이 일어나고 이 느낌[受]은 다시 갈애[愛]를 일으킵니다. 느낌이 즐거운지 괴로운 것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즐거운 느낌은 즐거운 대상에 대한 집착을 일으키는 반면, 괴로운 느낌은 즐거운 대상들에 대한 갈애를 일으킵니다. 갈애가 강해지면 광적인 갈애인 집착[取]으로 발전하고, 그러면 그것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행위나 노력이 따르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필요와 욕망을 충족시키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선행이나 악행을 합니다. 재생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갈애에 기반을 둔 업으로서의 존재[業有]입니다. 재생은 어느 중생계에서 일어나든지 간에 괴로움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축생계와 다른 악처의 괴로움을 깊이 생각해볼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계에서도 괴로움은 피할 수 없는 삶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괴로움은 어머니의 자궁에 있을 때부터 시작됩니다. 태어난 다음에는 먹고 살기 위해 힘들게 일해야 하고, 악당과 폭군에게 시달립니다.


설사 생존경쟁에 내재해 있는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늙음, 병듦, 죽음과 대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수태의 순간부터 사람은 이러한 피할 수 없는 삶의 괴로움을 향해 갑니다.


매 순간마다 사람은 이러한 삶의 괴로움에 한발 한발 다가섭니다. 어떤 사람은 겉보기에 걱정 없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의 정신-물질은 언제나 늙음과 무너짐의 과정 속에 있습니다.


늙음, 병듦, 죽음의 불가피함을 강조하는 인도의 설화가 있습니다. 한 사내는 늙음을 두려워하여 불로장생의 약을 입에 넣고 허공으로 올라서 하늘에 숨었습니다. 다른 사내는 병듦을 피하기 위해서 바다 속에 숨었으며 또 다른 사내는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히말라야의 동굴에 숨었습니다. 세 사내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찾아 나섰는데 첫째 사내는 아주 추하게 늙어 있었으며, 두째 사내는 병들어 죽어 있었고 세째 사내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늙고 병들고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일단 태어나면 이러한 존재의 괴로움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법구경」 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이건 땅이건 바다 속이건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67. 슬픔과 탄식



무너지고야 말 정신-물질의 테두리 안에서 재생이 일어나는 한 죽음과 다른 두 가지 삶의 괴로움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재생은 슬픔, 근심, 탄식, 번민에 이릅니다.


우리는 가족의 일원이 죽을 때 슬퍼합니다. 우리가 끔찍이 사랑하는 아들이나 딸을 잃었을 때 슬픔은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또 다른 슬픔의 원인은 못된 관리, 강도, 도둑, 화재, 홍수, 태풍, 가증스런 상속자들로 인해 재산을 잃는 것입니다. 또한 슬픔은 질병에 시달리고 건강이 나빠지면 일어납니다. 어떤 환자는 너무나 의기소침 하여 회복하는데 걸림돌이 됩니다.


도덕적으로 양심적인 비구와 재가자의 경우 계행이 훼손되면 근심합니다. 그래서 「알람부사 본생경(Alambusā Jātaka)」(J. 523)에 나오는 선인 이시싱가(Isisinga)는 자신의 청정한 계행이 한 천녀의 유혹으로 훼손되자 극심한 번민에 괴로워했습니다.


그릇된 스승의 지도 속에서 삿된 견해에 찬동하여 바른 견해를 저버린 뒤에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사람들의 근심과 후회도 고통스럽습니다.


이 외에도 슬픔, 번민, 탄식을 일으키는 사고, 강도에 의한 고통, 생계를 꾸려 나가고 생필품을 확보하는 어려움과 같은 다른 많은 삶의 불행도 있습니다.


지옥, 축생, 아귀계의 육체적 고통을 깊이 생각해볼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識]이 있기 때문에 사람도 괴로운 감각 대상과 맞부딪칠 때마다 고통에 휩싸입니다. 게다가 정신적으로도 고통스럽기 때문에, 엎친 데 덮친 격입니다.


성냄으로부터 자유로운 아라한이나 불환자인 성자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으며 육체적인 고통을 겪더라도 평온합니다. 자아가 있다는 전도된 인식이 없는 사념처 수행자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괴로운 느낌으로 고통 받을 때, 그 괴로운 느낌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중요한 것입니다.


과거에 자신이 겪었고 현재 겪고 있는, 또 미래에 겪을 좌절과 불행을 생각할 때 사람들은 불행합니다. 곤경에 처해 있고 불행을 눌려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 가슴 아프고 심난합니다.


이러한 괴로움은 다 태어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삶이란 자아가 없는, 설령 즐기는 그러한 자아가 있다 해도 즐길 만한 좋은 것이 없고, 모두 괴로움인 것입니다.


연기법에 따르면, 한 생이 다른 생과 연결되는 유일한 고리는 원인과 결과 관계입니다. 한 생의 무명에 토대를 둔 갈애, 업의 노력 등에서, 식(識), 정신-물질[名色], 여섯 감각장소[六入], 감각접촉[觸], 느낌[受]의 다섯 가지 과보가 생겨납니다. 이러한 과보는 재생으로 시작하여 늙음과 근심, 그리고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다른 괴로움을 거쳐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부처님의 이러한 가르침은 행복과 자아가 실재한다는 전도된 인식을 가지고 있는 보통 사람에게는 호소력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아와 괴로움은 틀림없는 존재의 현실로 천신계의 삶도 예외가 아닙니다.


일부 땅에 붙어사는 신[地神]170들은 생존을 위해 처절하게 노력해야 하므로 사람보다 더 비참합니다. 그들을 위니빠띠까 천신(vinipātika-deva)171이라고 하는데, 낮은 천신의 부류에 속하는 귀신이나 악령 따위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하늘의 어떤 천신들은 거처도 좋지 않고 시종들도 많지 않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습니다.


천신들의 왕인 제석조차도 불법이 선포되기 훨씬 전에 쌓은 선업으로 천신계에 태어났기 때문에 자신은 그다지 빛나지 않는다는 것과 부처님 시절에 선업을 쌓아서 자기보다 더 빛나는 천신들을 보면 숨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마하깟싸빠(Mahā-Kassapa) 장로172에게 고백했습니다.


이와 같이 제석은 항상 행복한 것만이 아니며, 제석을 시중드는 천녀들도 높은 지위의 여왕인 천녀들 가운데 있으면 자신은 아무 보잘 것이 없기 때문에 비참하고 불행하다고 마하깟싸빠(Mahā-kassapa) 장로에게 말씀드린 것처럼 항상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천신들은 몸에 장식한 꽃이 시들고, 양 겨드랑이에서 땀이 나고, 다른 늙음의 징조들로 죽음이 닥쳐오는 것이 예고 될 때 불행해집니다173. 또 어떤 천신들은 천상의 쾌락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마치 뇌졸중으로 목숨이 끊어지는 사람처럼 갑자기 죽습니다. 죽음은 촛불이 꺼지는 것처럼 한 순간의 문제일수도 있습니다. 『상응부』「수브라흐마경(Subrahmā sutta)」(S.i.53)에 나오는 수브라흐마(Subrahmā) 천신이야기가 이를 뒷받침합니다.





68. 수브라흐마 천신 이야기



수브라흐마(Subrahma) 천신174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나무 위에서 노래를 부르며 꽃을 따고 있던 그의 시종인 천녀들이 갑자기 죽어서 모두 무간지옥에 태어났습니다. 수브라흐마 천신은 시종들이 무간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것을 보았으며 동시에 자신도 며칠 뒤에 죽어서 그들과 똑같은 운명에 처할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소스라치게 놀란 천신은 부처님을 찾아가서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곳을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번뇌를 끝내는데 이바지 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 [七覺支法], 두타행(頭陀行)175, 네 가지 바른 노력[四正勤]176을 닦고, 번뇌를 피하는데 도움을 주는, 감각기능을 단속하는 계 그리고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출리(出離)를 뜻하는 열반 이외에 구원에 이르는 다른 길은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법문을 듣자, 천신과 그 시종들은 성스러운 도의 첫째 단계인 예류과를 성취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 여겨 봐야 할 것은 천녀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입니다. 쾌락을 쫒는데 몰두하다가 갑자기 죽는 이들은 불선한 업의 충격파로 지옥에 떨어지기 쉬운 운명이기 때문에 참으로 무시무시합니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어떤 조짐이 보이면, 두려움이 일어나 그들을 더욱 더 고통스럽게 합니다.


쾌락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되는 괴로움은 비단 욕계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괴로움은 또한 무색계의 범천들의 운명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범천계에는 성적인 쾌락이나 다른 감각적 쾌락이 없습니다. 범천들은 그저 보고, 듣고, 생각하기만 할뿐, 그들이 보고, 듣는 대상들에는 성적인 연상이 없습니다.


하지만「청정도론」(Vis.XVII.264)에 나와 있듯이, 일부 사람들은 소문이나 추론을 통해서 범천계의 감각적 쾌락은 인간계와 천신계의 감각적 쾌락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범천계의 감각적 쾌락에 대해 갈애를 일으킵니다. 이는 다름 아닌 바로 궁극적으로 색계 범천계나 무색계 범천계에 태어나게 하는 색계선, 무색계선을 증득하도록 하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입니다.


일부 사람들이 범천계의 감각적 쾌락을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은 놀랍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을 잘 아는 사람은 이러한 관념을 부정하겠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에겐 아마도 호소력이 있을 것입니다. 인도의 종교서적들은 범천을 아내와 같이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고177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열반을 자신의 가족, 시종들과 함께 살 수 있는 천상의 궁전이 있는 극락세계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69.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은 모든 종류의 지나친 갈애를 뜻한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kāmā-upādāna)은 단지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지나친 갈애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색계와 무색계까지 확장된 형태의 갈애를 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청정도론」에 따르면, 수행자는 성스러운 도의 마지막 단계에 가서야 비로소

이 지나친 갈애를 없앨 수 있고 이 갈애는 색계선과 무색계선을 얻고자 하는 모든 노력의 근저에 도사리고 있는 갈애입니다.


범부에게 있어 그러한 선정은 감각적 쾌락에 토대를 둔 색계나 무색계의 업의 노력을 뜻하며 이는 색계범천이나 무색계범천계에 태어나게 합니다. 그렇게 태어난 순간부터 정신-물질이나 삶의 두 현상 중 어느 하나에 끊임없는 늙음이 진행됩니다. 범천이 늙는 것은 사람이 늙는 것처럼 그렇게 명확하게 드러나진 않지만 그래도 쇠해가는 것만은 확실하며, 그 진행이 끝나면 범천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성냄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범천의 삶은 슬픔, 근심, 걱정 등을 겪지 않습니다. 또한 몸의 감성 물질이 없기 때문에 범천은 육체적인 고통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범천도 모든 유형의 존재에 내재해 있는 태어남, 늙음, 죽음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늙음과 죽음에서 벗어나려면 재생의 가능성을 제거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재생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선업과 불선업을 피하고, 집착과 갈애를 부르는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를 거부하려는 노력을 취해야 합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정신적 과정은 반드시 느낌[受]으로 끝나야 하고, 무언가에 대한 욕망으로 발전하는데 까지는 이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감각장소[處]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의 무상· 고· 무아를 철견 하는 관찰을 통해 욕망을 제거하는 것이  갈애, 재생, 늙음, 죽음에 이르는 원인과 결과의 다른 연결고리를 피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는 성스러운 도에서 수행자가 위빠사나 지혜를 계발하였을 때 일거에 완전히 극복할 수 있는 괴로움의 일시적 적멸(tadaṅga-nibbuti)을 뜻합니다.





70. 재생의 원인이 되는 사견에 대한 집착



사견에 대한 집착(diṭṭhi-upādāna)은 내생과 업을 부정하는 견해에 집착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죽고 나면 모든 것이 소멸한다고 주장하는 단견(斷見)은 사견에 대한 집착의 일종입니다. 그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선행을 하거나 악행을 삼가야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저 세상의 행복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것이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능한 한 삶을 즐기려 할 것입니다. 의심이 없기 때문에 그가 하는 행위 대부분은 악처에 태어나도록 하는 임종의 표상을 일으킬 불선업입니다.이는「아귀사」(Pv.iv.3; PvA.244ff)에 나오는 난다까(Nandaka)아귀178이야기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난다까는 오늘날 서인도의 뭄바이 지방 북쪽에 있는 수랏타(Surattha)국을 다스리던 삥갈라(Pigala)왕의 장군이었습니다. 난다까는 보시 등을 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라는 삿된 견해를 고수하였습니다. 그리고 죽어서는 뱅골 보리수에 사는 아귀가 되었지만 난다까의 딸이 한 비구에게 음식을 보시하고 자신의 공덕을 아버지와 함께 나누자 천상의 음료수와 음식을 무한정으로 얻게 되었습니다.


난다까는 그제야 업의 법칙을 이해하고 전생에 삿된 견해를 고수했던 것을 후회했습니다. 하루는 삥갈라 왕을 자신의 처소로 데려와서 왕과 시종들을 천상의 잔치로 접대하였습니다. 왕은 깜짝 놀라서 어찌된 영문인지 물었고, 난다까는 삿된 견해를 지니고, 도덕적이지 못한 삶을 살고, 보시를 극구 반대한 업보로 악처에 태어났으며, 자기 딸이 공덕을 나누어 줌으로써 한순간에 자신의 처지가 바뀌게 된 경위를 들려주었습니다. 난다까는 죽고 나서 겪을 괴로움, 즉 인간계에 있을 때 삿된 견해를 지니고 성자를 헐뜯었던 자들과 함께 나누어야 할 지옥의 무시무시한 고통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행위에는 아무런 업보가 없다는 등의 사견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불선한 업을 지으면 악처에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주석서는 또 단멸이 죽음이나 상위 중생계를 수반하게 되어 있다면 단견에 대한 집착으로도 천신계나 범천계에 이를 수 있다고 합니다.179하지만 천신들과 범천은 확실히 자신들이 죽은 뒤에 모든 것이 끝난다고 믿는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대체로 단견은 사람들로 하여금 악행을 짓도록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업의 행위는 상견(常見)에 의해서도 유발될 수 있습니다. 이 상견은 개인의 실체가 있다는 전도된 인식을 유발하며, 이 전도된 인식으로 사람은 내생에 자신의 선업이나 악업의 과보를 받아야 하는 것은 바로 영원한 자아라고 믿게 됩니다. 그래서 상견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선행이라고 여기는 일을 하는데 전념합니다. 그의 행위들 중 몇몇은 사실 악할 것이지만 어쩠든 상견에서 비롯된 그의 선하거나 악한 행위들은 재생과 괴로움에 이릅니다.


게다가, 또 다른 업의 행위의 주요 동기는 미신에 대한 믿음입니다. 수많은 미신들이 있는데, 예를 들면, 하위 계급의 사람을 보면 재수가 없다든지, 집에 벌집이 있거나 이구아나가 살면 반드시 가난해질 징조라는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미신의 영향으로 사람은 불가촉천민180을 잔인하게 다루거나, 벌을 죽이는 것과 같은 악행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찟따삼부따 본생경(Cittasambhūta Jātaka)」(J.498)에서 입증됩니다. 


이 본생경에서 보살은 하위 계급인 짠달라(caṅḍāla)181에 속하는 찟따(Citta)라는 이름의 사내였습니다. 그때 아난다(Ānanda)는 삼부따(Sambhūta)라고 하는 보살의 사촌동생이었습니다. 그들은 대나무를 가지고 춤을 추며 먹고 살았습니다. 하루는 미신을 너무 믿는 장자의 딸과 상위 계급의 바라문의 딸이 시종들을 데리고 소풍을 나왔습니다. 그 두 춤꾼을 보자 재수 없다고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자 소풍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게 된 성난 시종들은 두 사내를 두들겨 팼습니다.


그 뒤 두 춤꾼은 탁실라(Taxila)182로 가서 바라문으로 위장하고 공부에 몰두했습니다. 머리가 좋았던 찟따는 학생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하루는 스승이 그들을 바라문교의 호주(護呪)183를 암송해야 하는 곳으로 보냈습니다.


거기서 뜨거운 우유를 무심코 마시다가 입을 덴 삼부따가 짠달라 계급이 쓰는 말로 “칼루, 칼루!(뜨겁다)”라고 외치자, 찟따도 무심결에“닉갈라! 닉갈라!(토해버려)”라고 외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혀를 잘못 놀린 것이 화근이 되어 상위 계급인 바라문 학생들에게 정체를 들키고 말았습니다. 둘은 흠씬 두들겨 맞고는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스승의 권유에 따라 그들은 숲속에 들어가 선인(仙人)184이 되었습니다. 죽어서는 축생계에 태어났는데 처음엔 두 마리 사슴으로, 그 다음 생에는 두 마리의 독수리로 태어났습니다. 그 다음에 찟따는 바라문 수장의 아들로 태어나서 자신이 살아온 세 전생을 기억했습니다. 그는 선인이 되어 선정과 신통력을 얻었습니다. 삼부따는 왕이 되어 자신이 전생에서 낮은 계급이었음을 기억하고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면서 세월을 보냈습니다.


신통력으로 동생이 아직 영적으로 미숙하다는 것을 알고는 50년을 기다린 다음에 왕의 정원으로 갔습니다. 선인이 전생에서 자신의 형이었음을 알아본 왕은 선인에게도 왕의 쾌락을 나누어 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선행과 악행의 과보를 아는 보살은 제어(saṁvara), 출리(nekkhamma), 이욕(virāga)의 삶을 살기로 맹세하였습니다.


보살은 왕에게 전생에 그들이 최하위계급의 짠달라로, 사슴으로, 독수리로 서로 가까운 사이였음을 상기시켰습니다. 삶에서 업의 변덕스러운 과정을 지적하여 왕이 영적인 진보를 더 이루기 위해 사문이 될 것을 촉구하는 것이 보살의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삼부따가 세속적 쾌락을 저버리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보살은 히말라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 뒤 왕은 세속적 쾌락에 환멸을 느끼고는 히말라야로 들어갔고 거기서 선인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선인이 된 왕은 영적인 수행에 매진해서 선정과 신통력을 얻었습니다.





71. 미신과 나쁜 재생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미신에서 비롯되는 악업입니다. 악업의 원인이 되는 미신의 역할은 「법구경」주석서(DhA.iii.31f)에 나오는 사냥꾼 꼬까(Koka)이야기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부처님 당시 어떤 마을에 꼬까라는 하는 사냥꾼이 살았습니다. 하루는 사냥꾼이 개를  데리고 사냥을 하러 숲으로 들어갔는데 중간에 탁발을 나가던 한 비구를 만났습니다. 사냥꾼은 이를 나쁜 징조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사냥꾼은 그날따라 양식에 쓸 짐승을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사냥꾼은 또 그 비구를 만났습니다. 증오심과 격노에 눈이 먼 사냥꾼은 비구를 향하여 개들을 풀었습니다. 비구는 도망쳐서 나무위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비구는 그다지 높지 않은 가지위에 앉았습니다. 사냥꾼은 날카로운 화살촉으로 비구의 발을 찔렀습니다. 그래서 비구는 왼쪽 발을 들어 올렸다 오른쪽 발을 들어 올렸다 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나중에는 가사가 느슨해져서 밑으로 흘려 내렸습니다.


가사는 사냥꾼의 몸 위로 떨어졌고, 그렇게 가사를 두른 것을 본 개들이 비구인줄 착각하고 사냥꾼을 공격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냥꾼은 자신의 개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자기 주인을 죽인 것을 알게 된 개들은 도망쳐 버렸습니다.


비구는 나무에서 내려와 이 사실을 부처님께 보고 드렸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정하고 허물없는 사람에게

  어리석은 자가 악행을 하면

  그 결과가 다시 그에게 돌아가나니.

  마치 바람을 향해 뿌린 먼지처럼.”

  (Dhp.125)


이 이야기에서 사냥꾼의 참혹한 죽음, 악처에 태어난 것, 괴로움은 모두 악행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악행은 사냥꾼의 미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점성가가 별자리가 자신에게 안 좋은 징조라고 이야기 하면 화들짝 놀랍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상에 꽃과 초를 공양 올리고, 비구들에게 보시를 하고, 법문을 듣고 명상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즐겁지 못한 꿈과 관련된 임박한 악운을 막기 위하여 비구들에게 호주를 외게 합니다. 그들의 선행은 좋은 재생에 이르지만 악행에서 비롯된 다른 재생과 마찬가지로 이 또한 괴로움이 따릅니다.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은 닥쳐올지 모르는 불운을 막기 위해 악행을 합니다. 본생경은 신들을 달랠 재물로 네 마리 염소, 네 마리 말, 네 명의 사람을 죽이는 몇몇 왕의 동물 공희제(供犧祭)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법구경」 주석서(DhA.ii.5ff)나 「로하꿈비 본생경(Lohakumbhī Jātaka)」(J. 314)등에 보면 부처님 당시에도 빠세나디 꼬살라왕185이 이러한 공희제를 거행하려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때 빠세나디 꼬살라 왕은 한 결혼한 여자에게 연정을 품어서, 그녀의 남편을 먼 곳에 심부름 보냈습니다. 그가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고 당일에 도성으로 돌아오지 못하면 처벌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사내는 왕명을 완수하고 해가 지기 전에 돌아왔으나 성문이 닫혀 있어서 도성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기원정사(祇園精舍)에서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욕정과 삿된 욕망에 사로잡힌 왕은 왕궁에서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왕은 전생에 간통을 범했기 때문에 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네 명의 사내들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왕이 지옥에서 나는 이러한 소리를 들은 것은 어쩌면 부처님의 의지와 신통력에 의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왕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아침에 고문인 바라문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바라문은 그 소리는 불운이 곧 닥쳐온다는 전조이므로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각각 백 마리씩의 코끼리와 말 등을 공희제에 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왕은 공희를 지내기 위한 준비를 했습니다. 자기 한 목숨을 구하기 위해 수많은 산목숨을 희생시키도록 지시하니 인간의 본성이란 이 얼마나 잔인합니까! 산 재물들 가운데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그들의 울음소리를 들은 말리까(Mallikā) 왕비186가 왕에게 가서 부처님께 조언을 구할 것을 청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왕에게 그 소리는 왕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안심시켜 주었습니다. 그 소리는 까사빠 부처님187 당시에 결혼한 여자들을 유혹한 네 명의 젊은이가 지금 로하꿈비(Lohakumbhī) 지옥188에서 고통을 받으며 내는 소리이며 그들은 지금 뉘우치고 있으며 뒤늦었지만 지옥에서 벗어나고 나면 선행을 하겠다는 생각을 말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왕은 크게 놀라서 이제 남의 아내에게 욕정을 품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왕은 부처님께 잠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에 간밤이 어떻게 아주 길게 느껴졌는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왕의 원하는 것을 가지고 온 사내는 어제 1유순(由旬)189이나 되는 먼 길을 다녀왔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다음 게송을 읊으셨습니다.


“잠 못 이루는 자에게 밤은 길고

지친 여행자에게 1유순은 멀며

참된 가르침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에게

생사윤회의 길은 멀어라.”


이 게송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성스러운 도의 예류과와 그 밖의 다른 과를 얻었습니다. 왕은 공희제에 쓰려고 했던 중생들을 풀어주라고 명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이 없었다면 왕은 불선업을 지었을 것이기 때문에 이 이야기도 미신을 믿으면 어떻게 악행을 하게 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72. 종교에 대한 집착



종교에 대한 집착으로 선업이나 악업을 짓기도 합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만이 진리이며 남의 종교는 모두 거짓된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를 전도하려고 하고, 강제로 다른 사람을 개종시키거나 믿지 않는 사람들을 박해합니다. 이러한 모든 악행은 종교에 대한 집착인 광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또한 업의 행위는 이데올로기나 세속적 문제의 견해에 대한 집착에서도 유발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될 수 있는 한 모든 수단을 써서 자신의 신조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려 하고, 그 신조를 온갖 방법으로 전파하며,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의 단합을 해치거나 명예를 훼손하거나, 중상을 일삼습니다. 이러한 모든 노력과 행위는 집착에서 비롯된 업으로서의 존재[業有]입니다.


요컨대, 자아가 있다는 믿음으로 하는 수행과 신앙에 사로잡히는 것은 곧 업의 행위에 이르는 견해에 지나치게 집착함을 뜻합니다.





73.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



어떤 사람들은 팔정도와 무관한 수행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한 신념을‘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sīlabbata-upādāna)’이라고 합니다. 동물을 숭배하고, 동물의 사는 방식을 따르고, 구원을 얻으려는 바람에서 어떤 종교적 의식과 의례를 집행하는 것도 바로 이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입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어떤 사람들은 구원에 이르는 길로써 이러한 계율과 의식(sīlabbata)에 의존하고 인간계나 천상계나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나는 업의 행위를 합니다.


「청정도론」은 인간계나 다른 상위의 세계들에 이르는 업만을 말하고, 악처에 이르는 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이 악업을 야기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주석서가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되는 악업을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언급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 뿐입니다.


『중부』「견서계경(犬誓戒經 Kukkuravatika Sutta)」(M57)과 다른 경들은 소나 개와 똑같이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하면서 살면 소나 개로 태어나고, 사견을 받아들이되 철저히 실천하지 않는다면, 지옥이나 축생계에 떨어진다고 설합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이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 때문에, 제물로 바치기 위해 동물을 죽인다면 악처에 이르게 되고, 어떤 형태의 숭배나 의례나 의식과 결부되어 있는 집착에서 비롯된 다른 악행들도 악처에 이르게 합니다.


 요컨대, 괴로움에 대한 해결책으로 행하는 계율과 의식(sīlabbata)이 효과가 있다는 모든 믿음은 다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sīlabbata-upādāna)입니다. 「청정도론」주석서들에 따르면 해탈에 이르는 방법으로 인습적인 도덕과 세간계의 선정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 또한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입니다.


알라라나 웃다까가 얻은 무색계 선도 이러한 집착에서 비롯된 것이며, 유일신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여 많은 사람들이 짓는 행위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 집착에서 비롯된 모든 행위로 인하여 재생과 괴로움에 이릅니다. 





74.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



마지막 집착은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atta-vāda-upādāna)입니다. 이것은 자아의 실재에 대한 강한 확신이고, 자아는 항상 존재하며 모든 행동, 말, 생각의 주인공이라는 확고한 믿음입니다.


이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보통사람들은 보고, 듣고, 움직이는 주체는“나”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자아의 실재에 대한 전도된 인식은 자기사랑과 자신의 행복을 신경 쓰는 주요 동기입니다. 자기 사랑이 얼마나 보편적이고 무한한 힘을 지니고 있는지는『상응부』「말리까경(Mallikā sutta)」 (S.i.75)에 나오는 빠세나디 꼬살라왕의 질문에 대한 말리까 왕비의 대답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말리까는 원래 꽃장수의 딸이었습니다. 어느 날 길에서 부처님을 뵙고 자신의 음식을 드렸습니다. 식사를 다하시고 난 세존께서는 아난다에게 소녀는 꼬살라 왕의 왕비가 될 것이라고 예언 하셨습니다. 바로 그날 꼬살라 왕은 전쟁에서 패해서 말을 타고 도망쳐 나왔습니다. 완전히 지치고 절망에 빠진 왕이 화원에서 쉴 때 말리까가 상냥하게 왕을 받들었습니다. 크게 기뻐한 왕은 말리까를 왕궁으로 데리고 가서 정비(正妃)로 책봉했습니다. 말리까의 최근의 선업과 전생의 선업 때문에 부처님의 예언은 실현되었습니다.


하지만 말리까는 다른 비빈들만큼 그렇게 예쁘지는 않았습니다. 게다가 가난한 가문의 출신인 말리까는 왕궁사람들 속에서 기를 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말리까의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서 하루는 왕이 왕비에게 누구를 가장 사랑 하냐고 물었습니다. 왕이 기대하던 대답은“폐하를 가장 사랑합니다.”였습니다. 그러면 왕도 누구보다 왕비를 더 사랑한다고 말할 작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의 표현으로 자신과 왕비가 더 친밀해지고 왕비가 왕궁에서 맘 편히 지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의 용기를 지닌 지혜로운 여인인 말리까는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고 솔직하게 대답했습니다. 말리까는 왕에게 누구를 가장 사랑하는지를 물었습니다. 왕도 역시 다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왕은 이러한 대화내용을 부처님께 보고 드렸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이 세상에 자기 자신보다 남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연민의 정을 느껴야 하며 해코지 하지 않아야 합니다.190


이 부처님의 말씀에서 빨리어로 아따(atta)라고 하는“자기 자신”은 유신견에서의 자아나 아뜨만191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습적인 의미에서의 자아나 다른 중생들과 자기 자신을 구별하고자 말하는 자아만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유신견은 또한 자기 사랑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유신견이 강할수록 자신에 대한 사랑도 더 큽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남을 더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아내나 남편, 또는 자식을 배우자, 동반자, 조력자로써만 사랑할 뿐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이나 아버지의 사랑은 보석을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현실적입니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가 누구에 대한 사랑은 자신에 대한 사랑보다 더 크다고 말한다면 그러한 말의 신빙성을 의심해야 합니다. 생사의 위기에 부딪치면 어머니도 자기 자식을 돌보지 않게 됩니다.


어느 때 사막을 가로질러 가는 대상(隊商)과 함께 여행을 하던 여인이 잠들어 있을 때 대상들이 떠나는 바람에 아이와 함께 뒤에 남게 되었습니다.  태양이 하늘 높이 솟아올라 모래가 점점 뜨거워지자 엄마는 광주리를 놓고 자기 발밑에 옷가지를 두었습니다. 계속해서 모래가 참을 수 없을 만큼 뜨거워지자 결국 엄마는 아이를 자기 몸 아래에 두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어머니마저도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자식을 희생시킨다.”는 이야기가 있게 된 것입니다.


유신견에 토대를 둔 이 자기사랑 때문에, 사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행복이나 자기 가족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또한 자신의 이익을 채우기 위해 악행도 서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항상 하는 자아에 대한 믿음으로 선업을 짓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신견에 자극 받아 내생의 행복을 위해 보시, 지계, 선정 등을 닦습니다. 그 결과 천신계와 범천계에 태어나지만 거기서도 역시 늙음, 죽음, 다른 삶의 괴로움을 겪어야 합니다.


요컨대, 현생이나 내생의 행복을 추구하는 모든 노력은 다 유신견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한 업의 노력이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kāmā-upādāna)에서 비롯되는 업의 노력과 다른 점은, 후자의 원동력이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인 반면에 

전자의 주요 동기는 개인적 실재에 대한 집착이라는 점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신견에 강하게 집착하고 있는 사람의 이기주의는 감각적 욕망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습니다.


유신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성자들은 선행을 할 때 오로지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kāmā-upādāna)으로부터만 동기부여를 받습니다. 그래서 아나따삔디까, 위사카, 마하나마192의 보시, 지계, 수행은 인간계와 천상계의 보다 나은 삶이나 더 높은 단계의 도를 얻기 위한 욕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75. 욱가 장자 이야기



불환자인 성자는 색계와 무색계의 지복과 아라한과에 대한 욕구 때문에 선행을 할 것입니다. 아라한이 되어야 감각적 갈애가 제거됩니다. 불환자인 수행자의 경우 선행을 하는 동기는 아라한과를 얻고자 하는 욕구임이 『증지부』「욱가경(Ugga sutta)」(A8:21)과 「마음에 흡족한 공양을 올리는 자 경(Manāpadāyī sutta)」(A5:44)에 나오는 욱가(Uggā)장자193의 이야기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욱가는 웨살리(Vesāli)시의 장자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욱가 장자가 구족한 8가지 놀라운 덕성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한 비구가 세존께서 말씀하신 8가지 놀라운 덕성이 무언인지를 묻자, 욱가는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지만 자신은 다음과 같은  8가지 특유한 덕성을 구족했다고 말했습니다.


(1) 욱가가 부처님을 처음 뵈었을 때 고따마(Gotama)는 진정으로, 완전히 깨달은 부처님이라고 단호하게 결론지었습니다.


(2) 욱가가 부처님의 법문을 들었을 때 사성제를 관통하는 불환자의 통찰지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성관계의 금지를 포함한 오계를 지켰습니다. 


(3) 욱가는 네 명의 젊은 아내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욱가는 아내들에게 자신은 이제 성관계를 하지 않을 것 이니 부모의 집으로 돌아가거나 자신들이 선택한 남자와 재혼해도 좋다고 허락했습니다. 욱가는 가장 나이 많은 아내의 요청대로 그녀가 사랑하던 남자에게 보내면서 기꺼이 결혼식까지 치러주었습니다.


(4) 욱가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높은 덕성을 지닌 성자에게 보시하는데 쓰기로 결심하였습니다.


(5) 욱가는 비구들을 공손하게 대했습니다.


(6) 욱가는 비구들의 법문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경청하였으며, 비구들이 법문하지 않으면 자신이 법문을 했습니다.


(7) 천신들이 욱가를 찾아와서“부처님의 교법194은 훌륭합니다.”라고 말하면, 욱가는 천신들이 그렇게 말하든 말하지 않던 법은 훌륭한 교법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욱가는 천신들과의 대화에 우쭐해 하지도 않았습니다.


(8) 욱가는 낮은 욕계에 머물게 하는 오하분결(五下分結)195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음을 스스로 알게 되었습니다.(즉 불환과를 얻었음을 스스로 알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이러한 여덟 가지 덕성을 구족하고 불환과를 얻은 욱가 장자가 자신이 소중히 아끼는 음식과 가사를 부처님께 바쳤습니다.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보시의 성품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즐거워하는 것이나, 자신이 매우 소중히 여기는 것을 보시하는 사람은 자신이 갈망하는 것을 얻는다. 높은 덕성을 지닌 성자에게 보시하는 사람은 보통사람들이 하기 힘든 보시행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얻는다.”


 몇 년 뒤 욱가는 죽어서 범천계인 정거천(淨居天)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부처님을 찾아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전생에 자신의 가장 소중한 음식을 부처님께 보시하였을 때 세웠던 서원의 진정한 목표였던 아라한과를 얻었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보시가 가져다주는 업의 이익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보시자가 아주 소중히 하는 것을 보시하면 아주 소중한 것을 얻고, 진귀한 것을 보시하면 진귀한 것을 얻으며, 아주 칭찬할 만한 것을 보시196하면 아주 칭찬할 만한 과위를 성취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자신이 가장 아끼고 소중히 하는 물건들을 보시하는 업의 과보로 거룩한 삶[梵行]을 사는 최고선, 즉 아라한과까지도 얻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욱가의 보시는 아라한과를 얻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러한 욕구,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kāmā-upādāna)이 욱가의 동기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이라는 용어를 아라한과를 얻고자 하는 욕구와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을 반대하고 오히려 선한 의욕197(kusala-chanda)이란 명칭을 붙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럴 경우에 보시와 지계와 같은 성자들이 행하는 선업은 어떤 종류의 집착(upādāna)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설명을 해야만 할 것입니다.





76. 위빠사나 수행과 집착



위빠사나 수행도 존재의 괴로움에서 영원히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kāmā-upādāna)이라고 여겨집니다. 범부는 네 가지 집착198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명상해야만 하지만 성자들은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kāmā-upādāna)을 극복하기 위해서 명상합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은 집착의 정복을 뜻합니다.「청정도론」과 「삼모하위노다니199」와 같은 주석서에 따르면 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선행을 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무명은 선행의 간접적인 원인이며, 또 위빠사나 명상은 그러한 해탈을 위해 닦아야 하는 욕계의 선행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그러면 과연 위빠사나 수행으로 재생에 이르게 되는지에 대한 의문이 일어납니다. 『증지부』주석서와 「발취론」은 그러한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증지부』 주석서에 따르면200처음 세 가지 바른 견해[正見]는 좋은 재생에 이르고, 마지막 두 가지 바른 견해[正見], 즉 과의 바른 견해(phala-sammādiṭṭhi)와 위빠사나의 바른 견해(vipassanā-sammādiṭṭhi)는 수행자로 하여금 윤회로부터 벗어나는데 이바지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박식한 쭐라바야(Cūḷa-bhaya) 장로201에 따르면 수행자는 아라한과를 얻기 전까지 7번의 재생을 받는다고 합니다.「발취론」에 따르면, 무량함 (appamāṇa)에 대한 관찰은 욕계에서의 재생에 이른다고 하며, 주석서는 무량함202의 의도(appamāṇa-cetanā)를 종성203의 의도(gotrabhū-cetanā)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므로 아라한과를 얻기 전까지는 위빠사나 수행도 재생을 일으킬 수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합니다.


하지만 위빠사나는 모든 감각대상의 무상· 고· 무아를 꿰뚫는 통찰지, 즉 감각대상에 대한 갈애라는 번뇌를 막는 통찰지를 통해서 윤회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을 보장합니다. 이렇게 갈애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업과 재생이 일어나지 않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지혜는 일시적 버림(tadaṅga-pahāna)으로 업과 그 윤회의 과보를 상쇄하는데 이바지 합니다.


 게다가, 귀납적인 일반화를 통해서 수행자는 관찰하는 다른 현상들의 무상· 고· 무아를 깨닫습니다. 그리하여 억압에 의한 버림(vikkhambhana-pahāna)204으로 번뇌와 그 업의 잠재력을 피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번뇌를 근절하는 성스러운 도의 지혜가 따라옵니다.


이 성스러운 도의 지혜가 출현하는 것은 정부 부서의 최고책임자가 공문서에 서명을 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부서 최고 책임자의 역할은 사실 부하직원이 한 많은 업무들을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깨달음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위빠사나 수행의 주요한 기여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은 공문을 작성한 부서 직원의 공로를 무시할 수 없는 것과 같거나, 반복적인 톱질로 누적된 효과가 마침내 나무를 자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나무를 한번에 쓰러뜨릴 수 있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청정도론」의 복주석서에서“ 도의 초월지는 수행자가 세간의 위빠사나 지혜로 극복하려고 전력을 다한 번뇌들만을 쳐부수고, 뿌리 뽑는다."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명상하지 않는 사람들은 지복과 자아의 실재가 있다는 전도된 인식을 지낸 채 힘써 노력합니다. 이 전도된 인식으로 갈애, 업의 노력, 재생, 윤회에 내재하는 모든 괴로움에 이르게 됩니다.





77.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

                                                        


연기의 가르침은 (1) 무명(無明) (2) 업형성력인 상카라[行] (3) 식(識) (4) 정신-물질[名色] (5) 여섯 감각장소[六入] (6) 감각접촉[觸] (7) 느낌[受] (8) 갈애[愛] (9) 집착[取] (10) 존재[有] (11) 태어남[生] (12) 늙음과 죽음[老死]의 12가지 원인과 결과를 설하고 있습니다.


연기의 가르침에 따르면 무명과 갈애는 괴로움의 주된 근원입니다. 삶의 회전에는 전반부와 후반부라는 2개의 바퀴가 있습니다. 전반부의 삶의 회전은 무명을 그 주된 근원으로 하고 느낌으로 끝나며, 후반부의 삶의 회전은 갈애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납니다. 전반부의 삶의 회전에는 전생의 무명(無明)과 업헝성력인 상카라[行]가 태어남[生]에 이르는 반면 후반부의 삶의 순환에는 갈애와 집착이 내생에 태어남을 일으킵니다. 이 두 가지 삶의 바퀴는 사람의 일생이 어떻게 원인과 결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또한, 연기법을 시간의 척도로 설명한다면, 무명과 상카라는 전생의 두 연결고리 이고, 식에서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는 현생과 관련되어 있으며, 태어남, 늙음, 죽음은 우리에게 닥쳐올 내생의 연결고리입니다. 이렇게 연기법은 삼세(三世)205를 나타냅니다.




 

78. 과거의 다섯 가지 원인


 

연기의 가르침은 무명(無明)과 상카라[行]만으로 과거의 원인을 설명하지만, 사실 무명의 뒤에는 변함없이 갈애[愛]와 집착[取]이 따라옵니다. 그리고 상카라[行]도 항상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무애해도」에서는 연기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습니다.

 

“무명은 우리가 업의 행위를 하는 동안 우리를 지배한다. 상카라는 노력의 집합과 발휘를 뜻한다. 갈애는 현생과 내생의 업의 과보에 대한 갈애이다. 집착은 업과 그 과보에 집착하는 것이다.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는 의도이다. 과거의 이러한 5가지 요소가 현재의 재생의 원인을 이룬다.”

 

그래서 우리가 전생의 원인을 완전히 설명할 때는 (1) 무명(無明) (2) 갈애[愛] (3) 집착[取] (4) 상카라[行] (5)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라는 이 다섯 가지 연결 고리를 모두 고려해야만 합니다. 이 가운데 (1) 무명(無明) (2) 갈애[愛] (3) 집착[取]을 번뇌의 회전(kilesa-vaṭṭa)이라고 합니다. (4) 상카라[行] (5)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는 업의 회전(kamma-vaṭṭa)이라고 합니다.


주석서는 상카라[行]를 상카라의 행위가 있기 전에 선행하는 앞선 노력과 계획 등으로,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는 행위를 하는 순간의 의도로 설명하면서 구별을 짓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시행의 예비단계로 돈을 구하고, 물건을 사는 일 따위가 상카라[行]이고, 보시행을 하는 순간의 마음상태가 업으로서의 존재[業有]입니다. 살인을 하는 예비 행위들이 상카라[行]이고, 살인을 하는 순간의 의도가 바로 업으로서의 존재[業有]입니다.




 

79. 상카라[行]와 업으로서의 존재[業有]


 

상카라[行]와 업으로서의 존재[業有]간의 또 다른 구별은 자와나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살인이나 보시행은 일곱 가지 자와나를 포함한다고 합니다. 처음 6개의 자와나는 상카라[行]이고 마지막 자와나는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라고 합니다.

 

상카라[行]과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를 구분 짓는 세 번째 방법은 의도(cetanā)를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라고 하고 다른 마음부수[心所]들을 상카라[行]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구분 방법은 우리가 색계와 무색계의 선행을 말할 때 유용합니다. 이 세 가지 모든 구분 방법은 욕계의 선하거나 악한 행위들의 경우에 적용됩니다. 하지만 첫째 방법은 잘 알고 있지 못한 사람들에게 가장 교화적입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재생은 임종의 순간에 죽어가는 사람이 주의를 기울이는 회상, 표상, 환영중의 하나로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청정도론」에 따르면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는 전생의 선행이나 악행을 하게끔 한 의도(cetanā)로, 상카라는 임종의 체험으로 조건 지어지는 마음부수로 정의될 수 있다고 합니다.




 

80. 과거의 원인에서 비롯된 현재의 결과



그리하여 과거의 다섯 가지 원인을 이루고 있는 번뇌의 회전(kilesa-vaṭṭa)과 업의 회전(kamma-vaṭṭa)때문에, 정신-물질[名色], 여섯 감각장소[六入], 감각접촉[觸], 느낌[受]과 함께 재생연결식이 일어납니다.


이 다섯 결과를 뭉뚱그려서 과보의 회전(vipāka-vaṭṭa)이라고 합니다. 무명 때문에 범부들은 모든 감각대상과 마노의 대상, 즉 육경(六境)이 즐거움이라는 전도된 인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범부들은 갈애를 일으키고, 그에 따라 괴로움의 회전을 의미하는 원인과 결과의 악순환이 다시 되풀이 됩니다.

 

식(識), 여섯 감각장소[六入]등은 과거 업의 과보로 일어납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현상들처럼 원인과 결과의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자아, 신, 제 1운동자가 있을 여지가 없습니다. 유일한 차이점은 이 인과관계를 지배하는 도덕적 법칙과 즐겁거나 괴롭거나 간에, 과거의 선하거나 불선한 상카라에 따르는 느낌의 본성입니다. 실제로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을 갖는 사람은 없으며, 그러한 느낌을 갖도록 원인을 제공하는 존재도 없습니다. 삶이란 무명, 갈애, 집착 등의 요소에 의해 조건 지어진 식(識), 감각접촉[觸], 느낌[受] 등의 연속체일 뿐입니다206



 


81. 위빠사나 수행에 필요한 지식

 


연기나 아비담마에 대한 피상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연기나 아비담마에 대한 지식 없이 위빠사나를 수행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삶이란 무상· 고· 무아가 특성인 정신-물질의 과정인 것만 알고 있으면 스승의 지도를 따를 수 있기 때문에 학식 있는 스승의 지도를 받는 수행자는 심오한 불교철학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간단한 지식만으로도 아라한과를 얻고자 하는 수행자의 지성적 요구를 충분히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은 『중부』「애진소경(Cūḷataṇhāsankhaya Sutta)」(M.37)에 나오는 부처님의 말씀으로도 충분히 입증됩니다. 이 경에서 세존께서는 계속해서 위빠사나 수행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경전에서는 정신-물질에 대한 수행자의 이해를‘최상의 지혜로 안다’는 뜻인 아비쟈나띠(abhijānāti)207라고 하고 있으며 주석서에서는 통달지(pariññā)를 뜻하며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nāma-rūpa-pariccheda-ñāṇa)와 원인과 결과를 구별하는 지혜(paccaya-pariggaha-ñāṇa)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관찰을 통해서 수행자는 모든 현상을 무상· 고· 무아로 분석하여 철저하게 압니다(parijānāti). 여기서 철저하게 안다는 뜻인 빨리어 빠리자나띠(parijānāti)208는 명상의 지혜(sammasana-ñāṇa)와 다른 위빠사나 지혜를 가리킵니다.


연기법은 존재로써의 자아나 나를 배제하는 삶의 조건(paccaya)과 원인과 결과 관계에 대한 지식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연기법의 12각지나 20가지 주요 사항을 모두 완벽하게 알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위빠사나 수행이 그러한 종합적인 지식을 전제조건으로 한다면 쭐라빤타까(Cūḷa-pantaka)존자209처럼 머리 나쁜 사람은 수행할 엄두조차 못 냈을 것입니다. 존자는 기억력이 너무 나빠서 4개월 동안 배운 몇 구절 게송도 외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지도에 따라 명상을 닦아서 몇 시간 만에 아라한과를 얻었습니다.

 

또 다른 여신도, 마띠까마따(Mātika-mātā)는 자신에게 명상을 지도해주던  비구보다도 먼저 성스러운 도의 세 번째 단계인 불환과를 성취했습니다.


그녀는 아비담마와 연기에 대해 많이 알지 못했습니다. 이 여신도와 쭐라빤타까 같은 수행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을 철저히 배우지 않았더라도 명상을 하면 성스러운 도를 얻는 것이 가능합니다.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의 진정한 본성을 알지 못하는 것이 바로 무명입니다. 감각대상을 좋아하는 것이 갈애이며, 감각대상을 갈구하는 것이 집착입니다. 자신의 욕망의 대상을 추구하는 것과 현생이나 내생의 자신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서 선행이나 악행을 하는 것은 상카라[行]와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를 뜻합니다. 이 다섯 가지 요소가 현재의 원인이며 죽은 뒤에 재생이 일어나도록 합니다.


연기법은 느낌[受], 갈애[愛], 집착[取]의 세 가지 원인만 언급하지만 사실 이 세 가지 요소는 무명(無明)과 상카라[行]라는 다른 두 가지 원인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이 무명(無明)과 상카라[行]는 각각 갈애[愛]와 업으로서의 존재[業有]의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애해도」는 이러한 모든 다섯 가지 요소를 미래에 일어날 재생의 원인으로 설명합니다.





82. 현재 원인의 제거



모든 선업이나 악업은 이러한 5가지 현재 원인과 계기의 완벽한 결합을 뜻하며 그러한 결합은 한 생애에 수없이 많을 수 있습니다. 어떤 환경에 처하면 이러한 원인은 죽고 나서 태어나게 하거나 두 번, 세 번의 재생을 연달아 일으킬 것입니다. 모든 생은 늙음, 근심, 죽음 등과 결부되어 있으며, 우리가 이러한 괴로움을 피하고자 한다면 현재의 원인을 제거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모든 물질적 현상들이 일어나는 순간“봄” “들림”등으로 주시해야 합니다. 집중이 깊어짐에 따라, 우리는 모든 물질적 현상들이 즉시 사라짐을 주시하게 되고 그들이 무상하고, 불만족스럽고, 의지할 수 없는 것임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앎은 갈애, 집착, 업의 노력을 부추기는 무명과 전도된 인식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다섯 가지 현재의 원인들이 작용하지 않고 활동하지 못하게 하며, 그래서 재생과 재생의 결과로 생긴 괴로움을 미연에 방지하게 됩니다.


이렇게 원인을 제거하는 방법을 일러 관찰을 통해서 몇몇 번뇌를 극복하는 일시적 버림, 또는 반대되는 것으로 대체하여 버림(tadaṅga-pahāna)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수행자는 관찰을 통해서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적멸(tadaṅga-nibbuti)을 얻습니다.


나중에 모든 상카라의 소멸과 열반의 실현을 뜻하는 성스러운 도의 통찰지가 생깁니다. 이것이 근절에 의한 버림(samuccheda-pahāna)입니다. 그때 번뇌와 업은 일거에 완전히 제거됩니다. 예류과를 얻은 수행자는 악처에 떨어지게 하는 번뇌와 업을 극복하며, 이로써 선처에서 7번 이상의 재생할 것입니다.


일래과를 얻은 수행자는 2번 더 재생하도록 하는 번뇌를 극복하며, 불환과를 얻은 수행자는 욕계에 재생하게 하는 번뇌와 업을 제거합니다. 마침내 아라한과를 얻는 수행자는 남아있는 번뇌와 업을 모두 쳐부수게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수행자는 번뇌로부터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에 공양 받아 마땅한 성자인 아라한이 됩니다.





83. 아라한의 인생관


 

 아라한은 감각대상의 본성에 전도된 인식이 없습니다. 아라한은 감각대상의 불선(不善)을 알고 있고, 이는 무명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괴로움의 진리[苦]를 깨달았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무엇에도 갈애가 없습니다.


아라한도 불가피하게 식사를 하고, 잠을 자는 등의 생리적인 욕구를 들어줘야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형성됨에 기인한 괴로움(行苦 sakhāra-dukkha)으로 생각하고 기뻐할 만한 어떤 것도 찾지 못합니다.


 그러면 아라한이 이러한 괴로움을 끝내기 위해 빨리 죽기를 바라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하지만 때 이른 죽음이나 육신의 해체를 바라는 마음은 파괴적 욕망으로 아라한은 거기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래서「장로게」(Thag.654; 606; 1003)에는 죽음을 바라지도 않고 삶을 바라지도 않는다고 하는 어떤 아라한의 게송210이 있는 것입니다.


 삶이란 크게 보아 오취온(五取蘊)에 내재된 괴로움의 짐을 뜻하기 때문에 아라한은 오래 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비록 오취온의 부담은 끊임없이 보살핌과 돌봄을 요구하지만 조금도 의지할 만하지 않습니다. 많은 중년기의 사람과 노인에게 삶은 좌절, 실망, 괴로움에 지나지 않습니다.


삶의 조건은 갈수록 나빠지고, 건강은 점점 나빠지며 완전한 무너짐과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무명과 집착 때문에 생을 즐거워합니다. 반면 아라한은 무명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삶을 지루하고 따분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삶에 염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라한이 죽음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죽고자 하는 욕구는 아라한이 이미 정복한 공격적인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아라한이 바라는 것은 완전한 열반[般涅槃]에 드는 것으로, 이러한 바람은 근로자가 일당이나 월급을 받고자 하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


 근로자는 생계수단을 위해 불가피하게 일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과 고난에 처하기를 바라지 않지만 그렇다고 직장을 잃는 것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돈으로 급여 받는 날만 손꼽아 기다립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라한도 완전한 열반을 얻는 순간만을 기다립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자신의 수명을 생각하면 얼마나 더 정신-물질의 무더기인 오온(五蘊)의 무거운 짐을 더 짊어져야 하는지 생각합니다. 무명이 사라졌기 때문에 열반에 들고나면 아라한의 삶의 흐름은 완전히 끊어집니다. 그래서 이를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211이라고 합니다.





84. 단멸이 아닌 괴로움의 소멸



자아나 영혼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은 열반을 중생의 영원한 죽음이라고 비난합니다. 사실 열반은 정신-물질 현상과 그 원인인 업과 번뇌가 회전하지 않음으로써 비롯되는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갈애가 완전한 소멸되면 집착이 소멸되고, 집착이 소멸되면 존재[有]가 소멸됨을 지적하셨습니다. 재생이 일어나지 않음으로써, 늙음, 죽음, 다른 괴로움도 완전히 소멸합니다.


태어남, 늙음, 죽음이 중생을 핍박하는 괴로움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견해입니다. 하지만 사실상 이러한 괴로움은 정신-물질 과정에 의해서만 특징지어지는 것으로 살아있는 실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자아나 영혼은 없기 때문에 재생과 괴로움의 소멸을 가지고 중생의 단멸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열반을 단멸(斷滅)로 여기는 사람들은 자아의 실재가 있다는 전도된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지혜로운 불교신도에게 열반은 그저 괴로움의 소멸을 뜻할 뿐입니다. 이는 『상응부』「야마까경(Yamaka Sutta)」(SN.22.85)에 나오는 부처님 당시의 야마까(Yamaka) 비구 이야기에서 잘 드러납니다.  

                                                  



85. 야마까 비구 이야기



야마까 비구는 아라한은 죽고 나면 단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비구들이 그러한 견해의 잘못됨을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장로는 여전히 자신의 견해를 고집했습니다. 사리뿟따 존자가 그를 불러서 묻자, 야마까는 오온(五蘊)은 모두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그러한 오온을 자신의 소유나 자아로 여기는 것은 잘못임을 인정했습니다. 사리뿟따는 장로에게 오온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무명에서 벗어나 집착을 여의고 속박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리뿟따의 법문을 듣는 동안 야마까는 예류과를 얻고는 그릇된 견해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리뿟따는 야마까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사리뿟따의 질문에 대해 야마까는 아라한을 육체적인 몸[色], 느낌[受], 인식[想], 상카라[行], 식(識)과 동일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또 아라한이 색온(色蘊), 수온(受蘊)이나 다른 오온들 없이 다른 곳에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라한, 즉 살아있는 실재는 죽기 전에도 오온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기에, 완전한 열반[般涅槃]에 든 뒤에 다음에 아라한의 단멸에 대해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야마까는 자신이 그릇된 견해를 가졌음을 시인했습니다. 이제 야마까는 그릇된 견해에서 벗어났으며 아라한의 사후운명에 대해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를 알았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그에게 “아라한은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라고 물었다면 야마까는 “아라한의 죽음은 무상한 오온에 내재하는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을 뜻합니다.”라고 답변했을 것입니다.


이 말이 옳다는 것을 사리뿟따가 확인해주었습니다. 장로는 오온을 친구로 가장한 살인자에 비유하고, 오온을 자아와 동일하게 여기는 것은 마치 살인자를 환영하는 것과도 같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야마까는 맨 처음 아라한은 죽으면 단멸하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자아의 실재가 있다는 전도된 인식을 전제로 하고, 이러한 단멸론적인 시각으로 열반을 보는 것을 단견(斷見)이라고 합니다. 이 단견은 열반이란 죽은 뒤의 자아(atta)를 부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야마까가 진리를 깨달았을 때 예류과를 얻었으며, 아라한의 죽음은 무상한 오온에 내재하는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을 뜻한다고 말했습니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요약합니다. 보고, 듣는 정신-물질의 현상을 주시하지 못하면 무명(無明), 갈애[愛], 집착[取], 업(業), 상카라[行]가 일어나며, 이로써 미래에 태어남[生], 늙음· 죽음[老死]이 있습니다. 모든 현상에 대한 알아차림은 무명 등과 같은 현재의 다섯 가지 원인과 괴로움을 포함하는 다섯 가지 과보가 생기는 것을 미연에 방지합니다.





86. 오온의 성질에 대한 와지라 비구니의 말



게다가, 『상응부』「와지라경(Vajirā Sutta)」(SN.5.10)에 나오는 와지라(Vajirā) 비구니의 유명한 말에서도 열반은 괴로움의 소멸임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와지라 비구니가 기원정사 근처의 나무아래에 좌정하고 있을 때 마라가 나타나서 그녀를 겁을 주고 당황하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이봐,  비구니! 누가 중생을 창조했느냐? 그 창조자는 어디에 있느냐? 중생은 어떻게 생겨났고, 또 어떻게 끝나는가?”


와지라 비구니는 대답했습니다.“오, 마라여! 너는 중생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네가 중생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음은 전도된 인식이 아니냐? 네가 중생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상카라[行]의 무더기일 뿐이다.


이 무더기에서는 어떠한 중생도 발견되지 않는다. 중생이 색온(色蘊), 수온(受蘊) 따위의 오온(五蘊)의 집합을 가리키는 단순한 용어에 불과한 것은, 마치‘마차’가 바퀴와 차축과 멍에 등의 결합을 가리키는 용어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중생은 없고 단지 오온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괴로움을 일으킨다. 사실, 일어나고 존재하고 소멸하는 것은 단지 괴로움일 뿐이다. 괴로움 외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그러므로 중생이란 다만 개념적인 낱말입니다. 중생은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존재하지 않고, 무명(無明), 갈애[愛], 집착[取], 업, 업의 생성을 원인으로, 식(識), 정신-물질[名色], 여섯 감각장소[六入], 감각접촉[觸], 느낌[受]을 그 결과로 하여 이루어진 정신-물질 과정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이러한 결과는 다시 재생과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87. 네 가지 층, 세 가지 연결, 스무 가지 요소



12연기는 과거의 원인의 첫째 무리, 현재의 결과의 둘째 무리, 현재의 원인의 세째 무리, 그리고 미래의 결과의 마지막 그룹의 인과관계의 사슬에 포함된 요소 가운데 네 가지 무리를 언급합니다. 이 무리를 빨리어로는 상가하(saṅgaha), 혹은 상케빠(saṅkhepa)라고 하는데‘층’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층에는 세 가지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1) 과거의 원인과 현재의 결과 사이의 연결인데, 원인은 상카라[行]이며 결과는 식(識)입니다. (2) 현재의 원인과 현재의 결과 사이의 연결인데, 원인은 느낌[受]이며 결과는 갈애[愛]입니다. (3) 현재의 원인과 미래의 결과사이의 연결인데, 원인은 존재[有]이며 결과는 태어남[生]입니다.

 

 그리고 과거의 다섯 가지 원인, 현재의 다섯 가지 결과, 현재의 다섯 가지 원인과 미래의 다섯 가지 결과를 포함하는 스무 가지 성질(ākarā)이 있습니다.

 




88. 세 가지 회전



 또 연기법은 (1) 번뇌의 회전(kilesa-vaṭṭa) (2) 업의 회전(kamma-vaṭṭa) (3) 과보의 회전(vipāka-vaṭṭa)이라는 세 가지 회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번뇌의 회전(kilesa-vaṭṭa)은 무명(無明), 갈애[愛], 집착[取]으로 이루어져 있고,

업의 회전은 상카라[行]와 존재[有]로 이루어져 있고, 과보의 회전은 식(識), 정신-물질[名色], 여섯 감각장소[六入], 감각접촉[觸], 느낌[受]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셋째 과보의 회전은 다시 번뇌의 회전에 이르고, 번뇌의 회전은 다시 업의 회전을 일으키는 등으로, 세 가지 회전은 끊임없이 돌면서 악순환을 계속합니다.


이러한 세 가지 회전이 윤회고를 이루고 있습니다. 윤회란 원인과 결과, 즉 인과관계에 의해 진행되는 정신-물질 과정의 연속을 뜻합니다.


 우리는 윤회고 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행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성제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과 친숙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보고, 듣는 순간 관찰합니다. 우리는 끊임없는 정신-물질 현상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깨닫습니다.


이 위빠사나의 지혜로 우리는 전도된 인식에 휘말리지 않고 재생과 괴로움에 이르는 갈애와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청정도론」은 업이 번뇌의 회전에 이바지 한다고 설명합니다. 어떤 수행자는 정신-물질의 복합체가 어떻게 업의 회전과 과보의 회전에서 비롯되는지를 보며, 오로지 업과 그 과보만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과거의 업의 결과로 현재의 정신-물질이 일어납니다. 현재 업의 원인으로써 정신-물질은 현생의 업의 행위를 일으킵니다. 이러한 업의 행위는 재생을 일으킵니다. 이러한 식으로 끊임없는 정신-물질의 일어남, 또는 생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정신-물질의 일어남, 또는 생성이란 감각장소들, 즉 봄과 들음 등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뜻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번뇌, 업, 재생을 연달아 일으킵니다. 그렇게, 그리고 정신-물질의 과정은 업과 그 과보의 회전에 의해 조건 지어집니다.


「청정도론」(Vis.XIX.Ⅰ)에 따르면, 이러한 위빠사나의 지혜가 원인과 결과를 구별하는 지혜(paccaya-pariggaha-ñāṇa)로,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度疑淸淨 kaṅkhāvitaraṇa-visuddhi)212을 뜻합니다.




 

89. 연기의 네 가지 측면



 우리가 연기법에서 명심해야 할 네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연속되는 세 가지 생[三世]을 구성하고 있는 정신-물질 과정의 개별적 성품입니다. 비록 연기법이 모든 현상은 조건 지어져 있음을 강조하지만, 무명(無明)과 갈애[愛]등의 원인은 한 사람과만 연관되고, 식(識)과 정신-물질[名色]등의 다른 결과는 별개의 사람과 연관된다고 보면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견해는 죽은 뒤에 중생이 완전히 단멸되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불교에서 부정하는 단멸론입니다.


사실, 정신-물질 과정은 망고 나무의 생장과 비슷합니다. 망고의 씨앗이 묘목이 되고, 묘목은 어린 나무가 되며, 어린 나무는 큰 나무로 성장합니다. 여기서 씨와 묘목과 어린 나무, 다자란 나무가 원인과 결과 관계의 끊이지 않는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서, 다자란 나무와 어린 나무를 구별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무명, 상카라, 식 등은 원인과 결과에 의해 끊이지 않고 연속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그러한 과정과 연관된 어떤 특정한 사람을 거론하는 것은 합당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승가를 분열시킨 자는 데와닷따였으며 지금 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자도 데와닷따입니다. 선행을 한 자는 아나따삔디까였으며 죽어서 천신계에 태어난 자도 바로 아나따삔디까입니다.




 

90. 사띠 비구의 사견



이렇게 업의 행위를 한 사람과 그 업의 과보를 받는 사람을 동일하게 보면 우리는 단견을 피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중생이 옮겨간다고 믿습니다.『중부』「대애진경(Mahātaṇhāsankhaya Sutta)」(M38)에 나오는 부처님 당시의 사띠(Sati) 비구가 지녔던 이러한 그릇된 견해를 상견(常見)이라고 합니다.

 

사띠 비구가 이러한 사견을 가지게 된 것은 그가「본생경」을 읽었기 때문으로, 부처님께서는 이러한「본생경」의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은 바로 자신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사띠 비구는 이렇게 추론했습니다.“보살의 육체적인 몸은 죽어서 분해되었기 때문에 보살의 마지막 생까지 전달된 것은 그 가운데 아무것도 없다. 육체가 분해된 뒤에도  잔존하고, 각각의 생에서 보살이라는 개별적 실체의 중핵을 이루는 것은 오직 식(識)213이다. 다른 모든 중생도 마찬가지이다. 육체적인 몸과는 다르게, 식(識)은 분해되지 않고 한 몸에서 다른 몸으로 옮겨가며 영원히 존재한다.”

 

 하지만 「본생경」은 업을 행한 자와 그 과보를 받는 자로써 원인과 결과 관계의 연속성만을 강조하지 식(識)이나 또 다른 특성이 고스란히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전이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인과적 연결 때문에, 본생경 이야기에 나오는 영웅은 마지막에 싯닷타 태자가 되었다고 추정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사띠 비구에게 질문하시고 난 부처님께서는 식은 조건 지어진 것이며 그에 상응하는 원인이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것214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식을 그 연료에 따라 이름 붙여지는 불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장작에서 일어난 불은 장작불이며, 건초에서 시작된 불은 건초불 등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식은 언제나 무언가에 의해서 조건 지어지며, 식은 조건지우는 것에 따라서 이름 지어집니다.


그래서 눈[眼]과 형상[色]에서 일어나는 식은 안식(眼識)이라고 하며, 귀[耳]와 소리[聲]에서 일어나는 식은 이식(耳識)이라고 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함께 맞부딪쳐 식(識)을 생기게 하는 감각대상[境]과 감각기관[根]에 따라 식은 세분화됩니다. 불의 원인이 바뀌면 그 이름도 바뀝니다.


건초불이 관목으로 옮겨 붙이면 관목불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식이 의존하는 감각대상[境]과 감각기관[根]에 따라서 식은 그 이름을 바꿉니다. 같은 감각대상과 같은 감각기관에서도, 정신과정의 매 순간마다 일어나는 것은 새로운 식(識)입니다. 그렇게 정신 과정에 대한 진리를 깨닫는 것은 단견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반면에 정신과정에 대한 그릇된 견해는 상견을 가지게 합니다.




 

91. 각 현상의 분명한 특성



 연기법의 또 다른 특성은 인과의 사슬을 이루고 있는 다른 현상들 간의 구별입니다. 그래서 무명은 상카라를 조건 지우는 분명한 현상이며, 상카라는 재생 등에 이르는 다른 분명한 현상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구분하는 것이 원인과 결과 관계를 깨닫는 것이며, 이 깨달음은 우리로 하여금 상견에 휘말리지 않도록 합니다. 또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자아가 죽은 뒤에도 남아서 다른 생으로 옮겨간다는 전도된 인식을 없애는데 이바지 합니다.

 

 사실, 상견이나 단견은 사람들이 연속적인 두 생간의 정신 상태의 연결이나 그 두 생사이의 구분을 지나치게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만약 우리가 지혜롭지 못하게 현생과 전생의 정신-물질을 자신과 동일시한다면, 상견으로 치달릴 것입니다. 반면에, 정신-물질이 딱 양분되어 있음을 너무 강조하면, 단견의 덫에 걸리기 쉽습니다.


올바른 태도란 원인과 결과로 인해 한 생에서 또 다른 생으로 중단 없이 흐르는 정신-물질의 흐름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의 핵심은 정신-물질의 개별적 본성에 대한 인상을 우리에게 각인시켜 주고, 그렇게 함으로써 업의 작용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과거의 정신-물질이나 자아의 전이를 암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이전의 정신-물질이 소멸하고 현생에서 과거의 업에 토대를 둔 새로운 정신-물질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위빠사나 수행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매 순간 일어나는 정신-물질을 관찰하는 수행자에게는 연기법의 이 두 측면이 명백합니다. 수행자는 무명과 갈애와 집착 등으로 이루어진 원인과 결과의 흐름을 알게 됩니다. 수행자는 정신-물질 과정의 연속성과 중단 없는 흐름을 알기 때문에 단견을 철저히 배격합니다.


 게다가, 관찰할 때마다 일어나는 새로운 현상을 알고 있기에, 수행자는 감각대상과 그것을 아는 마음을 구별합니다. 관찰을 하면 느낌, 갈애, 집착, 노력, 식 등은 정신과정에서 별개의 단계로 뚜렷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수행자는 새로운 현상이 일어남을 잘 알기 때문에 상견에서 벗어납니다.



   


92. 노력 없음



연기의 또 다른 측면은 노력 없음(avyāpāra)입니다. 무명은 노력 없이 상카라를 일으키고, 상카라는 노력 없이 재생을 일으킵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지혜는 보고 듣는 어떤 주인공이나 행위자(kāraka-puggala)가 없다는 데 대한 통찰지를 뜻하며, 그리하여 우리는 유신견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청정도론」(Vis.Ⅷ.313)이 설하고 있듯이, 이 원리를 잘못 이해하면 운명론(niyata-vāda)215을 받아들여 도덕적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도덕 회의론자가 되기 쉽습니다.

 

정신-물질 현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는 수행자는 조건 지어진 정신-물질 현상이란 원래 의지가 없음을 똑똑히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정신-물질이란 조건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수행자의 마음과 몸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항상 따라주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깨닫기 때문입니다.

 




93. 결과에 대한 원인의 관련성



 연기의 마지막 측면은 원인과 결과의 일대일 대응(evaṁ dhammatā)입니다. 모든 원인은 적절한 결과에 대해서만 작용하며, 부적절한 결과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원인은 상응하는 결과의 필요충분조건입니다. 이러한 사실에는 업보를 부정하는 견해(akiriya-diṭṭhi)216가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하지만 청정도론이 말하고 있듯이, 잘못 이해한 사람들에겐 이는 운명론(niyata-vāda)의 토대가 됩니다. 관찰하는 수행자들은 각각의 원인에 대한 그 결과의 관련성을 분명히 보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의 일대일 대응과 도덕적 책임의 실재에 대해 아무 의심이 없습니다.


나는 연기의 주목할 만한 사실을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연기의 여러 측면들을 숙고하는 수행자는 이러한 사실이 명확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하지만 연기법은 심오하기 때문에 수행자의 지적수준을 넘어선 몇몇 사실은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것을 완전히 아는 사람은 일체지자(一切智者)이신 부처님뿐입니다. 수행자는 자기 지성의 범위 내에서 최대한 많이 알아야만 합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행자는 스님의 법문을 듣고, 들은 것을 숙고하고, 사념처 수행을 통해서 자신이 이해한 바를 더욱 확고히 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공부방법217 가운데 수행을 해서 생기는 지혜(修慧 bhāvanā-maya-ñāṇa)가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방법으로 통찰지를 얻는 수행자는 성스러운 도를 얻어 악처에 떨어질 위험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94. 결론



 이제 우리는 부처님의 주요한 특성인 아라한에 대한 설명으로 12연기 법문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연기의 공식은 무명(無明)에서 시작해서 늙음· 죽음[老死]으로 끝나는 12가지 각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전반부 회전은 무명(無明)에서 시작해서 느낌[受]으로 끝나고, 후반부 회전은 갈애[愛]에서 시작해서 늙음· 죽음[老死]으로 끝이 납니다. 범천계에서는 걱정과 슬픔 따위가 생기지 않으므로, 그것들은 태어남[生]에서 반드시 비롯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연기의 각지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게다가, 전반부 회전은 분명하게 무명(無明)과 상카라[行]만을 보여주고 있지만, 무명은 갈애[愛]와 집착[取]을 암시하고 상카라는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를 암시합니다. 그러므로 이 다섯 가지 각지(무명, 상카라, 갈애, 집착, 업)들은 모두 과거 원인을 구성하고, 식과 정신-물질[名色], 여섯 감각장소[六入]와 감각접촉[觸]과 느낌[受]은 현재의 결과을 구성합니다. 이러한 각지들은 봄, 들음 등의 순간 분명하게 경험되는 선업과 불선업의 과보입니다.


후반부 회전은 직접적으로 갈애[愛]와 집착[取]과 업으로서의 존재[業有]와 관련되지만, 이 세 가지 원인은 무명(無明)과 상카라[行]를 암시합니다. 그렇듯이 과거의 무명(無明), 갈애[取], 집착[取], 상카라[行], 업으로서의 존재[業有]는 미래에 태어남[生], 늙음 · 죽음[老死]에 이르는 현재의 다섯 가지 원인을 나타냅니다.


이 결과는 식(識), 정신-물질[名色]등의 결과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결과처럼 미래의 결과도 모두 다섯 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과거의 다섯 가지 원인, 현재의 5가지 원인, 미래의 다섯 가지 결과로 구성된 네 가지 층이 있습니다. 층들은 3가지 인과관계를 나타냅니다. 즉, (1) 과거의 원인과 현재의 결과의 관계, (2) 현재의 결과와 현재의 원인의 관계, (3) 이러한 층들에서 부각되는 현상적 존재의 조건, 또는 성질(ākāra)이라고 하는 원인과 결과의 스무 가지 요소가 그것입니다. 이 각지들은 우리가 앞에서 이미 설명한 번뇌· 업· 과보의 회전이라는 회전(vaṭṭa)라는 용어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선업을 지은 사람은 인간계, 천신계, 범천계로 갈 것이고, 악업을 지은 사람은 악처에 태어납니다. 윤회에 얽매어 있는 중생들은 좋은 스승을 만날 때만 선행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스승을 만나기는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부분 악행을 하고 자신의 업보를 괴로움으로 받습니다. 그래서 인과응보에 압도되고, 업의 회전 속에서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만 합니다. 일단 성스러운 도에 들어서면 지옥에 떨어지지는 않지만, 과보의 회전에 있어서는 부처님이나 아라한도 업의 과보를 면할 수는 없습니다.

  




95. 번뇌의 회전을 끊어버림



세 가지 회전을 멈추고자 한다면, 그 원인인 번뇌의 회전을 먼저 없애야 합니다. 번뇌는 보고 들어서 생기기 때문에, 반드시 사념처 수행을 해서 보고 들을 때 번뇌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마타 수행과 사념처 수행은 모든 현상의 무상과 실체 없음을 알게 해줍니다.  이는 수행자가 더 이상 전도된 인식을 지니지 않고 번뇌· 업· 과보의 회전에서 벗어났음을 뜻합니다.


지금부터 부처님의 특성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번뇌· 업· 과보의 세 가지 회전을 완전히 정복하는 방법을 요약 해보겠습니다.





96. 아라한과 부처님의 특성 



부처님의 특별한 칭호는 아라한이며, 이 아라한이란 말은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특성을 나타냅니다.

 

 (1) 부처님께서는 번뇌에서 벗어나셨습니다. 아라한도 번뇌에서 벗어났지만 정신적인 목표를 달성한 뒤에도 계속해서 지배해온 습관에서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이것는 「법구경」주석서(DhA.iv.181f)에 나오는 삘린다왓차(Pilindavaccha)장로의 이야기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장로는 천신들이 사랑하고 부처님께서도 칭찬하던 아라한이었습니다. 하지만 장로는 비구 도반이나 신도들을 다소 무례하게 부르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몇몇 비구들이 장로의 무례함을 부처님에게 불평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유쾌하지 못한 버릇은 장로가 바라문 가문에서 여러 전생을 살아온 데서 비롯된 것으로, 아라한으로써 장로의 속마음은 청정하고 선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위없는 깨달음[正等覺]을 증득한 뒤부터 전생에서부터 내려온 모든 버릇이나 번뇌의 잔영에서 자유롭게 되셨습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특성을 계속해서 생각할 때에는 부처님의 이러한 특성을 명심해야 합니다. 회전의

 완전한 소멸이란 번뇌, 업, 과보의 세 가지 회전에서 자유로워짐을 뜻합니다.

 

(2) 부처님께서는 모든 번뇌를 정복하셨기 때문에 공양 받아 마땅한 분[應供]인 아라한(arahan)218이라고 불립니다. 사람들은 도둑, 뱀 따위의 외부의 적만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훨씬 더 무서운 내부의 적인 번뇌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자신의 정신-물질의 복합체와 번뇌 때문에 괴로움을 겪어야만 합니다.


그 근본 원인은 되풀이 되는 재생과 괴로움을 일으키는 번뇌입니다. 번뇌는 갈애, 성냄, 무명, 자만, 사견, 의심, 해태, 들뜸, 수치심 없음, 양심 없음 등의 모두 열 가지입니다.

  

(3) 부처님의 완벽한 도덕적 청정, 지혜, 깨달음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존경과 공양을 받을 만합니다. 부처님을 숭배하거나 공양을 올린 사람들은 자신의 소원을 다 이루었습니다.

 

(4) 부처님께선 번뇌를 완전히 쳐부쉈기 때문에 홀로 계시거나 대중 앞에 계시거나 속마음은 늘 청정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주위에 사람이 있을 때는 착한 척 하지만 아무도 보거나 듣는 사람이 없을 땐 악행을 하는 위선을 부립니다. 사실, 몰래 나쁜 짓을 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설사 악행을 범한 사람이 사람이나 천신에 의해 목격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양심의 가책까지 들지 않을 순 없습니다. 양심은 자신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가장 의심할 여지없는 목격자이며 미래에 받게 될 괴로운 삶을 가리키는 임종의 표상의 토대가 됩니다.

 

부처님은 모든 번뇌를 완전히 쳐부쉈기 때문에 항상 마음이 깨끗하며 대중 앞에서나 홀로 계시거나 악행을 하고자 하는 욕망이나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5) 부처님께서는 아라한의 칼로 수레바퀴의 살을 없애셨습니다. 수레의 차축은 근본원인인 무명을 나타냅니다. 수레바퀴의 테두리는 늙음· 죽음[老死]을 나타내며 수레바퀴의 살은 상카라[行]등의 중간 연결고리를 나타냅니다.


바퀴살을 제거하면 바퀴가 굴러 갈수 없는 것처럼, 조건 지어진 현상의 사슬에서  중간 연결고리의 파괴는 윤회의 종식을 뜻합니다.

 







97. 바까 대범천 이야기



 윤회를 끝내기위해 맨 먼저 해야 할 것은 그 근본 원인, 즉 무명(無明)을 없애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명에 뒤이어 반드시 상카라[行], 식(識)등이 수반되고 늙음과  죽음[名色]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이는 욕계는 물론 색계범천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옛날 바까(Baka)라는 대범천(大梵天)219이 있었습니다. 바까는 수많은 겁(劫)에 걸쳐 살았습니다. 실로 너무나 오래 살아서 결국에는 자신의 전생을 잊어버리고 늙음이나 죽음이 없는 자신의 불멸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의 전도된 인식을 없애주고자 바까 범천의 거처로 가셨습니다. 범천은 부처님의 방문을 환영하고는 자신의 영원한 삶을 자랑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범천의 무명은 무상, 늙음, 죽음을 부정하는 것이므로 끔찍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은 범천이 오래 살게 한 선업을 밝히셨고 이러한 너무나도 오랜 수명으로 자기 전생을 잊어버리고 자신이 불멸한다는 전도된 인식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자 바까 범천은 자신의 전능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까 범천은 여전히 교만하였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고 부처님과 다른 범천들 눈앞에서 사라지고자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범천은 여전히 모습을 나타낸 채로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다음의 게송을 읊으셨습니다.


 Bhavevāham bhayam disvā bhavan ja vibhavesinam bhavam nābhivadim kiñci nandincana upādiyim


나는 존재에서 두려움을 보노라

존재하지 않음을 구하는 자들에서 존재를 보노라.

어떤 존재도 나는 환영하지 않고

즐김을 움켜쥐지도 않는다.(M.i.330)

 

 바까 범천과 다른 범천들은 너무나 오래 살아 자신의 존재와 세계가 영원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건강, 부귀, 명예, 성공 따위의 축복받은 삶을 누리는 사람들은 삶의 괴로움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욕계, 색계, 무색계라는 삼계(三界)의 모든 삶은 다 괴로움입니다. 색계나 무색계에 있는 선인(仙人), 즉 범천은 여러 겁을 살겠지만 그들도 언젠가는 죽지 않으면 안 됩니다.

 




98. 정등각자



괴로움의 근본원인인 무명의 파괴로 인도하는 것이 바로 통찰지입니다. 부처님의 경우에 이는 정등각자(samma-sambuddha)의 특성을 뜻합니다. 정등각자는 사성제를 바르게, 철저하게, 독자적으로 아는 분입니다. 여기서 연기의 12가지 각지는 사성제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늙음과 죽음은 모두 첫 번째 괴로움의 진리[苦諦]를 뜻하고 재생은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集]를 뜻합니다. 이 원인과 결과의 소멸은 소멸의 진리[滅]를 뜻하며, 이 소멸을 아는 지혜는 소멸에 이르는 도의 진리[道]를 뜻합니다.               

 재생과 업의 원인, 업의 원인과 집착[取], 집착[取]과 갈애[愛], 갈애[愛]와 느낌[受], 느낌[受]과 감각접촉[觸], 감각접촉[觸]과 여섯 감각장소[六入], 여섯 감각장소[六入]와 정신-물질[名色], 정신-물질[名色]과 식(識), 식(識)과 상카라[行], 상카라[行]과 무명(無明)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컨대 바로 직전에 선행하는 연결고리를 원인, 즉 일어남(samudaya)이라 하고, 그 직후에 바로 따라오는 것을 그 결과, 즉 괴로움의 진리[苦諦]라고 합니다.


우리가 만약 괴로움의 진리[苦諦]를 감각적 욕망의 번뇌[慾漏], 존재의 번뇌[有漏], 사견의 번뇌[見漏], 무명의 번뇌[無明漏]에 대한 집착들인 번뇌(漏 āsava)220의 결과로 본다면, 심지어 윤회의 근원인 무명도 괴로움의 진리[苦諦]와 같은 뜻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갈애를 괴로움과 동일하게 보는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상의 법칙에 따르기 때문에 갈애를 포함한 모든 정신-물질[名色]은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이러한 관점은 타당합니다. 주석서는 무명을 괴로움이라고 설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명은 번뇌[漏]에서 흘러나오는 괴로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번뇌(漏 āsava)에는 감각적 욕망의 번뇌[慾漏], 존재의 번뇌[有漏], 사견의 번뇌[見漏], 무명의 번뇌[無明漏]라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이는 과거의 무명과, 또 현재에 무명을 일으키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번뇌[漏]를 무명의 원인으로 볼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성제를 깨닫고 열반을 증득하시고 나서 스스로의 바른 깨달음을 통하여, 부처님께서는 정등각자(Sammā-sambuddha)라는 비할 바 없고 영광스러운 칭호를 얻으셨습니다.


부처님은 연기법이 포괄하는 모든 현상들은 진정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부처님은 무명에서 깨어나셨으며, 집착이 없어졌으며, 모든 족쇄221에서 해탈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래서 「청정도론」에 따르면, 윤회의 모든 바큇살을 완전히 파괴하셨기 때문에 아라한이라고 불리십니다.





99. 부처님의 명성



 부처님의 명성은 전 우주에 골고루 미쳤습니다. 부처님의 명성은 부처님의 법문을 들으러 온 어떤 중생계의 존재를 통해서, 또는 부처님이 어떤 중생계에 직접 가셔서 설하신 법문을 통해서, 또는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어떤 상위 중생계에 태어난 부처님의 옛 제자들에 의해 우주 곳곳에 널리 퍼졌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명성이 두루 퍼지게 된 첫째 방법을 깊이 생각해볼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두 가지 방법에 대해서는, 보살은 기나긴 윤회의 여정 동안 불환과를 얻은 성자들만 갈수 있는 다섯 정거천(淨居天)222을 제외하고는 모든 중생계에 다 가 보았습니다. 보살은 보통 마지막 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도의 네 가지 단계를 모두 성취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전에 정거천에 태어난 적이 없었으며223, 어느 때는  신통력으로 정거천을 방문하셨습니다. 부처님이 정거천에 오시자 수많은 범천들이 부처님께 경배를 드리면서, 과거 부처님들에 대한 이야기와 불환과 이상을 얻었기 때문에 과거 부처님들도 정거천에 오셨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들 범천가운데는 고타마 부처님의 제자로 수행을 했던 범천도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섯 정거천을 모두 방문하셨습니다. 부처님의 명성이 어떻게  부처님의 제자였던 이들의 거처인 천상계에 퍼지게 되었는지는 알기 쉽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명성이 어떻게 무색계에까지 퍼지게 되었는지는 의문이 생깁니다.


무색계 범천은 부처님을 찾아오지 못하고 부처님도 그들을 찾아가지 못합니다. 욕계나 색계에서 불법을 수행하고 도의 세 번째 단계인 불환과(不還果)를 얻은 이가 무색계 선의 마음을 가지고 죽을 때 원한다면 무색계 범천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이들 성자는 부처님의 고귀한 덕성과 사념처 수행을 통해 새로운 통찰지를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정신적 사건을 알아차림으로써 마침내 아라한이 되어 식무변처천(識無邊處天)이나 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 혹은 더 높은 비상비비상처천(非想非非想處天)에서 완전한 열반[般涅槃]에 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의 명성은 우주전역에 두루 미치게 되었습니다.




100. 사성제의 개요



 우리는 정등각자의 덕성과 비교하여 사성제에 대한 부처님의 지혜를 자세히 다뤄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성제를 간략히 되짚어 볼까 합니다. 경전에 따르면, 갈애를 제외한 욕계, 색계, 무색계의 모든 정신-물질[名色]은 괴로움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진리인 고제(苦)입니다.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는 두 번째 진리인 집제(集)입니다.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은 세 번째 진리인 멸제(滅)이며 소멸에 이르는 길인 성스러운 도는 네 번째 진리인 도제(道)입니다.


이들 사성제(四聖) 는 수행자가 위빠사나 수행을 닦아서 체험으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수행자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은 괴로움이며[고제], 그렇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에 대한 집착이 원인이고[집제], 괴로움과 그 원인이 모두 소멸하는 것이 바로 열반이며[멸제], 그 열반의 증득이 바로 도를 의미한다는 것[도제]을 체험으로 압니다.




 

101. 부처님과 정득가자



 붓다(Buddha)와 삼마삼붓다(Sammā-sambuddha)224라는 두 빨리어는 전지(全知), 즉 모든 법을 아는 지혜[一切智]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이 두 용어와 관련된 두 특성은 어떻게 구별되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삼마삼붓다의 특성이란 독립적인 숙고와 노력을 토대로 보살이 정각(正覺)을 얻은 것이고, 아라한도의 통찰지를 통하여 사성제를 깨달았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붓다의 특성이란 일체를 아는 지혜[一切智]등과 같은 오직 부처님만이 지닌 남다른 특성에 기반하여 모든 형성된 법[有爲法]과 형성되지 않은 법[無爲法]225에 대한 완전하고 철저한 앎입니다.


부처님의 이러한 남다른 특성은 제자들에게서는 발견되지 않는 사성제에 대한 지혜, 사무애해의 지혜(四無碍解 paṭismbhidā-ñāṇa)226, 여섯 가지 불공의 지혜(不共智 asādhāraṇa-ñāṇa)227에 있습니다. 여섯 가지 불공의 지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중생들의 각기 다른 도덕적, 영적 성숙도를 아는 지혜

(2) 중생들의 욕구, 근기, 잠재성향을 아는 지혜

(3) 쌍신변228의 지혜

(4) 모든 중생들에 대한 무한한 연민의 지혜

(5) 일체를 아는 지혜

(6) 부처님께서 알고자 하는 것과 주의를 하나로 모으는 것은 어떠한 장애나 걸림없이 아는 지혜


 이제 형성된 법[有爲法]과 형성되지 않은 법[無爲法]에 대해 몇 마디 언급하고자 합니다. 형성된 법[有爲法]이란 적절한 요소들의 조화로운 결합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정신-물질[名色]이나 오온(五蘊)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형성된 법[有爲法]이란 유리한 환경들로 조성된 현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막대기나 철봉과 같은 두 개의 단단한 물체 간의 마찰이 있을 때 소리가 생깁니다. 여기서의 소리가 형성된 것(有爲 sakhata)입니다. 형성된 것(有爲 sakhata)과 반대가 되는 것이 원인과 관련이 없는 형성되지 않은 것(無爲 asakhata)입니다. 형성되지 않은 법[無爲法]의 범주 내에서 유일한 구경법(究竟法 paramattha-dhamma)이 바로 열반입니다. 구경법이 아닌 형성되지 않은 법[無爲法]에는 모습, 모양 등의 이름과 같은 많은 개념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일체를 아는 지혜[一切智]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것이 형성된 법[有爲法]과 형성되지 않은 법[無爲法]의 모든 범위를 다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일체를 아는 지혜[一切智]는 형성된 법[有爲法], 구체적인 물질(nipphanna), 정신-물질[名色]의 조건 지어진 특성, 열반, 개념과 같은 다섯 가지 함축적인 의미의 법 (neyyatha-dhamma)229으로도 설명됩니다.


중생의 각기 다른 정신적인 성숙도와 근기와 잠재성향을 아는 지혜인 부처님의 처음 두 가지 특성을 일컬어 부처님의 눈(佛眼 buddha-cakkhu)이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을 보는 눈으로, 부처님께서는 깨달을 근기가 성숙된 중생들을 찾아가서 시의 적절할 때에 근기에 맞는 법을 설하셨습니다. 


우리는 독자들로 하여금 세존에 대한 믿음을 고취시키고자 부처님(아라한)의 특성에 대한 언급으로써 연기에 대한 법문을 마무리 합니다. 여러분도 공양 받아 마땅한 분[應供]의 특성을 지닌 아라한에게서도 영감을 얻기를 바랍니다.


아라한은 모든 번뇌에서 완전히 벗어났으며 윤회의 골조를 파괴하였습니다. 아라한은 몰래 악행을 할 비밀스런 곳이 없기 때문에 공양 받아 마땅한 분[應供]입니다. 일반 아라한이 지닌 특성은 부처님께서 지닌 최상위 아라한 특성보다는 낮지만 아무튼 이러한 것이 아라한의 특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언젠가 영광스런 아라한의 칭호를 얻게 될 날을 위해서 감각의 육문(六門)에서 일어나는 정신-물질 과정을 알아차려서 번뇌를 쳐부수고,  삶의 수레바퀴 살을 깨부수고, 항상 마음을 청정하게 유지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102. 요약



 고제(苦諦)와 집제(集諦)에서 언급된 두 가지 근본원인에서 네 가지 층, 세 가지 회전, 세 가지 연결, 십이 각지, 삼세(三世), 스무 가지 현상, 다섯 가지 정신-물질인 오온(五蘊)의 과정이 있습니다. 이 현재의 과보인 과정을 효과적으로 주시하는 사람은 느낌에서 비롯되는 갈애를 가지기 않게 되어 윤회를 완전히 끝낼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수행자는 여섯 감각장소[六入]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신-물질 사건을 무상· 고· 무아로 명확하게 주시합니다.

 

그러한 효과적인 사념처 수행에 의하여, 수행자는 형상[色], 소리[聲]등의 감각대상의 본성을 꿰뚫은 통찰지를 얻어서 반대되는 것에 의해서 그에 대한 집착을 일시적(tadaga)으로 극복합니다. 즉 그 뿌리를 잘라내는 지혜로 갈애에 대항해서 그것을 극복합니다.


갈애의 소멸로 집착[取]과 존재[有]와 태어남[生]등의 다른 현상이 일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위빠사나 지혜를 통해서 이렇게 소멸시킨 다음에, 성스러운 도에 대한 통찰지를 얻었을 때 수행자는 근절(samuccheda)을 통해서 잠재성향의 갈애를 완전히 극복합니다. 이 순간에 집착 등의 다른 현상도 완전히 소멸합니다.


 느낌이 소멸함에 따라 갈애도 존재하기를 멈춘다고 설하는 그런 가르침은 없습니다. 이는 아라한이라도 여섯 감각기관[六根]과 맞부딪쳐서 일어나는 느낌을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에 놀라운 것이 아닙니다.

 

만약 수행자가 갈애 등의 현재 원인과 미래의 결과를 제거하여 괴로움의 회전을 끝내고자 한다면, 현상을 일어나는 그대로, 즉 무상· 고· 무아로 지켜보고 주시해야 할 어떤 정신-물질 현상이 있습니다. 이 현상을 빨리어 용어와 함께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식(識 viññāṇa): 대상을 아는 마음으로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의식(意識)의 6가지가 있습니다.


(2) 정신(名 nāma) : 식(識)과 함께 일어나는 마음부수(cetasikā)입니다.

물질(色 rūpa): 그러한 식(識)과 함께 일어나는 물질현상입니다.

정신-물질(名色 nāma-rūpa): 말 그대로 정신과 물질로 번역될수 있을 것입니다.


(3) 여섯 감각장소(六入 saḷ-āyatana): 마음이 활동하는 여섯 장소, 즉 내부의 여섯  장소[內六處]와 외부의 외부장소[外六處]입니다. 내부의 여섯장소는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의 다섯 가지 물질적 감각기관과 마노[意]로 이루어져 있고, 외부의 여섯장소는 형상[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감촉[觸] 마노의 대상[法]입니다.


감각접촉(觸 phassa): 봄의 감각접촉[眼觸], 들음의 감각접촉[耳觸], 냄새의 감각접촉[鼻觸], 맛의 감각접촉[舌觸], 몸의 감각접촉[身觸], 마노의 감각접촉[意觸]의 여섯 가지가 있습니다.


느낌(受 vedanā): 즐거운 느낌[樂受], 괴로운 느낌[苦受], 무덤덤한 느낌[不苦不樂受]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봄의 감각접촉[眼觸], 들음의 감각접촉[耳觸], 냄새의 감각접촉[鼻觸], 맛의 감각접촉[舌觸], 몸의 감각접촉[身觸], 마노의 감각접촉 [意觸]과 결부된 6가지 종류의 느낌들로 세분할 수도 있습니다.


(1) 2가지 근본원인: 무명과 갈애.


(2) 2가지 진리: 일어남의 진리[集]와 괴로움의 진리[苦諦]


(3) 4가지 층:

① 과거원인의 층: 무명(無明), 업형성력(상카라), 갈애[愛], 집착[取], 존재[有]

② 현재 결과의 층: 식(識), 정신-물질[名色]의 복합체, 정신 활동의 여섯 감각장소[六入], 감각접촉[觸], 느낌[受].

③ 현재 원인의 층: 갈애, 집착, 업, 존재[有], 무명, 업형성력(상카라).

④ 미래의 결과: 태어남[生], 늙음∙죽음[老死], 식(識)등


(4) 3가지 회전:

① 번뇌의 회전: 무명, 갈애, 집착

② 업의 회전: 업형성력(sankhara), 업, 존재[有]

③ 과보의 회전: 식(識), 정신-물질의 복합체[名色], 정신 활동의 여섯 감각장소[六入], 감각접촉[觸], 느낌[受], 태어남[生], 늙음과 죽음[老死].

 

(5) 3가지 연결


① 과거의 원인인 과거 업형성력(상카라)과 현재의 결과간의 연결.

② 현재의 결과인 느낌[受]과 현재의 원인인 갈애[愛]간의 연결.

③ 현재의 원인인 존재[有]와 미래의 결과인 태어남[生]간의 연결.


(6) 12가지 연결고리


① 무명(無明)

② 업형성력[行]

③ 식(識)

④ 정신-물질[名色]

⑤ 여섯 감각장소[六入]

⑥ 감각접촉[觸]

⑦ 느낌[受]

⑧ 갈애[愛]

⑨ 집착[取]

⑩ 존재[有]

⑪ 태어남[生]

⑫ 늙음· 죽음[老死]

 

(7) 3가지 시간[三世]


① 무한한 과거: 무명과 업형성력

② 무한한 현재: 식, 마음과 몸의 복합체[名色], 여섯 감각기관[六入], 감각접촉[觸], 느낌[受], 갈애[愛], 집착[取], 업의 과정.

③ 무한한 미래: 재생, 늙음과 죽음[老死].

  

(8) 20가지 요소:


① 전생의 원인이 되는 과정인 5가지 요소

② 현생의 결과가 되는 과정은 5가지 요소

③ 현생의 원인이 되는 5가지 요소

④ 내생의 결과가 되는 5가지 요소                     (본문 끝)











































역주(譯註)








































마하시 사야도의 생애와 업적


 

1. 딸라신 : 현재 미얀마를 비롯한 상좌부 불교국가에는 정식 비구니는 존재하지 않고 삭발 염의하고 8계만을 평생 지키는 일종의 정학녀(正學女)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런 이들을 미얀마에선 띨라신(Thilashin)이라고 한다. 원래 부처님 당시에는 비구니 승가가 있었지만, 오래 전에 전란과 기근 등으로 상좌부 불교의 종주국 스리랑카에서 비구니 계맥이 단절되었기 때문에 상좌부 불교에는 비구니 승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최근 태국이나 스리랑카에서 대만과 같은 대승불교국가에서 비구니계를 수계하고 돌아와 단절된 상좌부 불교의 비구니법맥을 이으려는 이들이 있지만 정통 상좌부교단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2. 위찟따사라왐사(Vicittasārābhivamsa)스님 : 이 분이 바로 세계 기네스북에도 오른 전설적인 삼장법사, 밍군 사야도(Mingun Sayadaw)이다.  


3. 마하띠까 : 이것은 마하띠까(Mahā-ṭīkā)가 빨리어로 쓰여진 지 거의 1400여 년 만에 다른 나라 말로 완전하게 번역된 최초의 책으로 꼽는다. 아직 태국과 스리랑카에는 이 마하띠까의 자국어 번역이 없다. 이 책으로 마하시 사야도의 명성은 전 미얀마에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Mahasi Biography, by Ashin sīlānandā, Buddhasāsasanā Nuggaha Organization. Yanggon, 1981)





본문


1. 연기의 중요성



1. 보살의 원어인 보디삿따(Bodhisatta)는 bodhi(覺, 깨달음) + satta(有情, 존재)로 분해된다. 그래서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깨달음을 추구하는 존재’이고 경전에서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성취해서 붓다라고 불리기 이전의 상태를 이렇게 보살로 부르고 있다. 중국에서 원음 Bodhisatta를 보리살타(菩提薩埵)로 음역한 것을 다시 보살(菩薩)로 줄여서 부른다. 그리고 이 개념은「본생경(本生經)」에서 금생만을 보살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의 모든 전생을 다 보살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보살이 성불하기 위해서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겁(劫)동안 윤회를 반복하며 십바라밀(dasa-pāramī)을 닦아야 한다. 이 십바라밀에는 ① 보시(布施 dāna) ② 지계(持戒 sīla) ③ 출리(出離 nekkhamma) ④ 지혜(智慧 paññā) ⑤ 정진(精進 viriya) ⑥ 인욕(忍辱 khanti) ⑦ 진실(眞實 sacca) ⑧ 결의(決意 adhiṭṭhāna) ⑨ 자애(慈愛 mettā) ⑩ 평온(平穩 upekkhā)이 있다.


주석서에 따르면 보살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유형이 있다.

 

(1) 지혜의 보살인 빤냐디까(Paññā-dhika): 외적인 대상에 대한 숭배보다는 지혜의 계발과 명상의 수련에 더 심혈을 기울인다. 지혜의 보살이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4아승지와 10만겁이 필요하다. 고따마 부처님이 이 보살에 해당된다.


(2) 믿음의 보살인 삿다디까(Saddhā-dhika): 믿음과 확신이 주가 되는 보살로 믿음을 동반자로 하여 깨달음을 성취한다. 이러한 보살은 모든 형태의 경배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다. 믿음의 보살이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8아승지와 10만겁이 필요하다.  


(3) 정진의 보살인 위리야디까(Viriyā-dhika): 언제나 남을 위해 활동적으로 봉사하려고 한다. 명예나 평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닌 봉사의 정신으로 열심히 남을 돕는다. 정진의 보살이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16아승지와 10만겁이 필요하다. 미래에 오실 미륵(Metteya)부처님이 이 보살에 해당된다.



2. 부처님 당시의 고대 인도에는 바라문과 사문이라는 두 종류의 종교인이 있었다. 바라문(婆羅門 brāmaṇa)은 전통적인 종교인으로 베다의 종교를 신봉하고 제사를 지내지만 동시에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철학에 심취하여 거기서 불사의 진리를 얻으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소년기에 스승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학생기에 베다를 학습한다. 그 후 결혼하여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완수하는 가주기(家住期)에 들어간다. 그리고 노년이 되면서 집안의 모든 것을 아들에게 양도하고 숲속으로 들어가 임주기(林住期)를 지낸다. 최후에는 숲속의 거처까지도 버리고 일정한 곳에 머물지 않는 유행기(流行期)에 들어가 정처 없이 떠돌다가 일생을 마친다. 이러한 바라문 외에 전혀 새로운 형태의 종교수행자도 나타났는데, 이들을 사문(沙門 sāmañña)이라고 한다. 그들은 집을 버리고 걸식생활을 하면서 곧바로 유행기의 생활로 들어간다. 그리고 청년기부터 금욕생활을 하고 숲속으로 들어가 요가(yoga)수행을 하거나 혹독한 고행에 몸을 바쳐 불사의 진리를 체득하려 했다. 즉 사문이라는 말은 당시의 인도의 일반적인 수행자를 가리킨다.



3. 천신(天神)이라 번역한 데와(deva)는 유희한다, 빛난다는 뜻이다. 주석서에 따르면“천신들은 세 종류가 있다고 한다.


① 인습적인 천신(sommuti-devā): 왕과 왕비와 왕자들을 말한다.

② 태생적인 천신(upapatti-devā): 사대왕천을 비롯하여 그보다 높은 천신

③ 청정한 천신(visuddhi-devā): 번뇌가 다한 아라한


이 가운데서 태생적인 신을 일반적으로 천신이라 한다. 즉 여섯 가지 욕계천상과 16가지 색계천상과 4가지 무색계 천상에 거주하는 천신을 말한다.



4. 겁(劫)으로 번역되는 깝빠(kappa)는 고대 인도에서 우주의 시간을 재는 단위이다. 영역은 world cycle, aeon으로 표현한다. 이 겁에는 ➀ 중간겁(中間劫 antara-kappa) ➁ 아승지겁(阿僧祗劫 asaṅkheyya-kappa) ➂ 대겁(大劫 mahā-kappa)이 있다. 인간의 수명이 열 살에서 8만 4천 년으로 증가하였다가 다시 열 살로 감소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중간겁(中間劫)이라 한다. 이 중간겁의 20배에 해당 하는 기간이 아승지겁이며, 이 아승지겁이 넷이 모이면 대겁(大劫)이다. 한 대겁의 기간을 부처님께서는 사람이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한 유순(由旬)이 되는 큰 바위를 백 년에 한 번씩 비단 옷자락으로 스치고 지나가서 그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지는 시간이라고 비유하셨다.(S15:5/ii.181-82)



5. 윤회(輪廻)의 원어는 삼사라(saṃsāra)로 ‘함께 움직이는 것, 함께 흘러가는 것’이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보통 round of rebirth라고 한다.「앗타살리니(Atthasālini)」는 윤회를 5온(五蘊), 12처(十二處), 18계(十八界)가 연속하고 끊임없이 전개되는 것으로 정의하듯이,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란 윤회의 주체가 없는 연기적 흐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근본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매 찰나 전개되는 오온(五蘊)의 생멸자체가 윤회이고, 생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 생에서의 마지막 마음(死沒心)이 일어났다 멸하고, 이것을 조건으로 하여 다음 생의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는 것이 윤회이다. 그러므로 힌두교나 다른 종교에서 설하는 윤회설과는 구분 지어야 한다. 힌두교의 윤회는 불변하는 아뜨만(자아)이 있어서 금생에서 내생으로 전변하는 재육화(再肉化 reincarnation)이지만, 불교의 윤회는 갈애를 근본원인으로 한 다시 태어남(再生 rebirth)이기 때문이다.


윤회는『상응부』(S15:13)에서 “무명에 덮힌 중생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치달리고 윤회하므로 그 시작점을 꿰뚫어 알 수 없다.”는 등 경전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또한 부처님은「법구경」(Dhp.153-154)의 오도송에서“많은 생을 윤회하면서 나는 헛되이 치달려왔다. 집짓는 자를 찾으면서 거듭되는 태어남은 괴로움이었다. 집 짓는 자여, 마침내 그대는 보였구나. 그대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그대의 모든 골재는 무너졌고 집의 서까래는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마음은 업 형성을 멈추었고 갈애의 부서짐을 성취하였다.”라고 윤회가 종식된 데에 대한 감회를 밝히셨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갈애(tahā)와 무명(avijiā)이 윤회의 원인이라고 밝히셨고 그 중에서 갈애를‘재생을 하게 하는 것(ponobhavikā)’이라고 하셨다. 갈애와 무명이 있는 한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생사윤회의 바퀴는 계속 굴러간다. 하지만 갈애를 위시한 모든 번뇌를 쳐부순 아라한에게는 더 이상의 윤회가 없다.


윤회는 갈애와 무명에 휩싸여 치달리고 흘러가는 중생들의 가장 생생한 모습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윤회[苦]를 설하셨고, 윤회의 원인[集]인 갈애를 설하셨고, 윤회가 다한 경지[滅]인 열반을 설하셨고, 윤회가 다한 경지를 실현하는 방법[道]인 팔정도를 설하셨다.

 



2. 보살의 숙고



6. 존재(有 bhava)는 두 가지인데, 업으로서의 존재(業有 kāmā-bhava)와 재생으로서의 존재(生有 upapatti-bhava)이다. 업으로서의 존재는 의도와, 의도와 관련된 탐욕 등의 업이라고 불리는 법을 말하며, 존재로 인도하는 업은 모두 업으로서의 존재이다.(Vbh.137) 재생으로서의 존재는 업에서 생긴 무더기, 즉 오온(五蘊)을 말하며 중생이라는 존재와 개체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업으로서의 존재의 특징은 업(業)이고 재생으로서의 존재의 특징은 업으로부터 생긴 무더기[蘊]이다. 이것은 각각 다시 태어남을 만드는 역할과 다시 태어나는 역할을 하며, 업으로서의 존재는 유익하거나 해로운 것으로 나타나고 재생으로서의 존재는 유익하다 혹은 해롭다고 할 수 없는 무기(無記)로써 나타난다. 보다 상세한 것은 「청정도론」(Vis.XⅦ.251~269)을 참조할 것.



7. 빨리어 루빠(rūpa)는 중국에서 모두 색(色)으로 옮겼지만 문맥에 따라서 물질일반을 뜻하는 의미로도 쓰이고, 형상과 색깔을 뜻하는 의미로도 쓰인다.


(1) 물질 일반으로서의 rūpa이다. 오온(五蘊)의 처음인 색온(色蘊)으로 아비담마의 28가지      물질로 나타난다. 이 28가지 물질은, 크게 사대(四大 mahā-bhuta)와 파생된 물질            (upādā-rūpa)의 두 종류로 나뉜다. 영역은 matter, materiality, corporeality이다.


(2) 형상, 색깔로서의 rūpa이다. 눈[眼]의 대가 되는 것으로 색(色), 성(聲), 향(香), 미       (味), 촉(觸), 법(法)의 육처(六處) 중의 하나이다. 영역은 visual object라고 한다.



8. 감각장소[處,入]로 옮긴 아야따나(āyatana)는 ‘이쪽으로 온다’‘입(入)’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장소란 의미로 쓰이므로 처(處)로 옮기기도 하였다. 영어로는 보통 sense-base등으로 옮기고 있다. 보통 12연기에서는 육입(六入)으로, 12처와 공무변처 등의 4처는 처(處)로 옮기고 있다. 이 12가지 감각장소[十二處]는 ① 눈의 감각장소[眼處] ② 귀의 감각장소[耳處] ③ 코의 감각장소[鼻處] ④ 혀의 감각장소[舌處] ⑤ 몸의 감각장소[身處] ⑥ 마노의 감각장소[意處] ⑦ 형상의 감각장소[色處] ⑧ 소리의 감각장소[聲處] ⑨ 냄새의 감각장소[香處] ⑩ 맛의 감각장소[味處] ⑪ 감촉의 감각장소[觸處] ⑫ 법의 감각장소[法處]이다. 앞의 ①에서 ⑥까지를 안의 감각장소[內處]라 하고 ⑦부터 ⑫까지를 밖의 감각장소[外處]라고 하여 여섯 안팎의 감각장소[六內外入]이라고 한다.


그리고 본문에서 자주 언급되는 감각장소(處 āyatana)와 감각기능(根 indriya)과 문(門 dvāra)에 대해 정리해 본다. 중생은 매순간 대상과의 연기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데, 이 가운데 물질적인 대상과의 관계는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을 통해서 한다. 그러므로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은 각각 형상[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감촉[觸]이라는 대상을 만나는 문이 된다. 그리고 이처럼 서로 대(對)가 되어 만남이 일어나는 곳을 감각장소[處]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장소는 눈에 보이는 기능이 있고 귀에 듣는 기능이 있듯이, 각각에 고유한 기능 혹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감각기능[根]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서, 예를 들면 눈의 문[眼門]이라고도 하고, 눈의 감각장소[眼處]라고도 하고, 눈의 감각기능[眼根]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9. 정신-물질[名色]은 나마-루빠(nāma-rūpa)의 역어이다. 정신(名 nāma)은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의 사온(四蘊)을 뜻하고 물질(色 rūpa)은 색온(色蘊)을 의미한다. 그러나 주석서에서는 연기법의 12각지에서 정신은 느낌[受], 인식[想], 상카라[行]의 3온만을 의미한다고 한다. 식(識)은 따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물질[名色]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청정도론」(Vis.XVⅡ.186)이하를 참조할 것.




3. 순관(順觀)으로 추론하다



10. 바라밀의 원어인 파라미(pāramī)는 ‘중생을 피안(彼岸)에 이르게 하는 것‘ 이라는 뜻이다. 중국에서 바라밀(波羅密)로 음역되었고 영어로는 perfection이라 하는데 성불의 수기를 받은 보살이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윤회의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닦아야 하는 10가지 덕성을 말한다.「소행장(Cariya-piaka)」에 근거하여 10바라밀을 살펴보자.

 

① 보시(Dāna): 관대함이 특성이다. 그 기능은 나누어 줌으로써 사물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는 나누어 주는 집착 없음으로 표현되고 근접 원인은 시물(施物로)이다.

 

② 지계(Sīla):  몸과 말로 하는 선한 행위를 유지하는 것이 특성이다. 그 기능은 불선하거나 제멋대로 구는 몸이나 말의 행동을 제어한다. 그것은 언행이 청정해짐으로써 표현된다.  근접원인은 양심(hiri)과 수치심(ottappa)이다.

 

③ 출리(Nekkhamma): 감각적 쾌락을 버려서 존재[有]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특성이다. 그 기능은 청정하게 하는 것으로 감각적 쾌락과 존재의 위험스러움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감각적 욕망을 멀리하는 것으로 표출되고, 근접원인은 사려 깊은 두려움으로 감각적 쾌락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④ 지혜(Paññā):  참된 성질로 사물을 보는 것이 특성이다. 그 기능은

감각의 모든 대상에 빛을 비추는 것이다. 혼동하지 않음으로 표출되고, 근접원인은 삼매(samādhi)이다.

 

⑤ 정진(Viriya) : 부지런함이 특성이다. 그 기능은 분발하게 하는 것이다. 끈질김으로 표출되며, 근접원인은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과 부수적으로 수반하는 모든 괴로움에 대한 사려깊은 두려움에서 일어나는 긴박감이다..

 

⑥ 인욕(Khanti):. 참을성이 특성이다. 그 기능은 싫어함이나 좋아함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극도로 성을 돋구는 상황에 처해서도 참는 것으로 표출되며 근접원인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⑦ 진실(Sacca): 말로 다른 사람들을 현혹시키지 않는 것이 특성이다. 그 기능은 보거나 아는 그대로 발견하는 것이다. 감미롭고 상냥한 언어로 표출되며, 근접원인은 모든 중생들에 대한 동정적인 상냥함이다.


⑧ 결의(Adhiṭṭhāna): 바라밀을 완성하기 위해 공덕행을 하고자 하는 결심이 특성이다.

그 기능은 자신의 길에 놓인 모든 반대와 장애를 극복하는 것이다. 자기 입장을 확고히 함으로 표출되며, 근접원인은 바라밀을 수행할 때 보시와 같은 매우 공덕이 되는 행위이다.

 

⑨ 자애(Mettā): 다른 중생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이 특성이다. 그 기능은 다른 중생의 행복을 열렬히 바라는 것이다. 도움을 주려는 태도로써 표출되며, 근접원인은 다른 이들의 좋은 점만을 보는 것이다.

 

⑩ 평온(Upekkhā): 칭찬과 비난에 직면해서 평등심을 유지하는 것이 특성이다. 그 기능은 감정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가운데 놓는 것이다. 공평함으로 표출되며, 근접원인은 자신의 과거행위에 대한 사려 깊은 지혜이다.




4. 추론과 사유를 넘어서



11. 중도(中道)라 번역되는 맛지마 빠띠파다(majjhima-patipadã)는 majjhima(가운데, 중간의) + patipadã(도)의 합성어이다. patipadã는 일반적으로 도(道)로 옮기는 magga와 동의어로 취급되지만, magga는 주로 출세간의 도를 뜻하고 patipadã는 일반적인 수행의 길을 의미한다.


「초전법륜경」(S56:11)에서 부처님께서는 다섯 비구에게 중도를 이렇게 천명하셨다.


 “비구들이여, 출가자는 이들 두 가지 극단을 따라서는 안 된다. 무엇이 둘인가?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는 것은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하며 고결하지 않고 해로움과 함께하나니 이것이 하나의 극단이다. 자기 학대에 몰두하는 것은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하며 고결하지 않고 해로움과 함께하나니 이것이 다른 하나의 극단이다. 이들 두 극단을 따르지 않고 여래는 중도를 철저하게 깨닫고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었나니, 이 중도는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중도인가? 바로 이 팔정도(八正道)이니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알아차림[正念], 바른 삼매[正定]이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대반열반경」(D16)에서 반열반(般涅槃)에 들기 직전 수밧다(Subhadda)라는 유행승(遊行僧)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밧다여, 어떤 법과 율에서든 팔정도(八正道)가 없으면 거기에는 사문도 없다. 거기에는 두 번째 사문도 없다. 거기에는 세 번째 사문도 없다. 거기에는 네 번째 사문도 없다. 수밧다여, 그러나 어떤 법과 율에서든 팔정도(八正道)가 있으면 거기에는 사문도 있다. 거기에는 두 번째 사문도 있다. 거기에는 세 번째 사문도 있다. 거기에는 네 번째 사문도 있다. 수밧다여, 이 법과 율에는 팔정도(八正道)가 있다. 수밧다여, 그러므로 오직 여기에만 사문이 있다. 여기에만 두 번째 사문이 있다. 여기에만 세 번째 사문이 있다. 여기에만 네 번째 사문이 있다. 다른 교설에는 사문들이 텅 비어 있다. 수밧다여, 이 비구들이 바르게 머문다면 세상에는 아라한들이 텅 비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45년 설법의 최초와 최후 가르침으로 팔정도를 설하셨으며, 팔정도가 바로 불교수행의 결정판인 중도이다. 그러므로 중도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처님께서 초기경에 정형화해 분명하게 밝힌 팔정도의 정형구를 정확하게 살펴봐야 한다.


(1) 바른 견해(正見 sammā-diṭṭhi)는“괴로움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에 대한 지혜”로 정의되고 있다. 한마디로 바른 견해는 사성제에 대한 지혜를 말한다. 그리고「가전연경(Kaccaayanagotta Sutta)」(S12:15)에서 무엇이 바른 견해인가를 질문 드리는 가전연 존자에게 부처님께서는 “깟짜야나여,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이 없다는 것은 두 번째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여래는 이들 두 극단을 따르지 않고 중(中)에 의지해서 법을 설한다”라고 명쾌하게 말씀하신 뒤 12연기의 순관과 역관의 정형구로 중을 표방하신다. 즉 연기의 가르침이야말로 바른 견해이다.


이처럼 바른 견해는 사성제에 대한 지혜와 연기의 가르침으로 정리된다. 그런데 사성제 가운데 집성제는 연기의 유전문(流轉門, 고의 발생구조)과 연결되고, 멸성제는 연기의 환멸문(還滅門, 고의 소멸구조)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사성제와 연기의 가르침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것을 바르게 보는 것이 팔정도의 정견이다.


(2) 바른 사유(正思惟 sammā-saṅkappa)는 “출리(出離)에 대한 사유, 악의 없음에 대한 사유, 해코지 않음에 대한 사유”로 정의되는데 불자들이 세상과 남에 대해서 항상 지녀야할 바른 생각을 말한다. 이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자애(慈 mettā), 연민(悲 karuṅa). 더불어 기뻐함(喜 muditā), 평온(捨 upekkhā)의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四梵住 brahma-vihāra)을 가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바른 말(正語 sammā-vācā)은 “거짓말을 삼가고 중상모략을 삼가고 욕설을 삼가고 잡담을 삼가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4) 바른 행동(正業 sammā-sammānta)은 “살생을 삼가고 도둑질을 삼가고 삿된 음행을 삼가는 것”이다.


(5) 바른 생계(正命 sammā-ajiva)는“삿된 생계를 제거하고 바른 생계로 생명을 영위하는 것”이다. 다른 경에서 하는 설명을 보면 출가자는 무소유와 걸식으로 삶을 영위해야하며 특히 사주, 관상, 점 등으로 생계를 유지해서는 안된다. 재가자는 정당한 직업을 통해서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


이처럼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를 실천하는 지계의 생활은 그 자체가 팔정도의 고귀한 항목에 포함되고 있는 실참수행이다.


(6) 바른 정진(正精進 sammā-vãyama)은“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선법(不善法)을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미 일어난 불선법을 제거하기 위해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법(善法)을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이미 일어난 선법을 사라지지 않게 하고 증장시키기 위해서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른 정진은 해탈열반과 향상에 도움이 되는 선법(善法)과 그렇지 못한 불선법을 정확히 판단하는 것이 전제되고 있다. .


(7) 바른 알아차림(正念 sammā-sati)은 “몸에서 몸을 관찰하고,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고,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고,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며  머무는 것”이다.


바른 알아차림[正念]은 팔정도가 제시하는 구체적인 수행기법이다. 부처님은 나라는 존재를 먼저 몸[身]· 느낌[受]· 마음[心]· 심리현상[法]의 사념처(四念處)로 해체해서 이 중의 하나에 집중한 뒤, 그것을 무상· 고· 무아로 통찰할 것을 설하신다.


(8) 바른 삼매(正定 sammā-samãdhi)는 초선(初禪)과 이선(二禪)과 삼선(三禪)과 사선(四禪)에 들어 머무는 것이다. 이러한 바른 삼매(三昧) 혹은 선(禪)의 경지에 들기 위해서는 감각적 욕망, 악의, 해태. 혼침, 들뜸. 후회, 의심이라는 다섯 가지 장애[五蓋]를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이러한 장애들이 극복되어 마음의 행복과 고요와 평화가 가득한 경지를 순차적으로 정리한 것이 네 가지 선이며 이를 바른 삼매[正定]라 한다.



12. 사념처(四念處)로 번역한 사띠빠따나(satipaṭṭhāna)는 sati(念, 알아차림)+paṭṭhāna(處, 확립)의 합성어로 몸[身], 느낌[受], 마음[心], 심리 현상[法]의 네 가지 대상에 대한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중국에서 사념처(四念處)라고 옮겼고 영역은 Four foundation of mindfulness이라고 한다.「대념처경」과「청정도론」에서는 이것을 모두 44가지로 구분하고 있는데, 그것을 간단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몸(身 kāya): 14가지


① 들숨날숨[出入息]

② 네 가지 자세

③ 네 가지 분명한 앎

④ 32가지 몸의 형태

⑤ 사대(四大)를 분석함

⑥-⑭ 아홉 가지 공동묘지의 관찰


(2) 느낌(受 vedanā): 9가지


① 즐거운 느낌 ② 괴로운 느낌 ③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④ 세속적인 즐거운 느낌 ⑤ 세속적인 괴로운 느낌 ⑥ 세속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⑦ 세속을 여읜 즐거운 느낌 ⑧ 세속을 여읜 괴로운 느낌 ⑨ 세속을 여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3) 마음(心 citta): 16가지


① 탐욕이 있는 마음 ② 탐욕을 여읜 마음 ③ 성냄이 있는 마음 ④ 성냄을 여읜 마음 ⑤ 미혹이 있는 마음 ⑥ 미혹을 여읜 마음 ⑦ 위축된 마음 ⑧ 산란한 마음 ⑨ 고귀한 마음 ⑩ 고귀하지 않은 마음 ⑪ 위가 남아있는 마음 ⑫ (더 이상) 위가 없는 마음 ⑬ 삼매에 든 마음 ⑭ 삼매에 들지 않은 마음 ⑮ 해탈한 마음 ⑯ 해탈하지 않은 마음


(4) 심리현상(法 dhamma): 5가지


① 장애[蓋]를 파악함

② 무더기[蘊]를 파악함

③ 감각장소[處]를 파악함

④ 깨달음의 구성요소[覺支]를 파악함

⑤ 진리[諦]를 파악함



13. 장애[五蓋]로 옮긴 니와라나(nīvaraṇa)는 ‘덮어버림’이란 문자적인 뜻을 살려 중국에서 개(蓋)로 한역하여Y다. 영어로는 hinderance라고 한다. 주석서에서는 장애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법을 일어나지 못하게 막고, 이미 일어난 선법을 지속하지 못하게 막는 정신적인 요인’이라고 설명한다. 경에서는 ➀ 감각적 욕망(kāmāchanda) ➁ 악의(vyāpāda) ➂ 해태와 혼침(thīna-middha) ④ 들뜸과 후회(uddhacca-kukucca) ⑤ 회의적 의심(vicikichā)의 다섯 가지 장애(pañca-nīvaraṇa)로 정형화 되어있다. 그리고 아비담마에서는 여기에 ⑥ 무명(avijjā)을 더하고 있다. 처음 다섯은 선(禪)을 증득하지 못하게 하는 주 장애요소이고 무명은 통찰지가 일어나는 것을 방애하는 장애이다.



14. 알아차림으로 번역한 사띠(sati)는 알아차림, 마음챙김, 마음새김 등으로 번역하고 있는 용어인데, 본서에서는 알아차림으로 번역한다. 이 sati의 사전적인 의미는 기억(念), 억념(憶念)이지만 수행과 관련된 문맥에서는 결코 기억이라는 의미로 쓰이지 않는다. 대상에 깊이 들어가고 대상을 파지하고 대상에 확립하고 그래서 마음을 보호하는 것으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가능하게 하는 선한 마음부수법[心所法]이다. 이 알아차림에서 중요한 것은‘대상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 이미「청정도론」(Vis.IV.49)에서는 알아차림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다.


"알아차림은 마음이 들뜸과 게으름에 빠지는 것으로부터 보호한다.”


그러므로 이 알아차림은 모든 요리에 맛을 내는 소금과 향료처럼, 모든 정치적인 업무에서 일을 처리하는 대신처럼 모든 곳에서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설하셨다. '알아차림은 모든 곳에서 유익하다고 세존께서 설하셨다. 무슨 이유인가? 마음은 알아차림에 의지하고, 알아차림은 보호로써 나타난다. 알아차림 없이는 분발과 절제함이 없다.'라고."


이렇게 볼 때 알아차림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1) 알아차림은 대상에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알아차림은 대상 주위에서 맴돌지 않고 대상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는 말이다. 정해진 대상이나 명상주제의 주위에서 맴돌거나 이리저리 방황하지 않고 그 명상주제로 바로 깊이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2) 알아차림은 대상을 거머쥐는 것이다. 알아차림은 대상을 움켜쥐거나 거머쥐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대상에 깊이 들어감이라는 첫 번째 설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으로 대상을 정확하게 거머쥐어서 그것을 파지하고 파악하는 심리현상이다.


 이렇게 대상을 정확하게 거머쥐지 않으면 하나의 대상에 집중되는 삼매를 실현할 수도 없고, 통찰지로써 그 대상을 무상· 고· 무아로 관찰할 수도 없다.


(3) 알아차림은 확립이다. 알아차림은 첫 번째의 대상에 깊이 들어감과 두 번째의 대상을 파지함(철저하게 거머쥐는)을 바탕으로, 이제 대상에 확립되는 것이다.


(4) 알아차림은 마음을 보호한다. 대상에 알아차림이 확립되어 있으면 그 대상을 통해서 나쁜 표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보호라고 말한다. 마음이 대상을 알아차리는 강한 힘에 의해서 나쁜 표상 등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마음을 나쁜 표상에서 보호하는 것이다.




5. 법은 현자들만 이해할 수 있다



15. 비구(Bhikkhu)는 걸식자(乞士)를 말하며 ‘생업에는 종사하지 않고 세상을 떠나서 수행이나 종교생활에만 전념하는 자’라는 뜻이다. 중국에서 걸사(乞士)로 옮겼고 음역하여 비구(比丘)라고 하였다. 상좌부 비구의 경우 227가지로 이루어진 구족계(具足戒 upasampada)를 받는다.「청정도론」(Vis.I.7)에서는 “윤회에서(saṁsāre) 두려움을(bhayaṁ) 보기(ik-khati) 때문에 비구(bhikkhu)라 한다.”고 정의하고 있고, 『장부』주석서(DA.iii.756)에서는 “도를 닦는 자는 누구나 비구라고 이름한다. 도를 닦는 자는 신이든 인간이든 모두 비구라는 명칭을 가진다.”라고 설명한다.



16. 선(禪)이라 번역한 쟈나(jhāna)는 중국에서 선나(禪那)로 음역되고 다시 선(禪)이라 정착이 되었다.「청정도론」(Vis.IV.119)에서는 "대상을 명상하기 때문에, 혹은 반대되는 것을 태워 버리기 때문에 선(禪)이라 한다.”고 두 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반대되는 것이란 감각적 욕망, 악의, 해태와 혼침, 들뜸과 후회, 의심의 다섯 가지 장애[五蓋]를 뜻한다.


이러한 선정은 사마타 수행(samatha-bhāvana)으로 얻어진다. 사마타 수행은 삼매의 기능을 강화한다. 마음을 한 가지 선택된 대상에 고착해서 모든 정신적인 혼란이 제거되는 것이다. 장애는 억압되고 마음은 그 대상에 완전히 몰입된다. 경장에 따르면 선은 초선에서 사선까지 4가지로 정의되는 마음의 상태이고 이것을 바른 삼매[正定]라고 한다. 논장에서는 이것을 색계선(色界禪)으로 정의하고 경장에 나타나는 공무변처 등의 4처를 무색계선(無色界禪)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선과 삼매는 동의어로 취급된다.


경전에서 말하는 4가지 색계선은 ➀ 초선(初禪) ➁ 이선(二禪) ➂ 삼선(三禪) ➃ 사선(四禪)이고 4가지 무색계선은 ➄ 공무변처(空無邊處) ➅ 식무변처(識無邊處) ➆ 무소유처(無所有處) ➇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이다. 경전에서의 4가지 색계선을 다시 살펴보면, 초선(初禪)은 일으킨 생각(尋 vitaka), 지속적 고찰(伺 vicāra), 희열(喜 pīty), 행복(樂 sukha)의 네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선(二禪)은 일으킨 생각(尋 vitaka)과 지속적 고찰(伺 vicāra)이 가라앉고 희열(喜 pīty)와 행복(樂 sukha)만 있고, 삼선(三禪)은 행복(樂 sukha)만 있고 사선(四禪)은 행복(樂 sukha)도 사라지고 평온(捨 upekkhā)이 완성된다. 물론 이 넷에 마음이 대상 한곳에 집중된 상태(心一境性 cittassa-ekaggatā), 즉 집중(定 samādhi)은 두루 하고 있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선의 경지는 결코 출세간의 경지가 아니라는 점이다. 선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중요하고 강력한 토대지만 깨달음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상좌부 불교에서는, 이 선은 사마타의 경지이기 때문에 번뇌가 소멸하지 않는다고 본다. 번뇌를 완전히 멸하기 위해서는 모든 유위법의 무상· 고· 무아를 꿰뚫어 보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하는데, 이렇게 선 없이 위빠사나만 닦는 것을 순수 위빠사나(suddha-vipassana)라고 하고, 사마타 수행에서의 선정상태에 해당하는 순간적인 마음집중의 상태를 찰나삼매(khaṇika-samādhi)라 한다.



17. 범부(凡夫)로 번역되는 뿌뚜쟈나(puthujjana)는 '개개의 인간들‘이란 뜻이며 천신과 인간, 출가자와 재가자를 막론하고 아직 중생을 윤회계에 묶어두고 있는 족쇄(saṃyojana)를 끊지 못한 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영어로는 ordinary worldings, worldings라고 한다. 반면에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 아라한은 성자(ariya-puggala)라 부르고 예류자 이상의 성자의 경지에 들지 못한 모든 중생을 통틀어 범부라고 한다. 『장부』주석서(DA.i.59)에서는 범부를“여러 가지 형태의 번뇌(kilesa) 등이 생기기 때문에 범부라 한다.”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여기서 ’번뇌 등‘이라고 표현한‘등’에는 유신견(有身見)을 버리지 못하고 여러 가지 업을 형성하는 것을 들고 있다. 주석서에서는 범부를 다시 눈먼 범부(andha-puthujjana)와 선한 범부(kalyāṇa-puthujjana)로 나누고 있는데, 무더기[蘊], 장소[處], 요소[界] 등을 반조하지 못하는 자를 눈먼 범부라고 하고, 그렇지 않은 자를 선한 범부라고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DA.i.59)




6. 이해하기 어려운 가르침



18. 번뇌로 옮긴 낄레사(kilesa)는, 주석가들에 의하면 그 자체가 오염되어 있으면서 그것과 관계된 마음요소들을 오염시키는 것으로 오염원이라고 설명한다. 중국에서는 번뇌(煩惱)로 번역하였고 서양에서도 이러한 낄레사(kilesa)의 의미를 살려 defilement, 또는 mental impurity라고 번역한다. 그리고 이 번뇌는 마음속의 더러운 것이 외부로 누출되어 나타나는 것이므로 아사와(漏 āsava)라고도 한다. 이 번뇌에는 다음의 10가지가 있다.


➀ 탐욕(lobha) ➁ 성냄(dosa) ➂ 어리석음(moha) ④ 자만(māna) ⑤ 사견(diṭṭhi) ⑥ 회의적 의심(vicikicchā) ⑦ 해태(thīna) ⑧ 들뜸(uddhacca) ⑨ 양심없음(ahiri) ⑩ 수치심없음(anotta)


그리고 번뇌(kilesa)는 그 정도와 세기에 따라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거친 단계의 번뇌(vītakkama-kilesa)

말과 행동으로 표출되는 매우 거친 번뇌. 계율(戒 sīla)을 지켜서 제거할 수 있다.


(2) 중간 단계의 번뇌 (pariyutthāna-kilesa)

마음에 일어나는 감각적 욕망, 성냄, 적의 등과 같은 중간 번뇌. 삼매(定 samādhi)로 제거할 수 있다.


 (3) 잠재 성향의 번뇌 (anusaya-kilesa)

내면에 잠복해 있는 매우 미세한 번뇌. 성스러운 도의 지혜인 통찰지(慧 paññā)를 계발함으로써 제거할 수 있다.



19. 아비담마(abhidhamma)는 중국에서는 대법(對法)으로 옮겼고, 또 법을 체계화한 궁극적이고 수승한 가르침이라는 의미에서 승법(勝法)이라고도 옮겼다.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은 듣는 사람의 근거에 맞게 설해진 방편설이다. 부처님께서는 재가자들과 같이 처음부터 법을 잘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보시(danā), 지계(sīla), 생천(sagga)을 설하셨고, 법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에게도 그 사람의 근기에 맞게 다양하게 법을 설하셨다. 이를 방편설(方便說), 또는 대기설법(大機說法 pariyāya-desanā)이라 한다. 이에 비해 아비담마는 듣거나 배우는 사람의 성향이나 근기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즉 아무런 방편을 쓰지 않고 설한 비방편설, 또는 비대기설법(nippariyāya-desanā)이라 한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에도 제일 먼저 삼십삼천(三十三天)의 마야부인을 위시한 천신들에게 가르치신 이유라고 볼 수도 있겠다.


아비담마는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법의 사령관[法將] 사리뿟따로부터 시작하여 붓다고사, 붓다닷따, 아누룻다, 담마빨라, 그리고 근세기의 레디 사야도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기라성 같은 장로스님들의 이해와 논쟁과 탁마를 거쳐서 정착이 되었고 또 정착이 되어나가고 있다.



20. 불교의 가르침은 모두 사성제(四聖諦)로 집약되고 종합된다. 그래서『중부』「상적유대경(象跡喩大經 Mahahatthipadopama Sutta)」(M28)에서 사리뿟따(Sāriputta) 존자는 이렇게 설하였다.“도반들이여, 예를 들면 움직이는 모든 생명들의 발자국은 모두 코끼리 발자국에 총섭되고 코끼리 발자국이야말로 그 크기로서 최상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습니다. 도반들이여, 그와 같이 어떤 유익한 법이라도 모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에 총섭됩니다. 무엇이 넷인가?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集聖諦],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滅聖諦],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의 성스러운 진리[道聖諦]입니다.”


이처럼 사성제는 불교의 초석이라 할 수 있으며 깨달음이란 바로 이 사성제를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스스로도“나는 알아야 할 바를 알았고, 닦아야 할 바를 닦았고, 버려야 할 것을 버렸노라. 바라문이여, 그래서 나는 붓다, 즉 깨달은 사람이노라.”(SN.558)라고 말씀하셨다.


사성제는 괴로움(현실)을 철저하게 알고(pariññā) 그 원인인 갈애를 제거하고(padhāna) 괴로움의 소멸(열반)을 실현하고(sacchikiriya) 그러기 위해서 팔정도(八正道)를 수행하는 것(bhāvanā)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고성제와 집성제는 12연기의 순관(유전문)과 동의어이고 멸성제와 도성제는 12연기의 역관(환멸문)과 동의어이다. 그러면 사성제를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한다.


(1) 고성제(苦聖諦 dukkha-ariyasacca) -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


고성제는 먼저 괴로움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오온(五蘊)에 대한 정확한 이해로 귀결된다. 다음 여덟 가지 괴로움이 있다.


➀ 태어남(jāti)    늙음(jārā) ➂ 죽음(maraṇa) ➃ 근심(soka) ➄ 탄식(parideva) ➅ 육체적 고통(dukkha) ➆ 정신적 고통(domanassa) ➇ 절망(upāyāsa) ➈ 싫어하는 것과 만남(appiyasampayoga) ➉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piyavippayoga) ⑪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icchitālābha) ⑫ 오취온(upādāna-kkhandha)


그리고 다음의 세 가지 성질로 설명된다.


➀ 고고성(苦苦性 dukkha-dukkhatā): 삶은 고통스럽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➁ 괴고성(壞苦性 viparinnāma-dukkhatā): 아무리 큰 행복일지라도 끝내 변하고 말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➂ 행고성(行苦性 saṅkhāra-dukkhatā): 본질적으로 오온(五蘊)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을 ‘나’라거나 ‘내 것’으로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2) 집성제(集聖諦 dukkha-samudaya-ariyasacca) -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

집성제는 고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으로 갈애(taṇhā)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이 갈애(taṇhā)는 다음의 세 가지로 설명된다.

 

➀ 욕애(慾愛 kāma-taṇhā):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➁ 유애(有愛 bhava-taṇhā): 상견(常見)과 함께하는 존재에 대한 갈애

➂ 무유애(無有愛 vibhava-taṇhā): 단견(斷見)과 함께하는 비존재에 대한 갈애


(3) 멸성제(滅聖諦 dukkha-niroda-ariyasacca) -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


멸성제는 이러한 갈애의 완전한 소멸인 열반(nibbāna)의 실현을 뜻한다.


(4) 도성제(道聖諦 dukkha-niroda-gāmiṇī-paṭipadā-ariyasacca) -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의 성스러운 진리

 

도성제는 이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중도(中道)인 팔정도(八正道)를 제시하고 있다.


① 바른 견해(正見 sammā-diṭṭhi)

➁ 바른 사유(正思惟 sammā-saṅkappa) 

➂ 바른 말(正語 sammā-vācā)

➃ 바른 행동(正業 sammā-sammānta)

➄ 바른 생계(正命 sammā-ajiva)

➅ 바른 정진(正精進 sammā-vãyama)

➆ 바른 알아차림(正念 sammā-sati)

➇ 바른 삼매(正定 sammā-samãdhi)


그리고 이러한 팔정도는 계(戒 sīla) 정(定 samādhi) 혜(慧 paññā)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계(戒): 바른 말(正語), 바른 행동(正業), 바른 생계(正命)

(2) 정(定):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알아차림(正念), 바른 삼매(正定)

(3) 혜(慧):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21. 연기(緣起)로 번역되는 빠띳짜사뭅빠다(paṭicca-samuppāda)는‘의지하여 일어남’즉 조건을 뜻하며 중국에서 연기(緣起)로 번역되었다. 영어에서도 dependent origination이라고 한다.


경전에서 12연기로 정형화되어 나타나는 이 연기는 존재론적인 실체가 없음을 천명하는 무아와 동의어이며, 진리로써는 사성제로, 실천체계로는 팔정도로 나타난다. 연기는 나고 죽는 윤회의 바퀴를 지탱하여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돌아가게 하는 조건들을 밝힌 것이기 때문에, 결코 우주의 법칙이나 생성원리를 설명하는 체계가 아니라 현실 즉 지금 여기에서 괴로움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는 발생구조와 어떻게 괴로움을 소멸시킬 것인가 하는 소멸 구조를 드러내는 가르침이다.


본문에 나오듯이 붓다고사는「청정도론」(Vis.XVII.25)에서 이러한 연기의 가르침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어려움을 실토하고 있다.


“진리(sacca), 중생(satta), 재생연결(paṭisandhi), 조건(paccaya), 이 네 가지 법은 보기 어렵고 가르치기도 아주 어렵다.”


그러므로 경전을 통달하거나 수행하여 법을 증득한 자가 아니면 연기의 주석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서,


그러나 오늘 나는 조건의 구조를 설명하기를 원한다.

마치 깊은 바다 속으로 빠져든 사람처럼

그 발판을 찾지 못하는 구나.

그러나 여러 가지 가르침의 방법으로

이 교법은 잘 장엄되어 있고

옛 스승들의 길은 끊이지 않고 전해내려 오고 있다.

그러므로 이 둘을 의지하여 그것의 주석을 시작하리라.

주의 깊게 잘 들어라.




7. 무명(無明)이란 무엇인가?



22. 롱지(Longyi)는 통치마 형태의 하의로 미얀마사람들의 일상복이다. 남자의 롱지는 뻐소(pa-so)라고 하고 여성의 롱지는 타메잉(hta-main)이라 구별한다. 미얀마남자들은 하의로 롱지를 걸치고, 위에는 중국식 자켓인 에인지(eingyi)나 T셔츠를 입는다. 또 결혼식이나 공식행사에 참석할 때는 머리에 가웅바웅(Gaung Baung)이라는 실크 터번을 쓰고, 따입뽀웅(Taippoun)이라는 중국풍 상의에 비단 롱지를 하의로 입는다. 여자용 롱지인 타메잉과 남자용 롱지인 뻐소의 가장 큰 차이점은 허리 부분을 죄인 후에 남은 롱지를 처리하는 방법이다. 남자는 반드시 복부 전면 앞쪽으로 말아서 넣고, 여자들은 허리에 감아 두르고 난 후 왼쪽이나 오른쪽 허리 측면으로 여며서 넣는다. 또한 전통적으로 여자나 남자 모두 하의인 롱지 속에 속옷을 입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리고 더운 열대성기후 때문에 구두나 양말을 거의 신지 않고 맨발에 슬리퍼만 착용한다.



23. 수행(修行)으로 옮긴 바와나(bhāvanā)는 마음 계발(mental-developement), 수행(practice), 명상(meditation)을 뜻한다. 바와나(bhāvanā)에는 집중, 즉 삼매(samādhi)를 계발하는 사마타 명상(samatha-bhāvanā)과 통찰지(paññā)를 계발하는 위빠사나 명상(vipassanā-bhāvanā)이 있다.




8.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무지



24. 비틀(betel)잎은 인도나 미얀마 같은 남방에서 빈랑(檳榔)나무의 잎사귀 속에 각종 열매와 첨가제등을 넣어서 씹는 기호품이다. 미얀마어로는 꽁(Kun) 또는 꽁야(Kun ya)라고 하는데 씹고 나면 치아가 빨갛게 물들고 눈이 충혈 되기도 한다. 흥분과 각성작용이 있고 담배처럼 중독성이 있다.

 

 


9. 멸성제(滅聖)와 도성제(道聖)에 대한 무지



25.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戒禁取]으로 옮긴 실라밧따파라마사(sīlabbata-parāmāsa)는 종교적인 금계와 의례 ․ 의식을 지킴으로써 청정해질 수 있고 해탈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고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의례 ․ 의식만이 옳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이는 중생을 삼계(三界)에 붙들어 매놓고 있는 10가지 족쇄(saṃyojana) 가운데 세 번째 족쇄이며, 네 가지 집착(upādāna)가운데 하나이다. 성자의 초보 단계인 예류도(sotāpatti-magga)에 들면 유신견(sakkāya-diṭṭhi), 의심(vicikicchā)과 같은 족쇄와 함께 모두 뿌리 뽑히게 된다.




10. 바른 견해[正見]


 

26. 삼특상(三特相)으로 옮기는 띠락까나(ti-lakkhaṇa)는  세 가지 보편적 속성이나 특징이란 뜻이다. 영어로는 three charatecteristics of existence라고 한다.

이 삼특상은 오온(五蘊)과 모든 유위법(有爲法)의 보편적 속성으로 통찰지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위빠사나를 통하여 이러한 삼특상을 반드시 철견해야만 한다.


(1) 무상(無相 anicca): 무상으로 번역되는 아니짜(anica)는 무상함, 덧없음, 또는 항상 하지 않음이란 뜻으로 모든 유위법(諸行)이 변하며 영원하지 않다는 뜻이다. 영역은 impermanence.


(2) 고(苦 dukkha): 고로 번역되는 둑카(dukkha)란 불만스러움, 괴로움, 고통으로 모든 윤회하는 존재의 보편적 특성은 고(苦)라는 것, 즉 존재의 전반적 불만족성을 나태나는 말이다.

영역은 suffering, pain, ill, unsatisfaction.


(3) 무아(無我 anatta): 무아로 번역되는 아나따(anatta)는 항상하는 자아가 없고 실재하지 않음을 가리킨다. 영역은 not-self, not-ego, egolessness, impersonality.


빨리 경전의 도처에서 부처님은 무상(anicca)· 고(dukkha)· 무아(anatta)를 설하셨는데, 특히 이는 대부분 오온(五蘊)의 무상· 고· 무아의 문맥에서 나타나며 오온으로 대표되는 모든 개념적 존재를 분석하고 분해하고 해체해서 드러나는 유위법이 무상· 고· 무아임을 철견할 때 해탈열반은 실현된다고 설하신다. 그래서 유위법(諸行)의 무상을 꿰뚫은 해탈을 무상해탈(無相解脫)이라하고 고를 꿰뚫어 실현한 해탈을 무원해탈(無願解脫)이라하고 무아를 꿰뚫어서 실현한 해탈을 공해탈(空解脫)이라 부른다.


그런데 우리에게 익숙한 삼법인(三法印)이라는 용어는 빨리 경전과 주석서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법인(法印)이라는 말은 산스끄리뜨어 다르마무드라(dharma-mudra)의 번역어로 설일체유부(設一切有部)의 율장(律藏)에서 제일 먼저 사용한 단어인 듯하고, 이를 나중에 대승불교에서 그대로 받아들인 것 같다. 대승불교의 삼법인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적정열반(寂靜涅槃)으로 여기에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넣어 사법인(四法印)이라고 하기도 한다. 설일체유부는 인도의 부파불교 내에서 가장 활발하게 독특한 종지를 내세워 대승불교와 각축했던 교파였는데 이들은 이론투쟁을 많이 겪었던 만큼 자신과 남들과의 차이점을 분명히 할 필요성에서 법의 도장[法印]과 같은 확고한 잣대가 요구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삼법인은 상좌부 불교의 삼특상과 비교해 볼 때 수행에 관한 강한 메시지보다는 불교 전반의 가장 큰 특징을 천명하는 의미가 더 크다고 하겠다.



27. 불교수행의 핵심은 '지금 여기에서 자기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여기'는 diṭṭheva dhamme, 혹은 diṭṭha-dhamma로 빨리 경전에 나타난다. 이를 중국에서는 이현법중(以現法中), 또는 현금(現今)으로 옮겼고, 직역하면 ‘보여진 현상(법)에서’이고‘지금 여기'로 의역된다. 영어로는 'here and now'로 옮기고 있다. 우리는 매순간 지금 여기를 살고 있지만 끊임없이 과거로 미래로 관심을 가져가고 있다. 불교 수행의 시작이자 마지막은 바로 ‘지금 여기’라고 감히 말해도 좋을 것이다,


'나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현상'을 法(dhamma)이라 한다. 사실 지금 여기로 옮긴 딧테와 담메(diṭṭheva dhamme)에서 담메(dhamme)는 법에서 라는 말인데 '지금 여기'라는 어법 속에 지금 여기 나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뜻이 다 포함되어 있다. 나라는 존재를 조금만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그것은 무수한 현상들이 매순간 변화해가는 과정이다. 이런 수많은 현상들이 상호관계 속에서 변화해가는 나라는 존재를 불교에서는 다섯 가지 현상들의 무더기, 즉 오온(五蘊)이라 부른다.


관찰한다는 말은 초기경에서는 vipassati로 나타나는데, 그냥 피상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이런 오온의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중부』(M143)등에서


“과거를 되새기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 마라

과거는 사라졌고 미래는 닥치지 않았다

현재에 [일어나는] 현상[法]을

[매순간] 바로 거기서 통찰하라”


라고 강조하고 계신다.


부처님 가르침은 매순간 지금 여기를 관찰하여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현상의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는 것이 핵심이다.



28. 보시(dāna), 지계(sīla), 수행(bhāvanā)은 공덕행의 토대(puñña-kiriya-vattu)라고 경전에 나온다. 「앗타살리니(Atthasālini)」는 이를 좀 더 세분하여 다음의 10가지로 들고 있다. ① 보시(布施 dāna) ② 지계(持戒 sīla) ③ 수행(修行 bhāvanā) ④ 공경(恭敬 pacāyana) ⑤ 가까이 섬김(奉仕 veyyāvacca) ⑥ 덕의 전이(廻向 pattidāna) ⑦ 타인의 덕을 따라 기뻐함(隨喜 pattānumodana) ⑧ 법을 가르침(說法 desanā) ⑨ 법을 들음(聞法 savana) ⑩ 자기의 견해를 바로 잡음(diṭṭhujjukamma)




11.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상카라[行]가 일어난다



29. 업(業)으로 번역되는 깜마(kamma)는 광범한 행위 일반을 말하지만 그러한 행위 중에서도 의도(cetanā)가 개입된 행위를 업이라 한다. 부처님께서는 증지부(A6:63/iii.415)에 “비구들이여, 나는 의도적인 행위를 업이라고 말한다. 몸과 말과 뜻으로 의도하고서 업을 짓는다.”라고 하셨다. 



30. 상카라(sakhāra)는 행(行), 의도적 행위나 작용, 형성된 것[有爲法], 업형성력 등으로 해석된다. 상카라는 빨리 성전에서 크게 다음 네 가지 의미로 나타난다.


(1)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행개고(諸行皆苦)의 문맥에서 제행으로 나타나는데 항상 복수로 쓰인다. 이 경우의 제행은 유위법(有爲法 sankhata-dhamma)을 뜻한다. 즉 열반을 제외한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유위법을 행이라고 불렀다. 이 경우에 행은‘형성된 것’에 가까운 뜻이다. 그 외 수명의 상카라(ayu-sakhāra), 존재의 상카라(bhava-sakhāra), 생명의 상카라(jivita-sakhāra)등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경우도‘형성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영역은 formations.


(2) 오온(五蘊)의 네 번째인 행온(行蘊)으로 나타난다. 이 경우에도 항상 복수로 쓰인다. 오온 가운데서 색(色)은 아비담마의 물질법이고 수(受),상(想), 행(行)은 아비담마의 심소법(心所法)이고 식(識)은 아비담마의 심법(心法)이다. 그러므로 오온에서의 행(行)은 상좌부 아비담마의 52가지 심소법 가운데서 느낌(受)과 인식(想)을 제외한 나머지 심소법 모두를 뜻하는데 감각접촉, 의도, 주의, 집중, 의욕, 선한 심리현상들, 불선한 심리현상을 모두 포함한다. 그러므로 이 경우의 행은‘심리현상’로 이해해야 한다. 영역은 mental activities.


(3) 12연기의 두 번째 구성요소 즉 무명연행(無明緣行)으로 나타난다. 12연기에서의

행도 항상 복수로 나타나는데「청정도론」에서는‘공덕이 되는 행위(puñña-abhisaṅkhāra),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 흔들림 없는 행위’로 설명이 되듯이 ‘업지음’‘업형성력’‘의도적 행위’로 해석된다. 이 경우의 상카라는 업(kamma)이라는 뜻으로 쓰였고, 이는 의도(cetanā)와 동의어로 간주한다. 영역은 kamma-formations, volitional activities.


(4)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 행위인 신행(身行), 구행(口行), 의행(意行)으로 나타난다. 「청정도론」에서는 이 삼행(三行)도 12연기의 행처럼 업형성력 즉 의도적 행위로 이해한다. 그래서 신행, 구행, 의행은 각각 신업, 구업, 의업의 삼업(三業)과 일치한다. 영역은 activity.



31. 평온으로 옮긴 우뻭카(upekkhā)는  위에서 내려다본다는 의미가 있다. 선입견이나 편견에 흔들릴 수 없는 평온이나 공평무사한 고결한 정신적인 특질을 뜻하는 말로 나타난다. 선과 악, 좋아하고 싫어함, 있음과 없음, 즐거움과 괴로움 등에 흔들리지 않고, 이들을 여읜 마음의 평정하고도 평온한 상태라는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 중국에서는 버릴 사(捨)로 옮겨졌고 영어로는 equanimity라고 한다.


평온(upekkhā)은 경에서 크게 두 문맥에서 나타난다.


(1) 삼선(三禪)과 사선(四禪)의 경지를 설명하는 술어로 나타나는데 특히 사선을 특징짓는 핵심술어로 파악하고 있다.


(2) 이웃에 대한 자애(慈 mettā), 연민(悲 karuṅa). 더불어 기뻐함(喜 muditā), 평온(捨 upekkhā)의 사무량심(四無量心)에서 마지막으로 나타난다. 평온이 중생에게로 향하면 중생에 대한 공평무사하고 고결하며 평온한 마음가짐으로 나타난다.



32. 성향으로 옮긴 짜리따(carita)는 ‘행동, 성향, 처신, 기질’등의 뜻으로 쓰인다. 여기서는 중생이 가지는 성벽이나 기질을 뜻한다. 영어로는 disposition, nature, character라고 한다. 중생의 기질은 그들의 전생의 업이 다양하기 때문에 각각 다르다. 주석가들은 재생연결식(paisandhi-vinñāṇa)의 생산업(janaka-kamma)에 따라 기질이 결정된다고 한다. 「청정도론」(Vis.Ⅲ.74~102)에서는 (1) 탐하는 기질 (2) 성내는 기질 (3) 어리석은 기질 (4) 믿는 기질 (5) 지적인 기질 (6) 사색하는 기질의 여섯 가지 기질로 분류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중생들의 다양한 근기에 맞게 설하진 부처님의 법문을 방편설(方便說), 또는 대기설법(大機說法 pariyāya-desanā)이라 한다.



33. 자발적으로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은 자극받지 않은 선법(asaṅkhārika-kusala)이고, 남의 부추김을 받아서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은 자극받은 선법(sasaṅkhārika-kusala)이다. 여러 가지 중요한 뜻을 가진 상카라(saṅkhāra)가 여기서는 아비담마에 특유한 뜻으로‘자극하는, 고무하는, 야기하는’의 뜻이나 ‘방편을 적용하는’등의 뜻으로 쓰였다. 자극이나 권유가 없이 저절로 일어나는 마음을 자극 받지 않은 마음(asaṅkhārika-citta)이라 하고 자극이나 방편에 의한 권유로 일어나는 마음을 자극 받은 마음(sasaṅkhārika-citta)이라고 한다.



34. 욕계의 선한 마음(kāmāvacara-kusala-cittā)은 세 가지 원칙에 기초하여 8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1) 기쁨(somanassa)과 평온(upekkhā)이라는 느낌의 마음부수 (2) 지혜(ñāṇa)의 있음과 없음 (3) 자극(saṅkhārika)의 있고 없음이다.

                           


35. 심일경성(心一境性)의 원어 cittassa-ekaggatā는‘한 끝으로 됨, 한 끝으로 된 상태. 혹은 하나 됨’으로 직역할 수 있고, 마음이 대상 한곳으로 집중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 마음부수법은 경장의 사종선(四種禪)이나 논장의 오종선(五種禪)에 항상 나타나는 기본 구성성분이며 삼매(samādhi)의 본질이다. 영역은 one-pointedness of mind.



36. 선(禪)이라 번역되는 jhāna는 중국에서 선나(禪那)로 음역되고 다시 선(禪)이라 정착이 되었다. 청정도론(Vis.IV.119)에서는 "대상을 명상하기 때문에, 혹은 반대되는 것을 태워 버리기 때문에 선(禪)이라 한다.”고 두 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반대되는 것이란 감각적 욕망, 악의, 해태와 혼침, 들뜸과 후회, 의심의 다섯 가지 장애[五蓋]를 뜻한다.


이러한 선정은 사마타 수행(samatha-bhāvana)으로 얻어진다. 이런 수행은 삼매의 기능을 강화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마음을 한 가지 선택된 대상에 고착시킴으로써 모든 정신적인 혼란이 제거되는 것이다. 장애는 억압되고 마음은 그 대상에 완전히 몰입된다. 경장에 따르면 선은 초선에서 사선까지 4가지로 정의되는 마음의 상태이고 이것을 바른 삼매[正定]라고 한다. 논장에서는 이것을 색계선(色界禪)으로 정의하고 경장에 나타나는 공무변처 등의 4처를 무색계선(無色界禪)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선과 삼매는 동의어로 취급된다.


경전에서 말하는 네 가지 색계선은 ➀ 초선(初禪) ➁ 이선(二禪) ➂ 삼선(三禪) ➃ 사선(四禪)이고 네 가지 무색계선은 ➄ 공무변처(空無邊處) ➅ 식무변처(識無邊處) ➆ 무소유처(無所有處) ➇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이다. 경전에서의 네 가지 색계선을 다시 살펴보면, 초선(初禪)은 일으킨 생각(尋 vitaka), 지속적 고찰(伺 vicāra), 희열(喜 pīty), 행복(樂 sukha)의 네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선(二禪)은 일으킨 생각(尋 vitaka)과 지속적 고찰(伺 vicāra)이 가라앉고 희열(喜 pīty)와 행복(樂 sukha)만 있고, 삼선(三禪)은 행복(樂 sukha)만 있고 사선(四禪)은 행복(樂 sukha)도 사라지고 평온(捨 upekkhā)이 완성된다. 물론 이 넷에 마음이 대상 한곳에 집중된 상태(心一境性 cittassa-ekaggatā), 즉 집중(定 samādhi)은 두루 하고 있다.


아비담마에서는 이를 다섯 가지로 분류하는데,  이는 초선(初禪)의 일으킨 생각(尋 vitaka)이 가라앉고 평온(捨 upekkhā), 희열(喜 pīty), 행복(樂 sukha)이 있는 경우를 이선(二禪)으로 한 것이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선의 경지는 결코 출세간의 경지가 아니라는 점이다. 선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중요하고 강력한 토대지만 깨달음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상좌부 불교에서 이 선은 사마타의 경지이기 때문에 번뇌가 소멸하지는 못한다고 한다. 번뇌를 완전히 멸하기 위해서는 모든 유위법의 무상· 고· 무아를 꿰뚫어 보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만 하는데 이렇게 선 없이 위빠사나만 닦는 것을 순수 위빠사나(suddha-vipassana)라고 하고 사마타 수행에서의 선정상태에 해당하는 순간적인 마음집중의 상태를 찰나삼매(khaṇika-samādhi)라 하고 있다.




12. 불선업



37.「청정도론」(Vis.ⅩⅦ.60)에 따르면“'공덕이 되는 행위(puññā-abhisaṅkhāra)'는 보시, 지계 등으로 생긴 여덟 가지 욕계의 유익한 의도(cetanā)와 수행으로 생긴 다섯 가지 색계의 유익한 의도 등 13가지 의도이다.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apuññā-abhisaṅkhāra)'는 살생 등으로 생긴 12가지 불선한 의도이고, '흔들림 없는 행위(aneñja-abhisaṅkhāra)'는 수행으로 생긴 네 가지 무색계의 선한 의도이다. 이처럼 세 가지 상카라는 29가지 의도이다.”



38. 악처(惡處)로 옮긴 아파야(apāya)는 ‘분리, 손실, 타락’등의 뜻이며, 다음 생에 태어나는 불행한 상태를 뜻하는 전문술어로 정착되었다. 고통과 비참함이 즐거움보다 훨씬 더 많은 세계로 불선업을 저지른 이들이 태어나는 곳의 통칭이다. 여기에는 ① 지옥(niraya) ② 아귀(peta) ③ 축생(tiracchānayoni) ④ 아수라(asura)의 네 가지가 있다. 중국에서는 사악도(四惡道), 사악취(四惡趣)등으로 옮겼고 영어로는 four nether worlds, four lower worlds라 한다.


(1) 지옥(地獄): 주석서(AAṬ)에서는‘아무런 즐거움이 없는 곳‘으로 설명한다. 31가지 중생계[三界]의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세계로서 전생의 악업의 대가로 극심한 고통만이 있는 곳이다. 주석서들에 따르면 지옥에는 여덟 가지 대지옥, 즉 팔열지옥(八熱地獄)이 있는데 ➀ 등활(等活 Sañjīva) ➁ 흑승(黑繩 Kālasutta) ➂ 중합(Saṅghāta) ➃ 규환(叫喚 Roruva) ➄ 대규환(大叫喚 Mahā Roruva) ➅ 초열(焦熱 Tāpana) ➆ 대초열(大焦熱 Mahā Tāpana) ➇ 무간(無間 Avīci)지옥이 그것이다. 뒤의 지옥으로 갈수록 고통은 더 심해지며 이들 가운데 무간지옥이 제일 아래 있고 가장 무시무시한 곳이다.


(2) 아귀(餓鬼):

원래 조령신(祖靈神)을 뜻했다. 그런데 제사에서 후손들이 올리는 음식을 기다리는 자들이라는 뜻에서 불교에서‘굶주린 귀신’으로 정착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귀는 사는 영역이 따로 없이 숲이나 습지나 묘지 등 인간이 사는 세계에 같이 산다고 한다. 인간의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간혹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고 천안(天眼)으로 보이기도 한다. 띠로꿋다 경(Tirokudda Sutta)에 나오듯이 이들 가운데 ④ 파라닷뚜파지위노만이 살아있는 친척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행한 공덕을 나누어 줄때 그 공덕을 누릴수 있고 더 나은 선처로 갈수 있다고 한다.『소부(小部)』의 「아귀사(餓鬼事)」는 악업으로 인해 이러한 아귀로 태어난 중생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3) 축생(畜生): 축생계는 서로 죽고 죽이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기 때문에 사랑, 연민이나 기타 영적인 가치가 들어설 자리가 없고 동물들은 대개 고통과 두려움에 휩싸여 죽기 때문에 다시 악처에서 다시 태어날 확률이 크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동물도 선한 마음을 일으켜서 내생에 인간계나 천신계에 태어날 수도 있다.


(4) 아수라(阿修羅): 원어 아수라(asura)는 문자적으로 유희하거나 빛을 발하지 못하는 존재를 의미하고 경에서는 제석(Sakka)을 왕으로 하는 삼심삼천의 천신(deva)들과 싸우는 존재로 나타난다. 하지만 악처에 속하는 아수라는 그러한 아수라와는 구별해야 한다. 이들은 괴물처럼 생기고 집채만한 배에 입이 너무 작아 제대로 먹거나 마실 수 없는 일종의 아귀이다. 이 가운데 깔라깐지까(Kālakañjika)가 가장 비참하고 고통이 심한 아수라이다.



39. 아비담마에서는 불선한 마음(akusala-citta)을 먼저 불선한 마음의 가장 강력한 뿌리(mūla)인 탐욕(lobha), 성냄(dosa), 어리석음(moha)을 통해서 분류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본문 뒤의 도표참조



40. 들뜸으로 번역되는 웃닷짜(uddhacca)는 ‘위로 가버린 상태, 올려진 상태’를 뜻하며 들뜨고 흥분되고 불안한 마음상태를 나타낸다. 중국에서는 도거(掉擧)로 한역되었고 영역은 restlessness이다. 이 들뜸은 경전에서 후회(kukkucca)와 합성되어 다섯 가지 장애(nīvaraṇa)가운데 네 번째 장애로 나타난다. 또한 이 들뜸은 10가지 족쇄(saṁyojana)중의 아홉 번째 족쇄로 아라한이 되어야만 비로소 완전히 극복이 된다. 그래서 모든 불선에 항상 존재하는 원초적인 동요라고 할 수 있겠다.



41.. 목갈라나(Moggalāna) 존자는 마하목갈라나(Mahā-Moggalāna)라고도 하는데 라자가하(Rājagaha)의 꼴리따 마을(Kolitagāma)의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나 마을 이름을 따라 꼴리따(Kolita)라 불리었다. 또 어머니의 이름이 목갈리(Moggalī) 또는 목갈리니(Moggalinī)였기 때문에 목갈라나(Moggalāna)로도 불리게 되었다. 목갈라나가 태어난 날에 사리뿟따도 우빠띳사(Upatisa)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어릴적부터 사리뿟따와 절친한 사이였는데 하루는 자신들을 따르는 바라문 젊은이들과 함께 라자가하의 산마루 축제[山頂祭]를 보러갔다가 갑자기 삶의 덧없음을 느끼고는 함께 출가하여 사문이 되었다.


처음에는 사리뿟따와 함께 불가지론(不可知論)을 펴는 산자야(Sañjaya)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사리뿟따로부터 앗사지(Assaji) 존자의 연기법의 게송을 전해 듣고 예류과를 얻었다. 그리고는 사리뿟따와 함께 승가에 들어와 부처님의 상수제자가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사리뿟따 존자와 목갈라나 존자를 비구들이 본받아야 하는 이상적인 제자라고 선언하셨다.(S.ii.235; A.i.88). 부처님은 「제분별경(諸分別經 Saccavibhanga Sutta)」(M.iii.248)에서 두 상수제자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설명하셨다.“사리뿟따는 아이를 낳는 어머니와 같고 목갈라나는 갓난아이를 돌보는 유모와 같다. 사리뿟따는 제자들을 가르쳐 예류과에 들게 하고 목갈라나는 더 높은 단계로 이끌어 올려준다.”목갈라나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와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이자 도반으로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 친분은 부처님의 말년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세존께서는 두 상수제자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로 하여금 승가의 일을 분담하여 보살피도록 하시고, 여래가 안 계실 때에는 그들이 승가의 일을 책임지도록 하셨다. 또한 부처님은 긴요한 상황이 생기면 특별한 임무를 두 상수제자에게 부여하시는 일이 자주 있었다. 예컨대 데와닷따(Devadatta)가 웨살리(Vesāli)출신의 갓 출가한 비구들을 꼬드껴서 상두산(象頭山)으로 데리고 가자, 부처님께서는 두 상수제자를 보내어 데와닷따가 잠시 잠들어 있는 틈을 타 500명의 비구들을 설득하여 모두 되돌아오게 하셨다. (Vin.2:199-200)


목갈라나 존자는 신통력에서 누구보다도 으뜸이었다.(A.i.23). 존자는 살아 있는 형상을 무한대로 만들 수 있었고, 원하는 어떠한 형태로도 변신할 수 있었다. 또한 수미산(須彌山)을 강낭콩처럼 으깨 버릴 수 있었으며(DhA.iii.212), 지구를 손가락으로 돗자리처럼 둘둘 감을 수도 있었고, 지구를 옹기장이의 물레바퀴처럼 돌릴 수도 있었으며, 지구를 펼쳐진 우산처럼 수미산위에 올려 놓을 수도 있었다고 한다. 어느 때 부처님이 위층에 계시는 데도 불구하고 아래층에서 잡담을 하면서 노닥거리는 비구들을 따끔히 혼내주라는 세존의 명을 받아서 하늘 높이 치솟아 올라서는 엄지발가락 끝으로 강당을 흔들어 그들을 혼비백산하게 하기도 하였다.(S.v.269ff; SNA.i.336f) 한때 목갈라나 존자는 제석(Sakka)이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많은 이익을 얻고 있는지를 확인하러 삼십삼천으로 갔다. 하지만 제석은 자신의 영화에만 도취되어 너무 자만하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무상함을 일깨워 주고자 손가락으로 제석의 웨자얀따(Vejayanta) 궁전를 크게 흔들었다.(M.i.251ff). 목갈라나 존자는 또한 부처님이 바까(Baka) 범천의 오만함을 꺽는데 도움이 되어드리고자 직접 바까 범천의 처소로 가기도 하였다. 하지만 주석서들(ThagA.ii.188ff)에 따르면 목갈라나의 신통력의 극치는 독룡(毒龍) 난도빠난다(Nandopananda)를 조복시킨 일이었다. 목갈라나 존자는 별도의 선정에 들지 않고서도 아귀나 다른 중생계의 존재들을 육안(肉眼)으로 볼 수 있었다고 한다.(DhA.ii.64; iii.60, 410f., 479; S.ii.254ff). 목갈라나 존자는 지혜에 있어서도 사리뿟따 존자 다음가는 위치에 있었다.


「사라방가 본생경(Sarabhaṅga Jātaka)」(J.522)에 따르면 존자는 신통력으로 종종 웃사다(Ussada) 지옥과 천상계를 자유자재로 드나들면서 외도의 신자들은 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고 부처님의 신자들은 천상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알려주었는데 이렇게 되자 세상 사람들이 점점 외도를 멀리하고 부처님주위로 모여들었다. 그러자 이에 앙심을 품은 나형외도(裸形外道)들은 사마나굿따까(Samanaguttaka)라는 도적두목에게 천금을 주고 목갈라나 존자를 죽이라고 사주했다. 도적들은 존자를 죽이려고 깔라실라(kālasilā)로 갔지만 멀리서 그들을 본 존자는 하늘을 날아 화를 면하였다. 둘째 날도, 셋째날도 존자는 신통력으로 자리를 피해 살 수 있었지만 7일째가 되자 전생에 지은 순후업(順後業)이 그 과보를 얻을 기회가 무르익었기 때문에 더 이상 예전처럼 신통력을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존자가 지었던 순후업은 주석서들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먼저「본생경」주석서(J.522)에 따르면 존자는 과거전생의 어느 때 아내의 말을 쫒아 눈먼 부모를 죽이려고 수레에 태워 숲속으로 데리고 가서 도적이 나온 것처럼 꾸며 부모를 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모는 시력이 없었기 때문에 자식이 때리는 줄은 모르고 진짜 도적이라 생각하고는 아들 보고 빨리 피하라고 소리쳤다. 이러한 말에 감동한 아들은 원래 생각을 접고 부모를 도로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하지만「법구경」주석서(DhA.iii.65ff)에 따르면 존자는 실제로 숲속에서 부모를 때려죽였고 이 악업으로 무수한 세월동안 무간지옥에서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아무튼 이런 업은 오랫동안 그 과보를 받을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재속의 불씨처럼 묻혀 있다가 이렇게 존자의 최후 몸을 붙잡았다. 


도적들은 존자를 때려 뼈를 부수어 잘게 썬 볏짚처럼 만들어 놓고는 이제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떠났다. 잠시 후 의식을 회복한 존자는 죽기 전에 부처님을 뵈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부서진 몸을 신통력으로 한데 묶고 하늘로 솟아올라 공중으로 부처님께 가서 인사를 드리고 이제 자신이 반열반에 들 때가 왔음을 알렸다. 그러자 부처님은 마지막 설법을 할 것을 요청하셨고 이에 존자는 여러 기적들을 나투고는 법문을 하였다. 그리고는 깔라실라로 가서 반열반에 들었다. 이때 여섯 욕계천상에서는 대소동이 일어났고 천신들은 하늘의 꽃, 향료와 백단향가루와 갖가지 섶나무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다비장 주변 1유순 이내에 꽃비가 내렸다. 존자의 다비식은 천신과 인간들의 성대한 공경과 예배 속에서 7일 동안 아주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그리고 다비식이 모두 끝나고 나자 부처님은 존자의 사리를 잘 수습하여 죽림정사(Veḷuvana)에 탑을 세우게 하셨다. 사리뿟따 존자는 양력 10월과 11월에 걸쳐있는 깟띠까(Kattika)달 보름날에 입적하였고 보름 후 초승달이 떠오르는 날에 목갈라나도 입적하였다.(SA.iii.181) 그로부터 반년 후에 부처님께서도 무여의열반에 드셨다고 전해진다.


「불종성경」(B.i.58)에 따르면 목갈라나 존자의 몸은 푸른 연꽃이나 비구름의 색깔을 띠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스리랑카에서는 존자가 최근의 과거에 지옥에서 고통 받은 것으로 인한 것이라는 구전이 전해지고 있다.


주석서에 따르면 목갈라나 존자가 마지막 생에 고따마 부처님의 상수제자가 된 것은 1아승지 10만겁 전 아노마닷시(Anomadassī) 부처님 제세시 시리왓다나(Sirivaḍḍhana)라는 바라문으로 있을 때 사리뿟따 존자의 전신인 사라다(Sarada)와 함께 미래 부처님의 상수제자가 되고자 원을 세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19세기 중엽 영국의 커닝햄(Cunningham)에 의해 인도의 산치(Sanchi) 대탑에서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의 사리가 들어있는 두 개의 석재 사리함이 발굴되었고 두 존자의 사리 중의 일부가 1950년 10월 20일 미얀마에 전해져 제6차 결집의 사적지에 세워진 양곤의 까바예(Kabaye) 파고다에 안치되었다.


42. 승가(僧伽)로 음역한 상가(saṅgha)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함께 모인 집단을 뜻하며 불교에서는 좁게는 비구, 비구니의 승단, 넓게는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사부대중의 모임을 뜻한다.


43. 낫(Nat)은  오랫동안 미얀마인의 인생관과 우주관을 지배해온 민간 토착신앙의 대상으로 ‘정령’이나 ‘귀신’등을 의미하며 토지, 나무, 산, 하천 등의 자연정령과 마을수호신, 택지수호신, 도로수호신 등 다양한 개인 및 지역의 수호신을 포함한다.


                                  

44. 여기서 보듯, 본서에 나오는 영어 illusion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전도(vipallāsa)와 무명(avijjā)을 함축하고 있는 표현이므로 이를 문맥에 따라 전도된 인식과 무명으로 옮겼다.



45. 네 가지 전도는 빨리 경전과「청정도론」등의 주석들에서 항상하다, 즐겁다, 자아다, 깨끗하다는 상락아정(常樂我淨)에 대한 네 가지 전도된 인식(vipallāsa-saññā)들로 정형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14. 무명과 전도된 인식


    

46. 위사카(Visākha)는 부처님의 대표적인 재가 여신도였다. 앙가(Aṅga)국의 밧디야(Bhaddiya)에서 태어난 그녀는 7살 때 그 고장을 방문하신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예류과를 얻었다. 남편인 미가라(鹿慈 Migāra)는 원래 니간타(Nigantha)의 신자였지만 아내로 인하여 불법을 접하고 예류과까지 얻어 위사카를 어머님과 같이 공경했기 때문에 세상에서 미가라의 어머니(鹿慈母 Migāra-mātā)라 불렸다. 위사카는 기원정사(祇園精舍 Jetavana) 동쪽에 녹자모강당(鹿慈母講堂 Mīgāramātupāsāda), 즉 동원정사(東園精舍 Pubbārāma)를 지어 승가에 헌납하였고 매일 자신의 집에서 5백 명의 비구들에게 식사를 대접하였다. 세존께서는 그러한 위사카를 보시하는 여신도 가운데 으뜸이라고 칭찬하셨다.(A:1.26)

 


47. 세존으로 옮긴 원어는 바가완(Bhagavan)이다. 원어의 의미는 바가(bhaga)를 가진 분(-vat)이다. 여기서 바가란‘복, 행운’을 뜻하기 때문에 Bhagavan은 복자(福者)라는 의미이다. 중국에서는 세존(世尊)으로 옮겼고 영어로는 the Blessed one이라고 한다.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청정도론」(Vis.Ⅶ.53~)을 참조할 것.



48. 사왓티(Sāvatthi)는 꼬살라(Kosala)국의 수도였다. 이 도시의 이름은 선인 사왓타(Sāvattha)가 살았던 데서 유래한다고도 하고, 상업도시이므로 대상(隊商)들이 만나서 ‘어떤 상품이 있는가(kim bhandan atthi)’라고 물으면  ‘모든 것이 다 있다(sabham atthi)’라고 대답한 데서 유래한다고도 한다. 꼬살라는 부처님의 재세시에 인도에 있었던 16개국 가운데 하나였으며 16국은 점점 서로 병합되어 나중에는 마가다(Magadha)와 꼬살라(Kosala) 두 나라로 통일되었다. 부처님 재세시에는 빠세나디(Pasenadī) 왕이 꼬살라를 통치하였고, 그의 아들 위두다바(Viḍūḍabha)가 계승하였다. 부처님께서 말년에 24년 정도를 이곳 사왓티의 기원정사(Jetavana)에서 머무시는 등 부처님과 아주 인연이 많았던 곳이다.



49. 아자따삿뚜(Ajātasattu)는 빔비사라(Bimbisāra) 왕의 아들이었으며 아바야(Abhaya)왕자와는 이복형제 사이다. 장부 주석서(DA.i.135~7)에는 그가 데와닷따와 역모를 꾸며서 그는 부친을 시해하고 데와닷따는 부처님을 시해하여 했던 사실이 상세하게 나타난다. 그는 아버지를 시해하고 왕이 되었기 때문에 그도 아들 우다이밧다(Udāyibhadda)에 의해서 시해 당할까봐 항상 두려워 했다고 하며 그래서 아들이 출가하기를 바랐다고 한다.(DA.i.153) 그러나 결국은 그의 아버지 빔비사라 왕이 처참하게 죽던 날에 태어난 아들 우다이밧다에 의해 시해당하고 말았다고 한다.(Mhv.iv.1.26). 주석서에 따르면 부친을 시해하고 잠을 제대로 못 이루던 왕은 지와까를 통해서 부처님을 찾아 뵙고 법문을 들어 잘못을 참회한 뒤에야 비로소 잠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한다.

 


50. 데와닷따(Devadatta)는 부처님의 사촌형제로 석가족의 숫빠붓다(Suppabuddha)왕과 아미따(Amitā)왕비의 왕자로 태어났다. 데와닷따(Devadatta)라는 이름은‘천신(deva)에게 바친(datta)’이란 뜻이다.



51. 두시(Dūsī)는 까꾸산다 부처님(Kakusandha Buddha)당시의 마라였다. 두시는 처음에 바라문들로 하여금 까꾸산다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위두라(Vidhura)존자와 산지와(Sañjīva)존자를 헐뜯도록 했다. 하지만 비구들의 자애, 연민, 더불어 기뻐함, 평온의 힘으로 그러한 시도가 실패하자, 다시 바라문들로 하여금 비구들을 높이 공경하도록 하여 그들을 유혹하려 했다. 하지만 까꾸산다 부처님의 방해로 두시의 공작은 실패로 끝났다. 마침내 두시는 한 소년의 몸에 깃들어서 부처님을 모시고 아침 탁발을 나서는 위두라(Vidura)존자에게 돌을 던져 그 머리가 깨뜨려 죽게 했다. 두시는 그 즉시 무간지옥에 떨어졌다. 본문의 두시의 이야기는 『중부』「마라문책경(Māratajjaniya Sutta)」(M.i.333)및 「장로게」(Thag.1187-91)와 그 주석서(ThagA.ii.183)에 나온다. 여기서 마하 목갈라나는 자신의 배에 깃든 마라에게 성자를 해코지하는 죄업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경고하면서 그 두시가 바로 전생의 자신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52. 마라(Māra)는 초기경과 주석서들을 통해 크게 세 문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사악함이 의인화 혹은 상징화된 존재로서의 마라이고, 하나는 천신으로서의 마라이며, 또 하나는 세속적인 모든 존재로서의 마라이다.


(1) 사악함의 화신으로서의 마라는 그래서 빠삐만(波旬 Pāpiman)으로 불리는데 사악한 자, 악마(惡魔)라는 뜻이다. 또 나무찌(Namuci)라고도 불리는데 해탈을 방해하는 자라는 뜻이다.


(2) 신으로서의 마라는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신이다. 타화자재천은 욕계(欲界)의 최고 높은 천상이다. 그래서 그는 중생들이 욕계를 못 벗어나도록 방해한다고 한다. 이런 마라는 범천(梵天)이나 인드라처럼 대단한 위력을 가졌고 군대를 가지고 있다.


(3) 그리고 경에 따라서는 세속적인 모든 존재 즉 열반(涅槃)이 아닌 모든 것은 마라라고 하기도 한다. 그래서 『상응부』에서는 오온(五蘊)을 마라라고도 하는 등 마라는 참으로 다양한 문맥에서 등장한다. 그래서 세속적인 모든 것은 마라의 영역에 속는 것으로 표현된다. 말하자면 예류자 이상의 성자가 되기 전에는 항상 마라의 감시영역에 있다고 볼수 있다.


그래서 주석서에서는 이런저런 것을 다 포함하여 다섯 가지로 마라를 분류하는데 그것은 ➀ 신으로서의 마라(devaputta-māra) ➁ 번뇌로서의 마라(kilesa-māra) ➂ 오온으로서의 마라(khandha-māra) ④ 업으로서의 마라(kamma-māra) ⑤ 죽음으로서의 마라(maccu-māra)이다.



53. 무간지옥(無間地獄)으로 번역한 아위찌 니라야(Avīci-niraya)는  한 순간도 쉴 새 없이 고통을 받으므로 중국에서 무간지옥(無間地獄), 또는 아비지옥(阿鼻地獄)이라 번역했다. 무간지옥은 불교의 8가지 대지옥(Mahā-Niraya)중에서 제일 아래에 있고 가장 무시무시한 곳이다.(J.v.266).



54. 증득으로 번역한 사마빳띠(samāpatti)는‘함께 받아들임,‘증득, 얻음, 획득’의 뜻이다. 중국에서는 saṁ의 의미를 살려 등지(等持)로 번역했고 영어로는 attainment라고 한다. 사선(四禪), 사처(四處), 상수멸(想受滅)의 경지 가운데 하나를 증득했다는한 전문술어이다. 그리고 도와 과의 성취도 증득으로 부르고 있다.




15. 상카라[行]를 조건으로 식(識)이 일어난다



55. 재생연결식(paisandhi-vinñāṇa)은 ‘다시 함께 만남’이라는 뜻으로 ‘연결, 재생, 재생연결, 입태’등의 의미로 쓰인다. 즉  paisandhi-vinñāṇa는 금생과 내생을 연결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중국에서는 결생심(結生心), 결생식(結生識)등으로 번역했고 영어로는 rebirth conciousness라고 한다. 이 재생연결식은 중생들이 죽는 순간에 나타나는 업(kamma)이나 업의 표상(kamma-nimitta), 그리고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중 하나를 대상으로 생긴다. 상좌부 불교에서는 이 재생연결을 한 생의 출발로 본다. 모든 중생은 한 생을 죽음의 마음(cuti-citta)로 종결짓고 나면 즉시 다른 형태의 존재로 재생(再生)하는 재생연결식이 일어나고 이 재생연결식이 곧바로 다음 생의 바왕가(bhavaga)로 연결이 된다. 그러므로 임종직전에 가지는 마음 태도가 상당히 중요하다.

  


56. 바왕가의 마음(bhavaga-citta)은 한 개체의 존재 영속성을 유지시키는 마음, 즉 존재지속심이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life-continuum으로 옮기고 있고 중국에서 유분(有分), 유분심(有分心), 유분식(有分識)으로 한역하였다. 우리의 인식과정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아주 미세하고 수동적인 마음으로 서양 심리학의 용어로는 잠재의식이라 할 수 있다. 의식이 없어 보이는 깊은 잠속이나 기절했을 때도 이 바왕가는 흐르고 있다. 그리고 이 바왕가는 항상 강이나 흐름에 비유되며 바왕가의 흐름이란 뜻의 바왕가소따(bhavaṅga-sota), 또는 바왕가산따띠(bhavaṅga-santati)란 말이 주석서에 많이 나온다. 모든 마음은 대상 없이 일어나지 않듯이 이 바왕가의 마음(bhavaga-citta)도 임종직전 나타나는 업(kamma)이나 업의 표상(kamma-nimitta) 또는 태어날 곳의 표상(jāti-nimitta)중의 하나를 그 대상으로 가지고 흘러간다.



57. 죽음의 마음이라 옮긴 쭈띠찟따(cuti-citta)는 사심(死心), 사몰심(死沒心)이라고도 하며 영역은 death-conciousness이다. 이것은 한 존재가 생을 마칠 때 일어나는 마음이며, 이 마음으로 한 생명의 일생은 끝난다. 이 죽음의 마음은 재생연결식과 바왕가가 가진 대상을 대상으로 가져서 그 대상을 가지고 한 생을 끝내는 마음이다. 그렇게 죽은 다음에는 계속해서 재생연결식이, 재생연결식 다음에는 또 바왕가가 생긴다. 이렇게 해서 존재[有], 태어날 곳, 머묾, 거처에서 윤회하는 중생에게 마음의 흐름(citta-santāna)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아라한과를 증득한 성자는 죽음의 마음과 더불어 윤회가 종식된다.



58. 받아들이는 마음(sampaṭicchana-citta)에서 받아들임으로 번역되는 삼빠띠짜나(sampaṭicchana)는  문자 그대로 이쪽으로 향해 보내는 의미에서 ‘받아들임’의 뜻이고, 영어에서는 receiving으로 정착되었다. 대상을 잘 확인하여 받아들이는 작용이다. 이 받아들임과 조사함(santīraṇa)과 결정함(voṭṭhapana)은 오직 오문전향을 통해서, 즉 안 이 비 설 신의 전오식(前五識)을 통해서 일어나는 오문인식과정에만 나타나며 의문전향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문전향은 마음의 현상을 그 대상으로 하므로 받아들이고 조사하고 결정하는 역할 없이 즉각적으로 자와나가 일어난다.

  


59. 과보의 마음(vipāka-citta)은 업을 짓는 마음이 있으면, 그 업의 과보로 일어나는 마음이다. 그리고 업과 과보에 상관없이 일어나는 마음이 있는데 오문전향과 의문전향이라는 대상으로 전향하는 일종의 기계적인 마음이다. 이것을 작용만하는 마음(kiriyā-citta)이라 부른다. 물론 아라한이 일으키는 좋은 마음도 작용만 하는 마음이다. 왜냐하면 아라한이 일으키는 좋은 마음은 그 과보를 가져오지 않기 때문에 업을 짓는 마음이라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12연기의 식은 재생연결식도 되고 당연히 삶의 전개과정에서 일어나는 과보의 마음도 된다. 식이 조건이 되어서 일어나는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는 모두 이러한 과보의 마음인 식과 함께 일어나는 물질과  마음부수법이다.


 


16. 상카라[行]에서 어떻게 재생연결식[識]이 일어나는가?



60. 레디 사야도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과거(전생)의 선하거나 불선한 업형성력(상카라)이 발현되지 않으면 재생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 점은 매우 심오하다. 이것을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전통적인 불교신자들이 지닌 견해는  피상적일 뿐인데, 이들은 요소와 현상을 꿰뚫어 보는 직관적 통찰지가 여전히 부족하다.”A manual of the excellent man (Uttamapurisa Dipani), by Ven. Ledī Sayādaw. BPS. Kandy. 2000. P.117



61. 유신견(有身見)으로 번역되는 삭까야딧띠(sakkāya-diṭṭhi)는 sakkāya(존재의 무더기=오온) + diṭṭhi(견해)의 합성어이다. 영역은 personality belief, wrong view of self등으로 풀이 된다. 불멸하는 영혼이나 인격 주체와 같은 존재론적 실체가 있다고 믿는 그릇된 견해로 중생들을 윤회에 묶어두고 있는 10가지 족쇄(saṃyojana)중 첫 번째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엔 네 가지 종류가 있는데 ① 오온(五蘊)이 바로 자아라는 생각 ② 오온(五蘊)안에 자아가 들어 있다는 생각 ③ 오온(五蘊)과 따로 있다는 생각 ④ 오온(五蘊)의 주관자란 생각이다. 빨리 경전에 나오는 유신견의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여기 배우지 못한 범부는 성자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정통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인도되지 못하고 바른 사람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바른 사람의 법에 정통하지 못하여 물질[色]을 자아라고 관찰하고, 물질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물질이 자아 안에 있다고, 물질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한다. 느낌[受]을 … 인식[想]을 … 상카라[行]들을 … 식(識)를 자아라고 관찰하고, 식(識)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식이 자아 안에 있다고, 식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한다. 이와 같이 유신견이 있다.”(M43)


 이 유신견은 성자와 범부를 판단하고 걸러내는 금강석이다. 왜냐하면 이 유신견을 타파하지 못하면 성자의 초보단계인 예류자(sotāpanna)도 될 수 없기 때문이고, 유신견으로 대표되는 족쇄들이 풀리지 않는 한 아무리 깊고 미묘한 천상에 태어나더라도 탐· 진· 치의 불길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17. 상견(常見)과 단견(斷見)



62. 상견으로 번역한 사싸따딧띠(sassata-diṭṭhi)는 sassata(영원, 항상함) + diṭṭhi(견해)의 합성어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상견(常見)으로, 영어로는 eternalism, eternity-belief라고 한다. 이는 영혼이나 자아는 절대 죽거나 분해되지 않는다고 믿는 영원주의라는 삿된 견해이다. 거친 육신이 소멸되어도 살아있는 실체인 영혼은 소멸되지 않고 다른 새로운 몸속으로 들어가서 계속해서 존재하며, 설령 세계가 무너지고 파괴될지언정 영혼은 영원히 존속하고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교외의 다른 종교는 대부분 이러한 상견을 취하고 있다. 요컨데, 영혼이나 살아있는 실체가 소멸되지 않고 새로운 존재로 옮겨간다고 보는 믿음은 다 상견이다. 그리고 이 상견과 결부된 갈애를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bhava- taṇhā)라고 한다.



63. 원인을 부정하는 견해(無因論 ahetuka-diṭṭhi)는 중생의 번뇌와 청정에는 아무런 원인[因, hetu]도 조건[緣, paccaya]도 없다는 견해로서 중생들은 우연이나 운명이나 필요에 의해서 오염되기도 하고 청정해지기도 한다고 주장하는 3가지 삿된 견해(micchā-diṭṭhi)중의 하나이다. 경전에서는 이외에도 허무주의의 견해(虛無論 natthika-diṭṭhi), 업보를 부정하는 견해(akiriya-diṭṭhi)를 삿된 견해로 더 들고 있다.(D2; M60; M76)



64. 레디 사야도(Ledī Sayādaw)는 근세 미얀마가 낳은 걸출한 스님이다.

레디 사야도가 어떤 방법으로 수행하였는가 구체적인 정보는 없지만, 전통적인 수행방법인 호흡에 대한 관찰과 몸의 감각을 관찰하는 방법을 바탕으로 한 위빠사나 수행을 하였을 것이라고 고엔카 전통에서는 정리하고 있다. 이 방법은 사야 텟 지와 우바킨을 거쳐 고엔카지의 위빠사나 수행법으로 이어진다.



65. 찬나(Channa) 장로는 부처님이 출가할 때 마부였다.  그는 부처님과 법에 대한 집착과 자만심이 너무나 강해서 출가의 이익을 체득할 수 없었다고 한다. 세존께서는 찬나와의 인연을 중히 여기시어 유훈으로 어느 누구도 그와 상대를 하지 말라는 최고의 처벌(brahma-daṇḍa)을 내리셨다. 「율장」(Vin.ii.292)에 의하면 찬나는 이 처벌을 받고 크게 정신이 들어서 자만심과 제멋대로 하는 성질을 꺾고 홀로 한거하여 열심히 정진하였으며 마침내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66. 아난다(Ānanda) 존자는 부처님의 사촌동생이다. 부처님 시자의 소임을 맡아서 입멸하실 때까지 25년을 그림자처럼 한결같이 곁에서 모셨고, 세존이 하신 설법을 기억하여 1차 결집에서 부처님 말씀을 경장으로 확정짓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주석서에 의하면 그가 참석하지 않아서 듣지 못한 가르침은 개인적으로 여쭈어서 부처님이 하신 말씀은 빼놓지 않고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67.  저 세상으로 번역되는 파라로까(para-loka)는 para(저쪽으로, 넘어서) + loka(세상).




19. 마하담미까 이야기



68. 빨리(Palī)는 성전이라는 의미와 빨리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빨리 성전은 경(Sutta)· 율(Vinaya)· 론(Abhidhamma)의 삼장(Ti-Piaka)이며 주석서(Aṭṭhakathā)는 빨리 성전이라 하지 않는다.



69. 벽지불(辟支佛)이라 번역한 빳쩨까붓다(pacceka-buddha)에서 빳쩨까(pacceka)는 prati(~에 대하여)+ eka(하나)가 합성된 단어이다. 그래서‘각각 분리해서’‘독립적으로’의 뜻이다. 벽지불은 부처님의 교법이 사라진 시대에 태어나서 부처님 법에 의지하지 않고 홀로 깨달아서 법을 선포하지 않고 반열반(般涅槃)에 드는 분이다. 즉 깨달았다는 뜻에서는 부처님과 같지만 중생들에게 법을 선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부처님과 다르다. 그리고 부처님 법을 의지하지 않고 깨달았다는 점에서 아라한들과도 다르다. 이런 특이한 위치에 존재하는 깨달은 분이 벽지불(辟支佛)로써, 중국에서 독각(獨覺), 또는 연각(緣覺)으로 번역되었다. 영어로는 Slient buddha, Private buddha, Solitary Buddha, Independently Enlightend one등이라 한다.


상좌부 불교에 의하면, 깨달음에 이르는 존재에는 부처님, 벽지불 그리고 아라한의 세 가지가 있다. 아라한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았다는 의미에서 제자, 즉 성문(聲聞)이라고 한다. 성문은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의 상수제자와 아누룻다, 마하깟사빠, 아난다 등의 대제자 그리고 일반 제자로 다시 나뉜다.


이 부처님, 벽지불, 아라한은 모두 깨달은 분들이지만 깨달음의 자질은 서로 다르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최상이고 벽지불의 깨달음은 부처님의 깨달음 보다는 떨어지지만 아라한의 깨달음보다는 뛰어나다.


부처님은 많은 중생들을 교화하고 구제할 수 있다. 하지만 벽지불은 홀로 지내는 부처님들이어서 원칙적으로 법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을 구제할 수 없다. 아라한은 중생을 구제할 수 있긴 하지만 부처님처럼 많은 중생들을 구제하지는 못한다. 이 세 부류의 성자들이 바라밀을 완성하여 깨달음을 이루는데 걸리는 시간은 아주 차이가 많다.


부처님이 되기 위해서는 4, 8 또는 16 아승지겁과 10만겁 동안 열 가지 바라밀을 완성시켜야 한다. 하지만 벽지불의 경우에는 2 아승지겁과 10만 겁만이 필요하다. 성문 가운데 상수 제자는 1아승지겁과 10만 겁, 대제자의 경우에는 10만 겁이 필요하고, 일반적인 제자의 경우에는 한 생이나 백 생 또는 천 생 또는 더 긴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벽지불은 남에게 법을 전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이 얻은 깨달음은 귀먹고 말 못하는 사람이 꾼 꿈에 비유된다. 그리고 벽지불의 지혜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보살보다도 낮은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J.iv.341) 또 재가자의 상태에서 벽지불이 될 수는 있지만 그 즉시 재가자의 표식들이 사라진다고 한다. 또한 부처님과는 달리 그들이 출현하는 숫자에는 제한이 없다. 이들의 거주처는 히말라야에 있는 간다마다나(Gandhamādana)산이다.

  


70. 마하시와(Mahāsiva) 장로는 고대의 유명한 주석가로 그가 쓴 주석은 많은 주석서와 문헌에 인용되고 있다.



71. 이렇듯 아비담마에 따르면 정신과 물질 현상은 일어남(生 upāda), 머뭄(住 ṭhiti), 무너짐(壞 bhaṅga)의 세 과정을 거치며 변화하는 흐름 속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정신의 변화는  물질보다 16배 빠르다고 한다. 이렇게 마음은 생겨서 대상을 인지하는 본래 기능을 다하고 소멸하는데 그 기간을 심찰나(citta-khaa)라 부른다.



72. 조사하는 마음(santīraṇa-citta)는‘함께 건넌다’라는 뜻에서 ‘대상을 조사함’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아비담마의 전문술어이다. 영어로는 investigation이라 한다. 대상을 받아들여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조사하는 마음의 역할이다.



73. 자와나(javana)는  '재빠름, 신속함'의 뜻이다. 그래서 중국에서 속행(速行)으로 직역되었고 영역은 impulsion다. 인식과정에서 아주 중요하게 쓰이는 아비담마의 전문술어로 일단 대상이 무엇이라고 결정되고 나면 일어나는 일련의 인식과정을 모두 자와나라고 부르고 있다. 일반적인 인식과정에서 자와나는 모두 7번 같은 대상을 가지고 일어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결정된 대상에 마치 벼락치듯 재빠르게 그것을 이해하는 작용을 한다. 이 자와나의 단계야말로 의도적인 행위가 개입되는 곳으로서 선하고 불선한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들이다. 물론 아라한의 경우 이 자와나는 선, 불선이 아니고 단지 작용만하는 마음이다. 아라한은 모든 번뇌가 다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업을 짓지 않는다. 자와나는 인식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술어이고 개념이다. 아라한의 경우를 제외하고서 모든 존재들에게 속행은 선한 마음으로 일어나거나 불선한 마음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즉 업을 초래하는 마음이요 업을 짓는 마음이라는 말이다. 인식과정과 인식을 벗어난 과정에서 일어나는 마음 가운데서 이 자와나 이외에는 선(善)과 불선(不善)의 개념이 개입되는 마음은 없다. 그러므로 수행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자와나 과정에서 지혜롭게 주의 기울임(如理作意 yoniso-manasikāra)의 마음부수를 극대화하여 이 마음이 불선(不善)이 되지 않고 선(善)이 되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74. 등록하는 마음(tadārammaṇa-citta)에서 등록으로 번역되는 따다라마나(tadārammaṇa)는‘그것을 대상으로 가진 마음’이란 뜻이다. 즉 이 등록에 바로 앞에 일어난 자와나가 가졌던 그 대상을 자기의 대상으로 삼아 일어나는 마음이란 뜻이다. 영어로는 registration이라고 한다. 이것은 두 심찰나 동안 일어난다고 하는데 오문으로 큰 대상이 들어 왔을 때나 마음에 선명한 대상이 나타났을 때만 일어나는 마음의 역할이고 그 이외의 인식과정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자와나가 일곱 번 일어난 뒤 바로 사라져 버리고 바왕가가 일어나기에는 대상이 너무 크거나 분명할 경우에 나타나는 마음의 역할이다. 즉 자와나가 너무 강해서 바로 바왕가의 마음이 일어나지 못하고 두 번 단기 그 자와나의 대상을 대상으로 가져서 일어나는 일련의 마음이다. 이 등록이 끝나면 바왕가로 들어가고 그 바왕가는 다른 대상이 나타나기 전까지 계속된다.




20. 식(識)에서 정신-물질[名色]이 일어난다.



75. 주의 기울임으로 번역한 마나시까라(manasikāra)는 ‘마음에 만든다. 마음에 둔다. 마음에 새긴다.’는 뜻이다.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그 초보적인 뜻으로 대상에 대해 마음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다. 이것에 의해서 대상은 마음에 나타난다. 중국에서는 작의(作意)로 번역했고 영어로는 attention. mental advertence등이라 한다.



76. 깔라빠(kalāpa)는 무리, 더미, 무더기, 적집이란 뜻으로 아비담마에서 물질의 무리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마음이 항상 마음부수들과 함께 일어나고 함께 멸하는 것처럼 모든 물질도  단독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항상 무리지어서 일어나고 멸하는데 이런 무리를 깔라빠라고 한다. 이 깔라빠는 (1) 땅(地 pathavī) (2) 물(水 āpo) (3) 불(火 tejo) (4) 바람(風 vāyo) (5) 물질(色 rūpa) (6) 냄새(香 gandha) (7) 맛(味 rasa) (8) 영양분(ojā)의 8가지가 있다.


이 8가지는 물질의 무리를 이루는 최소의 구성요소로 더 이상 분리할 수 없는 것이란 뜻인 아위닙보가(avinibbhoga)라고 한다. 그래서 8가지로만 구성된 깔라빠를 ‘순수한 팔원소(suddhaṭṭhaka)’라고 표현하고 있다. 모든 깔라빠는 이들 여덟 가지를 기본으로 하고 그 깔라빠의 특성에 따라 다른 물질을 더 가지고 있다. 그래서 여기에다 다른 하나가 더 붙으면 구원소(navaka)가 되고 다시 하나가 더 붙으면 십원소(dasaka)가 되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의 9원소는 8가지 아위닙보가에다 생명기능(命根 jīvita-indriya)이라는 물질이 하나 더 붙어서 9원소가 되는 것이다.


이 아위닙보가는 물질의 무리인 깔라빠를 이해하는 가장 기초가 되는 개념이므로 반드시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위빠사나에서 깔라빠가 중요한 이유는「청정도론」(18장 후반부와 19장 전반부?)에 깔라빠를 명상하는 것이 위빠사나의 시작이라고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최소단위로서의 법으로 존재를 살피지 않고 개념으로서만 존재를 파악한다. 그러므로 법의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는 것이라 정의하는 위빠사나는 반드시 이러한 개념적 존재를 분석해서 법으로 환원해서 살펴야한다. 그리고 물질은 정신적 현상(수-상-행-식)보다 거칠고 그래서 살피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그러다 보니 위빠사나의 시작도 바로 이러한 물질의 깔라빠를 살피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깔라빠를 관찰하거나 명상한다함은 이러한 물질을 개념으로 파악하는 우리의 잘못된 습관을 떨쳐내고 땅[地], 물[水], 불[火], 바람[風], 물질[色], 냄새[香], 맛[味], 영양분등의 적집으로 본다는 것이다.


위빠사나 중에도 우리는 이러한 무수한 개념으로 무의식중에 자신을 살펴보고 있다. 이러한 개념을 버리고 법의 조합으로 보기 시작하는 것이 깔라빠를 명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몸을 깔라빠로 보지 못하면 그것은 아무리 깊은 수행일지라도 개념을 대상으로 하는 사마타거나 아니면 다른 엉뚱한 현상에 놀아나면서 그것을 수행이라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깔라빠를 명상하는 것이 위빠사나의 시작이라고 단정 짓고 있다.



77. 감성(感性)으로 번역되는 빠사다(pasāda)는 경장에서는 깨끗한 믿음(淨信)을 뜻하지만 아비담마에서는 이 깨끗함의 의미를 육근(六根)이 지니는 순수한 감각 작용을 나타내는 전문술어로 쓰인다. 그래서 빠사다(pasāda)는 각각의 감각기관에 위치하여 대상을 감지하는 특정한 기능을 가진 물질이다. 그러므로 눈의 감성(cakkhu-pasāda)은 형상이나 색깔을 감지하는 기능을 가진 물질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감성을 지탱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 바로 감각기관(根 indriya)이다.



78. 소레야(Soreyya)는 부처님 당시 한 장자의 아들이었다. 어느 때 한 친구와 함께 시종들을 데리고 강가에 멱을 감으러 성밖을 나올때 마하깟쨔야나(Mahā-kaccāyana)존자가 탁발을 위해 성으로 들어가기 전 가사를 고쳐 입는 것을 보았다. 소레야는 존자의 몸을 바라보고는 존자가 자신의 아내가 되거나 자기 아내의 몸 빛깔이 존자의 몸 빛깔처럼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일으켰다. 그 순간 소레야는 여자로 변했고 소레야는 일행들을 피해 마침 주위를 지나던 한 대상(隊商)과 함께 딱까실라(Takkasilā)로 갔다. 딱까실라에 도착하여 그 도시의 한 재정관의 아내가 되었고 두 명의 아들도 낳았다. 그런데 남자로 있을 때 소레야는 이미 두 명의 아들 두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서, 소레야는 옛 친구가 마차를 몰고 딱까실라를 지나는 것을 보았다. 소레야는 여자노예를 보내서 옛 친구를 자기집에 초대하고 접대하였다. 친구는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소레야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소레야는 마하깟쨔야나 존자를 식사공양에 초청하고 존자의 발앞에 무릅을 꿇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었다. 존자가 소레야를 용서해주자 다시 남자로 돌아왔다. 소레야는 존자 밑에서 출가하여 함께 사왓티(Sāvatthi)로 왔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몰려와 갖가지 질문으로 소레야를 피곤하게 했다. 그래서 소레야는 혼자 조용한 곳으로 가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소레야가 아라한이 되기 전에 사람들은 어느 쪽의 아이들을 더 사랑하는지를  물었는데, 그때마다 소레야는“여자였을 때 낳은 아이들을 더 사랑합니다.”라고 답하곤 했었다. 하지만 아라한과를 얻고 난 뒤에는 이렇게 말했다.“나는 이제 어느 쪽 아이들에도 애정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DhA.i.324ff)



79. 마하깟쨔야나(Mahā-kaccāyana) 존자는 웃제니(Ujjeni)의 짠다빳조따(Caṇḍappajjota) 왕의 궁중제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바라문 가문 출신이다. 깟짜나는 그의 족성이다. 그는 베다에 능통했으며 부친이 죽은 뒤 대를 이어 궁중제관이 되었다. 그후 짠다빳조따 왕의 명으로 일곱 명의 친구들과 함께 부처님을 웃제니로 초대하기 위해서 부처님께 갔다가 설법을 듣고 무애해(無碍解)를 갖춘 아라한이 되어 출가하였다. 북방불교에서는 논의제일로 불린다.



80. 주석서에 따르면 어머니의 모태에서 태아는 다섯 단계를 거쳐 성장하고 태어난다고 한다. 이를 태내오위(胎內五位)라고 하는데 다음과 같다.


① 깔랄라(kalala): 임신 직후부터 1주까지의 태아로, 세 가닥의 양모로 이루어진 실타래의 끝에 놓인 기름방울 크기이다.


② 압부다(arbuda): 임신 2~3주의 태아로 고기 씻은 물의 색깔을 띠고 있다. 


③ 뻬시(pesi): 임신 3~4주의 태아로 용해된 주석모양이며 연분홍색깔을 띠고 있다.


④ 가나(ghana): 임신 후 4~5주의 태아로 달rif 모양을 하고 있다.


⑤ 빠사카(pasākhā): 임신 후 6주 이상의 태아로 두 팔, 두 다리, 머리의 기초가 되는 다섯 개의 돌기가 생겨난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머리카락, 몸 털, 손발톱은 42주가 지나야 생겨난다.



81. 네 가지 요소라 번역한 마하부따(mahā-bhūta)는 ‘된 것, 생긴 것, 존재하는 것’이라는 기본 뜻에서 ‘존재하는 것 = 진실, 사실’의 의미로 쓰인다. 그래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지(地)· 수(水) · 화(火)· 풍(風)을 의미하게 되어 중국에서 사대(四大)로 번역되었다. 기본이 되는 요소라는 측면에서 이 마하부따는 다뚜(dhātu)와 함께 쓰이기도 한다. 다시 말해 그냥 사대(四大)라고 할때에는 mahābhūta로 주로 나타나지만 구체적으로 말할 때는 catuso-dhātu라는 말로도 자주 나타난다. 특히 각각의 요소를 나타낼 때는 대부분 다뚜(dhātu)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지대(地大)는 paṭhavi-bhūta라는 말 대신 paṭhavi-dhātu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이 dhātu라는 말은 √dhā(to put, to hold)애서 파생된 여성명사인데 주석서에‘자기의 본성을 간직하고 있다’고 해서 요소라 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계(界)라고 한역되었다. 네 가지 요소는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인데 이들은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이들이 여러 형태로 조합되어 작은 것은 미진에서부터 큰 것으로는 큰 산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질을 구성한다. 이들 요소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1) 땅의 요소(地大 paṭhavi-dhātu): 거칢, 조악함, 반드러움, 부드러움, 딱딱함, 견고함을 특징으로 하며 몸의 감촉으로 느낄수 있다.

(2) 물의 요소(水大 āpo-dhātu): 점착성, 유동성, 촉촉함, 응집력을 특징으로 하며 몸의 감촉으로써는 느끼지 못하고 마노의 문[意門]으로만 느낄 수 있다.

(3) 불의 요소(火大 tejo-dhātu): 뜨거움, 차가움, 따스함을 특징으로 하며 유기체를 성숙하고 숙성하게 한다. 흰 머리카락, 이가 빠짐, 주름살, 기타 노화의 징후가 생기는 것은 바로 몸의 열 때문이다. 이 열이 많으면 성숙의 과정은 더욱 더 빨라진다. 역시 몸의 감촉으로 느낄수 있다.

(4) 바람의 요소(風大 vāyo-dhātu): 팽창, 압박, 움직임을 특징으로 하며 역시 몸의 감촉으로 느낄수 있다.



82. 간답바(gandhabbha)는  중국에서 건달바(乾達婆)로 음역되었고 할 일 없이 빈둥빈둥 노니는 자를 뜻하는 건달이라는 우리말도 여기서 나왔다. 일반적으로 빨리 삼장에서 간답바는 세  가지 문맥에서 나타난다.


(1) 사대왕천(四大王天 Cātummahārājika)에 있는 신들이다. 이들은 가장 하위계급의 천신들로 천상의 음악가이다. 이들은 사대왕천의 동쪽에 거주하며 대국천왕(待國天王 Dhataraṭṭha)의 통치를 받는다고 한다. 


(2) 향기(gandha)나는 곳에 사는 신들을 뜻한다.『상응부』(S.iii.250f)에 따르면 간답바의 신들은 나무의 뿌리나 껍질이나 수액이나 꽃의 향기에 거주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3) 잉태될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 즉 재생연결식(paisandhi-vinñāṇa)이다. 주석서와 복주서에서는 문법적으로 이 간답바를 간땁바(gantabba)로 설명한다. 의미는 ‘가야만 하는 (것, 자)’가 된다. 중생들은 업에 의해서 죽은 다음에 반드시 재생을 해야 하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야만 하는 (자)’즉‘잉태될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라는 뜻이 된다. 그래서 주석서에서는 이 간답바를 재생연결식(paisandhi-vinñāṇa)이라고 설명한다.



83.『중부』「대애진경(Mahātaṇhāsankhaya Sutta)」(M38)에 따르면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어야하고 그것도 어머니가 수태하기에 적절한 월경기여야한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어머니와 아버지가 합쳐지고 어머니가 월경기라 하더라도 간답바(gandhabba)가 나타나지 않으면 수태는 이루어 지지 않는다고 한다.



84. 아비담마에서는 마음의 수명을 하나의 마음순간, 즉 하나의 심찰나(心刹那 eka-citta-kkhaṇa)라고 부른다. 이것은 너무나 순간적인 기간이라서 주석서들은 번개가 번쩍이고 눈 한번 깜빡이는 순간에도 수많은 심찰나가 흘러갈 수 있다고 설하고 있다. 이 심찰나는 다시 일어남(生 uppāda)과 머묾(住 ṭhiti)과 무너짐(壞 bhaṅaga)의 세 순간으로 이루어진다.



85. 음식에서 생긴 물질(āhāra-rūpa)이란 내부의 영양소는 외부에서 공급을 받아 유지가 되는데 음식을 삼키는 순간부터 머무는 순간에 생기는 물질을 말한다. 음식에서 생긴 깔라빠(물질의 무리) 가운데 있는 영양소는 그 다음의 순수한 팔 원소(suddha-ṭṭhamaka)를 생기게 한다. 이렇게 팔 원소는 열 번이나 열두 번까지 생긴다. 임신한 어머니가 섭취한 음식은 태아의 몸에 퍼져 들어가서 태아의 물질을 생기게 한다. 몸에 발라진 음식도 물질을 생기게 한다고 한다. 다른 세 원인들에 의해서 생긴 몸속의 깔라빠에 있는 영양소도 역시 잇달아서 여러 번 순수한 팔 원소를 생기게 한다. 하루에 섭취한 음식은 칠 일 동안 몸을 지탱할 수 있다고 한다.




21. 화생(化生)



86. 사대왕천(四大王天 Cātu-mahārājika)은 원래 고대 인도에서 세계의 수호신(Loka-pāla)이었던 것을 불교가 수용한 것이다.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앙에 우뚝 솟은 수미산(須彌山 Sineru)의 정상에는 삼심삼천(三十三天 Tāvatiṁs)이라 불리는 신들의 세계가 있고, 이 수미산의 중턱을 둘러싸고 사방에 사천왕의 세계가 있다. 동쪽의 천왕은 지국천(持國天 Dhataraṭṭha)인데 천상의 음악가인 간답바(Gandabba)들을 통치하고, 남쪽의 천왕은 증장천(增長天 Virūḷhaka)인데 숲이나 산이나 숨겨진 보물을 관리하는 꿈반다(Kumbhaṇḍa)들을 통치하고 서쪽의 천왕인 광목천(廣目天 Virūpakkha)은 용들을 통치하며, 북쪽의 천왕인 비사문천(毘沙門天 Vessavaṇa)은 야차(Yakkha)들을 통치한다고 한다. 이들은 위로는 제석(Sakka)을 섬기고 아래로는 팔부중(八部衆)을 지배하여 불법에 귀의한 중생을 보호한다고 한다.


  

87. 무상유정(無想有情)으로 번역되는 아산냐삿따(asañña-satta)는 인식이 없는 중생이란 뜻이다. 이들은 마음(citta)이 아예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인식과정도 없다. 전생에 인식에 대해 극도로 혐오하여 인식이 없는 경지를 얻고자 선정을 닦았기 때문에 무상유정천(無想有情天)에 태어나며 인식이 생겨나는 순간 그 무리로부터 죽게 된다고 한다.




23. 인식과정



88. 인식과정으로 옮기는 위띠찟따(vīthi-citta)는  마음이 진행되어 가는 진로나 과정을 뜻하는 용어이며, vīthi 단독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영어로는 progress of conciousness, 또는 congnitive process라고 한다.


마음은 감각의 오문(五門)이나 마노의 문[意門]에서 대상을 인식하면서 일어난다. 이들은 한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분명하게 한 마음에서 다음 마음으로 규칙적이고 통일된 순서에 의해서 일어난다. 이런 순서를 아비담마에서는 마음의 법칙(citta-niyama)이라고 부른다.

인식과정이 진행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필요불가결한 조건이 반드시 현전해 있어야 한다.


(1) 눈의 문에서 일어나는 인식과정을 위해서는

   (가) 눈의 감성(cakkhu-pasāda)

   (나) 형상인 대상(rūpa-ārammaṇa)

   (다) 빛(āloka)

   (라) 주의 기울임(manasikāra)이 있어야 한다.


(2) 귀의 문에서 일어나는 인식과정을 위해서는

   (가) 귀의 감성(sota-pasāda)

   (나) 소리인 대상(sadda-ārammaṇa)

   (다) 허공(ākāsa)

   (라) 주의 기울임(manasikāra)이 있어야 한다.


(3) 코의 문에서 일어나는 인식과정을 위해서는

   (가) 코의 감성(ghāna-pasāda)

   (나) 냄새인 대상(gandha-ārammaṇa)

   (다) 바람의 요소(vayo-dhātu)


(4) 혀의 문에서 일어나는 인식과정을 위해서는

   (가) 혀의 감성(jivhā-pasāda)

   (나) 맛인 대상(rasa-ārammaṇa)

   (다) 물의 요소(āpo-dhātu)

   (라) 주의 기울임(manasikāra)이 있어야 한다.


(6) 마노의 문에서 일어나는 인식과정을 위해서는

   (가) 심장토대(hadaya-vatthu)

   (나) 법인 대상(dhamma-ārammaṇa)

   (다) 바왕가(bhavaṇga)가 있어야 한다.


이런 여섯 가지의 인식과정은 (1) 다섯 가지 감각의 문에서 일어나는 오문인식과정(pañcadvāra-vīthi)과 (2) 마노의 문에서 일어나는 의문인식과정(mano-dvāra-vīthi)의 두 가지로 나누어 진다. 오문인식과정을 다시 잡문인식과정(missaka-dvāra-vīthi)라고도 하는데 오문과 의문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순전히 마노의 문[意門]에서만 일어나는 인식과정을 순의문인식과정(suddha-mano-dvāra-vīthi)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육체적인 감각의 문을 도구로 하지 않고 순전히 마노의 문[意門]인 바왕가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열거하고 있는 이런 일련의 마음의 흐름을 아비담마에서는 인식과정(vīthi-citta)이라고 하는데 다시 한 번 요점을 정리해본다.


(1) 인식과정은 크게 외부의 대상을 인식하는 오문인식과정과 마음을 대상으로 인식하는 의문인식과정으로 나누어진다.


(2) 물질이 일어나서 머물고 멸하는 시간과 마음이 일어나서 머물고 멸하는 시간은 다르다. 한번 물질이 일어났다가 멸하는 순간에 마음은 17번 일어났다가 멸한다.


(3) 그러므로 오문인식과정에서 예를 들면 눈에서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에서는‘같은 대상’을 두고 17번의 마음이 생멸한다. 이것도 대상에 따라서 ① 매우 큰 것 ② 큰 것 ③ 작은 것 ④ 매우 작은 것의 크게 4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지며, 이것은 다시 여러 등급으로 나누어져 총 15가지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여기서 크고 작다는 말은 물질적인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충격을 주는 힘의 강약을 나타낸다.


(4) 매우 큰 대상일 경우에 17번 일어나는 마음은 3가지 바왕가(지나간 바왕가, 바왕가의 동요, 바왕가의 끊어짐), 오문전향, 받아들임, 조사, 결정, 7가지 자와나, 2가지 등록이다. 이 가운데서 15가지 인식의 등급으로 나누어지는 핵심은 ‘지나간 바왕가(atīta-bhavaṅga)’인데 이것은 일단 대상이 나타났지만 그 대상의 충격이 미약하여서 마음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쳐 버리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면 충격이 매우 작은 대상들은 바왕가의 동요만 일으키고 인식과정이 끝나 버린다. 그 가운데서도 제일 마지막 15번째 경우에는 대상이 문으로 들어왔는데도 15번째의 마음 순간까지 그것을 알지 못하고 흘러가 버려 겨우 두 번만 바왕가의 동요가 일어나고서 인식과정이 끝나 버리는 경우이다.


(5) 의문인식과정은 오문인식과정보다 단순한데 그 이유는 오문전향, 받아들임, 조사, 결정의 과정이 없고 의문전향 다음에 바로 자와나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마음의 대상은 이런 과정이 없이 즉각적으로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다. 이것은 마노의 대상에 따라서 선명한 것과 희미한 것의 둘로 나누어진다.


(6) 각각의 인식과정은 반드시 하나 이상의 바왕가를 거쳐서 그 다음의 인식과정으로 넘어간다.


(7) 인식과정에 개입된 마음은 모두 7가지이다. 즉 오문전향의 마음, 식(안식∙이식∙비식∙설식중의 하나), 받아들이는 마음, 조사하는 마음, 결정하는 마음, 자와나, 등록하는 마음이다. 여기서 자와나는 7번 일어나고 등록은 2번 일어나므로 인식과정에서 모두 14가지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지나간 바왕가와 바왕가의 동요와 바왕가의 끊어짐은 바왕가의 한 형태이기 때문에 육문으로 들어온 감각의 대상을 아직 자기의 대상으로 삼지 못한다.)

 

이런 인식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본문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본서의 도처에 이런 인식과정과 관련된 술어나 단편적인 인식과정이 언급되고 있으므로 반드시 인식과정에 대한 기본 개념을 파악하고 있어야 본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음을 밝힌다. 더 자세한 것은 본문 뒤편의 도표들을 참고하기 바람.



89. 아비담마에 따르면 정신과 물질(rūpa)은 일어남(生 uppāda), 머묾(住 ṭhiti), 무너짐(壞 bhaṅga)의 세 과정을 거친다. 이 물질의 세 과정에 요구되는 시간은 17개의 마음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같다. 하지만 물질은 마음보다 16배 빠르고 물질이 일어나는 순간에는 감각기능들이 파악하기에는 너무나 미약하고 빨라서 그 순간에는 잠재의식이 그냥 하나 지나가게 된다. 이것을 지나간 바왕가(atīta-bhavaga)라고 부르며 이것을 인식과정에 포함시키면 17가지 마음이 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한 물질이 머무는 순간에 마음은 16번 일어나고 멸한다.’는 전통적인 1:16의 물질과 마음의 관계는 물질과 마음이 일어나고 머물고 소멸하는 전체과정에서는 1:17로 고정되는 것이다.



90. 전향(轉向)으로 옮긴 āvajjana는 ‘돌아 옴’‘돌아서 향함‘의 일차적인 뜻을 가졌고 영어로는 adverting으로 정착되어 있다. 전향이란 마음이 그 대상이 되는 다섯 감각의 문[五門]이나 마노의 문[意門]으로 향하는 역할을 말한다. 즉 전향은 인식 과정(vīthi)에서 첫 번째 단계로 대상과 관련하여 조사하는 마음 상태로 일어난다. 전향에는 눈[眼]-귀[耳]-코[鼻]-혀[舌]-몸[身]의 다섯 문으로 향하는 (1) 오문전향(五門轉向 pañca-dvāra-āvajjana)과 마노의 문[意門]으로 향하는 (2) 의문전향(意門轉向 mano-dvāra-āvajjana)의 두 가지가 있다.



91.. 아비담마에서는 사람의 내면에 벌어지고 있는 모든 심리 현상들을 선(善), 불선(不善), 무기(無記)로 나누고 있다.


(1) 선(善)으로 옮기는 꾸살라(kusala)의 원 의미는 ‘유익한, 숙련된, 능숙한, 이로운’등으로 기본적으로 도덕적으로 선한 것을 뜻하고 해탈과 열반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앗타살리니(Atthasālini)」에 따르면 꾸살라는 꾸사풀을 베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 풀이 아주 억세고 날카로워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잘못 꺾으면 손을 베고 만다. 그래서 이 풀을 베려면 아주 마음을 기울여서 조심해서 꺽어야 한다. 이렇게 어떤 것이 선하고 유익하기 위해서는 지혜롭게 주의 기울임(如理作意 yoniso-manasikāra)이 필요하다는 뜻에서 이 말이 유래되었다. 이렇게 kusala에는 능숙함이란 의미가 항상 담겨 있기 때문에 서양에서는 wholesome외에 skillful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2) 불선(不善)으로 옮기는 아꾸살라(akusala)는 모든 악의 뿌리(mūla)인 탐욕(lobha)이나, 성냄(dosa)이나, 어리석음(moha)과 결부되어 생기는 업(kamma), 의도(cetanā), 마음(citta), 마음부수(cetasika)이다. 도덕적으로 불선하고 해탈과 열반에 해로운 것이다. 영어로는 unwholesome, unskillfull이라고 한다.


(3) 무기(無記)로 옮기는 아봐까따(avyākata)는‘설명되지 않은, 답하지 못하는, 결정하지 못하는’의미다. 즉 선(善)과 불선(不善)으로 판단할 수 없는 심리현상을 뜻한다. 영어로는 indeterminate, amoral, kammically neutral이라고 한다.



92. 결정하는 마음(voṭṭhapana-citta)에서 결정으로 옮긴 옷타빠나(voṭṭhapana)는 ‘굳게 세운다’는 뜻에서 ‘확립, 확정’의 뜻이 있다. 이는 대상을 조사해서 결정하는 마음의 작용을 나타내는 전문술어이다. 영어로는 determination이라고 한다.




24. 의문(意門)인식과정



93. 오문 인식과정은 육체적인 감각의 문과 마노의 문[意門]이라는 두 가지 문이 실재로 개입된다. 물론 이때의 마노의 문[意門]은 잠재의식으로서 인식과정이 이 바왕가로부터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문에서의 인식과정이라 불리는 이 과정은 감각의 문이 전혀 개입되지 않고 오직 마노의 문[意門]에서만 일어난다. 그래서 이런 인식과정을 분명히 표현하기 위해 이 의문에서의 인식과정을 순의문인식과정(suddha-mano-dvāra-vīthi)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런 의문인식과정에는 (1) 제한된 자와나를 가진 욕계의 인식과정(제한된 자와나과정) (2) 색계, 무색계의 고귀한 마음(maha-ggata)과 출세간의 증득과 관계되는 본삼매에서의 인식과정(본삼매 자와나과정)의 둘로 나누어진다.




25. 오문전향에 이어지는 의문(意門)인식과정



94. 마노[意]는 빨리 mano를 음역한 것인데 중국에서는 의(意)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이해하는 意와 mano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 마노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감각장소(處 āyatana)와 감각기능(根 indriya)과 문(門 dvāra)이다. 중생은 매 찰나 대상과의 연기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데, 이 가운데 물질적인 대상과의 관계는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을 통해서 하게 된다. 그러므로 눈, 귀, 코, 혀, 몸은 각각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이라는 대상을 만나는 문이 된다. 그리고 이처럼 서로 대(對)가 되어 만남이 일어나는 곳을 감각장소[處]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장소는 눈에 보이는 기능이 있고 귀에 듣는 기능이 있듯이 각각에 고유한 기능 혹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감각기능[根]이라고 한다. 그래서 설법하는 상황에 따라서, 예를 들면 눈의 문[眼門]이라고도 하고 눈의 감각장소[眼處]라고도 하고, 눈의 감각기능[眼根]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정신적인 영역을 관장하는 문/감각장소/감각기능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것을 마노(意 mano)라고 명명한다. 그래서 설법하는 문맥에 따라 마노의 문[意門]이라고도 하고, 마노의 감각장소[意處]라고도 하고, 마노의 감각기능[意根]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마노의 대상이 되는 정신적인 영역을 법(法 dhamma)이라고 부른다. 아비담마에서는 마노의 대상인 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데 미세한 물질, 마음부수, 열반을 들고 있다.



95. 구경법(究竟3法)이라 번역되는 빠라맛따담마(paramattha-dhamma)에서 paramattha는 parama(최고의, 최상의) + attha(이치, 뜻)로 분석된다. 그래서‘최고의 이치’라는 뜻으로 중국에서 승의(勝義)라고 직역했고 서양에서는‘궁극적 실재’라는 의미인 ultimate reality로 번역한다. 구경법(究竟法)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불교에서 말하는 법(法 dhamma)의 의미를 살펴봐야 하는데 빨리 성전에서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나타난다.


(1) 부처님의 가르침(Buddha-dhamma)으로서의 법: 불--승 삼보(三寶)에 포함되는 법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서의 법이다. 서양에서는 이를 고유명사 취급하여서 Dhamma로 표기한다.


(2) 존재일반(sabbe-dhamma)으로서의 법: 서양에서는 이를 일반명사 취급하여서 dhamma로 표기한다. 이 법은 정신과 물질의 모든 현상을 말하는데 구경법(究竟法 paramattha-dhamma)과 개념법(施設法 paññātti-dhamma)으로 나뉘며 일반적으로 법은 이 구경법을 뜻한다.


➀ 구경법(究竟法 paramattha-dhamma): 일반적으로 법은 이 구경법을 뜻한다. 궁극적인 실재로 오온(五蘊), 12처(十二處), 18계(十八界),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12연기(十二緣起), 선법(善法), 불선법(不善法)등이다. 그리고 이 구경법으로서의 법을‘고유성질을 가진 것[任持自性]’으로 정의한다. 여기서 고유성질(sabhāva)이란 특정 법이 가지는 자신에게만 있는 고유한 성질을 말한다. 예를 들면 탐욕이라는 심리현상을 탐욕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대상을 탐하고 거머쥐는 탐욕만의 고유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성냄이라는 심리현상을 성냄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상에 대해서 분노하고 적개하고 밀쳐내는 등의 성냄만의 고유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탐욕이라는 법과 성냄이라는 법은 그 성질이 판이하게 다르다. 그것은 탐욕이 가지는 거머쥐는 성질과 성냄이 가지는 밀쳐내는 성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탐욕과 성냄이 다른 것은 그 고유성질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아비담마는 설명한다.


➁ 개념법(施設法 paññātti-dhamma): 그냥 개념(paññātti)이라고도 부르는데‘명칭, 개념, 서술, 술어, 용어’등의 의미이다. 중국에서는 가설(假說), 방편설(方便設)이란 의미의 시설(施設)로 번역되었다. 아비담마에서는 두 가지 빤냣띠(paññātti)를 말하는데 세간에서 통용되는 모든 언어인 ㉠ 삿다 빤냣띠(sadda-panññatti)와 그것이 지칭하는 구체적 대상인 ㉡ 앗타 빤냣띠(attha-panññatti)가 있다.  




26. 식(識)을 조건으로 정신-물질[名色]이 일어난다



96.「무애해도(無碍解道 Patisambhidamagga)」는 빨리 『경장』소부(小部)에 들어있는 논서적인 성격이 매우 짙은 경으로 상좌부 교학체계와 수행체계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경이다.「청정도론」의 주요 설명 특히 혜품, 그 가운데서도 위빠사나를 설명하고 있는 18장부터 22장까지는 대부분이 무애해도를 인용하고 있을 정도이다.



97. 아비담마에서는 마음과 물질에 관계된 법의 상호의존관계를 24가지 조건(paccaya)으로 설명한다. 이 24가지 조건은 아비담마에서도 가장 어려운 분야에 속하는데 이 조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다음의 세 가지 개념부터 잘 정리해야 한다.


(1) 조건 짓는 법(paccaya-dhamma): 다른 법의 조건으로 작용하는 법을 말한다. 즉 한 법이 다른 법을 일어나게 하거나 의지하게 하거나 유지하게 하면 그 법은 조건 짓는 법이 된다.

(2) 조건 따라 생기는 법(paccaya-upanna-dhamma): 조건 짓는 법에 의해 조건 지어져서 생긴 법을 말한다. 즉 조건 짓는 법이 제공해주는 도움을 받아서 일어나고 유지되는 법을 말한다.

(3) 조건 짓는 힘(paccaya-satti): 조건 짓는 법이 조건에 따라 생긴 법에 대해서 조건으로 작용하는 어떤 특별한 방법을 말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24가지 조건(paccaya)이 있다. 각각의 조건에 대한 더 상세한 설명은「청정도론」(Vis.XVⅡ)을 참고하기 바란다.


① 원인의 조건(因緣 hetu-paccaya)

➁ 대상의 조건(所緣緣 ārammaṇa-paccaya)

➂ 지배의 조건(增上緣 adhipati-paccaya)

➃ 틈 없이 뒤따르는 조건(無間緣 anantara-paccaya)

➄ 더욱 틈 없이 뒤따르는 조건(等無間緣 samanantara-paccaya) 

➅ 함께 생긴 조건(俱生緣 sahajāta-paccaya)

➆ 서로 지탱하는 조건(相互緣 aññamañña-paccaya)          

➇ 의지하는 조건(依止緣 nissaya-paccaya)

➈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親依止緣 upanissāya-paccaya)

➉ 먼저 생긴 조건(前生緣 purejāta-paccaya)

⑪ 뒤에 생긴 조건(後生緣 pacchājāta-paccaya)            

⑫ 반복하는 조건(數數修習緣 āsevana-paccaya)

⑬ 업의 조건(業緣 kamma-paccaya)                      

⑭ 과보의 조건(異熟緣 vipāka-paccaya)

⑮ 음식의 조건(食緣 āhāra-paccaya)                    

⑯ 기능의 조건(根緣 indriya-paccaya)

⑰ 선의 조건(禪緣 jhāna-paccaya)                      

⑱ 도의 조건(道緣 magga-paccaya)

⑲ 서로 관련된 조건(相應緣 sampayutta-paccaya)           

⑳ 서로 관련되지 않은 조건(不相應緣 vippayutta-paccaya)

㉑ 존재하는 조건(有緣 atthi-paccaya)           

㉒ 존재하지 않는 조건(非有緣 natthi-paccaya)

㉓ 떠나가버린 조건(離去緣 vigata-paccaya)       

㉔ 떠나가버리지 않은 조건(不離去緣 avigata-paccaya)



98. 위빠시(Vipassi)는 과거 일곱 부처님 가운데 91겁 전에 출현한 맨 첫째 부처님이다. 주석서(DA.ii.454)에 따르면 위빠시(Vipassi)라는 이름은 (1) 하늘 눈[天眼]으로 낮이든 밤이든 1유순 안에 있는 것을 두루 보았고 (2) 태어나면서부터 삼심삼천의 신들처럼 눈을 깜빡이지 않고 보았고 (3) 왕자로 있을 때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바른 방법으로 면밀하게 정무를 보았다고 해서 그렇게 불렸다. 그리고 과거 일곱 부처님은 ➀ 위빳시 부처님(毘婆尸佛 Vipassi Buddha) ➁ 시키 부처님(尸棄佛 Sikhi Buddha) ➂ 웻사부 부처님(毘舍浮佛 Vessabhu Buddha) ④ 까꾸산다 부처님(拘留孫佛 Kakusandha Buddha) ⑤ 코나가마나 부처님(拘那含牟尼佛 Konagamana Buddha) ⑥ 까사빠 부처님(迦葉佛 Kassapa Buddha) ⑦ 고따마 부처님(瞿曇佛 Gotama Buddha)이다. 이 중에서 행운의 겁(賢劫 bhadda-kappa)에 출현한 부처님은 ④ 까꾸산다 부처님 ⑤ 코나가마나 부처님 ⑥ 까사빠 부처님 ⑦ 고따마 부처님 등 모두 네 분이고, 행운의 겁이 끝나기 전 미래에 오실 부처님인 미륵 부처님(Metteyya Buddha)을 합쳐서 다섯 부처님이라고 한다. 주석서(DA.ii.410)에 따르면 미륵 부처님을 포함하여 다섯 분의 부처님들께서 출현하시어 장엄하시는 멋진 겁이요 핵심이 되는 겁이라고 세존께서 칭찬하셨기 때문에 현재의 겁을 행운의 겁이라고 한다. 즉 부처님이 출현하시는 겁보다 출현하시지 않는 겁이 훨씬 더 많은데, 현재의 겁에는 무려 5분의 부처님이 출현하셨고 또 출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27. 짝꾸빨라 장로 이야기



99. 짝꾸빨라(Cakkhu-pāla)는 cakkhu(눈) + pāla (보호자, 지기)의 합성어로 눈을 보호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장로가 눈이 멀었음을 반의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100. 아소카(Asoka)왕은 인도 최초의 통일왕조인 마우리야 왕조의 제 3대 왕(B.C 268-232년경 재위)이다. 한역으로 아육왕(阿育王)이라고도 하는데 a(부정접두어) + soka(근심, 슬픔)으로 분해되듯이‘근심이 없는[無憂]’이란 뜻이다.


전설에 의하면 아소카왕은 젊었을 때에는 매우 난폭하여 많은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 불교에 귀의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담마 아소카(Dhamma-Asoka)라고 불렸다. 그러나 처음 2년 반 정도는 열성적이지 않았고 즉위 8년이 지났을 때 지금의 인도 오리사주에 위치했던 칼링가국을 무력으로 정벌했다. 그 때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포로로 이송되어 부모를 잃거나 자식과 헤어지고 부부가 이별하는 등의 비참한 상태를 보고 전쟁의 죄악을 통감했다. 그리하여 폭력에 의한 승리는 진정한 승리가 아니며 ‘법에 의한 승리(dhamma-vijaya)'야말로 진정한 승리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로부터 법의 순행(巡行)을 시작하여 수많은 불적을 순례하였다. 왕이 열심히 수행을 하고 법의 수립과 증장을 위해 노력하고 백성들에게 천궁(天宮)의 광경 등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천계와 교섭이 없었던 세상 사람들도 천계와 교섭을 갖게끔 되었다고 한다.


왕은 또한 왕이 깨달은 법을 선포하고 후세에 남기기 위해 돌비석에 새기도록 했는데 이것이 암벽을 깎아 법칙을 새긴 ‘마애법칙(磨崖法則)’과 거대한 사암의 기둥을 깎아 거기에 법칙을 새긴‘석주법칙(石柱法則)’이다. 석주법칙에는 석주의 주두(柱頭)에 동물의 조각이 얹혀 있는데, 특히 사르나트의 석주애는 주두에 거대한 네 마리의 사자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그 바로 밑에 법륜이 새겨져 있다. 매우 아름답고 훌륭한 조각으로 독립인도의 문장(紋章)이 되었다.


아소카왕이 모든 인간이 지켜야 할 법으로 생각한 것은 인간의 본질은 평등하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생명을 사랑하고 진실을 말하며 관용과 인내를 발휘하고 가난한 사람을 돕는 등의 윤리적인 성실성과 자비의 이념이었다. 아소카왕은 이를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불변의 진리라고 굳게 믿고, 이를 자손만대에까지 전하고자 하여 법칙으로 새긴 것이다.


아소카왕은 이렇게 불법에 바탕한 통치이념을 인도전역에 전파하였을 뿐만 아니라 스리랑카, 미얀마, 시리아, 이집트, 마케도니아 등의 주변국까지도 정법을 포교할 전법사를 파견하였다. 이로써  

불교가 인도를 벗어나 세계종교로 발돋움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아소카왕은 불교에 귀의했지만 다른 종교도 평등하게 취급했다. 또한 부처님의 사리를 공양하고 8만 4천의 보탑을 세우고 많은 사람을 이익케 했다고 한다. 게다가 룸비니, 녹야원, 붓다가야, 쿠시나가라를 비롯한 많은 불적을 순례하고 그곳에 탑을 세웠으며 산치에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의 탑도 세웠다.


왕은 불교교단이 법의 실천자임을 깊이 인식하고 승가를 아낌없이 원조했다. 그러나 승가에 막대한 보시를 하다 보니 국가경제가 압박을 받게 되었고 만년에는 태자나 대신들로부터 배신당하고 승가에 보시하는 것을 제지당하여, 결국에는 수중에는 아말라까 열매의 절반밖에 안 남았다고 한다.




28. 목갈리뿟따띳사의 평결



101. 외도(外道)로 번역된 아냐티띠야(aññatitthiya)는 ‘다른 쪽 여울에 있는 자’라는 뜻이며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 이외의 다른 길을 가는 자라는 의미로 쓰인다. 그래서 중국에서 외도(外道)로 옮겼고 영역은 heretic이다.


부처님 당시의 이런 외도 수행자로는 주로 유행승(遊行僧 paribbājaka)들이 언급되고 있으며 그 외 사문(沙門 samaṇa), 바라문(bramaṇa), 나체 수행자(acela)들이 언급되고 있다. 아울러 경전에서는 육사외도(六師外道)로 정리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들 가운데 바라문들은 주로 결혼한 자들이었으며 다른 자들은 대부분 독신 수행자로 이들은 모두 각 파에서 설정한 해탈을 추구하며 수행을 하던 자들이었다. 한편 주석서와 복주석서에는 bāhiraka(밖에 있는 사람)란 표현도 많이 사용하며 경에서도 드물게 나타나고 있다.



102. 빠딸리뿟따(Pāṭaliputta)는 지금의 인도 비하르 주의 주도인 빠뜨나(Patna)이다. 『장부』「대반열반경」(D16)에는 빠딸리 마을(Pāṭaligāma)을 확장하여 빠딸리뿟따가 건설되는 것이 언급되고 있으며 세존께서는 이 도시는 번창한 최고의 도시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세존의 예언대로 그후 빠딸리 마을은 빠딸리뿌뜨라(Pāṭaliputra)로 불리게 되며 마우리야(Maurya) 왕조, 굽따(Gupta) 왕조 등 역대 인도 통일국가의 수도로 그 이름을 떨쳤다.



103.「도사(島史)」등에 따르면 아소카왕이 불교교단을 풍족하게 지원해 줌으로써 교단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웠지만 안이한 생활을 바라고 출가하는 자가 많아지고 승가의 계율이나 수행이 어지러워졌다. 그 때문에 승가에 싸움이 일어나 월례행사인 포살도 행해지지 않았다. 이러한 승가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목갈리뿟따 띳사장로가 아소카왕의 지원을 받아 승가를 숙정했다.


즉 불교를 분별설(分別說 vibhajja-vāda)이라고 말한 사람은 불교도이며, 이에 반하는 비구는 불교도가 아니라고 하여 승가에서 추방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vibhajja는 해체, 분석, 분별이라는 뜻으로 상좌부 불교는 부처님의 말씀을 분석적으로 이해하여 설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분별론자(vibhajja-vādin)라고 부르고 있다. 그래서 일부 서양이나 일본학자들도 남방상좌부를 분별상좌부라고 부른다. 아무튼 이 교설을 명확히 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비담마 칠론중 하나인「논사(論事)」였고, 그 후 목갈리뿟따 띳사는 1,000여명의 아라한을 선발하여 9개월에 걸쳐 3차 결집을 완성하였다.



104. 계목(戒目)이라 옮긴 빠띠목까(pātimokkha)는 중국에서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로 음역했고 영어로는 code of discipline이라고 한다. 출가 수행자를 제어하는 가장 기본이 되는 계의 목록, 즉 계본(戒本)이란 뜻이다. 비구의 경우 227가지로 되어 있는데 중한 정도에 따라 7가지 등급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무거운 죄는 바라이법(波羅法夷 pārājika)이다. 이것은 ➀ 사음 ➁ 도둑질 ➂ 사람을 죽이는 것 ➃ 깨닫지 않았는데 자신이 깨달았다고 말하는 것의 4개조로 이것들을 범하면 승가에서 영원히 추방된다.



105. 「띳티라 본생경(Tittira Jākata)」(J.319)은 부처님께서 라훌라(Rāhula)가 공부 짓기를 좋아하는 것을 언급하여 설하신 전생 이야기이다. 과거 어느 때 보살은 바라문 수행자였고 라훌라는 새잡이가 길들여 미끼로 부리는 자고새였다. 자고새가 한번 울면 다른 자고새들이 그 주변에 모여 들었는데 그때 새잡이가 와서 다 잡았다. 자고새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자신이 악업을 짓고 있다고 두려워했다. 보살은 자고새에게 악한 의도가 없다면 그 행위는 악업이 되지 않는다는 말로써 메추리의 죄책감을 해소해 주었다.



 

29. 선한 마음과 행복



106. 맛따꾼달리(Maṭṭhakuṇḍali)는 바라문 아딘나푸바까(Adinnapubbaka)의 외아들이었다. 아버지는 맛타꾼달리를 극진히 사랑했지만 지독한 구두쇠여서 대장장이에게 들어가는 돈을 아끼려고 자신이 손수 아들의 귀거리를 광택해 주었다. 그래서 광택 낸(maṭṭha) 귀거리(kuṇḍala)란 뜻의 맛타꾼달리로 불리게 되었다. 16살 때 맛따꾼달리는 황달에 걸렸지만 아버지는 돈을 아끼려고 의사를 부르지 않고 자신이 직접 약을 처방해주었다. 그러나 차도가 없자 장례식에 오는 사람들이 자기 재산을 볼까봐 아들을 바깥의 마당에 옮겨 놓았다. 부처님께서는 천안으로 맛따꾼달리가 누워있는 것을 보고는 큰 연민을 일으켜 바라문의 집 앞에 오셨다. 너무 병약해져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소년은 부처님에 대한 깊은 신심을 불러일으키고는 죽었다. 그리고는 넓이가 30평방이나 되는 황금궁전의 천신들 가운데 태어났다. 맛따꾼달리가 자기 전생을 조사해보자, 전생의 아버지가 묘지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시체를 화장하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 맛따꾼달리의 모습으로 변해 묘지에 가서 아버지 옆에 서서 울기 시작했다. 바라문이 왜 우냐고 묻자 천신은 달을 원한다고 했다. 그리고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천신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아버지의 어리석음을 꾸짖었다. 다음날 바라문은 부처님을 식사공양에 초대하였고 공양을 다 마치자 부처님께 단지 믿음만으로 천신계에 이를 수 있는지를 여쭈었다. 바라문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부처님께서는 맛따꾼달리가 바라문에게 나타나도록 해서 그것이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부처님의 법문이 끝나자 맛따꾼달리와 바라문은 모두 예류과를 얻었다. (DhA.i.20ff.; Vv.vii.9; VvA.322ff.; Pv.ii.5; PvA.92) 또한 8만 중생들도 진리를 깨달았다.(Mil.350).



107. 여래(如來)라 번역한 따타가따(Tathāgata)는 부처님께서 스스로를 호칭하시는 말이다.『장부』주석서(DA.i.59~60)에서는 여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여덟가지 이유 때문에 세존께서는 여래이시다. (1) 여여하게(tathā) 오셨다(āgata)고 해서 여래이시다. (2) 여여하게 가셨다(gata)고 해서 여래이시다. (3) 사실대로의 특징으로(tathalakkhaṇaṁ) 오셨다고 해서 여래이시다. (4) 사실대로의 법을 확실하게(yāthāvato) 정등각(abhisambuddha)하셨기 때문에 여래이시다. (5) 사실대로 보시기(tathadassitā) 때문에 여래이시다. (6) 사실대로 말씀하시기(tathavāditā) 때문에 여래이시다. (7) 여여하게 행하시기(tathākāritā) 때문에 여래이시다. (8) 지배(abhibhavana)의 뜻에서 여래이시다.”


그리고「청정도론」(Vis.Ⅶ.2)등에 나오는 여래십호(如來十號)는 다음과 같다.


① 아라한(應供 Arahan) ② 바르게 깨달으신 분(正等覺者 Sammā-sambuddha) ③ 영지와 실천을 구족하신 분(明行足 Vijjā-caraṇa-sampanna) ④ 피안으로 잘 가신 분(善逝 Sugata) ⑤ 세상을 잘 아시는 분(世間解 Lokavidū) ⑥ 가장 높으신 분(無上士 Anuttara) ⑦ 사람을 잘 길들이시는 분(調御丈夫 Purisadammasārathi) ⑧ 신과 인간의 스승(天人師 Satthā devamanussānam) ⑨ 부처님(佛 Buddha) ⑩ 세존(世尊 Bhagavā)



108. 불교의 믿음과 관계된 빨리어 술어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 빠사다(pasādā): 깨끗한 믿음으로 번역되는 빠사다(pasādā)는  마음이 가라앉은 상태, 즉‘고요함, 편안함’을 나타낸다. 아울러 그런 고요함처럼 청정한 믿음, 정신(淨信)을 뜻한다. 경전에는 이를 불(佛)· 법(法)· 승(僧)· 계(戒)에 대한 확고부동한 신앙을 뜻하는 사불괴정(四不壞淨 attāro-avecca-ppasādā)이라고 하며 이것은 성자의 반열에 동참한 예류자의 특징이다.


(2) 삿다(saddhā): 믿음, 신(信)으로 번역되는 삿다(saddhā)는 ‘마음을 어떤 대상에 놓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 믿음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믿고 삼보에 귀의할 때 생긴다. 하지만 이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조사와 탐구를 통한 합리적인 이해에 기반을 둔 확신을 뜻한다. 그래서 영역도 faith, belief보다는 confidence로 많이 번역한다. 그리고 믿음은 다섯 가지 기능(五根 pañca-indriya)과 다섯 가지 힘(五力 pañca-bala)중의 하나이다.


(3) 아디목카(adhimokkha): 확신, 결단, 결심으로 번역되는 아디목카(adhimokkha)는 ‘해탈을 향함’이 그 기본의미로 불· 법· 승 삼보에 확신을 가지는 것은 곧 해탈을 향하는 기초가 완전히 다져졌다는 의미라 하겠다. 이 용어는 경에서보다는 논서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믿음의 요소로 나타날 때는 삿다(saddhā)와 빠사다(pasādā)에 바탕한 확신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중국에서는 신혜(信解)라고 옮겼다.


이처럼 불교에서 말하는 신앙은 합리적인 이해와 통찰에 기반한 것으로‘와서 보라(epipassika)’이지‘와서 믿으라’가 아니다. 무조건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고 와서‘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如實知見)’이다. 빨리 경전 도처에서는 깨달음을 일컬어‘티 없고 때 묻지 않은 법의 눈(法眼)이 생겼다.(S.V.423)'라고 묘사하고 있고 지혜(ñāṇa)와 봄(dassana)이라는 두 단어가 합성된 명사 냐나닷사나(知見 ñāṇa-dassana)라는 용어가 중요한 술어로서 많이 나타난다. 그만큼 불교에서는 맹목적 믿음보다는 보고 아는 것을 중요시하고 이것을 신행의 출발로 삼고 있다.



109. 오계(五戒)는 빤쨔실라(panca-sīla)로 재가자들이 평생 동안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계율이다.


(1) 살생을 삼가기

(2) 도둑질을 삼가기

(3) 그릇된 성관계를 삼가기

(4) 거짓말을 삼가기

(5) 취하게 하는 술이나 약물을 삼가기


그리고 팔계(八戒)는 아따실라(aṭṭha-sīla)로 한달에 네 번, 그믐날, 상현달, 보름달, 하현달이 뜨는 재일(齋日 uposata)이나 선원에서 집중수행을 하는 동안 지키는 계율이다.


(1) 살생을 삼가기

(2) 도둑질을 삼가기

(3) 모든 성관계를 삼가기

(4) 거짓말을 삼가기

(5) 취하게 하는 술이나 약물을 삼가기

(6) 때 아닌 때(정오 이후)에 먹는 것을 삼가기

(7) 춤이나 노래나 음악을 즐기거나 향수나 화장품, 장신구를 사용하는 것을 삼가기

(8) 높거나 큰 침대나 의자의 사용을 삼가기



110. 12연기에서의 상카라(saṇkhāra)는 업형성력으로 이해되며, 이 업형성력은 업으로서의 존재(業有 kamma-bhava), 즉 업(kamma)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 상카라와 업은 모두 의도(cetanā)를 뜻한다.




30. 정신-물질[名色]과 여섯 감각장소[六入]



111. 음식(āhāra)은 지탱하는 상태로 떠받쳐주는 것을 뜻하며 다음의 네 가지가 있다.


(1) 덩어리로 된 음식(段食 kabaīkāra-āhāra): 육체적인 몸을 지탱해준다.

(2) 감각접촉의 음식(觸食 phassa-āhāra): 느낌을 지탱해준다.

(3) 의도의 음식(意思食 manosañcetanā-āhāra): 삼계에 태어나는 것을 지탱해주는데 의도는 업이며 업은 재생을 일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4) 식의 음식(識食 viññāṇa-āhāra): 정신-물질의 합성체를 지탱해준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1) 덩어리로 된 음식[段食]은 몸에서 네 가지 원인으로 생기는 물질적인 현상을, 나머지 (2)(3)(4)는 그 각각과 함께 일어나는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현상을 지탱해준다. 여기서 덩어리로 된 음식[段食]은 물질이므로 무기이고 나머지 세 가지 정신적인 음식은 선(善), 불선(不善), 무기(無記)의 셋에 다 해당된다.


112. 12연기의 요소 중 하나인 정신-물질[名色]은 식을 조건으로 일어남은 앞에서 이미 언급되었다. 그러면 이러한 식을 조건으로 일어나는 정신-물질이란 무엇인지 다시 살펴본다. 정신(nāma)은 과보의 마음과 연결된 마음부수들을 뜻하고 물질(rūpa)이란 업에서 생겨난 물질들을 의미한다. 오온(五蘊)이 다 있는 존재의 식(識)은 정신-물질[名色] 둘 다의 조건이 된다. 그러나 색온(色蘊)이 없는 존재, 즉 무색계에서 식은 오직 정신의 조건만 된다.


그리고 상온(想蘊)이 없는 중생인 무상유정천(無想有情天)은 식이 단지 물질의 조건만 된다. 오온을 모두 다 가진 존재는 재생연결의 순간 재생연결식이 일어날 때 그와 동시에 다른 세 가지 정신의 무더기들, 즉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이 일어난다. 물론 이때 특별하게 응고된 물질들도 함께 일어난다. 이 경우 사람에게는 몸과 성과 심장토대의 물질의 십 원소들이 해당된다. 식은 함께 존재하는 정신-물질의 요소들 가운데서 가장 으뜸이기 때문에 식을 반연하여 정신-물질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다.



113. 여섯 감각장소의 문[六門]에서 문(門 dvāra)이라는 것은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마노[意]라는 여섯 감각기관[六根]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이다. 왜냐하면 식(識)이 대상을 인지하는 통로 혹은 문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식(眼識)은 눈[眼]을 문으로 하여 대상을 인지하고 같이하며 신식(身識)은 몸[身]을 문으로 하여 대상을 인지한다.


같은 방법으로 의식(意識)은 마노[意]를 문으로 하여 대상을 인지하는데 이때 마노의 문[意門]은 구체적으로 바왕가(bhavaga)이다. 이처럼 마노[意], 마노의 문[意門]은 순전히 정신적인 영역이다. 그리고 마노의 문[意門]으로 인지할 수 있는 법이라 불리는 대상은 감성의 물질, 미세한 물질, 과거의 마음, 52가지 마음부수법, 열반(유학과 아라한만), 개념이다.


그리고 이 여섯은 마음(식)과 마음부수들이 일어나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이때 이 여섯을 장소(處 āyatana)라고 하고 육처(六處)나 육입(六入)이라 한다. 각각의 영역에 해당하는 대상을 받아들이는 기능 혹은 능력의 측면에서 고찰할 때는 그것을 기능(根 indriya)이라고 부르며 육근(六根)이라고 한다. 이렇게 그 기능과 역할 등에 따라서 이 여섯은 다르게 불린다. 그리고 마노[意]는 정신적 대상을 아는 감각기능[根] 혹은 감각장소[處]이다.


눈[眼]이라는 감각장소를 통해서 형상이나 색깔[色]이라는 대상에 대한 안식(眼識)이 일어나고 귀[耳]라는 감각장소를 통해서 소리[聲]라는 대상에 대한 이식(耳識)이 일어나듯이 마노[意]라는 감각장소를 통해서 정신적인 대상에 대한 의식(意識)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처럼 마노[意]는 정신적인 대상을 아는 감각장소 혹은 기능이다.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은 물질적인 감각장소이지만 마노[意]는 정신적인 감각장소인것이다. 그리고 감각대상이란 식(識)이 일어날 때 의지하는 물질적 토대를 말한다. 그러므로 안식[眼識]는 눈[眼]이라는 감성의 물질을 토대로 하고 같이하며, 이식(耳識)은 귀[耳]를, 비식(鼻識)은 코[鼻]를, 설식(舌識)은 혀[舌]를, 신식(身識)은 몸[身]이라는 감성의 물질을 토대로 한다. 그리고 의식(意識)은 모두 심장토대를 토대로 한다.


여기서 요점을 간추리면 전오식(前五識) 즉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은 모두 문과 토대가 같다. 즉 안식(眼識)은 눈[眼]이라는 감성을 그 문으로 하고 눈이라는 감성을 토대로 하여 일어난다. 모든 의식은 반드시 마노[意]를 그 문으로 가진다. 즉 모든 의식(意識)은 반드시 심장토대를 토대로 하여 일어난다.


그러나 모든 의식은 그 문이 다르다. 그러므로 눈의 인식과정에서 일어나는 의식(意識)은 눈[眼]을 문으로 가지면서 심장토대를 토대로 한다. 귀[耳]의 인식과정에서 일어나는 의식(意識)은 귀[耳]를 문으로 가지면서 심장토대를 토대로 한다. 의문인식과정에서는 모든 의식(意識)은 마노[意]를 문으로 하고 심장토대를 토대로 한다.

 


114. 이를 인식과정(vīthi)의 첫 단계인 전향(āvajjana)이라고 한다. 전향에는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의 다섯 감각의 문[五門]으로 향하는 (1) 오문전향(五門轉向 pañca-dvāra-āvajjana)과 (2) 마노의 문[意門]으로 향하는 의문전향(意門轉向 mano-dvāra-āvajjana)의 두 가지가 있다.



115. 욕계에서 정신-물질[名色]은 여섯 감각장소[六入/六處] 모두를 일어나도록 조건 짓고 색계에서는 눈[眼]과 귀[耳]와 마노[意]의 감각장소들만 일어난다. 무색계에서는 정신만이 마노의 감각장소[意處]를 일어나게 한다. 그리고 무색계에서는 마노[意]만이 유일한 감각장소인데 다섯 가지 물질로 된 감각장소는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다.



116. 함께 생긴 조건(俱生緣 sahajāta-paccaya)은 24가지 (paccaya)중 하나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문 뒤의 도표를 참조할 것.



117. 마음은 그 경지에 따라서 ① 욕계 마음(kāmāvacara-citta) ② 색계 마음(rūpāvacara-citta) ③ 무색계 마음(arūpāvacara-citta) ④ 출세간 마음(lokuttara-citta)으로 구분되고 종류에 따라서는 ① 불선한 마음(akusala-citta) ② 선한 마음(kusala-citta) ③ 과보의 마음(vipāka-citta) ④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kiriya-citta)으로 구분된다. 자세한 것은 본문 뒤의 도표를 참조할 것.




32. 요약



118. 이 게송은 후에 불교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넓게 유포된 게송이 되었다. 연기법에 딱 들어맞는 게송이 없던 시기에 설해진 이 게송은 초기 불교도들의 마음에 가히 혁명적인 영향을 끼쳤으리라 짐작된다. 『율장』(Vin.i.40) 에 나오는 앗사지(Assaji)장로가 읊은 게송과 그 빨리 원어는 다음과 같다.


“원인에서 발생하는 그 모든 법들,

그들에 관해 여래께서는 그 원인을 밝혀주셨네.

또 그들의 소멸에 대해서도 설명하셨나니,

이것이 대 사문의 가르침이라네.”


Ye dhammā hetuppabhavā

tesam hetum tathāgato āha

Tesam ca yo nirodho

Evaṃ vādi mahā samano (Vin.i.40)

  


119. 탑묘(塔廟)로 번역한 쩨띠야(cetiya)는 만든‘기념물, 분묘’를 지칭하는 것이 일차적인 의미이다. 원래는 불교 이전부터 있었던 신성한 곳, 즉 영묘(靈廟)를 가리켰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불상이나 사리를 모시고 예배드리는 곳을 의미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지제(支堤)라고도 음역되었다.



120. 빠두뭇따라 부처님(Padumuttara Buddha)은 과거 24불 가운데 10번째 부처님이다. 태어나는 순간과 깨달음을 이루는 순간 1만세계에 연꽃의 비가 내렸기 때문에 빠두뭇따라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부처님 재세 시에는 외도(外道)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또 아난다(Ānanda) 존자를 위시한 고따마 부처님의 여러 이름난 제자들이 빠두뭇따라 부처님 당시에 그러한 지위를 얻고자 하는 서원을 처음 세웠다고 한다.




33. 수행을 강조하시는 부처님



121. 기원정사(祇園精舍)라고 번역한 제따와나(Jetavana)는 중인도 꼬살라(Kosala)국의 수도 사왓티(Sāvatthi) 남쪽 1.6 km 지점에 있던 제따태자 소유의 동산에 아나타삔디까(Anāthapiṇḍika) 장자가 지어 승가에 헌납한 정사이다. 세존께서는 말년 22년간을 여기서 보내셨다. 세존이 아난다(Ānanda) 존자를 시자로 삼으신 것도 여기에 계시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불교 교단사로 본다면 세존께서 45년간 설법하신 기간의 절반 정도를 특히 말년을 이곳 한 군데서 머무셨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많은 경들이 이 기원정사에서 설해진 것으로 나타나며 특히 『중부』와 『상응부』경들은 반 정도가 이곳에서 설해졌다.



122. 아나따삔디까(Anāthapiṇḍika)는 사왓티(Sāvatti)의 장자로 부처님의 대표적인 남자신도였다. 원래 이름은 수닷따(Sudatta)인데 의지할 곳 없는 고독한 이들(anātha)에게 먹을 것(piṇḍa)을 제공했으므로 아나따삔디까(Anāthapiṇḍika)라 불렸고, 한역으로는 급고독(給孤獨) 장자라고 알려졌다.


하루는 사업차 라자가하(Rājagaha)를 방문하였을 때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셨다는 말을 듣고는 감격하여 날이 채 밝기도 전에 부처님을 찾아뵈러 길을 나섰다. 하지만 길이 너무나 어두웠기 때문에 잠시 두려움이 생겼지만 시와까(Sīvaka)라는 야차가 용기를 북돋아 주어 계속 길을 가게 된다. 한림(寒林 sītavana)에서 경행을 하고 계신 부처님을 뵙고 설법을 듣고 즉시 예류과를 얻었다. 라자가하에서 돌아온 그는 제따왕자의 소유인 사왓티(Sāvatthi)의 제따숲(Jetavana)을 바닥에 황금을 깔아서 사들이고 그곳에 기원정사(祇園精舍)라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제따와나(Jetavana)를 지어 승가에 헌납하였다. 그리고 아나따삔디까의 신심에 감복한 제따왕자는 그 돈으로 대문을 만들었다.


장자는 매일 자신의 집에서 백 여 명의 비구를 초청하여 식사공양을 올렸으며, 언제 누가 오더라도 바로 접대할 수 있도록 오백명분의 자리가 준비되어 있었다.(AA.i.208-9) 부처님께 귀의한 뒤로 그는 자신의 사업을 돌보지 않고 보시에만 마음을 쓰느라 그 많던 재산이 점차 줄어 나중에는 가난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좁쌀이나 신죽이라도 있는 대로 승가에 보시했다. 그때 집의 문에 깃들어 살던 여신이 이를 보고 아나따삔디까에게 이제 그만 보시하고 사업에 힘을 쓰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아나따삔디까는 이러한 충고를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여신에게 자신의 집에서 나가라고 명령했다. 예류과를 얻은 성인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 장자의 집을 나와 정처 없이 떠돌게 된 여신은 제석(Sakka)에게 그에게 용서를 빌 방법을 물었고, 제석의 말에 따라 다시 그의 재산을 이전과 같이 불려주었다.(DhA.iii.10ff; J.i.227 ff) 


아나따삔디까는 임종이 가까워지자 사리뿟따 존자를 집으로 청하였고, 존자는 아난다(Ānanda)와 함께 그를 찾아가서 여섯 감각장소[六處]로부터 시작하여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마음속에 집착을 품지 말라고 충고한다.(M.iii.258) 아나타삔디까는 그 설법을 듣고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아나타삔디까는 곧 숨을 거두고 도솔천의 천신으로 태어났다.



123. 사왓티(Sāvatthi)는 꼬살라(Kosala)국의 수도였다. 중국에서는 음역하여 사위성(舍衛城)이라고 하였다. 꼬살라는 부처님 재세 시에 인도에 있었던 16개국가운데 하나였으며 16국은 점점 서로 병합되어 나중에는 마가다(Magadha)및 꼬살라 두 나라로 통일되었다. 부처님 재세 시에는 빠세나디(Pasenadi)왕이 꼬살라를 통치하였고, 아들 위두다바(Viḍūḍabha)가 계승하였다. 부처님께서 말년에 24년 정도를 이곳 사왓티의 기원정사(Jetavana)에서 머무시는 등 부처님과 아주 인연이 많았던 곳이다.


124. 사두(Sādhu)는 “장하구나. 착하도다. 선재(善哉)”등의 뜻으로 상좌부 불교국에서는 어떤 공덕 행을 하고 나서, 또는 법문이 끝나고 나서 이 말을 3번씩 합송 하여 상대방의 선업과 공덕행을 찬탄해준다.



125. 제석(帝釋)의 원어는 삭까(Sakka)로 중국에서 석제(釋提)로도 한역되었다. 제석은 베다에 등장하는 인도의 유력한 신 인드라(Indra)이며, 삼심삼천(Tāvatiṃsa)을 다스리는 신들의 왕이다. 그래서 삼십삼천을 제석천(帝釋天)이라고도 한다.『상응부』(S.i.229)와 「법구경」주석서(DhpA.i.264)에서는 제석의 여러 가지 이름을 열거하는데 그 가운데서 셋째에 그가 인간으로 있을 때 철저하게 보시를 베풀었다(sakkaccam dānam adāsi)고 해서 삭까(Sakka)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제석은 웨자얀따(Vejayanta) 궁전에 거주하며 그 수도의 이름은 수닷사나(Sudassana)이다. 부처님은 『상응부』(S.i.228, 229, 231)에서 제석이 마가(Magha)라는 인간으로 있을 때 실천한 7가지 선행으로 천신들의 왕으로 태어났음을 설하고 계신다.


제석의 삼보에 대한 신앙은 아주 유명하다. 싯닷타 태자가 출가하여 아노마(Anomā) 강가에서 머리를 잘라 공중에 던지자 제석이 그것을 받아서 삼십삼천의 쭐라마니 탑묘(Cūḷamani cetiya)에 안치하였다.(J.i.65). 부처님의 정각을 방해하려고 마라(Māra)가 왔을 때 그는 보리수 근처에서 천상의 나팔을 불면서 서있었다.(J.i.72).부처님이 빔비사라(Bimbisāra) 왕의 식사초대를 받아 왕궁으로 들어갈 때 젊은이의 모습으로 변해서 부처님과 비구들 앞에 가면서 부처님을 찬미하였다.(Vin.i.38). 부처님께서 쌍신변(雙神變)을 나투실 때 제석은 천막을 지어 드렸고, 바람과 해의 신에게 명하여 외도들의 천막을 없애게 하여 그들에게 큰 불안감을 주었다.(DhA.iii.206, 208). 부처님이 삼십삼천에서 상까사(Saṅkasa)로 내려오실 때 금, 은, 보석으로 만들어진 세 개의 사다리를 만들어 드렸다.(DhA.iii.225)


제석은 또한 부처님이 유행병을 없애고자 웨살리(Vesāli)를 방문하였을 때 같이 동참하여 그의 위력으로 악령들이 사라지도록 했다. (DhA.iii.441). 한때 기원정사(Jetavana)의 연못이 말랐는데 부처님이 목욕을 하려 하시자 즉시 비를 내리게 해서 연못에 물이 차도록 했다.(J.i.330).그리고 부처님의 병이 위중해졌을 때 몸소 병간호를 해드렸다.(DhA.iv.269f) 또 사리뿟따의 임종 시에도 그렇게 병간호를 하였다. 제석은 부처님의 제자들이 영적인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힘닿는 데까지 도왔다. 또한 제석은 나병환자 숩빠붓다(Suppabuddha)의 경우처럼 사람들의 삼보에 대한 믿음이 굳건한지 시험하기를 좋아했다.(DhA.ii.34f) 그리고 제석은 세상에서 도덕률이 무너지지 않게 호지하는 역할을 한다. 즉 보통 사람들이나 왕이 계행을 지키지 않으면 그들에게 나타나서 겁을 주어 선을 행하도록 하고, 선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그들이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제석은 비록 높은 덕성과 위력을 지닌 신들의 왕이지만 경전과 주석서에 따르면 지성적으로는 완벽하지는 않은 듯하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고 종종 불안에 떨기도 했다. 어느 때 제석은 자신에게 죽음이 멀지 않았음을 알리는 징조를 발견하고는 크게 두려워했다. 그리고는 부처님께 와서 법문을 듣고 예류과를 얻고는 죽어서 젊고 새로운 제석으로 다시 태어났다. 신들은 화생(化生)을 하기 때문에 이 사실은 오직 부처님과 제석만이 알고 있었다.(DA.iii.732) 그리고 나서 제석은 다시 불환과를 얻었기 때문에 위로 흐르는 자(uddhaṁ-sota)가 되어 정거천(淨居天)의 무번천(無煩天)에서 천 겁을, 무열천(無熱天)에서 2천 겁을, 선현천(善現天)에서 4천 겁을, 선견천(善見天)에서 8천 겁을, 색구경천(色究竟天)에서 1만 6천 겁, 이렇게 하여 모두 3먼 천 겁동안 범천의 수명을 누릴 것이라고 한다.(DA.iii.740)  




126. 숫도다나 왕은 까삘라왓투(Kapilavatthu)의 석가족 왕국을 다스리던 왕이었다. 부인은 마야(Mahā-māyā) 정비였다. 마야 부인이 싯닷타 태자를 낳고서 7일 만에 죽어 도솔천에 태어나자 왕은 빠자빠띠(Pajāpatī)를 정비로 삼았다.(Mhv.ii.15f.; Dpv.iii.45; J.i.15, etc.) 점성가들이 태자는 출가하여 부처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자 출가하지 못하게 하려고 세 개의 궁전을 지어 태자를 세속적 쾌락 속에 지내게 한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태자가 유성출가하여 극심한 고행을 닦는다. 천신들이 와서 태자가 죽었다고 이야기 하였지만 왕은 자기 아들은 목표를 이루기 전에는 절대 죽지 않을 것이라며 믿지 않았다.(J.i.67). 태자가 깨달음을 성취하였다는 소문을 전해들은 왕은 라자가하(Rājagaha)의 죽림정사(Veḷuvana)로 전령을 보내어 까삘라왓투를 방문해줄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전령들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는 출가하는 바람에 자신들의 본래 임무를 망각하고 말았다. 9번씩이나 이렇게 전령들이 돌아오지 않자 숫도다나는 깔루다이(kāḷudāyī)를 보내어 다시 한번 부처님을 초청하였고, 부처님도 이에 응해 까삘라왓투를 방문하신다. 숫도다나 왕은 태자였던 부처님께서 까빌라왓뚜를 탁발다니시는 것을 보고는 부끄럽게 생각하자 탁발은 모든 부처님들의 관행이라고 말씀하셨고 이것을 들은 숫도다나 왕은 예류과를 얻었다. 왕은 부처님을 왕궁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베풀었고, 이 자리에서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일래과를 얻었다.(J.i.90; cf. DhA.iii.164f).그리고「마하담마빨라 본생경(Mahādhammapāla Játaka)」(J.447)을 듣고 불환과를 얻었다. 왕이 임종할 때 부처님은 다시 오셔서 왕에게 법문을 설하셨고, 왕은 재가 아라한이 되어 입멸하였다.(ThigA.141)



127. 불교는 개인과 중생을 예외 없이 오온(五蘊)으로 해체하고 분석한다. 빨리어 깐다(kkhanda)는 무더기, 더미, 적집(積集)이란 뜻으로 정신-물질(名色 nāma-rūpa)을 이루는 다섯 가지 무더기라는 의미에서 사용한 말이다. 또 오취온(五取蘊)이라는 말은 중생들은 이러한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무더기일 뿐인 자아를 나라거나 내 것이라고 집착(upādāna)하기 때문에, 집착하는 무더기(upādāna-kkhanda)라는 의미에서 오취온이라고 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오온과 오취온은 욕계(慾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중생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동의어이다. 하지만 성자의 경우는 오온(五蘊)에 대한 집착이 멸하여 오온이 단순한 객관적 현상으로만 존재한다.


① 색온(色蘊 rūpa-kkhandha) - 물질의 무더기

물질로 된 몸뚱아리를 의미한다. 더 구체적으로는 지수화풍의 사대(四大), 안· 이· 비··설· 신/색·성· 향· 미· 촉의 오내외입처(五內外入處)와 같은 물질일반을 나타내며, 아비담마에서는 이를 더 세분화하여 28가지 물질들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영역은 material body.

 

② 수온(受蘊 vedanā-kkhandha) - 느낌의 무더기

감각의 육문을 통해 경험되는 괴로운 느낌[苦受], 즐거운 느낌[樂受],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을 의미한다 .이 느낌[受]은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단초가 되는 심리현상이라 하겠다. 아비담마에서 마음부수[心所]와 일치하며 52가지 심소법(心所法)들로 설명하고 있다. 느낌[受]의 영역은 feeling.


③ 상온(想蘊 saññā-kkhandha) - 인식의 무더기

인식[想]은 개념적인 지각이나 파악을 뜻한다. 즉, 지적인 단초가 되는 심리현상이라 하겠다. 예를 들어 여기에 꽃이 있다면 그것을 그냥 꽃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 인식에는 외적인 대상의 지향에 따라 이름 지어진 형상[色]에 대한 인식, 소리[聲]에 대한 인식, 냄새[香]에 대한 인식, 맛[味]에 대한 인식, 감촉[觸]에 대한 인식, 마음대상[法]에 대한 인식의 여섯 가지가 있다. 느낌[受]과 마찬가지로 감각의 육문을 통해 일어난다. 아비담마에서 마음부수[心所]와 일치하며 52가지 심소법(心所法)들로 설명하고 있다. 인식[想]의 영역은 perception.


④ 행온(行蘊 saṅkhārā-kkhandha) - 상카라의 무더기

여기서의 상카라[行]는 심리현상을 의미한다. 오온에서의 상카라[行]는 상좌부 아비담마의 52가지 심소법들 가운데서 느낌[受]과 인식[想]을 제외한 나머지 마음부수법[心所法]들 모두를 뜻하는데 감각접촉(phassa), 의도(cetanā), 주의 기울임(manasikāra), 집중(心一境 ekaggatā), 의욕, 선한 심리현상들, 불선한 심리현상들을 모두 포함한다. 그리고 오온에서 느낌[受]· 인식[想]· 식[識]은 항상 단수로 나타나지만 상카라[行]는 항상 복수로 나타난다.(12연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것만 보아도 상카라[行]가 우리의 정신영역 가운데서 수[受]· 상[想]· 식[識]을 제외한 모든 정신적 행위, 즉 심리현상을 포괄하고 있음을 뜻한다. 이 상카라[行] 역시 아비담마에서 마음부수[心所]와 일치하며 52가지 심소법(心所法)들로 설명하고 있다. 영역은 mental formations.


⑤ 식온(識蘊 viññāṇa-kkhandha) - 식의 무더기

식(識)란 감각의 육문을 통해 이에 대응하는 외부의 감각대상들을‘아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식은 느낌[受]· 인식[想]· 상카라[行]와 같은 마음부수[心所]들의 도움으로 대상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식(識)은 매순간 일어나고 멸한다. 식(識)은 아비담마에서 마음(心 citta)과 일치하고 그래서 심법(心法)으로 정리되고 있다. 영역은 consciousness.


이 가운데 식온(識蘊)은 아비담마의 마음[心]과 일치하고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은 마음부수[心所]와 일치하며, 색온(色蘊)은 물질과 일치한다. 한 개체안에서 이들 오온은 함께 일어나고 함께 멸한다. 물론 아비담마에 따르면 물질인 색온(色蘊)과 정신인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 식온(識蘊)의 생멸속도는 다르다고 설명한다. 즉 정신은 물질보다 16배 혹은 17배 빠르다고 한다.


아라한의 경우는 오온(五蘊)에 대한 집착이 멸하여 오온이 단순한 객관적 현상으로 존재할 뿐이고 범부중생의 경우는 오온을 집착하는 무더기들을 뜻하는 오취온(五取蘊 pañca-upādāna-kkhanda)이라 구분해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오온과 같은 개념으로써 명색(名色 nāma-rūpa)라는 단어가 경에서는 주로 12연기의 하나의 구성요소로 많이 나타난다. 나라는 존재를 더미나 무더기나 적집의 측면을 강조해서 사용한 언어가 오온(五蘊)이고 나라는 존재를 정신-물질의 조합이라는 측면을 강조한 것이 명색(名色)이다.



128.「장로게(長老偈)」(Thag.92)에는 아난다 존자의 다음과 같은 게송이 나온다.


“8만 2천은 부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고

  2천은 비구들로부터 받은 것이니

  나는 8만 4천 가지의

  이러한 법들을 전개하노라.“(Thag.92)




34. 난해한 연기법



129. 주석서에서는 불교 혹은  법(Dhamma)을 교학(pariyatti), 수행(paṭipatti), 통찰(paṭivedha, 꿰뚫음)의 세 가지 측면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교학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이 기록된 삼장(Tipiṭaka)을 공부하는 것이고 수행이란 계· 정· 혜 삼학을 닦는 것이며, 통찰이란 출세간도를 통찰하고 성스러운 과를 증득하는 것이다. 배움은 도 닦음의 토대가 되고, 도 닦음은 통찰의 토대가 되며, 교학은 수행의 지침이 되고, 수행은 성위를 증득하는 돌파구가 되는 것이다.  



130.『증지부』주석서(AA.ii.335)는 이를“선업과 불선업이 자라는 장소(hāna)라는 뜻에서 업은‘들판khetta)’이다. (업과) 함께 생긴 업을 형성하는 식은 자란다는 뜻에서 ‘씨앗(bija)’이다. (씨앗을) 돌보고 자라게 하기 때문에 ‘갈애’는 물과 같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131. 마음[心]으로 번역되는 찟따(citta)는  대상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아비담마에사는 이 citta와 viññāṇa을 아무런 구분 없이 쓰고 있다. 굳이 구분하여 본다면 citta는 마음을 뜻하는 가장 보편적인 술어이고, viññāṇa는 여섯 감각기관[六根]과 여섯 대상[六境]이 만나서 일어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본서에서도 viññāṇa의 번역어인 conciousness를 문맥에 따라 식(識)이나 아는 마음, 또는 그냥 마음으로 옮긴다.



132. 아비담마에 의하면 세계(loka)는 다름 아닌 우리 마음에 있는 미세한 여러 계층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서 구현된 것이다. 중생들이 거주하는 세계의 계층조직은 마음의 계층조직을 그대로 복사한 것이어서 이 둘은 서로서로 상응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중생이 왜 특정한 세계에 태어났는가 하는 것은 그가 전생에 그 세계에 태어나기에 적합한 업을 산출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계(loka)와 마음(citta)은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그리고 세계로 번역되는 loka는 ‘보이는 세상(visible world)'을 뜻한다. 여기에 대비되는 개념이  본문 뒷부분에 나오는 저 세상(para-loka)이다.


경전에서 loka는 여러 문맥에서 등장하는데 정신· 물질의 모든 영역이나 세상, 세계, 세간을 뜻한다. 그래서 광의로 해석하여 영어로는 "sphere, plane. division, order"등으로 옮기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world로 옮긴다. loka의 의미를 경에 나타나는 문맥에 따라서 몇 가지로 정리해 본다.



(1) 우주, 혹은 세계, 세상의 뜻이다. 신의 세계(deva-loka), 인간세계(manussa-loka) 범천의 세계(brahmā-loka) 등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다시 niraya-loka(지옥계), tiracchāna-loka(축생계), pittivisaya-loka(아귀계), manussa-loka(인간계), asura-loka(아수라계), deva-loka(천상계) 등의 육도(六道)로 나타납니다.


(2) 이런 세계의 개념은 「청정도론」에서 다음의 셋으로 정리되어 나타난다.「청정도론」에서는 세상 혹은 세계를 ① 형성된 것들의 세상(sañkhāra-loka) ② 중생의 세상(satta-loka) ③ 공간의 세상(okāsa-loka)의 셋으로 나눈다.


① 형성된 것들의 세상(sañkhāra-loka): "하나의 세상: 모든 중생은 음식으로 생존한다. 두 종류의 세상: 정신과 물질. 세 종류의 세상: 세 종류의 느낌. 네 종류의 세상: 네 종류의 음식. 다섯 종류의 세상: 집착의 대상인 다섯 종류의 무더기. 여섯 종류의 세상: 여섯 종류의 안의 장소[六內入]. 일곱 종류의 세상: 일곱 종류의 식(識)의 거주. 여덟 종류의 세상: 여덟 종류의 세간적인 법. 아홉 종류의 세상: 아홉 종류의 중생의 거처. 열 종류의 세상: 열 가지의 감각장소[十入]. 열 두 종류의 세상: 열 두 종류의 감각장소. 열여덟 종류의 세상: 열여덟 종류의 요소[界]"로 나누어 설명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모든 형성된 것[有爲法]들을 세상(loka)이라 부르고 있다.


② 중생의 세상(satta-loka): 모든 중생들의 습성, 잠재성향, 행위, 성미, 그 중생이 눈에 때가 적은지 많은지, 근기가 예리한지 둔한지, 행실이 바른지 나쁜지, 유순한지 아닌지,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등등이 포함된다.

 

③ 공간의 세상(okāsa-loka)은 “하나의 세계는 종횡으로 각각 일천 백 2십만 3천 4백 5십 유순이다. 그 주위는, 일체의 주위는 3백6십만이 있고, 일만 3백 5십의 유순이다.”등등으로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1)의 우주나 세계는 이 공간의 세계를 뜻한다.


물론 이 세상(iha loka), 저 세상(para-loka) 등의 개념으로도 나타나고 일체 세상(sabba-loka)으로도 나타나고 욕계, 색계, 무색계를 세간(lokiya)이라 부르고 예류도에서 아라한과까지 사향사과 혹은 사쌍팔배를 출세간(lokuttara)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문맥에서 나타나는 것이 loka의 개념이다.



133. 감촉[觸]이라 번역한 뽓따바(phoṭṭhabba)는  몸의 기능[身根]의 대가 되는 몸의 감촉을 가리킨다. 그리고 아비담마에서 이 감촉은 땅의 요소[地大]와 불의 요소[火大]와 바람의 요소[風大] 그 자체라고 설명한다. 땅의 요소[地大]는 딱딱함이라 설명되는데 이것은 딱딱하고 부드러운 촉감으로 인식되며 불의 요소[火大]는 덥거나 차가움으로 느껴진다. 바람의 요소[風大]는 팽창이나 압박으로 느껴진다. 한편 물의 요소[水大]는 응집력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것은 감촉으로써는 느끼지 못하고 마노의 문[意門]으로만 느낄 수 있다. 영어로는 보통 touch, bodily impression, tactile impression이라고 한다.


그리고 감각접촉[觸]으로 번역되는 팟사(phassa)는 ‘닿음’을 뜻한다. 12연기 중 하나의 각지로 알려진 술어이다. 여기서 닿음이란 대상이 몸에 물질적으로 부딪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이것을 통해서 나타난 대상을 정신적으로‘만지는’것을 뜻하며 그로 인해 모든 인식과정을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감각접촉(觸)은 경에서도 기능(根 indriya), 대상(境 visaya), 식(識 viññaṇa)의 세 가지가 맞부딪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즉 마음을 대상과 맞부딪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서양에서도 이 phassa의 의미를 좀더 살려 정확성을 기하고자 할 때에는 sense contact 외에도 sense impression 이나 mental impression이라 번역하기도 한다.


정리를 하면 phoṭṭhabba(감촉)는 물질에 속하고 phassa(감각접촉)은 심소법(心所法)에 속한다. 즉 색· 성· 향· 미· 촉의 감촉(photthabba)은 물질이고 12 연기의 촉· 수· 애· 취· 유의 촉(phassa)은 심리현상이다. 감촉(phoṭṭhabba)과 감각접촉(phassa)은 중국에서 둘 다 촉(觸)으로 옮겼지만 완전히 다른 술어이다. 



134. 감촉(phoṭṭhabba)은 몸의 기능[身根]의 대가 되는 것이며 아비담마에서는 땅의 요소[地大]와 불의 요소[火大]와 바람의 요소[風大]라고 설명한다. 땅의 요소[地大]는 딱딱함이라 설명되는데 이것은 딱딱하고 부드러운 촉감으로 인식되며 불의 요소[火大]는 덥거나 차가움으로 느껴진다. 바람의 요소[風大]는 팽창이나 압박으로 느껴진다. 한편 물의 요소[水大]는 응집력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것은 감촉으로써는 느끼지 못하고 마노의 문[意門]으로만 느낄 수 있다.



135.「대념처경」(D22)에 나오는 전문은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이 도는 유일한 길이니, 중생들의 청정을 위하고, 근심과 탄식을 다 건너기 위한 것이며,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옳은 방법을 터득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념처(四念處)이다.”



136. 인식(想 saññā)은 빨리 경전과「청정도론」등의 주석서에서 상락아정(常樂我淨)에 대한 인식, 즉 항상하다, 즐겁다, 자아다, 깨끗하다는 네 가지 전도된 인식(vipallāsa-saññā)들로 정형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무상· 고· 무아· 부정이라는 유위법의 네 가지 특징을 전도되어 잘못 인식한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도 “① 무상(anicca)을 관찰하여 영원하다는 인식(nicca-saññā)을 버린다. ② 괴로움(dukkha)을 관찰하여 행복하다는 인식(sukha-saññā)을 버린다. ③ 무아(anatta)를 관찰하여 자아라는 인식(atta-saññā)을 버린다. ④ 더러움(asubha)을 관찰하여 깨끗하다는 인식(subha-saññā)을 버린다.”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35. 마노의 문[意門]과 식(識)의 관계



137. 앞에서 잠시 보았듯이 잠재의식, 존재지속심, 생명연속체, 유분(有分)등으로 해석되는 바왕가는 한 중생이 삶의 과정에서 생명이 끝날 때까지 그 연속성을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마음이다. 여섯 감각기관[六根]으로 대상이 나타나지 않으면 이 바왕가의 심찰나가 계속 흐른다. 우리의 인식과정은 모두 이러한 바왕가를 거쳐서 다음의 인식과정으로 넘어간다. 즉 인식과정에서 특정한 대상을 대상으로 일어난 마음은 일련의 인식과정을 거치고 난 뒤 사라진다. 그러면 바왕가의 마음으로 흘러 들어가서 어떤 대상을 대상으로 인식하는 과정이 전개될 때 까지 계속된다. 대상이 나타나지 않으면 재생연결식의 대상을 대상으로 한 바왕가가 지속되는 것이다.


이렇게 바왕가가 지속되다가 한 대상이 나타나면 바왕가는 움직이게 되는데 이것을‘바왕가의 동요(bhavaga-calana)’라 부르고, 움직인 바왕가는 바왕가의 상태에서 동적인 마음으로 전환된다. 이것을‘바왕가의 끊어짐(bhavaga-uppaccheda)’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바왕가가 끊어지면 마노[意]는 대상으로 전향을 하는 데 이것이 바로 전향(āvajjana)이다. 그리고 감각의 대상이 일어나 감각의 문으로 들어오는 그 순간에 하나의 바왕가가 흘러 들어가 버리게 되는데 그것을 지나간 바왕가(atīta-bhavaṅga)라고 한다.



138. 아비담마 칠론에는 다음과 같은 7가지 논서가 있다. 이들은 동시에 성립한 것이 아니라 B.C.250년 경부터 B.C.50년 경 사이에 순차적으로 성립하였다.


(1)「법집론(法集論 Dhammasagai)」

아비담마의 원천이 되는 책으로‘법의 모음[法集]’이라는 제명이 암시하듯이, 아비담마의 주제를 다 열거하고 있는 책이다. 「법집론」의 중요성은 특히 아비담마의 전체 골격을 드러내어 주는 그 논모(論母 Mātika)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법집론」의 논모(mātikā)는 선(善)· 불선(不善)· 무기(無記)로 시작하는 삼개조(tika)로 된 22개의 목록과 두개조(duka)로 된 100개의 목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들은 부처님 가르침의 전체 법수를 일관성 있게 개괄한 것이다. 이렇게 전체 마띠까를 열거하고 나서「법집론」은 선법(善法)과 불선법(不善法)과 무기법(無記法)의 순서로 욕계에서부터 시작해서 열거하고 있다.「법집론」은 비록 아비담마의 제일 처음 책이지만 꼭 제일 먼저 결집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이다. 오히려 아비담마에 관계된 다른 중요한 가르침을 결집하면서 이들을 요약하고 총괄하는 형식으로 제일 처음에 둔 책이라고 본다.


(2)「분별론(分別論 Vibhanga)」

위방가(vibhanga)는‘분석, 분해, 해체, 분별’로 번역되며, 부처님께서 설하신 주요 가르침을 무더기[蘊], 장소[處], 요소[界], 기능[根], 연기(緣起), 염처(念處)의 18가지 장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다. 이런 경향은 이미 『중부』등의 경에서도 다수 등장하고 있는데 부처님 재세시부터 법을 분류하고 분석하여 이해하는 것이 불교신자들의 가장 큰 관심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이 자연스럽게 분별론으로 결집된 것이다. 그래서 학자들은「분별론」의 원형은 칠론 중에서 제일 먼저 결집되었다고 간주하며 3차 결집이나 그 이전에 결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3)「계론(界論 Dhātukathā)」

‘요소(dhātu)들에 관한 가르침(kathā)’으로 번역되는「계론」은 여러 가지 법들이 무더기(蘊 khandha), 장소(處 ayatana), 요소(界 dhātu)의 세 가지 범주에 포함되는가 되지 않는가, 관련이 있는가 없는가를 교리문답 형식을 빌려서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짧은 1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논서는 이런 온(蘊)·처(處)·계(界)의 분석으로 자아가 있다는 그릇된 견해를 척파하기 위한 것이다.


(4)「인시설론(人施設論 Puggalapaññatti)」

제목이 암시하듯이 여러 형태의 인간에 대해서 일부터 열까지의 법수로서 논의하고 있다.

빤냣띠(paññatti)는 아비담마의 근본주제가 아닌 세속적인‘개념’이나‘명칭’을 뜻하기 때문에 중국에서 시설(施設)이라고 한역되었다. 여기에는 여러 유형의 인간이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법수에 따라서 모아져 있다.


➄「논사(論事 Katahātthu)」

아비담마 칠론 중에서 부처님이 설하지 않으신 것으로 전승되어온 책이다. 이 논서는 제 3차 결집을 주도한 목갈리뿟따 띳사(Moggaliputta Tissa) 장로가 다른 부파의 견해를 논파하고 상좌부의 견해를 천명하기 위해서 쓰여진 책으로 부파불교를 연구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자료이다.


➅ 「쌍론(雙論 Yamaka)」

 아비담마 전문술어의 애매하고 잘못된 사용을 해결하기 위해서 결집된 논서이며 문제 제기를 항상 쌍(yamaka)으로 하기 때문에 쌍론이라 이름 지었다.


➆ 「발취론(發趣論 Paṭṭhāna)」

 미얀마 아비담마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논서로 취급하고 있으며 총 5권의 25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법집론」에 나타나는 삼개조(tika)로 된 22개의 목록과 두 개조(duka)로 된 100개의 논모(論母) 전체에 대해서 24가지 조건(paccaya)을 적용시키고 있는 난해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139. 아비담마에 의하면 안식(眼識)과 이식(耳識)과 비식(鼻識)과 설식(舌識)과 신식(身識)은 각각 눈[眼]과 귀[鼻]와 코[鼻]와 혀[舌]와 몸[身]을 토대로 하여 일어난다. 그러나 이러한 감각기관을 토대로 하지 않는 마노[意]와 의식(意識)은 모두 심장토대(hadaya-vatthu)의 물질을 토대로 해서 일어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심장토대는 심장 속에 있는 피의 반만큼의 양에 해당하는 피라고 주석서는 설명하고 있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심장자체는 아니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현대 서양의 아비담마 학자들은 이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빨리 삼장에는 심장토대라는 말은 나타나지 않고 주석서 문헌에서부터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노[意]와 의식(意識)은 심장토대를 의지해서 일어난다는 것은 아비담마의 정설이다. 그리고 뇌는 상좌부 불교에서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한 기관이다.




37. 느낌[受]을 조건으로 갈애[愛]가 일어난다

 


140. 갈애(渴愛)는 딴하(taṇhā)의 역어로 갈증, 목마름 등을 의미한다. 즉 감각대상을 애타게 구하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주로 愛로 옮겼고 영어로는 craving으로 번역된다. 갈애는 일어나는 형태에 따라 ①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kāma-taṇhā) ②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vibha-taṇhā) ③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有愛 vibhava-taṇhā)의 셋으로 분류하기도 하고 눈, 귀 등의 일어나는 장소에 따라 6가지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18가지가 되고 안팎의 장소에 따라 6가지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18가지가 되고 안팎의 각각으로 36가지가 되고 다시 과거, 현재, 미래로 모두 108가지가 된다. 연기의 구성요소들 가운데서 생사유전(生死流轉)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것이 바로 갈애이다. 그래서 사성제(四聖諦)에서도 고의 원인을 밝히는 집성제(集聖諦)에서 갈애를 괴로움의 원인으로 들고 있는 것이다.




41. 마하띳사 장로 이야기



141. 이러한 사마타 수행을 부정관(不淨觀), 또는 부정상(不淨想 asubha-sañña)이라고 한다. 부정관은 모두 시체의 썩은 정도나 흩어진 정도를 가지고 다음의 열 가지로 나누고 있다.


① 부푼 것 ② 검푸른 것 ③ 문드러진 것 ④ 끊어진 것 ⑤ 뜯어 먹힌 것 ⑥ 흩어진 것 ⑦ 난도질 당하여 뿔뿔이 흩어진 것 ⑧ 피가 흐르는 것 ⑨ 벌레가 버글거리는 것 ⑩ 해골이 된 것


이 부정관은 특히 탐욕이 많은 사람에게 적합한 수행법이라고 잘 알려져 왔다. 그만큼 명상주제 가운데 가장 무섭고 어려운 주제라고 한다. 이러한 수행법은 주석서에서도 종종 언급되고 있을 정도로 부처님 당시부터 불자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던 것 같다.



 

43. 관찰과 소멸



142. 번뇌의 회전(kilesa-vaṭṭa), 업의 회전(kamma-vaṭṭa), 과보의 회전(vipāka-vaṭṭa)은 존재가 윤회를 거듭하면서 돌고 도는 방식을 드러낸다. 여기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회전은 번뇌의 회전(kilesa-vaṭṭa)이다. 무명으로 눈멀고 갈애로 인해 내몰려서 사람은 여러 가지 불선업과 선업을 짓는다. 그러므로 번뇌의 회전이 업의 회전을 일어나게 한다.이 업이 성숙하면 그것은 다시 과보로 익게 되고 그래서 업의 회전은 과보의 회전을 일어나게 한다. 이들 과보에 대한 반응으로 이미 무명에 휩쓸려있는 사람은 더 즐거운 경험을 즐기려는 갈애에 압도되어 자기가 이미 가진 즐거움에 집착하고 괴로운 것은 버리려고 애쓴다. 그래서 과보의 회전은 또 다른 번뇌의 회전을 낳는다. 이와 같이 세 가지 회전은 그것의 토대가 되는 무명이 위빠사나의 지혜와 출세간의 도로 제거될 때까지 쉼 없이 계속 돌아간다.「청정도론」(Vis.XVII)은 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세 가지 회전을 가진 존재의 바퀴는 쉼 없이 굴러간다. 여기서 상카라[行]와 존재[有]는 업(業)의 회전이고, 무명과 갈애와 집착은 번뇌의 회전이고, 식(識), 정신-물질[名色], 여섯 감각장소[六處], 감각접촉[觸], 느낌[受]은 과보의 회전이다. 세 가지 회전을 가진 존재의 바퀴는 번뇌의 회전이 끊어지지 않는 한 쉼이 없다. 왜냐하면 조건이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회전하면서 굴러간다고 알아야 한다.”



143. 다섯 가지 과보란 (1) 기능(根 indriya) (2) 대상(境 visaya) (3) 식(識 vinñāṇa) (4) 감각접촉(觸 phassa) (5) 느낌(受 vedanā)이다. 이를 다섯 가지 법[五法]이라고도 한다. 보는 경우에는 눈[眼], 형상[色], 안식[眼識]의 세 가지가 서로 맞부딪쳐서 시각접촉, 즉 감각접촉[觸]이 일어나고 이 감각접촉[觸]으로 말미암아 느낌[受]이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다섯 가지 법은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는 등의 다른 여섯 감각장소[六處]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된다.




44. 토대를 잘라냄



144. 감촉, 또는 좀 더 정확하게 몸의 감촉으로 옮긴 뽓따바(phoṭṭhabba)는 몸의 기능[身根]의 상대가 된다. 그리고 아비담마에서 감촉은 지(地), 화(火), 풍(風) 셋 중의 하나라고 설명한다.



145. 잠재성향으로 번역한 아누사야(anusaya)는 ‘따라 누운’이라는 문자적인 뜻에서 무시(無始)이래로 중생의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는 성향을 말한다. 그래서 중국에서 수면(隨眠)으로 옮겼고 영어로는 underlining tendency, dormant disposition등이라 한다.


 주석서에“자기가 속해있는 정신적인 흐름에 따라 누워 있다가 적당한 조건을 만나면 표면으로 드러나는 번뇌이다.”라고 하듯이 아누사야(anusaya)는 언제라도 튀어 나올 준비를 갖추고 있다가, 적절한 자극이 가해지면 겉으로 표출되고 자극을 주는 힘이 사라지면 언제라도 다시 잠복 상태로 되돌아가 버린다. 즉 아누사야라는 번뇌는 출세간의 도에 의해 소멸하지 않는 한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종류의 불선법(不善法)은 다 아누사야에 포함된다. 그중에서도 ➀ 감각적 욕망의 잠재성향(kāmarāgānusaya), ➁ 존재에 대한 욕망의 잠재성향(bhavarāgānusaya) ➂ 적의의 잠재성향(paṭighānusaya) ➃ 자만의 잠재성향(mānānusaya) ➄ 사견의 잠재성향(diṭṭhānusaya) ➅ 회의적 의심의 잠재성향(vicikicchānusaya) ➆ 무명의 잠재성향(avijjānusaya)의 7가지가 가장 두드러진 것이다.


「청정도론」(Vis.XXⅡ.73)은 이들 잠재성향이 어떻게 도에 의해서 버려지는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사견의 잠재성향과 의심의 잠재성향은 첫째 지혜(예류도의 지혜)로 버린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잠재성향과 의심의 잠재성향은 둘째 지혜(일래도의 지혜)로 버린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잠재성향과 적의의 잠재성향은 세째 지혜(불환도의 지혜)로 버린다. 자만의 잠재성향과 무명의 잠재성향은 네 번째 지혜(아라한도의 지혜)로 버린다.”




45. 번뇌와 알아차리지 못함



146.『증지부』주석서(AA.i.16f)에 나오는 굿띨라(Guttila)와「굿띨라 본생경(Guttila Jātaka)」(J.243)에 나오는 굿띨라와는 아마도 다른 사람인 듯하다. 왜냐하면 본생경에 나오는 굿띨라는 눈먼 노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일부러 결혼하지 않은 악사로 나오기 때문이다.




49. 감각적 즐거움의 토대



147.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sīlabbata-parāmāsa-upādāna)과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atta-vāda-upādāna)을 말한다.



148. 불가지론(不可知論)이란 초경험적(超經驗的)인 것의 존재나 본질은 인식 불가능하다고 하는 철학적인 입장을 가리킨다. 인도에서는 육사외도(六師外道)의 한 사람인 산자야(Sañjaya)가 주장한 학설 이였는데 마하시 사야도는 아마도 아지따로 혼동하신 듯하다. 아무튼 산자야는 내세(來世)가 존재하느냐, 선악의 과보는 존재하느냐는 형이상학적 문제에 관하여 일부러 애매하게 대답함으로써 확정적인 대답을 피하였다. 그는 사리뿟따(Sāriputta) 존자와 목갈라나(Moggallāna) 존자의 옛 스승이었다.



 

50. 바른 견해[正見]



149. 재일(齋日)로 번역한 원어는 우뽀사타(uposatha), 또는 우뽀사타디와소(uposatha-divaso)이다. 포살일이라고도 하며 영어로는 fasting day, Sabbath day라고 한다. 부처님 시대부터 불교신자들은 초하루나 보름이나 그믐 등의 정해진 날에 절에 가서 8계나 10계를 지키면서 자신을 다스리고 공덕을 쌓았다. 그리고 비구들은 이날 한데 모여서 계목(戒目 pātimokkha)을 암송하면서 잘못을 참회하였다. 특히 이러한 날 지키던 8계를 중국에서는 8관재계(八關齋戒)라 하였고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까지는 철저하게 지켜지던 풍속이었다.



 

51. 저 세상을 봄



150.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宿命智 pubbe-nivāsa-anussati-ñāṇa)는 여섯 가지 신통지(六神通)가운데 네 째 지혜로써 사선(四禪)을 토대로 하여 일어난 지혜이기 때문에 원하기만 하면 수십만 생 이전도 기억할 수 있지만 이 태어남을 기억하는 지혜(jātissara-ñāṇa)는 이러한 사선(四禪)을 토대로 한 신통지가 아니기 때문에 제한적으로만 전생을 기억할 수 있는 지혜이다. 그러므로 사선(四禪)의 체험이 없이도 갑자기 생길 수도 있고 주석서에서는 추론(takka)에 의해서도 생길 수 있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이 태어남을 기억하는 지혜(jātissara-ñāṇa)는 경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주석서와 복주서 문헌에 나타나고 있다.




53.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



151. 『중부』「견서계경(犬誓戒經 Kukkuravatika Sutta)」(M57)에서 부처님은 이 서계를 실천하는 세니야에게 “완전하고 중단됨이 없이 개의 서계(誓戒)를 닦고, 완전하고 중단됨이 없이 개의 마음을 닦고, 완전하고 중단됨이 없이 개의 행동거지를 닦고 나서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는 개로 태어난다. 만일 그가‘이런 버릇과 서계와 고행과 청정범행으로 신이 되거나 다른 낮은 신이 될 것이다.’라는 견해를 가진다면 이것은 그의 잘못된 견해일 뿐이다.”라고 말씀하셨다.

  



54. 꼬라캇띠야 이야기



152. 릿차위(Licchavī)는 웨살리(Vesāli)를 수도로 한 공화국체제를 갖춘 왓지국(Vajji)을 대표하는 종족의 이름이다. 왓지국은 몇몇 부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부처님 당시에는 릿차위가 강성하여 경전에서는 릿차위와 왓지는 동일시되다시피 하고 있다. 릿차위들은 한 사람이 아프면 모두가 문병을 갈 정도로 단결력이 있었고 화려한 옷을 입고 화려한 마차를 타고 다녔기 때문에 부처님은 삼십삼천의 천신들과 같다고 하셨고, 그들의 공화국 체제를 승가가 퇴보하지 않는 것과 견줄 정도로 칭송하였다.



153. 수낙캇따(Sunakkhatta)의 이야기는 『장부』「청정경(Pāṭika sutta)」(D.24), 『중부』「수낙캇따경(Sunakkhatta Sutta)」(M105),『소부』「로마함싸 본생경(Lomahamsa Jātaka)」(J.94)등에 보인다. 그는 밖으로 남들이 행하는 신통, 기적, 고행이나 우주의 기원 따위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지금 여기(here and now)에서 괴로움을 소멸하고 열반을 실현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성에 차지 않았고 제대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결국 그는 환속을 하고 부처님을 비방하면서 돌아다녔다. 한편 수낙캇따(Sunakkhatta)는 개(suna)-꼬리(khatta)라는 뜻이다.



154. 타심통(他心通 paracitta-vijānana)이란 남의 마음을 아는 지혜로 육신통(六神通)의 하나이다. 육신통은 ① 신족통(神足通) ② 천이통(天耳通) ③ 타심통(他心通) ④ 숙명통(宿命通) ⑤ 천안통(天眼通) ⑥ 누진통(漏盡通)이 있다.



155. 여래의 제자라고 의역한 삭까야뿟띠야(Sakkya-puttiya)는 Sakya-puttiya(사꺄의 아들)에다 어미 -iya를 붙여서 만든 것으로 ‘사꺄의 아들에 속하는’ 이라는 뜻이다. 물론 여기서 사꺄의 아들은 석가족(Sakkya) 출신의 성자인 석가모니 부처님을 뜻한다. 이미 초기교단에서부터 비구들은 자신을 이렇게 불렀던 것 같고 이런 전통은 중국에도 고스란히 전해져 중국에서는 출가자의 성을 모두 석씨(釋氏)로 바꾸어서 부르고 있고 불교교단을 석씨문중(釋氏門衆)이라고 한다.



156.『장부』주석서(DA.i.312-313)에 따르면 수낙캇따(Sunakkhatta)는 천상의 모습을 보고자 해서 세존께 그 방법을 여쭈었다. 세존께서는 그 방법을 가르쳐 주셨으며 그는 그대로 삼매를 닦아서 신통을 얻어 신들의 모습은 볼 수 있었다. 그런 다음에 천상의 소리를 듣고자 하여 세존께서 알려주신 대로 하였지만 전생에 계를 지닌 비구의 귀를 때려 귀머거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천상의 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한다.



157.『장부』주석서(DA.iii.822)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어떻게 [죽은 자가] 말을 하는가? 부처님의 위력에 의해서이다. 세존께서는 아수라의 모태로부터 꼬락캇띠야를 데리고 와서 몸에 풀어놓아서 말을 하게 하셨다. 혹은 그 시신으로 하여금 [스스로] 말을 하게 하셨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영역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55. 다른 계율과 의식에 의한 수행



158. 계율과 의식[戒禁]으로 옮긴 실라밧따(sīlabbata)는 종교적인 금계와 의례 ․ 의식을 지킴으로써 청정해질 수 있고 해탈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을 말하고,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의례 ․ 의식만이 옳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이는 중생을 삼계(三界)에 붙들어 매놓고 있는 열 가지 족쇄(saṃyojana) 가운데 세 째 족쇄이며 네 가지 집착(upādāna) 중의 하나이다. 성자의 초보 단계인 예류도에 들면 유신견(sakkāya-diṭṭhi), 의심(vicikicchā)과 같은 족쇄와 함께 뿌리가 뽑힌다.




56.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



159. 유행승(遊行僧)으로 옮긴 빠리바자까(paribbājaka)는 부처님 제자를 제외하고 집을 떠나 수행하는 출가사문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영어로는 wondering ascetic이라고 한다. 그래서 『중부』주석서(MA.ii.7)에서는“재가의 속박을 버리고 출가한 자”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편 사명외도(邪命外道 Ājīvika), 니간타(Nigantha), 나체 수행자의 무리 등은 paribbājaka라고 표현하지 않고 그들에 해당하는 이름을 부르고 있으며 그 외에 별다른 특징이나 큰 집단을 이루지 않은 일반 출가자를 이렇게 부르고 있다. 한편 경에서 비구들의 출가를 빱빳자(pabbajjā)라 표현하여 일반 유행자에 관계된 빠리바자까(paribbājaka)라는 이 용어와는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58. 멘다까 이야기



160. 마가다(Magadha)는 부처님 당시 인도 중원의 16국 가운데서 꼬살라(Kosala)와 더불어 가장 강성했던 나라이며 결국은 16국을 통일한 나라이다. 수도는 라자가하(Rajāgaha)였으며 빔비사라(Bimbisāra) 왕과 그의 아들 아자따삿뚜(Ajātasattu)가 부처님 재세 시에 왕위에 있었다. 이 마가다국이 나중에 인도를 통일한 마우리야(Maurya) 왕조로 발전이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이 마가다지방의 언어인 마가디로 법을 설하셨고 상좌부에서는 이 마가디가 바로 빨리어라고 하고 있다. 




61. 바른 선행과 그릇된 선행



161. 바른 법[正法]이라 번역하는 삿담마(saddhamma)는 ‘있는, 존재하는’이란 문자적인 뜻을 지녔다. 이 sad/sat는 주로 합성어의 앞에 놓여서‘바른, 참다운, 진실한’등의 의미로 쓰인다. 그래서 saddhamma는 ‘바른 법, 참된 법’을 뜻하며 주석서들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 바른 법은 교학(pariyatti), 수행(paipatti), 통찰(paivedha)의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눈다. (1) 교학(pariyatti)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이 기록된 삼장(ti-piaka)을 공부하는 것이고, (2) 수행(paipatti)이란 계· 정· 혜 삼학을 닦는 것이며, (3) 통찰(paivedha)이란 출세간도를 통찰하고 성스러운 과를 증득하는 것이다.




64. 아자따삿뚜 이야기



162. 빔비사라(Bimbisāra) 왕은 15세에 왕위에 올라서 52년간을 왕위에 있었고, 부처님보다 5살이 위였다고 한다. 주석서(SnA.ii.386)에 따르면 빔비사라 왕은 세존께서 깨달음을 얻으면 제일 먼저 라자가하를 방문해 주시기를 청하였고 세존께서는 실제로 그렇게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세존께서 머물도록 지은 최초의 절이 죽림정사(竹林精舍)라고 알려진 웰루와나(Veḷuvana)이다. 이렇게 빔비사라 왕은 세존이 깨달음을 증득하신 때부터 아들 아자따삿뚜(Ajātasattu)에게 시해될 때까지 37년간을 부처님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불교가 인도 중원에 정착하는데 큰 기여를 한 왕이다. 하지만 부처님을 해코지하려는 데와닷따(Devadatta)에게는 이러한 빔비사라 왕은 걸림돌이었기 때문에, 데와닷따는 아자따삿뚜를 사주하여 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도록 사주했다. 그러나 이러한 음모는 사전에 발각되었고 대신들은 아자따삿뚜와 데와닷따 무리을 처단할 것을 빔비사라에게 권했다. 왕은 사람을 보내어 아자따삿뚜가 왕위를 탐내고 있음을 듣고는 순순히 왕위를 물려주었다. 하지만 데와닷따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아지따삿뚜에게 빔비사라 왕을 죽여야 한다고 계속 종용하였다. 하지만 무기로는 왕을 해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자 아자따삿뚜는 그를 굶겨 죽일 작정으로 뜨거운 감방에 가두어 두고 왕비(아자따삿뚜의 모친)외에는 아무도 방문할 수 없게 했다. 왕비가 갖가지 방법으로 음식물을 반입하자 마지막에는 그녀마저 왕을 방문하지 못하도록 했다. 하지만 왕은 방안에서 경행을 함으로써 그럭저럭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아자따삿뚜는 이발사를 보내서 왕의 발바닥에 상처를 내고 거기에 소금과 식초를 뿌렸다.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된 빔비사라는 죽어서 사대왕천(Cātummahārājika)에서 비사문천(毘沙門天 Vessavaṇa)을 모시는 자나와사바(Janavasabha)라는 야차(yakkha)로 태어났다고 한다.



163. 1차 결집은 불멸직후 7일째 되던 날 수밧다(Subhadda)라는 늦깎이 비구가 이제 부처님이 입멸하였으므로 더 이상 성가실 게 없어졌으니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충격적인 말을 들은 마하깟사빠 장로가 이대로 놔두면 교법(sāsana)은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우려하여 개최하게 된 것이다. 마하깟사빠는 아자따삿뚜 왕의 후원 하에 라자가하(Rājagaha)의 칠엽굴(七葉窟)에서 500명의 아라한 비구들을 모아 부처님의 모든 교설을 결집하였다. 아난다는 결집이 개최되기 전날까지도 아라한과를 얻지 못해 결집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가 결집이 개최되기 바로 전날 아라한이 되어 결집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1차 결집에서 부처님의 법을 모아 엮는데 매우 신중하게 하였음을 나타내어 주는 것이다. 여기서 결집이라 번역한 상기띠(saṇgīti)는 원래 합송(合誦)이라는 뜻이다. 이때 경은 부처님을 항상 가까이 모시던 아난다(Ānanda) 존자가 송출하고 율은 계율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우빨리(Upāli) 존자가 송출했다. 그리고 마하깟사빠는 이들에게 질문하는 역할을 하였다. 1차 결집에서는 적어도 율장의 경분별 부분과 경장의 4부 니까야는 확정이 되었을 것이고 논장은 성립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학자들의 의견이다. 아쇼까 대왕 재위시절에 결행된 3차 결집에서는 지금 현존하는 형태의 삼장이 완성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164. 지와까 꼬마라밧짜(Jīvaka Komārabhacca)는 부처님의 주치의(主治醫)로 잘 알려진 명의(名醫)였다. 그는 라자가하(Rājagaha)의 기녀(妓女)였던 살라와띠(Sāla-vati)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나자마자 광주리에 담아 쓰레기 더미 위에 버려졌다고 한다. 빔비사라(Bimbisāra) 왕의 아들이며 아자따삿뚜와 이복형제인 아바야(Abhaya)왕자가 이를 발견하고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가를 묻자, ‘그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jīvita)'라고 대답하여서 그의 이름이 지와까가 되었으며, 왕자(kumāra)에 의해서 양육되었다고 해서 꼬마라밧짜(Komārabhacca)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AA.i.216) 그는 자라서 자신의 출신에 대해서 알게 되자 아바야 왕자 몰래 딱까실라(Takkasilā)로 가서 칠 년 동안 의술을 배웠다고 한다. 공부를 마치고 라자가하로 돌아와서는 빔비사라 왕의 고질병을 치료하여 유명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왕과 궁중의 주치의로 임명되었고 부처님과 승가의 주치의 역할도 하였다. 아버지 빔비사라 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아자따삿뚜도 지와까를 주치의로 삼아서 가까이에 두었다. 지와까가 부처님을 치료한 일화는 율장과 주석서등에 나타나고 있다. 지와까는 예류과를 증득한 뒤 항상 하루에 두 번씩 세존께 인사드리러 갔으며 세존께서 머무시는 왕사성의 죽림정사(Veḷuvana)가 너무 멀어서 그가 소유하고 있던 망고 숲을 승가에 기증하여 부처님과 승가가 머물게 하였다고 한다.




65. 습관적인 업과 임종할 무렵에 지은 업



165. 계속해서 생각함이라 번역한 anussati는 중국에서는 수념(隨念)이라고 번역되었고 서양에서는 recollection, contemplation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청정도론」(Vis.VⅢ)에서는 다음과 같은 열 가지 계속해서 생각함[十隨念]으로 정리되어 있다.


 ① 부처님을 계속해서 생각함(佛隨念 buddhānussati) ② 법을 계속해서 생각함(法隨念 dhammānussati) ③ 승가를 계속해서 생각함(僧隨念 sanghānussati) ④ 계를 계속해서 생각함(戒隨念 sīlānussati) ⑤ 보시를 계속해서 생각함(cāgānussati) ⑥ 천신을 계속해서 생각함(天隨念 devatānussati) ⑦ 죽음을 계속해서 생각함(死隨念 maraṇasati) ⑧ 몸에 대한 알아차림(身隨念 kāyagatā-sati) ⑨ 들숨날숨에 대한 알아차림(出入息念 ānāpānasati) ⑩ 고요함을 계속해서 생각함(寂靜念 upasamānussati)이다.



166. 사리뿟따(Sāriputta) 존자는 날란다 지방의 큰 바라문 가문에 태어났으며 출가전 이름은 우빠띳사(Upatissa)라고도 불리었다. 사리뿟따라는 이름은 존자의 어머니 이름이 사리(Sārī)였기 때문에 사리의 아들이란 뜻인 사리뿟따로 불리게 되었다. 목갈라나(Moggalāna) 존자와는 어렸을 적부터 친한 친구였으며 어느 날 라자가하(Rājagaha)의 산마루 축제[山頂祭]를 보러 갔다가 갑자기 삶의 덧없음을 느끼고는 함께 출가하여 사문이 되었다.


처음 출가해서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을 펴던 산자야 벨랏티뿟따(Sañjaya Belaṭṭhiputta)의 제자였는데 다섯 비구가운데 한 분이었던 앗사지(Assaji) 존자가 읊는 게송의 첫 번째 두 구절을 듣고 예류과를 얻었다. 그리고는 그 게송을 도반인 목갈라나에게 전해주어 그도 예류과를 얻게 하고는 함께 승가에 들어와 부처님의 상수제자가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사리뿟따 존자와 목갈라나 존자를 비구들이 본받아야 할 이상적인 제자라고 선언하셨다.(S.ii.235; A.i.88). 부처님은 「제분별경(諸分別經 Saccavibhanga Sutta)」(M.iii.248)에서 두 상수제자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설명하셨다.“사리뿟따는 아이를 낳는 어머니와 같고 목갈라나는 갓난아이를 돌보는 유모와 같다. 사리뿟따는 제자들을 가르쳐 예류과에 들게 하고 목갈라나는 더 높은 단계로 이끌어 올려준다.”세존께서는 두 상수제자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로 하여금 승가의 일을 분담하여 보살피도록 하시고, 여래가 안 계실 때에는 그들이 승가의 일을 책임지도록 하셨다. 또한 부처님은 긴요한 상황이 생기면 특별한 임무를 두 상수제자에게 부여하시는 일이 자주 있었다. 예컨대 데와닷따(Devadatta)가 웨살리(Vesāli)출신의 갓 출가한 비구들을 꼬드겨서 상두산(象頭山)으로 데리고 가자, 부처님께서는 두 상수제자를 보내어 데와닷따가 잠시 잠들어 있는 틈을 타 500명의 비구들을 설득하여 모두 되돌아오게 하셨다. (Vin.2:199-200)


주석서에 따르면 사리뿟따 존자가 마지막 생에 고따마 부처님의 상수제자가 된 것은 1아승지 10만겁 전 아노마닷시(Anomadassī) 부처님때 사라다(Sarada)라는 바라문이었을 때 목갈라나 존자의 전신인 시리왓다나(Sirivaddhana)와 함께 미래 부처님의 상수제자가 되고자 원을 세웠기 때문이라고 한다.「본생경」을 보면 사리뿟따는 보살과 함께 생사윤회를 반복하면서 위기에 처한 보살을 여러 번 구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보살이 바라밀을 완성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밀린다왕문경」에 따르면 사리뿟따 존자는 수천 수만 생 동안 보살의 아버지, 할아버지, 삼촌, 형, 아들, 조카, 그리고 친구였다고 한다.


부처님은 종종 법의 주제만 제시하고, 그러면 사리뿟따 존자는 그 주제에 대해 상세하게 설법을 하였고 그러한 법문은 부처님의 최종 승인을 얻었다고 한다.(M.i.13; iii.46, 55, 249). 그래서 법의 사령관(法將 Dhammasenāpati)라고 불렸다. 상수제자로서 사리뿟따가 한 주요한 임무는 불법을 체계화하는 일이었고 이것이 아비담마의 시작이었다. 부처님께서는 삼십삼천에 임하여 마야부인을 위시한 천신들에게 아비담마를 설하셨다. 그때 부처님은 제석(Sakka)의 보좌에 여래의 표상으로 만들어 놓고 그로 하여금 계속 법문을 하게하고 히말라야의 아노아따(Anoatta) 호수로 매일 내려 오셔서 목욕을 하시고 쉬시곤 했다. 이때 사리뿟따가 와서 부처님에게 아비담마를 듣고서 다시 이를 오백 명의 제자들에게 전수하였다고 한다. 사리뿟따의 뛰어난 지혜는 부처님께서 삼십삼천에서 상까사(Saṅkasa)로 내려온 뒤에 회중들에게 각각의 지적 수준에 맞는 질문을 하셨는데 마지막 최상의 질문은 아무도 답변하지 못하고 오직 사리뿟따만이 답변을 할 수 있었던 데에서 잘 드러난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사리뿟따를 큰 지혜를 가진 이들 가운데 으뜸이라고 선언하셨고(A.i.23), 지혜에 있어서 여래 바로 다음이라고 칭찬하셨다.(SA.ii.45)


법의 스승으로서 누렸던 사리뿟따의 위대한 명성은 사후에도 존속되어 후대의 불자들 사이에서 하나의 귀감이 되고 있다.「밀린다왕문경」에서 밀린다 왕은 나가세나 존자를 사리뿟따 존자와 비교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 부처님 문하에서 법의 사령관 사리뿟따 존자를 제외하고는 존자만큼 질문에 잘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소."(Miln.420)


사리뿟따는 제자를 가르칠 때에도 한량없는 인내심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는 제자들이 예류과를 성취할 때까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일깨우고 가르치곤 했다. 그런 다음에라야 그는 새 제자를 받아들였다. 그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라 아라한과를 성취한 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사리뿟따 존자는 지혜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한량없는 자비심을 가졌다. 또한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데도 으뜸이었다.「로사까 본생경(Losaka Jātaka)」(J.41)에 따르면 어느 날 사왓티(Sāvatthi) 시내를 탁발하다가 남의 집 하수도에서 밥알을 주워 먹는 로사까 띳사(Losaka-tissa)를 보고 매우 불쌍히 여겨서 그를 승원에 데리고 와 손수 목욕을 시키고 출가시켰다.「까란디야 본생경(Kāraṇḍiya Jātaka)」(J.356)에 따르면 사리뿟따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어부와 사냥꾼처럼 생계 때문에 도저히 오계를 지킬 수 없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오계를 주어서 바른 도로 인도하려고 노력했다.


존자는 또한 설법에 있어서도 누구보다 으뜸이었다. 임종의 병상에 누워 있던 아나따삔디까(Anātha-piṇḍika)에게 심오한 설법을 하였고, 존자의 설법에 감동한 아나타삔디까는 눈물을 흘리며 이에 견줄만한 법문은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노라고 고백했다.(M143).


사리뿟따 존자는 또한 한번 결의한 것은 두 번 다시 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때 신자들이 비구들을 위해 과자를 가져왔는데 같이 있던 젊은 비구가 탁발을 나가 자리에 없었으므로 신자들은 그 비구를 위해 남겨놓은 여분의 과자마저 존자에게 마저 드시게 하였다. 그때 젊은 비구가 돌아와 자신 몫의 과자가 없어진 것을 알고는 불평을 하였다. 사리뿟따 존자는 무안하여 두 번 다시는 그 과자를 입에 대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고 그 이후로는 평생 과자를 들지 않았다고 한다.(J.69)


사리뿟따 존자는 감사하는 마음과 친절, 남을 돕는 마음과 참을성 같은 훌륭한 성품 덕분에 출가자로서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깊은 교우관계를 많이 맺을 수 있었다. 그 중에 또 다른 한분의 상수제자인 목갈라나와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이자 도반으로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 친분은 부처님의 말년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사리뿟따 존자의 어머니는 삼보에 대해서 내내 증오심을 품어왔던 고집 센 바라문이었다. 입멸할 때가 왔음을 안 존자는 부처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는 고향마을 날라까(Nālaka)로 돌아와서 자신의 어머니에게 설법을 하여 예류과를 얻게 하고는 태어난 방에서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보름 뒤 목갈라나도 입적하였으며, 그로부터 반년 후에 부처님께서 무여의열반에 드셨다고 한다.


19세기 중엽 영국의 커닝햄(Cunningham)에 의해 인도의 산치(Sanchi) 대탑에서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의 사리가 들어있는 두 개의 석재 사리함이 발굴되었고 두 존자의 사리중 일부가 1950년 10월 20일 미얀마에 전해져 제6차 결집의 사적지에 세워진 양곤의 까바예(Kabaye) 파고다에 안치되었다.



167. 주석서(DA.i.312-313)에 따르면 수낙캇따는 천상의 모습을 보고자 해서 세존께 그 방법을 여쭈었다. 세존께서는 그 방법을 가르쳐 주셨으며 그는 그대로 삼매를 닦아서 신통을 얻어 신들의 모습은 볼 수 있었다. 그런 다음에 천상의 소리를 듣고자 하여 세존께서 알려주신 대로 하였지만 전생에 계를 지닌 비구의 귀를 때려 귀머거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천상의 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한다.



168. 깨달음의 구성요소로 옮긴 봇장가(bojjhaṅga)는 bodhi(覺, 깨달음) +  aṅga(分, 요소, 인자)의 합성어이다. 그래서 깨달음으로 이끄는 요인, 또는 통찰지를 이끌어 내는 인자를 의미한다. 중국에서는 칠각지(七覺支)로 옮겼고 영어로는 seven factors of enlightment라고 한다. 이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는 다음과 같다.


(1) 염각지(念覺支 sati-sambojjhaṅga) -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각지

(2) 택법각지(擇法覺支 dhammavicaya-sambojjhaṅga) - 법을 검토하는 깨달음의 각지

(3) 정진각지(精進覺支 viriya-sambojjhaṅga) - 정진의 깨달음의 각지

(4) 희각지(喜覺支 pīti-sambojjhaṅga) - 희열의 깨달음의 각지

(5) 경안각지(輕安覺支 passaddhi-sambojjhaṅga) - 편안함의 깨달음의 각지

(6) 정각지(定覺支 samādhi-sambojjhaṅga) - 삼매의 깨달음의 각지

(7) 사각지(捨覺支 upekkhā-sambojjhaṅga) - 평온의 깨달음의 각지



169. 무거운 업, 임종에 다다라 지은 업, 습관적인 업의 세 가지 업이 없으면 이미 지은 업이 재생연결시에 그 기능을 발휘한다.「청정도론」(Vis.XIX.15)에는 업의 성숙하는 순서에 따른 설명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다른 네 가지 업이 있다. 무거운 업, 습관적인 업, 임종에 다다라 지은 업, 이미 지은 업이다. 유익한 것이든 해로운 것이든 무겁거나 가벼운 업 중에서 어머니를 살해한 업이나 혹은 고귀한 경지(즉 선의 증득)의 업이 무거운 업이고, 이것이 먼저 과보를 준다. 그와 마찬가지로 습관적인 것과 습관적이지 않은 것 중에서 좋은 행위이든 나쁜 행위이든 습관적인 것이 먼저 과보를 준다. 임종에 다다라 지은 업이란 임종 시에 기억나는 업이다. 임종에 가까운 사람이 그 업을 기억할 수 있다. 그것에 따라 태어난다. 이 셋에 포함되어 있지 않고 자주 반복하여 지었기 때문에 이미 지은 업이라 한다. 앞의 세 가지 업이 없을 때 이것이 재생연결을 일으킨다.”(Vis.XIX.15)




67. 슬픔과 탄식



170. 땅에 붙어사는 신(地神 bhumma-deva)은 천상에 거주하지 않고 외딴 곳에 있는 숲이나 산이나 사당 등을 의지해서 사는 신을 가리킨다. 이들 가운데서 힘이 강한 신들은 두 가지 원인이나 세 가지 원인을 가진 재생연결식을 가진다. 그들은 대개 공덕이 모자라서 어렵사리 살아가는 저열한 신들을 포함한 회중들을 거느리기도 한다. 레디 사야도는 이런 공덕이 모자라는 저열한 신들이 바로 원인 없는 재생연결식을 가지고 태어난 신들이라고 말한다,



171. 위니빠띠까(vinipātika)천신은 위니빠띠까 아수라(vinipātika-asura)라고도 하는데, 타락한 아수라라는 뜻이며 그들은 사악도에 속하는 저급한 아수라가 아니라 선처에 속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들은 노란색, 흰색, 검은색, 황금색, 검푸른 색등이고 몸도 크거나 작거나 길어서 다르다. 인식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세 가지 원인을 가진 자가 있고, 두 가지 원인을 가진 자가 있고, 원인 없는 인식을 가진 자가 있다. 이들은 천신들처럼 큰 위력을 가지지는 못하였으며 가난한 인간들처럼 위력이 없고 겨우 몸을 가리는 천조차도 얻기 힘들고 괴로움에 압도되어 머문다. 어떤 자들은 상현(上弦)에는 고통을 받고 하현(下弦)에서 즐거움을 얻는다고 한다.(AA.iv.25~26) 이들은 마을이나 마을 가까운 곳에 살면서 마을 사람들이 버린 음식 등을 먹고 사는 정령들로 음식을 구하지 못하면 사람들을 괴롭히거나 홀린다고 한다.



172. 마하깟싸빠(Mahākassapa) 장로는 마가다(Magadha)의 마하띳타(Mahāttha)에서 바라문으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삡빨리(Pippali)였다. 그는 결혼을 원치 않았으나 부모의 강권에 못 이겨 자신이 만든 조각과 똑 같은 여자가 있다면 결혼을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부모들은 그 요건을 만족시키는 밧다 까삘라니(Bhaddā Kāpilānī)라는 처녀를 싸갈라(Sāgala)에서 발견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혼 상대자라고 만인이 인정해야 한다.’는 편지를 주고받다가 편지를 들켜 빼앗겼다. 양가의 부모는 마침내 그들을 강제로 결혼시켰다. 그러나 서로의 합의로 첫날밤에 잠자리를 꽃줄로 갈라놓고 각기 따로 잠을 잤다. 삡빨리는 엄청난 부자였다. 그는 60여개의 호수를 소유했고 정원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인근 40여개 마을에 흩어져 살았다. 어느 날 그는 쟁기질하는 논에 갔다가 벌레가 새에 쪼여 먹히는 것을 보고 그것이 자신의 죄임을 직감하고 출가를 결심하였다. 동시에 아내 밧다도 까마귀들이 곤충을 잡아먹는 것을 보고 출가를 결심했다. 그들은 함께 머리를 자른 뒤 발우를 손에 들고 우는 하인들을 뒤로 한 채 집을 떠났고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그 후 가섭은 죽림정사(Veḷuvana)의 향실에서 부처님을 뵙고 먼저 제자가 되었고 밧다는 나중에 빠자빠띠고따미(Pajāpati Gotamī)의 비구니 교단에 출가했다. 마하깟사빠는 부처님의 반열반 후 교단을 이끌고 1차 결집을 주도한 분으로 두타(頭陀)제일이라고 불렸다.



173.『중부』 주석서(MA.iv.170)에 따르면 천신들에게 죽음이 임박했을 때 (1) 화환이 시들고 (2) 옷이 낡고 (3) 겨드랑이에서 땀이 나고 (4) 몸에 나쁜 색깔이 나타나고 (5) 신이면서 신의 자리에 앉아있지 못하는 것의 5가지 조짐이 나타난다고 한다.




68. 수브라흐마 천신 이야기



174. 주석서(SA.i.88f.; DA.iii.750; MA.i.190f)에 따르면 수브라흐마(Subrahma)는 삼십삼천의 천신이었는데 하루는 1천명의 요정들을 거느리고 난다와나(Nandavana)로 놀러 갔다. 5백 명의 요정들은 나무아래에 앉아 있었고, 다른 5백 명의 요정들은 나무위에 올라가서 화환을 던지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나무위에 있던 5백 명의 요정들은 순식간에 사라져서 무간지옥에 태어났다. 수브라흐마는 사라진 5백 명의 요정들이 모두 무간지옥에 태어났음을 발견하고 자기 운명을 조사해보니 자신도 7일밖에 더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려움과 슬픔에 휩싸인 수브라흐마는 위안을 얻기 위해 부처님을 찾아왔고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예류과를 얻었다.


“깨달음의 구성요소[七覺支]와 두타행(頭陀行)이외에는

감각기능[根]을 단속하는 계 이외에는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것[出離] 이외에는

중생들의 안전을 나는 보지 못하노라.”(S.i.53)


175. 두타행(頭陀行 dhutaṅga)은 「청정도론」(Vis.Ⅱ)에 상세히 나오는데 다음과 같은 13가지가 있다. 부처님 당시 이 두타행에 으뜸인 분이 바로 제 1차 결집을 주도한 마하깟사빠(Mahā-kassapa)였다.


(1) 분소의(糞掃衣)를 입는 수행

(2) 삼의(三衣)만 수용하는 수행

(3) 탁발음식만 수용하는 수행

(4) 차례대로 탁발하는 수행

(5) 한 자리에서만 먹는 수행

(6) 발우의 탁발음식만 먹는 수행

(7) 나중에 얻은 밥을 먹지 않는 수행

(8) 숲에 머무르는 수행

(9) 나무 아래 머무는 수행

(10) 노천에 머무는 수행

(11) 공동묘지에 머무는 수행

(12) 배정된 대로 머무는 수행

(13) 눕지 않는 수행



176. 네 가지 바른 노력으로 옮긴 삼마빠다나(sammā-ppadhāna)는 사정근(四精勤)으로 번역했고 영어로는 four effort, four supreme efforts라고 한다. 이 사정근에는 (1) 이미 일어난 불선법을 버리려는 노력 (2)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선법을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노력 (3)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한 법을 일으키려는 노력 (4) 이미 일어난 선한 법을 증장시키려는 노력 등 네 가지가 있다. 이 사정근(四精勤)은 팔정도의 6번째인 바른 정진(正精進)의 내용이며, 다섯 가지 기능(五根 pañca-indriya)과 다섯 가지 힘(五力 pañca-bala)의 두 번째인 정진(viriya)의 내용이기도 하다.



177. 불교에 따르면 욕계 천상의 신들은 아내를 거느리고 있지만 범천의 신들은 이미 거친 감각적 욕망을 제거했기 때문에 아내가 없으며 성별의 구분도 없다. 그래서 독신수행을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라고 한다. 이렇듯 brahma-cariya의 일차적인 의미는 성행위를 완전히 여읜 삶을 뜻하며, 이것이 출가 수행자의 청정하고 거룩한 삶을 가리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70. 재생의 원인이 되는 사견에 대한 집착



178. 「아귀사(餓鬼事)」에 따르면 난다까(Nandaka)는 불멸후 200년경 서인도의 수랏타(Surattha)국의 삥갈라(Piṅgala) 왕의 장군이었다. 그는 단멸론자(斷滅論者)였는데 죽어서 윈드야(Vindhayā) 숲에 사는 아귀(peta)로 태어났다. 하지만 불심 깊은 그의 딸 웃따라(Uttarā)가 한 아라한 비구에게 아버지 이름으로 보시를 하였다. 그 순간 난다까는 천상의 행복을 얻게 되었다. 그러자 난다까는 삥갈라왕이 단견을 버리게 하려고 담마아소카(Dhamma-Asoka) 왕과 회담을 마치고 돌아오는 왕을 자신의 처소로 초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라고 훈계했다고 한다.(Pv.iv.3; PvA.244ff)



179. 「청정도론」(Vis.XVII.265)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다른 사람은 욕계의 행복한 존재나 색계와 무색계 존재 가운데 어느 한 곳에서 이 자아라는 것이 끊어질 때 모든 것은 완전히 끊어진다는 단견을 가져 거기에 이르는 업을 짓는다. 그의 업이 업으로서의 존재[業有]이고, 업으로부터 생긴 무더기들이 재생으로서의 존재[生有]이다. 인식을 가진 존재 등은 이 안에 포함된다. 견해에 대한 집착은, 그 종류를 분석하고 또 종합하여 설명한 욕계, 색계, 무색계의 세 존재 모두에게 조건이 된다.”(Vis.XVII.265)



180. 카스트제도는 인도의 독특한 봉쇄적 신분계급이다. 카스트(caste)라는 용어의 어원은 라틴어의 castus(순혈)와 포르투갈어의 casta(혈통)로부터 만들어진 말이라 한다. 인도에서는 베다시대 이래로 출생에 의해 사회적 신분과 직업 등 일체를 카스트에 따라 구분하여 규정함으로써 특이한 사회계급 제도를 구성하고 있다. 고대사회에서는 사제(司祭)인 바라문(brāhmaṇa), 왕후나 무사인 찰제리(kṣatriya), 농· 공··상업에 종사하는 서민인 바이사(vaiśa), 노예인 수드라(śūdra)의 4성의 구별이 있었지만, 점차로 가지를 쳐서 부(副)카스트가 생기고 잡종계급도 생겨 종교적, 역사적, 사회적으로 복잡한 모습을 나타내게 되고 종족, 종교, 직업 등에 따라서도 가지를 쳐서 현재에는 그 세분된 수가 2천 내지 3천에 이른다고 한다. 다른 카스트 사이에는 식사와 결혼이 금지되고, 극히 복잡하고 엄격한 풍습과 계율을 지킨다. 현대에는 바라문 계급은 그 특성을 고집하고, 크샤트리아는 서북 인도의 라지푸트족 및 지주계급 등에 그 모습을 전하고, 바이샤는 일반 상업자에 의해 대표되고 있다. 또 카스트에도 들지 못하는 최하층 계급으로서 불가촉천민(outcaste)이 있는 바, 인도 독립 후로는 평등한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아 이 불가촉천민의 출신자로서 지도적 역할을 떠맡고 있는 사람도 많다. 카스트제도는 현재 인도공화국의 헌법에 의해 부정되고 있지만 농촌에서는 아직도 실제문제로 남아 있어 인도의 근대화를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으며, 이 카스트 문제의 해결이 인도국가의 발전과 국민의 번영의 관건이 되어 있다.



181. 짠달라(caṅḍāla)는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을 말한다.



182. 탁실라(Taxila)는 현재 파카스탄 라왈핀디 부근의 지명으로 빨리 경전에서는 딱까실라(Takkasilā)로 나온다.「본생경」은 이곳을 간다라 왕국의 수도이자 학문의 큰 중심지로 언급하고 있다. 그렇지만 비하르의 날란다에 있는 것과 같은 강연장과 거주지역을 갖춘 대학 도시는 아니었다. 탁실라에서 교사는 제자들을 유숙시켰고 그들은 하숙비를 스승과 가족에게 현금이나 용역의 형태로 지불했다.



183. 호주(護呪)로 번역되는 빠릿따(parittā)는  질병이나 악령의 해코지나 다른 여러 위험들로부터 보호하는 주문을 뜻한다. 이 호주는 빨리 5부경에 보호의 목적으로 독송되는 경으로 등장한다.「밀린다왕문경」에는 「보경(寶經 Ratana Sutta)」(Sn.222~238), 「온호주(蘊護呪 Khandha-paritta)」, 「공작호주(孔雀護呪 Mora-paritta)」(J.ii.33f), 「다작가 호주(Dhajagga-paritta)」(S.i.218f), 「아따나니야 호주(Āṭnātiya-paritta)」, 「앙굴리말라 호주(Aṅgulimāla-paritta)」(M.ii.97ff)를 들고 있다. 이밖에도 상좌부 불교권에서는 「길상경(Maṅgala sutta)」(Sn.258~269)와 「자애경(Mettā Sutta)」(Sn.258~269)도 호주에 넣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길상경」, 「자애경」, 「앙굴리말라경」등은 지금도 상좌부 불교국가에서 아침저녁으로 널리 독송되고 있다.



184. 선인(仙人)이라고 번역한 isi(산스크리트어는 rishi)는 숲속고행자를 뜻한다. 영어로는 hermit, forest ascetic등으로 표현한다.





71. 미신과 나쁜 재생



185. 빠세나디 꼬살라(Pasenadī-Kosala)는 마하꼬살라(Mahā-kosala)의 아들이었다. 그는 그 당시 인도 최고의 상업도시이자 교육도시로 알려진 딱까실라(Takkasilā)로 유학하여 릿차위(Licchavī)의 마할리(Mahāli)와 말라(Malla)의 반둘라(Bandhula)왕자 등과 함께 공부하였으며 여러 학문과 기술에 능통하였다고 한다. 그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자 마하꼬살라왕은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DhpA.i.338) 그는 선정(善政)에 힘썼으며 뇌물과 부패를 청산하려고 애썼다고 한다.(SA.i.109) 그의 정비는 말리까(Mallikā)였는데 부처님께 크나큰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그녀가 기증한 정사도 있었다. 그는 부처님과 같은 해, 같은 날에 태어났다고 하며, 그래서 일찍부터 부처님과 교분을 맺었으며 죽을 때까지 헌신적인 부처님의 신도였다. 그가 얼마나 부처님을 존경하고 흠모하였는지는 『중부』「법탑경」(M89)등 여러 경전에서 나타나고 있다.


여러 문헌(DhpA.i.339; J.i.133; iv.144등)에 따르면 그는 석가족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부처님과 인척관계를 맺고 싶어 하였다. 자부심이 강한 석가족은 마하나마(Mahā-nāma)와 하녀 사이에 난 딸린 와사바캇띠야(Vāsabhakhattiyā)를 보냈으며, 이들 사이에서 난 아들이 바로 위두다바(Vīdūdabha) 왕자이다. 위두다바 왕자가 커서 까삘라왓투를 방문하였다가 이 이야기를 듣고 격분하였고, 그래서 후에 위두다바는 석가족을 정복하여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참한 살육을 하였다고 한다. 이 위두다바는 빠세나디 왕의 총 사령관인 디가까라야나(Digha-kārāyana)의 도움으로 모반을 일으켜 왕이 되었으며, 빠세나디는 마가다(Magadha)로 가서 아자따삿뚜의 도움을 청하려 하였지만 그가 라자가하(Rājagaha)에 도착하였을 때 이미 성문은 닫혀 있었다. 노후한 몸에 피로가 엄습한 그는 성 밖의 객사에서 그날 밤에 죽었다고 하며 아자따삿뚜가 그의 시신을 잘 수습하였다. 이에 아자따삿뚜는 위두다바를 공격하려다가 대신들의 조언으로 그만 두었다고 한다. (M.ii.118; MA.ii.753; DhpA.i.353; J.iv.150)


그에게는 브라흐마닷따(Brahmadatta)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부처님의 문하에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고 하며(ThaA.i.460) 그의 여동생 수마나(Sumanā)공주도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제따 숲을 기증한 제따(Jetā) 왕자도 그의 아들이었다. 부처님께서 후반부의 24여년 간을 사왓티(Sāvatthi)에서 머무실 정도로 꼬살라와 부처님과는 인연이 많은 곳이며 『상응부』의 세 번째 상응인 「꼬살라 상응」(S3)은 모두 빠세나디 왕과 관계된 가르침일 정도로 부처님과는 가장 인연이 깊었던 왕이었다.

후대 주석서인「아나가따왐사(Anāgatavaṁsa)」에 따르면 빠세나디는 4번째 미래불이 될 보살이라고 한다.



186. 말리까(Mallikā)는 꼬살라(Kosala)국의 빠세나디(Pasenadi) 왕의 정비였다. 말리까(Mallikā)는 재스민 꽃을 뜻하는데, 원래는 꼬살라의 화환 만드는 사람의 딸이었다. 16살 때 하루는 바구니에게 세 그릇의 유미죽을 가지고 친구들과 정원으로 가던 길에 부처님을 뵙자 그 죽을 드리고 예배를 올렸다. 부처님께서는 그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는 미소를 지으셨다. 아난다(Ānanda) 존자가 부처님께 미소 지으신 이유를 여쭙자, 바로 그날 꼬살라의 정비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J.iii.405; SA.i.110ff).부처님께서는 말리까의 행운을 설명하기 위해서 「꿈마사핀다 본생경(Kummāsapinda Jātaka)」(J.416)을 설하셨다.


그 날 빠세나디왕은 아자따삿투왕과 싸우다가 크게 패하고 실의에 빠져 돌아오는 길에 말리까의 목소리에 끌려 화원으로 들어왔다. 말리까는 왕이 오는 것을 보고는 앞으로 나가 말의 고삐를 잡았다. 왕은 지쳤기 때문에 이내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잠에 들었고 말리까는 왕을 정성으로 모셨다. 말리까의 상냥함에 만족한 왕은 바로 그날로 그녀에게  수많은 보석을 하사하고 왕궁으로 데려가 정비로 삼았다. 그 날부터 말리까는 왕의 총애를 받는 아내가 되었고 또 부처님의 헌신적인 신자가 되었다.


말라까는 빠세나디왕과의 사이에 딸을 하나 두었지만 경전에는 아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 딸은 「밀린다왕문경」(M.ii.110)에서 왕의 유일한 딸이라고 하는 와지리(Vajī rī)인것 같다. 빠세나디왕은 태어난 아기가 딸인 것을 알고 크게 실망했지만 부처님께서 여자도 때로는 남자보다 지혜롭다고 왕에게 용기를 주셨다.(S.i.86f).


「밀린다왕문경」(Mil. 115, 291)은 그녀를 선업의 과보가 현생에서 바로 결실을 맺고 그 명성이 천신들에게까지 미친 일곱 사람들 중의 한명으로 거론하고 있다. 그리고 말리까는 뛰어난 여신도(upāsika) 가운데 하나로 언급되고 있다.(A.iv.348). 말리까는 어느 때 부처님께 왜 어떤 여자들은 평범한 용모에 가난한데 반해, 어떤 여자들은 아름답고 부유한지를 여쭈었고 부처님은 아름답고 부유한 여자들은 전생에 화내지 않고 보시에 힘썼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셨다.(S.i.75)


말리까는 왕의 모범적인 아내이자, 부처님의 헌신적인 신자였지만 생전에 어떠한 도과도 얻지 못했다.「법구경」 주석서(DhA.iii.119ff)는 말리까가 욕실에서 애완견과 성적으로 그릇된 행위를 한 황당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빠세나디왕이 그 광경을 우연히 보았지만, 왕에게는 욕실의 조명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라고 거짓말을 둘러댔다. 하지만 임종의 순간 말리까는 자신의 그릇된 행위를 떠올렸고 그 때문에 무간지옥에 태어나 7일 동안 고통을 받다가 도솔천으로 올라갔다.



187. 까사빠 부처님(Kassapa Buddha)은 행운의 겁(賢劫 bhadda-kappa)에 출현한 과거 네 분의 부처님 가운데 세 번째 부처님으로 고따마 부처님의 바로 전대에 출현하신 부처님이다.



188. 로하꿈비 지옥(Lohakumbhī-niraya)은 쇠솥지옥이란 뜻이다. 로하꿈비야(Lohakumbhīya) 지옥이라고도 한다. 이 지옥에 태어나는 중생들은 극심한 열에 의해 고통을 받는다.(SNA.i.59; J.iii.22; v. 269). 이 지옥은 전 지구의 밑바닥에 걸쳐 뻗쳐있고, 수는 4 나유타(nahuta)이며, 깊이는 10만 유순이라고 한다. 그리고 용해된 쇳물로 가득 차 넘치는 큰 쇠솥과 같이 생겼다고 한다.(SNA.ii.480).



189. 유순(由旬)으로 음역한 요자나(yojana)는 고대 인도의 길이 단위로서 소를 멍에 매어 쉬지 않고 한 번에 갈수 있는 거리이며 대략 7마일 즉 11km의 거리라고 한다.




74.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



190. 경전에 나오는 부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마음으로 모든 방향으로 찾아 보았건만

어느 곳에서도 자신보다 사랑스러운 자 얻을 수 없네,

이처럼 다른 이들에게도 각자 자신이 사랑스러운 것

그러므로 자기의 행복을 원하는 자, 남을 해치지 마세."

(S.i.75; Ud.47; S3:8)



191. 아뜨만(atman)은 힌두교와 인도철학에서 말하는 자아(自我), 개아(個我), 진아(眞我)로 만물 속에 내재하는 영묘한 힘을 뜻한다. 인도의 철학자들은 이 말을 둘러싸고 많은 학설을 전개하였다. 우파니샤드나 베단타학파에서는 이것을 보편적 실재라고 생각하여 세계원리인 브라만(梵)과 같은 성질의 것이라고 하였으며, 현실의 나인 아뜨만은 브라만과 하나가 됨[梵我一如]으로써 최고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상키아 학파에서는 아트만을 순수 정신원리인 푸루샤(purua)로 보고, 물질적 원리인 프라크리띠(prakti)와 대치시킴으로써 세계의 생성을 설명한다. 이들은 이러한 불변하는 아뜨만이 매생을 재육화 한다고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윤회의 주체가 없는 연기적 흐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힌두교의 윤회는 이 아뜨만의 전변이지만 불교의 윤회는 갈애를 근본원인으로 한 다시 태어남이다.



192. 마하나마(Mahā-nāma)는 석가족 왕의 한 사람이었으며 아누룻다(Anuruddha)존자의 형이고 세존의 사촌이 된다. 세존께서는 『증지부』(A1:14)에서 뛰어난 보시를 하는 자 가운데 으뜸이라고 그를 칭찬하실 정도로 정성을 다하여 세존을 모시고 승가를 후원하였다.




75. 욱가 장자 이야기



193. 욱가(Uggā)는 키가 크고 덕스러운 성품을 지녔기 때문에 Uggā(고상한)라고 불렸다 한다. 그는 세존을 처음 뵙고 예류과를 얻었고 뒤에는 불환과를 얻었다고 한다. 세존께서는 『증지부』(A1:14)에서 욱가를 마음에 흡족한 공양을 올리는 자(manāpa-dāyaka)들 가운데 으뜸이라고 칭찬하셨다.



194. 교법(敎法)이라 번역한 사사나(sāsana)의 문자적 의미는‘메세지, 전갈'의 뜻으로 부처님께서 설하신 아홉 부류의 교설[九分敎]을 말한다. 이 구부경은 구부설(九部設) 또는 구부경(九部經)라고도 하며 서술의 형식이나 내용에 따라 경전을 분류한 체제이다.


➀ 계경(契經 Sutta): 경 가운데 장행 내지 산문의 부분.

➁ 중송(重頌 Geyya): 먼저 산문으로 서술한 후 다시 운문으로 읊고 있는 경의 부분.

➂ 수기(授記 Veyyākarana): 주석(註釋). 수역(授譯) 또는 별기(別記)라 번역. 불제자들의 생사인과를 적거나 불법의 심의(深意)를 분명히 적은 부분.

➃ 고기송(孤起頌 Gāthā): 운문체의 경문.

➄ 감흥어(感興語 Udāna): 부처님이 질문받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감흥이 일어나 설한 시의 문구.

➅ 여시어(如是語 Itivuttaka):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로 시작하는 경으로 감흥어와 유사하다. 이는 주로 부처님의 윤리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다..

➆ 본생경(本生經 Jātaka): 부처님의 전생담을 실은 경.

➇ 미증유법(未曾有法 Abbhuta-dhamma): 부처님의 공덕의 위대함을 찬탄한 부분. 또는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미증유의 일들을 기록한 부분.

➈ 교리문답(方廣 Vedalla): 인명(因明), 정리(正理)에 의거, 불법의 깊은 뜻을 자세히 설한 부분


그리고 십이분교(十二分敎)로 분류할 경우는 여기에 ➉ 인연담(因緣譚 Nidāna) ⑪ 비유(譬喩 Apadāna) ⑫ 논의(論議 Upadesa)가 포함된다.


이와 같이 사사나(sāsana)는 부처님이 평생 설하신 교설(一代敎說)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써 부처님의 가르침 또는 종교적 체계로서의 불교를 뜻한다. 영어로는 Dispensation of the Buddha, teaching, doctrine등이라 한다.


195. 오하분결(五下分結 orambhāgiya-saṃyojana)은 10가지 족쇄(saṃyojana)중 처음 5가지 거친 족쇄를 말한다. 그리고 10가지 족쇄(saṃyojana)란 중생을 중생계에 붙들어 끊임없는 생사윤회를 반복하게 하는 것으로 다음과 같다.


①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 ② 회의적 의심(vicikicchā) ③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戒禁取 sīlabbata-parāmāsa) ➃ 감각적 욕망(kāma-rāgā) ➄ 적의(paṭigha) ➅ 색계에 대한 집착(rūpa-rāga) ➆ 무색계에 대한 집착(arūpa-rāga) ➇ 자만(māna) ➈ 들뜸(uddhacca) ➉ 무명(無明 avijjā)


①부터 ➄까지가 앞에 나온 5가지 거친 족쇄(orambhāgiya-saṃyojana)인 오하분결(五下分結)이라 하고 ➅부터 ➉까지는 5가지 미세한 족쇄(uddhambhagiya-saṃyojana)인 오상분결(五上分結)이라고 한다. 예류자는 ①에서 ③을, 불환자는 ➃와 ➄를, 아라한은 나머지 ➅에서 ➉까지의 족쇄를 완전히 끊어낸다.



196.『증지부』의 「마음에 흡족한 공양을 올리는 자 경(Manāpadāyī sutta)」(A5:44)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읆으셨다.


“마음에 흡족한 공양을 올리는 자는

마음에 흡족함을 얻고

으뜸가는 보시를 한 자는 다시 으뜸가는 것을 얻고

뛰어난 보시를 한 자는 뛰어난 것을 얻고

최상의 보시를 한자는 최상의 경지를 얻도다.

으뜸가는 보시를 하고 뛰어난 보시를 하고

최상의 보시를 하는 사람은

태어나는 곳마다 긴 수명과 명성을 얻누나.”



197. 의욕으로 옮긴 찬다(chanda)는 ‘자극, 고무, 열의, 의욕, 하고자 함, 의지’등의 뜻을 지녔다. 영어로는 intention, desire, will이라 하고 있다. 여기서 의욕이란 하고 싶어 함을 뜻하는데, 행위를 하여서 어떤 결과를 성취하고자 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런 열의는 비난받아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탐욕(lobha)이나 갈망(rāga)과는 구별이 되어야 한다. 욕망과 갈망 등은 불선한 것이지만 열의는 다른 것과 같아지는 마음부수여서 선한 마음부수들과 함께 하면 고결한 목표를 달성하려는 선한 바람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경에서는 종종 chanda가 lobha나 rāga의 동의어로 쓰이기도 하지만 아주 이로운 법으로 인정하고도 있다. 불선법을 버릴 열의를 일으키는 것과 선한 법을 증득하는 것을 설하는 경우에 이 단어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76. 위빠사나 수행과 집착



198. 네 가지 집착(upādāna)은 다음과 같다.


①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kāmā-upādāna) -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에서 비롯된 집착.

② 사견에 대한 집착(diṭṭhi-upādāna) - 업과 그 과보는 없으며 내생, 정등각자, 아라한이 없다는 견해에 대한 집착.

③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sīlabbata-parāmāsa-upādāna) – 팔정도와 아무 상관 없는 의식과 의례를 행하는 것에 대한 집착.

④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atta-vāda-upādāna) – 영혼, 자아, 살아있는 실체에 대한 믿음에 대한  집착.



199. 삼모하위노다니(Sammohavinodani)」는 아비담마 칠론 중의 하나인「분별론(Vibhanga)」의 주석서이다.



200.『증지부』주석서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다섯 가 바른 견해가 있다.

➀ 업이 자신이라는 바른 견해(kammasakata-sammādiṭṭhi) ➁ 선의 바른 견해(jhāna-sammādiṭṭhi)  ➂도의 바른 견해(magga-sammā-diṭṭhi) ④ 위빠사나의 바른 견해(vipassanā-sammādiṭṭhi) ⑤ 과의 바른 견해(phala-sammādiṭṭhi)



201. 쭐라바야(Cūḷa-bhaya) 장로는 스리랑의 유명한 주석가로 쭐라바야 삼장법사(Tipiṭaka-Cūḷa-bhaya)라고 불리웠다. 아주 명석한 기억력을 지녔다고 하는데 그의 이름은 주석서(VibhA.11, 16; Vsm.69, 394, 397)에서 종종 등장하고 있다.



202. 『증지부』주석서(AA.iii.231)에 따르면 무량함(appamāṇa)이란 그 범위를 잴수 있는 법이 아닌 출세간적인 것을 뜻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무량은 자(慈)· 비(悲)· 희(喜)· 사(捨)의 사무량심(四無量心)을 뜻하지만 아비담마의 이런 문맥에서는 도와 과를 뜻하기도 한다.



203. 종성(gotrabhū)은 성인의 반열에 드는 순간의 마음으로 첫 번째 성자의 경지인 예류도를 얻기 바로 전 찰나에 범부의 이름을 버리고, 성자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찰나를 말한다.



204. 억압에 의한 버림(vikkhambhana-pahāna)이란 삼매(samādhi)의 힘으로 번뇌(kilesa)를 일시적으로 몰아내거나 제압하는 것이다.「청정도론」(Vis.XXII.108)에 따르면 세 가지 버림(pahāna)이 있다. ➀ 억압에 의한 버림(vikkhambhana-pahāna) ➁ 반대되는 것으로 대체하여 버림(tadaga-pahāna) ➂ 근절에 의한 버림(samuccheda-pahāna)이 그것이다.




77.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


                                                        

205. 이렇게 12연기가 과거· 현재· 미래에 배당하여 과거의 2가지 원인(무명, 행), 현세의 5가지 과보(식, 명색, 육입, 촉, 수), 현재의 3가지 원인(애, 취, 유), 그리고 내생의 2가지 과보(생, 노사)라는 식으로 원인과 결과[因果]가 2중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라고 한다.




80. 과거의 원인에서 비롯된 현재의 결과



206. 존재[有]로 번역되는 바와(bhava)를 서양에서 becoming으로 옮기고 있듯이 우리의 삶은 그냥 존재가 아니고 갈애(taṇhā)와 집착(upādāna)을 통해서 끊임없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즉 존재는 어떤 고정된 불변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멸하는 오온(五蘊)이 흐르는 진행과정 그 자체임을 뜻한다.

 



81. 위빠사나 수행에 필요한 지식


 

207.최상의 지혜로 안다(abhijānāti)’는 것은 무상· 고· 무아라고 안 것의 통달지(ñāta-pariñña)를 통해 그렇게 안다는 것이다.‘철저하게 안다(parijānāti)’라는 것은 마찬가지로 조사(調査)의 통달지(tīraṇa-pariññā)를 통해 그렇게 안다는 것이다.(AA.iv.43). 안 것의 통달지와 조사의 통달지 등의 통달지(pariññā)에 대해서는「청정도론」(Vis.XX.3~5)을 참조할 것.



208. 빠리자나띠(parijānāti)는 ‘꿰뚫어 안다’.‘철저하게 안다’라는 뜻으로 여기에서 파생된 동사가 통찰지로 번역되는 paññā이다. 



209. 쭐라빤타까(Cula-pantaka)비구는 라자가하(Rājagaha)의 부유한 상인의 딸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하인과 눈이 맞아서 라자가하를 도망 나가서 살았다고 한다. 그의 형은 마하빤따까(Mahā-panthaka)라고 불렸다. 두 형제는 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jātattā) 빤따까(Panthaka)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와 하인이 도망 다니면서 길에서 낳았기 때문이다. 그는 후에 형과 함께 외갓집에 보내져서 양육되었다. 그의 형은 외할아버지를 따라 부처님을 뵈러 다녔기 때문에 먼저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그도 형의 권유로 출가하여 형이 준 게송(A.iii.239)을 넉달이나 외웠으나 외울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형은 그를 쫒아내려 했지만 부처님께서는 그에게 천 조각을 주시면서 ‘먼지 닦기(rajo-haraṇa), 먼지 닦기’라고 반복해서 외우라고 하셨고 그런 방법을 통해서 무애해(無碍解)와 육신통(六神通)을 갖춘 아라한이 되었다. 45자모(字母)로 구성된 게송은『증지부』(A.iii.239)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마치 향기로운 꼬까나다의 연꽃이

아침에 향내음을 풍기면서 피듯이

멀리 빛을 드리우신 부처님을 보라.

마치 허공에서 빛나는 태양과 같구나.”

(A.iii.239)




83. 아라한의 인생관



210. 「장로게(長老偈)」(Thag.654)에는 레와따(Revata) 존자의 다음과 같은 게송이 전해진다.


“나는 죽음을 기뻐하지도, 삶도 기뻐하지도 않는다. 고용된 사람이 그저 월급날만 기다리는 것처럼 나는 죽음이 올 날만을 기다린다.”(Thag.654)



211. 열반(涅槃)으로 음역한 nibbāna는 ‘불어서 꺼진’의 뜻이다. 경전에서는 탐욕(rāga), 성냄(dosa), 어리석음(moha)의 불이 완전히 꺼진 것을 열반이라고 설명한다. 이 열반은 진정한 불교신자라면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지복이자 최고선이다. 이 열반은 출세간이며 형성된 것을 완전히 벗어난 형성되지 않은 것이며 고요함을 특징으로 하는 하나의 본성을 가졌다. 비록 열반은 본성에 있어서는 하나지만 남음(upādi)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측면에서 보면 두 가지가 있다.


①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 saupādisesa-nibbāna): ‘받은 것이 남아 있는 열반’이라는 뜻이며 아라한의 경우 번뇌는 완전히 소멸하였지만 그의 수명이 남아 있는 한 과거 집착의 산물인 오온(五蘊)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②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 anupādisesa-nibbāna): ‘남음이 없는 열반’이라는 뜻이며 아라

한의 수명이 다하고 입멸(入滅)을 하게 되면 이러한 오온(五蘊)까지도 완전히 멸하기 때문에 이런 열반을 완전한 열반(般涅槃 parinibbāna)이라고 한다.




88. 세 가지 회전



212. 「청정도론」(Vis.XIX.Ⅰ)에서는“이 정신과 물질에 대한 조건을 파악함으로써 삼세(三世)에 대한 의심을 극복하고 확립된 지혜를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이라 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이것은 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나를 구성하고 있는 정신-물질이 우연히 생긴 것도 아니며, 어떤 가상적인 원인에 의해서 생긴 것도 아니고, 신이 창조한 것은 더욱 더 아니며, 전생의 무명과 갈애와 집착과 업에 의해서 생긴 것이라고 연기법을 적용시키며 이런 원칙을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도 적용시켜 나간다. 그래서 이러한 청정을 조건[緣], 즉 원인과 결과를 파악하는 지혜라고도 부른다. 그래서 오온, 즉 정신과 물질의 원인과 조건을 정확히 파악하여 모든 의심이 없어지면 그를 작은 수다원(cūḷa-sotāpana)이라 부른다.


 


90. 사띠 비구의 사견



213. 상좌부 불교에서는 마음(心 citta)과 식(識 vinñāṇa)을 동의어로 간주하며 사실상 아무런 구분 없이 쓰고 있다. 굳이 구분하여 본다면 찟따(citta)는 마음이나 식등을 뜻하는 가장 보편적인 의미로, 윈냐냐(vinñāṇa)는 여섯 감각기관[六根]과 여섯 대상[六境]이 있는 곳에서 따라 일어나는 마음의 뜻으로 많이 쓰인다.「청정도론」(XIV.82)에 따르면‘식(識 vinñāṇa)과 마음(心 citta)과 마노(意 mano)는 뜻에서는 하나이다.’라고 한다.


그리고 마음과 관련해서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것은 한글이나 영어로는 그냥 마음이나 mind란 단어하나로 우리 마음의 여러 가지 현상이나 기능들이 다 표현될 수 있지만 아비담마에서는 다르다는 것이다. 아비담마에서 표현되는 우리의 마음과 심리현상에 관련된 용어를 간단히 정리해보기로 한다.


① 마음[心]으로 옮긴 찟따(citta)는 주로 우리의 생각이나 사고 일반을 나타낸다. 그리고 아비담마에 의하면 이 찟따는 마노(mano)와 윈냐나(vinñāṇa)를 다 아우르는 개념으로 쓰인다. 그래서 영역도 mind, consciousness, state of consciousness로 다양하다.


➁ 마노[意]로 음역한 마노(mano)는 우리의 생각을 관장하는 감각기능(根 indriya)이거나 감각장소(處 ayatana)의 개념으로서만 등장한다. 중국에서는 의(意)로 번역했지만 현재 우리가 이해하는 意와 mano의 의미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마노라고 음역한 것이다. 영역은 보통 mind이다.


➂ 식(識)로 옮긴 윈냐냐(vinñāṇa)는  여섯 감각기능(六根)이나 감각장소(六處)가 그 각각의 감각대상(六境)과 부딪혀서 일어나는 식이다. 그래서 윈냐나는 모두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의 6가지가 있다. 영역은 보통 consciousness이다.


➃ 마음부수(心所 cetasika)는 마음(citta)과 함께 결합되어 일어나는 정신현상이며 전체 인식 행위에 있어서 마음이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돕는 것이다. 마음부수들은 마음 없이는 일어나지 못하며 마음은 마음부수법과 완전히 분리되어서 단독으로 일어날 수 없다. 역할로 보면 이 둘이 상호 의존적이지만 마음을 근본적인 것이라고 간주한다. 마음부수는 인식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인인 마음에 의지하여 대상을 인식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영역은 mental concomitants이다.


➄ 정신[名]으로 옮긴 나마(nāma)는 오온(五蘊)에서 물질[色]을 제외한 느낌[受], 인식[想], 심리현상들[行], 식(識)의 네 가지를 뜻한다. 그리고 여기서의 식(識)은 단지 대상을 아는 것이라고 아비담마에서는 정의한다. 영역은 mind, mentality이다.


그리고 후대 주석서와 아비담마에서는 찟따(citta),  마노(mano), 윈냐냐(vinñāṇa) 이 셋을 같은 것이라 정의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찟따(citta)와 마노(mano)는 위에서 보듯 그 사용처가 분명 다르다. 그러나 찟따(citta)와 윈냐냐(vinñāṇa)는 별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찟따(citta)는 마노(mano)와 윈냐나(vinñāṇa)를 포함한 마음 일반을 나타내는 용어라 보면 되겠다. 그렇기 때문에 빨리어 원어에 대한 이해 없이 이것들을 그냥 마음(mind)하나로 뭉뚱그려서 이해하거나 한문이나 영어 해석에만 따라 가다보면 왜곡된 이해를 할 가능성이 크다.



214. 부처님은 식(識)이 윤회의 주체라고 이해하고 있던 사띠 비구를 크게 나무라시면서“참으로 나는 많은 방법으로 식(識)은 조건 지어져서 일어난다고 설하였고 조건이 없어지면 식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라고 강조하셨다. (M.38/i.259)




92. 노력 없음



215. 운명론(niyata-vāda)이란 인간의 행위를 포함하여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것이 정해진 때와 장소에서 일어나도록 미리 정해졌다고 생각하는 철학사조이다. 숙명론(宿命論) 또는 결정론(決定論)이라고도 한다. 고대 인도에서는 육사외도(六師外道)중 하나인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āla)가 주장한 학설이었다. 




93. 결과에 대한 원인의 관련성



216. 업보를 부정하는 견해(akiriya-diṭṭhi)는 행위는 아무런 결과를 낳지 못한다는 견해로써 선업이 가지는 특질을 인정하는 않는 일종의 도덕부정론(akiriya-vāda)이며 경전에서 언급하는 세 가지 삿된 견해(micchā-diṭṭhi)중 하나이다.



217. 세 가지 공부방법이란 팔정도의 세 번째 도인 통찰지(慧 paññā)를 얻기 위한 세 가지 단계를 말한다.


(1) 들어서 생기는 지혜(聞慧 suta-maya-ñāṇa): 책을 읽거나 법문을 들어서 생기는 지혜이로 문소성지(聞所成智)라고도 한다.


(2) 사유해서 생기는 지혜(思慧 cintā-maya-ñāṇa): 책을 읽거나 법문을 들은 것을 스스로 생각하고 사유하여 생기는 지혜로 사소성지(思所成智)라고도 한다.


(3) 수행해서 생기는 지혜(修慧 bhāvanā-maya-ñāṇa): 읽고 듣고 생각한 것을 실참 수행을 닦아서 생기는 지혜로 수소성지(修所成智)라고도 한다.




96. 아라한과 부처님의 특성 



218. 아라한(arahan)은 ‘대접과 존경을 받을 만한 분’이란 뜻이고 중국에서 그 의미를 살려 응공(應供)이라고 번역했다. 아라한은   열 가지 족쇄를 완전히 제거하여 성스러운 도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신 분이다. 그래서 주석서에서는 아라한을 번뇌들로 이루어진 적(ari)을 부수어 버린(hata)자로 설명한다. 이 아라한은 또한 부처님의 열 가지 이름[如來十號]중 하나이기도 하다.




97. 바까 대범천 이야기



219. 대범천(大梵天)의 원어는 마하브라흐마(Mahā-brahmā)이다. 초선천(初禪天)의 세 번째 천상을 뜻하기도 하고 여기서처럼 유력한 범천을 뜻하기도 한다. 이러한 유력한 범천으로 경에서는 뚜두(Tudu), 나라다(Nārada), 가띠까라(Ghaṭikāra), 바까(Baka), 사냥꾸마라(Sanaṅkumarā), 사함빠띠(Sahampatī) 등을 언급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서 사함빠띠 범천이 대범천으로 많이 등장한다. 부처님께 법륜을 굴려주시길 간청한 대범천이 바로 사함빠띠이다.




98. 정등각자



220. 번뇌(漏)로 옮긴 āsava는‘흐르는 것’이라는 문자적인 뜻에서 마음속의 해로운 상태나 더러움이 외부로 표출되는 뜻으로 발전되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루(漏), 번뇌(煩惱)로 옮겼고 서구에서는 influxes, 또는 좀더 정확성을 기하고자 할 때는 canker, taint로 옮긴다.「아따살리니」(Asl.48)에 따르면 이것을 흘러나오는 것이란 뜻인 아사와라고 하는 이유는 이것이 존재하는 것으로는 최고로 높은 세계까지 흘러가고 법으로는 종성(種姓 gotrabhu)의 영역에까지 흘러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번뇌(漏)에는 네 가지가 있다.


① 감각적 욕망의 번뇌(慾漏 kāmā-āsava) ② 존재의 번뇌(有漏 bhava-āsava) ③ 사견의 번뇌(見漏 diṭṭhi-āsava) ④ 무명의 번뇌(無明漏 avijjā-āsava)


그리고 이 네 가지 번뇌(漏)는 네 가지 폭류(ogha)와 네 가지 속박(yoga)이란 이름으로도 경전과 주석서에 종종 등장한다. 그리고 육신통(六神通)중의 하나인 누진통(漏盡通 āsavakkhaya-sutta)이 바로 위빠사나를 통한 통찰의 힘으로 이러한 모든 번뇌(漏 āsava)를 부순 지혜를 가리킨다.



221. 족쇄는 빨리어 삼요자나(saṃyojana)의 역어로 범부를 윤회의 바퀴에 붙들어 매놓는 10가지 족쇄를 말한다. ①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 ② 회의적 의심(vicikicchā) ③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戒禁取 sīlabbata-parāmāsa) ➃ 감각적 욕망(kāma-rāgā) ➄ 적의(paṭigha) ➅ 색계에 대한 집착(rūpa-rāga) ➆ 무색계에 대한 집착(arūpa-rāga) ➇ 자만(māna) ➈ 들뜸(uddhacca) ➉ 무명(無明 avijjā). 그리고 ①부터 ➄까지는 다섯 가지 거친 족쇄(orambhāgiya-saṃyojana)인 오하분결(五下分結)이라 하고 ➅부터 ➉까지는 다섯 가지 더 미세한 족쇄(uddhambhagiya-saṃyojana)로 오상분결(五上分結)이라고 한다. 예류자는 ①에서 ③을, 불환자는 ➃와 ➄를, 아라한은 나머지 ➅에서 ➉까지의 족쇄를 완전히 끊어낸다. 족쇄의 영역은 fetter.




99. 부처님의 명성



222. 정거천(淨居天)이라 번역되는 숫다와사(suddhāvasā)는 불환과를 얻은 성자들만 태어나는 곳으로 여기에 태어나서 다시는 이보다 더 낮은 세상에 태어나지 않고 여기서 열반에 든다고 한다. 정거천의 다섯 하늘은 다음과 같다.

(1) 무번천(無煩天 avihā) (2) 무열천(無熱天 atappā) (3) 선현천(善現天 sudassā) (4) 선견천(善見天 sudassī) (5) 색구경천(色究竟天 akaniṭṭhā)



223.『중부』「긴 사자후경(Mahāsihanāda Sutta)」(M12)에서 언급하듯이 만일 부처님께서 정거천의 신으로 태어나셨더라면 이 세상에 다시 오시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정거천은 다시는 이 세상에 오지 않는 불환과를 이룬 성자들이 머무는 곳이기 때문이다.




101. 부처님과 정득각자



224. 삼마삼붓다(sammā-sambuddha)는 ‘바르게 깨달은 분’을 뜻한다. 중국에서는 정변지(正遍知)와 정등각(正等覺)으로 옮겼다. 영어로는 보통 The Fully Enlightend one이라 표현한다.



225. 형성된 법이라 번역한 상카따담마(sakhata-dhamma)는 중국에서 유위법(有爲法)이라 번역했는데, 무상· 고· 무아의 삼특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마음[心], 마음부수[心所], 물질[色]등이 해당된다. 그리고 형성되지 않은 법이라 번역한 아상카따담마(asaṅkhata-dhamma)는 중국에서 무위법(無爲法)으로 번역했으며, 열반(涅槃)이 이에 해당된다.



226. 사무애해(四無碍解 paṭismbhidā)는 자유자재하며 거리낌 없는 이해능력 및 언어적 표현능력으로 다음의 네 가지가 있다. 영어로는 analytical knowledge라고 한다. 여기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청정도론」(Vis.ⅪV.21)을 참고할것.


(1) 의무애해(義無碍解 attha-paṭisambhidā): 의미를 통달한 분석지. 세존의 모든 가르침의 의미, 목적, 결과와 기능적 필요성을 이해하는 것.


(2) 법무애해(法無碍解 dhamma-paṭisambhidā): 법에 대한 분석지.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는 것(인과법, 연기법), 고귀한 팔정도, 설해진 법, 법과 관련된 범위 내에서 있는 모든 지식을 이해하는 것.


(3) 사무애해(詞無碍解 nirutti-paṭisambhidā): 언어에 대한 분석지. 실재를 표현하는 언어에 관한 지식으로서 언어로 표현하는 데 걸림이 없는 것.


(4) 변무애해(辯無碍解 paṭibhāna-paṭisambhidā): 언어 구사력에 대한 분석지. 즉 임기응변에 능한 분석지인데, 법의 의미에 대해 미사여구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여 누구나 쉽게 알아듣도록 설명하는 능력.



227. 불공의 지혜(不共智 asādhāraṇa-ñāṇa)란 범부는 말할 것도 없고 아라한이나 벽지불 또는 보살과도 공통되지 않는 부처님만이 가지고 있는 뛰어난 공덕과 자질이다.



228. 쌍신변(雙神變)의 원어는 야마까빠따리야(yamaka-pāṭhāriya)로 부처님이 외도(外道)를 조복하기 위해 보이는 신통의 하나이다. 일련의 대우(對偶)신통으로 상체에서 물줄기를 내뿜는 동시에 하체에서는 불꽃을 내뿜고, 또 그 반대도 나타내며 한쪽으로는 불을 다른 쪽으로는 물을 내뿜기도 하고, 전신의 구멍에서 6가지 광채를 발해 위로는 범천(梵天)을, 아래로는 철위산(鐵圍山) 끝까지 비추는 등 부처님만이 보일 수 있는 신통이다.



229. 함축적인 의미의 법(neyyatha-dhamma)이란 그 뜻이 확정된 명확한 의미의 법(nītattha-dhamma)과 대비되어 그 의미가 함축적이어서 숨은 뜻을 알아내어야 하는 법이다. 『증지부』주석서(AA.ii.118)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한 사람, 두사람, 세 사람, 네 사람이 있다.’라는 가르침은 ‘그 [숨은 뜻을] 알아내어야 하는 가르침(neyyatha suttanta)'이다. 왜냐하면 비록 정등각자께서 '한사람이 있다.’라는 식으로 말씀을 하셨더라도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사람(puggala)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 숨은 뜻을 알아 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이런 가르침을 두고‘이미 그 뜻이 확정된 가르침(nitattha suttanta)이라고 우긴다.‘만약 궁극적인 의미에서 사람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존께서‘비구들이여, 한 사람이 있다.’라는 식으로 설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세존께서 그렇게 설하셨기 때문에 궁극적인 의미에서 사람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잘못 이해하면서 숨은 뜻을 알아내어야 할 경에 대해서 이미 그 뜻이 확정된 경이라고 우긴다.”                                     (역주 끝)


                                                                                        

 


       















약어


A.     Aṅguttara Nikāya(증지부)

AA.    Aṅguttara Nikāya Aṭṭhakathā(증지부 주석서)

AA   Aṅguttara Nikāya Aṭṭhakathā Ṭīkā(증지부 복주서)

Asl.   Aṭṭhasālini(아따살리니, 법집론 주석서)

AP.    Apadana(비유경)

B.     Buddhavamsa(불종성경)

Dhs.   Dhamma Saṅgaṇī(법집론)

Dhp.   Dhamma Pada(법구경)

DhA.   Dhamma Pada Aṭṭhakathā(법구경 주석서)

D.     Dīgha Nikāya(장부)

DA.    Digha Aṭṭhakathā(장부 주석서)

Dv.    Dipavaṁsa(도사)

J.     Jātaka(본생담)

JA.    Jātaka Aṭṭhakathā(본생담 주석서)

KhpA.  Khuddakapātha Aṭṭhakathā(소송경 주석서)

Nid.   Niddesa(의석)

M.     Majjhima Nikāya(중부)

MA.    Majjhima Nikāya Aṭṭhakathā(중부 주석서)

Mhv.   Mahāvasa(대사)

Miln.  Milinda Pañhā(밀린다왕문경)

Mtu.   Mahāvastu(마하와스뚜)

Ps.    Paṭisambhidā Magga(무애해도)

Ptṇ.   Paṭṭhāna(발취론)

PTS.   Pāli Text Society(빠알리 성전 협회)

Pm.    Paramatthamañjūsa = Visuddhimagga Mahāṭīkā (청정도론 주석서)

Pug.   Puggala-Paññati(인시설론)

Pv.    Petavattu(아귀사)

PvA.   Petavattu Aṭṭhakathā(아귀사 주석서)

S.     Saṁyutta Nikāya(상응부)

SA.    Saṁyutta Nikāya Aṭṭhakathā(상응부 주석서)

SAṬ.   Saṁyutta Nikāya Aṭṭhakathā Ṭīkā(상응부 복주서)

Sn.    Sutta Nipāta(경집)

SnA.   Sutta Nipāta Aṭṭhakathā(경집 주석서)

Thag.  Theragāthā(장로게)

ThagA. Theragāthā Aṭṭhakathā(장로게 주석서)

Ud.    Udāna(감흥어)

UdA.   Udāna Aṭṭhakathā(감흥어 주석서)

Vv.    Vimānavatthu(천궁사)

VvA.   Vimānavatthu Aṭṭhakathā(천궁사 주석서)

Vbh.   Vibhaṅga(분별론)

Vin.   Vinaya(율장)

VinA.  Vinaya Aṭṭhakathā(율장 주석서)

Vis.   Visuddhi Magga(청정도론)

VsTi.  Visuddhi Magga Tīkā(청정도론 복주서)








일러두기


(1) 본문의 삼장(Tipiṭka), 주석서(Aṭṭhakathā), 복주서(Ṭīka)는 모두 미얀마 6차 결집본이다. 하지만 경전번호는 모두 PTS본에 의거해서 괄호로 표기하여 제시하였다.

예) M123/iii.123은 중부 제 123번 경임과 동시에 중부 제 3권 123쪽에 나타남을 , M123은 중부 제 123경을, M.iii.123은 중부 제 3권의 123쪽을 나타낸다.


(2) 각주는 빨리어 술어의 어원과 기본적인 의미를 파악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또한 해당술어가 처음 나오는 곳에는 빨리어를 병기하고 만약 통용화된 한문술어가 있는 경우에는 이를 병기하였다.


(3) 각주는 어느 곳을 읽어도 이해하기 쉽도록 여러 곳에서 중복 설명하였고 필요한 경우 도표를 첨부하였다.


(4) 본문의 모든 술어는 가급적 한글로 풀어서 적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하지만 해당 술어의 이해를 돕고 한문 불교용어에 익숙한 분들을 위해 괄호에 한문을 병기하였다.











참고문헌


I. 빨리 삼장 번역본


「청정도론」(전 3권) 대림스님. 서울. 초기불전연구원. 2004

「디가니까야」(전 3권) 각묵스님. 서울. 초기불전연구원. 2004

「앙굿따라니까야」(전 6권) 대림스님. 서울. 초기불전연구원. 2007

「네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각묵 스님. 서울. 초기불전연구원. 2003

「한글대장경/본생경(本生經)」(전 5권) 김달진 번역. 서울. 동국역경원. 1996

「쌍윳따니까야」(전 7권) 전재성. 서울. 한국빨리성전협회. 2006 

「맛지마니까야」(전 5권) 전재성. 서울. 한국빨리성전협회. 2002 

「법구경」(전 2권) 거해스님 편역. 서울. 샘이 깊은 물. 2003


2.사전류


Buddhist Dictionary. by Ven. Ñāṅatiloka. Kandy. BPS. 1950

Consise Pali-English Dictionary. by Ven. A.P. Buddhadatta. Colombo. 1955.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by G.P. Malalasekera. London. 1938

「빨리-한국어사전」 전재성. 서울. 한국빨리성전협회. 2005


3. 기타 참고도서


A manual of the excellent man (Uttamapurisa Dipani), by Ven. Ledī Sayādaw.

BPS. Kandy. 2000   

Buddha and His Teachings, by Ven. Nārada Mahāthera. Colombo. 1980

The Coming Buddha, Ariya Metteyya, by Sayagyi U Chit Tin. BPS. Kandy. 1992

What the Buddha Taught, by Ven. Walpola Rāhula. Colombo. 1996

「아비담마 길라잡이」(전 2권) 대림 스님/각묵 스님. 서울. 초기불전연구원. 2003

「인도불교의 역사」(전2권) 平川彰. 이호근역. 서울. 민족사. 1991










                             도 표


                     <도표 1> 89/121가지 마음의 개관

세간적인 마음 81

욕계 마음 54

해로운 마음 12

(1) ~ (8)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    8

(9) ~ (10) 성냄에 뿌리박은 마음   2

(11) ~ (12) 어리석음에 뿌리박은 마음  2

원인없는 마음 18

(13) ~ (19) 해로운 과보의 마음  7

(20) ~ (27) 유익한 과보의 마음  8

(28) ~ (30) 원인없는 작용만 하는 마음  3

욕계의 아름다운 마음 24

(31) ~ (38) 욕계 유익한 마음  8

(39) ~ (46) 욕계 과보의 마음  8

(47) ~ (54) 욕계 작용만 하는 마음  8

색계 마음 15

 

(55) ~ (59) 색계 유익한 마음  5

(60) ~ (64) 색계 과보의 마음  5

(65) ~ (69) 색계 작용만 하는 마음  5

무색계 마음 12

 

(70) ~ (73) 무색계 유익한 마음  4

(74) ~ (77) 무색계 과보의 마음  4

(78) ~ (81) 무색계 작용만 하는 마음  4

 출세간 마음 8/40

출세간 유익한 마음 4/20

(82) ~ (86) 예류도  1/5

(87) ~ (91) 일래도  1/5

(92) ~ (96) 불환도  1/5

(97) ~ (101) 아라한도 1/5

출세간 과보의 마음 4/20

(102) ~ (106) 예류과 1/5

(107) ~ (111) 일래과 1/5

(112) ~ (116) 불환과 1/5

(117) ~ (121) 아라한과 1/5










                       <도표 2> 52가지 마음부수법


다른 것과 같아지는 것(aññasamāna) - 13

아름다움 마음부수들(sobhana-cetasika) - 25

모든 마음에 공통되는 반드시들(sabba-citta-sādhāraṇa) - 7

아름다운 반드시들(sobhana-sādhāraṇā) - 1

 

(1) 감각접촉(觸 phassa)

(28) 믿음(信 saddhā)

(2) 느낌(受 vedanā)

(29) 알아차림(念 sati)

(3) 인식(想 saññā)

(30) 양심(懺 hiri)

(4) 의도(思 cetanā)

(31) 수치심(愧 ottappa)

(5) 집중(心一境 ekaggatā)

(32) 탐욕없음(不貪 alobha)

(6) 생명기능(命根 jīvita-indriya)

(33) 성냄없음(不嗔 adosa)

(7) 주의 기울임(作意 manasikāra)

(34) 중립(tatramajjhattatā)

때때로들(pakiṇṇka) - 6

(35) 몸의 경안(輕安 kāyapassaddhi)

(8) 일으킨 생각(尋 vitakka)

(36) 마음의 경안(cittapassaddhi)

(9) 지속적인 고찰(伺 vicāra)

(37) 몸의 가벼움(kāyalahutā)

(10) 결심(信解 adhimokkha)

(38) 마음의 가벼움(cittalahutā)

(11) 정진(精進 viriya)

(39) 몸의 부드러움(kāyamudutā)

(12) 희열(喜悅 pīti)

(39) 몸의 부드러움(kāyamudutā)

(13) 열의(欲 chanda)

(40) 마음의 부드러움(cittamudutā)

불선한 마음부수들(akusala-cetasika) - 14

(41) 몸의 적합함(適業性 kāyakammaññatā)

모든 불선에 공통되는 반드시들

(sabba-akusala-sadhārana) - 4

(42) 마음의 적합함(cittakammaññatā)

(14) 어리석음(痴 moha)

(43) 몸의 능숙함(練達性 kāyapāguññatā)

(15) 양심 없음(無慙 ahirika)

(44) 마음의 능숙함(cittapāguññatā)

(16) 수치심 없음(無愧 anottappa)

(45) 몸의 올곧음(正直性 kāyaujukatā)

(17) 들뜸(掉擧 uddhacca)

(46) 마음의 올곧음(cittaujukatā)

불선한 때때로들(sabba-akusala-pakiṇṇka) - 10

절제(virati) - 3

 

탐욕에 관계된 세가지

(18) 탐욕(貪 lobha)

(47) 바른 말(正語 samā-vācā)

(19) 사견(邪見 diṭṭhi)

(48) 바른 행위(正業 samā-kammanta)

(20) 자만(慢 māna)

(49) 바른 생계(正命 samā-ājīva)

성냄과 관계된 네가지

(21) 성냄(嗔 dosa)

무량(無量 appamaññā) - 2

(22) 질투(嫉 issā)

(50) 연민(悲 karuṇā)

(23) 인색(吝 macchariya)

(51) 같이 기뻐함(喜 muditā)

(24) 후회(惡作 kukucca)

어리석지 않음(不痴 amoha) - 1

해태와 관계된 네가지

(25) 해태(懈怠 thīna)

(52) 통찰지의 기능(慧根 paññindriya)

(26) 혼침(昏沈 middha)

 

(27) 의심(疑 vicikicchā)

 






                         <도표 3> 욕계의 선한 마음


 

  느낌

지혜

자극

 유익

  과보

 작용

1

2

3

4

5

6

7

8

 기쁨(somanassa)

 기쁨(somanassa)

 기쁨(somanassa)

 기쁨(somanassa)

 평온(upekkhā)

 평온(upekkhā)

 평온(upekkhā)

 평온(upekkhā)

있음

있음

없음

없음

있음

있음

없음

없음

없음

있음

없음

있음

없음

있음

없음

있음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44)

(45)

(46)

(47)

(48)

(49)

(50)

(51)

(52)

(53)

(54)

  



                            <도표 4> 불선한 마음

 

 뿌리

느낌

함께(결부된)

없음

자극

1

2

3

4

5

6

7

8

 

 탐욕(lobha)

기쁨(somanassa)

기쁨(somanassa)

기쁨(somanassa)

기쁨(somanassa)

평온(upekkhā)

평온(upekkhā)

평온(upekkhā)

평온(upekkhā)

사견(diṭṭhi)

사견(diṭṭhi)

···

···

사견(diṭṭhi)

사견(diṭṭhi)

···

···

···

···

사견

사견

···

···

사견

사견

없음

있음

없음

있음

없음

있음

없음

있음

9

10

 

 성냄(dosa)

 

불만족(domanassa)

불만족(domanassa)

반감(paṭigha)

반감(paṭigha)

···

···

없음

있음

11

12

어리석음(moha)

평온(upekkhā)

의심(vicikicchā)

들뜸(uddhacca)

···

···

···

···








             <도표 5> 89가지 마음과 선(善)· 불선(不善)· 무기(無記)

 

    불선(不善)

      선(善)

             무기(無記)

      과보

      작용

욕계

      12

       8

       23

       11

색계

      ···

       5

        5

        5

무색계

      ···

       4

        4

        4

출세간

      ···

       4

        4

      ···

 

      12

       21

       36

       20


              

       


                         <도표 6> 89가지 마음과 세계


  세간의 마음 - 81

 출세간의 마음 8

 욕계의 마음 54

 고귀한 마음 27

 선한 마음 12

 원인없는 마음 18

 아름다운 마음 24

 색계의 마음 15

 무색계의 마음 12

탐욕에 

뿌리한 마음

 

 

 

8

성냄에 

한 마

 

 

 

2

어리석음에뿌리한 마음

 

2

불선한

 

 

 

 

 

 

7

불선한과보

 

 

 

 

 

 

8

작용만하는과보

 

 

 

 

3

선한 마음

 

 

 

 

 

 

 

8

과보로나타난마음

 

 

 

8

작용만하는마음

 

 

 

 

8

선한마음

 

 

 

 

 

 

 

5

과보로나타난마음

 

 

 

5

작용만하는

 

 

 

 

 

 

5

선한마음

 

 

 

 

 

 

 

4

과보로나타난마음

 

 

 

4

작용만하는 마음

 

 

 

 

4

 

 

 

 

 

 

 

 

 

 

4

 

 

 

 

 

 

 

 

 

 

4









                            <도표 7> 물질의 개요

                  구체적인 물질(nipphannarūpa) - 18

근본물질

(bhūta-rūpa)

1. 땅의 요소(地界 paṭhavī-dhātu)

2. 물의 요소(水界 āpo-dhātu)

3. 불의 요소(火界 tejo-dhātu)

4. 바람의 요소(風界 vāyo-dhātu)

감성의 물질

(pasāda-rūpa)

5. 눈의 감성(cakkhu-pasāda)

6. 귀의 감성(sota-pasāda)

7. 코의 감성(ghāna-pasāda)

8. 혀의 감성(jivhā-pasāda)

9. 몸의 감성(kāya-pasāda)

대상의 물질

(gocara-rūpa)

10. 색(色 rūpa)

11. 소리(聲 sadda)

12. 냄새(香 gandha)

13. 맛(味 rasa)

* 감촉은 땅, 물, 바람의 3대임

성의 물질(bhāva-rūpa)

14. 여성(itthibhāva 혹은 itthatta)

15. 남성(pumbhāva 혹은 purisatta)

심장의 물질(hadaya-rūpa)

16. 심장토대(hadaya-vatthu)

생명의 물질(jīvita-rūpa)

17. 생명기능(命根 jīvita-indriya)

음식의 물질(āhāra-rūpa)

18. 영양소(ojā)

                  추상적인 물질(anipphanna-rūpa) - 10

한정하는 물질(pariccheda-rūpa)

19. 허공의 요소(空界 ākāsa-dhātu)

암시의 물질(viññatti-rūpa)

20. 몸의 암시(kāya-viññatti)

21. 말의 암시(vacī-viññatti)

변화의 물질(vikāra-rūpa)

22. 물질의 가벼움(rūpassa-lahutā)

23. 물질의 부드러움(rūpassa-mudutā)

24. 물질의 적합함(rūpassa-kammaññatā)

특징의 물질(lakkhaṇa-rūpa)

25. 생성(upacaya)

26. 상속(santati)

27. 쇠퇴(jaratā)

28. 무상함(aniccatā)











               <도표 8> 오문전향의 인식과정의 등급



(1) 매우 큰 것

1   B [A C U P E Sp St V J J J J J J J T T] B


(2) 큰 것

2   B [A A C U P E Sp St V J J J J J J J B] B

3   B [A A A C U P E Sp St V J J J J J J J] B


(3) 작은 것

4  B [A A A A C U P E Sp St V V V B B B B] B

5  B [A A A A A C U P E Sp St V V V B B B] B

6  B [A A A A A A C U P E Sp St V V V B B] B

7  B [A A A A A A A C U P E Sp St V V V B] B

8  B [A A A A A A A A C U P E Sp St V V V] B

9  B [A A A A A A A A A C U P E Sp St V V] B


(4) 매우 작은 것

10 B [A A A A A A A A A A C C B B B B B] B

11 B [A A A A A A A A A A A C C B B B B] B

12 B [A A A A A A A A A A A A C C B B B] B

13 B [A A A A A A A A A A A A A C C B B] B

14 B [A A A A A A A A A A A A A A C C B] B

15 B [A A A A A A A A A A A A A A A C C] B


B: Bhavaga(바왕가) A: Atīta-bhavaṅga(지나간 바왕가)

C: Bhavaṅga-calanda(바왕가의 동요)

U: Bhavaṅga-uccheda(바왕가의 끊어짐)

P: Pañca-dvāra-āvajjana(오문전향)  E: 안식(眼識)

Sp: Sampaṭichana(받아들임)   St: Santīraṇa(조사)

V:  Voṭṭhapana-citta(결정) J: Javana(속행)  T: Tadārammaṇa(등록)   



             <도표 9> 눈의 문[眼門]에서의 인식과정(매우 큰 대상)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

···

···

···

···

···

···

···

···

···

···

···

···

···

···

···

···

···

···

 

바왕가의흐름

 

지나간바왕가

바왕가의동요

바왕가끊어짐

오문전향

안식

받아들임

조사

결정

        ← 자와나 →

바왕가의 흐름

 

 * 귀[耳]· 코[鼻]· 혀[舌]· 몸[身]의 문에서의 인식과정도 이와 동일           




                <도표 10> 의문인식과정의 제한된 속행과정



(1) 선명한 것


B {C U M J J J J J J J T T} B


(2) 희미한 것


B {C U M J J J J J J J} B


B: 바왕가의 마음(bhavaga-citta) - 과보의 마음

C: 바왕가의 동요(bhavaṅga-upaccheda) - 과보의 마음

U: 바왕가의 끊어짐(bhavaṅga-avajjana-citta) -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

M: 의문전향식(manodvāra-avajjana-citta) -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

J: 자와나의 마음(javana-citta) - 아라한이 아닌 경우에는 선한 마음 또는 불선한 마음

T: 등록하는 마음(tadārammaṅa-citta) - 과보의 마음




                         <도표 11> 24가지 조건

1

원인의 조건(因緣 hetu-paccaya)

2

대상의 조건(所緣緣 ārammaṇa-paccaya)

3

지배의 조건(增上緣adhipati-paccaya)

 

(1) 대상으로서 지배하는 조건

 

 (2) 함께 생긴 것으로서 지배하는 조건

 

 틈없이 뒤따르는 조건(無間緣 anantara-paccaya)

5

더욱 틈없이뒤따르는 조건(等無間緣 samanantara-paccaya)

6

함께 생긴 조건(俱生緣 sahajāta-paccaya)

7

서로 지탱하는 조건(相互緣 aññamañña-paccaya)

8

의지하는 조건(依止緣 nissaya-paccaya)

 

(1) 함께 생긴 것으로 의지하는 조건

(2) 먼저 생긴 것으로 의지하는 조건

(ㄱ) 토대가 먼저 생긴 것으로 의지하는 조건

(ㄴ) 토대와 대상이 먼저 생긴 것으로 의지하는 조건

9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親依止緣 upanissāya-paccaya)

 

(1) 대상으로써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

(2) 틈 없이 뒤따르는 것으로써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

(3) 자연적으로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

10

먼저 생긴 조건(前生緣 purejāta-paccaya)

 

(1) 토대로써 먼저 생긴 조건

(2) 대상으로써 먼저 생긴 조건

11

뒤에 생긴 조건(後生緣 pacchājāta-paccaya)

12

반복하는 조건(數數修習緣 āsevana-paccaya)

13

업의 조건(業緣 kamma-paccaya)

 

(1) 함께 생긴 업의 조건(sahajāta-kamma-paccaya)

(2) 함께 생기지 않은 업의 조건, 또는 다른 순간에 생긴 업의 조건(nānākkhaṇika-kammapaccaya)

14

과보의 조건(異熟緣 vipāka-paccaya)

15

음식의 조건(食緣 āhāra-paccaya)     

 

(1) 물질의 음식의 조건(rūpa-āhāra-paccaya)

(2) 정신의 음식의 조건(nāma-āhāra-paccaya)

16

기능의 조건(根緣 indriya-paccaya)

 

(1) 미리 생긴 기능의 조건

(2) 물질의 생명기능[命根]의 조건

(3) 함께 생긴 기능의 조건

17

선의 조건(禪緣 jhāna-paccaya)

18

도의 조건(道緣 magga-paccaya)

19

서로 관련된 조건(相應緣 sampayutta-paccaya)

20

서로 관련되지 않은 조건(不相應緣 vippayutta-paccaya)

 

(1) 함께 생긴 관련되지 않은 조건

(2) 먼저 생긴 관련되지 않은 조건

(3) 뒤에 생긴 관련되지 않은 조건

21

존재하는 조건(有緣 atthi-paccaya)

 

(1) 함께 생긴 존재하는 조건

(2) 미리 생긴 존재하는 조건

(3) 뒤에 생긴 존재하는 조건

(4) 음식으로 존재하는 조건

(5) 기능으로 존재하는 조건

22

존재하지 않는 조건(非有緣 natthi-paccaya)

23

떠나가버린 조건(離去緣 vigata-paccaya)

24

떠나가버리지 않은 조건(不離去緣 avigata-paccaya)





                         <도표 12> 업의 개요  


1

기능에 따라

 

(1) 생산업(janaka-kamma)

(2) 돕는업(upatthambhaka-kamma)

(3) 방해업(upapīḷka-kamma)

(4) 파괴업(upaghātaka-kamma)

2

성숙하는 순서에 따라

 

(1) 무거운 업(garuka-kamma)

(2) 임종에 다다라 지은 업(āsanna-kamma)

(3) 습관적인 업(āciṇṇa-kamma)

(4) 이미 지은 업(kaṭattā-kamma)

3

성숙하는 시간에 따라

 

(1) 금생에 받는 업(diṭṭhadhammavedanīya-kamma)

(2) 다음 생에 받는 업(upapajjavedanīya-kamma)

(3) [세번째 생부터]끊임없이 받는 업(aparāpariyavedanīya-kamma)

(4) 효력이 없는 업(ahosikamma-kamma)

4

성숙하는 장소에 따라

 

 

 

(1) 불선업(akusala-kamma)

(2) 욕계 선업(kāmāvacara-kusala-kamma)

(3) 색계 선업(rūpāvacara-kusala-kamma)

(4) 무색계 선업(arūpāvacara-kusala-kamma)

                       


           <도표 13> 네 가지 색계선[四種禪]과 다섯 가지 색계선[五種禪]


                         경장에서 말하는 네 가지 색계선[四種禪]

초선(初禪)

일으킨 생각(尋 vitakka), 지속적 고찰(伺 vicāra), 희열(喜 pīti), 행복(樂 sukha), 삼매(定 samādhi)

이선(二禪)

희열(喜 pīti), 행복(樂 sukha), 삼매(定 samādhi)

삼선(三禪)

행복(樂 sukha), 삼매(定 samādhi) 

사선(四禪)

평온(捨 upekkhā), 삼매(定 samādhi) 

                         논장에서 말하는 다섯가지 색계선[五種禪]

초선(初禪)

일으킨 생각(尋 vitakka), 지속적 고찰(伺 vicāra), 희열(喜 pīti), 행복(樂 sukha), 삼매(定 samādhi)

이선(二禪)

지속적 고찰(伺 vicāra), 희열(喜 pīti), 행복(樂 sukha), 삼매(定 samādhi) 

삼선(三禪)

희열(喜 pīti), 행복(樂 sukha), 삼매(定 samādhi)

사선(四禪)

행복(樂 sukha), 삼매(定 samādhi)

오선(五禪)

평온(捨 upekkhā), 삼매(定 samādhi)



***영어 원문 :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기본자료실> 190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