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타스님

[제3장] 으뜸가는 복을 심는 법보시

通達無我法者 2007. 5. 18. 16:00

 

 

 

  으뜸가는 복을 심는 법보시


  두번째 보시는 법시이다.  흔히 법보시라고 칭하는 법시는 사람들이 온전한 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진리를 베풀어주는 것이다. 곧 재물을 보시하는 것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재물을 보시할 수 있는 근본정신을 나누어 주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수십 년 동안 미국의 원조를 받아왔다. 그런데 이러한 물질적인 보시에 대해 '우리의 정신을 미국에 팔아온 것이 아니냐' 하는 일부 의식있는 사람들의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정녕 우리가 우리의 속알맹이인 정신은 잃어버리고 물질적인 풍요에만 만족한다면, 그것이 개인이 되었든 국가가 되었든 결과는 비참해질 수밖에 없다. 조금이라도 지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면서도 정신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요즘 시중에서는 하나에 수십만원 하는 속옷, 수천만원짜리 가구가 잘 팔려나간다고 한다. 이것이 무엇을 일려주는 것인가?

  자기 정신을 팔아먹고 분수를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이 이 땅에 많이 살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때가 문제이다. 바로 이러한 때일수록 우리 모두가 올바른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법보시를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참다운 법보시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금강경>>에는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로 보시하는 것보다 금강경 사구게 한 구절을 일러주는 것이 낫다."고 한 구절이 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금강경>>을 외워서 줄줄 읊어주는 것이 복이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 내용을 깨닫도록 일러주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내용을 깊이 깨달아야 복이 되는 것이고, 그 참뜻을 이해시켜야 진짜 그 사람의 복이 되기 때문이다.

 

  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금강경>> 사구게 중에는 "모양이 있는 것이 다 허망하다."는 구절이 있다. 그렇다면 그 구절을 들려준다고 하여 누구나 무상함을 절감할 수 있다는 것인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듣고도 무상을 절감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 구절을 설할 때는 모양 있는 모든 것이 진정으로 허망하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허망한 것을 깨우치되 팔순 할머니와 스무살 처녀를 같이 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쪽은 예쁘고 저쪽은 밉다는 차별심만 있으면 말로만 허망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확증을 심어줄 수만 있다면 <<금강경>>의 말씀대로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로써 보시한 것보다 더 많은 복을 짓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복 짓는 일 중에서 깨달음을 얻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해주는 복보다 더 큰 복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위 사람들에게 성심성의를 다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여, 그들의 참 정신을 일깨워주도록 하여야 한다. 그리고 아는 것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능력껏 불교책을 법보시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책을 법보시할 때는 꼭 불경이 아니라도 좋다. 오히려 어려운 불경보다는 읽어서 진리를 분명히 깨우칠 수 있고 정신을 온전하게 만들어주는, 쉬운 불교책이나 글을 법보시하는 것이 더 좋을 경우도 있다.

  참되게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해주는 책, 마음의 눈을 열어줄 수 있는 글을 가깝고 먼 사람에게 두루 공양한다면, 그 공덕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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