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능엄경(楞嚴經)

능엄경 제4권

通達無我法者 2007. 7. 6. 17:18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

그때 부루나가 대중 속에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 어깨를 메고 오른 무릎을 꿇고
합장하며 공손하게 부처님께 아뢰었다.

  “위엄 있고 덕 높으신 세존께서 중생을 위하여 여개의 가장 높은 진리를 잘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세존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설법하는 사람들 중에 제가 제일이라’고 하셨사온데
   지금 부처님의 미묘한 법음을 듣자오니
   마치 귀먹은 사람이 백 걸음 밖에서 모기 소리를 듣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본래 볼 수도 없는 것이거늘 더구나 어떻게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해 주셔서 저로 하여금 의혹을 조금은 덜어 주셨사오나
   저는 아직도 그 뜻을 끝까지 추구하여 의혹이 없는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나이다.

   세존이시여, 아난 같은 무리들은 비록 깨달았다고는 하나
   익혀온 습기와 번뇌가 아직 다 없어지지 못하였거니와
   저희들은 모임 가운데 번뇌가 없는 데까지 이른 자들이므로
   비록 모든 번뇌를 다 끊어버렸다 하더라도
   지금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음을 듣자옵고는 오히려 의혹과 회의에 얽혔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세간에 일체의 근(根). 진(塵). 음(陰). 처(處).계(界) 등이
   다 여래장이어서 깨끗하고 본래 자연 그대로라고 한다면
   어찌하여 홀연히 산과 강, 그리고 땅덩어리 같은 모든 물질들이 생겨나서
   차례로 변천하여 끝마쳤다가는 다시 시작하곤 하는 것입니까?

   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흙과 물, 불과 바람은
   본래 성품이 원융하여 법계에 두루 퍼져서 맑고 고요히 늘 머문다’고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흙의 성품이 두루 퍼진다면 어떻게 물은 용납하며
   물의 성품이 두루 퍼진다면 불은 생기지 않아야 할 것인데
   어떻게 물과 불의 두 성분이 허공에 가득하여 서로 능멸(陵滅)하지 아니하나이까?

   세존이시여, 흙의 성질은 가로막는 것이고 허공의 성질은 텅텅 빈 것인데
   어찌하여 두 가지가 다함께 법계에 두루 퍼진다고 하십니까? 
   저는 그 이치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원컨대 부처님께서는 큰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들의 어두운 구름을 벗겨 주소서.“

이렇게 말하고서는 모든 대중들과 함께 오체(五體, 全身)를 땅에 던지고
여래의 더없이 높고 자비로운 가르침을 흠모하여 목마르게 기다렸다.

그때 세존께서 부루나와 모임 가운데에서 번뇌가 다 끊어진 더 배울 것이 없는[無學]
모든 아라한들에게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오늘 이 모임을 위해서
   수승한 이치 속에서도 참되고 더욱 수승한 이치를 설명하여
   너희 모임 중에서 소승인 성문들과 두 가지 빈 것을 얻지 못한 모든 이들과
   상승(上乘)에 회향한 아라한 등으로 하여금
   모두 일승의 고요하고 한적한 도량인 훌륭한 *아련야(阿練惹)에서
   올바르게 수행할 방법을 얻게 하고자 하나니
   너는 지금 자세히 들어라. 마땅히 너를 위하여 설명하리라.”

부루나 등이 부처님의 법음을 흠모하여 잠자코 들으려 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부루나야, 네가 말한 것과 같이
   ‘깨끗하여 본래 자연 그대로라면 어떻게 홀연히 산과 강과 대지가 생기겠느냐?’고 하는데
   너는 내가 늘 ‘성각(性覺)은 오묘하고 밝으며 본각(本覺)은 밝고 오묘하다’고 한 말을 듣지 못했느냐?”

부루나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그러한 이치를 말씀하시는 것을 저는 늘 들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말한 깨달음이니, 밝음이니 하는 것은 성품이 밝은 것을 깨달음이라고 이름 한 것이냐,
   아니면 깨달음이 밝지 못한 것을 밝은 깨달음이라고 이름한 것이냐?”

부루나가 말했다.

  “만약 이와 같이 밝지 못한 것을 이름하여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밝혀야 할 대상이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밝힐 대상이 없다면 밝혀야 할 깨달음도 없으리라.

   밝힐 대상이 있으면 깨달음이 아니요 밝힐 대상이 없으면 밝힐 것이 아니니
   밝음이 없으면 깨달음의 맑고 밝은 성품이 아니니라.
   성품의 깨달음은 반드시 밝은 것이건만 허망하게 밝혀야 할 깨달음이라고 하느니라.

   깨달음은 밝힐 수 있는 것이 아니건만 밝힘으로 인하여 밝혀야 할 대상으로 만들었으니
   그 밝혀야 할 것이 이미 망령되게 이루어지면
   너의 허망한 작용의 능력을 생기게 해서
   같고 다름이 없는 가운데서 불꽃처럼 성하게 다름을 이루느니라.

   저 다른 것을 다르다고 여겨서 그 다른 것으로 인해 같음이 성립되었고
   같음과 다름을 분명히 구분하므로 그로 인해 다시 같음도 없고 다름도 없음이 성립되었다.
   이렇게 gms들리고 어지러운 것이 서로 작용하면 피로가 생기고 그 피로가 오래되면 번뇌가 생겨서
    자연 서로 혼탁하게 되느니라. 또 이로 말미암아 오염과 번뇌가 일어나느니라.

   움직여 일어나면 세계가 되고 고요하게 있는 것은 허공이다.
   허공은 같으나 세계는 다르니 그 같고 다름이 없는 것이 참다운 현상계[有爲法]이니라.

 

 

-세계와 중생의 시초

깨달음의 밝음과 허공의 어두운 것이 서로 작용하여 요동하기 때문에
   풍륜(風輪)이 생겨나서 세계를 잡아 지탱[執持]하는 것이다.   
   그리고 허공으로 인하여 흔들림이 생겨나고 밝은 것을 굳혀서 막힘이 이루어지나니
   저 금은 보배는 밝은 깨달음이 굳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금륜(金輪)이 생겨서 국토를 보전하고 지탱하는 것이며,
   깨달음이 굳어져서 금은보배가 되고 밝음이 흔들려서 바람이 일어나나니
   바람과 금이 서로 마찰하므로 불빛이 생겨 변화하는 성품이 되었으며,
   금보(金寶)의 밝음이 윤택한 기운을 생기게 하고 불빛은 위로 치솟기 때문에
   수륜(水輪)이 생겨 시방세계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불은 위로 오르고 물은 흘러 내려서 서로 발하여 굳어져서
   젖은 곳은 큰 바다가 되고 마른 곳은 육지와 섬이 되었으니
   이러한 이치로써 저 바다 가운데에서는 불빛이 늘 일어나고
   육지와 섬 가운데에서는 강물과 냇물이 늘 흐른다. 
   물의 힘이 불보다 열세이면 맺혀서 높은 산이 된다.

   그러므로 산에 돌이 부딪치면 불꽃이 일어나고 녹으면 물이 되며
   흙의 힘이 물보다 열세이면 돋아나서 풀이나 나무가 된다.
   그러므로 숲과 늪이 타버리면 흙이 되고 쥐어짜면 물이 된다.
   서로 엉켜서 허망하게 발생하여 번갈아 서로 종자가 되나니
   이러한 인연으로 세계가 서로 이러지느니라.

   또 부루나야, 밝은 것이 허망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깨달음의 밝은 것이 허물이 되니 허망한 것이 이미 성립되면
   밝은 이치가 이를 앞지르지 못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듣는 것이 소리를 벗어나지 못하며
   보는 것이 색깔을 벗어나지 못하여 빛과 향기, 맛과 촉감 등 여섯 가지 허망함이
   이루어지나니 그로 말미암아서 보고 듣고 깨닫고 느끼는 것이 나누어져서
   같은 업장끼리 서로 얽히고 어울리고 떨어져서 변화를 이루느니라.

   보는 것이 밝아서 빛이 발하고 밝게 봄으로 해서 생각이 이루어지나니
   다르게 보면 미움이 생기고 생각이 같으면 사랑이 생겨서
   그 사랑이 흘러 종자가 되고 생각을 받아들여 태(胎)가 되어서
   서로 어우러짐이 발생하게 되고 같은 업장끼리 끌어들이게 된다.
   그러므로 그 인연으로 해서 *갈라람(羯羅籃)과 알포담(遏蒲曇) 등이 생기느니라.

   태로 생겨나는 것과 알로 생겨나는 것, 습지에서 생겨나는 것과 화생으로 생겨나는 것이
   제각기 응할 바를 따라서 알로 생겨나는 것은 오직 생각으로서만 생겨나고,
   태로 생겨나는 것은 정(情)으로 인해 생겨나며,
   습기로 생겨나는 것은 합하여 느낌으로서 생기고
   화생은 떠나서 응함으로 생기니,
   정(情). 생각[想]. 합(合). 떠남[離] 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것들이
   다시 서로 변하고 바뀌어서 업을 받는데 그 업을 따라 혹은 날고 혹은 잠기고 하나니
   그러한 인연으로 중생이 서로 계속되느니라.

   부루나야, 생각과 사랑이 함께 맺어져서 애욕을 여읠 수가 없어서
   모든 세간의 부모와 자손이 서로 낳아 끊이지 않나니
   이러한 것들은 탐욕(貪慾)이 근본이 되느니라.
   탐욕과 사랑이 함께 불어나 탐욕을 그치게 할 수 없으므로
   모든 세간이 알로 생겨나는 것, 변화로 생겨나는 것, 습기로 생겨나는 것,
   태로 생겨나는 것의 강하고 약한 힘을 따라 번갈아 가며 서로 잡아먹나니
   이것들은 살생을 탐하는 것이 근본이 되느니라.

   사람이 양을 잡아먹었을 경우 그 양은 죽어서 사람이 되고 사람은 죽어서 양이 되어,
   이러한 열 가지 생명을 지닌 무리들에 이르기까지 죽고 나고, 나고 죽고 하여
   번갈아 가며 서로 잡아먹으면서 악업이 함께 생겨 미래의 세계가 다하도록 계속되나니
   이러한 것 등은 도적질을 탐하는 것이 근본이 되느니라.

   네가 나의 목숨을 저버리면 나는 너의 빚을 갚아서
   이러한 인연으로 백 천겁을 지나도록 항상 나고 죽음에 머물며,
   너는 나의 마음을 사랑하고 나는 너의 얼굴을 어여삐 여겨서
   이러한 인연으로 백 천겁이 지나도록 항상 얽매이게 되느니라.

   오직 살생과 도적질 그리고 음욕, 이 세 가지가 근본이 되나니
   그러한 인연으로 업장과 과보가 서로 이어지느니라.

   부루나야, 이러한 세 가지 뒤바뀜이 서로 계속되는 것은
   모두 밝은 깨달음인 밝고 또렷하게 아는 성품이 분명하게 알므로 해서 생기는 현상이며
   허망함을 따라 보는 것으로 인하여 생기나니
   산과 강, 그리고 이 땅덩어리의 모든 작용하는 현상들이 차례로 변하여 흘러도
   이 허망으로 인하여 끝나면 다시 시작하곤 하느니라.“

부루나가 말했다.

  “만약 이 오묘한 깨달음과 본래 오묘한 각명(覺明)은
   여래의 마음과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것이거늘 
   까닭 없이 산과 강, 이 땅덩어리의 모든 작용이 있는 현상들이 생긴다고 하면
   부처님께서는 지금 오묘하고 빈 명각(明覺)을 얻었사온데
   산과 강, 그리고 이 땅덩어리의 작용이 있는 번뇌의 습기가 언제 다시 생기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마치 혼미한 사람이 어떤 *취락(聚落)에서
   남쪽을 북쪽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과 같나니
   이러한 미혹은 미혹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냐, 깨달음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냐?”

부루나가 말했다.

“이렇게 혼미한 사람은 미혹으로 인한 것도 아니며
   또한 깨달음으로 인한 것도 아닙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미혹은 본래 뿌리가 없는 것인데 어떻게 깨달음으로 인한 것이라고 하겠으며
   깨달음이 미혹으로 생긴 것이 아닌데 어떻게 깨달음으로 인한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 미혹한 사람이 정말로 미혹하였을 때에
   어떤 깨달은 사람이 옳게 지시하여 깨닫게 한다면
   부루나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사람이 비록 미혹하였었지만 그 마을[聚落]에서 또 다른 미혹이 생기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부루나야, 시방의 부처님도 역시 그러하니라. 
   그 미혹은 근본이 없어서 그 성질이 필경 빈 것이니
   옛날에는 본래 미혹하지 않았었으나 미혹이 있는 듯한 데서 깨닫나니
   미혹을 깨달아 미혹이 없어지면 깨달은 사람에게는
   다시는 미혹이 생기지 않느니라.

   또한 눈병이 난 사람이 허공의 꽃을 보는 것과 같아서
   눈병이 없어질 것 같으면 그 꽃은 허공에서 저절로 없어지나니
   갑자기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저 허공의 꽃이 없어진 빈자리에서  
   그 허공의 꽃이 다시 생기기를 기다린다면
   너는 그러한 사람을 볼 적에 어리석다고 하겠느냐, 지혜롭다고 하겠느냐? “

“허공에는 본래 꽃이 없거늘 허망으로 인하여 생기고 없어짐을 보는 것이니
   그 꽃이 허공에서 없어짐을 보는 것도 이미 뒤바뀐 것인데
   다시 나오기를 기다린다면 이는 실로 미친 바보짓입니다.   
   어찌하여 이러한 미친 바보짓을 하는 사람에게 어리석다느니 지혜롭다느니 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알고 있는 것과 같다면 어찌하여 ‘모든 부처님의 오묘하게 깨달은
   밝은 허공에서 어느 때에 다시 산과 강, 그리고 이 땅덩어리가 나옵니까?’라고 묻느냐?

   또 마치 광석에 순금이 섞여 있다가 그 금이 완전하게 순금이 되고 나면
   다시는 광석에 섞이지 않는 것과 같으며,
   마치 나무가 불에 타서 재가 되면 다시는 나무가 되지 못하는 것과 같나니,
   모든 부처님의 보리와 열반도 역시 그와 같느니라.

 

 

-공불공여래장(空不空如來藏)

부루나야, 또 네가 묻기를 '흙과 물, 불과 바람의 본래 성품이 원융하여
   우주에 두루하였다면 어째서 물의 성품과 불의 성품이 서로 능멸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고,
   또 묻기를 '허공과 땅덩어리가 함께 우주에 두루하였다면 서로 용납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부루나야, 비유하면 허공의 본체는 여러 가지 모양이 아니지만
   그래도 저 여러 가지 모양이 나타남을 막지 않는 것과 같느니라.

   그 까닭이 모엇이냐 하면, 부루나야, 저 커다란 허공이 해가 비치면 밝고 구름이 끼면 어두우며,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비가 개이면 맑으며, 기운이 엉키면 탁하고
   흙먼지가 쌓이면 흙비가 되며, 물이 맑으면 밝게 비치기 때문이니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러한 여러 방면에서 작용하는 모든 현상들이
   저것들로 인하여 생기느냐, 허공을 따라 있는 것이냐?

   만약 저것들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라면, 부루나야,
   장차 해가 비칠 적에는 이미 그것은 햇빛이므로 시방세계가 다 같은 햇빛이어야 하거늘
   어찌하여 공중에서 다시 둥근 해를 보게 되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 밝음은 해도 아니요, 허공도 아니며, 허공이나 해, 또한 다른 것도 아니니라.

   그 현상을 살펴보면 본래가 허망해서 가리켜서 말할 수 없음이
   마치 허공의 꽃에서 부질없이 열매가 맺히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나니,
   어떻게 서로 능멸하는 이치를 따지겠느냐?

   성품을 살펴보면 본래 참된 것이라서 오직 오묘하고 밝은 깨달음일 뿐이다.
   오묘하고 밝은 깨달음의 마음이 본래 물이나 불이 아니거늘
   어찌하여 또다시 서로 용납하지 못하느냐고 묻느냐?

   참되고 오묘하고 밝은 깨달음도 역시 그러하니라.
   네가 허공으로써 밝히면 허공이 나타나고 흙과 물, 불과 바람으로 각각 밝히면
   곧 그것들도 각각 나타나며 만약 한꺼번에 밝히면 곧 다함께 나타나느니라.

   어떤 것을 함께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는가 하면 부루나야,
   마치 물 속에 해의 그림자가 나타나는 것과 같나니,
   두 사람이 함게 물 속의 해를 보다가 동쪽과 서쪽으로 제각기 가면
   물 속의 새도 제각기 두 사람을 따라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가서
   본래부터 표준한 곳이 없거늘 따져 말하기를
   '저 해는 하나인데 어찌하여 제각기 가느냐?'고 하며,
   '각자 가는 해가 이미 둘인데 어찌하여 하나로 나타나느냐?'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완연히 허망하여 의지할 수가 없느니라.

   부루나야, 너는 물질과 허공으로써 여래장에서 서로 밀어내고 서로 빼앗으므로
   여래장도 따라서 물질과 허공이 되어 우주에 두루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서 바람은 움직이고 허공은 맑으며 해는 밝고 구름은 어두운 것인데,
   중생들은 어리석고 미련해서 깨달음을 저버리고 허망한 티끌과 어울리므로
   번뇌가 일어나서 세간의 현상이 생기게 되느니라.

   나는 오묘하고 밝은 것이 생겨나거나 없어지지도 않는 것으로서
   여래장과 합하였는데 여래장이 오직 오묘하고 밝은 깨달음이므로
   우주를 원만하게 비추고 있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서 하나가 한량없는 것이 되고 한량없는 것이 하나가 되기도 하며,
   작은 가운데 큰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 큰 가운데 작은 것을 나타내기도 하며,
   도량에서 움직이지 않고 시방세계에 두루퍼지며,
   몸으로 시방의 끝없는 허공을 머금으며,
   한 털끝에서 보왕(寶王)의 세계를 나타내며,
   작은 먼지 속에 앉아서 큰 법륜(法輪)을 굴리느니라.

   번뇌를 없애고 깨달음에 합하였으므로 진여인 오묘한 깨달음의 밝은 성품을 발하나니,
   여래장의 본래 오묘하고 원만한 마음은 마음도 아니요 허공도 아니며,
   흙도 아니요 물도 아니며, 바람도 아니요 불도 아니며,
   눈도 아니요 귀.코.혀.몸.생각도 아니며,
   빛도 아니요 소리.향기.맛.촉감.법도 아니며,
   안식계(眼識界)도 아니요 나아가 의식계(意識界)도 아니며,
   밝음도 밝음이 없음도 아니요 밝음과 밝음이 없는 것마저 다함도 아니며,
   이와 같이 나아가 늙음도 아니여 죽음도 아니며, 늙음과 죽음이 다함도 아니며,
   괴로움[苦]도 아니요 괴로움의 원인[集]도 아니며,
   괴로움을 없애는 자리[滅]도 아니요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道]도 아니며,
   지혜도 아니요 증득함도 아니며, 보시바라밀도 아니요 계율바라밀도 아니며,
   인욕바라밀도 아니요 정진바라밀도 아니며, 선정[禪那]바라밀도 아니요 반야바라밀도 아니니라.

   이와 같아서 더 나아가 여래도 아니요 응공[阿羅訶]도 아니며, 정변지도 아니요
   대열반도 아니며, 항상함[常]도 아니요 즐거움[樂]도 아니며,
   주체[我]도 아니요 청정함[淨]도 아닌데까지 이르나니
   이렇게 세간과 출세간도 모두 아니기 때문이니,
   곧 여래장의 원래 밝고 오묘한 마음은 곧 마음이요 허공이며,
   흙.물.바람.불이요, 곧 눈.귀.코.혀.몸.생각이며,
   곧 빛.소리.냄새.맛.촉감.법(法)이요,
   곧 눈으로 보아 의식하는 경계이며,
   이렇게 나아가 뜻으로 생각하여 의식하는 경계이며,
   곧 밝음과 밝음이 없음이요, 밝음과 밝음이 없는 것까지 다끊음이며,
   이렇게 나아가 곧 늙음이요, 죽음이며, 곧 늙음과 죽음이 다함이요,
   곧 괴로움.괴로움의 원인.괴로움을 없애는 자리.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지혜.증득함이며,
   곧 보시.계율.인욕.정진.선정.반야바라밀이고
   이렇게 나아가 곧 여개.응공.정변지이며, 곧 대열반이요,
   곧 항상함.즐거움[樂].주체[我].청정[淨]이니
   이것 모두가 곧 세간법과 출세간법이므로
   곧 여래장인 오묘하고 밝은 마음의 근본은 그런 것도 아니요 그렇지 아니함도 아니며,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 것이니라.

   어찌하여 세간 *삼유(三有)의 중생들과 출세간의 성문과 연각들이 알고 있는 마음으로
   부처님 최상의 보리를 추측하고 헤아려서 세간의 언어로써 부처님의 지견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

   비유하면 마치 거문고.비파.*공후(箜篌)가 비록 오묘한 소리를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만약 사람의 손가락이 없으면 끝내 소리를 낼 수 없는 것과 같으니
   너와 중생들도 이와 같아서 보배로운 깨달음의 참마음이 각각 원만하건만
   만일 내가 손가락을 놀리면 해인(海印)이 빛을 발하거늘
   너는 잠시만 마음을 움직여도 번뇌가 먼저 일어나나니
   이는 가장 높은 깨달음의 길을 부지런히 구하지 않고 소승을 좋아하여
   적은 것을 얻고도 만족하게 여기는 탓이니라."

부루나가 말했다.

  "저와 부처님은 보배의 깨달음이 원만하게 밝아서 진실하고 오묘하고 깨끗한 마음이 다름없기 원만합니다만,
   저는 시작도 없는 과거로부터 허망한 생각을 내어서 오랫동안 윤회 속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지금 성인의 과업을 이루었으나 아직도 완전하지 못하옵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모든 허망함이 다 없어져서 홀로 오묘하게 참되고 항상하시니
   감히 여래께 묻습니다만
   모든 중생들은 무슨 원인으로 허망한 생각이 있어서
   스스로 오묘하게 밝은 것을 가리우고 이렇게 윤회에 빠져 허덕이나이까?"

부처님께서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비록 의심은 없앴으나 나머지 의혹이 다 없어지지 못하였으니
   내가 이 세상에 현재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가지고 다시 네게 묻겠다.
   너는 듣지도 못하였느냐?
   시라벌성에 *연야달다(演若達多)가 갑자기 이른 새벽에 거울로 얼굴을 비추어 보다가
   거울 속에 있는 머리의 눈썹과 눈은 볼만하다고 좋아하고 자기 머리의 얼굴과 눈은
   보이지 않는다고 짜증을 내면서 그것을 도깨비라고 여겨 까닭없이 미쳐 달아났다 하니
   너는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이 무슨 원인으로 까닭없이 미쳐 달아났겠느냐?"

부루나가 말했다.

  "그 사람은 마음이 미친 것일 뿐 다른 까닭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오묘한 깨달음의 밝은 마음은 본래 원만하고 밝고 오묘한 것이니
   이미 허망한 생각이라고 하였던들 어떻게 원인이 있다고 하겠으며,
   만약 원인이 있다면 어떻게 허망한 생각이라고 하겠느냐? 
   스스로 일으킨 모든 망상들이 전전하며 서로 원인이 되어 미혹을 좇아서,
   미혹을 쌓으면서, 끝없는 세월을 지내왔으므로
   비록 부처님께서 드러내어 밝혀 주었어도 오히려 돌이키지 못하느니라.

   이와같이 미혹한 원인은 미혹으로 인하여 저절고 생긴 것이니
   미혹함이 원인이 없다는 것을 알면 허망한 생각이 의지할 데가 없어서
   오히려 생기는 것조차 없으리니 무엇을 없애려느냐?
   보리를 얻은 자는 잠을 깬 사람이 꿈 속의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아서
   마음에는 비록 꿈 속의 일이 분명하지만 무슨 수로 꿈 속의 물건들을 취할 수 있겠느냐?
   더구나 원인이 없어서 본래부터 있지도 않은 것이겠느냐?

   저 시라벌성의 연야달다와 같은 경우는 무슨 인연이 있어서
   자기의 머리를 무서워하면서 달아났겠느냐?
   홀연히 미친 증세가 없어지면 그 머리는 밖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니,
   비록 미친 증세가 없어지지 않았다고 한들 어찌 잃어버린 것이겠느냐?
   부루나야, 허망한 성품이 이러하니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하겠느냐?

   네가 다만 세간에 업장과 과보 그리고 중생,
   이 세 종류가 서로 연속되는 것을 따라 분별하지 아니하면,
   세 가지 인연이 끊어지기 때문에 세 가지 원인이 생기지 아니하면
   곧 너의 마음 속에 연야달다의 미친 성품은 자연 사라질 것이다.

   무명이 없어지면 곧 보리의 뛰어나게 깨끗하고 밝은 마음이 본래 우주에 두루 퍼져서
   다른 사람에게서 얻어진 것이 아니니 어찌하여 애써 수고롭게 닦아서 증득하겠느냐?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의 옷 속에 여의주를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미처 알지 못해서 타향에서 곤궁하게 돌아다니며 빌어먹는 것과 같아서
   비록 가난하긴 하지만 여의주를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홀연히 지혜 있는 사람이 그 여의주를 가르쳐 주면 마음 속에 기원하던 대로 큰 부자가 되리니
   그때서야 비로소 그 신비로운 여의주가 밖에서 얻어진 것이 아님을 깨달으리라."

 

 

-인연이란 무엇인가?

그때 아난이 대중 가운데 있다가 부처님의 발에 이마를 대고 예를 올린 후 일어나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께서 지금 말씀하시기를 '살생.도적질.음욕의
   세 가지 업연이 끊어짐으로 해서 세 가지 원인이 생기지 아니하면
   마음속에 연야달다의 미친 성품이 자연 없어지리니
   미친 성품이 없어지면 이는 곧 보리인지라,
   사람에게서 얻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因)과 연(緣)이 분명한 것이거늘
   어찌하여 부처님께서는 인연을 완전히 버리셨습니까?
   저도 인연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열리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이치는 어찌 나이 어린 저희 성문들뿐이겠습니까?
   지금 이 모임 가운데 있는 대목건련과 사리불과 수보리등도 늙은 범지(梵志)를 추종하다가
   부처님의 인연법을 듣고서 발심하여 깨달아 번뇌가 끊어지는 도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지금 '보리는 인연을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왕사성의 구사리 등이 말하는 '자연이라야 제일의(第一義)가 된다'고 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큰 자비를 베푸시어 혼미하고 답답한 것을 열어 밝혀주시옵소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마치 성 가운데 있는 연야달다가 만약 미친 성품의 인연을 제거하여 없앨 수만 있다면
   미치지 아니한 성품이 자연히 나오는 것과 같아서 인연과 자연의 이치가 여기에서 끝나느니라.

   아난아, 연야달다의 머리가 본래 자연 그대로일진댄 본래부터 스스로 그러한 것이어서
   자연 아닌 것이 없거늘 무슨 인연 때문에 머리를 두려워하여 미쳐서 달아났느냐?

   만약 자연인 머리가 인연 때문에 미쳤다면 어찌하여 자연은 인연 때문에 잃어지지 않느냐?
   본래의 머리는 잃은 것이 아니거늘, 미쳐 두려워함이 허망하게 생겼다면
   이는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인연에 의한 것이라고 하겠느냐?

   본래 미친 것이 자연이라면 미친 두려움이 본래부터 있는 것이겠지만
   미치지 않았을 적에는 미친 증상이 어디에 숨었으며,
   미치지 않은 것이 자연이라면 머리는 본래 미쳐 날뜀이 없을 것이거늘
   어찌하여 미쳐서 달아나느냐?

   만일 본래의 머리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 미쳐서 달아났던 것을 알면,
   '인연이다, 자연이다'라는 말이 모두 쓸데없는 다른 논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세 가지 연(緣)이 끊어지므로 곧 보리심이다'라고 한 것이다.

   보리의 마음이 생기고, 나고 없어지는 마음이 없어진다고 하면 이것도 나고 없어지는 것이니라.
   나고 없어짐이 모두 다하여 공부의 작용[功用]이 없는 길에 만약 자연이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것은 자연의 마음이 생기고, 나고 없어지고 하는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 분명하니
   이것도 나고 없어지는 것이니라.

   나고 없어짐이 없는 것을 자연이라고 이름한다면
   이는 마치 세간의 모든 현상이 섞여서 한 몸이 되는 것을 화합의 성품이라 하고
   화합하지 않는 것은 본연의 성품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본래 자연과 본래 자연이 아닌 것, 화합과 화합이 아닌 것,
   자연과 합해진 것을 모두 여의고, 따라서 여의고 화합함이 모두 아니라야
   이 구절이 비로서 쓸데없는 다른 논리가 아닌 참다운 진리라고 할 수 있느니라.

   보리와 열반이 아직도 아득하고 멀어서 네가 여러 겁 동안 애써서 닦아 증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비록 다시 시방 부처님이 *십이부경(十二部經)의 깨끗하고 오묘한 이치를 기억해 지님이
   항하의 모래와 같더라도 쓸데없는 다른 논리만 더할 뿐이다.

   네가 비록 인연과 자연의 이치를 설명함에 있어서 결정코 분명하고 또렷하므로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많이 들은 것으로는 제일이라고 하겠지만,
   이렇게 여러 겁 동안 많이 들음을 쌓아 익혔어도 마등가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기에
   나의 불정신주(佛頂神呪)를 기다려서야 마등가의 음욕의 불꽃이 다 없어지게 하고,
   아나함(阿那含)을 증득하여 나의 법 가운데에 정진의 숲을 이루고 애욕의 강을 말릴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아난아,
   네가 비록 여러 겁을 부처님의 비밀스럽고 오묘하고 장엄한 것을 기억해 지녔다고 하더라도
   단 하루나마 번뇌를 끊는 도를 닦아서
   세간에서 미워하고 사랑하는 두 가지 고통을 멀리 여의는 것만 같지 못하느니라.

   마등가와 같은 경우는 전세에 음란한 여자였으나
   신주(神呪)의 힘으로 인하여 그 애욕을 소멸하고
   지금은 나의 법 가운데 들어와서 성비구니(性比丘尼)라는 이름을 얻었으니
   라후라의 어미인 야수다라와 함께 과거세의 인연을 깨달아
   많은 세상을 지내오면서 맺어온 인연이 탐욕과 애욕으로 괴로움이 된 것임을 깨닫고서
   일념으로 번뇌가 없어지는 선행을 닦았으므로,
   혹은 얽매임에서 벗어나고 혹은 수기(授記)를 받기도 하였는데
   너는 어찌하여 스스로 속아서 아직도 보고 듣는 데 머물러 있느냐?"

-참다운 수행의 기초

아난과 대중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의혹이 사라져 없어지고
마음의 참모습을 깨달아 몸과 마음이 가볍고 편안해져서 일찍이 없었던 것을 얻고는
다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부처님의 발에 이마를 대어 예를 올리고 꿇어앉아 합장한 채 부처님께 아뢰었다.

  "가장 높고 크게 자비하신 깨끗한 보배의 왕께서 저희들의 마음을 잘 열어 주셔서
   이러한 여러 가지 인연을 방편으로 이끌어 주시고 권장해 주시는 한편
   캄캄한 데 빠진 자를 인도하여 괴로움의 바다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비록 이러한 진리의 말씀을 듣고서
   여래장인 오묘한 깨달음의 밝은 마음이 시방세계에 두루 퍼저서
   부처님께서 시방국토의 깨끗한 보배로 장엄한 부처님의 국토[寶嚴妙覺王刹]를
   함유하였음을 알았습니다만,
   부처님께서 다시 꾸짖으시기를
   '많이 듣기만 하는 것은 공이 없어 닦아 익히는 데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시니
   저는 지금 마치 나그네 생활을 하던 사람이
   홀연히 천왕(天王)이 주신 호화로운 집을 받은 것과 같나이다.

   비록 큰 집을 얻었으나 문을 찾아 들어감이 요긴한 일이 될 듯하오니
   원컨대 여래께서는 큰 자비를 베푸셔서 이 모임에 있는 어리석은 저희들을 깨우쳐 주시어
   소승을 버리고 마침내 부처님의 *무여열반(無餘涅槃)의 본디 발심했던 길을 얻게 하여주소서.

   그리고 배울 것이 있는 자들로 하여금 어떻게 해야 지난날 반연하던 마음을 항복받고
   다라니(陀羅尼)를 얻어 부처님의 지견(知見)에 들어갈 수 있게 하겠습니까?"

이렇게 말하고는 오체를 땅에 던지고서 모임 가운데 있는 사람들과 한마음으로
부처님의 자비하긴 가르침을 기다렸다.

 

-처음 발심할 때의 중요한 두 가지 생각

그때 세존께서는 모임 가운데 있는 연각과 성문들이 보리의 마음에 자재하지 못한 것을 가엾게 여기시고,
부처님께서 멸도(滅度)하신 뒤 말법의 중생들 가운데 보리의 마음을 일으키려는 자들을 위하여
무상승(無上乘)의 오묘한 수행의 길을 열어 주시고자 아난과 대중들에게 말씀해 주셨다.

  "너희들이 보리의 마음을 내어 부처님의 오묘한 삼마지에
   피로하고 게으름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마땅히 먼저 깨달음을 일으키려는
   첫 마음에 두 가지 결정된 이치를 밝혀야 하느니라.

   무엇을 '처음 발심한 때에 두 가지 결정된 이치'라고 하는가?

   아난아, 첫번째 이치는
   너희들이 만약 성문을 버리고 보살승(菩薩乘)을 닦아서
   부처님의 지견(知見)에 들어가고자 하면
   마땅히 인지(因地)의 발심이 과지(果地)의 깨달음과 같은가 다른가를 자세히 살펴야 한다.

   아난아, 만약 인지에서 나고 없어지는 마음으로 본래 수행할 원인을 삼아서
   나고 없어짐이 없는 불승(佛乘)을 구한다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느니라.
   그러한 까닭에 너는 마땅히 온 세상이 만들어지는 법을 비추어 밝혀 보아라.
   모두가 변하여 없어지리라.

   아난아, 너는 세상에서 무엇인가 만들어지는 법을 보아라.
   어느 것이 무너지지 않더냐?
   그러나 끝끝내 허공이 허물어졌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을 터이니
   무엇 때문인가? 
   허공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허물어져 없어지지 않느니라.

   너의 몸 속에서 굳은 모양은 흙이 되고, 축축한 것은 물이 되며,
   따뜻한 촉감은 불이 되고, 움직이고 흔들리는 것은 바람이 되나니,
   이 네 가지 원소가 얽혀서 너의 맑고 원만하고 오묘한 깨달음의 밝은 마음이 나누어지고,
   보고 듣고 깨닫고 살피는 것이 되어 처음부터 끝까지 다섯 겹의 혼탁함이 생기느니라.

   어떤 것을 혼탁이라고 하는가 하면,
   아난아, 비유하면 마치 맑은 물은 청결함이 본래부터 그러한 것이고
   저 흙과 뿌연 모래의 종류는 본바탕이 머물러 섞이는 것이니,
   두 가지 본체는 자연의 법칙이라서 그 성품이 서로 따르지 못하는 것이거늘,
   세상 사람들이 그 흙과 모래를 가져다가 맑은 물에 넣으면,
   흙은 가라앉아 섞이는 것을 잃어버리고 물은 맑음을 잃어버려서 형태가 흐릿하게 되는 것을
   혼탁[濁]이라고 이름하나니 너의 다섯 겹으로 쌓인 혼탁도 이와 같느니라.

   아난아, 네가 허공이 시방에 두루한 것을 볼 적에 허공과 보는 주체가 구분되지 아니하여,
   허공은 있고 실체는 없으며 보는 주체는 있고 깨달음은 없어서
   이것이 서로 짜여 허망함을 이루나니 이는 첫번째 둘러싼 것으로
   그 이름이 '겁탁(劫濁)'이니라.

   네 몸은 현재 네 가지 원소가 뭉쳐서 이루어졌으므로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것이 막혀서 장애가 되며,
   물과 불.바람과 흙이 돌아가며 깨달아 알게 하여 서로 짜여 허망함을 이루었으니
   이는 두번째로 둘러싼 것으로 그 이름이 '견탁(見濁)'이니라.

   또 네 마음 속에 기억하고 의식하고 외우고 익히고 하여
   성품에서 깨닫고 보고 하는 것을 발하고,
   모양은 여섯 가지 대상인 물질을 나타내나니
   대상인 물질을 여의면 현상이 없고 깨달음을 여의면 성품이 없어서
   이것이 서로 짜여 허망함을 이루나니
   이는 세번째로 둘러싼 것으로 그 이름이 '번뇌탁(煩惱濁)'이니라.

   또 네가 아침저녁으로 생기고 없어짐이 멈추지 아니하여
   느끼고 보는 주체는 늘 세간에 머물고자 하며 업장을 지어 움직이는 힘은
   언제나 항상 국토에 옮겨져서 이것이 서로 짜여 허망함을 이루나니
   이는 네번째로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그 이름이 '중생탁(衆生濁)'이니라.

   너희들의 보고 듣고 하는 것이 원래 다른 성품이 아니거늘
   모든 대상 물질이 가로막아서 근거도 없이 다른 것이 생기느니라.
   성품 가운데에선 서로 알고 작용 가운데에선 서로 배반하여
   같고 다름이 기준을 잃어 서로 짜여 허망함을 이루나니
   이것은 다섯번째로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그 이름이 '명탁(命濁)'이다.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네가 지금 보고 듣고 깨닫고 알고 하는 것으로 하여금
   멀리 여래의 상(常).락(樂).아(我).정(淨)과 계합하기를 바라거든
   먼저 마땅히 나고 죽는 근본부터 골라 버리고,
   나고 죽지 않는 맑고 원만한 성품에 의해서 이룩해야 하느니라.
   맑음으로써 허망하게 났다, 죽었다 하는 것을 돌이키고
   이를 항복 받아 본래의 깨달음으로 돌아가서
   본래의 명각(命覺)인 나고 죽음이 없는 성품을 얻어
   인지(因地)의 마음을 삼은 다음에야 과지(果地)를 닦아 증득함을 원만하게 성취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흐린 물을 맑게 할 적에 고요한 그릇에 담아서 흔들리지 않게 오래 두면,
   모래와 흙은 저절로 가라앉고 맑은 물만이 앞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처음으로 객진번뇌(客塵煩惱)를 항복 받았다고 이름할 것이요,
   섞임을 버리고 순수한 물만 남게 한 것과 같은
   *근본무명(根本無明)을 영원히 끊었다고 이름할 수 있으니,
   밝은 모양이 정밀하고 순수하면 일체가 변하여 나타나도 번뇌가 되지 않아서
   모두가 열반의 깨끗하고 오묘한 덕과 부합하느니라.

 

 

-업(業)의 근본

그 두 번째 이치는 너희들이 반드시 보리의 마음을 일으켜
   *보살승(菩薩乘)에서 큰 용맹을 내어 결정코 모든 작용이 있는 현상을 버리려고 한다면,
   마땅히 번뇌의 근본을 자세히 살펴보되 이것이 시작 없는 과거로부터 업장을 짓고 삶을 불려왔으니
   그 무엇이 업장을 지었으며 그 무엇이 과보를 받는가 생각해 보아라.

   아난아, 네가 보리를 닦는다면서도 만약 번뇌의 근본을 자세히 살피지 못한다면
   허망한 감각기관과 그 대상인 물질이 어느 곳에서 뒤바뀐 것인지를 알 수 없으리니,
   그 곳도 오히려 모르거늘 어떻게 항복을 받을 것이며 또한 부처의 지위를 얻을 수 있겠느냐?

   아난아, 너는 세상에서 매듭을 푸는 사람을 살펴보아라.
   맺힌 곳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푸는 방법을 알겠느냐?
   허공이 찢어졌다는 말은 일찍이 듣지 못하였을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허공은 형상이 없기 때문에 맺히고 풀림이 없기 때문이니라.

   네 앞에 나타난 눈. 귀. 코. 혀.몸과 마음,
   이 여섯 가지가 도적의 앞잡이가 되어 자기 집의 보배를 스스로 빼앗나니,
   이로 말미암아 시작 없는 과거로부터 중생세계에 얽매이게 하였기 때문에
   온 세상을 초월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난아, 무엇을 중생세계라고 하느냐?
   세(世)는 옮겨 흐르는 것이고 계(界)는 방위를 말함이니
   지금 너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동쪽.서쪽.남쪽.북쪽과 동남.서남과 동북. 서북과 위.아래가 계(界)가 되고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세(世)가 되니, 방위는 열이고 흐르는 숫자는 셋이다.
   일체중생이 허망함에 얽히고 서로 이루어져서 몸 속에서 바뀌고 옮겨지는 가운데
   '세'와 '계'가 서로 연관이 되느니라.

   그 계(界)의 성질이 비록 열 방향으로 설정되었으나 정해진 위치는 밝힐 수 있으니,
   세상에서는 다만 동.서.남.북만 지목하고 위와 아래는 위치가 없으며
   중간은 정해진 방향이 없느니라.

   사방의 수가 반드시 분명해서 세(世)와 더불어 서로 연관이 되어 삼사. 사삼이
   완연히 굴러 열 둘이 되고 흘러 변하는 것이 세 번 거듭하여 일.십.백.천이 되니,
   처음과 끝을 모두 묶으면 여섯 가지 감각기관 가운데 공덕이 각각 일천이백이 되느니라.

   아난아, 너는 다시 그 가운데에서 우열을 정해 보아라.
   눈은 보기는 하되 뒤는 어둡고 앞만 밝으니.
   앞 방향은 완전하게 밝고 뒷 방향은 완전하게 어두우며
   왼쪽과 오른쪽은 곁만 보는 것이라서 삼분의 이가 되니
   그 작용을 통틀어 논하면 공덕이 완전하지 못하다.
   삼분으로 공덕을 말하면 일분은 공덕이 없으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눈은 오직 팔백 공덕일 뿐이니라.

   귀는 두루 들어서 시방에 남김이 없나니 움직임에 있어서는 가깝고 먼 것이 있는 듯하나
   고요한 상태에서는 한계가 없으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귀는 일천이백 공덕이 원만하니라.

   코는 냄새를 맡음에 있어 내쉬고 들이쉼을 통해서 냄새를 맡게 되는데,
   들이쉬고 내쉼은 있으나 중간에 교체되는 동안에는 끊어지나니,
   코에 대하여 증험해 보건댄 셋으로 나눈 가운데 하나가 빠졌으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코는 팔백 공덕이 되느니라.

   혀는 말을 함에 있어 모든 세간과 출세간의 지혜를 다하나니
   말은 방위와 나누어짐이 있으나 이치는 다함이 없으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혀는 일천이백 공덕이 원만하니라.

   몸은 접촉으로 인해 느낌이 생기나니 거슬리고 순함을 알아서
   합하였을 적에는 느끼고 떨어지면 느끼지 못한다.
   떨어지면 하나이고 합하면 둘이니 몸에 대하여 징험해 보면
   셋으로 나눈 가운데 하나가 빠졌으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몸은 오직 팔백 공덕이니라.

   뜻은 시방 삼세의 일체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묵묵히 포용해서
   성인과 범부를 포용하지 않음이 없어 그 끝 닿은 데까지 다하였으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뜻은 일천이백 공덕이 원만하니라.

 

 

-원만한 감각기관

아난아, 네가 지금 나고 죽는 애욕의 흐름을 거슬러서
   그 흐름의 근원으로 돌아가서 나고 죽음이 없는 데에 이르고자 하면
   마땅히 이 여섯 가지 느껴 작용하는 감각기관이 어느 것이 합하고 어느 것이 떠나며,
   어느 것이 깊고 어느 것이 얕으며, 어느 것이 원만하게 통하고
   어느 것이 원만하게 통하지 못하는 것인지를 징험해 알아야 한다.

   만약 그러한 데에서 원만하게 통하는 감각기관을 알아서
   시작이 없는 과거로부터 허망함이 짜여서 된 업장의 흐름을 거슬러서
   원만하게 통함을 따를 수만 있다면
   원만하지 못한 감각기관에 의지하여 닦는 것과는
   시간의 흐름이 서로 배가 될 것이다.

   내가 지금 여섯 가지 맑고 원만하게 밝은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공덕의 수량이 이러함을 갖추어 나타내었으니,
   네가 자세히 선택해서 따라 들어갈 수 있는 것을 내가 밝혀서 너로 하여금 더 나아가게 하리라.
   시방의 여래는 십팔계(十八界)에서 하나하나 수행하여 모두 원만한 최상의 보리를 증득하여
   그 중간에 우열이 없거니와 다만 너는 근기가 하열하여
   그 가운데 원만하고 자재한 지혜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내가 이를 선양해서 너로 하여금 오직 한 문으로만 깊이 들어가게 하는 것이니,
   한 문으로 들어가 허망함이 없어지면
   저 여섯 가지 느낌이 있는 감각기관이 일시에 깨끗하게 될 것이다."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해야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한 문으로 깊이 들어가서
   여섯 개의 감각기관을 일시에 깨긋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이미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증득하여
   삼계의 중생들이 세간에서 *견도위(見道位)를 수행할 적에 끊어야 할 의혹을 없앴다.
   그러나 아직도 여섯 개의 감각기관 중에는 오랫동안 쌓여서 생긴
   시작이 없는 과거로부터의 허망한 습관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 습관은 모름지기 *수도위(須道位)를 수행할 적에 끊어야만 되는 것인데
   더구나 그 가운데 나고 머무르고 변하고 없어지는 분제(分劑)와 두수(頭數)이겠느냐?

   너는 또다시 살펴보아라.
   앞에 나타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은 하나이냐, 여섯이냐?
   아난아, 만약 하나라면 귀로는 왜 보지 못하고 눈으로는 왜 듣지 못하며,
   머리로는 왜 다니지 못하고 발은 왜 말을 하지 못하느냐?

   만약 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결정코 여섯을 이룬다면
   내가 지금 이 모임 중에서 너희에게 미묘한 법문을 말할 적에
   너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 중에서 어느 것이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아난이 대답하였다.

  "저는 귀로써 듣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 귀가 스스로 듣는데 몸과 입은 무슨 관계가 있기에
   입으로 질문할 적에 몸은 일어나서 공경하여 받드나야?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하나가 아니라 여섯이며 여섯이 아니라 하나이니,
   마침내 네 여섯 개의 감각기관은 원래 하나도 아니고 여섯도 아니니라.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여섯 개의 감각기관이 하나도 아니고 여섯도 아니거늘
   시작 없는 과거로부터 뒤바뀐 데 빠져 왔으므로
   원만한 맑음에서 하나이니 여섯이니 하는 이치가 생겼느니라.

   너는 수다원으로서 비록 여섯 가지는 소멸하였으나 아직 한 가지는 없애지 못했느니라.
   마치 큰 허공을 여러 가지 다른 모양의 그릇에 담아 놓으면 그릇의 모양이 다름으로 해서
   허공도 다르다고 하다가 그 그릇을 치우고 허공을 보면 허공은 하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저 허공이야 어떻게 너를 위하여 같기도 하고 같지 않기도 하겠느냐? 
   더구나 또다시 어떻게 '하나다, 하나가 아니다'라고 하겠느냐? 
   네가 아는 여섯 개의 감각기관이 수용하는 것도 이와 같느니라.

   어두움과 밝음 등 두 가지가 서로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미묘하고 원만한 가운데 맑고 고요한 데에 붙어서 보는 것을 발생시키나니,
   보는 정기가 빛을 비추어서 그 빛이 맺혀 근(根)이 되었으니
   그 눈의 근원은 깨끗한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졌고,
   그러므로 안체(眼體)라 이름하는 것이니 이는 마치 포도알과 같다.
   그것은 네 가지 티끌로 이루어진 부질없는 감각기관이라서 빛을 따라 흘러 치닫느니라.

   움직이고 고요한 두 가지가 서로 부딪침으로 말미암아
   미묘하고 원만한 가운데 맑고 고요한 데에 붙어 듣는 것이 발생하나니
   듣는 정기가 소리에 비치고 그 소리가 말려서 근(根)이 되었으니,
   그 근원은 깨끗한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졌는데 그를 이름하여 이체(耳體)라 하니,
   마치 새로 돋아나는 *권이(卷耳)의 잎새와 같다.
   그것은 네 가지 티끌로 이루어진 부질없는 감각기관이라서 소리를 따라 흘러 치닫느니라.

   통하고 막히는 두 가지가 서로 드러남으로 말미암아
   미묘하고 원만한 가운데 맑고 고요한 데에 붙어 냄새를 맡나니,   
   맡는 정기가 향기에 비쳐서 그 향기를 받아들여 근(根)이 되었으니,  
   그 근원은 깨끗한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졌고 따라서 비체(鼻體)라고도 하니,
   이는 마치 두 개의 오이가 드리운 것과 같다.
   그것은 네 가지 티끌로 이루어진 부질없는 감각기관이라서 향기를 따라 흘러 치닫느니라.

   그대로 있거나 변화하는 두 가지가 서로 섞여서
   미묘하고 원만한 가운데 맑고 고요한 데에 붙어 맛을 보나니
   맛보는 정기가 맛에 비쳐서 그 맛을 짜내어 근(根)이 되었으니,
   그 근원은 깨끗한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졌고
   따라서 설체(舌體)라고도 하니 이는 마치 초생달과 같다.   
   그것은 네 가지 티끌로 이루어진 부질없는 감각기관이라서 맛을 따라 흘러 치닫느니라.

   떨어지거나 합하는 두 가지가 서로 부딪침으로 말미암아
   미묘하고 원만한 가운데 맑고 고요한 것에 붙어 느낌이 생기나니,
   느끼는 정기가 접촉에 비추고 그 접촉이 뭉쳐서 근(根)이 되었으니,
   그 근원은 깨끗한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졌고 따라서 신체(身體)라고도 하니,
   이는 마치 장구통[腰鼓顙]과 같다.
   그것은 네 가지 티끌로 이루어진 부질없는 감각기관이라서 감촉을 따라 흘러 치닫느니라.

   나고 없어지는 두 가지가 서로 이러짐으로 말미암아
   미묘하고 원만한 가운데 맑고 고요한 것에 붙어 깨닫게 되나니,
   깨닫는 정기가 법에 비추어서 그 법을 잡아서 근(根)이 되었으니,
   그 근원은 깨끗한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졌고
   따라서 의사(意思)라고도 하니 이는 마치 어두운 방에서 보는 것과 같다.
   그것은 네 가지 티끌로 이루어진 부질없는 감각기관이라서 법을 따라 흘러 치닫느니라.

   아난아, 이러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은
   저 밝은 깨달음[覺明]에 밝히려는 명각(明覺)으로 말미암아서
   정밀하고 또렷함을 잃고 허망한 데 붙어서 빛을 발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네가 지금 밝음과 어두움을 여의면 보는 실체가 없을 것이고,
   움직임과 고요함을 여의면 맡는 성품이 생기지 않을 것이며,
   그대로 있어서 변하는 것이 아니면 맛보는 성품이 나오지 않을 것이며,
   나고 죽음이 없으면 깨달음이 어디에 붙어 있겠느냐?

   네가 다만 움직이고 고요함, 합하고 여읨, 그대로 있고 변함, 통하고 막힘,
   나고 없어짐, 밝고 어두움의 열두 가지 모든 작용이 있는 현상을 따르지 아니하면
   마음대로 한 감각기관만을 골라 거기에 집착된 것을 벗겨내고 속으로 굴복시켜서
   이를 본래의 참된 상태로 돌아가게 해야 본래의 밝은 빛을 발하리니
   밝은 성품이 환하게 밝아지면 나머지 다섯 가지 집착도 선택에 따라서 원만하게 벗겨질 것이다.

   앞에 나타난 대상 물질이 일으킨 지견(知見)을 따르지 아니하여
   밝음이 감각기관을 따르지 않고, 그 감각기관에 의탁하여 밝음이 발생하면
   그로 말미암아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서로서로 작용하느니라.

   아난아, 네가 어찌 알지 못하랴? 
   지금 이 모임 가운데 아나율타는 눈이 없는데도 볼 수 있고,
   발난타룡은 귀가 없는 데도 들을 수 있으며,
   긍가신녀는 코가 없는 데도 냄새를 맡고,
   교범바제는 혀가 달랐는데도 맛을 알며,
   순야다신은 몸이 없는데도 촉감을 느끼나니
   부처님의 광명 중에 비치므로 잠깐 나타나기는 하지만 본래가 바람의 체질이므로
   그 몸은 원래 없으며, *멸진정(滅盡定)을 닦아 고요함을 깨달아 성문이 된 이로서
   이 모임 가운데에 있는 마하가섭 같은 이는
   오래 전부터 의근(意根)이 없어졌어도 원만하고 밝게 깨달아 앎에 있어 마음을 쓰지 아니하느니라.

   아난아, 지금 네가 모든 감각기관을 원만하게 뽑아버리면 안으로 환하게 광명을 발하여
   이러한 부질없는 대상인 물질과 온 세상의 모든 변화하는 현상들이
   마치 끓는 물에 얼음이 녹듯해서 생각을 따라 최상의 깨달음을 이루리라.

   아난아, 마치 세상 사람들이 보는 힘을 눈에 집중시켰다가 만약 갑자기 눈을 감으면
   어두운 현상이 앞에 나타나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캄캄하여 머리나 발과 같으리니,
   그 사람이 손으로 몸을 따라 더듬으면 그가 비록 보지는 못하더라도 머리인지 발인지는
   틀림없이 분별하여 깨달아 아는 것은 밝을 때나 마찬가지인 것과 같으니,
   대상물질을 보는 것은 밝음을 인해야 하고 어두우면 볼 수 없거니와
   밝지 않더라도 스스로 깨달음이 생기면 모든 어두운 현상이 영원히 어둡지 않으리니
   감각기관과 그 대상 물질이 이미 소멸되면
   어찌하여 밝은 깨달음이 원만하고 오묘함을 이루지 못하겠느냐?"


-원만한 성품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처음 수행할 때
   인위(因位)에서 깨닫는 마음으로 늘 머무르기를 구하고자 하거든
   과위(果位)의 명목과 서로 응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과위 중에 보리와 열반.진여와 불성.암마라식과 공여래장.
   대원경지 등 일곱 가지 명칭이 그 이름은 비록 각기 다르나 깨끗하고 원만해서
   그 자체의 성품이 단단하게 섞임은
   마치 금강왕(金剛王)이 항상 머물러서 무너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그 보고 듣는 것이 밝고 어둡고 움직이고 고요하고 통하고 막힘을 여의면
   마침내 실체가 없음이
   마치 생각하는 마음이 앞에 나타나는 대상 물질을 여의면 본래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으니,
   어떻게 장차 끊어버리는 것으로써 수행하는 원인을 삼아
   부처님의 일곱 가지 항상 머무는 과업을 얻을 수 있겠나이까?

   세존이시여, 만약 밝고 어두움을 여의면
   보는 주체가 마침내 공(空)하게 되어 마치 앞에 나타나는 대상 물질이 없는 것과 같으며,
   생각의 자성이 없어진 것과 같아질진대
   이리저리 순환하면서 미세하게 추구하여도 본래 나의 마음과 마음의 처소가 없을지니
   장차 무엇으로 원인을 삼아 최상의 깨달음을 구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맑고 정밀한 것이 원만하고 항상하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진실한 말씀이 못되고 끝내는 농담 같은 말씀이 되었으니
   어떻게 부처님은 진실한 말씀만 하시는 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옵건대 큰 자비를 베푸셔서 저희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소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많이 듣는 것만 즐겨 배우고 모든 번뇌를 다 끊지 못해
   다만 마음 속에 뒤바뀐 원인만을 깨닫고
   참으로 뒤바뀐 것이 앞에 나타나는 것은 알지 못하나니,
   네가 아직도 진실로 마음 속으로 믿어 복종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지금 내가 시험삼아 티끌 세상의 모든 일들을 들어서 너의 의혹을 제거시켜 주리라."

그때 부처님께서 라후라에게 명하여 종을 한 번 치게 하시고 아난에게 물으셨다.

  "너는 지금 종소리가 들리느냐, 들리지 않느냐?"

아난과 대중들이 함께 대답했다.

  "저희들은 듣고 있습니다."

종소리가 없어지자 부처님께서 또 물으셨다.

  "너는 지금 들리느냐, 들리지 않느냐?"

아난과 대중들이 함께 대답했다.

  "들리지 않습니다."

그때 라후라가 또 한 번 종을 치자 부처님께서 또 물으셨다.

  "너는 지금 들리느냐, 들리지 않느냐?"

아난과 대중들이 또 대답했다.

  "모두 듣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떤 것을 듣는다고 하고 어떤 것을 듣지 못한다고 하느냐?"

아난과 대중들이 모두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종을 쳐서 소리가 나면 저희들이 듣고,
   종을 친 지가 오래되어 소리가 사라져서 메아리까지 다 없어지면 들리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또다시 라후라를 시켜 종을 치게 하시고는 아난에게 물으셨다.

  "지금 소리가 나느냐, 나니 않느냐?"

아난과 대중들이 함께 대답했다.

  "소리가 납니다."

조금 있다가 소리가 없어지자 부처님께서 또 물으셨다.

"지금은 소리가 나느냐, 나니 않느냐?"

아난과 대중들이 대답했다.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잠깐 있다가 라후라가 다시 와서 종을 치니 부처님께서 또 물으셨다.

  "지금은 소리가 나느냐, 나지 않느냐?"

아난과 대중들이 모두 대답했다.

  "소리가 납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떤 것을 소리가 난다고 하고 어떤 것을 소리가 없다고 하느냐?"

아난과 대중들이 모두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종을 쳐서 소리가 나면 소리가 있다고 하고,
   종을 친 지가 오래되어 소리가 사라지고 메아리까지 없어지면 소리가 없다고 하나이다."

부처님께서 아난과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지금 어찌하여 스스로 하는 말이 이랬다 저랬다 하느냐?"

아난과 대중들이 함께 부처님께 여쭈었다.

  "저희들이 지금 무엇을 이랬다 저랬다 했다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들리느냐고 물으니 너는 들린다고 말하였고,
   또 너에게 소리가 나느냐고 물으니 너는 소리가 난다고 말하여,
   듣고 소리가 나는 데 대한 대답이 일정하지 아니하니
   그것이 어찌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아난아, 소리가 사라지고 메아리까지 없어진 것을 너는 들음이 없다고 말하는데
   만약 참으로 들음이 없을진댄 듣는 성품이 이미 없어져서 마른 나무와 같으리니
   종을 다시 친들 네가 어떻게 들을 수 있겠느냐?
   있음을 알고 없음을 아는 것도 그 들리는 대상인 소리가 있었다 없었다 하는 것이지
   어찌 저 듣는 성품이야 네게서 있었다 없었다 하겠느냐?
   듣는 것이 참으로 없다고 할진댄 무엇이 없다는 것을 알겠느냐?

   그러므로 아난아, 듣는 가운데 소리가 저절로 생겼다 없어졌다 할지언정
   네가 듣는 데 있어서 소리가 생기고 없어짐이
   너의 듣는 성품으로 하여금 있었다 없었다 하게 하는 것은 아니니라.

   너는 아직도 뒤바뀌어서 소리를 듣는 것으로 착각하나니
   어찌 혼미하여 항상한 것을 끊겼다고 여기는 것을 이상한 일이라 하겠느냐?
   끝내는 모든 움직임.고요함.열림.닫힘.통함.막힘을 여의고서 듣는 성품이 없노라고 말하지 못하리라.

   마치 깊이 잠든 사람이 침대에서 한참 자고 있을 적에
   그 가족들이 다듬이질이나 방아를 찧으면
   그 사람이 잠결에 방망이 소리와 절구소리를 듣고는
   다른 소리로 착각하여 종을 치거나 북을 치는 줄로 여기면서
   '꿈 속에서는 어찌하여 나무 두드리는 소리 같으냐'고 하다가
   문득 깨어나면 그것이 절구소리인 것을 깨닫고는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지금 꿈을 꾸었는데 이 절구소리를 북소리로 잘못 들었었노라'고 하리라.

   아난아, 그 사람이 잠결에 기억하겠냐마는
   그 몸은 비록 잠을 자고 있었으나 듣는 성품은 혼미하지 않았으니,
   가령 너의 몸이 없어져서 목숨이 바뀐다고 하더라도
   그 성품이야 어찌 너에게서 없어지겠느냐?

   모든 중생들이 시작도 없는 과거로부터 모든 빛과 소리를 따르면서
   생각을 좇아 흘러 돌아서 일찍이 깨끗하고 오묘하고 항상한 성품은 깨닫지 못하여
   항상한 것을 따르지 않고 나고 없어지는 것만 좇아다니므로
   이로 말미암아 세세생생에 잡념으로 흘러 돌게 되나니
   만약 나고 죽음을 버리고 참되고 항상함을 지키면
   항상한 빛이 앞에 나타나서 감각기관과 그 대상 물질,
   그리고 의식하는 마음이 때를 따라 없어질 것이다.
   생각하는 형상이 허망함 티끌이고 의식하는 마음이 더러운 때가 된다.
   두 가지를 모두 멀리 여의면 너의 법안(法眼)이 때를 따라서 맑고 밝아지리니
   어찌 최상의 깨달음을 이루지 못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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