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돌아가 쉬는 곳
大德아 儞且識取弄光影底人하라 是諸佛之本源이요 一切處가 是道流의 歸舍處니라 是儞四大色身도 不解說法聽法하며 脾胃肝膽도 不解說法聽法하며 虛空도 不解說法聽法하나니 是什麽가 解說法聽法고 是儞目前歷歷底勿一箇形段孤明한 是這箇가 解說法聽法이니 若如是見得하면 便與祖佛不別이니라
“대덕아! 그대들은 또한 그림자를 조종하는 사람을 확실히 알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삶의 모습[一切處]이 도를 닦는 이들의 돌아가 쉴 곳이다.
그대들의 사대[地․水․火․風]로 된 이 육신은 설법을 하거나 법을 들을 줄 알지 못한다.
비․위․간․담(脾胃肝膽)도 설법을 하거나 법을 들을 줄 알지 못한다.
허공도 설법을 하거나 법을 들을 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설법을 하고 법을 들을 줄 아는가?
그것은 그대들 눈앞에 역력하고 뚜렷한 아무 형체도 없이 홀로 밝은 이것이 바로 설법을 하고 법을 들을 줄 안다.
만약 이와 같이 볼 줄 안다면 곧 할아버지 부처님과 더불어 다르지 않느니라.”
강의 ; 이 단락의 말씀은 일반적인 불교 상식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다.
즉, 사람의 육신은 마음의 그림자고 그 그림자를 조종하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이다.
그 마음은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다.
이 마음만 알면 모든 수행자들은 이 삶 이대로[一切處]가 집으로 돌아가 두 다리 뻗고 편안히 쉴 곳이라고 하신다.
다음의 구절이 수많은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이다.
특히 49재 법문을 할 때 가장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사대육신이 말을 하거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다.
비위간담도 그렇다.
허공도 말을 하거나 듣지는 못한다.
다만 얼굴을 통해서 늘 출입하고 있으면서 아무런 흔적도 없는 그 한 물건이 말을 하고 말을 듣는다.
임제스님은 앞에서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 했다.
대개 한 물건[一物]이라는 말도 많이 쓴다.
한 물건을 가장 멋있게 표현한 고려 말 함허(涵虛,1376-1433)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다.
무한한 과거에서 무한한 미래에까지 고금을 꿰뚫고 있다.
작은 먼지 속에 있으면서 온 천지를 다 에워싸고 있다.
안으로는 별의별 신묘불측한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 밖으로는 온갖 상황에 다 대처한다.
과거, 현재, 미래의 주인이고 만법의 왕이다.
크고 넓고 멀어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고,
높고 또 높아서 짝할 자가 없다.
참으로 신기하다.
몸을 구부리고 펴는 그 사이에 있고 보고 듣는 그 자리에 있다.
참으로 멀고 아득하여라.
천지보다 먼저 있었지만 그 시작이 없고 천지보다 뒤에까지 남아 있어도 그 끝이 없다.
아, 이것이 공(空)인가.
유(有)인가.
내 그 까닭을 알 수 없도다.”
청허당 서산스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찍이 생긴 것도 아니고 일찍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름 지을 길 없고 그 모양 그릴 수도 없다.”
이어서 주해하시기를,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옛 사람이 게송하시기를 ‘옛 부처님 나기 전에 뚜렸하게 밝았도다.
석가도 오히려 몰랐거니 가섭존자가 어떻게 전할 수 있으랴[古佛未生前 凝然一相圓 釋迦猶未會 迦葉豈能傳].’
이것이 한 물건의 생긴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이름 지을 길 없고 그 모양 그릴 수 없는 이유이다.”
한 단락 모두 기억해 둬야할 내용이다.
특히 식취농광영저인(識取弄光影底人)을 유념하라.
참으로 만고의 사람들이 미칠 수 없는 법어다.
但一切時中에 更莫間斷하야 觸目皆是언마는 祇爲情生智隔하고 想變體殊로다 所以輪廻三界하야 受種種苦하나니 若約山僧見處하면 無不甚深하며 無不解脫이니라
다만 모든 시간 속에 전혀 간격이 없어서 눈으로 보는 것이 모두 다 그것이지만,
그러나 감정이 생겨서 지혜가 막히고 생각이 변하여 본바탕과는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계에 윤회하여 가지가지 고통을 받게 된다.
만약 산승의 견해로 본다면 깊고 깊은 경지가 아닌 것이 없고 해탈 아닌 것이 없다.
강의 ; 이 한 물건은 모든 시간 속에서 일초의 간격도 없다.
모든 공간 속에서 조금도 자리를 비운 적이 없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다.
귀에 들리는 모든 것이다.
실로 만목청산(滿目靑山)이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도(道)가 무엇입니까?”
“그대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방안에 사람이 있고, 병풍이 있고, 벽이 있는 것을 봅니다.”
“도가 그렇게 그대의 눈을 찌르고 있건만 그래도 모르겠는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그대는 지금 무엇을 듣고 있는가?”
“지금 마침 비가 내려서 비오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도가 그처럼 그대의 귀를 찌르고 있건만 그래도 모르겠는가?”라는 문답이 있다.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늘 그렇게 있건만 그것에 대한 이해가 없다.
설사 설명을 들어도 믿음이 없어서 모를 뿐이다.
여시불(汝是佛). 그대가 바로 부처라고 한들 믿지 못하니 어떻게 하겠는가.
임제스님은 보고 듣는 것을 그대로 받아드리지 못하고 공연한 감정이 생겨서 지혜가 막히고 생각이 변하여 본바탕과는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이 말은 통현장자의 화엄논에서 언급한바 있다.
산승의 견해에서 보면 모두가 불가사의 하고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이다.
모두가 대 해탈 대 자유다.
무량광명, 모량복덕, 신통묘용이다.
짧은 글에 구절구절이 빛나는 다이아몬드다.
일체시중 갱막간단 촉목개시(一切時中 更莫間斷 觸目皆是).
정생지격 상변체수(情生智隔 想變體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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