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 23
14-1 문자에 속지 말라
師示衆云, 如今學道人은 且要自信이요 莫向外覓하라 總上他閑塵境하야 都不辨邪正하나니 祇如有祖有佛은 皆是敎迹中事니라 有人拈起一句子語하야 或隱顯中出이면 便卽疑生하야 照天照地하야 傍家尋問하야 也太忙然이로다
스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날 도를 배우는 사람들로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믿는 것이다.
밖으로는 찾지 말라.
모두 다 저 부질없는 경계들을 받들어서 도무지 삿된 것과 바른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조사니 부처니 하는 것은 모두 다 교학의 자취 가운데 일이다.
어떤 사람이 한 마디 말을 거론하였을 때 혹 그 말의 뜻이 알려지지 않은 상태[隱顯中]에서 나온 것이라면
곧 바로 의심을 내어 이리저리 온갖 생각을 다해 보며 천지를 뒤진다[照天照地].
또 옆 사람을 찾아가 물으며 몹시 바빠서 정신없이 서둔다.”
강의 ;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 중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과 함께 사람을 아는 일이다.
이 사람이라는 미묘 불가사의한 존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으면 그것으로 성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다.
하물며 도를 배운다는 입장에서는 더 말 할 나위가 없다.
자신을 상세하게 알고 그 자신을 믿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공연히 자신 밖을 향해서 무엇인가 찾으려고 한다.
자신 밖엣 것은 그 어떤 것도 모두가 삿된 것이다.
조사와 부처도 모두 문자 상의 이름일 뿐이다.
교학적인 표현일 뿐이다.
그것을 �아서 얼마나 바쁘게 찾아 헤매는가.
온 천지를 다 뒤진다[照天照地].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파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궁리하고 또 궁리한다.
그 자신이란 무엇인가.
육조 혜능스님은 처음 오조스님에게서 금강경의 “응당 머무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 지니라.”라는 말씀을 듣고 크게 깨달아 일체 만법이 제 자신의 성품을 떠나지 않은 것을 알고 이렇게 말하였다.
“내 자신의 성품이 본래 스스로 청정함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내 자신의 성품이 본래 스스로 모든 것이 구족한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내 자신의 성품이 본래 스스로 흔들림이 없음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내 자신의 성품이 본래 스스로 능히 만법을 만들어 내는 줄을 이제야 알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조계종(曹溪宗)이라고 하면 언필칭 조계산에서 터전을 닦은 육조 혜능스님을 종조(宗祖)로 삼고 육조스님의 사상을 의지한다.
그래서 육조단경을 교과서로 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많다.
조계종이라는 이름이 그를 증명하며 따라서 육조스님은 조계법맥(曹溪法脈)의 높은 산으로 섬김을 받기 때문이다.
그 가르침을 보면 표현은 약간 달라도 그 뜻은 임제스님과 한결같다.
보고 듣고 하는 우리들 자신 속에 모두 갖추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차요자신 막향외멱(且要自信 莫向外覓)을 잊지 말라.
大丈夫兒여 莫祇麽論主論賊하며 論是論非하며 論色論財하야 論說閑話過日하라 山僧此間에는 不論僧俗이요 但有來者하면 盡識得伊니 任伊向甚處出來나 但有聲名文句하야 皆是夢幻이니라
“대장부라면 이렇게 주인이니 도적이니,
옳거니 그르거니,
색(色)이니 재물(財)이니,
하며 쓸데없는 이야기로 세월을 보내지 말라.
산승의 이곳에는 승속을 논하지 않고 다만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다 알아내 버리고 만다.
그들이 어디서 오든 간에 그들은 다만 소리나 명칭이나 문자나 글귀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모두가 꿈이나 허깨비이다.”
강의 ; 불교에서 대장부란 남자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영웅호걸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의리의 사나이를 대장부라 하지도 않는다.
대장부란 양변(兩邊)에 떨어지지 않은 사람이다.
유무, 선악, 시비, 주객, 증애 등등의 양변을 벗어난 사람이다.
그래서 주인이니 도적이니 하는 것을 논하지 않는다.
도적에도 큰 도적 작은 도적 날도적이 있다.
언어나 문자의 시시비비도 논하지 않는다.
세상사의 시시비비도 논하지 않는다.
그런데 소비할 시간이 없다.
양변을 벗어나 있으면서 또 양변을 잘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다.
예컨대 중생이 본래로 부처인줄 알고 제도하기를 맹서하라.
번뇌가 본래 보리인줄 알고 끊기를 맹서하라.
법문이란 본래 배울 것이 없는 줄 알고 배우기를 맹서하라.
불도란 본래 이룰 것이 없는 줄 알고 이루기를 맹서하라.
여래란 그림자와 같고 메아리와 같은 줄 알고 정성들여 공양을 올리라.
공양구란 환영(幻影)이요
헛것인줄 알고 가득 가득 고여 올려라.
죄악의 성품이 본래로 텅 비어 없는 줄 알고 백만 배 천만 배 절을 하며 참회하라.
부처님이란 언제나 상주불멸(常住不滅)하는 줄 알고 이 땅에 오래 오래 계시기를 청하라.
육바라밀도 허공 꽃과 같이 본래로 없는 것인 줄 알고 열심히 실천하라.
모든 존재가 텅 비어 없는 줄 알고 씩씩하게 열심히 살라.
이렇게 사는 사람이 대장부다.
불교인이다.
중도(中道)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본래의 모습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벗어나라고 하는 것이다.
존재의 법칙인 중도에 맞게 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와 같은 치우친 소견으로 부질없이 세월을 보내지 말라는 것이다.
임제스님은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승속을 막론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그들의 속을 훤하게 들려다 본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았더라도 그들의 살림살이는 소리와 이름과 문자에 불과하다.
그런 것은 참으로 하찮은 것들이다.
소리와 이름과 문자들을 어디에 쓸 것인가.
모두가 꿈과 같이 허망하고 허깨비와 같은 가짜들이다.
그런 가짜들을 한 걸망씩 지고 재산인양한다.
애석하고 안타깝고 불쌍할 뿐이다.
부디 문자에 속지 말라.
성명문구(聲名文句)가 개시몽환(皆是夢幻)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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