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書狀)

서장대강좌16/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10. 17. 18:09
 

 

서장 대 강좌 4 - 2 강

 

p. 67 

 

  道를 배운다는 문제와, 진짜 도의 문제에 대해서 여기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보지 않았습니까? 황벽 화상이 이르기를 “우리 이 선종은 위로부터 서로 이어온 이래로 사람으로 하여금 지(知)와 해(解)를 구하게 한 적이 없고, 다만 道(도)를 배우라 일렀다.”고 하였습니다.

 

入此門來(입차문래) 莫存知解(막존지해) 사찰에 들어가면서 일주문에나 천왕문에 써 붙여 놓은 것 아시지요?

이 문에 들어오려거든, 불교 문에 들어오려거든, 이 자리에 앉아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절에만 들어갈 때, 막존지해. 알음알이 두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진짜 불교. 제대로 된 불교. 참 불교를 공부하려거든, 알음알이 제치고, 알음알이 다 파헤쳐 버리고, 알음알이 밑에 있는 것에 관심을 두라는 것이지요.

 

  막존지해. 알음알이 두지 말라. 이 문에 들어오려면... 불교라는 문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 두지 말라. 요즘은 불교전적들이 너무 많이 있고 또 그것을 손쉽게 접할 수 있어서, 또 머리들이 좀 좋습니까?

세상에서 어려서부터 두 살 세 살 때부터 교육을 받아서 알음알이 쪽으로 공부는 아주 발전 했어요.

그래서 불교도 대개 알음알이 쪽으로 많이 나가고 있는데요.

그것도 안 하는 것 보다는 낫지만, 진짜 불교는 좀 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일찍이 이것은 사람을 提接(제접) 하는 말입니다. 그렇지요.

사람을 제접 하는 말이지요.

사람을 끌어 들일 때는 천수경도 외우라. 반야심경도 외우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낚시 밥은 될지언정 고기는 아니지요.

 

  그러나 도는 또한 배울 수 없는 것이어서, 도를 배우는데 情識(정식)을 두면 이것은 보통 알음알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도리어 도에 어둡게 됩니다.

정말 도는 딱 들어내 놓고 다시 생각해 봐야 됩니다.

 

無我思想(무아사상)하고 如來藏思想(여래장사상)하고 이론이 분분한 사람들을 가만히 보니까 책을 너무 많이 본겁니다.

책의 노예가 되어 버렸어요.

저도 이야기를 하려니까 옛날 스님들 이야기.

유일물어차하니 해서 함허스님의 이야기 등등.

그 동안 주워들은 일물에 대한 心性(심성)에 대한 명사들을 자꾸 열거를 하는데, 그런 것 다 제쳐놓고, 불교용어 하나도 쓰지 말고, 지금 이렇게 말하고 듣고, 화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슬퍼하는 이것은 도대체 뭐냐 이겁니다.

이것은 어떻게 부정할 길이 없잖아요.

 

  이것은 아무리 떨쳐 버리려고 “無我(무아)다”“무아다”“무아다”“空이다”“공이다”“공이다”아무리 천만 번을 공이라고 하고, 무아라고해도, 무 안이비설신의. 무 색성향미촉법 해도 그 놈! 무 안이비설신의. 무 색성향미촉법하는 그 놈은 항상 있는 것입니다.

그 놈이 있어서 무 안이비설신의라고 하는 겁니다.

공이라고 하고요. 그 놈이 있어서 공이라고 하고, 무아라고 하는 겁니다.

저는 그것이 불성인지 일물인지 진여인지 법성인지 자성인지 그것은 모르겠어요.

  그 따위 용어 다 팽개쳐버리고, 지금 우리가 이렇게 떠들고 옳으니 그르니 무아사상이 옳으니 여래장사상이 옳으니 하는 그러면서 다투기도 하고, 열도내고 고함도 치는 그놈을 도대체 우리가 어쩌지 못하지 않느냐?

어떻게 하려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 이겁니다.

이것이 불교적인 경전이나 용어. 다 배제하고 한 이야기입니다.

 

불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불교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 하더라도 이것은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이겁니다.

이것은 끝까지 따라가는 것입니다.

‘에이, 불교 싫다. 스님도 싫고, 불상도 싫고, 일체가 다 싫다고 혼자 저~~ 멀리, 달 뒷면까지 도망갔다 손쳐도 거기까지 역시 따라와 있는 것입니다.

나 보다 먼저 가있는 놈이 그 놈입니다.

 

  왜 이렇게 캄캄하냐? 왜 이렇게 추우냐? 하는 바로 그 놈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요.

불교는 천불 만불. 천 조사 만 조사. 천 보살 만 보살이 수많은 세월동안 나타나서 별별 주장을 했어도, 바로 그 점 하나 깨우쳐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 인생을 그리고 세상을 좌지우지 한다는 사실. 그것 하나 잘 굴리면 인생을 성공적으로 산다는 것. 그것을 좀 우리 일상에 이끌어다가 설명하면 그렇게도 되는 것이지요.

 

  여기 보십시오.

도가 方所(방소)가 없는 것을 이름 하여 대승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일정한 장소, 법칙이 없다 이 말입니다.

굳이 도라는 표현을 씁니다.

도는 일정한 장소가 없는 것을 이름 하여 대승심. 이런 말을 좀 써야 그래도 알아들으니까요.

 

래서 금강경에는 뭐라고 했지요?

一切法(일체법)이 皆是佛法(개시불법) 그랬잖아요.

그럼 이야기 다 했잖아요?

일체법이 개시불법 인데 무슨 법당에만 불법이 있고, 교회에는 불법이 없어요?

그것은 말도 아닌 소리지요.

일체법이 개시불법 이라면서요? 일체법이 다 불법인데요.

道無方所(도무방소)라면서요?

도는 일정한 장소가 없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도교에서도 그랬잖아요?

道不可須臾離(도불가수유리)니可離(가리)면 非道也(비도야).

 

도라는 것은 한 순간도 떠나 있을 수 없으니 가히 떠나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달 뒷면에 가 보세요. 안 따라오는가?

벌써 나 보다 먼저 와있어요.

달 뒷면에 가 있어도... 그것을 흔히 하는 말로 대승의 마음이라. 대승심이다. 최고의 마음. 가장 큰 마음.

 

  이 마음은 안과 밖, 중간에도 있지 아니하여 실제로 방소가 없습니다.

일정한 장소가 없습니다.

첫째로 알음알이[知解(지해)]를 짓지 마십시오.

다만 이것은 당신이 情量處(정량처)를 도로 여기는 것이니,

정량처 머리로 헤아리는 겁니다.

사변으로 이렇게 굴리고 저렇게 굴리는 것을 도 로 말하니 정량이 만약 다하면 마음에 방소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량 분별이 뚝 떨어져버리면, 사량 분별 그 너머에 그야말로 툭 터져버릴 것이라는 겁니다.

 

  어릴 때 우리 집 넓은 마당에서 아이들이 모여서 땅 따먹기 해보면, 아이들 그 조그만 손으로 뼘으로 재면서 땅 따먹기를 하는데, 거기서도 그냥 치고받고 싸우며 울고불고 야단이었습니다.

조금만 침범을 더하면 그러다가 어지간히 재미가 없어서 끝나면, 그것 싹 지워 버려요. 線(선)을 그어 놨을 때는 네 꺼 내꺼 있어서 울고불고 싸우기도 하고, 그러는데 재미가 없으니까 그것 다 지워 버리면, 道無方所(도무방소)입니다.

 

  거기에 사량 분별로서 네 꺼다 내꺼다 차별적인 틀과 선을 그을 때는 그것이 정량입니다. 그

런데 본래의 땅은 그렇게 그어있지 안잖아요?

우리가 괜히 그어 놓은 겁니다.

우리가 공연히 한 생각 일으켜서는, 재미있게 놀자는 한 생각을 일으켜서 선을 그어 놓고는 거기서 땅 따먹기 하고, 거기에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막 그냥 주먹이 오고 가고 싸우고 울고 야단이라고요.

  아이들 싸움이 나중에는 어른 싸움이 되는데요.

그것이 뭡니까? 본래 넓은 마당인데 공연히 그렇게 선을 그어서 그런 것이지요. 재미없으면 갈 때는 발로 싹 문질러버리고 갑니다.

그러면 다시 한 마당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도 지금 이런 저런 차별적이고, 너니 나니 하는... 일단 선을 그어 놓으면 잘 보이지요.

선이 없을 때는 눈에 안 들어옵니다.

그렇게 밟고 다니며 놀이를 하면서도 땅이 눈에 안 들어옵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차별적인 이런 중생심으로서 생활할 때는 눈에 잘 들어오긴 하지만, 그것은 내 본심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사람 사람들이 마음 씀씀이에 따라서 다 다르지요.

그 선을 무너뜨려 버리니까 그만 큰 한 마당이 되듯이, 내 마음도 역시 하나가 된다.

 

道無方所(도무방소)입니다. 어떤일정한 처소가 없습니다.

것을 대승심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큰 마당이라고 합니다.

  마음이라고 하면 대승심이라고 하고요. 그

래서 眞空妙智(진공묘지)는 太虛空(태허공)과 같다고 했잖아요. 허공과 같다. 그 허공에는 아무리 건물을 짓고 비행기다 오고가고 해도 아무 이상 없지요.

큰 마당에는 아무리 그림을 그리고 선을 그어도 아무 이상 없는 겁니다.

그 마당은 그냥 마당대로 있는 겁니다.

우리 마음의 실체에 대해서 조금 그림이 그려지나요?

그림이 그려지면 안 되는 건데요 이거는... 하하하하하하~

그림이 그려지면 소승심이 돼 버려요. 대승심이 아니고...

 

   이 도는 天眞(천진)하여 본래 이름이 없습니다.

다만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여 정식 가운데 미혹해 있어서 모든 부처님께서 출현하셔서 이 일을 說破(설파)하셨습니다.

깨달은 사람은 다 부처님입니다.

안 깨달아도 부처님인데, 깨달은 사람이야 더 부처님이지요.

 

  당신 같은 사람들이 통달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방편으로 도라는 이름을 세우셨습니다.

이름을 가지고 분별심을 내지 마십시오.

이름. 우리는 이름을 자꾸 부르다보니까본인은 어디 가 버리고 이름이 그만 머릿속에 더 박혀있는 겁니다.

저도 어릴 때 불교공부 한다고 경전 외우고, 또 법수라는 책이 있어요.

삼보. 삼아승지겁. 사홍서원. 육바라밀, 삼십칠조도품. 숫자로 된 불교 용어들이 있거든요.

 

  그것만이 아니고 大明法數(대명법수) 라고해서 상하권으로 된 두꺼운 책을 다 외우려는 식으로 심취하고, 빠져있고, 열중하다 보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모든 것이 본래 경전에서 설해진 대로 그냥 그것이 본래 있고, 이치라든지 어떤 현상은 그 이후에 생긴 것처럼 그렇게 생각이 들어요.

十信(십신). 十住(십). 十行(십행).十廻向(십회향). 十地(십지)와 等覺(등각). 妙覺(묘각).須陀洹(수다원). 斯多含(사다함). 阿那含(아나함). 阿羅漢(아라한).

이런 것들이 딱 고정적으로 정해져 있는 줄로...

제가 한참동안 그렇게 알았어요.

  그것이 진짜 그렇게 정해져 있는 줄로 알았어요.

그렇게 빠져 있었다니까요.

하다보면 그것에 집착하게 되고, 집착하게 되면 그것이 하나의 어떤 환상이라고 할까? 의식화 됐다고나 할까?

그것이 意識化(의식화)가 된다니까요.

 

원효는 8지 보살이다 하고, 이구지 보살에 오르면 옷에 때도 안 탄다

그러고, 스님들끼리 그러거든요.

한 달쯤 빨래 아니하고 게으른 스님들이 있어요.

그래 놀린다고 “아, 이사람, 자네는 이구지 보살에 오르는가?

옷에 때도 하나도 안타고...”이런 식으로 경책을 하고, 핀잔을 주고 그래요.

그러면 슬며시 새 옷으로 갈아입고 오기도 하는데 그런 것들이 그런 교리적으로 익힌 것이 실지로 적용화 된 것으로 착각이 되더라니까요. 의식화 돼요.

그것이 의식화지요.

  내 의식이 자꾸 그 쪽으로 가니까 그것이 균형이 잡혀버리더라니까요.

실지로 있는 것처럼 느껴지더라니 까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것이 전혀 없는 겁니다.

그냥 방편으로 이름을 가설해 놨을 뿐입니다. 그럼 뭐가 있느냐?

오직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부처도 보살도 성문 연각. 아무 것도 없어요.

오로지 사람하나 있을 뿐입니다.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이런 것도 전혀 없는 겁니다.

오로지 사람이 그냥 있을 뿐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있었다면, 수행 계위가 있었다면, 제가 아무리 수행을 잘못해도 어느 만치는 올라 왔을 것 아닙니까?

최소한도 십신. 십주에는 올라왔을 것 아닙니까? 안 그렇겠어요?

아무리 제가 올라갔다 내려오고 내려왔다 또 올라가고 아등바등 했어도 십지에는 올라갔을 것 아닙니까?

 

  무슨 십지 표현이 있어요?

제가 큰스님이라는 분들을 보니까 전혀 그런 것이 없어요.

저는 있는 줄 알았어요. 원효스님은 팔지 보살이라고 그랬잖아요.

전혀 그런 것이 없어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만이 진짜입니다.

지금 있느니 없느니, 시시비비하는 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니까 이것 하나 밖에 없어요.

사람 인품이 좀 낫다 못하다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못난 사람도 좀 참으면 인품이 근사해 보여요. 그

런데 아주 밖에 나와서는 인품이 근사한 사람도 집에 들어가면 형편없는 사람 많아요.

그것 아무 것도 아니라니까요. 그 차이 별 것 아닙니다.

 

  정말 위대한 존재는 있어요.

오늘 처음부터 배운 진공묘지라는 것!

경계를 긋지 않은 땅과 같은 大智(대지). 大乘心(대승심). 그것이 있어요.

그것이 無位眞人(무위진인)입니다.

차별 없는 참 사람. 그것이 참 나고, 나의 무량공덕생명이고, 부처님의 무량공덕생명이고, 여러분들의 참 생명이고, 이것 하나 확인하자고 하는 것이고, 이것 하나 내 것으로 되었을 때, 내가 어떤 처지에 살든지 간에 정말 자신 있고 당당하게,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죽어도 당당하게 죽고요. 그것이면 다입니다.

그것을 부처라고 하고, 그것을 조사라고 하고, 보살이라고 하고 그런다니까요. 그것 하나 갖고요. 그 외에는 없습니다.

 

  p. 69

 

  당신이 이미 깨끗하게 살아서 도를 향하는 한조각 진실하고 견고한 마음을 가졌으니 공부가 순일하고 순일하지 않는 것을 상관하지 마십시오.

다만 옛사람의 言句(언구)위에 탑을 쌓는 것과 같이 하여 한 층을 마치고 또 한 층을 마치려고 하지 말아야 하니 공부를 잘못 하면 마칠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한층 쌓고 또 한층 쌓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그러니까 십신위에 십주 있고, 십주위에 그것도 제가 십신 하니까 열단계를 한꺼번에 이야기 하지만, 십신. 1신 2신 3신 4신... 십주도 1주 1주 3주 4주...

십지도 십회향도 전부 그렇게 그래서 五十二位(오십이위) 그러잖아요.

오십이위 지위지 점차...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53 선지식입니다. 52위인데요.

53 선지식도 지위 점차를 상징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이야기를 해서 그런 이야기가 먹혀드는 근기가 있어요.

그러니까 그 불교가 한참 성행을 하다가 그 불교를 폐기해 버리고 선불교로 발전한 것 아닙니까?

대승불교 얼마나 근사한데...

그런데 거기에서 그것을 폐기하고, 폐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선불교로 나선 겁니다.

가끔 대승경전에서 한 구절 두 구절 주워 쓸 일이 있으면 주워 쓰지 선불교는 거기에 통째로 의지하지 않는다니까요.

 

  다만 마음을 한 곳에 두면 얻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니, 시절 인연이 도래하면 저절로 축대가 맞고 맷돌이 맞듯이 계합하여 문득 살펴 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시절 인연이 도래하면 축착 합착한다.

서장 배울 때 제일 많이 쓰는 소리가 축대가 맞고 맷돌이 맞듯이 축대 돌입니다.

축대를 쌓기 위해서 돌 깎아 놓은 것 있지요?

갖다 척척 놓으면 되는 겁니다.

왜냐? 쌓기 좋도록  돌을 아예 다듬어놨으니까 척척 갖다놓으면 되는 겁니다. 맷돌도 이미 일을 마쳤잖아요?

아무리 나 뒹굴어져서 돌아다녀도 가져다가 꽂으면 맞는 겁니다.

그와 같이 일이 착착착 그렇게 순리적으로 진행이 될 때가 있을 것이다.

 

  “한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 도리어 허물이 있습니까?”하니, 이르기를 “수미산이다.”라고 했습니다.

“한 물건도 가져 오지 않은 때는 어떠합니까?” 하니, 이르기를 “내려 놔라.”했습니다.

이 속에서 의심이 깨어지지 않거든 다만 이 속을 참구할지언정 화두입니다. 다시 스스로 지엽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화두를 이렇게 저 앞에서 몇 가지를 소개 했지만 여기서도 둘을 소개합니다.

요즘 사람들의 화두 드는 관념하고는 달라요.

지금은 화두 하나만 들라고 해요.

그런데 여기 화두를 하나만 들라고 이렇게 고집했다면 대혜스님이 이렇게 소개 하지 않았을 겁니다.

 

만약 나를 믿는다면(대혜스님 자신) 다만 이렇게 참구할지언정 달리 불법을 다른 사람에게 지시하여 줌이 없느니라.

내 지시 방법은 이것뿐이다 이겁니다.

  만약 믿음이 미치지 못한다면, 강북과 강남 왕노에게 물어서 선지식입니다.

온 세상 선지식에게 물어서 한번 의심 하고 나서, 또 한 번 의심을 하는 것에 맡깁니다.

 

의심하고 또 의심하고 문제의식을 갖고 살아 가십시오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문제의식을 가졌을 때 거기에 깨달음이 있고, 자기 발전이 있습니다. “불교 다 안다.” 그렇지만 또 한 생각. 궁금한 생각을 가질 때 한 마디라도 귀에 들어오고, 소득이 있고, 또 내 인생에 보탬이 되는 이치와 같은 것이지요.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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