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書狀)

서장대강좌17/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10. 17. 18:40
 

 

서장 대강좌 4- 3 강

 

   p.72    

 

 증시랑에게 답함(4) 

  여기의 내용은 고요함과 시끄러움. 세상사와 출세간사.

일반 신자로서의 수행과 출가해서 스님으로서의 수행. 이런 것들과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이 문제가 참 세속에 있는 분들도 수행을 좀 하려고 하면 이것이 큰 문제가 되고, 출가해서 고요한데서 공부하는 사람들도 문제가 됩니다.

무엇이 문제인가? 다 시끄러운 것 때문에 문제 삼는 겁니다.

‘아이고 세속에 시끄러운 일이 이렇게 많은데, 이거 공부 되겠나?’아예 여러분들은 그 마음을 밑에 깔고 살아가요.

그런데 고요한 선방에서 수행하는 이 들은 늘 고요해요.

寺(사)중에서 항상 고요한 분위기를 잘 보호해 줍니다.

 

  그러다가 어쩌다가 수련대회 왔다든지 학생들이 방학 중에 짧은 기간 동안 템프스테이를 한다든지 이럴 때는 도량이 시끄럽거든요. 시끄러우면 생야단이 나는 겁니다.

그것도 역시 시끄러운 것을 혐오하는 병이 도져서 그렇습니다.

이 법문을 잘 들으면 그런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설사 그런 시끄럽고 고요한데 끄달린다 손치더라도 그렇더라도‘아, 기본적으로 시끄러움의 문제와 고요함의 문제는 이런 것이구나!’하는 것을 머릿속에다 제대로 정리 해놓을 수가 있어요.

 

  보내온 편지를 자세히 읽고서야, 四威儀(사위의)  行住坐臥(행주좌와). 가운데 間斷(간단)함이 없어서 번거로운 공무에 빼앗기지 않고,

급한 흐름 가운데 항상 맹렬히 살피고 다만 게으르지 아니하여,

道心(도심)이 오래 될수록 더욱 견고함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편지를 가만히 읽어 보니까 아, 이분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가운데, 그리고 또 공무를 집행하는 중에 세상살이 번거롭게 살아가면서도 도심을 잃지 않고, 도에 대한 마음은 갈수록 더욱 더 견고 해진다는 것을 표현을 했고, 대혜스님은 그것을 아셨습니다.

 

제 마음에 심히 맞습니다. 참 기분 좋다는 겁니다.

도 닦는 사람은 도에 관심 깊은 사람을 만나면 同志(동지)지요.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니까요.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그런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다. 모든 분야에 다 그렇겠지요.

 

  그러나 세간의 번뇌는 불 같이 熾盛(치성)하니 어느 때에 끝내겠습니까? 정히 시끄러운 가운데 있을 때에도 대나무 의자와 방석 위에서 공부하던 일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대나무 의자와 방석 위에라는 말은 선방에 앉아서 참선 하는 것.

개인 가정이라 하더라도 좌선을 일부러 한다고 할 때의 일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시끄러운데 공무를 집행하면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서류를 검토하고, 현장에 가서 지시하고, 별별 일을 다 하면서도 방석 위에 앉아서 “이 뭣꼬”“이 뭣꼬”하고 밀어붙이던 그 때의 공부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평상시에 마음을 고요한 데에 두는 것은 잘 들으세요.

마음을 고요한데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히 시끄러운 가운데서 쓰기 위함입니다.

고요한 선방에 앉아서 참선 하는 것은 훈련입니다.

일상생활에 농사짓고 나무해오고 물 긷고, 장사하고, 공무 집행하는 데에서 써먹기 위해서 事前(사전)에 연습하는 것입니다.

선방은 연습장입니다.

여러분들 일상생활은 實戰(실전)장소고요.

 

  만약 시끄러운 가운데서 힘을 얻지 못한다면, 일상생활 속에서 공부가 잘 안된다면그러면 고요한 가운데서 공부를 하지 않은 것과 도리어 같게 될 것입니다.

공부하나마나 똑 같다는 것입니다.

캬~ 무서운 소리 아닙니까?

선방에 스님들 절에 들어와서 이것이 사집이니까 2년차에 다 배웁니다.

2년차에 다 배운 이야기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일한다고 공부가 안된다면 고요한데 앉아서 좌선하나마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앉아있는 禪에서 일으켜 세운 선이라니까요. “좌선”“좌선”좌선을 부르짖는 것은 묵조 사선에서 하는 짓입니다.

 

  앉아있는 부처가 어디 있어요? 뭐라고했지요?

若坐若臥(약좌약와) 若來若去(약래약거) 만약 앉았다거나 누웠다거나 섰다거나 간다거나 라고 한다면 是人(시인)不解我所說義(불해아소설의) 이 사람은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여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누구의 여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석가의 여래도 그렇지만, 우리들의 여래도 역시 똑 같아요.

이것이 앉아있기만 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받아 보니 과거의 인연이 복잡하여 의례히 대는 핑계지요.

여러분들이 잘 대는 핑계입니다.

지금 이 과보를 받는다고 탄식하니, 세상사와 도입니다.

과거 인연이 복잡해서 지금 공부하려고 해도, 마음은 있는데 도대체 공부가 안 된다고 탄식하는 것이지요.

어찌 그리 속을 잘 알고 해놨는지... 유독 이 말만은 감히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다른 말은 당신 말 다 받아들여도 오직 이 말만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만약 이러한 생각을 하면 도에 장애가 됩니다.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거 인연이 어디 있어요? 과거 업이 도대체 어디 있어요?

선방에 있다고 해서, 자고 일어나고 옷 입고 청소하고 밥 먹고 빨래하고 목욕하고 온갖 일상생활. 그것을 타피부득처라. 피하려하나 피할 수 없는 것.

그것이 직장생활 한다든지 사업을 한다든지, 장사를 한다든지, 일이 많은 사람들은 약간 많아요.

그것은 정도차이 뿐이라고요.

禪要(선요)의 고봉스님은 한 번도 앉은 적이 없어요.

한 번도 앉은 적이 없고, 항상 도량을 걸어 다니면서 일 하면서 공부 했어요.

 

  고덕이 고덕은 마라나존자입니다. 이르기를 “흐름에 따라 성품을 알게 되면, 기쁠 것도 없고 또한 근심할 것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참 유명한 말입니다.

흐름이 뭡니까? 밥 먹고 옷 입고 걸어가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거기에서 성품을 알아요.

거기에서 마음을 챙겨요.

화두면 화두를 챙기고, 염불이면 염불을 챙기고, 입으로만 챙기지 말고 마음까지 다 챙겨요.

그쯤 되면 기쁠 것도 없고 또한 근심할 것도 없다. 無喜亦無憂(무희역무우)라.

 

유명한 관세음보살에 대한 바람직한 기도는 어떤 것인가?

萬緣都放下(만연도방하), 온갖 만 가지 인연 다 놓아버리고, 但念觀世音(단념관세음). 다만 관세음만 외운다.

그러면 此是如來禪(차시여래선)이며, 如其祖師禪(여기조사선)이다.

그것이 여래선이고 조사선이다 이겁니다.

뭘 하든지 자기 자신을 떠나지 않고 하면 그것이 여래선이고 조사선이고, 최고의 선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요는 그것이 중요합니다.

앉았다고 공부 특별히 더 잘 되는 것 아닙니다. 절대 더 안 돼요.

앉아서 좌선 해보십시오. 앉아서 좌선이 잘 된다면,

그냥 곳곳에서 터지는 소리가 뻥뻥 났을 것 아닙니까?

그것이 아니라니까요.

우리 교과서에 있는 간화선 지침서의 중의 하나인 서장과 선요.

선요의 주인공인 고봉스님은 일부러 앉지를 않았다니까요.

절대 앉지 않았어요.

 

  정명이 이르기를 유마거사 나왔네요.“비유하자면 고원 육지에 연꽃이 피지 아니하고, 저 높은 언덕이나 잘 닦여진 화단에는 연꽃이 아니 피어요.

낮고 젖은 진흙에 이 꽃이 핀다.”고 했습니다. 불교 꽃이 연꽃이잖아요.

그거 하나만 해도 불교 다 깨닫고, 열 번이라도 깨닫고 남지요 사실은...

진흙에 뿌리를 내려야만 그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겁니다.

연근 먹으려고 행자 때 우리가 사와서 다듬어 보면, 세상에 그렇게 두루 뭉치로, 못났잖아요.

그것이...퉁퉁한 것이 진흙투성이가 되어서...

 

  여기서 어떻게 그 아름다운 꽃이 필까? 그 못난 연근을 없애고 따로 아름다운 연꽃이 없잖아요.

더러운 진흙탕 그것이 그대로 아름다운 연꽃입니다.

아름다운 연꽃 그대로가 더러운 진흙탕입니다.

그런데 시끄러움과 고요함이 거기서 만약에 분별이 되고, 거기서도 공부가 되느니 안 되느니 하면 그것은 초보자도 아닙니다.

그런 것을 문제 삼고 따진다면 초보자도 아닙니다.

 

  노호께서 이르시기를 노호는 부처님입니다.

“眞如(진여)는 自性(자성)을 지키지 아니하여 인연을 따라서 일체법을 성취한다.”고 하셨습니다.

진여는 진공묘지 있었지요?

진여는 자성을 지키지 아니하여 그 자리에 가만히 있지 아니 한다 이겁니다. 인연을 따라서 일체법을 성취한다.

 

와서 서장 공부할 때는 서장 공부하고, 얼른 집에 돌아가게 되고, 비 오면 우산 쓸 줄 알고, 비 안 오면 우산 걷을 줄 아는 이것이 뭡니까?

굳어 있으면 이것이 되겠습니까? 햇빛 쨍쨍 나는데도 계속 우산 펴들고 갈 수는 없잖아요? 그런 사람도 없고요.

비가 오는데도 우산 안 펴들고 갈사람 없잖아요?

이것이 우리의 참 모습입니다.

 

진여는 자성을 지키지 아니하여 인연을 따라서 일체법을 성취한다.

인연 따라서 상황 따라서 거기에 척 척 척 척 맞춰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시끄러울 때는 시끄럽고, 고요할 때는 고요하고, 잠 잘 때는 잠자고, 일할 때는 일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뭐라고요?

앞에 있었던 고덕이이르기를 “흐름에 따라 성품을 알게 되면”하는 그 성품. 그것이 원래는 [心隨萬境轉(심수만경전)이나 轉處悉能幽(전처실능유)]라 그랬어요.

 

  또 이르시기를 역시 부처님이지요?

“인연을 따라 感應(감응)함에 두루하지 않음이 없되, 항상 이 菩提座(보리좌)에 처해 있다.”고 하셨으니, 어찌 사람을 속이겠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본성입니다.

본성이 인연을 따라서 상황 따라서 적응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부처님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마음을 상징하는 겁니다.

인연을 따라서 감응함에 두루하지 않음이 없다.

어디든지 다 상황에 맞춰서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항상 보리좌에 처해 있다.

부처님이라고 했으니까요.

우리 본성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상황에 흘러가든지 우리의 주인이 하고 있다는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완전히 경계가 돼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임제스님은 隨處作主 立處皆眞(수처작주 입처개진). 그랬어요.

어느 곳에서든지 주인노릇을 하라.

그러면 그대가 있는 그 곳이 다 참 행복이다.

  화엄경의 구절을 두 번이나 인용을 했고, 대혜스님은 깨닫고 나서 어디 가서 화엄경공부를 하셨다고 되어있지요?

저 앞에 행장에서 보면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승경전도 아주 발전된 경전이니까요.

불교 경전 중에서는 법화경. 화엄경 같은 것은 부처님이 열반하신 5·6백년 후에 결집된 경전이라서 아주 뛰어난 경전들이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좋은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앞에서 대승불교까지 폐기하고 선불교로 발전 했다고 하지만, 대승불교 안에서 다이아몬드 같이 아주 빛나는 말씀들은 이렇게 활용을 하시지요.

 

  만약 고요한 곳을 옳게 여기고 시끄러운 곳을 그르게 여긴다면, 이것은 世間相(세간상)을 버리고 實相(실상)을 구하는 것이며 우리가 온갖 시시비비로 꿰어 세상에 찌들어서 옳다 그르다, 사기도 치고, 울고 웃으면서 살아가는 그 세간상이 그대로 실상이다.

진리의 모습이다 이겁니다.

 

  生滅(생멸)을 버리고 寂滅(적멸)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안 맞는 말이지요.

생멸 그대로가 적멸의 도리이고, 적멸 그대로가 생멸의 도리이고, 실상 그대로가 세간상이고, 세간상 그대로가 진리의 세계입니다.

 

  고요함을 좋아하고 시끄러움을 싫어 할 때에 정히 좋게 힘을 써야 합니다.

문득 시끄러운 속에서 고요한 때의 소식으로 뒤집으면 그 힘이 대나무 의자, 방석 위에 앉아 하는 공부보다 천만 억 배나 강할 것입니다.

다만 자세히 들으십시오.

결단코 서로 그릇되게 하지 않습니다.

 

  아주 시끄러운 가운데 자기가 처해진, 불가피한 일들을 그대로 다 행하면서 공부 하는 겁니다.

화두를 드는 사람 화두 들고, 기도하는 사람 기도하고, 염불외우는 사람 염불외우고, 경전외우는 사람 경전외우고 그렇게한 사람이, 그 공부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목에다 줄을 해서 책을 걸어 놓고, 밭도 매고 논도 매면서 공부한 출세한 사람들이 많지요.

예컨대 그와 같이 우리도 일상생활, 일할 때가 정신이 오히려 또렷또렷 하거든요. 공부 한다고 일부러 좌선하고 앉아 있으면 편안하니까 금방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면 그만 졸기 시작합니다. 흐릿합니다.

 

  조는 맛이 얼마나 달콤하다고요.

이것은 누워서 자는 맛 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맛이 아주 달아요.

그리고 또 그것이 익숙해져요.

습관이 들어버려요. 정작 누우면 잠이 안와요. 그것 참 묘하지요.

앉아서는 그렇게 달콤한 잠이 퍼부어 오는데 ‘이러느니 차라리 누워서 확실하게 한숨 자고 맑은 정신으로 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하고는 지대방에 가서 눕는 거예요.

누우면 눈이 말똥말똥해서 도대체가 잠이 안 옵니다.

왜 그런지 공부에는 별별 장애가 그렇게 많습니다.

그러므로 일할 때 정신이 초롱초롱 하잖아요. 그 때 챙겨요.

이 뭣꼬를 챙기든지, 관세음보살을 챙기든지, 뭘 챙기든지...

 

  또 받으니 노방의 두 글귀로 아까 “다만 모든 있는 것을 비우기를 원할지언정 간절히 모든 없는 바를 있도록 하게 하지 말라.

이것이 두 글귀지요.

노방의 두 글귀. 앞에 소개 됐었습니다.

이것을 行住坐臥(행주좌와)의 교훈을 삼는다고 하니 좋기가 더할 나위 없습니다.

이분은 그렇게 사네요.

그러니까 대혜스님이 기분이 좋다는 것이지요.

 

  만약 시끄러울 때 싫어하는 마음을 내면, 이것은 스스로 그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만약 분별심이 일어날 때에 다만 노방의 두 글귀를 떠올리면 문득 열이 날 때 淸涼散(청량산)을 한 번 복용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도대체가 망상이 많이 끓고, ‘공부가 안 된다’‘공부가 안 된다’그럴 때는 이런 명구를 하나씩 기억하는 것이 참 좋은 일입니다.

이것은 원문으로 기억하면 더 좋겠네요.

 

但願空諸所有(단원공제소유)언정 切勿實諸所無(절물실제소무)어다.

66쪽에.

최소한도 지금 최첨단. 최고급불교, 선불교를 공부하시는 분들이니까 이 정도 글자 몇 자 외우는 것은 일도 아니지요?

화두는요? 글자 몇 자 외우는 것보다는 천배 만배 수승한 것입니다.

어려운 것이 아니고 殊勝(수승)한 것이라고요.

 

  저도 어릴 때 관세음보살 외워서 덕본일이 참 많아요.

어디 다니다가 무서울 때라든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무조건 관세음보살 열심히 외우면, 상당히 첫째 마음이 안정되고,

영험도 나타나고, 참선 이야기하면서 이런 이야기가 우습지만,

그러나 참선공부에도 여기 대혜스님이 지도 하셨듯이 아주 지침이 되는 간단한 명구.

꼭 필요합니다.

간단한 명구는 꼭 필요하다고요.

여기 딱 그렇게 했잖아요?

그것을 늘 목에 걸어 두라고 했는데 이 거사는 아주 착실하고 성실한 분이어서, 대혜스님이 시킨 대로 그렇게 한다고 했잖아요.

 

“노방의 두 글귀를 떠올리면 문득 열이 날 때 청량산을 한 번 복용하는 것과 같다.”아주 열이 펄펄 끓을 때 청량산이라는 아주 시원한 약이 있는데,

그것을 한 번 먹으면 그만 그 순간 열이 사~ㄱ 내려가듯이 단원공제소유)언정 절물실제소무어다.

있는 것을 비워야지 왜 없는 것을 자꾸 채우려고 하느냐?

이렇게 알면 더 간단해요.

 

있는 것을 비워야지 왜 없는 것을 자꾸 채우려고 하느냐?

“있는 것 비우자.”“있는 것 비우자.”

이렇게 해도 시원해요.

상당히 효과가 있습니다.

 

  저는 반야심경 주력을 많이 했는데요.

반야심경을 하도 외우다보니까 요령이 딱 생기는 겁니다.

한마디로, 아주 짧은 글귀로 그것이 요약이 되더라고요.

그것이 뭐냐? “나는 없다.”“나는 없다.”입니다.

270자가 “나는 없다.”넉자로 딱 요약이 돼 버려요.

그것도 한글로 하니까 더 간단하고 훨씬 영험도 있고 이해가 잘 돼요.

“나는 없다.”무 안이비설신의 무 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뭡니까? 결국은 내가 없다는 소리입니다.

내가 없으면 세상 다 없어요.

  “나는 없다.”“나는 없다.”

이것을 아주 속이 답답하고 울화통이 터질 때, 반야심경 외우니까 길어서 안 되겠고 그래서“나는 없다.”“나는 없다.”하고 외우니까

속이 청량산 먹은 것 같이 효과가 있습디다.

한 순간이라도 내가 없어져요.

내가 없어지더라고요.

잠깐이라도, 의식적으로라도 내가 없어져요.

내가 없어지니까 다른 것은...

내가 있으므로 해서 일어났던 열 오르는 일들. 세속적인 표현으로 뚜껑 열리는 일들. 어느 정도는 사라져요.

꼭 한번 써 보십시오.

반야심경 복잡하니까 외우려고 하지 말고 나는 없다. 나는 없다.

대혜스님이 마침 이 거사님에게 그렇게 지시를 하셨고, 또 이분도 잘 따라서 그렇게 했고, 이런 효과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당신은 결정적 믿음을 갖추었으니 큰 지혜를 가진 사람입니다.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이런 진리에 대한 관심과 신앙심. 믿음. 이해.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현명한 사람이고, 성공한 사람입니다.

몇 표 더 얻으려고 열을 올려서 조작빼기 이야기. 주먹을 내두드리면서 해봤자 그것을 성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인생의 高手(고수)들은 그런 데에 관심 없어요.

여기오신 분들은 다 인생의 고수들입니다.

그런 것은 하수들이나 하는 것이지요.

 

  오랫동안 고요한 가운데서 공부를 해 왔기 때문에 바야흐로 이런 말을 감히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만약 識業(식업)이 아득하게 많고 교만한 사람에게 이와 같은 말을 해주면 이것은 그에게 악업의 짐 덩어리를 더해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禪門(선문)의 갖가지 병은 이미 앞의 편지에 갖추어 말했습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

일찍이 자세히 이해했습니까?

 

이것은 오늘 편지도 이해했느냐는 뜻도 되고, 선문의 갖가지 병.

제가 앞에 생략한 묵조선의 병폐.

처음에 묵조선 비판 이야기.

그 속에도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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