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書狀)

서장대강좌15/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10. 17. 15:38
 

 

서장 대 강좌 4 - 1 강

 

        1

  태풍영향으로 비가 대단히 많이 내렸는데, 이 궂은 날씨에도 많은 분들이 동참 하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법을 설하는 법사는 청중들이 정성과 열의로 참여해 주시는 그 마음을 잘 감지하고, 거기서 힘을 얻습니다.

역시 제가 열심히 준비하고 성의를 다 할 때, 여러 불자님들에게는 상당히 힘이 되리라 믿습니다.

모든 것이 서로 상부상조하는데서 효과가 훨씬 더 크게 나타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야기를 할 만한 사람을 앉혀놓고 제가 만약에 이것은 이야기해 주기가 아깝다고 생각하면, 사람을 잃어버리는 것이 되지요.

정말 마음을 다해서 한 마디라도 들으려고 여기까기 왔는데 만약에 법을 아낀다면 정말 이것은 큰 잘못이고, 사람을 잃어버리는 것이 되지만, 들을만한 사람이 아닌데도 高峻(고준)한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은 또 말을 잃어버리는 것이 되지요.

사람도 잃지 않고 말도 잃지 않는 관계가 되려면 오늘 같은 이러한 모습을 서로서로 보여줌으로 해서 좋은 결과를 얻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문득 해 봅니다. 

 

  그 동안 禪(선) 내지 看話禪(간화선)의 전체 그림을 대강 3회에 걸쳐서 그려 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서장 진도가 제대로 나가지를 못했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역사적으로 제가 아주 부러워하는 큰 선지식! 대혜스님의 법문이라면 더 이상 덮을 것이 없는 법문이라고 우리가 그렇게 믿고 공부합니다.

사실 그렇기도 하고요.

그러기 때문에 대혜스님의 가르침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정확하게 귀담아 들을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큰 이익은 없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은 63쪽.

지난 시간 증시랑 에게 두 번째 답한 내용이 이어지는데, 眞空妙智(진공묘지)에 대한 이야기가 앞에 좀 있었습니다.

진공묘지와 허공. 허공을 진공묘지에 비유를 했는데요.

진공묘지라는 말은 우리가 상당히 유의 깊게 들어야할 내용입니다.

 

불교의 양대 사상이라고 제가 대강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불교 안에도 다양한 사상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양대 사상을 이야기를 하면, 無我思想(무아사상)과 如來藏(여래장)사상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최근에 불교신문을 보신 분들은 무아사상과 여래장사상 때문에 신문을 통해서 논쟁이 약간 벌어졌던 것을 아마 보셨을 줄 믿습니다.

아주 좋은 현상인데요.

불교 안에서는 사실은 다른 것 때문에 논쟁을 할 일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 불교 안에서의 사상적인 것을 갖고 논쟁을 해야 옳습니다.

禪房(선방)에서도 法擧揚(법거량)을 하느라고 싸움이 벌어져야지 다른 문제 때문에 싸움이 벌어져서는 사실 안 되거든요.

 

법거량 때문에 심한 경우 멱살도 잡고, 목침이 오고가고 하는 것도 다 용납이 되고, 또 그러한 시대를 상당히 선망하고, 좋은 사례라고 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마저도 객기를 부리면서 선문답을 장난삼아라도 주고받는 이런 풍토가 상당히 사라져 버려서 참 안타깝게 생각을 합니다.

또 간화선의 열기가 이렇게 계속 분다면, 아마 그런 분위기도 금방 살아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불교의 양대 사상이라고 하면, 무아사상과 여래장사상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데요.

무아는 두 말할 것 없이 空思想(공사상)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또 공은 緣起(연기)를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에 공이라고 하고, 또 공을 저변에 깔고 연기를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공이니 연기니 무아니 하는 것은 같은 입장에서 보는 것이고, 여래장사상이라는 것은 잘 아시는 대로 一心思想(일심사상). 佛性思想(불성사상). 自性思想(자성사상). 一物(일물)이니 心主(심주)니 眞如(진여)니 불성이니 法性(법성)이니, 이런 여러 가지 말로 표현되는 사상이 여래장사상입니다.

 

  오늘 공부하려는 眞空妙智(진공묘지)라는 것은 바로 여래장사상에 연관되는 것인데, 이 진공묘지라고 하더라도 그 낱말이 보여줬듯이 진공이면서 참으로 공한 것이면서 아주 아름다운 지혜! 아주 미묘한 지혜가 죽지 않고 활발발 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을 진공묘지라고 합니다.

지금 이렇게 말하고 여러분들은 열심히 듣는 이 사실이 아주 미묘한 지혜가 활발발 하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본바탕을 추궁해보면 도대체 무엇이 있어서 이렇게 활발발한가?

이것을 추적해보면 사실은 없습니다.

텅 비었습니다.

그래서 진공이면서 묘지이고 묘지이면서 진공라고 보는 것이지요.

무아니 공이니 하는 것하고는 전혀 다른 별개의 것입니다.

이것은 일물사상. 금강경오가해 에서도 보면 아주 우리 불교사에 안목이 밝으신 분으로서 글도 아주 뛰어나게 잘하신 분들을 신라는 원효를 꼽고, 고려에 와서는 조선 초기까지 사셨지만 함허득통선사를 꼽습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서산을 대개 꼽는데 함허득통선사께서 금강경오가해를 편집하셔서 서문을 쓰시면서 有一物於此(유일물어차)하니 絶名相(절명상)호대 하는 아주 유명한 서문이 있습니다.

또 불교에 글 중에서 서문을 쳐 주거든요.

왜냐하면 서문 속에는 한 권의 경전 내용이 함축되어있기 때문에요.

오가해 서문은 아주 명문으로 꼽습니다.

 

거기도 서두에 여기에 한 물건이 있다. 절명상이라. 이름과 형상이 없으되, 貫古今(관고금)이라. 무한한 과거와 무한한 미래까지 꿰뚫고 있다고 했어요.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는 것이지만, 과거와 미래를 꿰뚫고 있는 것.

이렇게 이야기가 나갑니다.

그러다 저기 중반에 가면 이것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내 그 까닭을 알지 못 하겠도다.

空耶(공야)아 有耶(유야)아 吾未知其所以(오미지기소이)로다. 라고 아주 멋진 글을 남기셨습니다.

  진공묘지. 대혜스님의 법문을 봅시다.

 

  p.63

  이 眞空妙智(진공묘지)가 비유하자면 太虛空(태허공)입니다.

태허공과 더불어 수명을 가지런히 합니다.

우리의無量功德生命(무량공덕생명). 이렇게 떠도는 이 참 생명은 그야말로 허공의 수명과 같다는 말입니다.

다만 이 태허공 가운데서 도리어 한 물건이 장애가 됩니까?

한 물건의 장애도 받지 않아서 모든 물건이 공중에 왕래하는 것이 방해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무리 걸어 다녀도, 비행기가 날아 다녀도, 차가 지나 다녀도, 건물을 세워도, 건물을 부수어도 허공하고는 아무 관계없습니다.

 

   이 진공묘지도 또한 그러해서 生死(생사)와 凡夫(범부) 聖人(성인)과 垢染(구염)이 조금도 붙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죽고 태어나고, 범부다. 성인이다. 때 묻었다. 물들여졌다.

천차만별의 인간상들이 진공묘지라는 누구나 공히 갖고 있는, 이것은 누구나 아주 평등한 추호도 차이가 있지 않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상적으로는 온갖 차별된 것이 있지요.

런데 그 차별된 현상은 우리 한 마음자리에는 조금도 붙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비록 붙을 수는 없으나, 생사 범성이 그 가운데서 왕래하는 것은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범부가 됐든지 성인이 됐든지 죽었든지 태어났든지, 또 어떤 훌륭한 일을 했든지 나쁜 일을 했든지, 참 생명 자리에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이것이 좀 우리가 이해가 되고 감이 좀 잡혀야 됩니다.

불교공부를 제대로 맛을 들일려면 이 문제가 좀 감이 잡혀야 됩니다.

일물의 문제! 일심의 문제!

 

  이와 같이 믿음이 미치고 보기를 철저히 하면, 바야흐로 나고 죽음에 大自由(대자유)를 얻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왜냐? 그것이 나의 진실이고, 그것이 내 생명이고, 그것이 내 참모습이니까요. 그러니까 대자유를 얻지요.

그것과 더불어 살고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고 죽고, 잘나고 못난 차별상만 봅니다.

차별상만 보지만 차별상 이면에 활발발한 그 한 물건을 이해하고, 그것을 나의 참 생명으로 느껴야 됩니다.

그것이 내 살림살이가 되어야 됩니다.

 

  지금 말소리를 듣는데 유식 무식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남녀가 관계가 있습니까? 僧俗(승속)이 관계가 있습니까? 아무 관계없습니다. 나이가 많고 적고에 이 말 소리 듣는데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것이 비록 사량 분별이고 망상으로 짐작하는 것이지만, 망상으로 짐작하는 것이라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전혀 차별이 없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대단한 존재입니다.

이런 대단한 존재를 우리가 공기 활용하면서 공기 사용 하듯이 쓰면서, 오히려 공기보다도 더 가까이 쓰면서, 거기에 대해 이해도 없고, 알려는 관심도 없는데서, 내가 이것이면서 이것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산다는 것이지요.

짧은 글이지만 대혜스님이 아주 명쾌하게 잘 설명을 했습니다.

 

  화두를 든다는 간화선의 문제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비로소 조주의 방하착과 운문의 수미산과 더불어 조금 상응함이 있게 될 것입니다.

대자유를 얻은 사람! 그 한 물건에 대한 깊은 이해! 그것을 사물을 보듯이 확고부동하게 본 것을 見性(견성)이라고 합니다.

눈으로 사물을 보듯이 보는 것을 성품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거기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으면, 조주스님의 방하착이라는 화두. 운문스님의 수미산이라는 화두가 별 문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것 표현입니다.

무슨 소리를 했든지 간에 그것에 대한 표현입니다.

왜냐? 그것 떠나서는 어떤 이야기도 성립될 수 없으니까요.

바로 진공묘지라고 합시다.

여기 대혜스님이 진공묘지라고 이름을 붙였으니까요. 이름이 수 만 가지인데...

  진공묘지라는 것을 떠나서는 그 어떤 것도 표현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 어떤 표현도 放下着(방하착)이 됐든지, 須彌山(수미산)이 됐든지, 이 뭣꼬가 됐든지, 無자가 됐든지, 板齒生毛(판치생모)가 됐든지, 乾屎橛(간시궐)이 됐든지, 庭前栢樹子(정전백수자)가 됐든지, 그 어떤 기상천외한 격외소식도 그것을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럼 그것의 한 줄기요.

그것의 한 표현이고, 그것의 한 잎입니다.

그것의 한 물결입니다.

그것의 한 바람결입니다.

진공묘지의 한 바람결이라고요.

 

  어떤 기상천외한 格外道理(격외도리)를 이야기했다 하더라도 그래요.

안 그렇습니까? 거기서 나온 것이니까요. 전부 거기서 나온 것이지요.

금으로 불상을 만들었든, 사람 죽이는 칼을 만들었든 금입니다.

아름다운 불상을 만들었다고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칼을 만들었든 불상을 만들었든 금은 값 차이 안 납니다.

골동품이나 되면 몰라도 막 만들었다면 큰 차이 안 납니다.

똑 같이 상당히 비쌀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고받는 잡담에서부터 선사들의 고준한 법담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바로 이 진공묘지의 한 표현입니다.

진공묘지에서 나왔습니다.

금으로 뭘 만들었든지 간에 불상을 만들었든지, 칼을 만들었든지 돼지를 조각을 했던지 물고기를 만들었는지 간에 역시 금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불상을 모셔놓고 점안할 때, 첫 법문에 염불 소리 잘 들어보면 栴檀木做衆生像(전단목주중생상)을 들을 수 있을 겁니다.

及與如來菩薩形(급여여래보살형) 전단 나무로 중생의 모습도 만들고 부처님모습도 만들고, 보살모습 나한모습 온갖 모습을 다 만들었다.

천 가지 만 가지 얼굴이 각각 달라요.

부처님제자의 모습을 만들었으면 부처님제자이고, 불상을 만들었으면 불상입니다. 그렇지만 萬面千頭雖各異(만면천두수각이)나 만 가지 얼굴 천 가지 머리가 다 각각 다르지만, 若聞薰氣一般香(약문훈기일반향)이라. 만약에 가서 냄새를 맡아보면, 생선 조각을 해놔도 생선 냄새가 아니 나고 전단향기가 납니다.

불상을 만들어도 똑 같이 전단향기가 납니다.

보살상을 만들어도 역시 똑 같이 전단향기가 난다는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불교의 생명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들의 참 생명입니다.

진공묘지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무슨 형체가 있다고 오해하실 일은 없지요.

그렇게 오해 안 하실 겁니다. 아마 그것은 길게 설명을 아니 해도...

그러면 운문 수미산. 조주 방하착 이까짓 것 별 문제없다 이겁니다.

여기 표현상 조금 상응할 것이라고 말을 해서 그렇지, 이런 것들도 다 잘 이해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만약 믿음이 미치지 못하고 내려놓지 못하면, 도리어 청컨대 하나의 수미산을 짊어지고 도처에 행각하여 눈 밝은 사람을 만나서 분명히 들어 보이십시오.

한바탕 웃게 될 것이요.

제가 번역을 그렇게 했습니다.

청컨댄 하나의 수미산 하는 것은 하나의 큰 문제의식을 갖고, 무슨 수미산. 방하착만 문제가 아니라 여기에 대한. 이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입니다.

 

화두를 든다는 것은 대혜스님 이전에도 있었던 일이지만, 그러나 구체적으로 화두를 들고 공부한다는 이 문제는 이것을 일반화 시키고 공부하는 하나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제시한 것은 역시 대혜스님 이십니다.

그럼 대혜스님은 왜 그런 방법을 새롭게 제기를 했는가 하면, 그 당시까지 소위 默照禪(묵조선)이라고 해서 좌선 중심이었습니다.

앉아서... 앉아 있는 것 중심이었습니다.

몸도 마음도 철저히 앉는 것입니다.

“앉는다.” 하면 몸도 마음도 철저히 다 앉는 것입니다.

앉아서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이 다른 데에 도망가면 그것은 앉는 것이 아니지요.

몸만 앉았지 앉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앉아라”“앉아라”“앉아라”“좌선”“좌선”“좌선”이것을 아주 철저히 권한 수행 풍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지혜도 나지 않을뿐더러 여러 가지 시간낭비만 하고, 수행에 폐단이 너무 많다고 해서 앉아 있는 사람을 일으켜 세운 것이 간화선 운동입니다.

  대혜스님의 간화선 운동은 모두 앉아서만 수행한다고 생각하던 것을 전부 일으켜 세운 운동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습니다.

아시듯이 서장은 전부 사부 대중을 향해서 가르치는 가르침이고, 특히 거사 분들이 제일 많습니다.

거의 99%가 거사 분들을 대상으로한 가르침이지요. 그

러기 때문에 이것은 일상생활을 하시는 거사 분들에게 이런 가르침을 펼치려면 앉아 있는 것을 권해서는 될 일이 아닙니다.

가서 공무보고 와야지, 퇴근한 뒤에 잠깐 앉으면 앉을 수 있든지 하면 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까?

 

  行住坐臥(행주좌와). 語默動靜(어묵동정). 어디를 가든, 공무를 보든, 대화를 나누든 대인 접하를 아무 관계없이 공부가 되는 공부라야만 되겠다고 보신 겁니다.

그래서 간화선을 제창한 것입니다. 제가 엇 그저께 기본 선원에도 가서 이야기를 했지만, 간화선이라는 것이 앉아 있는 사람을 일으켜 세워 놨더니 요즘은 돌아앉아 버렸다고...

대혜스님은 분명히 일으켜 세운 것입니다.

전부 앉아서 공부하던 사람을 전부 일으켜 세운 것입니다.

활동선. 생활선. 생활 속에서 선이 되도록 가르친 것인데, 어떻게 된 심판인지 요즘은 돌아앉아 버렸다고 제가 이야기를 했는데요.

 

  우리가 간화선에 관심이 없으면 몰라도, 간화선에 관심을 갖는 한은 간화선이 그런 선 인줄을 알아야 되는 겁니다.

여기서는 간화선을 주창 하게 된 이면에 默照邪禪(묵조사선)이라는 것. 앉아서만 모든 공부가 다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비판하는 내용이 서장에 반은 차지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실은... 그래서 이런 중복 되는 것은 생략도 하고 넘어가야할 입장인데요.

 

  p. 65

    증시랑에게 답함(3)

 

  노방이 “다만 모든 있는 바를 비우기를 바랄지언정 간절히 모든 없는 바를 실재한다고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이 두 글귀를 알면 필생의 공부를 마친 것입니다.

거사님이라면 어떻습니까?

유마거사. 중국에는 노방 = 방거사. 신라 때 부설거사. 또 근년에 계셨던 백봉거사. 김기추 선생이라고 저도 그 분 밑에서도 공부했는데 아주 대단한 거사 분이었어요.

아직도 그 분의 영향이 남아 있어서 신행단체도 있습니다.

책도 많이 쓰셨고, 소견이 아주 뛰어났던 백봉거사분인데, 모르겠어요.

근래에는 또 어떤 거사 분들이 선지식으로 활동을 하시는지...

여기 노방이라는 방거사는 그런 분입니다.

 

  이 구절은 아주 유명한 말입니다. 있는 것.

지금 우리 의식 속에서 있다는 것을 지우는 것. 무 안이비설신의. 무 색성향미촉법. 이것을 우리가 간절히 원 해야 되는데, 없는 것마저 있도록 한다.

그러니까 없는 것마저도 있도록 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있는 것 비우는 것이 불교의 공부입니다.

불교는 비우는 공부입니다.

비우는 것을 바랄지언정 없는 것을 있도록 해서는 안 되지 않느냐?

그런데 우리는 왕왕 없는 것을 있다고 여기고, 또 있게 만듭니다.

그것이 의식화 운동입니다. 없는 것을“있다”“있다”“있다”하면 꼭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꼭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니까요.

일체유심조니까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우리 의식이 만들면 만들어지기도 한다고요.

그렇지만 그런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것은 원문을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但願空諸所有(단원공제소유)언정 切勿實諸所無(절물실제소무)로다 라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지금 머리 깎은 한 외도가 자기 눈도 밝지 않으면서 다만 사람들에게 죽은 고슴도치 같이 쉬고 쉬어가라고 합니다.

고슴도치가 죽은 듯이 있잖아요.

자기보다 큰 동물이 오면 가시를 세운 채 죽은 듯이 가만히 있잖습니까?

그러면 다른 짐승이 와서 입을 대면 그 가시에 찔리잖아요.

꼼짝도 안 하니까요.

죽은 고슴도치처럼 그렇게 가만히 쉬고 쉬어라 묵조선은 이렇게 가르친다고요. 앉아서 공부하는 것.

 

  만약 이와 같이 쉬면 일천 부처가 세상에 출현하더라도 또한 쉴 수가 없어서 점점 마음이 혼미하고 답답하게 될 뿐입니다.

마음이 쉬어지는 겁니까? 쉬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금강경에서 잘 배웠듯이 應無所住(응무소주) 而生其心(이생기심). 마음은 흘러가게 되어 있으니까요.

흘러가면서 마음 쓰라 이겁니다.

주하지 말고, 머물지 말고 마음 쓰라.

그런데 대개 살아온 습관이나 세상의 가치관에 의해서 꼭 “이렇게 살아야 된다.”하고 마음을 어떤 틀에다 매달고 사는 경우가 많잖아요.

 

  인생관이라든지 가치관이라든지... 여기서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몸이 앉아서 좌선할 때 쉬는 것처럼,

마음도 그렇게 “쉬라”“쉬라”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앉아만 있어집니까?

눕기도 하고, 화장실에도 가고, 식사도 하고, 산책도 해야 되지요.

그럴 때는 공부가 안 되고, 같이 마음이 들고 일어난다면 그것이 무슨 공부입니까?

그것은 공부 아니잖아요?

한 자리에 가만히 오랫동안 놔둔 석상 같은 것을 공부 잘 한다고 봐야지요.

사람이 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 때, 그런 공부가 유행 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문제 삼은 것입니다.

 

  또 사람으로 하여금 인연을 따라 오로지 지속하여 識情(식정)을 잊고 고요히 비추어 보라.

이것이 어떻게 觀照禪(관조선)! 제가 관조선이라고 하는데요.

인연을 따라 오로지 지속하여 식정을 잊고 고요히 비추어 보라.

이것은 가만히 예의주시 하는 것입니다.

예의관찰 하는 것이지요.

내가 걸어가면 걸어가는 것. 누구를 만나면 만나는 것. 말 하면 말을 하는 것. 공부하면 공부하는 것.

또 하나의 나를 뒤에, 이면에 세워놓고 내가하는 모든 것들을, 말하자면 인형이 사람이 조절하는 대로 움직이듯이 그렇게 내가 이면에서 나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관조선이고, 요즘 흔히 위빠사나가 그런 선 아닙니까?

그것은 일단 차분해질 수는 있어요.

차분해질 수는 있지만 그것은 궁극적인 해결책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추어 오고 비추어 가며, 지속해 오고 지속해 감에 점점 혼미하고 답답함이 더하여 통달할 기약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랬지 않습니까? 비추어 오고 비추어 가며, 예의주시. 제가 위빠사나가 하도 바람이 세기에 본격적으로 위빠사나만 공부를 했지요.

옛날에 강원에서 “비발사나”라고 해서 경전에 나오는 소위“비발사나”라고 할 때는 그냥 대충 止觀(지관).

망상을 그치고, 그 다음에 어떤 상황이든지 그 상황을 관찰하는 것.

그렇게 되어 있는데, 그래서 대강 이론적인 것을 배웠는데, 근년에 위빠사나가 유행을 많이 해서 그 분들이 강의한 테잎. 책. 자료를 구할 수 있는 대로 다 구해서...

  강의한 것도 여러 사람이 강의한 것을 다 들어보았는데 결국은 여기에 뭡니까?

비추어 오고 비추어 가며, 지속해 오고 지속해 감에 이런 말입니다.

예의주시 하는 것. 예의 관찰하는 것. 처음에 숨 쉬는 것을 관찰하고 다음에 내가 행동하는, 모든 행동을 예의주시 하고 예의관찰하는 것. 급하게 달리면 안돼요.

놓쳐버리니까요.

천천히 걸어야 돼요.

행동 하나하나도 천천히 하게 되고요.

또 예의관찰하다 보면 천천히 할 수 밖에 없어요.

밥도 천천히 먹게 되고요.

한머리 관찰하면서 밥을 먹어야 되니까요.

걸어가면서 관찰하고 관찰하면서 걸어가야 하니까 천천히 될 수밖에 없어요.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 공부법도 있어요.

 

  특히 조사의 방편을 잃고 사람을 잘못 가르쳐서 사람으로 하여금 한결같이 헛되게 살고 죽게 합니다.

간화선 말고 간화선이 일어나게 된 묵조선을 비판하는데 쉬어가고 쉬어가라. 인연을 따라 오로지 지속하고 비추고 비추라.

  다시 사람들에게 “이 일을 간섭하지 말라.

죽든 살든 생사 문제를 문제 삼지 말라 이겁니다.

죽으면 죽는 것을 보고, 살면 사는 것을 보고...

간섭을 하지 말라 이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거부감 갖지 말라는 식이지요.

 

  다만 이렇게 쉬어 가고 쉬어 옴에 情念(정념)이 생기지 않을 것이니, 이러한 때에 이르러 가만히 앎이 없지 않다.

바로 이것이 惺惺(성성)하고 歷歷(역력)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것들이 전부 묵조선의 병폐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다시 毒害(독해)로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것이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증시랑이 이런 가르침의 스승들을 만날 기회가 너무 많았습니다.

사찰의 스님들도 그러려니와 그 당시 송나라 때 유식한 사람들은, 전부 한 禪해야 어디 가서 명함을 내놓는 겁니다.

서양 학자들이 요즘 선문답 몇 구절은 다 외우고 있어서 대화에 선문답 몇 마디는 쓸 줄 알아야 요즘 서양 학자들이 명함을 낸다고 할 정도로 되어 있듯이, 송나라 때 이 당시는 그야말로 한 禪해야 유식한 사람이라고, 명함을 내밀 정도니까 그것이 대개 묵조선이었습니다.

대혜스님께서 아주 그냥 입에 침을 튀겨가면서 비판하고 사정없이 곳곳에서 거부하고 있습니다.

 

  운문은 대혜스님 자신입니다. 평소에 이런 무리를 보고 공부하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이미 스스로의 눈이 밝지 않아서 다만 책자 위의 말을 가지고 겉모습으로 사람을 가르칩니다.

이러한 사람이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러한 사람을 믿을 것 같으면 영겁 동안 참구해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운문도 평소에 사람에게 좌선을 하게 하되 조용한 곳에서 공부를 하게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것은 병에 따라 약을 주는 것이지 실제로 이렇게 사람을 지시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앉아서 공부하는 것 괜찮다.”이겁니다.

行 住 坐 臥 語 默 動 靜.(행주좌와어묵동정) 그 가운데 좌가 하나 들어 있잖아요?

그 가운데 앉는 것이 하나 들어있습니다.

 

  앉아서 하게 된 경우라면 “앉아서도 해라.”이 정도로 가르쳐주지 무조건 “좌선만 해라.”只管打坐(지관타좌) 그래요.

只 管 打 坐. 일본에는 조동종이 선종으로서는 상당히 盛(성)하거든요.

임제종은 크게 성하지가 않습니다.

일본에는 조동종이 아주 성하거든요.

조동종에서는 지관타좌. 오로지 “앉아 있으라.” “철저히 앉아 있으라.” “몸도 마음도 다 앉아 있으라.”여기서 말한 그대로입니다.

거기는 화두선 이야기를 안 하니까요.

앉는 것만을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는 공부하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했는데 뒤에 가면 “나는 그런 것을 인간으로도 취급하지 않았습니다.”이런 표현이 또 나와요.

그래서 다시 덧붙일 것은 간화선은 앉아있는 선에서 서서 활동하는 선으로 전환시킨 선이다.

  여기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들은 용기를 내서, 간화선에 관심이 있다면 ‘아, 이거 직장 생활하는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구나!’대혜스님의 신도는 전부 여러분들처럼 직장 생활하고, 일상생활 하면서 참선하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정년퇴직해서 아주 철저히 이것만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요. 용기를 갖고 간화선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해도 되는 공부입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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