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書狀)

서장대강좌19/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10. 22. 22:06
 

 

서장 대 강좌 5강 - 1

 

  서장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지식과 어찌 보면 불교의 백지 상태인 일반 거사님들과의 절차를 뛰어넘은 순서를 전혀 관계하지 않고,

불교를 바로 이해시키려는 선지식의 가르침이고, 또 서장 안에 등장하는 많은 거사님들이 언제 천수경 외우고 반야심경 외우고 108배 할 줄 아는 그런 절차를 밟은 뒤에야 비로소 불교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야 되겠다는 의식이 전혀 없는 입장에서 불교를 바로 질러가는 길을 택하고 있습니다.

돌아가는 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질러가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관계는 아예 처음부터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이런 저런 인연으로 해서 불교에 대한 상식과 지식이 너무 많고, 그것이 또 어찌 보면 불교를 제대로 아는데 사실은 상당한 장애의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서장에서도 그런 것을 지적하고 있는데요.

아는 것이 왜 장애가 되겠는가? 아는 것이 장애가 아주 많이 됩니다.

아는 것이 장애가 됩니다.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저하고 아주 잘 아는 스님이 평소에 글씨를 나름대로 모필 글씨를 열심히 썼습니다.

아주 명필을 만나서 글씨를 좀 배우려고 마음을 먹고 가서 글씨를 배우는데, 상당히 공을 들여서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평소에 쓴 습관이 나오는 겁니다. 그것을 고치려고 아무리해도 도대체 고쳐지지가 않는 겁니다.

일 년을 고치려고 해도 자기 혼자 연습한 그 습관이 나와서 당신은 틀렸다.

금생에는 붓글씨 제대로 쓰기는 틀렸다는 지적을 받고, 저한테 그 얘기를 하는 것을 직접 들었어요.

그러니까 미리 아는 것이 제대로 알면 모르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을 쌓아 놓은 것이 바른 공부를 하는 데에 얼마나 장애가 되겠는가?

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서장에는 천하에 아주 명 선지식으로서 불교의 중요한 제반 사항들을 여기서 많이 지적 하면서 뛰어난 견해로 해결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 교재 85쪽입니다.

 

8. 이참정 한노가 질문하는 편지.

  저~ 앞에서는 증시랑이 질문하는 편지가 한편 있었고, 그 다음에는 이참정. 참정 벼슬이라면 국무총리정도 되는 벼슬입니다.

그분이 질문하는 편지입니다.

이분은 이 질문하는 편지가 事前(사전)에 대혜스님을 찾아가서 대혜스님에게 지시를 받고, 상당한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분입니다.

앞에 증시랑은 깨닫지 못한 사람으로서의 질문하는 편지를 대표로 한편 실었고, 여기는 깨달은 사람의 편지로서 대표로 한분 실었습니다.

그 외에는 질문하는 편지가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대혜스님의 법문만 실려 있습니다.

질문하는 편지로서는 마지막인데 깨달음의 전말에 대한 이참정의 이야기가 앞에 서두에 나오고, 그 다음에 세속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

또 그런 삶을 통해서 세속적 상식이라고 하는 것. 이런 문제를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고,

끝에 가서는 불교에서 아주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頓悟頓修(돈오돈수)와 頓悟漸修(돈오점수)의 문제.

이 문제도 이참정 章(장)에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편지를 읽겠습니다.

 

제가 근래에 籌室(주실)께 묻고서 어리석고 막힘을 激發(격발)해 주심에 힘입어 홀연히 깨달아 들어감이 있었습니다.

주실이라는 것은 조실. 방장이라는 뜻입니다.

방장 스님한테 묻고 비로소 홀연히 깨달았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마음이 어둡고 둔하여 평생 배우고 안 것이 다 情見(정견)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 말이 그 말이지요. 평생 배우고 안 것이 오히려 어떤 변색된 소견.

 

情見 이라는 것은 변색된 소견이지요.

자가 뭡니까? 마음 심 변에 푸를 청 이지요.

이것이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고, 어떤 푸른 안경이나 누런 안경을 끼고 사물을 보듯이 변색된 마음으로 존재와 사물을, 인생관과 세계관을 보는 태도를 情見 이라고 합니다.

모든 우리의 지식이라는 것이 情見에 떨어져 있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하나를 취하고 하나를 버림이 마치 떨어진 솜옷을 입고 풀 가시밭 가운데를 가다가 마침내 스스로 엉킨 것과 같았습니다.

표현을 아주 잘 했습니다.

당시 참정 벼슬 정도를 한다면 천하에 손꼽는 선비에 해당 되겠지요.

정말 세속적인 삶이라는 것. 이것 하나 놓으면 저것 하나 걸리고, 저것 하나 놓으면 이것 하나 걸리고...

세상사는 그렇지요.

또 세상사로서 공부에 연관시켜서 공부를 한다고 해봐도 역시 그와 같더라는 술회입니다.

 

지금 한번 웃음에 깨닫고 나니 이런 뜻이지요.

문득 풀렸으니 기쁘고 다행함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큰스님께서 자세하게 내려주신 자비가 아니었다면 어찌 이것을 이루었겠습니까?

성중에 이른 뒤부터 옷을 입고 밥을 먹으며 자식을 안고 손자를 데리고 노는 가지가지가 그전 그대로지만, 이미 구속되고 막히는 감정이 없고 또한 기특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불교 공부의 효험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생활이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밥 안 먹고 잠 안자고 사람 안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로 그전 그대로 잘못 번역을 해서 “옛 본분을 따른다.”고 했는데, 그전 그대로 본문에는 仍舊(잉구)라는 말입니다.

그전 그대로. 옛 그대로. 깨닫기 이전하고 그대로...

그전 그대로 이지만 그런데 묘하게도 가뿐해요.

자식과 어떤 문제를 논의 한다든지, 손자를 안고 어여삐 여기고, 손자하고 장난치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깨닫기 전과 깨달은 이후의 그 일상생활은 똑 같으나 내 마음에 남는 찌꺼기는 전혀 달라요.

 

  가뿐하다는 겁니다. 그런 겁니다. 이것이 불교를 공부한 효험입니다.

무슨 엉뚱하게 공부도 아니 했는데 기도해서 좋은 학교 척 붙고, 내놓은 아파트가 팔릴 때가 되어서 어쩌다가 팔린 것을 기도해서 팔렸다고 착각해서, 불교를 그렇게 巫俗化(무속화) 시킨다면 僧俗(승속)을 막론하고 참 지극히 잘못된 것입니다.

불교의 효험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저 밥 먹고 옷 입고 자기에게 처해 있는 인연을 수용하면서 해결할 것 해결하면서 살아가는데 뭐라고 했지요?

기특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구속되거나 막히지 아니해요.

그 나머지 묵은 습관과 오래된 장애도 또한 조금씩 경미해졌습니다.

가벼워 졌다는 겁니다.

뒤에 스님의 답장에 이런 문제를 짚어갈 것이니까 그 때 또 말씀 드리기로 하고...

 

이별할 때 간절히 일러주신 말씀은 감히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대혜스님을 친견한 후 산에 가서 대혜스님 절에 오래 머물면서 법문을 주고받으면서 말씀아래 깨달았어요.

깨달았는데 깨닫고 나서 대혜스님이 가라고 하지를 않고, 최후의 주의를 일러 주셨는데 그 말이 86쪽 밑에 주에 있습니다.

 

152번 주에 보면 이것이 능엄경의 말을 인용 했는데요.

理則頓悟(이즉돈오)라 乘悟倂銷(승오병소)니와 事非頓除(사비돈제)라 因次第盡(인차제진)이라

이치는 문득 깨달아서 깨달음을 따라 아울러 녹여가지만,

일상생활에서의 끌림은 홀연히 제거할 수 없어서 차례를 따라 없애야 한다.

이런 이론이 있습니다.

 

  그렇지요. 얼음이 물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물로 쓰기는 시간이 걸리잖아요. 물은 틀림없이 물이지만 물로 사용 하려면 녹여야 됩니다.

이런 문제를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직도 그런 문제가 남아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얼음 그대로 물이라고 보고 그리고 말아버리면 아무 이상이 없어요. 전혀 관계없어요.

그런데 꼭 물로 쓰고 싶으면, 얼음이 녹을 때 까지 기다려라. 아니면 불을 때서 얼음을 녹여서 써라.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은 아무 상관없는 일이고요.

 

이런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돈오다. 점수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래서 이것은 頓悟漸修(돈오점수)사상이다.

그래 원래는 頓悟頓修(돈오돈수)가 우리 宗門(종문)에 맞는 사상인데 여기는 돈오점수다.

이런 등등의 이야기를 합니다.

 

거듭 생각하니 비로소 문에 들어갔으나, 큰 법을 밝히지 못하여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함에 부딪치는 일 마다 막힘이 없지 않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겸손해서 하는 말입니다.

아까 아들을 안고 손자를 희롱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아주 가벼워 졌습니다.

그런 말을 했어요.

그런데 여기서 이런 표현을 한 것은 이 분이 아주 진중한 사람이라서 이런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다시 바라옵건대 이끌어 가르쳐서 마침내 도달하는 곳이 있게 해주신다면, 겨우 스님의 法席(법석)에 허물이 없을까 합니다.

이렇게 했어요. 조금 이른 감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여기에 이 문제를 돈오점수다. 돈오돈수다.

그러는데 이건 아무 소용없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시원이라는 스님한테 “시원” 하고 불렀어요.

“예” 하고 대답 했어요.

이것이 돈오돈수입니까? 돈오점수입니까?

여기에 돈오돈수다. 돈오점수다를 붙이면 그것 참 어쭙잖은 짓입니다.

 

  그럼 불교는 뭐냐? 내가 부르면 상대가 대답하는 이 사실입니다.

이 사실 이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것만이 오직 진실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돈오돈수다. 돈오점수다 하는 것은 전부 어쭙잖은 짓이고,

그냥 아는 사람들은 해보는 소리이고 그런 사실은 없습니다.

돈오돈수니 돈오점수니 하는 사실은 없습니다.

아예 없는데 모르는 사람들이 이야기가 그렇게 많지요.

부르면 대답하는 일입니다.

 

T V 보다가 아이구 졸린다 피곤하다하고 벌렁 누워 자는 그 일입니다. 피곤하면 그냥 자는 일이라고요.

  이렇게 쉬운 불교입니다.

그래서 임제스님이 황벽스님한테 진짜 불교가 무엇입니까? 임제스님은 천하의 일대 장경을 다 통달하신 분입니다.

그래도 뭔가 갑갑해요. 아닌 것 같아요.

그거 가지고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어서 황벽스님을 찾아가서 “스님. 진짜 불법이 뭡니까?” 이렇게 물으니까 진짜 불법을 가르쳐 준다고 몽둥이로 후려 갈겼어요.

 

황벽스님 입장에서 보면 저놈 자기 자신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진짜 불법인데도 불구하고, 엉뚱하게도 나한테 와서 ‘진짜 불법이 뭡니까?’

라고 하니까 진짜 불법을 보여 준 것입니다.

미워서 때린 것도 아니고, 벌주려고 때린 것도 아니고,

그냥 진짜 불법을. 황벽스님의 진짜 불법을 보여 준 것입니다.

 

  황벽스님이 보기에는 묻는 그 일이 진짜 불법입니다.

궁금하니까 묻는 그 일이 진짜 불법인데, 그것을 두고 물으니 답이 없을 수가 없지요.

답을 하는 것이 바로 방망이로 후려갈긴 것입니다.

임제스님은 나중에 그것이 진짜 불법인줄 알고, 황벽불법이 이렇게 간단하구나! 黃檗佛法無多子(황벽불법무다자)라고 유명한 말을 남기지요.

황벽의 불법만 간단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불법이 간단합니다.

본래 불법이 간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꽃을 들어 보였잖아요.

 

들고 보고한 사실이 진짜 불법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해를 못하니까 이해시키기 위해서 장황하게 별별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지요.

 별별 이야기를 다 늘어놓는 것이라고요.

돈오니 점수니 하는 것도 그런 것입니다.

내가 부르면, “예”하고 대답하는 그 일입니다.

그것 밖에 달리 다른 것 아무 것도 없어요. 뭐가 있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참 생명입니다.

우리들의 참 생명은 곧 부처님의 無量功德生明(무량공덕생명)입니다.

이 사실에 눈 뜨는 것! 이것 외에 달리 다른 것 없습니다.

이외에 달리 다른 별별 이야기들은 전부 방편입니다.

전부 방편이고 거품이고요.

근기 따라서 이해시키기 위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禪佛敎(선불교)에 와서는 지금 그렇게 너절한 방편 늘어놓고 있을 겨를이 없습니다. 선불교는 그런 방편 다 걷어치우는 겁니다.

그야말로 참 몸통 하나만 놔두고 잎 다 쳐버리고, 가지까지 다 쳐버리고 딱 나무로 치면 큰 나무 중심 줄기 그것하나만 놔두고, 나머지는 다 잘라 버리는 것 하고 똑 같은 格(격)이 선불교입니다.

 

“선불교”하면 그것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나머지 잡다한 불교는 무엇인가? 가지요, 잎이요,

東(동)으로 뻗은 가지, 西(서) 로 뻗은 가지, 굵은 가지, 작은 가지, 무슨 푸른 잎, 누른 잎, 큰 잎, 작은 잎, 떨어진 잎, 아직도 달려 있는 잎, 별별 잎입니다.

  부처님은 그런 잎 같은 가르침을 많이 하셔 놓으니까 어느 날, 미안한지 큰 숲에 가서 손으로 잎을 한 움큼 훑었어요. 그리고

  “내 손에 있는 나뭇잎이 얼마나 되느냐?”

  “글쎄요. 한 여남은 잎 되겠네요.”

  “그럼 이 숲에 있는 나뭇잎은 얼마냐?”

  “그것을 어떻게 비교합니까? 손에 있는 나뭇잎하고 저 숲에 있는 나뭇잎하고 어떻게 비교할 수 있습니까? 수 억만 배나 더 많지요.”

  “너희들은 나 보고 말을 많이 했다고 하지만, 내가 말한 것은 내 손에 있는 나뭇잎이고, 내가 아직 말하지 못한 것은 저 숲에 달려 있는 나뭇잎이니라.”

 

  방편을 부처님 당시만 하더라도 그랬는데, 오늘날은 이 시대에 부처님도 깜짝 놀랄 별별 방편을 다 만들어 내어서 한국 불교에서 그렇게 그냥 쓰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이 시대에 왔더라면 아마 기겁을 하고 자빠질 겁니다.

돈오니 점수니 하는 것. 전부 헛소리입니다. 그렇게 아세요.

얼음을 물로 쓰고 싶으면 녹여야 되겠지요.

꼭 물로 써야할 이유는 없어요.

얼음으로 쓸 경우는 또 물을 얼려야 돼요.

아시지요? 물을 다시 얼려야 얼음으로 쓴다니까요.

굳이 얼음을 물로 써야할 경우는 녹여야 되겠지요.

물을 얼음으로 써야할 경우는 다시 얼려야 돼요. 경우에 따라서 그런 과정은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돈오니 점수니 하는 것은 전부 모르고 하는 소리이고, 전부 헛소리입니다.

 

  내가 불렀는데 스님이 “예”하고 대답하는 것. 얼마나 간단명료합니까?

그것을 어떻게 돈오점수다. 돈오돈수다할 수 있겠어요?

거기에는 돈오니 점수니 붙을 수가 없어요.

그것이 진실이니까요. 그것이 불법의 진실이니까요.

여기까지 질문하는 편지가 간단하게 이렇게 소개가 됐습니다.

다음은 그런 편지를 받고 대혜스님께서 이참정에게 답하는 편지지요.

 

p. 88

 

9. 이참정에게 답함

 

보내온 편지를 보니, 성중에 이른 후로부터 옷 입고 밥 먹고 자손을 안고 희롱하는 가지가지가 그전 그대로지만, 이미 구속되고 걸리는 정이 없고, 또한 기특하다는 생각도 하지 아니하며, 묵은 습관과 오래된 장애도 또한 점차 경미해진다고 했습니다.

 

  처음에 젊을 때 남녀가 만나서 얼마나 깨가 쏟아집니까?

그런데 몇 년 지나고 나면 시들해지고 경미해져요.

서로가 거의 도인이 다 되어간다고요.

도 안 닦아도 도인이 다 되어간다고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 ~~~

인간관계 보다도 그 중에서 부부관계보다 더 진한 관계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렇지만 그것도 경미해지고 시들해져요.

도 안 닦아도 거의 도의 경지에 이른다고요.

그런데 여기에서 정말 모든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본 안목이라면 어디 부부문제, 자식 손자문제, 사업문제, 명예문제, 돈 문제, 그것 뿐 이겠습니까?

일체 것이 가뿐해져요.

그것 때문에 지저분한 일들은 생기지가 않는다고요.

그런 일을 아예 저지르지를 않아요.

인생의 高手(고수)가 되었는데 그 하찮은 일.

저~기 下手(하수)들이나 하는 짓들을 하고 있겠습니까?

제가 처음부터 그랬지요?

이 불교는, 특히 선불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인생에 고수를 지향하는 사람이다.

그러면 그 까짓것 시시한 일들은 크게 관심 없어요.

저절로 가벼워져 버려요.

 

경미해진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세 번 반복하여 읽음에 뛸 듯이 기쁩니다.

이는 불교를 배운 효험입니다.

만약 한 번 웃는 가운데 백 가지를 通達(통달)하고 천 가지를 堪當(감당)하는 局量(국량) 넓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능히 우리 집에 과연 전할 수 없는 미묘함이 있음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대혜스님이 기뻐서 당신이 가르친 그 이참정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이 도리에, 이 도의 문제에 눈을 뜨고 나니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그 효험을 여기서 소개를 했는데, 세 번 반복해서 읽었다 잖아요.

야~! 이렇게 됐구나! 그리고 참정 벼슬을 하는 사람이 그쯤 된다면 그 나라 참잘 될 겁니다.

邪心(사심)이 없을 것 아닙니까?

명예에 연연 않을 것이고, 재산에 연연하지 않을 것 아니겠어요?

신문에, 9시 뉴스를 온통 장식하고 있는 그런 지저분한 뉴스는 안 생길 것 아닙니까?

 

만일 그렇지 못했다면 疑怒(의노) 두 자 법문을 未來際(미래제)가 다하도록 끝내 타파하지 못 했을 것입니다.

의심과 분노. 이것은 대혜스님이 분노를 잘하는 분입니다.

도인이 왜 분노를 하느냐?

의문스럽겠지요?

대혜스님 같이 분노를 잘하는 분이 없어요. 열 잘 내고요.

삿된 법에 대해서는 아주 그냥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드는 분이 대혜스님 입니다. 특히 默照邪禪(묵조사선)에 대해서는 아주 열렬하게 입에 거품을 물고 비난하는 분이 대혜스님 이라고요.

도인이 그렇게까지 했겠느냐? 천만에요.

  도인일수록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그렇게 열을 낼 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이 도인이고요.

입에 거품 아니라 피라도 물라면 물 수 있어야 그것이 도인이라고요.

목석 같이 된 도인이 우리한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하고는 아무 관계없어요.

도통을 천번 만번 했다 하더라도 木石(목석)이 된 도인은 우리하고는 아무 관계없습니다.

 

이 의심이라는 것은, ‘저 스님이 정말 소견이 올바른가?’

그리고 또 삿된 법에 대해서 분노를 일으키는 그런 문제에 대한 것입니다.

미래제가 다하도록 끝내 타파하지 못 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 당신이 깨달은 뒤에 ‘내가 왜 그렇게 하는가?’

에 대해서 환히 아실 것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太虛空(태허공)으로 운문의 입을 삼고 草木瓦石(초목와석)으로 다 광명을 놓게 하여 도리를 도와서 말하게 하더라도 또한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운문은 이 온 드넓은 허공이 전부 대혜스님의 입이 되고, 산천초목 모든 것이 다 放光(방광)을 해서 어떤 도리를 설명을 한다 하더라도 당신이 눈을 뜨지 못했다면 어찌하지 못했을 거라는 표현입니다.

 

바야흐로 이 本分因緣(본분인연)은 전할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스스로 증득하고, 스스로 깨달으며, 스스로 긍정하고, 스스로 쉬어야 비로소 끝까지 사무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지금 한번 웃음에 얻은 것도 문득 잊어버렸으니 다시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一笑(일소). 한번 웃는다는 표현이 좋지요?

깨달았다느니, 증득했다느니, 견성을 했다느니, 그런 진부한 표현보다는 한 번 웃었다. 참 멋지잖아요.

깨달음이란 것이 웃음 한번 웃는 것이지요.

허허허~ 하고 한번 웃는 것이지 그 이상 또 무슨 변화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구구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는데요.

전법의 문제를 우리가 여기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앞에는 불교공부, 효험의 문제를 다시 한 번 짚었다면, 이것은 전법의 문제. 법을 전하는 문제에 있어서 마음을 전했느니, 법을 전했느니, 전법제자니, 법을 전해 받았느니 이런 말들이 불교 안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여기 보십시오.

바야흐로 이 본분인연은 전할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증득하고, 스스로 깨달으며, 스스로 긍정하고, 스스로 쉬어야 비로소 끝까지 사무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이것은 이 서장을 펴놓고 우리가 하는, 글공부도 그래요.

제가 아무리 입에 거품을 물고 고함을 쳐도, 여러분들이 관심 없으면, 다른 생각하고 있으면 귀에 안 들어갑니다.

 

그러나 스스로 알려고 하는 마음이 있으면 집에서 벌써 복습 다 하고 왔을 겁니다.

제 이야기가 틀린 말인지 맞는 말인지를 점검하고 앉아있을 겁니다.

안 그렇겠어요?

자기가 하는 거예요.

  불교에는 전한다. 부처님이 가섭존자에게 전했느니 하는 그런 말이 너무 많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전혀 전할 수 없다는 이 청천벽력 같은 사실. 너무나도 이율배반적인 사실.

이 또한 놀라운 일입니다.

만약에 전할 수 있는 것이라면 부처님이 누구에게 전했겠어요?

저 같으면 라후라보다도 야수다라에게 먼저 전하겠네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하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

그 다음에 라후라에게 전하겠네요.

하하하하하하하하~

아이 라후라하고는 1촌이고 야수다라하고는 무촌입니다.

혼자 사는 모양이지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어느 경전 어느 어록을 뒤져봐도 야수다라에게 법을 전했다.

라후라에게 이뻐서 법을 전했다는 그런 얘기는 없어요.

그런 이야기 없다고요.

  그런데 법화경에 授記(수기)를 주는 이야기에 보면, 법화경이라는 것이 부처님의 최종 결론이거든요.

불교 전반의 최종 결론입니다.

거기는 전부 “너는 부처다.”  “너는 부처다.”  “너도 부처다.”  “너도 부처다.” 하고 전부 부처라고 수기하는 그런 이야기로 거의 3분의1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법화경입니다.

참 좋은 경전입니다.

불교는 법화경을 이해해야 됩니다.

경전의 왕이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기에 야수다라가 등장하는 장면이 있어요.

 

  다른 사람들 500명 몇 천 명 다 수기를 하는데 도대체 교담미.

소위 마하파사파제비구니 젖 먹여 키운, 부처님을 젖 먹여서 키운,

養母(양모)잖아요?

그 사람 이름을 안 부르는 겁니다.

그리고 야수다라 이름도 안 부르는 겁니다.

야수다라가 약간 삐져서 ‘저 양반이 내가 한번 바가지를 긁어야 하나?

왜 우리 이름도 안 부르고 우리한테는 수기를 안 주느냐?’ 이겁니다.

그런 생각을 얼핏 한다고요.

법화경에 적혀 있어요.

제가 적혀 있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조금만 살을 붙입니다.

하하하~ 그러니까 부처님이 그 생각을 아시고,

이것이 經家(경가). 경을 편찬하는 사람의 솜씨입니다.

글 솜씨 라고요.

야수다라가 그런 생각을 했는지 어쩐지 그것은 경을 편찬하는 사람이 그렇게 꾸민 것이지요.

 

  그것을 아시고는 비로소 마하파사파제비구니 하고, 야수다라.

거기는 부처님이 출가하기 이전 부인이라고 안 하고, ‘라후라의 어머니 야수다라’라고 묘하게 표현을 하면서 그 사람들을 불러서 “너도 부처다.”

결국 너희들도 부처라고 수기를 주는 대목은 있습니다만,

어쨌거나 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야말로 자기가 해야 됩니다.

자신이 해야 하는 공부입니다.

 

감기 하나 앓는 것도 자신이 책임져야 되고, 자신이 혼자 앓는 것이지 누가 대신 못 앓아줘요.

아들이 어머니 감기 대신 못 앓아주고, 어머니가 아들감기 대신 못 앓아줘요.

그런데 하물며 이 도 닦는 일이야 두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이 제일 많이 말씀하신 법문이

自燈明法燈明(자등명법등명)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의 가르침을 등불로 삼아라.

自歸依法歸依(자귀의법귀의)

자기 자신을 의지처로 삼고, 진리의 가르침을 귀의처로 삼아라.

自洲法洲(자주법주)

자기 자신을 안식처로 삼고, 진리의 가르침을 안식처로 삼아라.

 

말하자면 뗏목을 타고 가다가 어디 섬에 당도하면 거기서 며칠 쉬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로 섬洲(주)자를 씁니다.

 

이것을 “자등명 법등명법문” 이라고 합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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