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書狀)

서장대강좌20/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10. 24. 14:33
 

 

서장 대 강좌 5 - 2 강

 

우리들이 쓰는 말에 대해서 특히 경전의 말씀이나 조사스님들의 어떤 위대한 말씀이라 하더라도 중도적인 안목으로 들어야 됩니다.

모든 것은 중도적인 원리에 의해서 존재하니까 제가 처음에 그런 말씀 드렸지요?

“모든 존재는 존재의 원리가 있다. 그 원리를 뭐라고 이름 지을까?”

하다가 “중도의 원리 라고 이름 짓자”그랬어요.

모든 존재는 존재의 원리가 있는데 그것을  “중도의 원리”라고 불교에서는 해요.

그러면 그런 원리에 입각해서 모든 것을 봐야 됩니다.

  더구나 부처님의 가르침.

조사스님들의 위대한 가르침도 그 원리로 봐야 됩니다.

그 원리로 봐야 된다는 것은 아무리 서장의 훌륭한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이것을 의지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의지해야 되고 때로는 의지하지 말아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p. 89

 

  黃面老子(황면노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중생이 말한 일체 有爲(유위)의 허망한 일을 구하지 말며, 그렇지요.

중생들이 쓸데없이 지껄이는 소리를 구하지 말라 이겁니다.

비록 다시 말에 의지하지 아니하나 또한 다시 말없는 데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중도의 원리”라고 그럽니다.

말에 의지하지 아니하나 또한 다시 말이 없는 데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보내온 편지에 “이미 걸리고 막히는 情(정)이 없고 또한 기특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은밀히 契合(계합)합니다.

곧 이렇게 말하면 부처님의말씀이고, 이것을 떠나 말하면 마왕의 말입니다.

마왕 파순의 말이다. 이렇게 라고 하는 말은 뭡니까?

집착도 하지 말고 그렇다고 거기에 너무 배척도 하지 말라.

그것을 배척도 하지 말고 집착도 할 것이 아니다.

 

  부모 말을 들어도 안 되고 안 들어도 안 됩니다.

그런 모순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우리 상식으로는, 흑백논리로 보면 지극히 모순인데 그러나 불교적인 깨어있는 눈으로 볼 때 이것이야말로 진짜 논리입니다.

진짜 진리에 맞는 논리라고요.

부모가 하는 말이라고 다 맞나요?

지혜 있는 자식은 그것을 분별해서 행동해야지요. 일체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부처님안이 그럴 바에는 우리 보통사람들의 말이야 더 말할 나위 없지요.

 

  聖見(성견). 성인의 가르침이라고 해서 그저 거기에 푹 빠져있고 절대적으로 생각하고, 燃臂(연비)하면 좋다니까 본인은 아니하고 상좌들에게만 그냥 연비시켜서 멀쩡한 손가락 태우는 법화경에 그런 이야기 있거든요.

그것 잘못 들으면 그만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 의미를 잘 알아야지요.

의미를 잘 안다는 그 말을 잘 새겨듣고, 잘 새겨듣는 것은 듣기도 잘 듣지만 그 말에 집착도 아니 하는 것이 잘 새겨듣는 것입니다.

중생들은 말하기가 무섭다니까요.

말 한마디 하면 그만 거기에 빠져서...

뭐 좋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그만 거기에 푹 빠지지요.

 

  그렇게 중도적으로 알아야 그것이 부처님의 말씀이고, 중도적인 원리를 떠난 말이라면 이것은 마왕의 말이다.

이렇게 바꾸어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뭘 하든지 誓願(서원)을 세운다고 하는 것이 참 중요한 것인데, 천수경을 보더라도 원 이라고 하는 것.

發願(발원)이니 서원이니 하는 것이 3분의 1 이상 됩니다.

불교에는 祝願文(축원문). 發願文(발원문). 誓願文(서원문). 별별 원이 많지요.

  대혜스님께서도 이 원을 강조 하고 있습니다.

 

제가 평소에 큰 원을 세우기를 ‘차라리 이 몸으로 일체 중생을 대신하여 지옥의 고통을 받을지언정 끝내 이 입으로 불법을 가지고 인정 때문에 일체 모든 사람의 눈을 멀게 하지 않겠다.’ 고 했습니다.

차라리 지옥에 갈지언정 사람들이 아이고 그래 너는 나하고 친하니까,

옛날에 나하고 같이 살았으니까, 당신은 나한테 시주를 많이 했으니까 내가 이렇게 이렇게 좀 왜곡되게라도 일단은 입에 달콤하니까요.

귀에 달콤하니까요. 내가 달콤한 소리로 해 주겠다.

나는 차라리 지옥 갔으면 갔지 그렇게는 못 하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대혜스님의 원 중의 하나입니다.

 

당신이 이미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으니 스스로 이 일은 남을 따라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누구한테 다른 사람한테 얻는 것이 아닙니다.

서원이 꼭 있어야 됩니다.

이것은 물론 “나는 오로지 정법으로서 사람을 가르치지 누구에게 어떤 은혜를 입었다고 해서 내가 삿된 법으로 사람을 오도 하지는 않겠다.”

대혜스님의 원력.

이것도 좋지요. 참 좋은 원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사실은 원이 있어야 됩니다.

원이 그 사람의 생명력입니다.

願力(원력)이 있는 것이 생명력입니다.

나이가 많고 적고 아무 관계없습니다.

꿈이 있고 기대감이 있고, 뭔가 원력이 있을 때 그 사람은 어떤 생명력이 충만한 사람이고, 생기에 넘치는 사람입니다. 생기에 넘치는 사람이라고요.

 

  불교 안에 들어오면 좋은 원력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고 싶은 원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선 내가 법화경을 사경 하겠다.’

‘금강경을 한 100번쯤 사경 하겠다.’

이런 원력 딱 세워놓고 살아 보십시오.

그 사람의 생활이 얼마나 제대로 갖춰져 있습니까?

그 한 가족이 한 가정에 그렇게 굳건한 원력을 세워놓고 그렇게 철두철미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요?

그 집안은 저절로 뭔가 보이지 않는 기둥이 형성 되어서 그 기둥을 중심으로 해서 비바람이 몰아쳐도 결코 넘어지지 않습니다.

모두 그 기둥을 붙들고 버티어 낼 수가 있는 겁니다.

 

이런 꺼리들이 불교 안에는 너무너무 많습니다.

이 불교를 만났을 때 꼭 그 나름의 좋은 원력을 세우고, 불교적인 꿈을 설계를 해서 하루하루 아주 신앙으로 다져진 삶을 산다면 이것은 깨달음의 안목 외에 아주 상당히 큰 소득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다만 그전 그대로 살지언정 이것은 悟後(오후). 깨달은 뒤의 문제입니다.

다만 옛날 그대로 깨닫기 이전 그대로 밥 먹는 것 역시 밥 먹고, 자식하고 무슨 문제 의논하고, 장사하는 일 있으면 장사하고, 할 것 그대로 다 하라는 말입니다.

그전 그대로 살지언정 大法(대법)이 밝고 밝지 못한 것과 어떤 문제에 봉착 했을 때 막히고 막히지 않는 것을 묻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이러한 생각을 하면 그전 그대로 사는 것이 못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대법 未明(미명). 그 말이 문제가 되었어요.

보다 더 큰 어떤 이치를 밝힐 것이 있는가? 라고 하는 것이 이분에게는 대혜스님에게 질문하는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해서 대혜스님이 이렇게 짚습니다.

 

  悟後 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큰 깨달음 말고, 그것은 다음 이야기고, “불교에 우리가 입문했다.”고 칩시다.

불교에 입문하니까 불교를 알고 절에 다니고 보니까 생활을 영 달리 해야 되는 것 같아요.

뭐도 안 먹고, 뭐도 안 먹고, 화장도 너무 진하게 하면 안 되는 것 같고, 자기 나름대로 헤아려 보니까 온갖 자질구레한 걸리는 것이 많아요.

이것이 그 말입니다.

그전 그대로 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불교에 입문했든 도통을 열 번을 했든 살아온 대로 그냥 그대로 살라는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절에 몇 번 다녀 보니까 자기 마음에 맞는지 불교 냄새를 가는 곳 마다 그냥 피우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것을 우리 스님들은 “절순이”라고 부르는데 그냥 절 냄새가 자르르 흘러요. 백발백중 그 사람들은 불교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 대혜스님 보십시오.

그냥 그대로 살아라.

그렇게 외형을 달리해서 불교에 입문했다고, 법문 몇 마디 들었다고, 법문 들었으면 그렇게 아마 안 할 겁니다.

그저 절에 와서 그냥 뭣도 모르고 절만 하고, 그냥 목이 터져 라고 관세음보살만 불러대고, 남 하니까 그것이 좋은 줄 알고한 불교이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십중팔구 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절 냄새는 더 풍기고 다닙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냥 그대로 옛날 그대로 살아라.

먹을 것 다 먹고 입을 것 다 입고하던 짓 다 하라는 겁니다.

불교가 무슨 사람 바보 만들고, 이상하게 사람의 삶을 왜곡되게 만드는 것이냐 이겁니다.

깨달은 것까지도 그런데 하물며 기껏 절에 며칠 다닌 것 가지고 어디 가서 참선 했다고... 

참선 한다고 결과부좌 해서 딱 앉아서는 남편이 퇴근해서 들어오는데도 쳐다보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서...

속에는 망상이 부글부글 끓으면서 참선하는 척 하고 앉아있는 겁니다.

이렇게 잘못된 불교가 수도 없습니다.

 

  하기야 저도 처음에 절에 들어오면 밥도 안 먹고 공기도 안마시고 사는 줄 알고, 해인사 선방에 있을 때 百苦(백고)한다고 솔잎 먹는 훈련하고, 솔잎 먹으니까 그것은 자신 있어요.

제가 평생 솔잎만 먹어도...

그런데 깊은 산 중에 들어가면 솔잎만 먹어서 안 되겠다 싶어서 더 센 것을 훈련하느라고 잣 잎을 따 먹었어요.

해인사는 잣나무가 많아요.

잣 잎을 따 먹으니 아주 독 하더군요.

그것 한참 연습하다가 그만 지쳐서 못 했어요.

 

절에 들어오면 어릴 때 제 생각처럼 밥도 안 먹고 공기도 안마시고 사는 어떤 특별한 생활이 전개될 줄로 아는 겁니다.

제 나름대로 혼자 그렇게 상상하고 들어온 것이 큰 문제였어요.

   대혜스님은 그것을 제일 주의한 것입니다.

 

여기는 仍舊(잉구). 그전 그대로 살아라.

하는 말이 여기 수없이 나옵니다.

그것이 잘못 번역되었기 때문에 제가 몇 번 고쳤는데요.

仍舊  그전 그대로 살아라.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받아보니, 여름을 지난 뒤에 바야흐로 다시 나온다고 하니 심히 제 마음에 맞습니다.

깨달은 사람끼리 척 만나면 얼마나 기분 좋겠습니까?

 

만약 다시 심히 어지럽게 달려가 구하기를 쉬지 못한다면 본분과 서로 계합하지 못할 것입니다.

전에 당신이 매우 기뻐하는 것을 보고설파하지 않은 것은 말에 다칠까[傷]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기쁨이 이미 안정됐기 때문에 바야흐로 감히 가리켜 보입니다.

이 일은 지극히 쉽지 않으니 모름지기 부끄럽다는 생각을 내어야 비로소 옳습니다.

 

그러니까 깨달은 사람에게 무슨 이런 구구한 이야기가 있겠나?

얼마든지 그럴 수가 있습니다.

깨달음도 천 가지 만 가지입니다.

더 이상 덮을 것이 없는 깨달음도 있을 수가 있지만, 대개 대혜스님 자신도 여러 번 깨달았습니다.

  기고만장해서 은사스님인 원오스님을 만나기 전 까지는 자기도 기고만장 했어요.

몇 번 깨달았거든요.

원오스님을 만나서 새로 점검 받고 다시 한 번 더 깨닫고는 비로소 안정이 됐지만, 이참정이 깨달은 사람이라고 해서 완전무결할 리가 있습니까?

그래서 이런 등등의 이야기가 있는 겁니다.

 

이런 편지는 지금 일본 동경대학교 도서관에 가면 대혜스님 친필 편지가 그대로 있습니다.

친필 편지가 그대로 있다고요.

일본에서 나온 서장 사서 보세요.

“선의 어록”이라고 해서 여기 있습니다.

거기 보면 대혜스님 편지가 영인으로 딱 견본이 나와 있습니다.

 

가끔 예리한 상근기의 사람은 이것을 얻는 데 힘을 들이지 않아서 드디어 쉽다는 생각을 내어서 곧 수행을 하지 않습니다.

깨닫는데 있어서 쉽고 어려움의 문제인데요.

그야말로 불법은 일상생활의 문제이지만, 이것은 한 번 터져서 수천억 건지듯이 로또복권식이 아니거든요.

한 번 눈 밝아졌다고 띵까띵까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삶의 모습이 중요한 것입니다.

삶의 모습이 중요한 것이라고요.

그래서 살아가는 그 모습. 이참정 이라는 사람이 아무리 크게 깨달았다손 치더라도 깨닫고 나서 인간이 개차반이라면 그것 무엇에 쓰겠습니까?

아무 쓸모없는 겁니다.

 

설사 깨닫지 못했다손 치더라도 그 사람의 삶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때, 그 사람이 우리 불교계에 필요한 사람이고 세상에 필요한 사람입니다.

  전 번에도 한 번 말씀 드렸지만, 근세에 우리 대표선사! 국민선사! 제가 자꾸 그런 표현을 하는데요.

그 스님은 스스로 “나는 깨닫지 못했다.” 당신 책에 있어요.

그렇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그 스님에게 얼마나 큰 감동을 받습니까?

깨닫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왜 감동을 주느냐?

그 스님의 삶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겁니다.

 

경허스님 있잖아요.

경허스님은 정말 500년 역사에 崇儒抑佛(숭유억불) 정책을 통해서 불교의 등불이 꺼질대로 거의 다 꺼져가는 최후의 순간에 경허라는 걸출한 스님이 나타나서 한국 불교를 다시 되살렸습니다.

  우리에게는 부처님 다음으로 한국 불교에 있어서는 공로가 큰 분이 경허스님입니다.

오늘 날 한국 불교에 있어서는 그렇다고요.

그런데 경허스님의 수계자인 만공스님이 경허스님 열반 했다는 소리를 듣고,

善惡(선악)과 佛虎(불호)라고 했어요.

경허스님에 대해서 평을 세 가지 시로서 썼는데 다시 말해서 선과 어불이요 악과 어호라.

이런 표현을 썼어요.

좋은 입장으로는 부처님보다 더 지나가고, 나쁜 입장으로는 우리 한국 불교에 폐악을 끼친 입장으로는 호랑이 보다 더 지나간다.

선과 어불이요 악과 어호라.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수제자 만공스님이 썼어요.

다른 사람이 썼으면 큰일 나지요.

이것이 무슨 소식이냐고요. 이것이...

 

  경허스님은 그게 깨달으신 분입니다.

그렇지만 그 분의 삶이 문제가 있다 이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깨닫지 못했다는 국민선사는 오늘 날 까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데, 깨달았다는 그 스님은 그 스님의 삶이 문제가 있기 때문에, 생활이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 수제자인 만공스님으로부터 선과 어불이요 악과 어호라.

좋은 입장으로는 부처님보다 더 위대해.

그렇지만 나쁜 입장으로는 호랑이 보다 더 지나간다.

 

韓國佛敎全書(한국불교전서) 보세요.

한국불교전서 경허스님어록에 보면 수제자 만공스님이 그렇게 딱 쓴 글이 있습니다.

그것은 경허스님 연구한 책 본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니까요.

  여기서도 깨달음이 문제가 아니고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렇다고 함부로 눈 좀 밝아졌다고...

불교공부 하다가 소견이 좀 들었다고 해서 함부로 그렇게 하지 말라 이겁니다.

복권 큰 것 당첨된 사람치고 폐가망신 아니한 사람 없어요. 다 인생 조진 겁니다.

 

불교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요.

깨달음의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삶이 문제입니다 삶이...

그래서 선불교는 선의 정신에 입각한 그 삶의 태도가 중요하다고 제가 그런 말씀을 했지요?

첫째 간소, 간결. 소박한 삶. 탈속한 삶. 자연스러운 삶. 깊이 있는 아주 유현한 삶. 고고한 삶. 아주 준엄하고 위엄 있는 일면도 갖고 있는 그런 삶이 중요하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눈앞 경계에 빼앗김을 당하여 主宰(주재)가 되지 못하고, 날이 가고 달이 깊어지면 미혹하여 돌이키지 못하고 道力(도력)이 業力(업력)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랬잖아요. 한 번 눈 밝아졌다고 자기 멋대로 띵까띵까 하고 놀아 봐요 그것이 금방 도로묵이 되고 말지요.

삶이 문제다 이겁니다.

그것도 시종일관 끊임없이 죽는 순간까지 시종일관이 된 禪界(선계)의 정신을 갖고 살아가는 그 삶!

 

魔軍(마군)이 그 틈을 타고 들어오면 반드시 그 마군에게 잡히며, 죽을 때에도 또한 힘을 쓰지 못합니다.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지난날의 말에 “이치는 문득 깨닫는 것이라 깨달음을 따라 아울러 녹여지지만 일은 홀연히 제거할 수 없어서 차례를 따라 없애야 한다.”고 했습니다.

보낸 편지에 나왔던 내용이지요?

行住坐臥(행주좌와)에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신신당부를 합니다.

일상생활이 중요하다 이겁니다.

삶이 중요하다.

그러니 스스로 못 깨달았다고 했지만 국민선사는 오늘 날까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 아닙니까?

 

그 나머지 고인의 여러 가지 다양한 말도 다 실제를 삼아서는 안 되며, 또한 허망한 것으로 여겨서도 안 됩니다.

이것도 또 경전이나 어록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해서 중도적인 안목으로 받아들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聖人(성인)의 말씀을...

 

  실제를 삼아서도 안 되고, 또한 허망한 것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여기서 우리가 중심을 잡아야 됩니다.

“관세음보살 부르면 온갖 것 다 성취된다.” “좋다.” “다 성취된다.”

그렇다고 거기에 빠져 있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이 필요한 중생에게는 그 말이 필요하고요.

그것을 뛰어넘은 사람에게는 그것은 다 저 우는 애기를 달래느라고 하는 소리라고 버리고요.

우는 애기를 달래느라고 멀쩡한 죄 없는 호랑이가 밖에 왔다고 그러거든요.

그렇지만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잖아요.

누가 그걸 보고 “아이고 저 부모는 아주 사기꾼 부모야. 애들한테 저런 거짓말을 새빨간 거짓말을 한다.”고 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것은 방편이라고요.

 

그렇게 방편을 적당히 써야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지 방편이라는 미명하에 그냥 별별 무당 불교.

이교도적인 불교.

불교라는 간판 밑에서 별별 잡된 짓을 그렇게 하면 도대체 어쩌란 말입니까?

그 좋은 진짜 불교를 놔두고...

 

  그러니까 좋은 바른 불교.

정법 불교를 서로 주고받아야 받는 사람도 이익이 있고, 주는 사람도 이익이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대혜스님이 아까 원력이 뭐랬지요?

나는 인정 때문에 시주 많이 했다거나 좋은 절 지어 줬다거나 사사롭게 속닥속닥 하는 삿된 불교는 이야기 하지 않겠다 이겁니다.

가차 없이 정법 불교.

그 사람이 받아들이든지 못 받아들이든지 그것은 그 사람의 그릇이고, 나는 바른 불교를 이야기 하겠다.

대혜스님 원력이 그랬잖아요.

이 서장이요. 정말 아주 중요한 문제들을 많이 이렇게 다루고 있습니다.

 

오래오래 해서 익숙해지면 저절로 묵묵히 자기 본심과 契合(계합)하게 되므로 반드시 따로 빼어나고 기특한 것을 구할 것이 없습니다.

뭐 좀 특별한 뭐가 있는가?

한강 강물도 걸어서 척척척 건너가고, 하늘도 휘~ 한번 날아보는 그런 도리가 있는가?

혹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고 불교에 기웃기웃하는 사람들 적지 않아요.

승속을 막론하고요. 있어요.

저는 많이 봤거든요.

 

  그전에 제가 어릴 때에 은해사에 살 때인데요.

우리보다 나이가 훨씬 좀 많이 들어서 출가한 사람인데요.

어디서 병 고치는 것 좀 배우다 온 것 같았어요.

그 사람하고 저 하고 좀 가까이 지낸 어느 시간에 “불교는 병 고치는 이야기도 없고 참 이상해” 이런 소리를 하는 겁니다.

제가 깜짝 놀랐어요. 그

러더니 얼마 안가서 시라지고 안 보이더라고요.

그런 아주 특별하고 기특한 것을 생각하고 불교에 접근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들이 불교에 와서 그런 쪽으로 사람을 유도해 갑니다.

“아~ 어디 가서 무슨 기도 하면 어떻게 된다더라.

거기로 가 보자.”하고요.

솔깃하게 해서 데리고 가고요.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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