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능엄경(楞嚴經)

능엄경 강의 4 / 송찬우 교수

通達無我法者 2007. 11. 28. 10:25
 
능엄경 강의 4
 
 

《六正破妄處無體
佛告阿難. 如汝所言. 身在講堂. 戶?開豁. 遠囑林園. 亦有衆生在此堂中. 不見如來見堂外者. 阿難答言. 世尊. 在堂不見如來能見林泉無有是處. 阿難. 汝亦如是. 汝之心靈一切明了. 若汝現前所明了心實在身內. 爾時先合了知內身. 頗有衆生先見身中後觀外物. 縱不能見心肝脾胃. 爪生髮長筋轉脈搖誠合明了如何不知. 必不內知云何知外. 是故應知汝言覺了能知之心住在身內無有是處. 阿難稽首而白佛言. 我聞如來如是法音. 悟知我心實居身外. 所以者何. 譬如燈光然於室中. 是燈必能先照室內. 從其室門後及庭際. 一切衆生不見身中獨見身外. 亦如燈光居在室外不能照室. 是義必明將無所惑. 同佛了義得無妄耶. 佛告阿難. 是諸比丘適來從我室羅筏城. 循乞搏食. 歸祇陀林. 我已宿齋. 汝觀比丘一人食時諸人飽不. 阿難答言. 不也. 世尊. 何以故. 是諸比丘雖阿羅漢軀命不同. 云何一人能令衆飽. 佛告阿難. 若汝覺了知見之心實在身外. 身心相外自不相干. 則心所知身不能覺. 覺在身際心不能知. 我今示汝兜羅綿手. 汝眼見時心分別不. 阿難答言. 如是. 世尊. 佛告阿難. 若相知者云何在外. 是故應知汝言覺了能知之心住在身外無有是處. 阿難白佛言. 世尊. 如佛所言. 不見內故不居身內. 身心相知不相離故不在身外. 我今思惟知在一處. 佛言. 處今何在. 阿難言. 此了知心旣不知內而能見外. 如我思忖潛伏根裏. 猶如有人取琉璃椀合其兩眼. 雖有物合而不留?. 彼根隨見隨卽分別, 然我覺了能知之心不見內者爲在根故. 分明?外無障?者潛根內故. 佛告阿難. 如汝所言. 潛根內者猶如琉璃. 彼人當以琉璃籠眼當見山河見琉璃不. 如是. 世尊. 是人當以琉璃籠眼實見琉璃. 佛告阿難. 汝心若同琉璃合者當見山河何不見眼. 若見眼者眼卽同境不得成隨. 若不能見云何說言此知了心潛在根內如琉璃合. 是故應知汝言覺了能知之心潛伏根裏如琉璃合無有是處. 阿難白佛言. 世尊. 我今又作如是思惟. 是衆生身腑藏在中. 竅穴居外. 有藏則暗. 有竅則明. 今我對佛. 開眼見明名爲見外. 閉眼見暗名爲見內. 是義云何. 佛告阿難. 汝當閉眼見暗之時. 此暗境界爲與眼對. 爲不對眼. 若與眼對暗在眼前云何成內. 若成內者居暗室中無日月燈. 此室暗中皆汝焦腑. 若不對者云何成見. 若離外見內對所成. 合眼見暗名爲身中. 開眼見明何不見面. 若不見面內對不成. 見面若成. 此了知心及與眼根乃在虛空. 何成在內. 若在虛空自非汝體. 卽應如來今見汝面亦是汝身. 汝眼已知身合非覺. 必汝執言身眼兩覺應有二知. 卽汝一身應成兩佛. 是故應知汝言見暗名見內者無有是處. 阿難言. 我常聞佛開示四衆. 由心生故種種法生. 由法生故種種心生. 我今思惟. 卽思惟體實我心性. 隨所合處心則隨有. 亦非內外中間三處. 佛告阿難. 汝今說言. 由法生故種種心生. 隨所合處心隨有者. 是心無體則無所合. 若無有體而能合者則十九界因七塵合. 是義不然. 若有體者如汝以手自?其體. 汝所知心爲復內出. 爲從外入. 若復內出還見身中. 若從外來先合見面. 阿難言. 見是其眼. 心知非眼. 爲見非義. 佛言. 若眼能見. 汝在室中門能見不. 則諸已死尙有眼存應皆見物. 若見物者云何名死. 阿難. 又汝覺了能知之心. 若必有體. 爲復一體. 爲有多體. 今在汝身爲復?體. 爲不?體. 若一體者則汝以手?一支時四支應覺. 若咸覺者?應無在. 若?有所則汝一體自不能成. 若多體者則成多人. 何體爲汝. 若?體者同前所?. 若不?者當汝觸頭亦觸其足. 頭有所覺. 足應無知. 今汝不然. 是故應知隨所合處心則隨有無有是處. 阿難白佛言. 世尊. 我亦聞佛與文殊等諸法王子談實相時. 世尊亦言心不在內. 亦不在外. 如我思惟. 內無所見. 外不相知. 內無知故在內不成. 身心相知在外非義. 今相知故. 復內無見. 當在中間. 佛言. 汝言中間. 中必不迷. 非無所在. 今汝推中中何爲在. 爲復在處. 爲當在身. 若在身者在邊非中. 在中同內. 若在處者爲有所表. 爲無所表. 無表同無. 表則無定. 何以故. 如人以表表爲中時. 東看則西. 南觀成北. 表體旣混心應雜亂. 阿難言. 我所說中非此二種. 如世尊言眼色爲緣生於眼識. 眼有分別色塵無知. 識生其中則爲心在. 佛言. 汝心若在根塵之中. 此之心體爲復兼二. 爲不兼二. 若兼二者物體雜亂. 物非體知. 成敵兩立云何爲中. 兼二不成非知不知. 卽無體性. 中何爲相. 是故應知當在中間無有是處. 阿難白佛言. 世尊. 我昔見佛與大目連須菩提富樓那舍利弗四大弟子共轉法輪. 常言覺知分別心性旣不在內. 亦不在外. 不在中間. 俱無所在. 一切無著名之爲心. 則我無著名爲心不. 佛告阿難. 汝言覺知分別心性俱無在者. 世間虛空水陸飛行諸所物象名爲一切. 汝不著者爲在爲無. 無則同於龜毛兎角. 云何不著. 有不著者不可名無. 無相則無. 非無則相. 相有則在. 云何無著. 是故應知一切無著名覺知心無有是處
《 6. 허망한 마음의 처소는 실체가 없음을 논파하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고하셨다.

“네가 말한 것처럼 너의 몸은 강당 안에 있는데[心在身內] 창문이 활짝 열렸으므로 정원의 숲을 멀리서 조망할 수 있다 했다.
그렇다면 역시 다른 중생들도 이 강당 안에 있으면서 강당 안의 여래를 보지 못한채 강당 밖을 먼저 보는 일이 있겠느냐.“

아난은 답변하였다.
“세존이시여. 강당 안에 있으면서 여래를 우선적으로 뵙지 못하고 강당 밖의 숲을 먼저 보는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난아, 네가 너의 마음이 너의 몸 가운데 있다 함도 역시 이와 같다.

너의 신령한 마음은 일체의 대상경계를 부딪치는 데로 명료하게 인식해 안다. 가령 네가 목전에 나타난 경계를 현재 명료하게 아는 마음이 실로 너의 몸 안에 있다면 그 마음은 너의 몸 안부터 우선적으로 알아야만 하리라. 중생들이 그들 몸 안부터 먼저 보고 그 이후에 몸 밖의 사물을 보는 일이 더러는 있더냐.

설사 몸 안이 깊숙한 곳에 있는 심장ㆍ간장ㆍ비장ㆍ위장은 보지 못한다 해도 겉으로 드러난 손발톱이 자라나고 모발이 생장하며, 근육이 움직이고 맥박이 요동하는 이러한 일들은 우선적으로 분명히 보고 알아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도 무엇 때문에 이같은 일들을 우선적으로 보고 알지 못하느냐. 마음이 우선적으로 몸 안의 사정부터 모르는 일이 필연적이다면 어떻게 그보다 멀리 떨어진 외부의 사정을 보고 알겠느냐.
그러므로 너는 알아야만 한다. 네가 말하는 명료하게 지각해서 아는 마음이 너의 몸 안에 머물고 있다 함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아난은 머리를 조아리고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저는 부처님께서 마음이 몸 안을 보지 못한다는 이같은 말씀을 듣고 저의 마음은 몸 밖에 거처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비유하면 밝은 등불[心]의 광채가 방 안에서 타오르면 그 등불은 반드시 방 안[身]을 우선적으로 비추고 그 뒤에 방문을 따라서 뜰 앞까지 비춰야만 할 것입니다. 마음이 저의 몸 안에 있다 함도 이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체 중생들은 그들 몸 안은 보질 못한채 유독 몸 밖의 사정만 볼 수 있는 것도 역시 등불이 집 밖에 위치하면 그 방 안은 비추지 못하는 것처럼 나의 마음도 몸 밖에 거처할 것입니다.
이 의미는 반드시 분명하여 부처님이 말씀하신 마음은 몸 안에 있지 않다 하신 명료한 의미와 동일하여 현혹됨이 없을 것입니다. 저의 이같은 생각이 잘못되진 않았는지요.“

부처님은 아난에게 고하셨다.
“모든 비구들이 조금 전에 나를 따라서 실라벌성에서 법도 있게 걸식을 마치고 나서 다시 기원정사로 되돌아 왔다. 나는 오늘은 이미 점심공양이 끝났다만 너는 비구들을 관찰해 보라. 그들이 공양할 때 한 사람이 음식을 먹으면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배가 부르더냐.“

아난은 대답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모든 비구들이 신통이 자재한 아라한의 도를 증득했다곤 하나 서로의 몸과 생명이 각자 동일하지 않는데 어떻게 한 사람이 먹은 음식이 모든 대중까지 배 부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은 아난에게 고하셨다.

“가령 네가 대상경계를 한 번 보고 바로 명료하게 아는 마음이 실제로 너의 몸 밖에 있다면 너의 몸과 마음은 서로가 소외되어 서로가 상관관계가 없으리라.

사정이 이같다면 마음이 안다 해도 몸이 지각하지 못하고 반대로 그 지각하는 작용이 몸에 있다면 밖에 있는 마음을 알지를 못하리라.
나는 지금 향기롭고 섬세하고 하얗기가 도라면과도 같은 나의 손을 너에게 보여주겠다. 너의 눈으로 나의 손을 볼 때 너의 마음이 동시에 나의 손을 분별하느냐.“

아난은 대답하였다.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은 아난에게 고하였다.

“가령 너의 보는 눈과 아는 마음이 동시적으로 서로 안다면 무엇 때문에 너는 아는 마음이 너의 몸 밖에 따로 있다고 하느냐.
그러므로 알아야만 한다. 네가 말하는 한 번 보면 동시에 명료하게 아는 마음이 너의 몸 밖에 머문다 함도 옳지 않다는 것을.”



아난은 부처님께 고하였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마음은 몸 안을 보지 못하므로 몸 안에 거처하질 않고 몸과 마음이 서로 분리하지 않고 동시에 알기 때문에 몸 밖에 있지도 않습니다. 저는 지금 생각하오니 제 마음이 하나의 특정한 처소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그 마음이 머무는 처소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아난은 말하였다.

“한번 보면 바로 아는 이 마음은 이미 몸 안은 알지 못했으나 몸 밖은 보고 알았으므로 제가 생각하기론 몸 안도 몸 밖도 아닌 육안[眼根]속에 잠복해 있을 것입니다.[眼根合心]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유리안경을 두 눈에 끼면 설사 유리와 눈이라는 이 두 물질이 하나로 합한다 해도 보는 데는 서로가 장애가 없는 것처럼[琉璃合眼] 눈이 보는 데로 마음도 따라서 동시에 대상사물을 분별해 앎이다.
그러나 나의 명료하게 아는 마음이 저의 몸 안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그 마음이 눈 안에 있기 때문이고, 분명하게 밖의 사물은 보지만은 서로가 장애가 없는 이유는 육안 속에 잠복해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고하셨다.
“네가 말한 것처럼 너의 마음이 눈 안에 잠복해 있는 상태가 마치 유리안경을 두 눈에 낀 것과도 같다 하자. 그렇다면 그 사람이 안경을 끼고 밖으로 산하대지를 볼 때 동시에 그 유리안경도 보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그 사람은 유리안경을 끼였기에 투명한 그 유리까지도 봅니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고하셨다.

“너의 마음이 마치 유리안경을 눈에 낀 것과 같다면 네가 밖으로 산하대지를 볼 때 무엇 때문에 너의 눈을 보지는 못하느냐. 가령 동시에 너의 눈까지도 본다면 너의 눈은 밖으로 보이는 산하대지의 경계와 동일하여, 네가 대상을 바로 아는 마음을 따라서 그 눈은 보는 작용을 이루지 못하리다. 이와는 반대로 마음이 밖을 알 때 너의 눈은 보질 못한다면 명료하게 바로 아는 마음이 그 눈 안에 있는 것이 마치 두 눈에 안경을 낀 것과 같다고 말 할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알아야만 한다. 네가 말하는 어떤 사물을 눈으로 보면 그것을 따라 아는 마음이 너의 눈 안에 잠복해 있는 것이 마치 안경을 두 눈에 낀 것과 같다함도 옳지 않다는 것을.“

아난은 부처님께 고하였다.

“세존이시여. 저는 다시 이러한 생각을 해봅니다. 모든 중생들의 육신을 살펴보면 오장육부는 그들 몸 안에 있고, 눈 등의 구멍은 밖으로 뚫려 있습니다. 안에 있는 오장육부는 컴컴하여 어둡고 밖에 있는 구멍은 밝고 분명합니다.
지금 제가 부처님을 마주하고 두 눈을 뜨면 분명히 보이므로 이럴 땐 밖을 보고 안다 할 수 있고, 눈을 감으면 어두운만 보이므로 이같을 땐 몸 안을 본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는 어떠할는지요.“

부처님은 아난에게 고하셨다.

네가 눈을 감고 어두움을 볼 때 그 어둡게 보이는 경계가 너의 보는 눈과 상대적인 모습으로 목전에 떠오르더냐. 너의 눈과 상대적인 모습으로 떠오르지 않는 상태에서 그 어두움이 보이더냐.

가령 너의 보는 눈과 보이는 어두움이 상대적으로 마주했다면 그 어두움은 너의 눈 앞에 즉 눈 밖에 있다 할 수 있는데, 어떻게 그 어두움이 너의 몸 안이 되겠느냐.

가령 너의 말대로 그 어두움이 너의 몸 안이라고 한다면 해와 달과 등불마저 없는 어두운 방에 있을 때 그 어두운 방은 모두가 너의 오장육부라고 하겠구나. 만일 그 어두움이 너의 보는 눈과 목전에 상대적으로 마주하지 않는 상태에서 보인다면 어떻게 네가 그것이 어두움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고 알겠느냐.

가령 눈을 뜨고 밖으로 밝음을 보는 것을 떠나서 안으로 마주하면서 눈을 감고 어두움을 보는 것을 몸 안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눈을 뜨고 밖으로 밝음을 볼 때 무엇 때문에 너의 얼굴을 밖에서 안으로 상대적인 모습으로 보질 못하느냐. 만일 너의 얼굴을 밖에서 안으로 상대관계에서 본다면 너의 마음과 눈은 동시에 바깥 허공에 걸쳐 있을 것이므로 몸 안으로 어둠을 마주한다 함도 역시 성립하지 않으리라.

밖에서 안으로 얼굴을 마주하고 보는 일이 성립한다면 너의 명료하게 아는 마음과 얼굴을 대상으로 보는 눈이 허공에 걸려 있어야만 하는데 어떻게 마음이 몸 안에 있다 함이 성립하겠느냐.

이처럼 가령 마음과 눈이 밖으로 허공에 있다면 그것은 너의 자체 몸이 아니므로 그렇다면 여래가 지금 바로 너의 얼굴을 보는 것까지도 역시 너의 몸에 있는 눈이리니, 왜냐하면 그 눈은 안으로 돌이켜 자신의 얼굴을 마주 보는 논리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는 마음과 보는 눈이 자체의 몸과 서로 분리한다면 너의 눈은 이미 너의 몸을 반대로 마주해서 보고 안다해도 너의 몸은 그것을 지각하지 못해야만 하리라.

그런데도 네가 반드시 고집스럽게 말하기를 너의 눈이 보고 알면 몸도 따라서 동시에 지각한다 하겠느냐. 그렇다면 응당 밖에서 보는 눈과 그것을 따라서 지각해 아는 몸에서의 마음이 별개의 모습으로 둘이 있어야만 하리니, 이런 경우 너의 한 몸에서 몸의 지각과 밖에서 보고 아는 마음이 둘이 있으므로 성불도 둘이 해야만 하리라.
그러므로 알아야만 한다. 네가 말한 어두움을 마주할 때를 몸 안을 보는 때라 함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아난은 말하였다.
“저는 평소에 부처님께서 사부대중(四部大衆)에게 안에서 업식분별심(業識分別心)이 허망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갖가지 허망한 경계상이 나타나고, 밖으로 갖가지로 일어난 경계의 인연 때문에 다시 안으로 갖가지 분별심이 일어난다 고 가르치는 말씀을 늘 들어왔었습니다.

저는 지금 생각해보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 분별심 자체가 진실한 저의 심성입니다. 그렇다면 분별하는 대상처소를 따라서 내 마음이 그곳에 동시에 있을 것이므로 이는 역시 안과 밖이나 그 중간, 이 세 곳에 있질 않다고 여겨집니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고하셨다.

“너는 지금 밖으로 갖가지 경계가 나타난 인연 때문에 다시 안으로 갖가지 분별심이 동시적으로 일어나므로 밖으로 분별하는 갖가지 경계의 처소를 따라서 나의 마음도 그곳에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밖으로 나타난 갖가지 경계는 안으로 분별심을 일으키도록 이끌어 내는 자체이긴 하나 그러나 그 분별하는 마음은 따로의 실체가 없다. 이처럼 분별하는 마음이 실체가 없다면 분별심이 일어난다 해도 밖으로 나타난 경계와 하나로 융합하여 그곳에 너의 마음이 따로 존재해 있질 않는다.

가령 이처럼 마음은 실체가 없는데도 분별하는 대상경계와 동시에 하나로 합치한다면 이는 본래없는 십구계(十九界)가 본래 없는 칠진(七塵)과 하나로 융합해서 있다 함처럼 이러한 의미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만일 너의 마음이 반드시 자체가 있어 분별하는 대상을 따라서 그 경계와 하나로 합치하는 실체가 있다면 그것은 마치 너의 손으로 너의 몸을 문지르며 동시에 촉감을 느끼는 것과도 같을 것이다.

그때 그 촉감을 아는 너의 마음이 몸 안에서 실체의 모습으로 나오더냐. 아니면 몸 밖에서 들어오더냐. 가령 그 마음이 몸 안에서 나온다면 몸 안부터 보아야만 할 것이며, 몸 밖에서 왔다면 우선적으로 겉으로 드러난 얼굴부터 봐야만 하리라.
설혹 이처럼 너의 마음이 출입이 있다면 앞에서 이미 논파됐던 허물과 동일한데, 어떻게 분별하는 대상사물을 따라서 그 마음이 밖으로 나와 그 사물과 하나로 합치하겠느냐."

아난은 말씀드렸다.
“대상사물은 눈이 보고 보이는 대상을 아는 마음은 눈이 아니므로 마음이 보고 안다고하신 부처님의 말씀이 올바른 의미가 아닌들도 싶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가령 너[心]의 눈이 사물을 본다면 네가 방[身] 안에 있으면서 그 문[眼見]이 사물을 보더냐. 눈이 밖으로 사물을 보는 것으로 인해 보이는 그 사물에서 너의 아는 마음을 얻으며, 그런 뒤에야 그 사물을 볼 수 있다 하나 너의 마음이 아니라면 눈 자체만으로 어떻게 사물을 볼 수 있겠느냐 만일 눈만으로 외부의 사물을 볼 수 있다면 이미 죽은 모든 사람들도 아직 부패하기 이전엔 생시와 똑같이 눈이 그대로 존재해 있으므로 그 눈만으로 모든 사물을 보아야만 하리라. 만일 그 눈만으로 사물을 본다면 어떻게 그들을 죽은 사람이라 하겠느냐. 이처럼 관찰해 본다면 아는 마음과 보는 눈은 동시에 너의 일심(一心)일 뿐인데, 어떻게 그것을 따로의 모습으로 양분할 수 있겠느냐.

아난아, 또 너의 명료하게 아는 마음이 반드시 눈과는 따로의 실체가 있다면 사지(四肢)와 하나의 공동체로 이뤄졌느냐. 아니면 사지마다에 각자 따로의 많은 심체가 있겠느냐. 아니면 하나의 마음이 사지에 두루 충만하였겠느냐. 또는 하나의 마음이 사지에 두루 보편하지 않겠느냐.

만일 그 마음이 사지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다면 네가 손으로 사지 가운데 어느 한 부분만을 문지를 때도 온 사지가 똑같이 그 문지르는 감촉을 동시에 지각하여 그 감촉이 신체의 문지르는 부분에만 국한하지 않아야 한다.

이처럼 사지 모두가 동시에 감촉을 똑같이 지각한다면 일정하게 어느 한 부분만을 문지르는 처소도 없어야 한다.

그러나 가령 일정하게 문지르는 특정한 처소가 따로 있다면 너의 마음이 분별하는 대상을 따라서 그 사물과 그때 그때 하나의 전체로 합치한다는 말이 성립하질 않는다.

만일 사지마다에 따로의 많은 마음의 자체가 별개로 있다면 너는 한 사람이 아닌 많은 사람을 이루어야만 하는데, 그 가운데서 어느 몸이 진짜 너의 몸이겠느냐.

가령 마음이 사지에 보편하게 충만해 있다면 사지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 경우와 같을 것이고, 사지에 보편하지 않다면 네가 머리에서 촉감을 지각할 때 발에서까지도 동시에 그 촉감을 인지하는 것이 현실인데, 그러나 보편하지 않을 경우에 머리엔 지각이 있어도 발에선 전혀 지각이 없어야만 하리니, 지금 너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알아야만 한다. 눈으로 사물을 보면 그 사물을 아는 마음도 따라서 그곳에 있다 함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아난은 부처님께 고하였다.

“세존이시여, 저도 역시 부처님께서 문수보살 등 모든 법왕자(法王子)보살과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담론하실 때 세존께서 마음은 안에 있지 않고 역시 밖에 따로 있지 않다 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생각해보았더니 몸 안에 있다 하려니 컴컴하여 보이는 것이 없고, 몸 밖이라 하려니 이 경우엔 몸과 마음이 서로를 알지 못하게 됩니다. 몸 안은 보고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몸 안에 있다는 논리가 성립하질 않고, 몸과 마음이 동시에 서로 알기 때문에 몸 밖에 있다 함도 올바른 의미는 아니니, 왜냐하면 지금 몸과 마음이 동시에 서로를 알기 때문이며, 다시 몸 안에는 보이는 것이 없으므로 그렇다면 보는 눈과 그 눈에 보이는 사물, 이 둘의 중간쯤에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너는 너의 마음이 보는 눈과 보이는 사물, 그 중간에 있다 말하나 그렇다면 그 중간지점은 일정한 처소가 따로 확정적으로 있을 것이므로 그 중심점이 어디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반드시 미혹하지 않아야만 한다.

지금 너는 그 중심점을 추리해 보라. 그 중심점이 어디에 있느냐. 일정한 중심점 처소가 몸 밖에 있느냐. 아니면 너의 몸에 있느냐. 가령 너의 몸에 있다 하자. 그 중심점이 너의 몸 주변에 있다면 그것은 이미 중심점이 아니고, 몸 가운데에 있다면 그것 또한 몸 안과 동일하리라.

만일 일정한 처소가 따로 있다면 그 처소를 일정하게 표시할 수 있느냐. 아니면 표시할 수 없느냐. 표시할 수 없다면 애초에 없는 것과 같고, 표시할 수 있다면 그곳은 일정하여 변함 없는 방향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령 어떤 사람이 표대로 어떤 중간지점을 표시했을 때, 그 표대를 동쪽에서 보면 서쪽이 되고 남쪽에서 보면 다시 북쪽 방향으로 보여, 이처럼 그 표대의 자체가 이미 방향이 혼잡하였으므로 그것을 바라보고 분별하는 마음마저 따라서 혼란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난은 말씀드렸다.
“제가 말씀드린 중심점은 몸과 처소, 이 둘의 중간이 아닙니다. 세존께선 말씀하시기를 안근과 색경(眼根色境) 즉 안으로 안근을 의지하여 밖으로 색경을 바탕으로 깔고, 이 둘의 중간에서 안식(眼識) 분별심이 일어난다 하였 습니다. 안의 안근은 색경을 분별하는 앎이 있고 밖의 색진(色塵)은 아는 마음이 없습니다. 안식은 이 둘의 중심점에서 일어나므로 마음은 그곳에 있다 함입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너의 마음이 안근과 색진의 중간에 있다면 그 마음의 자체는 안근과 색진, 이 둘을 동시에 함께 하고 있느냐. 아니면 이 둘을 함께 하지 않고 안식만이 홀로 자생적으로 그 둘의 중간지점에서 일어나느냐.

가령 너의 마음이 안근과 색진을 함께 겸하여 안식분별심(眼識分別心)이 그 중간에서 일어난다면 안근[有知]과 색진[無知]이라는 두 물건과 그 중간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자체가 어지럽게 한 덩어리로 뒤섞여 통일적인 하나의 인식체계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안근과 색진은 마음으로 인식할 상대적인 대상이 아니여서 안근으로 보는 유지(有知)와 보이는 색진의 무지(無知)가 안식심과는 전혀 별개인 상대적인 양립관계를 이루리니, 그렇다면 안식심은 유지의 안근과 무지의 색진, 그들 양쪽에 따로의 모습으로 떨어지게 되는데, 어떻게 안식심이 그 중심점을 이루겠느냐.

이와는 반대로 심체, 즉 안식심이 안근과 색진, 이 둘을 겸하는 일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그 심체는 안근의 유지를 겸하지 않으므로 안근으로 보는 유지도 성립하지 않으며, 색진의 무지를 겸하지도 않으므로 보이는 색진의 무지도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심체는 이 둘중 그 어느쪽에서도 아는 성질이 없으므로 이럴 경우 그 중간의 모습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알아야만 한다. 그 마음이 안근과 색진의 중간에 있다 함도 옳지 않다는 것을.”



아난은 부처님에게 말씀 올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지난날 부처님께서 반야회상(般若會上)에서 대목견련ㆍ수보리ㆍ부루나ㆍ사리불, 이들 사대제자(四大弟子)와 함께 법문을 전파하는 모습을 보았었습니다.

그 때 부처님께선 평소에 항상 말씀하시기를 지각분별하는 마음은 이미 몸 안, 즉 육근(六根) 안에 있지 않으며, 역시 밖으로 육진경계에도 따로 있지 않으며, 그 중간 육식분별에도 역시 있질 않다. 이 셋 모두에서 동시적으로 있지를 않으므로 일체에서 집착없는 마음 가짐을 진실한 마음이라고 한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안과 밖과 중간, 이 모두에 집착없는 상태를 진실한 나의 마음이라 하오니까.“

부처님은 아난에게 고하셨다.

“너는 지각분별하는 심성은 셋 모두에 동시적으로 일정한 따로의 처소가 없다고 말하나 세간의 허공과 물과 육지에서 위에서 나는 모습, 밑에서 다니는 모습, 이 모든 사물을 흔히들 일체물상이라고 한다.

이 모든 일체물상에서 너의 마음이 집착으로 붙지 않는다면 집착없는 그 물상에 너의 진실한 마음이 있겠느냐[有心] 아니면 이 상태를 집착없는 마음이라고 하겠느냐. 아니면 그 물상도 너의 마음마저도 함께 없는 무심의 상태를 집착없는 마음이라고 하겠느냐.[無心]

너의 마음이 아예 없다면 마음이라는 헛된 명칭만 있을 뿐 그 실체란 애초부터 없다. 그렇다면 너의 마음은 이미 실체가 없는데 어떻게 집착하지 않는다고 말하겠으며, 있다면 너의 마음의 모습은 이미 있으므로 집착이 없다 함도 역시 옳지를 않다.

이처럼 마음의 모습이 이미 없다면 그 마음을 집착 없음이라 할 수가 없고, 마음의 모습이 이미 없지 않다면 그 마음은 모습이 있는데 어떻게 집착 없음을 진실한 마음이라고 하겠느냐.

그러므로 알아야만 한다. 마음이 일체물상에 집착없는 상태를 지각하는 진실한 마음자체라 함도 옳지 않다는 것을.“
[要義] 부처님이 아난에게 마음의 소재[心目所在]를 묻자 아난은 그 마음이 육진 안에 있다고 답변하였다. 이는 아난이 그러할 뿐만 아니라 일체중생의 모든 집착심이 어느 누구도 몸 안에 있지 않다 한 자가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허망한 마음으로 자기의 색신을 의지하는 진실한 처소로 삼기 때문인데, 이곳이 번뇌의 도적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아난은 삼관법문을 청하였는데도 여래는 그에 대한 답변은 아직 하시지 않은체 우선적으로 아난에게 마음이 있는 소재를 따져 물은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서 그 이유를 말해보기로 한다.

일진법계불생불멸상주진심(一眞法界不生不滅常住眞心)은 제불과 중생이 두 모습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생들은 무시이래의 일념무명(一念無明)으로 인해 이런 이치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진실한 마음의 실체엔 본래 없던 생멸상이 있게 되었다. 바로 이 생멸하는 무명망상이 불생불멸하는 상주진심과 한 덩어리로 화합하여 이윽고 아뢰야식이 이루어졌다. 이것이 중생생사의 근본이다.
이 아뢰야식은 삼분(三分)을 갖추고 있다.
첫 번째는 기신론에서 말하는 무명업상(無明業相)으로서, 근본무명(根本無明)이라고 하는데 이는 바로 아뢰야식, 즉 체8식의 자증분(自證分)이며,



두 번째는 그 자증분자체에서 일어나는 전상(轉相)으로서 이는 근본지(根本智)가 전환하여 허망한 견해가 된 상태인데 제8식의 주관적 분별작용인 견분에 해당한다. 이 제8식의 견분이 전7식(前七識)의 활동을 일으키는 근본자체이다.
세 번째는 현상(現相)으로서 이는 제8식의 견분으로 인식할 대상인 상분(相分)에 해당한다.
상분경계, 즉 자연물질 현상계는 무엇 때문에 일어났을까. 그 원인을 추구해 보기로 한다.
이는 최초 일념무명번뇌가 우리의 상주진심을 뒤덮어 영명무상적멸(靈明無相寂滅)한 진공진심(眞空眞心)을 변화시켜 완악하여 아무런 지각없는 허공경계[頑空]로 변화하였다. 즉 진공여래장성의 이치를 미혹하여 전혀 지각이 없는 허공이 이루어졌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본경문에서는“미혹한 망상 때문에 신령하게 아는 여래장성이 전혀 지각이 없는 허공으로 변화하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지각없는 허공 자체 가운데서 어두운 무명번뇌가 하나의 세력으로 응결하여 이윽고 본래없던 지수화풍사대로 구성된 허망한 색법이 되어 이것이 허공 가운데 떠 있는 한량없는 세계국토를 이루었다. 그러므로 본경문에서는“지각없는 허공을 의지하여 다시 세계국토가 건립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상이 본래없던 색온이 망상으로 형성된 과정이다.
이처럼 식온 자증분에서 망상견분에 상대적인 모습으로 떠오른 상분경계로서의 색온 즉 허공과 세계가 떠오르면 그것이 내 마음 식온 안의 분별심에서 일어난 모습임을 모르고 다시 그에 대한 허망한 분별심을 치연하게 일으킨다. 이같은 분별견해[見分]로 지수화풍사대[相分]의 허망한 색상을 마주 대하기를 습관적으로 오래하면 이윽고 외부 자연현상계의 색법 가운데서 약간의 분야만을 취하여 자기의 소유물로 집착한다. 그리고는 다시 허망한 견해로 그 색법을 흡수하고 부여잡아 그 가운데 거처하면서 나의 소유물로 집착한 색법과 그것을 허망하게 분별하는 심법이 한 덩어리로 화합하여 아무런 지각도 없는 색법을 집착하고 무너지지 않게 함으로써[執受身] 그것을 실제의 아(我)로 여긴다. 이렇게 해서 본래 없던 오온화합의 중생을 이룬다.
그러므로 본경문에서는 이 경우를 두고 “망상은 지각없는 국토를 이루었고, 모습을 실제인양 분별하는 주관적인 허망한 마음은 지각있는 중생이 되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본래 없던 중생이 식자증분(識自證分)에서 동시적으로 일어나게 된 이유이다.


이로부터 중생들은 식온자체에서 일어난[識自證分] 오온으로 이뤄진 육신[相分=色蘊]과 그에 따른 분별심[見分=受想行]을 집착할 뿐 식온이 일어나기 이전 자기의 참 모습인 광대무변한 진실한 마음[如來藏性]을 모른다.



지금 여기에서 아난은 그 마음이 그 육신 안에 은연중에 따로 있다고 집착하였다. 그는 색신[相分]을 의지해서 일으키는 망상견해[見分]를 진실한 상주진심으로 잘못 오인한 것이다.
그 때문에 아난은 부처님 외형의 모습[相分]만을 탐애[見分]하였을 뿐 탐애하는 마음과 탐애의 대상인 색법이 동시적으로 내 마음 자성 자리에선 본래 공적한 이치임을 몰랐던 것이다.[自證體本無]
이같은 오온을 의지해서 육근(六根)이 허망하게 나뉘고, 그 육근은 다시 대상 육경(六境)을 상대적으로 마주하면서 다시 지수화풍사대로 조성된 허망한 오진(五塵)을 집착하여 나의 소유물로 수용(受用)하곤 그 사이에서 육식(六識)을 일으켜 허망한 분별심으로 미혹을 일으키고 그에 따른 모든 업[善惡諸業]을 짓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 결과 청정한 자성엔 본래 없던 생사윤회가 끝없이 반복 순환한다. 이것이 중생계의 현실상황이다.
이같은 생사윤회는 망상의 모습인 오온신심(身心)을 실제의 아(我)로 허망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상주하는 실체라고 집착한데에 따른 것이다.
지금 이러한 허망한 망상을 도리켜 근원적인 진실한 마음으로 되돌아 가려면
반드시 우선적으로 오온에 대한 잘못된 아집(我執)을 타파해야만 한다. 허망한 아집은 억겁이래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 수행을 한다 해도 능엄삼관대정이 아니면 타파하지 못한다.
그 때문에 여래께서 능엄삼관대정을 선양하려 하시면서, 그보다 앞서 우선적으로 마음의 소재(心目所)를 찾으라 하였다. 아난이 집착한데로 마음이 몸 안에 있다함을 의거한다면 그곳이 바로 번뇌의 도적이 있는 처소이므로 바로 그곳에서 격파할 수 있다.
그러나 아난은 지금까지 이를 실제의 아(我)로 잘못 집착하였다. 때문에 지금 그것을 하루 아침에 타파하려니 놀랍고 두려운 마음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부처님은 아난의 정수리를 어루만지고 위로하면서 그에게 고하였다.
“여기에 삼마제가 있는데 그 이름을 대불정수능엄왕이라고 하며, 이 삼매엔 모든 선공덕행을 빠짐없이 갖추었고, 시방여래께서도 이 하나의 삼매문을 통해서 생사를 벗어난 실로 오묘하게 장엄한 수행로이다”라고.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여기에서 심견(心見)의 소재를 따져 묻고 논변함으로부터 이후에 등장하는 이종망견(二種妄見)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과정은 중생들의 아법이집(我法二執)을 타파함으로써 본각진심(本覺眞心)을 나타내는 이 모든 수행은 능엄삼관대정법을 반드시 의지한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제일 먼저 오온중생이 상주한다고 집착하는 허망한 분별을 우선적으로 논파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부처님과 아난이 문답한 칠처징심(七處徵心)의 경문은 그 이름은 비록 마음의 소재를 따져 묻고 논파한다 함이지만 그 실제 알맹이를 살펴보면 오온 가운데 색수이온(色受二蘊)을 타파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아난은 허망한 망상[受想行識]으로 한결같이 지수화풍 사대[色蘊]를 집수(執受)하여 실아(實我)로 삼고 대상에 대한 감정작용을 일으키는 마음이 그 색신 안에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는 색신을 집수하여 그 마음이 의지하는 처소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 마음이 색신 안에 있다고 현재의 감정에 따라 집착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안으로 추구해 보았으나 얻지를 못하였고, 마음이 육신 밖에 있다고 집착하므로 밖으로 찾아 보았으나 역시 실체를 구하질 못하였다.


이로 인해서 일곱 군데서 추구하였으나 마음의 실체는 끝내 얻지를 못하였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허망한 육신[色蘊]은 있지도 않은데 그것을 집수(執受=受蘊)하여 그것을 실제의 아(我)로 여기는 감정에 따른 분별심 이 모두가 허망한 망상일 뿐이라는 점이다.
이를 통해서 관찰해 본다면 이상의 경문 일곱 곳에서 마음의 소재를 따져 묻고 논파한 문장은 실제로는 색온을 논파하였으나 감정에 따른 정서인 수온까지도 역시 동시에 논파되었다는 점이다.
이로부터 점진적으로 더욱 심도있게 나머지 상온ㆍ행온ㆍ식온까지를 하나하나 논파해 나가는데, 이 문제는 본경문의 차례를 따라 그때 그때 담론하기로 한다.

이것이 실로 이 경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로 관통하는 큰 틀의 형식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부처님이 아난에게 마음의 소재를 따져 묻는 시초에 우선은 능엄대정을 설해 주리라 허락하곤 그 이후 끝내 이 문제를 결론지어 지적한 문장이 따로 없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