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보훈(禪林寶訓)

선림보훈/37 선지식의 요점은 사람을 알아보는 데 있다  

通達無我法者 2007. 12. 3. 17:24
37  선지식의 요점은 사람을 알아보는 데 있다   혹암사체(或庵師體)스님/1108∼1179 
 

1. 혹암사체(或庵師體)스님이 차암(此庵) 경원 포대(景元布袋:1092∼1146)스님을 천태산 호국사(護國寺)에서 처음 참례하였다.
법당에 올라 방거사(龐居君)·마조(馬祖)스님의 선불장(選佛場;승관직 채용 과거시험)에 대한 게송을 거론(擧論)하는 차에 `…여기가 바로 선불장일세'라는 구절에 이르자, 차암스님이 대뜸 할(喝)을 하였다.
혹암스님은 여기서 크게 깨닫고 이 과거장 상황에 제격일 듯한 게송을 지었다.

헤아리길 다한 곳에 제목〔試題〕을 보고
길이 끝나는 데서 시험장에 들었네
붓끝을 들자마자 장황한 글 쏟아내니
이제부터 3등짜리 급제자〔探花郞〕는 되지 않으리
商量極處見題目 途路窮邊入試場
拈起毫端風雨快 遮回不作探花郞

이로부터 자취를 천태산에 숨기고 있었다. 승상 전공(錢公)은 그의 사람됨을 흠모하여 천봉사(天封寺)를 맡아 세간에 응해 주기를 권하였다. 혹암스님이 듣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양의 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파는 짓은 알지 못한다." 
그리고는 그날 밤으로 도망을 가버렸다.

2. 건도(乾道) 초년(1165)에 할당(堂)스님이 국청사(國淸寺)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혹암스님이 관음상〔圓通像〕을 보면서 찬(贊)을 한 수 읊었다.

본분에서 나오사 중생을 깨우시나
우러러보면서도 소경같은 중생들
장안의 달빛은 고금에 여전한데
뉘라서 더듬더듬 소경행세 하겠는가
不依本分惱亂衆生
之仰之有眼如盲
長安風月貫今昔
那個男兒摸璧行

이 찬(贊)을 듣고, 할당스님이 깜짝 놀라며 기쁜 마음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차암(此庵)스님에게 이런 납자가 있는 줄 몰랐다." 
그리고는 즉시 두루 찾다가 그를 강심(江心)에서 만나고는 굳이 많은 사람 가운데서 제일 윗자리에 앉기를 청하였다. 『천태야록(天台野錄)』

3. 혹암스님이 건도(乾道) 초년에 호구산(虎丘山) 할당스님을 날듯이 방문하였다. 고소(姑蘇) 지방의 4부대중이 그의 고상한 풍모를 소문으로 듣고 즉시 군으로 나아가 추천하며 성 안의 각보사(覺報寺)에 머물게 해주도록 청하였다.
혹암스님은 이 소문을 듣더니 말하였다.
"스승 차암(此庵)께서 나에게 유언하시기를 뒷날 노수(老困)를 만나면 머물라 하셨는데 지금은 마치 부절(符節)이 들어맞듯 하구나." 
드디어 기쁜 마음으로 명에 응하였다. 이는 각보사의 옛 명칭이 노수암(老困庵)이었기 때문이다. 『호구기문(虎丘記聞)』

4. 혹암스님이 각보사에 들어간 후 시주(施主)들이 법문을 청하자, 소참(小參)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도는 항상(恒常)하여 나빠지지 않으나 세상일은 피폐함이 있으면 반드시 좋아질 때도 있다.
옛날 강서(江西)·남악(南嶽) 등 모든 스님들은 옛 도를 상고하여 가르침을 삼았는데, 그 타당성 여부를 살핌에는 중도(中道)에 입각했으며 인심에 계합하는 일에는 깨달음으로 목표를 삼았다. 때문에 평소의 가풍이 늠름하여 지금에 이르도록 끊기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우리 문하를 거론해 본다면 말〔言〕끝에 알음알이를 내어 우리 종풍을 변질시키고, 글귀 아래서 분간하여 불조의 도를 매몰시키고 있다. 비록 이런 판국이긴 하나 물이 다한 곳까지 도달하면 앉아서 산 아래 구름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되리라."
그리하여 승속이 이제껏 들어보지 못했던 법문을 기뻐하며, 시장가는 사람처럼 앞을 다투어 귀의하였다. 『어록이차(語錄異此)』

5. 혹암스님이 주지를 맡고 나자 관리 계급들이 새떼처럼 쏠린다는 소문이 납자들에 의해 호구산에 이르자, 할당스님이 말하였다.
"이 산간의 오랑캐 같으니, 법도를 따르지 않고 인정도 되돌아보지 않으면서 방종하게도 눈먼 선〔盲禪〕에 기대고 가는구나. 그들 여우 같은 정령(精靈) 무리를 내 혼내주어야겠다."
혹암스님은 이 말을 듣더니 게송으로 답변하였다.

산간 오랑캐 멋대로 하는 짓 미워할 순 있어도
대중 거느리고 바로잡는 건 아직 없던 일인 듯하네
격식을 초월하여 빗자루 거꾸로 들고
눈먼 선에 의지하여 여우 같은 스님 치료하네
山蠻杜拗得能憎 領衆翠徒昭不曾
越格倒拈苕 柄 拍盲禪治野狐僧

할당스님은 보더니 웃을 뿐이었다. 『기문(記聞)』

6. 혹암스님이 시랑(侍郞) 증체(曾逮)에게 말하였다.
"도를 배우는 요점은 저울이 물건을 달듯 평형을 유지해야 하니 편중되어서는 안됩니다. 
전후로 미루거나 가까이 하는 것도 치우치기에는 매한가지니 이를 알면 도를 배울 수 있읍니다." 『견증공서(見曾公書)』

7. 도덕은 총림의 근본이며 납자는 도덕의 근본이니 주지가 납자를 싫어하며 버리는 것은 도덕을 망각한 것이다. 도덕을 잊고 나면 무엇으로 교화를 닦아 총림을 정돈하고 후학을 끌어 주겠는가.
옛사람은 근본을 체득함으로써 지말을 바로잡았으니, 도덕이 실행되지 않는 것을 근심했을지언정 총림에서 제 소임을 잃을까 걱정하진 않았다. 그러므로 "총림의 보존은 납자에게 있고, 납자의 보존은 도덕에 달렸다"고 말했던 것이니 주지가 도덕이 없다면 총림이 폐지되리라. 『견간당기(見簡堂記)』

8. 선지식의 요점은 훌륭한 사람을 알아보는 데 있으며 스스로가 잘났다고 여기는 데 있지 않다. 그러므로 훌륭한 사람을 해치는 자는 어리석고, 가리워 버리는 자는 어둡고, 질투하는 자는 자신의 견해가 짧아진다. 한 몸의 영화를 얻는 것이 한 세대의 명성을 얻느니만 못하고, 한 세대의 명성을 얻는 것이 훌륭한 납자 하나를 얻어 후학에게 스승이 있고 총림에 주인이 있게 하느니만 못하다. 『여원극서(與圓極書)』

9. 혹암스님이 초산(焦山)으로 옮긴 지 3년 되던 해, 그러니까 순희(淳熙) 6년(1179) 8월 4일의 일이었다. 먼저 작은 병을 보이시더니 즉시 손수 쓴 편지와 벼루 한 개를 군수시랑(郡守侍郞) 증공(曾公)에게 보내 이별을 하였다. 그리고는 한밤중에 천화(遷化)하자 증공은 게송으로 그를 애도하였다.

짚신 한짝 매고 훨훨 서풍(西風)을 좇더니
혼연하여 일물(一物)도 포대 속에 없었네
벼루를 남겨 사용하라 하시나
내게는 허공같은 광명을 그려낼 글재주 없다네.
翩翩隻履逐西風 一物渾無布袋中
留下陶泓將底用 老夫無筆判虛空 『행장(行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