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

진귀조사설

通達無我法者 2007. 12. 10. 11:44

“누가 더 훌륭한지 중요하지 않아”

 

명주 굴산사의 범일국사는 진성대왕이 하문하신 선과 교의 뜻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셨다. “우리의 본사이신 석가모니께서는 태어나신 이후에 설법으로 일관하셨습니다. 먼저 태어나자마자 동서남북으로 7보씩 걷고나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말했습니다.

 

나이를 먹은 후에는 성을 벗어나 설산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에서 별빛을 보고 깨침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깨친 법이 궁극의 경지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수십 개월 동안 조사이신 진귀대사를 찾아 유행하였습니다. 이로써 비로소 궁극의 뜻을 전승받았는데 그것이 곧 교외별전의 선입니다.

 

그리고 성주화상께서는 항상 <능가경>을 공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조사의 종지가 아님을 알고서 <능가경>을 그만두고 마침내 입당하여 법을 전수받았습니다. 그리고 도윤화상께서는 <화엄경>을 공부하다가 ‘화엄의 원돈의 가르침이 어찌 심인의 선법과 같겠는가’라고 말하고는 역시 입당하여 법을 전수받았습니다. <능가경>과 <화엄경>의 경우처럼 교학은 근본이 되지도 못하고 믿을 수 있는 교외별지도 아닙니다.”

 

선과 교의 관계는 예로부터 늘상 제기되어 온 문제였다. 소위 선교일치 내지는 선교차별이 그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선교차별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키려는 입장으로 나타나 있다. 그도 그럴것이 본 내용은 통일신라 말기에 중국으로부터 직수입된 소위 조사선의 가풍과 당시 신라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던 교학불교의 풍토 사이에 전개된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석가모니가 진귀조사에게 심인을 받았다는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본 내용의 요점이다. 부처님으로서의 석가모니가 큰스님으로서의 진귀조사에게 한 수 지도받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언설에 속아서는 안된다. 부처님과 조사 가운데 누가 더 훌륭한지 그리고 누가 스승이고 누가 제자인지는 중요치 않다. 다만 석가여래와 진귀조사라는 여래와 조사라는 용어에 주목해야 한다.

 

석가 ‘여래’와 진귀 ‘조사’ 등장

사굴산문 열은 범일 국사 주장

 

이 일화가 수록된 <해동칠대록>은 현재 전승되는 책은 아니다. 그리고 그 칠대조사가 누구인지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가 없다. 단지 이 무렵에 중국에서 조사선법을 수입한 일곱 조사들이라는 추정은 가능하다. 여기에서 그들이 전승한 조사선의 권위야말로 어떤 선풍보다도 우선이었고 보편적이었으며 부처님을 대신할 정도였다. 그런데 조사선에서 말하는 조사는 본래는 달마조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와 같은 조사의 개념을 진귀조사라는 인물에 투영한 것이다.

 

한편 석가는 여래의 개념을 상징한다. 여래는 49년 동안 고구정녕하게 설법을 하였다. 반면 조사는 직설적이고 현실적인 교화수단을 활용했다. 때문에 조사선의 가풍이 팽배해 있던 시기야말로 선을 언설을 통해 자상하게 이해시켜주는 여래선의 방식보다 직지인심으로 제자의 의표를 찔러 가르쳐주는 조사선의 접화방식이 큰 매력을 발휘하였다. 곧 석가라는 여래와 진귀라는 조사를 등장시켜 그 접화수단의 차이를 비유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신라 말기에 선승들은 당시 신라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던 교학의 풍토와는 사뭇 다른 새로운 선법을 홍포하기 위하여 조사선의 방식을 의용하였다. 그 가운데 소위 구산선문 가운데 사굴산문의 개조인 범일국사가 내세운 것이 바로 여기에 등장하는 진귀조사설이었다.

따라서 여기에 등장하는 여래와 조사는 선사상의 깊고 옅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부처님으로서의 여래와 큰스님으로서의 조사의 개념을 여래선과 조사선의 개념을 통하여 조사선이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비유한 것이다. 따라서 당시에는 의도적으로 선교의 차별을 강조했다. 그것이 교학의 입장을 49년 동안 설법을 했던 여래의 개념으로 내세우고, 언설을 초월하여 오로지 좌선수행으로 일관했던 선종의 입장을 조사라는 개념으로 강조한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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